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촉한
원래 역사대로라면 마속의 삽질로 큰 성과를 내지 못했을 1차 북벌에서 옹주,량주를 사실상 촉의 영역으로 편입했고, 영토를 회복하러 온 위나라의 침공도 물리치고 장안 일대까지 위협하면서 완벽하게 옹량주를 권역에 넣어서 작중 최대의 수혜국이 되었다. 이로서 변방에서 몰락하던 상황( #1, #2 )에서 변모하여, 위나라도 전력을 다하지 않고는 막지 못할 수준의 국력 신장을 이루어내었다.2차 북벌에서는[1] 장안 일대까지 영역권에 넣는다. 위나라의 촉 국경 방면 주력군을 이끌던 사마의나 장합, 곽회 등의 촉나라 방면 주요 장수들을 상당수 원 역사보다 빠르게 실각 혹은 사망시킨 것은 덤. 2차 북벌에선 15만에 달하는 군 동원력을 보여주었을 정도로 국력이 증대했고 조예 사후 장완의 북벌에서는 20만 명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면 위나라도 다른 국경에서 병력을 상당수 빼내야만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장완의 북벌 후에는 위, 촉, 오의 세력비가 대략 4 : 3.7 : 2.3을 이루어 오를 제치고 위와 거의 대등한 세력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왕평, 나헌, 황숭 등의 인재들이 원래 역사보다 십수년은 더 빠르게 두각을 드러내고 출세가도를 달리면서 2차 북벌 시점에서는 왕평과 나헌은 일군의 수장, 황숭은 부장을 맡기에 충분한 실적에 잘만 하면 일군을 맡아도 될 정도의 경험과 실력을 쌓아 인재 부족 현상도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량주를 성공적으로 개척한 유능한 관리인 서막을 포섭해 남중의 개발을 담당시킨 것도 큰 성과.[2] 또한 서막의 사위이자 훗날의 명장 왕준까지 촉한에 등용되면서 미래를 맡길 인재까지 어느 정도 확보했다. 단, 최근 제갈량이 역사대로 과로사하고 위연이 장합과 동귀어진, 이엄이 제갈량 사후의 권력을 탐하다 제갈량에게 숙청당하여 주인공이 최고 지휘관급으로 급부상한다.[3] 이후 육손 문제와 촉의 팽창에 대한 오의 경계로 인한 오와의 관계 냉각, 위나라의 전쟁 준비가 눈 앞까지 다가온 상황이라 촉한의 위기상황이 닥쳐왔고, 이를 막기 위해 마속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결국 위나라가 20만 대군을 동원하게 만든 3차 북벌에서 우세를 점하며 홍농군까지 점령하고 목덜미에 칼을 들이대는데 성공했고 오나라의 11만 병력이 동원된 대오 전쟁에서도 백제성과 교주라는 양 전선에서 모두 승전을 거두고 마속이 교주 세력과 협조해 벌인 깽판으로 오나라는 남 때리러 간 사이에 자기 집에 불난 상황이 되면서 국경 전선은 촉한이 승기를 확실히 잡았다. 그러나 위나라에는 최종 보스로 예상되는 사마의가 여전히 군권을 잡고 있어 아직 불길이 남은 상태. 현재는 3차 북벌에서 관중 전역을 먹었고 교주까지 확보했으며 형남 지방의 일부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후 장안으로 천도한다. 이후 팔진도로 선비족을 박살내고 변경이 안정되었으며 비의가 후계자 인수인계를 시작할 무렵에는 총병력이 약 25만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위나라와 오나라가 적국이 되었으므로 원정에 동원 가능한 총 병력은 그 절반 정도다.
현재 위나라에서 사마의가 정변을 일으켜 위나라를 장악했기에 잘하면 원 역사의 반 사마씨 세력을 포섭해 위의 내분을 유도할 여지도 있는 상황이다. 실제 역사대로 하후패의 귀부를 이용해 낙양까지 점령하지만, 계한의 국력 소모도 심해 마속 세대의 북벌은 여기서 마무리된다. 마속 등이 사망하고 20여년이 흘러, 사마씨의 찬탈로 인한 혼란을 틈타 진을 멸하고, 이어서 손호의 폭정에 마비된 오나라도 멸망시키며 결국 천통을 달성하게 된다.
참고로 촉이란 이름은 촉한 사람들은 잘 사용하지 않던 명칭이고, 작중에서도 장안까지 점령했으니 촉한보다는 계한이라는 명칭이 어울린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작중에선 장안 점령 이후 내부적으로는 계한이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했다.
1.1. 마속 라인
- 마속(박선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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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평
마속의 부장. 촉한에서 수십 년의 군생활을 하며 촉한 말기를 지탱한 거장 중 한명이지만, 작중 시점에서는 난독증이 우려되는 까막눈에 항장 출신이라 대우가 좋지 않다. 그러나 왕평의 능력을 아는 마속에게 빙의되어 전생한 주인공이 가정 전투에서부터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중용하게 되어 원 역사보다 수십 년은 빨리 출세로가 열린다.
가정 전투에서 첫 등장. 산을 올라가서 진을 쳐야 한다는 마속의 명령에 극렬하게 반대를 했지만 면박만 듣고 별 수 없이 따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래인이 빙의한 마속이 뒤늦게 왕평의 의견을 들어주며 산 밑으로 하산해 진을 치고, 왕평의 의견을 전적으로 들어주면서 활약의 장소를 얻는다. 여기서 혼자서 작전 설계, 병사들의 사기 관리는 물론이고 강족 병사들을 직접 이끌고 우회해 기습을 시도하던 장합의 특공병사들을 도륙해버리며 연의에서 이름을 날릴 정도의 명장이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지녔는지 주인공에게 각인시켜준다. 그러나 수만 대군의 맹공에 사기가 떨어진 촉한 병사들이 진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도망치려 하는 순간, 마속이 총대장으로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자신을 믿어주자[4] 크게 감격해 다른 장병들과 힘을 합쳐 가정을 막아내는 것에 성공한다. 이후 연회에서도 위연과 양의를 상대로 겸양하는 척하면서 자리를 빠져나온 마속을 경외하게 된다. 사실상 작중에서 첫 마속 라인에 올라탄 사람.
두 번째 전쟁에서도 마속의 부관으로 참전해 왕쌍을 격살하는 데 공을 세운다. 여러 번 공을 세운 끝에 마속의 추천과 제갈량의 인정으로[5] 일군의 지휘관을 맡게 되고 2차 북벌을 위한 제갈량의 통조림 멤버도 되고 제갈량의 유언에서까지 군무를 물어볼 장수 중 한 명으로 언급될 정도로 중용받는다. 3차 북벌에서도 강유와 함께 최전선에 나섰으며 위나라의 군단을 압박해 전선을 밀어붙인다.
이후 마지막 북벌을 개시하기 위해 여론을 바꿀 필요를 느낀 마속이 방문하자 반갑게 맞이한다. 과거 마속이 베풀어준 은혜와 인정을 기억한다면서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도 신뢰한다고 말해주고 그를 지지한다. 이후 북벌군에 합류해 강유, 마속과 함께 전장에 출격해 진태에게 밀리는 왕준을 구해준다. 금용성의 제갈탄에게 귀부를 권유하고 입성한다. 이후 장안에서 마속이 은퇴한 이후 군부의 원로로 살다가 병사한다.
여담으로 상당한 노력파인 그가 문맹인 것은 지능 문제가 아니라 모종의 감각 장애 문제로 추측되며 현대의 교육방법을 대강 아는 마속 덕에 학문 공부에도 재미를 붙인다. 이후 왕평이 출세하면서 둘이 사적으로 만날 일이 없어지면서 과외는 많이 받지 않았지만 이 당시의 은혜를 왕평은 후일 마속과 비슷한 위치인 군부의 중역이 되고도 잊지 않았다. 덕분에 사서와 고사성어를 자연스레 인용할 정도가 되었지만 끝까지 글은 못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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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헌
마속의 제 1제자. 활달하며 마속을 어릴 때부터 따라 그와 대화하고 싶어한다. 본 역사에선 등장이 늦어 촉이 망한 직후 오의 공격에서야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다. 진창성 전투에서 험준한 진창성의 북문 성벽을 마속이 육성한 산악병들을 이끌고 넘는 기습 작전을 제안해 성공시켰고 마속의 장안 특공작전에도 참가하며 큰 공을 세운다. 이후 마속의 인재육성 계획의 대상이 되어 그를 따라다니며 학습한다.[6] 고사성어를 즐거 읊는 버릇이 있는 투머치 토커다. 2차 북벌에선 황숭과 일군의 부장 역할을 차고넘치게 수행할 정도로 능력이 성장했다. 마속이랑 오래 붙어 다니면서 산악회 활동이 취미라는 걸 이해하게 된 듯, 민생사찰 나간다면서 등산 가려는 마속에게 그냥 산악회 하나 꾸리자고 이죽거리다 혼난다.
