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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가 마속이다/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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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촉한
1.1. 마속 라인1.2. 황실1.3. 역대 재상1.4. 조정1.5. 군부1.6. 기타
2. 동오
2.1. 황실2.2. 역대 대도독2.3. 조정2.4. 군부2.5. 손패파2.6. 오국팔절
3. 조위
3.1. 역대 황제3.2. 황실3.3. 군부3.4. 조정3.5. 사마씨 일파3.6. 조상파3.7. 기타
4. 기타 인물

1. 촉한

원래 역사대로라면 마속의 삽질로 큰 성과를 내지 못했을 1차 북벌에서 옹주,량주를 사실상 촉의 영역으로 편입했고, 영토를 회복하러 온 위나라의 침공도 물리치고 장안 일대까지 위협하면서 완벽하게 옹량주를 권역에 넣어서 작중 최대의 수혜국이 되었다. 이로서 변방에서 몰락하던 상황( #1, #2 )에서 변모하여, 위나라도 전력을 다하지 않고는 막지 못할 수준의 국력 신장을 이루어내었다.

2차 북벌에서는[1] 장안 일대까지 영역권에 넣는다. 위나라의 촉 국경 방면 주력군을 이끌던 사마의나 장합, 곽회 등의 촉나라 방면 주요 장수들을 상당수 원 역사보다 빠르게 실각 혹은 사망시킨 것은 덤. 2차 북벌에선 15만에 달하는 군 동원력을 보여주었을 정도로 국력이 증대했고 조예 사후 장완의 북벌에서는 20만 명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면 위나라도 다른 국경에서 병력을 상당수 빼내야만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장완의 북벌 후에는 위, 촉, 오의 세력비가 대략 4 : 3.7 : 2.3을 이루어 오를 제치고 위와 거의 대등한 세력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왕평, 나헌, 황숭 등의 인재들이 원래 역사보다 십수년은 더 빠르게 두각을 드러내고 출세가도를 달리면서 2차 북벌 시점에서는 왕평과 나헌은 일군의 수장, 황숭은 부장을 맡기에 충분한 실적에 잘만 하면 일군을 맡아도 될 정도의 경험과 실력을 쌓아 인재 부족 현상도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량주를 성공적으로 개척한 유능한 관리인 서막을 포섭해 남중의 개발을 담당시킨 것도 큰 성과.[2] 또한 서막의 사위이자 훗날의 명장 왕준까지 촉한에 등용되면서 미래를 맡길 인재까지 어느 정도 확보했다. 단, 최근 제갈량이 역사대로 과로사하고 위연이 장합과 동귀어진, 이엄이 제갈량 사후의 권력을 탐하다 제갈량에게 숙청당하여 주인공이 최고 지휘관급으로 급부상한다.[3] 이후 육손 문제와 촉의 팽창에 대한 오의 경계로 인한 오와의 관계 냉각, 위나라의 전쟁 준비가 눈 앞까지 다가온 상황이라 촉한의 위기상황이 닥쳐왔고, 이를 막기 위해 마속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결국 위나라가 20만 대군을 동원하게 만든 3차 북벌에서 우세를 점하며 홍농군까지 점령하고 목덜미에 칼을 들이대는데 성공했고 오나라의 11만 병력이 동원된 대오 전쟁에서도 백제성과 교주라는 양 전선에서 모두 승전을 거두고 마속이 교주 세력과 협조해 벌인 깽판으로 오나라는 남 때리러 간 사이에 자기 집에 불난 상황이 되면서 국경 전선은 촉한이 승기를 확실히 잡았다. 그러나 위나라에는 최종 보스로 예상되는 사마의가 여전히 군권을 잡고 있어 아직 불길이 남은 상태. 현재는 3차 북벌에서 관중 전역을 먹었고 교주까지 확보했으며 형남 지방의 일부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후 장안으로 천도한다. 이후 팔진도로 선비족을 박살내고 변경이 안정되었으며 비의가 후계자 인수인계를 시작할 무렵에는 총병력이 약 25만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위나라와 오나라가 적국이 되었으므로 원정에 동원 가능한 총 병력은 그 절반 정도다.

현재 위나라에서 사마의가 정변을 일으켜 위나라를 장악했기에 잘하면 원 역사의 반 사마씨 세력을 포섭해 위의 내분을 유도할 여지도 있는 상황이다. 실제 역사대로 하후패의 귀부를 이용해 낙양까지 점령하지만, 계한의 국력 소모도 심해 마속 세대의 북벌은 여기서 마무리된다. 마속 등이 사망하고 20여년이 흘러, 사마씨의 찬탈로 인한 혼란을 틈타 진을 멸하고, 이어서 손호의 폭정에 마비된 오나라도 멸망시키며 결국 천통을 달성하게 된다.

참고로 촉이란 이름은 촉한 사람들은 잘 사용하지 않던 명칭이고, 작중에서도 장안까지 점령했으니 촉한보다는 계한이라는 명칭이 어울린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작중에선 장안 점령 이후 내부적으로는 계한이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했다.

1.1. 마속 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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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황실

1.3. 역대 재상

"저는 본디 의심이 많은 성품입니다. 주공께서 돌아가시기 전 저에게 나라를 차지하란 말을 하셨을 때 저는 주공께서 저를 믿지 못해서 저를 떠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주공의 말은 진심이셨던 것입니다. 항상 그랬습니다. 처음 주공을 만났을 때부터 그분은 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죽음이 다가와서야 그것이 저에게도 확실해졌습니다."

"제가 처음에 초려를 나설 때 제 형 제갈근이 이미 손권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저에게도 강동에 오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왜 주공의 뒤를 따르기로 마음먹었는지 아십니까?"

"오나라의 손권은 손씨 일족의 힘을 바탕으로 일어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외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으나 기실 동오 요직 곳곳에 손씨 일족이 기용되어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조조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험악한 난세에서 가문과 일족의 도움없이 대업을 이루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 주공만은 그런 뒷받침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아래에서 제가 아무 간섭없이 능력을 펼칠 수 있을 거란 계산을 했습니다. 물론 오로지 그 이유만은 아니었습니다만, 그 이유가 컸습니다"

"사실 주공 밑에 들어오기 전에는 주공께서 젊은 시절에 돗자리를 짰다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이미 주공은 좌장군에 예주목을 역임하셨습니다. 다른 군웅들에 비하면 덜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따르는 혈족이 있고 돗자리 이야기도 적당한 과장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주공 밑에 들어왔을 때 진짜 세상에 알려진 그대로라서 오히려 당황했습니다. 정말 주공 본인 외에 그 밑에 도움이 될만한 유씨 성의 친족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성이 다른 의형제인 관우, 장비에게 의지하고 조운, 간옹, 손건, 미축 같은 사람들이 근근이 세력을 끌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 제가 불쑥 끼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을 회상하는 제갈량의 얼굴에 그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닙니까? 주공 밑에 모인 우리들은 공통성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성도 다르고 제각각 고향도 달랐습니다. 주공의 친족들이 중심이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이런 집단은 도무지 오래 버틸 수 없는 것입니다. 조조나 손권처럼 뒷받침이 되어줄 막강한 혈족이 있고 영천군이며 오군의 지연으로 연결된 호족들의 지지를 받은 사람들도 난세를 뚫어내기 어려웠습니다. 주공 밑에서 그 사실을 깨달은 저는 일이 어렵겠구나 생각했지만, 왠지 모르게 주공을 떠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들이 끝끝내 버텨서 나라를 세웠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저 자신이 그 과정을 직접 겪었지만, 여전히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주공과 그 뒤를 따르던 우리들은 또한 고금의 역사를 둘러봐도 찾기 어려운 일을 이루었습니다. 당양에서 주공과 우리들은 조조의 추격을 당하면서도 우리를 따르는 10만의 백성들을 지키기위해 끝까지 함께했습니다. 세상의 어느 군사집단이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주공께서는 의형제인 관우 장군의 죽음을 친형제의 죽음처럼 슬퍼하며 군사를 일으켜 나아갔습니다. 저도 결국 무모한 선택을 하는 주공을 말릴수 없었습니다. 세상을 이런 우리를 미련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역사를 돌이켜봐도 우리처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뒤에 나올 후인들도 쉽게 우리들을 따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작중 제갈량의 유언 중 일부
이후 마속에게 제갈량의 1차적 목표를 이룬 상황에서 오와의 동맹 결렬로 융중대도 깨졌는데 혹시 제갈량이 향후를 위해 준 비단 주머니 같은 것이 없는지 묻는다. 당연히 장완 자신부터 그런 게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을 아는 마속은 놀랐으나, 사실 원 역사대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지푸라기라도 짚는 심정으로 물어본 것. 그 후 자신의 병에 대하여 대외적으로 털어 놓는다. 아무 말도 없이 떠난 제갈량이 원망스러웠다고.