오나라가 배신했을 때[7] 백제성에서 칠천 명 상당의 병력으로 오륙 만이 넘는 대규모의 오군을 막으면서 그들의 군사가 빠진 것을 금방 눈치채고 야습으로 한 방 먹이면서 능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투머치 토커 성향 때문에 수만 대군 상대로 겨우 칠천 병력으로 나가자는 것에 두려워하던 병사들이 나헌이 지금 공격해야 하는 이유를 줄줄 읊으려 들자 그냥 빨리 가자며 충성심(?)을 보여준다. 그 후 백제성에서 오군을 막는 공을 세우며 정동장군에 올랐다. 이제 나름 직위가 있어서 마속이 남들 앞에서 갈구기도 뭣해지자 천도할 때까지 마속의 집에 머물면서 식객들에게 하루 종일 투머치 토커를 즐기는 중. 그나마 남중 유배에서 돌아온 이막이 제어 장치 역할을 하곤 있지만 그마저도 이막이 자리를 비우면 바로 말이 터진다... 그 후 제 5차 북벌에서 선봉을 맡지만 제갈탄이 데려온 죽림칠현한테 말빨이 발리고 이 틈을 노린 등애의 일격에 측면이 노출되고 만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타이밍 맞게 황숭이 구해줘서 구사일생한다. 설전에서 패한 게 어지간히도 분했는지 왕준에게 한탄할 때 전투에서 위기에 처한 것보다 설전에서 패했다는 것을 더 중히 여겼고 낙양성에서 다시 제갈탄과 마주쳤을 때도 죽림칠현을 데려오라면서 도발하거나 죽림칠현이 없으니 두려울 것 없다는 등 소리쳤다. 제갈탄과 치고받다가 예비병력을 몰고 온 마충과 합류해 마침내 제갈탄을 죽이는 것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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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숭
본래 유비 세력의 중신 가문이지만 아버지와 형이 위나라에 항복 후 귀화해서 벼슬까지 받는 바람에 온갖 멸시를 받는다.[8] 실 역사에선 등애가 쳐들어오는 최후까지 맞서 싸운 충신이며 전술적으로 정확한 판단을 하는 모습을 보여서 잠재력이 있음을 증명했다. 과거에서는 이막한테 너희 아버지랑 싸우는 불효를 시킬 수 없다며 불합격했으나,[9] 마속이 천거하여 마속의 제 2제자가 되어서 2차 북벌에서도 함께 하고 부장 역할을 수행한다. 본래도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나헌이 갈수록 말이 많아지자 자기 말도 대신해줘서 그런지 더욱 말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2차 북벌에서는 나헌과 함께 일군의 부장 역할을 차고 넘치게 수행할 정도로 능력이 성장했다. 아버지인 거기장군 황권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처해하며 조문단으로 가지 않겠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인데 장례라도 참석하라는 장완의 지시에 조문단으로 위나라에 가게 된다.(말이 조문단이지 상주의 자격으로 빈소를 지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속이 계획적으로 이막을 보내버리자 대외적으론 모욕당했던 제자의 복수를 해주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이후 마지막 북벌에 참전해 사마의의 계략에 빠진 나헌을 구원하며 활약한다.절친끼리 뭐 돕고 그러는 거지 하는 나헌은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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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막
본래 위나라 량주 자사. 1차 북벌로 옹주가 촉한의 손에 들어가자 량주는 위 본토에서 고립되었고 서막은 겨우 1만의 병력만으로 사태를 타개해야하는 상황에 놓인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산에 숨어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전으로 마대를 패퇴시키지만 마속에게 당해서 포로가 된다. 그럼에도 수년 간이나 귀화하지 않고 충심을 지켰지만 위나라에서 후한의 황제인 헌제가 의문사했다는 소식을 들려오고 정황상 위나라에서 모살한 것이 확실했기에 이에 위나라 조정에게 크게 실망해 촉에 귀순해 관직을 받게 된다. 한동안은 명목상의 직함만 주었지만 마속이 남중 일대의 반란 진압을 위해서 갔을 때 같이 따라가서 난이 진압된 후 남중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긴다. 이후 남중에 뿌리를 박을 생각으로 부지런히 일해 마속이 찾아간 수년 뒤에는 남중 유력가들을 잘 통제해 명목상 촉의 영토지만 토착민들의 반발과 지형 문제로 손을 못대던 군현까지 회복해 온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서막은 남중에서 일가를 보존하게 된 것에 만족했는데 사위인 왕준은 만족하지 못해 서막 몰래 마속에게 천거를 부탁한 것을 알자 크게 분노하지만, 장래 오나라와의 마찰에 서막과 왕준의 힘이 도움이 되리라 여긴 마속에 의해 교주의 이민족들과 연락하며 오나라와의 대치를 준비하게 되며 결국 교주의 봉기한 조국달 세력과 함께 군단을 이끌고 참전한다. 형교양주제군사를 대행한다. 본인이 귀화하기 전 벌어졌던 오나라의 오국팔절과의 대결에서, 조불흥과의 그림 승부에서 본의 아니게 촉 대표로 출전해 승리하기도 하는데, 실제로도 서막은 역대명화기에 이름을 올린 유명한 화가였다. 제갈량의 늦둥이 아들 제갈첨이 그의 그림에 감탄해 반쯤 사부로 모시고 있다. 형교양주제군사에 올라 형주와 교주를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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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
가정 전투시 마속의 부장이었지만 왕평을 문맹이라고 무시한다. 일단 눈치가 빠른 편으로 가정이 무너지려 했을 때 처음엔 도망치려 했으나 마속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것을 보고 어차피 도망쳐봐야 참수형인데 일단 싸우고 보자라며 전장에 합류하기도 하며 원군을 청하러 가는 사신도 제일 먼저 자처하는 등의 행보를 보인다. 이후에도 촉한의 장수로서 간간이 등장하며 불리한 전황에서도 실수 없이 제몫을 해낸다. 본작에서는 2차 북벌 이후론 비중이 실종된 수준이었지만 여전히 군부에 남아 움직였으며, 마속에게도 별 유감이나 미련은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어쩌면 마속만 까먹었지 남들은 여전히 군부의 중견을 차지한 마속 라인 중진으로 대우해줬던 모양.[10] 제 5차 북벌에서 마속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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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습
성실한 성격으로 가정 전투 시 가정성에 주둔하며 적을 견재하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진창 공방전 때 공을 세워 상당한 고위직으로 승진하는데 성공했다. 이성과 장휴와 노년까지 친하게 지내며 마속 라인의 중견 장수진을 대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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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정
원래 역사에선 아버지가 맹달 밑에 있던 사람이라 촉이 망하기 전까지 듣보잡이었던 사람. 비슷한 처지였던 황숭을 주인공이 출세시켜준 것을 알고 주인공을 찾아온다. 주인공은 대오 외교에 쓸 인재로 육성하려고 그쪽 업무로 배치해준다. 육손의 이간계를 쓸 때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고 극정을 이용해서 마음고생을 시켰는데 그것에 양심이 찔린 마속이 잘 대해준다. 왕준의 자기자랑에 일침을 가하기도 하고, 후에 마속의 4차 북벌에 참가해 하후패에게 귀순을 제안하는 사절로 떠난다. 하후패가 병사를 불러 죽이려 드는데도 평정을 유지해 인정을 받으며, 그에게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면서[11] 잘 되어봤자 평생 사마 가문 눈치만 보면 살게 되는 것에 만족하냐고 물으며 안 그래도 흔들리던 하후패의 마음을 더욱 동요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하후패가 귀순을 결심하자 미리 마속에게 받아온 황실 인척의 예로 대우하겠다는 문서(장비의 처 하후씨는 하후연의 조카이고 장비와 하후씨 소생의 딸 둘은 모두 유선에게 시집갔다. 즉 하후연의 아들 하후패는 유선의 처당숙 뻘이 되며, 당연히 황족으로 대우할 만 하다.)를 보여주며 마음을 굳히게 만들고 하후패를 귀순시키는 것에 성공한다. 마속 역시 하후패의 귀순만이 이 마지막 북벌 계획의 열쇠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므로 매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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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균
포원의 천거로 마속 밑에서 무기 개발에 착수한다. 포원조차 인정할 정도의 훌륭한 장인이지만 너무 실리적인 성격이다 못해 마이페이스 기질이 있어서 마속도 그를 거두긴 했지만 좀 언짢아할 정도. 첫 등장부터 제갈량의 연노를 극딜한 덕에 장완의 어그로를 끌어 출셋길이 거의 막힐 뻔했다가,[12] 그의 능력만은 크게 인정하는 포원이 장완의 절친인데다 계한 군부의 중추인 마속에게 사정사정한 끝에 활약할 수 있는 장을 얻는다. 이후 석유를 찾아낸 마속의 요청으로 시간을 달려 맹화유궤를 개발하는 것에 성공하고 이를 이용해 마속이 삭방 원정에서 석성을 깨부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거들었다.[13] 이런 활약을 한 결과 장완도 그의 능력을 인정해 장완의 북벌 때 황하 도하용 부교의 설계를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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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준
서막의 사위. 실제 역사에서는 건업을 털어먹고 삼국지를 끝내 버린 인물인데, 후반 인물이라 별로 유명하진 않지만 강렬한 활약과 그 이상으로 강렬한 이름[14] 덕에 주인공의 기억에 남았다고 작중에서는 역사가 바뀐 탓에 서막과 함께 촉한에 항복했는데, 당대 사대부답지 않게 출세욕을 감추지 않고 빨리 공을 세워 중앙에 진출하고 싶어 마속에게 매달린다.[15] 마속은 그냥 서막을 잡았더니 왕준이 덤으로 온 격이라 쾌재를 불렀다. 출세욕이 보통 대단한 것이 아니라서 빚까지 퍼내어 병사들에게 퍼준 뒤 공으로 이를 다시 충당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졌고, 이에 따라 여대와의 전투에서 휘하의 500명을 이끌고 돌격해 여대군의 우익과 중앙을 무너뜨린 뒤 여대를 사로잡는 공을 세우기도 한다.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빚까지 져가며 재물을 풀었는데 오군의 보급을 빼앗아 전리품을 나누는 과정에서 빚을 갚기는커녕 모든 재물을 푸는 모습을 보고 마속이 경악한다. 더 큰데서 따서 갚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듯하다. 이후 육윤의 군사와 대치하자 장인 서막과 같이 만만치 않더라도 단기 결전을 주장하지만 마속은 나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후 공을 세워 출세하고 장안에 저택도 받았다. 그 후 천도를 기다리면서 마속의 집에 머물면서 공을 부풀리면서 자기자랑 하는 건 덤. 주변에는 자신은 마속 장군 외에는 계한에 기댈 곳이 없어 이럴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지만 사실상 그냥 자기자랑 좋아하는 성격인지라 마속은 아주 황당해한다. 그나마 이막이 제어 장치 노릇을 하지만 이막이 사라지면 다시 자기자랑을 한다. 이때, 왕준 역시 나헌과 더불어서 마속 문하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제 5차 북벌 전쟁에 선봉을 서지만 무리하다가 진태한테 포위되기 직전에 놓이나[16] 왕평이 구해줘서 어찌저찌 넘어갔다. 마속은 내심 이 기회에 왕준이 버릇 좀 고쳤으면 하는 모양. 낙양성 공성전에서 남쪽을 맡아 수군과 함께 맹공을 퍼붓지만 상대인 진태가 만만치 않아 고전하다가 헌제의 복수란 명분으로 조예의 무덤을 파괴하겠다고 진태를 도발해 성벽 밖으로 끌어내는 것에 성공한다.
종전 이후 마속의 익주목 전임 때 따라와서 익주 지역의 군사를 담당했다. 평생 동안 자기홍보에 바빴지만, 마속은 진수 한 명에게 집중홍보를 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음을 보여줬다. 실제 역사보다 일찍 출세해서 그런지 여기서는 오나라 정벌의 선봉에 서서 삼국지의 마침표를 찍는 역할은 하지 못하고 그 역할은 관우의 후손인 관윤에게 넘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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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직
선비족의 침공으로 새 인재를 찾던 주인공의 눈에 띈 또 다른 인재. 주인공은 선비족을 상대할 전법으로 2차 북벌 이후 잘 쓰이지 않았던 제갈량의 팔진도를 떠올리는데 이를 다시 훈련시킬 이로 양직을 떠올리고 그에게 훈련을 지시한다. 이후 마속을 따라 독발부와의 싸움에 투입돼 팔진도를 지휘하며 공을 세운다.[17] 마속 사후 노장으로서 삼국통일의 마무리인 오나라와의 싸움에서도 참전해 교주에서 북진하는 방면을 맡았다고 한다.
1.2.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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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
촉한의 2대 황제. 승상 제갈량을 신뢰하고 전권을 위임한다.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순수한 성격이다. 다만 겁이 많은지 마속은 한나라의 옛 수도인 장안으로 돌아가면 하후무처럼 겁을 집어 먹을 것이라고 평가했고 실제로 장안을 수복하고 한중으로 이어하자는 신하들의 청을 거절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위기에 둔감하기도 하여 오나라가 쳐들어 와도 귀찮다고 한중으로 몸을 피하자는 의견을 물리친다. 즉, 위기를 직감하면 겁을 많이 집어먹는데 그 위기를 잘 직감하지 못하는 것. 여담으로 은근히 아버지를 닮았는지 사람 보는 눈은 초능력 수준으로 좋은 듯. 마속에 빙의한 주인공을 보자마자 얼굴이 전과 달라진 거 같다고 해서 주인공을 식겁하게 하거나, 나중에도 주인공이 돈을 중시하는 성격을 간파해서 또 한번 뜨끔하게 한다. 중신들의 고충을 이해하는 모습도 있다. 또한 주인공이 접한 다른 황제가 중신들에게 술을 강권하는 손권이다보니 그냥 알아서 즐겁게 잘 먹고 노는 유선을 상대적으로 고평가하게 된다.[18]
그렇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말기에 간신에게 휘둘려 온갖 추태를 부린 실적이 있고, 중신들도 이 점을 우려해 주변의 인물상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다.[19] 장안이 차후 삼국 분쟁의 핵심지역이자 계한의 거점이 된 상황에서 가비능과 같은 유력 유목 부족장들이 암살당하는 사태가 계속 벌어지면서 유선 걱정에 불안해하는 중신들이 파견을 미룬다. 이후 동오가 배신하여 백제성을 공격하여 중신들이 동요하고 있음에도 백제성이 함락된 것도 아니고 마속이 교주로 간 게 오나라 뒷통수 예측하고 대처하러 간 거고 능력상 다 알아서 할 수 있으니 최악의 상황도 아닌데 뭘 당황하냐면서 여유로운 태도를 보인다.[20] 이후 결국 천도를 하게 되자 역시 하던 대로 도장은 찍어줄 테니까, 필요하면 부르라고 말하고 평상시대로 놀고먹으며 예술을 즐기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마속의 마지막 북벌에도 장완과 마속을 지지하여 적극 협조해 어림군을 보낸다. 특유의 성격이 제갈량, 장완, 마속, 비의 같은 명신들 덕에 장점으로만 발휘되어 명신들에게 맡겨놓고 노는 행적이 후대 신료들에게는 이상적으로 비춰져 제법 명군주로 기록될 듯하다.[21] 특히 동세대의 손권이 육손을 믿지 못해 죽인 것과 대비되어 더욱 비교될 듯하며, 마속이 육손을 죽이기 위해 꾸민 계획이 밝혀진다면 더더욱 비교될 것이다. 작품 최후반부에는 아예 북벌에 호위병 100명만을 두고 그 외에 모든 병력을 지원군으로 보내주는 과감함까지 기록되어 선조인 유비의 뒤를 이어 촉한을 안정시킨 수성군주 겸 범군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선조와 달리 인재를 찾아오는 능력이 있진 않지만 그걸 다 알아서 구해오는 마속에게 과감하게 고위직을 줘버렸으니 유선 또한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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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
유비의 차남이자 유선의 이복동생으로 작위는 노왕. 유비가 마속을 평한 말이 유영을 통해 위연에게 전해졌다는 언급이 있다. 그래서 제갈량도 이 사실을 알아차리면서 "노왕 전하께서요? 그런데 그때 노왕 전하께서는 어렸을 텐데 대체 어떻게 그 얘기를 기억하고 계신 건지...?" 라며 꽤나 당황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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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의
촉한의 주요 무장. 유비의 처남으로 위연과는 달리 차분하고 수비전에 강하다고 한다. 초반에도 위연과 함께 곽회를 패퇴시켰고, 전쟁마다 주요 군단을 이끌며 위나라의 경계대상이었다.[22] 1차 북벌에서는 위연과 같이 곽회를 크게 무찔렀고, 2차전에서도 조진과 학소와 진창성에서 대치하다가, 마속이 승전하고 지원 오자 전선으로 이동한 조진을 쫓아가 밀어붙이기도 했다. 군부에서의 입지나 실력으로는 제갈량 사후 군 통솔을 맡을 만했지만 외척이라서 후보에서 제외된다. 그래도 정치에 관여하지 않을 뿐 군부에서는 사실상 2인자에 가까운 장군이다.[23] 제갈량도 군부에서의 자신의 후계로 마속과 같이 언급했다. 중신답게 통찰력이 있다. 마속의 북벌에서는 나이가 있어서인지 언급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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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
마속 최대의 요주 인물. 그러나 능구렁이답게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아 잡지는 못하고 있다. 마속이 환관이 조정대신과 만나지 못하는 법을 추진시켜 아예 환관이 정치에 개입할 여지를 뿌리 뽑아버렸으며, 결국 역사와 달리 동윤이 죽은 뒤에도 권력을 쥐지 못했다.