이후 장안 권역이 계한의 것으로 굳어지기 시작할 때에는 병세가 깊어 비의에게 인수인계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마속의 북벌에 장안 일대에서 예비 전력을 긁어모아 지원을 온다. 이에 계한군의 사기는 상승했고 그 결과 승리를 거두게 된다. 4차 북벌의 결과 하남윤, 하동군, 하내군 그리고 남양군의 일부를 수복하고 병사한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이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독단으로 위나라와 화친을 맺는다. 또한 비의 이후의 후임이 누가 좋을지 유선이 사위인 제갈첨을 보내서 묻자, 그때와 달리 나라가 안정되어서 후임을 지명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한다. 이제야 승상을 뵙겠다며 눈을 감고, 이후 중흥사걸로 기록된다.

1.4. 조정

이후 교주와 형남에서 마속이 여대와 육윤과 맞서는 동안 남중에서 사무를 처리할 사람이 없어 임시로 맡은 업무를 잘 처리하고 유배 동안 그 성격도 많이 죽었을 것이라고 여긴 마속이 그를 유배에서 해제하지만 유배에서 풀려나자마자 막말[60]을 하는 변함없는 모습을 보인다. 이에 마속은 교주에 보내버릴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유배를 풀자마자 다시 보내는 것은 뭔가 아니라서 포기한다. 돌아와서는 마속의 집에 머물며[61] 투머치 토커 나헌과 자기자랑꾼 왕준에 대한 제어장치 역할을 해주고 있다.

1.5. 군부

1.6. 기타

2. 동오

삼국 중 장강 평야에서의 강남 지역에서 호족 연합 정권으로 이뤄진 국가( #1, #2 ).

초반부 촉나라의 배에 가까운 국력을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육군이 따로노는 호족의 사병들이란 한계상 촉한이나 위에 비해 정예화가 덜 되어있다. 그래도 수군은 삼국제일. 이 세계관에서는 동맹국 덕에 나름 이득을 본 케이스인데 원 역사에서는 실패했던 요동 원정 성공과 고구려와의 통교, 2차 북벌에서 양번을 점령하고 상용을 계한과 갈라먹는 등의 원 역사와 다른 팽창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를 경계하여 마속이 손권과 육손의 사이를 이간질시켜 육손이 분사하면서 서서히 망조가 들어가는 중.

오나라의 인재진을 말려버린 재앙이던 이궁의 변이, 육손의 이른 죽음과 제갈각의 적극적인 권력 투쟁 시작, 요동 문제로 인한 사성 귀족과 손패파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계속해서 먼저 일어나는 중이다. 그러던 중 위나라 측에 대부분의 병력을 투입한 촉한의 배후를 공격하여 촉오동맹은 파기된다. 하지만 마속의 예측으로 수성전에 일가견을 보이는 나헌에 의해 백제성에서 진격이 막히고, 촉한의 수비군이 빠르게 집결해 기습의 이점을 거의 잃었다. 더불어 서막과 왕준을 동원한 국력의 중요한 요지인 교주에서 반오 운동이 조직되어 반란이 일어났으며 토벌군조차 역으로 패하여 지배권을 상실한 상태고 마속은 형남으로 진격 중인 상태. 이렇듯 동맹을 배신하고 침략 행위를 벌였음에도 얻은 것은 없고 오히려 영토는 잃어버려 명분과 실리 둘 다 잃어버렸다. 게다가 패전의 책임을 두고 각 파벌들이 정쟁을 하고, 손권도 자신의 책임을 피하고자 패전한 장수들을 처벌하려 하기에 혼란한 상태다.

그렇게 수년을 지내다가 결국 마속의 마지막 북벌에서 사마의가 패하면서 어부지리로 치열한 전쟁 끝에 남양군 일부를 얻게 된다. 다음 세대를 이은 손호의 폭정으로 나라가 마비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가 계한의 20만 대군에게 멸망한다.

2.1. 황실

2.2. 역대 대도독

2.3. 조정

2.4. 군부

2.5. 손패파

기존의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요동 문제에서부터 손권편을 들고 있다.

2.6. 오국팔절

촉한이 북벌에서 성공을 거두고 잘나가자 오나라가 땡깡(...) 삼아 기예 대결을 펼치려 촉을 찾아온다. 8가지 기예 중 해몽과 관상은 대결하기 어려워 제외되고, 기상예측과 산술은 촉이 이겼다고 나오나 묘사되진 않는다.

3. 조위

하남 평야의 대부분과 하북 평야, 관중 분지를 차지하여, 삼국 중 압도적인 국력을 가진 강국( #1, #2, #3). 촉과 오가 그나마 위나라와 엇비슷한 싸움이 성립했던 시기는 적벽대전부터 한중 공방전까지의 시기밖에는 없지만 오나라가 촉을 뒤통수치면서 시간을 가지게 된 위는 압도적 국력을 바탕으로 우위에 섰다.

그러나 촉의 북벌에 연달아 당하면서 세수도 인구도 적지만 군사적 요충지인 옹주와 량주를 빼앗겨 촉의 영토와 운신 범위가 크게 늘었고 유목민들과 요동 방면까지 적으로 돌아서면서 다면 전선이 형성,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의 유지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결국 장안과 양번을 각각 촉과 오에 빼앗기면서 삼국지는 위나라 압도에서 제대로 된 삼세력 승부 판도가 그려지고 만다. 그럼에도 151화까지 진행된 작중에서도 촉과 오가 힘을 합쳐야 승부가 되는 막강한 국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빼앗긴 장안과 나머지 영토를 되찾기 위해 대전을 준비중이다. 이를 위해 지난 전쟁에서 여러번 변수가 되었던 병주의 이민족들을 대거 토벌하는 중이나, 이 과정에서 손속도 가리지않아 촉의 원군과 다시 충돌하는 등 전초전이 벌어지고 있다. 내부에서는 난세시엔 유능한 군주였던 조예와 그 충신들이 하나둘씩 노환이나 전사, 병사 등의 악재로 사라지고, 이제는 사마씨 가문이 득세할 수 있는 상황. 그러나 연이은 패배로 수도인 낙양 지척까지 위험해져서 여유가 없다.

오나라가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근시안적 안목과 수군에 비해 약한 육군(육손 제외), 촉나라가 불리한 전력과 제갈량의 신하란 한계상 모험을 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면, 조위는 너무 엄격한 군율과 경직된 정치판이란 분위기로 장수들에게 자비가 없다는 단점이 있다고 한다.[123] 또한 우연이기는 하지만, 황제들의 2대에 이은 짧은 수명과, 뒤를 이은 황제 조방의 어린 나이로 황권이 약해지고, 제갈량 같은 신하가 없어 정치적 혼란이 격화되고 있다.

그러다 결국 조상이 운하 시설을 감독하러 간 사이, 사마의 일파가 임시수도인 업을 공격해 조상파를 쓸어버리고 원 역사대로 위의 정권을 장악했다. 마속의 마지막 북벌군 12만명을 상대로 대등 이상의 전력을 끌고 맞서지만 내부의 갈등으로 전력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전황을 보인 끝에 패배하고 낙양과 사예주마저 빼앗긴다. 사마의는 온갖 대전에서의 연전연패로 위신이 크게 깎였지만 다른 군부 장수들이 전사했기에 대항할 사람이 없어 더욱 강력한 정권을 구축하고 서진을 세운다. 그러나 이십 년이 지나 황위를 계승받은 사마염은 결국 패배해 멸망한다. 사마의가 원 역사와 달리 전쟁영웅의 권위가 없다보니 반발하는 세력이 더욱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3.1. 역대 황제

3.2. 황실

3.3. 군부

3.4. 조정

3.5. 사마씨 일파

3.6. 조상파

3.7. 기타

4. 기타 인물

4.1. 후한

4.2. 요동

4.3. 고구려

원 역사에 비하면 수혜자(?). 본래대로라면 관구검이 이끄는 위나라군에 의해 수도까지 큰 피해를 입을 시기가 가깝지만 마속에 의해 관구검이 대패하고 요동 일대에서 위나라가 쫓겨나면서 나라의 성장과 국격이 한층 더 빠르고 높아졌다. 오나라와의 협조 관계도 맺었으니 한반도 쪽의 역사도 격변할지도 모른다.하지만 후일담에는 나오지도 않았다[161]