1.3. 역대 재상
"저는 본디 의심이 많은 성품입니다. 주공께서 돌아가시기 전 저에게 나라를 차지하란 말을 하셨을 때 저는 주공께서 저를 믿지 못해서 저를 떠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주공의 말은 진심이셨던 것입니다. 항상 그랬습니다. 처음 주공을 만났을 때부터 그분은 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죽음이 다가와서야 그것이 저에게도 확실해졌습니다."
"제가 처음에 초려를 나설 때 제 형 제갈근이 이미 손권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저에게도 강동에 오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왜 주공의 뒤를 따르기로 마음먹었는지 아십니까?"
"오나라의 손권은 손씨 일족의 힘을 바탕으로 일어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외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으나 기실 동오 요직 곳곳에 손씨 일족이 기용되어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조조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험악한 난세에서 가문과 일족의 도움없이 대업을 이루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 주공만은 그런 뒷받침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아래에서 제가 아무 간섭없이 능력을 펼칠 수 있을 거란 계산을 했습니다. 물론 오로지 그 이유만은 아니었습니다만, 그 이유가 컸습니다"
"사실 주공 밑에 들어오기 전에는 주공께서 젊은 시절에 돗자리를 짰다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이미 주공은 좌장군에 예주목을 역임하셨습니다. 다른 군웅들에 비하면 덜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따르는 혈족이 있고 돗자리 이야기도 적당한 과장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주공 밑에 들어왔을 때 진짜 세상에 알려진 그대로라서 오히려 당황했습니다. 정말 주공 본인 외에 그 밑에 도움이 될만한 유씨 성의 친족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성이 다른 의형제인 관우, 장비에게 의지하고 조운, 간옹, 손건, 미축 같은 사람들이 근근이 세력을 끌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 제가 불쑥 끼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을 회상하는 제갈량의 얼굴에 그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닙니까? 주공 밑에 모인 우리들은 공통성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성도 다르고 제각각 고향도 달랐습니다. 주공의 친족들이 중심이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이런 집단은 도무지 오래 버틸 수 없는 것입니다. 조조나 손권처럼 뒷받침이 되어줄 막강한 혈족이 있고 영천군이며 오군의 지연으로 연결된 호족들의 지지를 받은 사람들도 난세를 뚫어내기 어려웠습니다. 주공 밑에서 그 사실을 깨달은 저는 일이 어렵겠구나 생각했지만, 왠지 모르게 주공을 떠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들이 끝끝내 버텨서 나라를 세웠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저 자신이 그 과정을 직접 겪었지만, 여전히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주공과 그 뒤를 따르던 우리들은 또한 고금의 역사를 둘러봐도 찾기 어려운 일을 이루었습니다. 당양에서 주공과 우리들은 조조의 추격을 당하면서도 우리를 따르는 10만의 백성들을 지키기위해 끝까지 함께했습니다. 세상의 어느 군사집단이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주공께서는 의형제인 관우 장군의 죽음을 친형제의 죽음처럼 슬퍼하며 군사를 일으켜 나아갔습니다. 저도 결국 무모한 선택을 하는 주공을 말릴수 없었습니다. 세상을 이런 우리를 미련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역사를 돌이켜봐도 우리처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뒤에 나올 후인들도 쉽게 우리들을 따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작중 제갈량의 유언 중 일부
"제가 처음에 초려를 나설 때 제 형 제갈근이 이미 손권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저에게도 강동에 오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왜 주공의 뒤를 따르기로 마음먹었는지 아십니까?"
"오나라의 손권은 손씨 일족의 힘을 바탕으로 일어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외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으나 기실 동오 요직 곳곳에 손씨 일족이 기용되어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조조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험악한 난세에서 가문과 일족의 도움없이 대업을 이루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 주공만은 그런 뒷받침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아래에서 제가 아무 간섭없이 능력을 펼칠 수 있을 거란 계산을 했습니다. 물론 오로지 그 이유만은 아니었습니다만, 그 이유가 컸습니다"
"사실 주공 밑에 들어오기 전에는 주공께서 젊은 시절에 돗자리를 짰다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이미 주공은 좌장군에 예주목을 역임하셨습니다. 다른 군웅들에 비하면 덜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따르는 혈족이 있고 돗자리 이야기도 적당한 과장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주공 밑에 들어왔을 때 진짜 세상에 알려진 그대로라서 오히려 당황했습니다. 정말 주공 본인 외에 그 밑에 도움이 될만한 유씨 성의 친족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성이 다른 의형제인 관우, 장비에게 의지하고 조운, 간옹, 손건, 미축 같은 사람들이 근근이 세력을 끌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 제가 불쑥 끼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을 회상하는 제갈량의 얼굴에 그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닙니까? 주공 밑에 모인 우리들은 공통성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성도 다르고 제각각 고향도 달랐습니다. 주공의 친족들이 중심이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이런 집단은 도무지 오래 버틸 수 없는 것입니다. 조조나 손권처럼 뒷받침이 되어줄 막강한 혈족이 있고 영천군이며 오군의 지연으로 연결된 호족들의 지지를 받은 사람들도 난세를 뚫어내기 어려웠습니다. 주공 밑에서 그 사실을 깨달은 저는 일이 어렵겠구나 생각했지만, 왠지 모르게 주공을 떠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들이 끝끝내 버텨서 나라를 세웠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저 자신이 그 과정을 직접 겪었지만, 여전히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주공과 그 뒤를 따르던 우리들은 또한 고금의 역사를 둘러봐도 찾기 어려운 일을 이루었습니다. 당양에서 주공과 우리들은 조조의 추격을 당하면서도 우리를 따르는 10만의 백성들을 지키기위해 끝까지 함께했습니다. 세상의 어느 군사집단이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주공께서는 의형제인 관우 장군의 죽음을 친형제의 죽음처럼 슬퍼하며 군사를 일으켜 나아갔습니다. 저도 결국 무모한 선택을 하는 주공을 말릴수 없었습니다. 세상을 이런 우리를 미련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역사를 돌이켜봐도 우리처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뒤에 나올 후인들도 쉽게 우리들을 따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작중 제갈량의 유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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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촉한의 모든 권력을 틀어쥔 승상.[24][25] 군사면 군사, 내정이면 내정, 정치와 예술까지 최상위권의 능력을 가진 역사적인 위인으로 마속은 잠재력을 개화하고, 미래인의 지식을 더하면 제갈량을 넘을 수 있지 않을까 하다가 미래의 일 몇 가지를 본인의 능력으로 순식간에 통찰해내는 사기적인 현안에 기가 죽었다. 사실 촉한의 수명 연장을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제갈량이 건강하게 장수한다면 좋겠지만, 제갈량은 딱히 의료 기술이 부족해서 죽었다기보다는 그냥 과로라서, 마속도 그쪽은 포기했다. 이미 주변에서 건강을 챙기라고 끝없이 말해도 듣지 않는다고. 일생을 한 황실의 부흥과 유비의 후계에서 충정을 다하는 것에 헌신하고 있으며, 휘하 사람들을 한계까지 몰아붙여서 어거지로 능력을 짜내는 데에 능하다. 본래부터 수십 가지 세밀한 계획을 짜고 움직이는 걸 선호하는 편이기도 하나, 마속의 평으로는 제갈량은 유비와 조조 등의 창업 군주들처럼 모든 것을 건 도박을 던지지 못했다고 한다. 유비가 맡겨준 한나라 부흥의 꿈을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압박감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듯 능력은 거의 완벽하지만 자신을 부려먹는 것에 대해 마속은 상당히 불만을 삭히고 있는데, 실제로 제갈량은 마속을 급할 때 이리저리 보낼 수 있는 인재로 보고 있다.
제갈량의 첫 번째 북벌이 가정의 역사개변으로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막판에 가정 인근에 농서태수 유초의 시신을 가지고 나타나 장합을 물러서게 한다. 사마의가 11만에 달하는 병력으로 총력전을 시도하자 촉한의 미래를 한 번의 야전에 걸 수는 없다는 생각에 마속이 총대를 메자 그걸 명분 삼아서 물러난다. 위나라의 16만 대군을 동원한 사로병진 반격에도 비단 주머니에 계책을 준비해 곽회를 속여서 마속과 강유가 승세를 잡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자신이 담당한 전선에서도 사마의와 심리전과 야전을 벌인 끝에 그를 격파하는 것에 성공한다. 모든 전선에서 승리하자 역공을 개시하고 익주+옹량의 총력을 동원해 말 그대로 위군 잔존병력의 저항을 정면에서 밀어버리는 기염을 토한다. 그러나 정작 장안을 앞두고 나타난 헌제의 마차에 의해 끝내 장안을 공격하지 못하고 퇴각한다.[26]
마지막 북벌에서는 사마의를 경계하다가 자신의 방식으로는 약점을 잡힌다 여기고, 휘하 장수들이 짠 계책을 자신이 억지로라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만들어서[27] 무시무시한 능력[28]으로 동관대전에서 사마의를 압도해 패퇴시키고 장안을 점령하여 마침내 한나라의 수도를 수복한다. 그러나 제갈량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었고 결국 역사대로 234년 가을에 세상을 떠난다. 장안으로 진군하던 중 마속이 기지를 발휘해 만들어낸 쌀 튀밥 눈을 바라보다 삼고초려 때를 회상하며 조용히 숨을 거두는데, 작가가 공을 들여 묘사한 것도 있어서 촉빠들의 심금을 울리는 명장면이 되었다. 제갈량의 죽음은 실제 역사에서 그랬듯이 삼국 구도의 격변을 가져온다. 후대에는 중흥사걸[29]로 칭해지며 훗날 관윤이 그가 남긴 흔적들을 보면서 자만심을 완전히 버리게 되는 등, 사실상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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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완
원래 비의와 더불어 마속과 유난히 친분이 깊은 친구 사이.[30] 마속과도 자주 어울려서 마속의 집에도 자주 찾아와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간다.