4.4. 강족

4.5. 선비족

4.6. 남만

4.7. 교주



[1] 3번째 전쟁이지만 2번째 전쟁은 위나라의 선공이므로, 촉이 주도한 북벌로만 치면 2번째다. [2] 서막은 촉의 영향력이 미비하던 남중의 군현들까지 제대로 정비해 국력 신장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3] 정확히는 오의도 있긴 하지만 나이가 많은데다 외척의 입장이라 군에 대한 전권을 쥘 수 없는 상황상 제갈량의 이후 세대 중 군부에서 가장 핵심인 마속의 역할이 중요했다. [4] 사실 마속은 진작에 도망치려 했지만, 난데없이 고대 세계, 그것도 전쟁터 한가운데에 떨어진데다 밥이란 것이 대충 만든 주먹밥이다 보니 넘어가질 않아 며칠간 물밖에 못 마셨다. 그래서 도망치려다 힘에 겨워서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지휘권을 넘겨준 거야 미래 왕평의 진가를 알기에 그랬고. [5] 제갈량이 노숙이 했던 괄목상대라는 말이 허언인 줄 알았다가 왕평을 보고 그 말이 맞았음을 깨달았다고 하니 그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정작 마속은 일단 왕평은 원래 똑똑했으니 핀트가 어긋났다고 속으로 깐 뒤에 왕평을 데려가면 난 누구 데리고 싸우냐고 불평했다. 그래도 제갈량이 강유를 붙여주겠다고 말하자 바로 풀리긴 했지만... [6] 보다 정확히는 군사학은 마속이 붙여준 강유에게 배웠다. [7] 본격적으로 붙기 전에 설전에 들어가는데, 나헌이 촉한의 정치 상황을 설명한답시고 삼고초려부터 시작해서 한 시진(2시간)동안 투머치 토킹을 시전하고, 듣다 못한 오군이 빡쳐서 공격을 시작한다. 심지어 백제성에서 오군이 철수할 때는 역으로 투머치 토킹을 유도하며 퇴각할 시간을 버는데, 나헌도 런각을 잡으려는 수작임을 눈치채지만 백제성 주둔군의 숫자가 너무 적다보니 괜히 추격하다 실수해서 백제성을 잃으면 여태 버틴 게 말짱 도루묵이 되기에 그냥 오군의 퇴각을 묵인하고 설전을 즐기기로 결정한다. [8] 실제로는 이릉대전에서 촉한으로의 퇴로가 막혀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그렇다고 방금까지 싸운 적수인 오나라에 항복할 수 없어 차악으로 택한 것이며 이후 유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위나라의 다른 이들이 모두 좋아할 때 홀로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촉한에 대한 충성심도 남아있었다. 그래서였는지 위나라에서도 실권은 없는 신세로 지냈고 결국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9] 더구나 마속을 제외한 시험관들도 차마 뽑을 수 없어 어물거리던 중 이막이 "우리 승상도 오에 형이 있고 위에 친척이 있는 부역자 아니냐? 기회는 주자"라고 말한 다음에 바로 저렇게 취급당한 거다... 당연히 시험관들은 너나없이 이막은 대체 사람의 마음이 있는 거냐고 경악한다. [10] 군부 최고 권력자인 마속과 연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군부 내에서 중진이 될만했다. 거기다가 본인도 무능하지는 않고 적당히 무난한 장수 정도는 됐으니, 군부 내에서 꺼릴 이유도 없었다. [11] 극읍. 나름 고위직이고 계한에서 조위로 투항한 항장인데, 계한 전선에 배치된 하후패는 물론, 그 누구도 기억 못할 정도로 중용받지 못해 이제는 살아있는지도 모르게 되었다.(실제로도 사망년도 미상) 황숭의 아버지인 황권도 항장이 되고 나서는 진남장군을 거쳐 거기장군으로 중용받았지만 실권은 없이 쓸쓸히 죽었으니 결국 위나라의 약점을 잘 보여준 것. [12] 물론 온화한데다 공사구분도 잘 되는 장완이기에 매우 불쾌해하긴 해도 등용을 안 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이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누가 그를 제대로 등용할 수 있을지.... [13] 정확히는 삭방 일대의 석성들을 지은 재료가 석회암인데, 석회암은 산에 변질되기 쉽다. 이를 미래인의 지식으로 알고 있던(환생한 뒤 세월이 많이 지나 원리는 까먹었다고 한다.) 마속이 맹화유궤를 이용해 군수물자로 지니고 다니던 식초(원래는 군량의 역할을 담당한다.)를 분사하게 해 석회암으로 지어진 석성을 무너뜨린 것이다. [14] 왕준의 자는 사치. 즉 왕사치. [15] 심지어 마속이 위장군에서 대홍려로 한 직급 낮아지고 군부에서 실각한 것처럼 보이자, 찾아가서 대놓고 큰일난 게 아니냐고 한탄해 눈총을 산다. 마속은 대홍려라도 천거권 정도는 넘치고 일부러 물러난 것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권세가 떨어진 건 맞지 않냐고 한탄해서 마속이 어이를 날려버린다. 그도 그럴 게 대홍려도 장관급 고위직이다. [16] 이때 그의 능력을 인정한 진태가 항복을 권하지만 단호히 거절했다. 이미 계한의 마속에게 패배하고 귀순해 큰 공을 세우고 간신히 인정받았는데, 여기서 또 패배하고 귀순한다면 철새라고 평생 조롱거리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17] 이때 마속을 우러러보며 승상(제갈량)도 우러러 볼 정도가 아니냐고 극찬해서 원 역사의 마륭의 공을 빼앗은 것을 찔리게 만들었다. 마속이 찔려한 이유는, 팔진도를 비롯한 보병의 대 기병 전술에 선비족이 대처할 방법을 몰라 진 것이라 1회성 전략에 가까운데 이걸 먼저 선수친 것이기 때문. 미래인의 특권 [18] 주인공이 표현하기를 고난이 없었으면 되었을 유비의 모습. 때문에 조운이 선제(유비)의 풍모를 가지셨다고 칭찬했던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19] 특히 황호는 마속과 동윤이 요주의 인물로 주목하고 있다. 작중에서는 원 역사에 비해 북벌이 잘 진행되어 승상부의 권위가 높아진 덕에 환관의 전횡을 막을 법안을 통과시켜 황호의 전횡을 막을 여지를 남겼다. [20] 정확히는 안전불감증에 가깝다. 그래도 유선이 평정심을 놓지 않은 덕분에 중신들의 동요가 어느 정도 진정되는 효과는 있었다. [21] 당장 비의 역시도 꾸준히 자신이 촉한을 재상으로서 이끌어가고 싶어하는 모습이 제갈량의 생존 당시부터 드러났다. 황제에게 전권을 받아서 자신이 원하는 정치를 펼칠 수 있는 재상 자리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하여 열정적인 신하들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위치다. 물론 현대인 소시민 마인드인 마속은 과로사하기 좋은 자리라 여긴다. [22] 실제로 적은 분량에 비해 연의에서나 사서에서나 눈에 띄는 단점 없이 제 몫 이상을 해내는 것으로 고평가 받는 지휘관이다. 유관장이나 황충, 조운 등의 원로들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23] 비공식적 서열 1위는 마속이다. 오의가 거기장군이고 마속은 당시 위장군이었기에 공식적 서열은 오의가 높다. 능력만 보자면 강유, 왕평 등도 뛰어나긴 하지만 이 둘은 아직 경력이 짧은 편이라 군부의 수장을 맡기에는 손색이 있다. [24] 마속의 평으로는 제갈량이 마음 먹으면 못 자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황제에 준하는 권력을 가졌으면서도 워낙에 힘을 아껴서 티가 안 난다고 한다. 그러면서 언뜻 보기엔 큰 차이 안 나보였던 이엄과 위연 등이 훅 하고 가버린 것을 거론한다. [25] 승상으로서 촉한 국경의 모든 주력군단 지휘권을 가졌고, 익주목을 겸임하면서 수도 인근의 병력도 전부 관할한다. 심지어 어림군 지휘관 상총도 제갈량의 사람이다. 본인이 독재하는 티를 안 내려고, 업무가 느는 걸 감수해가면서 절차와 법도를 전부 지켜서 실감이 안 나는 거라고 한다. [26] 이때 헌제가 곧 위나라에게 죽을 것이라 예측하고 슬퍼한다. [27] 이때 계책을 짜내라고 외딴 곳에 마속, 왕평, 마충, 강유를 납치해 가둬놓고 만두만 줬다 [28] 계책을 수립한 것에 제갈량의 의사가 단 1도 들어가 있지 않았으나, 수립한 계책은 어느 정도는 미흡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런 결점들을 제갈량이 본인의 능력으로 죄다 메워버렸다. [29] 다른 사걸인 마속, 장완, 비의가 모두 제갈량의 후계자이자 직속 수하였던 것을 감안하면 중흥사걸의 필두로 취급될 것이다. [30] 실제로 장완은 마속의 처형을 반대하며 살려달라 제갈량에게 청했었다. [31] 위연이 죽은 후, 군부의 압도적인 실권자가 된 마속이 먼저 장완을 집정으로 추대하는 모습을 제갈량의 앞에서 보여주는 것으로 그를 지지함을 선언했기에 본래 눈에 띄지 못한 공로만 있던 장완의 입지가 급상승했다. 물론 다른 장수들은 군부에 힘이 약한 장완은 제갈량처럼 간섭을 해오지 않을 것이라 여겼지만, 제갈량의 유언에서 마속 등과 논의해서 하라는 것처럼 정작 군부의 최고 권력자인 마속이 장완을 지지하기에 장완은 이후에도 군권에서 문제를 겪을 일이 없었다. [32] 관직명을 부르지 않고, 자를 부른 것은 친구로서 부른 것이다. 존경하다못해 숭배하는 제갈량이 사망을 앞두고 자신을 생각도 못해본 후계자로 지명한 데다가 군부의 최고 권력자가 된 친구가 자신을 촉한 최고 권력자로 추대해주는 상황에 복잡한 기분이 된 것. [33] 마속 덕분에 장완은 원 역사와 달리 북벌의 공로로 입지가 비대해진 군부에서 불만세력이 나오지 않은 덕도 보았다. 사실 이도 제갈량의 의도인 것이 보급 위주로 일을 한 탓에 군부에 영향력이 없던 장완과 비의의 입지가 매우 부족했기에 제갈량은 장수들이 보는 앞에서 장완을 후계자로 정했고, 군부의 최고 권력자인 마속이 절친한 친구인 장완을 앞장서서 추대하는 것을 구도를 원했던 것. 물론 마속에게 따로 명령을 내리진 않았지만, 마속이 눈치껏 파악해서 제갈량 생전에 군부의 장수들이 모두 장완을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34] 물론 마속이 속으로 태클 걸듯이 제갈량이 최상류층에 걸맞지 않게 검소하게 살긴 했어도 남긴 유산은 한 마을의 지주 쯤은 되는 재산이었기에 제갈량의 가족들이 먹고 살기에 사실 큰 문제는 없었다. 즉, 장완의 걱정은 괜한 걱정. [35] 사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마속은 역사를 아는 만큼, 평시에 오나라 싫단 소리를 그렇게 하면서도 정작 북벌 기회를 놓치기 싫어 이성적 생각을 못하는 계한 수뇌부에 답답함을 느꼈지만, 굳이 제갈량 사후 간신히 안정된 계한 정계에 분쟁을 일으켜가며 정책을 주장할 필요는 없다고 느껴 위장군 직위까지 반납하며 오나라 전선에 집중했다. [36] 장완은 과거의 자신의 행적을 유비에게 목이 안 날아간 것이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대체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자신은 오만함이 마속보다 더했다고 여기고 있다. [37] 마속은 제갈량의 후계자 자리에 올라서 계한의 최고권력자가 되면 그냥 과로사하기 딱 좋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역사에서 제갈량, 장완, 동윤 등 줄줄이 과로사로 죽어나간 자리가 촉한 최고 권력자이기 때문에... [38] 마속은 대장군 다음가는 표기장군만 해도 충분히 높은 자리인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표기장군이 높은 자리이기는 하지만 대장군 자리를 자기가 차지하겠다고 선언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마속의 공적이 너무 컸고 비의는 공적이 부족했기 때문에 장완이 감격한 것. [39] 실제로 외부에서도 보기에도 마속이 권력에 초탈한 것은 특이한 것으로 취급된다. 당장 작중에서 오나라를 속이기 위해서 마속이 장완의 만류에도 스스로 위장군 자리에서 물러날 때, 오나라의 손권과 위나라의 조상은 장완과 마속이 권력다툼을 하다가 마속이 밀려났다고 생각해 두려워하던 유능한 장군인 마속이 없어졌다고 여겨 만만하게 보고 군사를 일으켰다가 대참패를 당했다. [40] 비의도 후보에 올랐지만, 이 사신으로 갔다간 친오파 낙인이 찍혀 비의가 꿈꾸는 재상 자리는 물건너가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제갈량에게 살려달라면서 애걸복걸하면서 거부했다. 그로 인해 마속이 가게 된 것. 마속은 마속대로 '이거 갔다 오면 출세길이랑 명예는 개박살나는데, 그 대신 금전적인 보상은 섭섭찮게 해줄 거 아냐? 어차피 난 출세고 명예고 관심 없으니까 개꿀 아닌가?'라는 마인드로 좋아했다. [41] 실제 역사에서도 비의는 암살당한다. 그것도 본래는 유선을 노렸지만 틈이 안 생겨서 꿩 대신 닭으로 타겟이 된다. [42] 마속은 이 계획을 위해 '대홍려배' 바둑 대회까지 열었는데 비의는 이걸 보고 마속에게 감탄하면서 장완에게 요청해 대사마배 바둑대회를 정기적으로 열 계획까지 짠다. 후일 본인이 대장군이 된 걸 감안하면 진짜로 해마다 열었을지도. [43] 사실 비의 뿐만이 아니라 장완과 서막, 왕준 등 계한의 다른 인재들과 장수들 모두 오나라의 배신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마속 본인도 자신이 미래 지식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예측할 수 있던 것이지 아니었으면 비슷한 의견이었을 거라고 자평한다. [44] 제갈각은 비의가 사신으로 오를 찾아왔을 때 그를 만난 적이 있어 깔봤지만, 비의는 군대를 다루는 데도 재주가 있었고 결과는 당연히 오의 공격 실패였다. 참고로 비의는 흥세산 전투에서 왕평과 함께 위군의 진격을 크게 저지한 실적도 있는 사람이다. [45] 대장군의 자리이기는 하지만 군권은 실질적으로 마속에게 있었다. 마속이 사용하질 않아서 그렇지, 마음만 먹었다면 군부의 장수들이 모두 마속을 따르기 때문. 그러나 비의도 이를 경계하지 않았으며, 실질적으로 비의는 이름만 대장군인 재상의 위치였다. 다만, 군부를 장악한 마속이 비의의 친구이자 지지자이기에 어떻게 보면 군권을 쥐고 있는 것도 맞다. [46] 이때는 군부에서 물러나 사도로 있는 상태였다. 전쟁 후 군부의 최고 권력자이자 주전파의 거두인 마속이 또 전쟁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한 조정에서 마속이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군부에서 떼어놓기 위해 사도로 추천한 것. 그리고 마속 역시 더 이상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기에 순순히 물러났다. 물론 이때 마속이 사도 임명을 전하는 초주에게 주전파의 거두인 자신을 군부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것이냐고 웃으며 말하자 초주가 당황하는 등, 마속이 거부한다면 답이 없었지만 마속은 순순히 군부에서 물러났다. [47] 전쟁이 벌어지면 연전연승의 명장(?) 마속을 총사령관으로 계속 쓸 생각이었다. 비의 본인도 군사적 재능은 있는 편이지만 마속만큼은 아닌지라 마속이 은퇴하여 떠난다고 하자 불안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절친한 친우이기도 했던 마속이 떠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둘은 서로간에 공통점도 많은 수십 년을 함께 나라를 이끌어온 친구 사이였다. [48] 이때도 마속이 붙여준 바둑 잘하는 호위를 데리고 있다. 마속의 뜻을 이미 알고는 있지만, 바둑을 잘하다 보니 마음에 들고 마속의 배려도 생각해서 줄곧 데리고 있는 것. [49] 원 역사와 달리 암살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갈량 사후 12년만에 사망한 장완과 달리 더 오래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정치가 안정된 덕에 정적도 없었으며, 군부 역시 마속 이후에 군부의 새로운 수장이 된 강유도 정치에 관심이 없는 순수한 장수였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50] 양의는 야심이 컸지만 군사 관련해서는 보급 외에는 딱히 군공을 세울 기회가 없었고, 때문에 자기와 같이 행정가 출신이면서 남만에 이어 가정에서도 제갈량에게 중용된 마속을 질투하고 있었다. [51] 허나 둘이서 같이 마속을 깎아내린 것도 잠시, 마속이 그만 실수로 '가정은 누구라도 지킬 수 있는 땅이었다.'라고 하는 바람에 양의는 그 대답에 만족한 방면, 위연은 발끈했고 그로 인해 둘이 다시 다투게 되었다. [52] 위연은 양의가 군사작전을 대하는 태도부터 막되먹었다고 깠고, 처음엔 흘려듣던 마속도 양의가 서막은 난이도에 비해 별로 큰 공도 못된다고 불만을 토하자 위연이 맞다고 인정했다. [53] 다만 마속도 순순히 당해준 건 아니고 강제기부를 안 당하려고 튀려고 하거나 경제가 정상화되면 깍은 돈 준다는 각서를 받아냈다. 장예 왈 이런 대응을 한 건 마속이 처음이라고. [54] 량주 자사가 되면, 전쟁복구가 주 목적이라서 옹량주 전체를 탈탈 털어야 하는데, 그러면 실질적으로 촉한 내에서 넘버2 수준의 실권자가 된다. 그래서 이엄과 위연이 탐냈는데 장예라면 위에 적힌 마속의 말대로 권력 논란이 없으므로 적합했던 것. 물론 전선지역에 군사 경험 없는 그가 간다는 것은 불안하지만, 마속이 천수 태수를 자청한 것이 하필 그때였던 바람에... [55] 마속은 장금이 이것들이 돈 아끼겠다고 신참 관리들을 일부러 험지로 내몰아서 못 버티게 만드는 거 아니냐고 뒷담을 깠다. [56] 여기서 중앙으로 오면 남은 생 동안 관직 진출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라고 마속이 언급했다. [57] 참고로 장완과 비의는 마속이 나라를 생각해서 마병을 핑계로 옹량주의 군사적 부분을 담당하려고 일부러 직급을 낮춰 천수 태수까지 자청한다면서 감탄했다. 