이후에 군부에 비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 행정관료로 꾸준히 일하다가 제갈량의 첫 번째 후계로 지목되어 대사마에 취임한다. 처음 후계자로 지명됐을 때는 상상도 못한 탓에 당황하나, 이때 마속이 나서서 직접 제갈량의 지명을 받은 장완을 차기 최고 권력자로서 추대해줬기에 쉽게 자리잡았다.[31] 이때 마속이 앞장서서 자신을 추대하며 예를 갖춰주는 모습에 그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며 "유상"이라고 부르다가[32] 결국 마속을 비롯한 장수들의 군례를 받아들이고 이 모습을 제갈량이 흐뭇하게 바라본다.[33]
촉한 사람들은 제갈량을 숭상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 작품에서 장완은 제갈량의 죽음 이후 제갈첨을 '도련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유달리 그 정도가 심한 걸로 나온다. 그래서 제갈량 유족들의 생계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34] 다만 한 가지 고증 오류가 있는데 장완은 원래 제갈량 사후 상서령에 임명되었다가 대장군이 되었고 곧이어 승진해 대사마가 된 것이다. 물론 역사가 달라진 만큼 승진 코스쯤이야 달라질 수 있다고 치고 넘어갈 수 있는 사소한 사항.
마냥 사람 좋아 보이지만 그래도 괜히 제갈량의 후계자가 아닌지 마속이 친 동오파로 여겨지지만 실제론 반 동오파인 걸 통찰했고, 마속은 그런 장완에게 육손 실각 이간계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 육손과 잠시 회담을 나누어보고 바로 육손의 사람됨을 알아보아 마속의 의견에 더욱 찬동하는 걸 보면 그 역시 제갈량 밑에서 쌓은 짬이 어디 안 가는 듯하다. 또한 마속이 친구인 장완을 제갈량의 후계자로 임명될 때, 집정이라 부르면서 지지선언을 해 앞장서서 밀어줬듯이, 장완 역시 마속의 공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고 공식적인 포상은 아니더라도 자신만은 안다며 친구로서 마속의 마음을 감싸주며 우정을 보여준다.
대규모 야전에 나서면서 마 유상이 있다면 든든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한다. 마속의 오나라 전선 출전을 강유와 장완에게 정치적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것으로 착각하고[35] 미안함에 병력의 여유도 있겠다 그가 부탁한 지원군을 지체없이 보내준다. 결단력도 있어 조예 사후 북벌을 할 때 조상의 엉터리 진형을 보고 위군의 실력을 알아 위군의 함정을 의심한 다른 장수와 달리 정확한 판단을 해 위군을 포위섬멸한다. 유비가 마속에게 내렸던 평가에 대해서는 제갈량 사후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세히 나오지는 않았지만 장완이 오의 배신이 마속의 예상대로 벌어지자 마속을 신뢰하면서 오의 공격에도 철군하지 않고 홍농을 공격할 때, 자신처럼 자기 잘난 맛에 빠졌던 흑역사 시절을 거쳐서 성장했다고 생각하고 있다.[36] 그리고 제갈량을 떠올리면서 서로에 대한 믿음을 다짐하며, 홍농을 끝내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비의와 마속의 공에 따른 승진과 작위에 고심한다. 후계자인 비의도 3만이 넘는 대군을 몰고 열심히 싸웠지만 마속의 공적이 너무 컸기 때문. 그러나 마속이 출세에 심드렁한 상태라[37] 대장군 자리를 비의에게 양보하며 적당한 자리만 달라고 하자 계속 은혜만 받는다며 감격하고 표기장군 직을 내린다.[38] 장완이 마속에게 고마워하는 것은 당연한데 당장 군부에서는 제갈량 사후에 마속더러 후계자가 되는 것이 어떠냐고 부추기는 이들도 있던 것을 생각하면 그런 권력을 지니고도 양보를 반복하는 마속의 행보가 친구로서 고마울 수밖에 없다. 물론 마속도 과로사하기 싫은 것도 있지만, 위나 오처럼 내분으로 개판되지 않도록 권력다툼을 막기 위해 믿을 수 있는 능력자이자 친구들인 장완과 비의에게 힘을 실어서 몰아주는 것이다. [39]
이후 마속에게 제갈량의 1차적 목표를 이룬 상황에서 오와의 동맹 결렬로 융중대도 깨졌는데 혹시 제갈량이 향후를 위해 준 비단 주머니 같은 것이 없는지 묻는다. 당연히 장완 자신부터 그런 게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을 아는 마속은 놀랐으나, 사실 원 역사대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지푸라기라도 짚는 심정으로 물어본 것. 그 후 자신의 병에 대하여 대외적으로 털어 놓는다. 아무 말도 없이 떠난 제갈량이 원망스러웠다고.
이후 장안 권역이 계한의 것으로 굳어지기 시작할 때에는 병세가 깊어 비의에게 인수인계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마속의 북벌에 장안 일대에서 예비 전력을 긁어모아 지원을 온다. 이에 계한군의 사기는 상승했고 그 결과 승리를 거두게 된다. 4차 북벌의 결과 하남윤, 하동군, 하내군 그리고 남양군의 일부를 수복하고 병사한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이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독단으로 위나라와 화친을 맺는다. 또한 비의 이후의 후임이 누가 좋을지 유선이 사위인 제갈첨을 보내서 묻자, 그때와 달리 나라가 안정되어서 후임을 지명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한다. 이제야 승상을 뵙겠다며 눈을 감고, 이후 중흥사걸로 기록된다.
이후 장안 권역이 계한의 것으로 굳어지기 시작할 때에는 병세가 깊어 비의에게 인수인계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마속의 북벌에 장안 일대에서 예비 전력을 긁어모아 지원을 온다. 이에 계한군의 사기는 상승했고 그 결과 승리를 거두게 된다. 4차 북벌의 결과 하남윤, 하동군, 하내군 그리고 남양군의 일부를 수복하고 병사한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이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독단으로 위나라와 화친을 맺는다. 또한 비의 이후의 후임이 누가 좋을지 유선이 사위인 제갈첨을 보내서 묻자, 그때와 달리 나라가 안정되어서 후임을 지명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한다. 이제야 승상을 뵙겠다며 눈을 감고, 이후 중흥사걸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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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주인공이 마속에게 빙의한 후 장완과 함께 살갑게 지내는 사이. 사교성이 뛰어나 비단 주인공 뿐 아니라 여러 인사들과도 두루두루 친한 사이로 주인공도 위연과 양의와 같이 자신이 껄끄러워하는 상대를 만날 때 그 친화력을 활용하고자 반드시 데리고 간다. 또한 마속이 다 가기 싫어했던 대오 사신을 자처하고 그 뒤 은거한 것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40] 없는 시간 쥐어짜서 서천산악회도 꾸준히 참가했으며 마속이 정계 복귀에 도움을 줄 것을 부탁하자 곧바로 도와주는 등 사실상 마속 라인이라 봐도 무방한 인물이다. 재상이 된 것은 작품이 완결나는 화에서 된 것이라 더더욱. 실제로 마지막 화에서 마속이 은퇴할 때도 전쟁이 날 때 마속이 없으면 어쩌나하고 불안해하는 것에서 본인도 나름 능력이 있음에도 전쟁에 관해서는 마속에게 상당히 의존하고 있다.
단점이 있다면 안전불감증이 크다는 점인데 가비능 등 북방 이민족 족장들이 조위의 공작으로 암살당하자 주인공 포함 다른 관료들은 호위를 늘리고 경비 태세를 강화하는데 혼자만 전처럼 하인 하나만 데리고 홀가분하게 돌아다닌다.[41] 이에 마속은 비의가 바둑을 좋아한다는 것을 이용해 바둑기사를 가장한 경호원을 두고 철로 만든 접히는 바둑판을 경호용 무기로 선물하는 편법을 쓰게 된다...[42]바둑Knight은근히 촉한을 다스리고 싶어하는 야망이 있었고, 결국 제갈량의 지명에 의해 장완과 함께 제갈량의 후계자가 된다.
동오를 경계해야 한다는 마속의 조언에도 그들이 천하를 도모하려면 지금 칠 것이 누구인지 알면서 계한을 배신하겠냐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43] 마속은 결국 독자적으로 움직이며 대오 방어선을 준비하게 된다. 비의는 익주의 병력을 다시 모아 북진해 장안에서 북벌군과 합류한다. 이후 상용성을 지키던 장익을 지원하며 장완의 군대가 홍농을 장악할 때까지의 시간을 벌어주는데 성공한다.[44] 이후에 스스로 대장군의 자리를 나눠갖기를 거부하고 표기장군으로 물러난 마속의 양보 덕에 대장군 자리에 오른다.[45] 수년 후 북벌을 준비하는 마속이 찾아오자 그와 바둑을 두며 대화한 끝에 마속의 북벌을 지지해주기로 하고, 마속이 출격한 사이 상용에 쳐들어온 오나라군의 공격을 방어한다.