마병이 나이가 몇이고, 아빠가 마량에 삼촌이 마속인데 설마 그딴 편지나 보냈겠냐고, 그럴 리가 없겠지만 진짜였으면 감찰을 해서 해고해버렸을 것이라고 마속 앞에서 농담 같은 진담을 했다. [58] 이를 두고 마속은 권력자 집안이 되면 부정부패를 안해도 이런 혜택도 있다고 속으로 한탄한다. [59] 사실 이 연회는 이막을 살려주기 위해 마속이 짜놓은 판이었다. 일부러 장완에게 제갈량을 떠올리게 해서 연회자리에서 제갈량과의 추억담을 꺼내게 만들었는데, 배알이 뒤틀린 이막이 막말을 시전한 것. 막말을 해도 공적인 자리에서 맨정신으로 대놓고 하는 막말과 사적인 연회 자리에서 술 들어가서 생각없이 내뱉은 막말은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으니, 사형까지는 가지 않고 유배형으로 끝난 것이다. 따라서 마속은 이막이 계속 저러다간 언젠가 반드시 사형을 당할 테니 멀리 유배를 보내 더 이상 어그로를 못 끌게 하면서 쓸데없는 살생은 피하도록 판을 짠 것이다. 물론 다른 중신들은 마속이 이막을 숙청하려고 짜놓은 판이라고 착각하지만.... [60] 마속이 오나라와 가까이 지내다보니 오나라 통수를 잘 쳤다는 말을 마속 앞에서 하고, 마속에게 열렬한 환영을 하는 백성들을 보고 북쪽의 장군들이 더 잘 했는데 백성들이 무지해 오나라에게 망신 준 것을 더 좋아한다고 말한다. [61] 일단 친가 쪽으로 찾아가 집을 구할 때까지 살 생각이었는데, 친척들이 현 계한 군부 톱인 마속이 겁난다고 쫓아냈다고 한다... 이 시점에서 마속은 작정하면 언제든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가능한 포지션이었고, 연좌제가 당연시되던 시절이라 이막을 도와줬다간 친척들까지 화를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62] 엄밀히 말하면 고증오류다. 조운의 생년이 불명이긴 하나 170년 무렵으로 추정되므로, 따라서 1차 북벌 당시 조운은 60세도 안 되었다. 다만 이는 북벌 당시의 조운을 칠순 노장으로 묘사한 연의를 따라가느라 그렇게 된 것이다. [63] 기주는 점령도 못한 상태이기에 다스릴 땅 따위는 없는 직위다. 따라서 업무는 보통 기주 출신의 노병들을 돌보는 것. [64] 원래 연의에선 청강검이다, 작가의 오류. 코에이 삼국지 등에서 청공검으로 나올 때도 있어서 실수한 듯. [65] 이때 주인공이 의욕을 잃고 물러나려는 의도를 간파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본인 말로는 첫 전투 후 무상함을 느껴 그런 식으로 물러난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또한 본인 역시 유비에 대한 충성이 흔들리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형주에서 백성들을 이끌고 피난을 할 때, 군사들에게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하면서도 백성들을 버리지 않아서 결국 백성들과 군사들 대부분을 잃게 되고, 본인도 청강검과 명성을 얻었지만 이에 염증을 느끼고 의욕을 잃었지만 결국 형주를 차지하게 되면서 백성들을 다시 되찾게 된 것을 보고 유비를 계속 따르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66] 공을 세운 마속에게 시비를 거는데 경험 없는 마속이 뭘 할 수 있었겠냐고, 기절이나 안 하면 다행이고 왕평이 다했을 거라고 하는데 이에 마속은 뜨끔하면서 감탄했다. 감탄한 이유는 자신에게 악의적이지만 군사에 능한 위연답게 진상을 파악했다는 것. 양심이 찔린 마속도 자신이 공을 세운 게 아니라 왕평을 비롯한 이들이 다 했다고 하는데 속으로 이게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67] 다만 마속이 출세에는 시큰둥하고, 위연도 정치엔 재주가 없어 견제의 효과는 미미했다. 전공을 깎아내리려 해도, 위연처럼 숙련된 장군에게는 장합을 상대로 열세에도 버틴 전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는지라 그저 왕평이 다했으리라고 공을 돌리기만 하느라 오히려 공 자체를 저평가하던 양의와 시비가 붙었다. [68] 실제로 장합과 동귀어진할 때 마속이 자신을 대신해 한실을 위해 뛰어줄 것이라 생각하는 걸 보면 마속의 능력 자체는 믿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69] 마속을 구하려는 건 제갈량 사후 후계자 경쟁에서 마속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빚지우기 과정이었다. 다만 동귀어진은 위연의 의도가 아니었는데 본인은 이기고 돌아올 줄 알았지만 예상과 달리 실력이 비슷했고 무기의 차이로 대도에 가슴이 베여진 장합은 바로 죽고 창에 뚫려진 본인도 곧 죽을 치명상을 입어버린 것. [70]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헛된 죽음이었던 건 아니다. 무엇보다 원래 목적이던 마속 구출에 성공했고 위군의 장합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았던 탓에 전열의 붕괴로 이어져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마속도 평생의 죄책감이 될 것이라며 울분을 삼키고, 이후 자리에 걸맞은 장군이 된다. [71] 이때 위연의 회상 속 유비의 말투는 연의 속 인의군자보다는 유비 패왕설에 더 가깝다 [72] 이때, 유비가 자신을 한중 태수로 발탁해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하고 있음이 나오며 여전히 유비를 주공이라 부르며 자신의 주인으로 여기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유비의 아들인 유선이 현 황제이긴 하지만, 위연은 한실부흥의 대의 자체보다도 아닌 척 해도 자신의 노력을 꼼꼼하게 살펴주면서 자신을 알아준 유비를 위해 모든 걸 걸었던 것. 제갈량처럼 위연도 유비의 사람 끌어들이는 힘에 깊이 매료되어 자신의 모든 걸 바친 인물 중 한 명인 셈. 제갈량 역시 마지막에 유비를 선제가 아닌 위연처럼 주공이라 부르며 자신의 주인으로 깊이 여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73] 덕분에 마속이 천수 태수, 강유가 량주 사마로 일할 때 평일에는 강유가 체력단련이라고 굴리고, 주말에는 마속이 휴식이라고 등산을 시키는 병사들에게 있어 환장의 콜라보가 이루어진다. [74] 위나라의 침공은 물론 동관대전에서도 각각 보병과 기병을 운용하며 손발을 맞췄고, 병주 원정이나 독발수전의 난 등 마속과 최전방에서 콤비를 이뤄 싸우는 일이 가장 많았다. 또한 등장 자체가 마속의 뒤를 이은 후임 참군이니만큼 사실상 마속 라인이라고 봐도 무리는 없다. [75] 알아서 한 건 아니고 제갈량이 시켰다. [76] 제갈량의 사망 직전에는 마속이 군권을 이어받는 것을 알자 마속이 제갈량의 후계자가 된 것이라고 확신하며 이를 확정하라고 은근히 눈치를 줄 정도. [77] 나머지는 오의, 마속, 강유, 왕평. [78] 사마의는 원 역사에서도 제갈량이 지휘하는 촉군에게 고전하자 최대한 야전을 피하고 방어전을 주로 했지만, 다른 장수들을 대상으로는 고속 기동전도 꺼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확신하는 장익과 요화는 빠른 기동으로 압도했지만, 철두철미한 제갈량과 대치하자 그 빠른 기동이 독이 되어 제갈량에게 간격을 찔려 무너졌다. 아예 이것부터가 제갈량의 계획이라는 언급이 있다. [79] 유선의 아내는 장비 하후씨의 딸로 유선의 아들은 하후씨의 외손자다. 또한 정군산 전투에서 황충에게 참살당한 친부 하후연의 시신을 하후씨가 거두어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묘소가 촉한에 있다. [80] 가상인물. 실제 역사에서는 관흥의 아들 관이가 촉 멸망 때 살해당하며 관흥의 가문은 대가 끊겼다. [81] 대도독은 형식상 황족인 북지왕 유심이 맡고, 부도독이 지휘권을 가졌음. [82] 아직 마속과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었기에 원래는 잠만 잘 생각이었는데, 곽향의 미모와 살내음에 그냥 정신을 놓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하룻밤을 치른 상태였다. [83] 현대로 치면 국립대학의 총장격. [84] 여담이지만 실제 정사 삼국지에는 마속전이 없으며, '마량전'에 덤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쪽에서는 진수가 마속에게서 직접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므로 마속전 뿐 아니라 중흥사걸 항목들이 모두 원 역사보다 상당히 풍부해질 듯하다. 또한 촉한이 멸망하지 않았으니 유비 세력의 초기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있을 테고 마속이 중반에 기주 자사를 역임하면서 유관장과 오래 함께했던 조운은 물론 기주 출신 노병들과 많은 대화를 했으므로 마속이 이 이야기도 전했다면 촉서(여기서는 공식적으로 계한서가 되겠지만)가 전반적으로 더 두툼해질 것이다. [85] 원 역사에서는 1차 북벌에 실패한 한이 오의 칭제를 대놓고 반대할 실리가 없어서 반대 여론이 크지 않았겠으나 주인공이 빙의하여 1차 북벌이 성공한 한나라 입장에서는 한적불양립 원칙을 내세우며 오나라와의 단교를 외치는 여론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마속이 은퇴를 목적으로 총대를 매고 오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86] 삼국시대에 폭탄주가 있을리가 없으니 마속은 양국의 동맹과도 같은 술이라며 '동맹주' 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하는데, 마속이 나중에 오나라에 다시 와 보니 술의 파괴력 때문에 현생과 같이 폭탄주라는 이름이 되어 있었다. 사실 삼국시대에 화약무기는 존재하지 않았으니 '폭탄' 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을 확률이 높아 고증오류라 할 수 있지만, 개그성 서술이라 그런지 깊이 따지지는 않는 분위기이다.爆彈이 아니라 暴呑일지도 모른다 [87] 물론 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높게 보는 건 용인술 한정이다. 육손만이 손권이 명군이라 믿을 뿐, 오나라의 신하들마저도 작중의 손권이 명군이라는 생각은 잘 하지 않는다. 반면, 역사를 알고 있는 마속 입장에서 손권이 이후 이궁지쟁을 일으킨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손권의 용인술에 비해 좀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88] 현대에서도 문제인 술 강요나 나이 차이가 20살이나 나는 유비와 조조를 막 부르는 행동 등으로 마속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89] 사실 성과라기엔 오나라의 국익에 도움되는 바는 거의 없다시피했다. 손권 입장에서는 자신의 권위가 일시적으로 올라간 셈이지만, 결국 이 권위를 바탕으로 소집한 대군으로도 합비를 뚫지 못해 기껏 올린 권위가 아무 소용이 없었기 때문. [90] 다만 제갈각이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육손 숙청은 단순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육씨 가문을 시작으로 오나라 내에서 거대한 힘을 갖고 있는 오군 4대 호족들을 쳐낸 뒤 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궁의 변이 신권을 견제하기 위한 손권의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추정하는 쪽도 있으니 그럴 듯한 셈. 그러면서 그만큼 기득권이 없다시피하므로 손권에게 의지해야 하는 자신들 가문의 세가 더 커질 것을 예측한다. [91] 그러나 육손의 부재로 오나라가 계한의 뒤통수를 치는 것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데다 오히려 마속의 안배에 교주와 형남을 털린 것을 보면 당장 자신의 권위를 얻자고 기둥뿌리를 뽑은 셈이 되어 실이 너무 컸다. 육손이 살아있었다면 백제성을 통한 익주 점령은 둘째치더라도 상용을 완전히 점령해서 한중을 노리거나, 마속의 교주 점령을 방어하는 정도는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 자신의 권위를 세우자고 유능했던 신하인 육손을 팽해버린 것은 득보다 실이 훨씬 컸다는 것이다. [92] 이는 오나라가 계속해서 합비에서 막힌 것 때문에 장강 방어선의 중요도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장강 상류에 자리잡은 계한이 수군을 대대적으로 육성하면 파죽지세로 장강을 따라 진격할 수 있기 때문. [93] 이 와중에 위나라의 20만 대군이 크게 대패하고 군주가 막 바뀌었으며 수도가 위험한 상황인데 어떤 감정도 내보이지 않는 사마의를 보며 뭐 이런 놈이 있느냐고 경계한다. [94] 그나마 남양을 점령한 것이 손권 본인의 권위 상승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95] 손화의 첩인 하희의 아들인데 원 역사처럼 즉위한 것을 보면 원 역사에서 손화의 4남 중 손호를 제외하면 요절한 것으로 추정된다. [96] 마속이 손권에게 시달리는 중신들을 구해주려고 폭탄주와 회오리주를 전해준 걸 손권을 꼬드겨 사치에 빠트리려 한다고 판단하는 등. [97] 당시 양번과 상용은 위나라의 요충지였으므로 촉을 대놓고 배신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오나라에서 양번과 상용을 점령하면 장안을 공격할 길이 열린다. 그런 민감한 요충지를 동맹인 촉나라에 말도 없이 진행했다는 점에서 육손과 오나라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98] 거기다, 주인공이 빙의하기 전의 일이라서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지만 육손은 이릉대전에서 마속의 형 마량을 전사시킨 마속의 원수이기도 하다. [99] 특히 양번 함락에서 이 사실이 두드러지는데 양양과 번성은 1천 년은 더 지난 뒤의 몽골군이 고대보다 더 뛰어난 공성술을 가지고도 6년이나 포위한 끝에 가까스로 점령한 철옹성이다. 그런 양번을 후대의 몽골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는 공성 기술에 위군보다도 떨어지는 오나라 육군으로 몽골보다 더 짧은 시간에 함락시킨 건, 육손의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증거이다. [100] 다만 당시 제갈량이 이끄는 촉군과 손권이 이끄는 오군 본대가 각각 장안과 합비로 진군해 격전을 벌이고 있어 관우 때와는 다르게 위나라가 양번을 지원할 틈이 없었으며, 작중에서도 촉한이 장안을 함락시키자 양번의 위군이 동요해서 이룩한 성과이기도 하다고 언급되기에 약간 걸러서 볼 필요는 있다. 그래도 실제 역사에선 둘다 함락시키기는커녕 관우 같은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는 것과 양번의 견고함을 생각하면 이 작품에서 군사적 능력이 엄청나게 버프받았다. [101] 마속이 육손이 확인할 것이라 예상하고 극정을 시켜 과거 제갈직과 위온에게 준 비단주머니를 받아오라 했는데 그것을 빼앗아 내용을 확인하는데 그 내용이 '그냥 안 될 것 같으면 요동에서 철수하는 게 최고다'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마속은 제갈직과 위온이 자신을 믿어준 데 대한 보답으로 괜히 안 될 싸움하다 죽느니 그냥 빤쓰런하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하려고 준 거였는데, 이게 어쩌다 보니 빠트리기 아주 좋은 함정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눈치챈 마속이 써먹은 것. 결국 육손은 그 편지를 이용해 손권의 요동 지배론을 반대했다가 손제리의 분노를 산다. 게다가 별 것도 아닌 걸로 꼴받는 손권의 성격을 노리고 깨알같이 육손이 국서를 교정할 권리를 행사하도록 유도해 손권의 속을 긁는다. 사실 후자의 경우 육손도 이전에는 행사한 적이 없는 권리라 유명무실한 것에 가까웠으나 마속이 한의 왕족 이름과 겹치므로 피휘해야 한다는 식으로 교정을 유도한 것이다. [102] 황제가 보낸 편지를 일반 우편 받듯이 받을 수 없고, 하나하나 날씨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예법을 차려서 무릎 끓고,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받은 성지에 적힌 거라고는 유치한 모욕과 조롱뿐인 셈. [103] 죽기 전 자신은 지금까지 유비를 한번도 영웅이라고 여기지 않고 사람 보는 재주만을 믿고 관우, 장비, 제갈량의 힘을 빌렸을 뿐이라고 여겼기에 유비를 이긴 사실을 대단히 느끼지 않았지만 오늘에서야 영웅으로 인정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자신을 믿지 못한 손권에 대해 굉장히 큰 충격을 느꼈고, 그에 대비되어 사람들을 믿고 맡겨주는 유비에 대해 인정하게 된 듯. 그의 마지막 말은 지인지감. 