낙양 함락이 성공한 후에 장완이 병으로 죽고 난 후, 대장군으로서 계한을 이끌어나가다가 마속이 은퇴를 청하자[46] 전쟁을 대비하여 남기를 바라면서 만류한다.[47] 그러나 마속은 이미 밑천도 다 빠졌고, 이제 강유 등이 잘해줄 것이며, 당분간 큰 전쟁은 없을 것이라며 은퇴를 요청하자 익주목으로 임명하며 중앙 정계의 은퇴를 받아들여준다.[48] 중흥사걸로 기록된다. 아무래도 마속의 본편의 이야기가 사실상 끝난 시점에서 재상이 되었다보니 중흥사걸 중 작중에서 가장 업적이 적게 나온 편이었는데, 마속이 은퇴한 이후에도 재상으로서 조정을 이끌어가며 내정을 잘 꾸려간 모양.[49]
1.4. 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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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윤
FM에 충실한 성격으로 근무 중 바둑을 두던 마속과 비의를 조정에 근무 태만으로 상소를 올려 녹봉을 깎아 마속에게 비호감을 산다. 중신의 기강을 잡으며 제갈량도 탄핵하려 했었다. 마속이나 비의나 우리는 할 일은 다 했다고 하면서 꺼리는 사람이지만, 사람 좋은 황제인 유선과 합쳐져서 기적적으로 좋은 시너지를 낸다. 황호에 대해서도 마속이 찾아오기 전부터 이미 경계하고 있었으며, 이후 마속과 함께 환관이 조정 중신들과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추진시킨다. 동오가 배신하며 6만명에 달하는 대군단으로 백제성을 공격하자 관료들의 동요를 억제하면서 유선의 담대함에 감동하며 성도를 지킨다. 시중으로 장안천도 전에 혜릉 참배를 지휘한다. 이 세계관에서는 마속이 계한의 사걸에 들어가게 되면서 사영 혹은 사상으로 꼽히던 동윤은 밀려나게 됐다. 물론 동윤의 성격상 본인이 칭송받게 기록되고 촉한이 망한 실제 역사보단 작중의 결말을 더 좋아할테니 나름 해피엔딩일지도...? 원 역사처럼 병사하여, 이제 동윤도 없다며 마속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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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유지
전형적인 문관으로 1차 북벌에서 보급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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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촉한의 중신. 1차 북벌 중 가정에서 승리한 마속을 못마땅히 여겨 위연과 함께 마속의 공적을 깎아내린다..[50][51]행정에서 활약하는 유능한 중신이나 역사대로 위연과 사이가 안 좋아 사사건건 대립한다. 마속이 낙향했다 돌아온 이후 서막 토벌을 명받자 계기 삼아서 마속에게 명을 떠넘기고 자신의 당여로 끌어들이려 한다.[52] 제갈량 사후 원 역사에서의 계한군 퇴각 지휘를 마속이 하게 되고, 대립하던 위연이 장렬히 전사함으로 양의의 평은 급격히 하락하였고, 여전히 익주에서 중군사 고위직을 역임하고 있기는 하지만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걸로 시간을 때우고 있다고 한다. 비의와 마속이 놀러왔을 때도 장완 뒷담을 깠는데, 다행히 마속과 비의가 이런 쪽에는 너그러운데다가, 계한이 상당히 여유가 있는 강국이 된지라 그냥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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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엄
제갈량과 더불어 촉의 유이한 탁고대신. 촉의 원로로서 그만한 능력을 가진 중신이지만 너무나도 능력이 출중한 제갈량에게 밀리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정치를 통해 세력을 모아보려 한다. 동관대전 당시에는 마충과 함께 위수 방면에서 진격하며 활약을 펼쳤으나, 제갈량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드디어 자신에게도 기회가 왔다며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진군하며 위군을 격파하지만 제갈량 역시 이엄의 이러한 행태를 예상하고 있었기에 미리 마속을 파견하여 소환 명령을 내리자, 이에 불응하며 마속을 억류하려 하는 등 제갈량이 죽을 때까지만 버티려 하다가 결국 오의와 마충에게 체포되어 실각한다. 같이 종군하던 아들 이풍은 이엄의 부하 병졸들까지 이엄의 체포를 묵인하는 것을 보자 칼을 버리고 "저는 아버지를 막아 보려고 했습니다."라며 바로 포기했고, 그 후 제갈량의 지시대로 이풍은 별 일 없이 이엄의 군대 지휘권을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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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예
촉한의 사금중랑장. 세금 관련 총괄자인만큼 국내 호족들이 굉장히 싫어한다. 마속은 장예가 제갈량의 후계가 되는 날에는 앞장서서 반란을 일으켜 주겠다고 이를 갈았을 정도. 경제정책의 달인이며 예산을 절약하는데 몰두하여 마속의 연금도 깎아버려서 마속이 미워하였다.[53] 다만 반은 행정관이기도 한 마속과는 자주 어울려서 국무를 처리했으며 같이 형주의 육손을 만나러 가기도 했었다. 일명 장금이. 마속이 천수 태수가 되자 직속상관인 량주 자사가 되어[54] 량주를 관리하며 마속조차도 감탄할 정도의 뛰어난 내정 능력을 발휘해 전쟁 피해를 복구한다. 여기서 옹량주의 구리 화폐유통이 잘 되지 않아 답답해하는 마속에게 처음에는, 비단과 구리그릇으로 시작해서 구리의 가치를 보전해주며 화폐를 퍼트리는 방식을 알려준다.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 직전에 병사한다. 그가 죽은 후 마속은 그를 미워했으면서도 아쉬운 마음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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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련
촉한의 사염교위로 소금을 담당하고 있으며 마속의 연금을 깎는데 일조하여 마속이 미워한다. 일명 왕소금. 사실은 225년에 죽었기 때문에 제갈량의 북벌 때는 나오면 안 되는 사람인데 나와 버렸다. 작가의 고증오류. 위나라의 사로 공격 당시 촉한 재정상 십수만 대군을 다시 운용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기에 제갈량에게 세율을 높이자고 제안했다가, 직백오수전을 형주에서 유통시켜 형주 물자로 재정을 보충하자는 결론을 낸다. 이에 엿듣다가 잡혀버린 대오 전문가 마속과 같이 형주로 향한다. 형주로 가는 길에서 열심히 육손을 설득할 논리를 준비했으나, 정작 육손과 한 자리에 서자 겁먹어서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마속이 고생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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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병
마량의 아들로 마속의 조카. 옹주의 현령이 되지만, 전선 국경지의 업무가 갓 임지에 부임한 신참이 하기엔 너무나 힘든 일인지라[55] 나름 버티고 버티다가 한계에 도달해 엄마한테 "집에 가고 싶어요ㅠㅠ" 하는 편지를 보냈다. 덕분에 마속은 형수님이 찾아와서 우리 마병이 좀 중앙에 복귀시켜달라고 울며 매달리는 광경을 봐야 했다. 초임부터 그런 험지에 갔으니 이해 못할 일도 아니지만, 형수님 말대로 마병을 복귀시켜버리면 앞으로 관직생활에 있어 지대한 애로사항이 꽃필 것이 뻔했고[56] 마침 제갈량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마속이 아끼는 형의 조카인 마병을 도와준다는 핑계로 옹주의 천수 태수로 부임하게 된다. 마침 북벌의 전장이던 옹주를 복구하기 위해서 장예가 옹주 자사가 되었는데, 여전히 안정되지 않은 전선지역인 옹주에 군사능력이 없다시피 한 장예를 보내놓으면 안심할 수가 없었던 재상부가 기쁘게 받아들여 보내준다.[57] 마속이 옹주에 부임해 계속 조언해준 끝에 제법 우수한 현령이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현령이 되었을 때, 마속은 현령으로 뽑히는 건 쉬운 게 아니고 마병의 능력이 그 정도로 특출난 건 아닌데? 라며 의아해하나 그 진실이 다름아닌 평정심 때문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촉한의 내로라하는 권력자들인 장완, 비의 등과 마주한 각지에서 올라온 후보들은 긴장감에 떨지만 마병 입장에선 숙부인 마속의 집에 술 마시러 놀러오는 숙부님 친구 아저씨들이었기에 자주 보던 사람들이라 익숙해서 편한 마음으로 시험을 치른 것.[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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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막
1차 북벌을 성공시킨 제갈량을 경계하라고 유선에게 막말을 하지만 유선은 듣지 않는다. 원 역사에서도 그랬듯이 대놓고 막말러로 관리 면접을 보러 온 황숭에게 기회를 주지만 곧바로 너네 아버지는 배신자라며 몰아 붙여 황숭이 도망치듯 나가게 해버린다. 이 모양을 본 마속이 속으로 촉한에서 제일 이상한 사람이라고 할 정도. 결국 제갈량이 죽은 후에 마속이 승진 기념 연회를 열었는데 사람 좋은 비의와 동행해서 그 연회에 참석하던 중 "제갈량은 선제의 신임을 받아서 전횡을 일삼았으며 장안을 탈환하고 바로 죽은 덕분에 충신으로 죽을 수 있었다."라는 말도 안 되는 망언을 해버려서 장완과 마속에 의해 남만으로 유배형을 당하였다.[59] 그나마 공적인 자리에서 그런 막말을 하지 않아서 목숨을 유지했으니 나름 다행인 셈. 원 역사에서는 유선 앞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가 격노한 유선에 의해 투옥에 이어 살해당하고, 생전 화 한번 안 내던 온화한 유선이 이렇게 폭발했으니 한동안 촉한 정계는 완전히 얼어붙었으며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삼덕들에게 주제 모르고 막말한다며 욕먹고 있다.
이후 교주와 형남에서 마속이 여대와 육윤과 맞서는 동안 남중에서 사무를 처리할 사람이 없어 임시로 맡은 업무를 잘 처리하고 유배 동안 그 성격도 많이 죽었을 것이라고 여긴 마속이 그를 유배에서 해제하지만 유배에서 풀려나자마자 막말[60]을 하는 변함없는 모습을 보인다. 이에 마속은 교주에 보내버릴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유배를 풀자마자 다시 보내는 것은 뭔가 아니라서 포기한다. 돌아와서는 마속의 집에 머물며[61] 투머치 토커 나헌과 자기자랑꾼 왕준에 대한 제어장치 역할을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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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진
촉한의 원로대신. 원 역사에서는 말년에 위태로운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는 생각에 오나라에 간 대오 전문가이지만, 본작에서는 전쟁에도 이겨서 나라가 급한 불은 끈 마당이라 마지막 명예를 위해 손권의 칭제 축하사절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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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지
손권 칭제 축하사절을 거부한다. 이후 장완의 북벌에 참전하고, 사마의가 아들 사마사를 보내 황권의 부고를 알리면서 휴전을 제안하자 황권의 아들 황숭과 함께 조문 겸 사신으로 위나라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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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몽
광한태수. 나헌의 아버지. 마속의 나헌 발탁을 승인해준다. 사실 마속은 당시 이미 촉한에서 한손에 드는 권신인지라 그 권신이 직접 자신의 아들의 후견인 역할을 해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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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옹
장안으로 진격하던 중 헌제가 등장해 촉한 군영이 혼란에 빠지자 성도에 사신을 보내 결정해야 한다며 주장한다. 논리는 타당했지만, 전형적인 문관의 논리였기에 위연에게 반박당한다. 이후 장예와 같은 시기 부고 소식이 전해진다.
1.5. 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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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
70세의 노인[62]이 된 촉나라 군부의 원로. 1차 북벌에서도 약체로 이루어진 2만명의 군단으로 위나라의 주력군을 상대로 유인전을 펼쳤다. 상산도 기주라서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명목상의 기주 자사[63]가 된 마속에게 친밀하게 대하다가 노환으로 위독해진다. 죽기 직전 그에게 청공검[64]을 맡기면서 조금이라도 나라를 위해 움직이고 싶어지기를 바란다고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65] 마속은 그가 맡긴 청공검을 조운의 아들들에게 돌려주려 했지만, 아들들은 아버님이 그러신 이유는 분명히 있을 것이라며 받지 않았다. 비중은 적었지만 마속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어, 마속은 자기의 목숨도 걸어야 하는 작전을 시도해 성공하면서 조자룡이 남긴 말대로 해주었다고 되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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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연
촉한의 주요 무장. 장합과 곽회 같은 위나라의 맹장들과도 수만 대군을 몰고 자웅을 겨루는 용장이지만 욕심이 많고 정치에 어두운 것이 단점. 그럼에도 제갈량의 후계자가 되고 싶다는 욕심을 부리고 있다고 한다. 본인은 제갈량과 동년배인데도 7-80세까지는 산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다고 한다. 1차 북벌에서 공을 세운 마속을 견제하는 등[66] 사이가 좋지 않다가[67] 마속이 친오인사로 낙인 찍히며 후계 자리에서 멀어지자 나름 친해지려 시도는 하지만 마속이 은근 거리를 두고 있다.[68] 1차 북벌에선 곽회가 장합을 응원하러 가던 증원군 1만여 명을 패퇴시키고 위의 반격전에선 장합을 상대로 열세에도 아득바득 버티며 오의, 강유 등의 지원과 제갈량의 사마의 격파로 상황을 뒤집는 것에 성공한다.
동관대전에서는 동관 방면에 참전. 호전적인 성격 탓에 굉장히 모험적인 마속 일행의 전술에 매우 만족해하며 열정적으로 임한다. 이후 사마의와의 야전에서도 선봉에 서서 싸우다가 마속이 장합에 의해 위기에 처하자 마속을 구하기 위해 장합에게 달려들었고, 끝내 장합과 동귀어진한다.[69][70]
이 때 평소 그가 근자감에 가까울 정도로 과감한 전략을 내세운 이유가 드러나는데 하급 장수 출신이었던 자신을 태수로 임명한 유비[71] 가 이릉대전의 패전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죽고 난 후 제갈량마저도 침체될 정도로 다운된 촉한의 분위기를 주공인 유비가 알아줬던 자신의 용기로 바꾸고 싶었다는 속사정이 있었다.[72] 원하던 죽음은 아니었지만, 마 유상은 아직 젊으니까 나 대신 나라를 위해 뛰어주리라 생각하고, 마지막에 전투가 어찌되었는지 결과를 보지 못해 주공인 유비에게 결과를 말해줄 수 없어 아쉬워 하다가 승상이라면 이길 수 있을 거라 믿으면서 장안을 함락시켰다고 주공에게 말하자며 생각하다 죽는다. 이 장면은 제갈량의 죽음과 함께 촉빠들의 심금을 울리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사후 계한 내에서 영웅이 되어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실제 역사와 연의에서는 반란군으로 불명예스러운 최후를 맞이한 것과 다르게 큰 수혜자가 된 인물 중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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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
촉한의 주요 장수. 원 역사에서 사실상 촉한 최후의 불꽃으로 취급받았던 명장으로, 제갈량을 존경하며 사병들과 소통하는 자상한 성격이다.[73] 뛰어난 천재성을 가진 용장이지만 지나치게 호전적이라는 단점도 존재한다. 마속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이로 인한 실수가 터졌을 수도 있고, 제갈량도 이를 미심쩍어한다. 그래도 과감성 하나는 인정할 만한지라 북벌에서도 주요 장수로 활약하며 특히 제갈량의 통조림 멤버로도 뽑혔다는 점에서 성장이 기대되는 장수 중 한 명이며, 작품에서도 사실상 왕평과 함께 마속의 주요 전쟁 파트너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74] 첫 등장은 칭제를 한 오나라에 사신으로 간 것으로 승상부에서 쫓겨난 마속이 인수인계를[75] 한 후임으로 등장했다.