사람을 보는 눈도 없고, 신뢰도 주지도 받지도 못했던 자신에게 안목이 없었다고 자각한 것이다. [104] 본인도 뒤늦게야 자신이 손권을 잘못 건드렸다는 걸 깨닫자 마속에게 오나라에 와서 중재 좀 해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물론 마속은 육손의 숙청이 목적이었기에 거절했다. [105] 아닌 게 아니라 명군이라고 하기는 뭔가 애매한 손권을 명군이라고 진심으로 칭송하는 것은 작중에 육손 뿐이다. 제갈근도 장소도 그런 말은 안하는 판에. 손권의 편지 폭격도 자신이 겉으로나마 죄를 인정하고 군권을 반환했으면 실각은 해도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할 수는 있었으나 본인이 끝끝내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화를 보고 말았다. 결국 그 특유의 성격이 죽음으로 이어진 셈이다. [106] 한편 누가 봐도 육손과 손권 둘의 혈족이나 동료들은 물론 본인들도 몰랐던 인격적 결점이 맞물려 시너지를 일으켜 발생한 참사였기에 일에 엮인 제갈직과 위온은 물론 이 일로 손권에게 실망하고 오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던 제갈근조차도 마속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제갈직과 위온은 후일 교주 전투에서도 적장 마속에게 막말을 하지 않고 예의를 차렸고, 육손의 부고를 전하러 왔던 제갈근은 아예 속내를 털어놓으면서 동생 가족의 신변을 부탁했을 정도. [107] "듣기 싫다! 공격해라!" 사실 나헌이 3시간 넘게 떠들었던지라... 역으로 나헌은 말해보라더니 기습을 가한다며 분개했다. [108] 마속은 원 역사에 비해 지휘관의 능력 차이와 백제성의 대비 상태를 감안하면 절대 뚫릴 리가 없다고 확신한다. 실제로 백제성이 수비에 고난을 겪었다는 묘사조차 나오지 않는다. [109] 만일 마속이 욕심을 내서 형북까지 북상했다면 주연에게 공격받았겠지만 딱 형남의 영릉, 계양, 무릉까지 점령하고 물러나는 바람에 실패했다. [110] 정확히는 '넌 요동 원정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 이렇게 잘 풀렸잖음? 그러니 벌주나 먹어라.'라는 손권의 심중이 껴있었다. [111] 마속이 이를 보고 손권이 강약약강 성향이라고 생각한다. [112] 마속이 불교를 들인 목적은 옹양주에 영향을 끼치게 될 강저(羌氐) 등의 이민족 교화에 있었으나, 불교를 들이기 위해 본인의 이름을 딴 사찰을 건립하는 등 어느 정도 정성을 들일 필요도 있었다 보니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13] 마속은 자기랑 같은 사상이라 동질감을 느낀다.하도 징징대서 곧 사라지지만 [114] 원 역사의 장미는 마속과는 상관없이 요동에 파견갔다가 공손연의 배신으로 죽었기에 이 예언은 맞는 게 되었다. 장미 본인은 이 귀인이 마속이라는 걸 인정하지 못했지만. [115] 주인공은 제갈근의 얼굴 생김새를 은근히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평범하게 깔끔해서 실망(?)한 듯하며, 저 별로 길지도 않은 얼굴을 갖고 당나귀 상이라 놀려서 후대에 길이길이 전해지게 만든 손권이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116] 이때 손권과 육손을 유비와 제갈량보다 뛰어나니 둘처럼 이상적인 군신 관계를 쌓을 수도 있다고 설득하지만, 손권의 대답은 "옆집에서 나무에 부딪치고 죽은 토끼를 얻었으니까, 나도 가만히 기다리라는 것인가?" 라면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일축했다. 심지어 그런 제갈근을 정말 순진해서 총애한다고 모욕에 가까운 발언까지 한다. [117] 실제로 제갈근에게는 여동생이 2명 있었으며 두 사람 모두 형주의 명문가에 시집을 갔다. [118] 사실 제갈량이 제갈첨을 너무 늦게 얻었기 때문에 제갈량은 제갈근의 차남 제갈교를 양자로 들인다. 제갈교는 제갈첨이 태어난 다음 해 죽지만 아들 제갈반을 남겼기에 나중에 제갈근 일족이 멸문하자 제갈반은 제갈근 가문으로 원복해 대를 잇는다. 보험은 준비해둔 것. [119] 동천왕이 타는 말의 갈기가 잘린 것에 대해 고구려 관리에게 물어봤었다. 역사적 사실은 우 태후가 동천왕을 괴롭히기 위해 일부러 자른 것이지만 그걸 밝힐 순 없던 고구려 관리가 왕의 위엄을 보이기 위함이라고 거짓말을 했고 위온은 그것을 그대로 적었다... [120] 이것도 원래는 거열형에 처하라는 것이 마속이 어찌어찌 달랜 결과이다. 사섭의 일가를 몰살한 자신의 죄에 대한 댓가를 받은 것. [121] 이것 때문에 마속과 독자들비의가 역대급으로 추하게 보인다고 속으로 생각했을 정도다. [122] 물론 오나라에선 무효로 처리해 조불흥의 승리로 포장한다. [123] 곽회는 패전 책임을 지기 위해 후미를 맡다가 죽었고, 진군은 이간책에 걸린 전예를 보며 과거 유비를 섬긴 점이 꼬투리 잡힐까봐 스스로 은퇴했다. 죄 없는 전예의 가족들은 무고함이 밝혀졌음에도 조위의 정치적 체면을 위해 처형당했다. [124] 여기서 약간 옥의 티가 있는데, 장완이 조식을 두고 진사왕이라고 칭한다. 조식이 진왕(陳王)에 봉해진 것은 232년이고, 사왕(思王)은 조식이 죽은 후에 받은 시호이다. 당시 시점은 228년에 벌어진 1차 북벌이 끝나고 1년 가량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조식의 영지는 진이 아닌 동아(東阿)였으며, 따라서 진왕이 아닌 동아왕으로 서술해야 맞는 말이다. 물론 현대인인 주인공이나 소설을 보는 독자들 입장에서야 상관없지만, 명백히 작품 속의 고대인인 장완이 당시 조식을 진사왕이라 부르는 것은 오류. [125] 실제 역사에도 있었던 일이다. 자세한 것은 문서의 3.2 문단을 참조. [126] 황제가 뒤에 있는데 도박수인 결전을 제안하거나, 자신들의 건국 명분을 위태롭게 만드는 헌제 유협을 앞세우는 등. 실제로 헌제의 경우는 위나라 내의 한실 지지 잔존세력을 움직이게 만들어 주살하는 강수를 두게 만들어, 위의 국제적인 위신을 크게 손상시켰다. 게다가 무고한 전예의 가족들을 조정의 체면을 위해 모조리 주살하자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제대로 위기감을 가진 모양. [127] 이에 조예는 제갈량을 발굴한 유비를 예로 들며 사마의를 변호했으나, 조진은 밑바닥부터 시작해 무일푼으로 온 천하를 떠돌며 안목을 기른 유비가 인재를 보는 통찰력만큼은 조예보다 뛰어남을 지적했다. [128] 개인적인 복수심도 있었지만 그 역시도 가정에서의 패전이 장안의 위기를 가져온 흐름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위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 가정에서의 패전을 안겨준 장본인인 마속을 죽이려 했던 것. [129] 둘의 실력은 비슷했지만 둘 모두 자신감이 넘치는 성격 탓에 상대를 가볍게 여겨 간단히 이길 줄 알았다. 사실 장합은 그냥 말을 몰아 병사들에게 도망치면 그만이었지만 현시점에서 자신보다 군사를 잘 다루는 자들은 있어도 용맹을 떨치는 장수로는 자신이 제일이라 자신하고 있었기에 관우, 장비도 아니고 위연 따위가 자기를 도발하냐며 자존심 탓에 굳이 일기토에 응했다. 위연도 그걸 예상하고 도발한 것. [130] 정사에서의 장합은 이 소설과 달리 무력이나 정면 대결에 별로 뛰어나지 않고 책략에 능한 지장이었다. [131] 게다가 애초에 위연의 목적은 마속을 구하는 것이였으니 목적을 달성했지만 장합은 마속을 잡으려다 죽었으니 상황 자체도 촉이 유리했다. 마속군을 몰아넣던 장합군은 장군이 죽자 지휘의 혼란에 빠진 반면, 마속은 위연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에 열세에 몰리던 군을 정비해 순식간에 장합군을 역으로 몰아쳤다. [132] 왕쌍의 기병술에 호응을 해주며 말을 지치게 만들고 왕쌍이 다시 돌아올 때 여물을 뿌려 말의 기동을 막았다. [133] 촉군의 진지를 점령해 사용했는데, 진지의 창고에는 천장 위쪽에 시간이 지나면 오물을 뿌리는 장치가 숨겨져있었다. 해당 장치가 작동되자 위군이 넣어둔 식량에 오물이 뿌려져 상당량이 썩어버린다. 이러한 상황에선 마속과 강유를 패퇴시킨다하더라도 더 이상의 진군은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고 당연히 이때를 노린 촉군의 맹공에 패퇴한다. [134] 도굴은 정말 심각한 수준의 패드립 + 고인드립이다. 효렴이라고 해서 효도만 잘해도 관직에 추천받을 수 있었던 후한~삼국시대 기준 가치관으로는 당장 찢어 죽여도 아무 말 못할 중죄. 오히려 마속의 동료들이 도굴꾼이라니, 아무리 도발이라도 그렇지 그런 패드립은 좀...이라며 마속을 말린다 [135] 학소가 있던 진창성이 큰 성이 아니라서, 비석 같은 큰 물체들을 버리는 것이 들키기 쉬운 환경이긴 했다. 차라리 끝까지 모르는 척 했으면 오히려 들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36] 원 역사와 달리 진창성에 위군이 1천명이 늘어서 총 2000명 정도가 있었지만, 그래도 성 안에 적군이 800명이나 진입했으니 질 수밖에... [137] 이때 적인 마속만이 자신의 진짜 의도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허탈해한다. 일가 건은 안타까운 것이 전예는 반년만 있다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으니 가족들이라도 그때까지 형을 미뤄달라고 유언을 남겼고, 그대로 증명되었으나 사마의는 조정의 체면을 위해서 그들을 전부 죽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결국은 죽여버렸다. [138] 마속이 수비자 입장이라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다. 특히 상류에서 배로 도강하려는 것처럼 짰을 때는 마속의 주력이 낚여서 그대로 왕평의 잔존 병력을 격파하고 도하에 성공할 뻔 했으나, 역풍항해를 연구하느라 배에 익숙해진 마속이 먼 발치에서 얼핏 보기만 하고도 가짜라는 걸 눈치채고 돌아오는 긴급히 복귀하는 바람에 성공 직전에 실패한다. [139] 물론 진태도 유능한 장수인데다가 왕평의 병력이 겨우 5천명이라서 압도적으로 몰아붙이기는 했다. [140] 위나라 최고의 군사는 사마의지만 촉한의 제갈량에게 대패한 경력이 있고 때마침 손권을 설득하기 위해 오나라로 나가 있어 제외되었다. [141] 심지어 반 사마씨 파벌이던 장군들은 전쟁 이후 사마의에게 숙청당했다. [142] 권하는 왕평이 제갈량하고 친척이라고 하자 본인 스스로가 제갈량 같은 역적하고 같은 가문인 게 수치스럽다고 외친다. [143] 이때 계한만 아니었으면 천하가 평화를 맞을 것이라고 한다. 조위의 많은 선비들은 관도대전 이후 중원 제일세력이던 조위를 지지하는 것이 난세를 마치고 천하를 위한 것임이라 생각했다고. 이에 제갈량은 그 명분이면 조위가 자기들 힘으로 해결 못해서 헌제까지 내세운 시점에 끝장난 것 아니냐고 반박한다. [144] 다행히 내부 분열은 장완이 적절하게 대응해서 막아냈다. [145] 장기전으로 가도 이긴다는 건 아니다. 이미 기세를 탄 촉군이 하나하나 위의 성을 함락하고 있는지라 그냥 시간을 끄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지킬 것만이라도 지키면서 위나라가 우세한 국력을 촉나라 방면에 제대로 투사할 시간을 벌자는 의도. [146] 헌제 유협에게 군대를 맡겨 촉군을 막게 한 것. 이는 명분을 중시하는 촉의 약점을 찌른 것이다. 물론 사마의 본인도 이것이 너무나도 초강수인 것을 알고 있는지라 이 계책을 듣고 조예가 자신의 목을 치더라도 원망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147] 정확히는 비의와 군사 일부를 떼어 상용으로 보낸 것은 맞다. 그러나 빗자루 등을 이용한 눈속임으로 대군이 움직이는 것처럼 위장한 뒤, 그대로 위나라의 긴장이 풀릴 때까지 매복하고 홍농을 기습한 것. [148] 일단 위나라라는 왕조 자체가 안전해야 나중에 찬탈을 하든 실권자가 되든 할 것이기에 당장 군사적 가능성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소와의 대화에서도 위나라는 그렇게 쉽게 망할 국가가 아니라며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149] 미래지식을 알고 미래 명장들의 방식을 활용한 것이거나 미래지식을 기반으로 전투 상황에 따라 다르게 움직이다 보니 일정한 스타일이 없는 마속이 어떤 인물인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아 제갈량과 육손도 알 수는 있었다며 당황하고, 전쟁 내내 마속이 어떤 유형의 인물인지 끝내 파악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한다. 그런다고 행보를 기반으로 적을 간파하는 능력이 어디가는 건 아니라서 나헌이나 왕준은 사마의의 맞춤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으며 각기 마속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150] 본작의 사마의는 상대방을 분석해서 맞춤 전술을 구성하는 것이 주특기다. 그런데 본작 마속의 스타일은 미래 지식을 통해 상대방의 행보를 알아서 그걸 토대로 맞춤 전술을 구성하는 것. 사마의의 주특기에 미래의 지식이 더해진 상위호환이므로 더러운 미래인 치트에 밀려버린 것이다. 물론 이런 거 빼고 기본기로 정직하게 붙으면 마속이 밀리겠지만, 이미 최종전이라 딱 한 번만 사마의를 흔드는 정도로도 충분했으므로 딱히 상관이 없었다. [151] 진태의 의견대로 형북의 위군은 오나라 때문에 데려올 수 없지만, 업 주변의 병력은 데려올 만도 했다. 그러나 사마의는 바로 얼마 전에 업을 기습적으로 공격해서 조상을 실각시키고 위나라의 권신이 되었던 탓에 똑같은 짓을 절대로 할 수 없었다. 도리어 그런 말을 한 진태를 경계한다. [152] 촉과의 전쟁 3번에서 연이은 패배 + 위나라 정계의 혼란 등. [153] 사실 순수한 군사적 소양과 지략만 따지면 사마의가 더 뛰어날 수도 있겠지만, 마속의 진정한 강점은 언제든 (역사 속의 다른 명장들을 본떠서) 타입을 바꿔가며 전략전술을 세울 수 있는 점이었기에 사마의에게는 제갈량보다도 더욱 난적이었다. [154] 198화에서는 막바지에 아버지와 합류해 도망치는 장면이 있었는데, 작가도 여기까지 사마의에게 우세한 장면을 만들어주는 건 불공평하다고 여겼는지 다음 화에 돌아와서 싸우다 죽었다. [155]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원 역사에서 서진의 건국은 (조모 시해는 넘어가더라도) 촉한을 정벌한 공헌이 아니었으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런데 작중에서는 위나라의 영토 회복 없이 벌어진 일이 되니 역적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게 되었다. [156] 위나라에서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던 하후씨의 하후패가 계한에 귀순했고, 우대받는 상황에서 아무런 정당성도, 내세울 공로도 없는 것을 넘어서 탄핵받아 마땅한 사마씨가 멋대로 찬탈을 했다 보니 위나라의 귀족층들이 반발해 차라리 계한에 내통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157] 낙양이 사마씨의 병력에 장악당했을 때 조상은 낙양 외부에 적잖은 병력과 무엇보다 적법한 황제 조방을 데리고 있었다. [158] 이때 까막눈인 왕평이 제갈량의 명령서를 읽는 고증오류 장면이 있다. 뭐 고상과 같이 읽었으니 그냥 고상이 읽어줬다고 뇌내보완하면 전개상 허점이 생기는 오류는 아니다. [159]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운 것은 이렇게 된 이상 헌제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 뻔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160] 실제 역사에선 제갈량과 같은 해인 234년에, 암살당한 것도 아니고 조용히 자연사했다. 졸지에 명줄이 3년이나 줄어들었으니, 대체역사의 피해자라면 피해자. 실제로 주인공도 자신이 역사를 바꾸는 바람에 유협이 애꿎은 희생을 당한 게 아니냐며 내심 씁쓸해했다. [161] 사실 대체역사로 인해 중국의 삼국시대 역사가 격변했기에 당연히 그쪽과 맞닿아있는 한반도의 삼국시대 역사도 크게 변할 것이 뻔하기에 작품이 복잡해지는 걸 막기 위해 일부러 뺐다고 볼 수 있다. [162] 중국어를 못하다보니 손권의 술 강요가 노신을 공경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163] 성이 소씨인 태후가 아니라 작은 태후라는 뜻의 小太后. [164] 교주 전체의 유력자라고 할 수 있는 사섭과 그 가문 사람들은 과거 여대에 의해 비참하게 죽었다. 만약 살았다면 통솔력 있는 지도자 밑의 교주가 지금처럼 차별받거나, 미개척 상태로 남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다만 이 때문에 교주 사람들이 손오에 이를 갈게 된 것이기도 하다. [165] 다만 원 역사에서는 사마씨의 진나라가 교주의 반란을 유도해놓고는 나몰라라 하는 바람에 큰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작중에서도 계한 최고의 장수인 마속이 아니었으면 아무리 꼬셔도 봉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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