위나라의 사로 침공에 맞서서 마속과 함께 곽회를 물리쳤고, 이 뒤에는 과감한 진창성 공격을 제시하거나 위연을 지원하는 등 첫 출전임에도 후세의 명장다운 솜씨를 발휘한다. 이후 동관대전은 물론 마속의 병주 원정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이를 기점으로 계한 군부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한다. 애당초 마속이 교주에 손을 쓴다면서 일부러 사직을 청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역할인 강유가 성장할 때까지의 가교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했기에 가능했으며 장완이 주도하는 4차 북벌의 핵심 주력군을 담당해 장완과 다른 계한 장수들과 함께 조상의 대군을 섬멸한다.
그 후 선비족이 거병해 계한국경을 어지럽히자 2만 기병을 이끌고 공세에 나선다. 진나라를 위기로 몰았던 독발수전의 능력에 고전했지만 마속이 이끌고 온 보병의 팔진도로 선비족을 패퇴시킨 후 마속의 강력한 의지에 추격을 개시해 독발수전을 죽이고 독발부를 멸망시킨다. 이즈음 위장군으로 승진하게 된다.
마속이 마지막 북벌을 계획하기 위해 왕평 다음으로 찾아간다. 여기서는 원 역사에서 계한 말기 북벌을 전담했던 것에 반해, 이제는 병사들을 위해서라도 전쟁을 그만둘 때가 되었다며 진지하게 반전 정책을 언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속은 놀라면서도 이미 충분할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고 현상유지할 능력은 충분하지만 패배한다면 쌓아온 것을 상당히 잃게 되니까 강유라도 의견이 바뀔 수 있다고 납득한다. 하지만 마속의 능력과 나라를 위한 헌신을 수십 년간 몇 번이나 본 전우인 강유였기에 마 표기라면 성공할 것이라고 납득하고 마속, 왕평과 함께 12만 대군의 본군 지휘관을 맡아 마지막이 될 북벌에 참전한다. 이후 마속의 작전을 따라 진군 속도를 한계까지 높여서 사마의가 끌고 온 위나라 주력군에게 타격을 입히고 낙양성 전투에서도 왕평과 함께 북망산의 사마의 본군을 상대하는 선두에 선다. 결국 낙양을 수복하고 이어 벌어진 오나라의 전쟁에서도 비의와 함께 맞서 남양군 북쪽을 지켜내었다. 마속이 은퇴한 이후 군부의 원로로 활동했다. 마속이 은퇴하면서 강유를 대표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나오는데, 왕평마저 병사한 이후에는 사실상 군부의 최고위로 대우받으며 오의-마속-왕평에 이은 군부의 사실상의 수장격으로 존경받으며 말년을 보냈다. 특히 마속이 은퇴할 때, 걱정하는 비의더러 강 백약이 잘 해줄 거라고 말하는 등 군부에서는 은퇴했으나 여전히 압도적 위상을 지닌 마속이 후계자로 공인해줬기에 사실상 마속의 뒤를 이은 군부 최고 권력자가 됐던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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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
가정 후방 지역의 열류성을 지키던 촉한 장수. 삼국의 맹장들에게는 상대도 안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일군을 맡음직한 장수로 인재 부족인 촉에서는 우수한 장수라고 한다. 제갈량이 사전에 가정이 떨어지면 열류성도 시간 문제이므로 가서 도울 것을 명해두었고, 덕분에 당장 달려가서 마속과 같이 분투했다. 덕분에 제갈량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텨낼 수 있었다. 정치에 관심이 있는지 마속에게 연줄을 대보려 하지만 마속의 뜻이 거기에 있지 않음을 보고 그만둔다.[76] 다만 마속 덕에 승진에 성공했고, 마속 역시 다소 속물적이지만 일은 열심히 하는 고상을 싫어하진 않았기 때문에 마속과의 관계는 좋은 편이며 마속의 마지막 북벌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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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충
유비가 찾아낸 마지막 인재로 남중에 파견나가 있는 걸로 언급되며 마속 역시 사령관급 인재로 인정한, 능력이 뛰어난 인물. 실제로 북벌이 진행되어 남중에 부담이 가중될 때도 별탈 없이 잘 다스린 것에서 그 능력이 드러난다. 그 뒤 2차 북벌 준비에 마속, 왕평, 강유와 함께 제갈량의 통조림 멤버로 들어와 대위 전략을 짜며 장안 함락에 큰 공을 세우며 제갈량이 유언으로 군무를 맡길 인물 중 한 명으로 지목하며[77] 앞으로도 계한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릴 인물이 되었다. 마속이 총대장이 되어 출진한 마지막 북벌에서도 중군의 참모로 참전하고, 낙양 전투에서 마속의 참모장으로 있다가 장완의 보조로 허락이 떨어지자 출격해서 다른 장병들과 힘을 모아 사마사와 제갈탄을 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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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익
마충이 성도로 올라가면서 교대로 간 남중에서 융통성 없이 법규대로만 해결하며 호족들과 마찰하다가 유주의 반란을 직면한다. 그러나 역사대로 충실하게 군수 물자를 마련한 덕에 진압군으로 내려온 마속이 유주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위나라의 사로 침공에는 요화와 같이 사마의를 상대하다 밀리나 제갈량의 참전으로 역전에 성공한다. 이후 마속의 이민족 구출작전에 참여한다. 3차 북벌 당시 융통성이 없는 그였기에 아직 오나라의 배신을 전혀 몰랐는데도 군기에 충실하게 오나라군의 국경 침범을 철저하게 막았고, 이어 몰려온 오나라 대군을 상대로 상용을 지키며 상용군 전체를 계한의 영역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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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대
제갈량의 1차 북벌 후 량주에서 저항하던 자사 서막을 토벌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서막의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전에 고전한다. 이에 파견된 마속과 함께 서막을 공격하여 공을 세운다. 이후엔 서랑의 안정을 위해 남는다. 그 뒤 동관대전에서 길안내 및 동관을 수비하는 역할을 맡아 제갈량이 올 때까지 위군의 공세를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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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화
선비족과 함께 초원길을 타고 관구검에 잡힐 뻔한 마속을 구원한다. 위군의 사로 침공 당시엔 장익과 함께 사마의를 상대하지만 역부족으로 밀린다. 그러나 이는 사마의를 간파한 제갈량의 계략이었기에 그 뒤를 받치러 나온 제갈량의 원군과 같이 사마의를 격파한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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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반
오의의 친척 동생. 제갈량의 부관으로 그를 신봉한다. 제갈량의 2차 북벌에서도 그를 보좌하며 팔진도를 지휘했다. 위연의 전사 이후에는 위연의 부대를 수습해 위군을 크게 무찌른다. 제갈량의 사망 이후에는 마속에게 지금 촉한의 모든 군권을 쥐신 셈인데 권력이 탐나지 않으시냐고 묻는다. 북벌 성공 이후 동관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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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촉한의 정서장군. 원로 장수로 조운이 죽고 얼마 안 가 세상을 뜬다. 그의 부대인 백이군은 마속이 물려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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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억
마충의 천거로 군부의 중추를 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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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익
마속의 남중행에 동행한다. 형주와 교주를 맡은 서막을 보좌한다. 하나 같이 문제가 있는 다른 마속의 부하들과 달리 좋은 집안에서 탄탄한 경력을 쌓았기에 왕준의 질투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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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총
촉한 어림군의 수장으로 오나라의 침공 때 병으로 오늘내일하여 요양 중이라고 언급이 된다. 그 언급 이후로 수년은 지났으니 사망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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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후패
본래 조위의 황족이자 장수로, 업도로 천도하고 최전선이 된 낙양을 맡는다. 주인공은 원 역사처럼 사마의의 반란이 일어나 하후패가 배신하면 단번에 천하통일 상승세를 탈 수 있다고 판단한다. 하후패 역시 이미 사마의가 정권을 잡은 시점부터 조위는 멸망한 거나 다름없다 생각하면서 심란해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마속이 보낸 극정이 찾아와 귀순하라는 제안을 건네고, 결국 평생 사마 가문의 변덕에 가문의 운명을 걸 것이냐는 질문에 응해 계한의 편에 서기로 하고 황실의 인척 대우를 받으리라고 약조를 받는다.[79] 다만 낙양에는 하후패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력이 크지 않았기에 낙양성 전체를 넘기지는 못했고, 대신에 낙양 인근의 군사 요충지와 진지들 상당수를 무혈입성하게 도와주고 길잡이 역할을 맡으며 낙양 외벽이 뚫리고 시가전이 벌어지게 하는 것에 큰 공을 세웠다. 넘어온 3천 명의 가병들과 함께 조용히 있었지만 전투의 승패가 결정될 수준이 오자 마속에게 예비 병력을 쓸 때라고 청원하고 직접 군을 이끌고 사마 가문의 깃발이 있는 사병들을 공격하는 것에 앞장선다.
진태와의 대결에서는 자신을 배신자라고 매도하는 진태에게 조상이 살해당하고 지금의 위나라가 어찌 되었냐며 반박하고 같이 사마의를 잡자고 설득하나 그쪽도 사마의처럼 자기 안위를 위해 배반한 것이 아니냐는 진태의 재반박에 기세가 죽는다. 이후에도 진태에게 끝까지 귀부를 권하나 거부당하고, 사마의를 잡는 것에는 실패한다. 그래도 마속이 언급한 것처럼 원 역사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막강해진 계한에 투항했으니 원 역사보다는 좀 더 안락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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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윤
에필로그에서 등장한 관우의 증손자이자 관흥의 손자[80]. 마속 사후 20여 년이 지나 사마씨가 조씨를 몰아내고 진을 세우자 반감을 가진 관동의 호족들이 계한에 내통했고, 손호의 폭정으로 오 역시 진을 구할 여유가 없자 계한은 관윤을 평북부도독으로 임명해[81] 25만 대군을 이끌고 총공격을 감행해 진을 멸망시켰다. 관윤은누가 자존심 괴물 관우의 핏줄 아니랄까봐처음에는 중흥의 사걸로 평가받던 제갈량, 장완, 마속, 비의를 무시하며 8개월 만에 기, 유, 청, 연, 예, 서주를 제패한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다가, 오나라 정벌을 위해 관윤이 익주자사로 전임되었는데 잔도를 지나면서 이 길을 통해 10만 대군을 움직인 제갈량에게 놀랐고, 익주 경내로 들어서서 제갈량이 만든 도강언을 보자 술자리에서도 제갈량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다. 관윤이 익주에서 배를 만드려고 했는데, 마속이 은퇴생활을 즐기면서 심은 나무들이 30년 동안 크게 자라나 목재를 조달하기가 쉬웠다고 한다. 이후 성도의 노인들을 모아서 잔치를 열었다가 마속이 쌀과자 가게를 열어주었던 부하인 팽경에게 마속과 자신을 비교하면 어떠냐고 물었다가 팽경에게 "마 환후는 미래를 내다보시는 분입니다."라는 대답을 듣고 불쾌해했다. 하지만 출진 전에 마속이 세웠던 유상사를 본영으로 삼아서 군사를 점검할 때 유상사의 승려가 마속이 죽기 전에 오나라와 전쟁이 나면 전해놓으라면서 맡겨놓았던 낡은 주머니를 받아 열어보고 장강의 지도와 "오인들이 궁지에 몰리면 쇠사슬로 장강을 막을 것이니 이를 대비하라"라는 말을 보고 매우 놀라게 된다. 마속의 조언을 바탕으로 양직, 독발수기능, 문앙, 마륭을 거느리고 20만 대군을 이끌어 오나라를 멸망시키자 대장군에 임명되고 5천 호의 식읍을 받지만, 자신은 공을 세운 것이 없다면서 식읍을 중흥의 사걸의 후손들에게 주려 했으나 이들 또한 거절해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유족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관윤 역시 사걸을 존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1.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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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향
마속의 부인. 흑발 생머리의 미녀로 마속에 빙의한 주인공은 어쩌다 곽향과 하룻밤을 보내고는[82] 그냥 현대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가정에 충실한 부지런한 현모양처지만 전쟁터에서 고생하다 왔다면서 종일 드러누워 빈둥대려고만 하는 주인공을 타박하지도 않는 대인배. 결국 주인공도 민망해서 생활 태도를 성실하게 바꾼다 이후 마속이 워낙에 이곳 저곳 불려다니느라 등장이 별로 없다. 이는 작품에서 히로인의 비중을 크게 두지 않는 작가 특성 때문인 듯하다. 늘그막에는 천거를 바라는 손님이 너무 많이 밀려와 마속에게 힘들다고 하소연하는데 이 덕분에 마속이 과거제도 같은 시험을 만들게 되었으니 어쩌면 역사에는 중요 인물로 남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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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통
조운의 장남.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 조운의 유품인 청공검을 마속이 가져야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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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주
태학의 권학종사[83]로 북벌 성공으로 한적불양립을 내세우며 동오와의 단교를 외치는 학생들을 통제하느라 애를 먹는다. 동오의 배신에 당황하며 한중으로 파천하기를 간언한다. 4차 북벌 후 장완이 병사하자 마속이 삼공 중 하나인 사도가 되기를 주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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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평
비단장수로 마속의 오나라행을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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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원
제갈량 휘하에서 일하는 대장장이로 마속의 부탁으로 산악장비들을 만들어준다. 게다가 이걸 제갈량에게 보고해서 촉한군을 산악전 전문가로 탈바꿈시키는데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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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부인
제갈량의 아내. 나이가 나이인지라 할머니 모습으로 등장. 기록에 의하면 추녀였다고 하나, 주인공이 그의 외모에 별다른 코멘트를 달지 않은 걸 봐서 그 정도는 아닌 모양. 아니면 현대 기준으로는 나쁘지 않은 정도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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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첨
제갈량의 늦둥이 아들. 제갈량이 죽은 후 거의 아이돌 같은 대우를 받으며 그 와중에 마속이 만든 튀밥이 제갈첨이 만든 것으로 와전되기도 했다. 마속은 이에 언짢아 하면서도 제갈첨이 그림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이용해 서막의 그림을 보여주며 친분을 쌓은 뒤 향후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
마속을 마 아저씨라고 부르는데, 주인공은 아저씨 소리에 충격을 먹고 내심 형님이라 불러주길 바란다. 실제 마속의 나이가 제갈첨의 아버지뻘이라 아저씨 소리는 어쩔 수 없고, 사실 빙의 전 현대 기준으로도 주인공은 대학생이었고 또 삼국시대에서 수년을 지내며 알맹이도 사회인 나이대로 레벨 업을 했으므로 어린애한테 형님 소리를 들을 연배는 한참 넘어갔다. 동오의 배신에 당황하던 성도로 돌아와 서막과 마속의 분전을 알리며 민심을 다독였다. 훗날에 유선의 딸과 결혼해 부마가 되었다. 제갈첨의 아들인 제갈상은 군부에 들어가서 자리를 꿰찼지만 능력은 별로여서 관윤에게 찍소리도 못했다고 한다. 진 멸망전에 나갔을 때도 매복에 걸려 말아먹을 뻔하다가 관윤에게 구원받아 관윤이 중흥사걸을 깎아내릴 때도 반박을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후대에는 제갈량의 후손들은 능력이 없다고 주목을 받을 듯하다. 제갈첨은 원 역사에서 제갈량의 아들이란 이유로 좋은 일만 생기면 제갈첨이 한 일로 여겨지는 등 특별 대우를 받았고, 여기서도 마속의 튀밥 저작권을 강탈하여 마속이 드물게 분노하는 일이 발생했다. 타인의 시점에서 볼 때면 공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며 권력에 초탈한 마속이 드물게도 분노한 일이니 주목받을 가능성이 크다. 역시 타인의 시점에서 볼 때 나헌 같은 어린 장수도 재능을 알아보고 키우는 인재 보는 눈이 뛰어난 마속이 제갈첨에게는 일절 군략을 가르치지 않고, 그림만 가르친 것을 보면서 마속이 아버지의 후광으로 계한의 아이돌 취급을 받지만 제갈첨의 무능한 실체를 알아보았다고 평가될 가능성이 크다.너무 뛰어난 아버지와 무능한 아들 사이에서 무능함을 부각받게 된 제갈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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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경
마속의 부하로 동관대전에서 다리를 잃은 후 마속의 도움으로 가게를 열지만 마속이 만든 튀밥이 제갈첨이 만든 거라는 소문을 장사를 위해 통제하지 않아 마속의 분노를 산다. 마속은 가게 짓는 데 도와준 돈을 회수한다며 펄펄 뛰어서 팽경을 겁먹게 했다.높으신 분께 찍히며 위수 지역 장사는 끝장이다구순까지 장수했으며, 익주자사로 부임한 관윤이 자신과 마속을 비교하며 어떠냐고 하자 마속은 미래를 내다 보았다고 평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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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
역사서 정사 삼국지의 저자. 본편에는 사실상 나오지 않고 에필로그격인 마지막 연재분에서 17~18세의 소년으로 등장. 초주의 제자이며 유명한 역사가에게 자기 홍보를 하려는 마속이 식객으로 받아주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돈도 후원해준다. 익주목이 된 마속을 따라 등산을 하면서 나무를 심을 때, 마속이 그 동안 겪은 일을 이야기하는데, 가정 전투에서 패배했다면 역사가 바뀌었다는 말에 의아해하며 동관대전이나 낙양대전이 더 중요하지 않겠냐고 말한다. 그리고 익주에 내려온 것이 아쉽지 않냐고 묻고, 장안에 계속 머무르다가 군사를 일으켰다면 위와 오를 모두 멸할 수도 있으셨을 거라고 말한다. 물론 마속은 가정에서 산에 오르다 내려왔기에 살았다며 부인한다.
이후 정사 삼국지의 마속전을 쓰면서 마속이 자신에게 귀중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줬는데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하다가 역사를 쓰며 지난 100년을 살펴보니 마속의 말이 모두 옳다고 평한다.[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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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촉한의 건국자이자 초대 황제. 작중 시간대가 시간대이니만큼 과거 회상으로만 등장한다. 위연이 죽어갈 때 한 회상에서 한중 공방전 이후 위연에게 조조가 한중에 쳐들어오면 어쩔 거냐고 묻고, 위연이 조조를 짓밟아버리겠다고 호기롭게 대답하자 지금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이 위 문장의 용기라며 단순 병졸이었던 그를 한중 태수로 임명한다. 위연도 유비가 부하들에게 건들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위연 자신이 했던 고생을 다 살펴보고 있었다는 것에 매우 감동했다.
작중에서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이기에 등장하지는 않으나 촉한의 건국자답게 간접적인 영향력은 실로 막대한 수준으로, 장완이 병주의 이민족들을 구원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도 유비가 당양에서 10만의 백성을 버리지 않았음을 언급하며 무모할 수도 있는 구원 요청을 받아들였을 정도이다. 마속 역시 무슨 죽은 유비가 산 마속을 조종하는 거냐며 황당해했을 정도. 제갈량이 죽기 직전 삼고초려를 회상할 때도 익히 알려진 것처럼 지극정성을 들여 본의 아니게 이미 유비에게 출사하기로 했었던 제갈량의 마음을 확실히 얻기도 하는 등 여러 인물들을 통해 그 존재감이 확실하게 언급되고 있다. 심지어 마속을 중히 쓰지 말라는 유언조차도 역사서에는 마속의 대오각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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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
유비와 마찬가지로 시간대가 시간대이니만큼 과거 회상으로 등장한다. 그 성격 때문에 자꾸 갈등을 일으키던 위연을 못마땅하게 여겨 직접 불러다가 무인이라도 학문과 책을 가까이하는 것이 좋다고 충고했다. 정작 위연은 관우도 춘추 한 권만 수십 년째 파고 있을 뿐이 아니냐며 시원찮게 여겼지만 상대가 관우인지라 차마 대들지는 못했다. 에필로그에서는 관우의 증손인 관윤이 등장해 진나라와 오나라를 차례차례 평정한다. 원 역사에서처럼 양번을 함락하지 못하고 형주에서 오나라에게 배반당해 죽었지만, 수십 년 뒤 자신의 후손이 양번을 무너뜨리고 형주를 평정한 뒤 오나라를 멸망시켰으니 끝내 한풀이를 한 셈.
2. 동오
삼국 중 장강 평야에서의 강남 지역에서 호족 연합 정권으로 이뤄진 국가( #1, #2 ).초반부 촉나라의 배에 가까운 국력을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육군이 따로노는 호족의 사병들이란 한계상 촉한이나 위에 비해 정예화가 덜 되어있다. 그래도 수군은 삼국제일. 이 세계관에서는 동맹국 덕에 나름 이득을 본 케이스인데 원 역사에서는 실패했던 요동 원정 성공과 고구려와의 통교, 2차 북벌에서 양번을 점령하고 상용을 계한과 갈라먹는 등의 원 역사와 다른 팽창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를 경계하여 마속이 손권과 육손의 사이를 이간질시켜 육손이 분사하면서 서서히 망조가 들어가는 중.
오나라의 인재진을 말려버린 재앙이던 이궁의 변이, 육손의 이른 죽음과 제갈각의 적극적인 권력 투쟁 시작, 요동 문제로 인한 사성 귀족과 손패파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계속해서 먼저 일어나는 중이다. 그러던 중 위나라 측에 대부분의 병력을 투입한 촉한의 배후를 공격하여 촉오동맹은 파기된다. 하지만 마속의 예측으로 수성전에 일가견을 보이는 나헌에 의해 백제성에서 진격이 막히고, 촉한의 수비군이 빠르게 집결해 기습의 이점을 거의 잃었다. 더불어 서막과 왕준을 동원한 국력의 중요한 요지인 교주에서 반오 운동이 조직되어 반란이 일어났으며 토벌군조차 역으로 패하여 지배권을 상실한 상태고 마속은 형남으로 진격 중인 상태. 이렇듯 동맹을 배신하고 침략 행위를 벌였음에도 얻은 것은 없고 오히려 영토는 잃어버려 명분과 실리 둘 다 잃어버렸다. 게다가 패전의 책임을 두고 각 파벌들이 정쟁을 하고, 손권도 자신의 책임을 피하고자 패전한 장수들을 처벌하려 하기에 혼란한 상태다.
그렇게 수년을 지내다가 결국 마속의 마지막 북벌에서 사마의가 패하면서 어부지리로 치열한 전쟁 끝에 남양군 일부를 얻게 된다. 다음 세대를 이은 손호의 폭정으로 나라가 마비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가 계한의 20만 대군에게 멸망한다.
2.1.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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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
오나라의 황제. 술을 좋아하고 변덕스럽기가 한도가 없어서 상대하기 피곤한 인물. 황제가 되겠다는 욕망에 전쟁준비를 못 하는 바람에, 한오동맹을 초장부터 어긋나게 만들었다.[85] 마속이 전해준 폭탄주[86]와 회오리주에 반하여 이후로 연회 때마다 신하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오나라는 변한 것이 없이 합비에서 막히고 있는지라 어떻게든 군사 부분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촉과의 동맹을 배신할 것이란 추측이 지배적이다. 촉오위 대부분의 인물들은 손권의 용인술을 높게 보지만,[87] 마속은 그 옹졸한 인간성을 직접 보게 된다.[88] 주유, 노숙, 여몽처럼 뛰어난 군부의 실력자들이 전부 10년도 못 채우고 죽어서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나마 주인공의 조력으로 공손연을 명목상의 동맹으로 만들고 고구려와도 통교한데다, 촉이 장안까지 점령하면서 육손도 양번을 함락시키고 상용까지 진출해 촉과 상용을 나눠먹는 등 실제 역사보다는 상당히 세력이 넓어져서 당장 배신하기보다는 계속 합비에서 막히는 자신과 다르게 승승장구해서 양번을 점령하는 등의 공을 세워 입지가 높아진 육손을 점차 견제하게 되고, 주인공 역시 이 견제를 이용해 육손을 실각시킬 계략을 짠다. 요동 정벌은 손권 혼자만 좋아라 하고 대신들 대부분이 반대한 작전이었는데, 이걸 마속이 단기적으로는 엄청난 성과[89]가 나지만 장기적으로는 유지비로 돈이 줄줄 새는 방향으로 애매하게 성공시켜 놓고 오 조정을 철수파 vs 유지파로 갈라지도록 유도해 이궁의 변 요동 ver.을 만들어 버렸다.
결국 마속의 계책에 말려들어, 오나라 최고의 명장 육손에게 질책 편지 수백통을 보내 홧병으로 죽게 만드는 희대의 트롤링을 저질렀다. 게다가 이를 두고 자신을 책망하는 제갈근에게 양심 하나 찔리지 않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행보를 보여 제갈근도 사실상 손권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90][91] 게다가 과거 주유가 계획했던 천하이분지계에 대한 미련[92]을 가지고, 계한이 조위와 벌인 대전에서 크게 압도하자 결국 대군을 동원해 현재 관중에 있는 계한군의 생명줄인 한중의 보급로와, 유선이 있는 성도를 노리기 위해 상용과 백제성을 동시에 노린다.[93] 그러나 사태를 예견한 마속의 안배로 완전히 실패했으며 오히려 애써 병합했던 교주와 형남이 털리고 마는데 손권은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이에 대한 책임을 돌릴 희생양을 찾고 있다. 노신 장미는 이로 인한 화병으로 이미 병사했고, 다른 군부 인사들 역시 하나둘 유배되거나 실각한다.
배신과 패전의 여파로 이궁의 변의 전조가 보일 정도로 큰 정쟁이 벌어졌으나, 낙양대전에서 승리한 계한군을 상용을 통해 공격. 남양군에서 치열하게 다투다 분할해 영토를 확장하면서 간신히 권위를 세운다. 역사가 크게 달라져 마속으로 인해 나라가 크게 흔들리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황태자 손등이 사망하자 삼황자 손화를 태자로 책봉해 후계를 정리하여 진짜 이궁의 변은 일으키지 않은 채 사망했다.[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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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
손권의 손자이자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95] 즉위한 뒤로 끊임없이 원 역사에 버금가는 폭정과 사치를 벌여 오나라를 사실상 파탄국가로 만들었고 그 결과 사마씨의 서진을 멸한 뒤 익주에서 장강을 따라 진군한 관윤에 의해 오는 허망하게 멸망한다.
2.2. 역대 대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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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손
오나라의 대장군. 오군 사대명가 중 최고인 육가의 가주이자 가문 내에서 정예한 사병만 5천명 이상을 양성한 장군. 촉의 북벌을 위한 형익병진 전략에 반드시 필요한 형주를 점령하고 이릉대전에서 촉의 인재풀을 거의 말려죽여버린 걸물로 촉에 있어서는 증오스러운 대원수지만 손권에 비하면 이성적인 대화가 통해서 한오동맹이 멀쩡히 굴러가기 위해서는 육손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육손은 마속이 계속해서 오나라를 엿먹이려고 얕은꾀를 쓴다고 생각하여 마속을 은근히 압박하고 있고,[96] 마속 역시 나름대로 한오동맹을 위해서 힘을 쓴 것인데 공연히 의심부터 하는 육손에게 예전부터 이를 갈고 있었다. 거기다 육손이 제갈량의 죽음을 틈타 양번을 함락하고 상용으로 진군하려다[97] 죽기 전에 이미 육손의 행동을 파악한 제갈량의 유언을 받든 마속에게 가로막혀 결국 한오간에 상용을 둘로 나누는 조약을 맺게 된다. 이 때문에 마속이고 육손이고 서로에게 좋은 감정은 없는 상황이다.[98]
오나라의 육군은 촉과 위에 비하면 약체지만, 육손에 한해서만큼은 어림도 없는 이야기라고 하며[99][100] 사실상 촉의 제갈량, 위의 사마의와 함께 삼국을 대표하는 최상급 인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마속은 육손을 어떻게 하지 못하면 위나라보다도 위협적일 것이라면서 그를 제거할 계책을 준비하는데, 안 그래도 요동을 지배하는 것에 반대하여 손권의 심기를 거슬렀는데 마속의 계책[101]에 걸려 더더욱 손권을 압박하는 모양새를 취한다. 그러나 손권의 인간성을 간과하고 있던 육손에게 날아온 건 하루마다 오는 2~30통의 질책 편지와 육가 주변인들의 곤혹이었다.[102] 이에 장휴 등이 일단 도독의 인수를 반환하고 1년 정도 죄를 청하고 요양하라고 조언하지만 육손은 육손대로 절대로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고 버티다가 결국 이로 인해 홧병으로 죽고 만다.[103] 마속은 육손의 죽음 이후 이제 오나라에서 자신을 압도할 적장은 없다고 판단하고 교주에 책략을 시행하게 된다.
말로 자체는 태자 문제로 직언을 올리며 마찰했다가 맞이한 실제 역사와 유사하나 그 시기는 실제 역사에서보다 훨씬 더 빨라서 사망 당시엔 50대에 불과했다. 마속은 자신이 평생 사람을 잘못 봐왔다는 회한이 그의 수명을 단축시킨 게 아닐까 생각하며,[104] 단순히 실각 정도로 끝날 줄 알았던 일이기에 살짝 죄책감을 느꼈다.[105][106]
사후에는 오나라 최후의 명장 중 한 명이던 아들 육항이 겨우 10살이어서 스스로 가문을 관리할 능력이 안 되었기에 손권과 원로들의 손에 가문이 돌봐지게 된다. 또한 정봉과 전종 등의 인물들이 장례식장에서 대놓고 여론 조작을 하는 등 죽음조차 오나라의 정치에 이용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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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
육손 사후 다음 대도독에 오른다. 군사적 능력으로 치면 주연도 촉과 위의 네임드 못지 않은 장수지만, 이미 육손의 비참한 사망으로 오나라 정계와 군부의 상태가 맛이 간 상태라 스스로의 배경이나 상황이 육손보다 못한 상태. 그후 백제성을 치지만 나헌의 연설을 들은 후 학을 떼며[107] 백제성을 공격하나 예상과는 다르게 백제성이 잘 버텨 당황한다.[108] 이에 자신이 백제성을 뚫지 못한 책임을 추궁당할까 육윤에게 책임을 돌리려 마속을 공격하라고 독촉한다. 그리고 결국 육윤이 무모한 공세 끝에 마속에게 대패해 마속이 교주를 장악하고 형남까지 진출하자 이를 빌미삼아 형주를 지키기 위해서 철통방어 중인 백제성에서 후퇴한다.[109] 어떻게 패전의 책임을 벗었는지 이후 계한과 위나라의 전쟁을 기회로 상용을 다시 공격해 대치중이라고 언급된 뒤 출연 종료.
2.3. 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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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오나라의 노신. 손책 때부터 오나라의 내정을 담당했다. 무익한 전쟁을 반대하는 소신이 있으나 적벽대전을 반대한 전력으로 손권에게 연회 때마다 괴롭힘을 당해 연회를 매우 싫어한다. 마속이 건업에 다시 오자 폭탄주 건을 따지고, 마속이 요동 원정을 제안하자 격렬하게 반대하지만 결국 이를 막지 못한다. 이후 원 역사와는 달리 마속의 공으로 요동 원정이 잘 풀리고 고구려에서 사신이 오자 기분좋아진 손권에 의해 연회에서 또 다시 시달림을 당한다...[110] 나이가 많은지라 후에 병사해 장례식이 치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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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옹
오나라의 승상. 장소와 달리 전혀 술을 마시지 않는데다 오의 대호족인지라 연회에서 손권에게 괴롭힘 당하지 않는다.[111] 그래도 당하는 모습을 앞에서 생중계로 보는지라 멍때리긴 하지만... 그랬기에 고구려에서 온 사신 밀우가 오나라 황제가 어르신을 잘 모신다고 극찬하자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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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온
전쟁에서 패한 손권이 체면치레를 위해 촉나라와 기예대결 이벤트를 벌일 때 사신으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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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오의 태상으로 고위직으로 유유자적하게 살고 싶었으나[113] 요동에 사신으로 가게 되자 마속을 비난한다. 조울증인지 뭔지 요동 원정 동안 원체 징징대고 감정이 시시각각 바뀌는 모습을 보이는지라 마속은 물론 오나라 사람들까지 언짢은 모습을 보이는 게 압권. 마속의 작전으로 중원을 우회하다시피 하며 공격해온 강유와 서량의 기병들 덕에 요동과 동오의 군대는 대승을 거뒀고, 이에 손권의 명령대로 마속을 납치하다시피 동오로 끌고가려 했지만, 미리 눈치를 챈 마속이 강유와 합류해 탈출해 실패한다. 10년 후 오의 배신을 예상한 마속의 교주 거병으로 모든 것이 어그러지자, 손권의 책임 떠넘기기로 궁에서 온종일 무능한 매국노라는 등 심한 모욕을 당하는 수모를 받는다. 본인 역시 한 명은 죽어야 오나라의 친 계한 파벌이 손권의 화풀이를 피할 수 있다고 직감하고, 삶의 미련을 버리고 병상에 눕는다. 얼마 후 집에서 손권을 달래는 유언을 남기고 점쟁이가 자기는 귀인 덕에 수명보다 10년은 더 살 거라고 그랬다면서 사망한다.[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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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안
오의 집금오. 마속과 함께 요동에 사신행을 가게 된다. 교주가 계한에게 붙고 나서, 10여 년 전에 마속과 친하다는 이유로, 장미와 같이 손권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 온갖 모욕을 당하자 참다못해 전부 손권의 명령에 따른 것뿐이라고 항의하려다 장미가 제지했다.
2.4. 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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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근
오나라의 상장군. 제갈량의 형. 촉한과의 외교를 담당한다. 동생 제갈량에 비해 군사적 기량은 대단치 않으나 내정, 외교적으로는 뛰어난 인물로 오촉동맹을 위해 힘 쓰고 있다. 주인공에 의하면 의외로 얼굴이 그리 길지 않다고 한다. 그냥 자기 동생처럼 깔끔하게 생겼지, 누가 말상이라 언급을 안 하면 티도 안 날 정도라고. 다만 근엄한 분위기인 동생과 달리 푸근한 인상이라 한다.[115] 동생 제갈량이 죽었을 때는 오의 상용 점거를 위한 계략인 듯 묘사되면서도 동생의 죽음에 대해 진심으로 크게 슬퍼하며 눈물을 흘린다. 이후 등장이 없다가 육손의 장례식 때 등장. 계한에 사신으로 와 육손의 장례에 마속이 참석해달라고 요청한다.
육손이 죽을 때도 육손에게 미친듯이 편지로 폭격을 날려대는 손권을 필사적으로 설득하려 했으나 결국 육손의 죽음을 막지 못하고,[116] 그의 죽음을 슬퍼하다 아들인 제갈각이 야심을 보이자 너 때문에 우리 가문이 망하겠다며 한탄하는 등 이리저리 휘둘린다. 이후 마속과의 술자리에서 이러한 심적 피로로 인해 술을 마셔대며 육손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알려주고는, 마속에게 여동생들[117]이라도 계한에 이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귀국 후에는 사적인 공간에서 자기 측근들만 모아놓고 정치를 하는 손권의 행보와 동맹의 파기를 보고 불편한 기색을 보이나 대놓고 반대하지 못한다. 그 후 이 전쟁마저 실패로 끝나자 심로와 병이 겹쳐 정계에서 은퇴했다.[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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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직
대만원정이 실패하여 처형당할 뻔하나 마속에 의해 목숨을 건져 요동행을 하게 된다. 요동에서 촉이 보낸 유목민 기병의 기습으로 관구검을 대패시켜서 간신히 도망치게 만드는 대승을 거두고 마속에게 훗날 요동에서 다시 위기가 온다면 써야 할 조언이 담긴 비단 주머니를 받는다. 이후 계한에 올 때마다 마속을 만나지만 마속이 오의 동맹 파기를 눈치채고 미리 선수를 치면서 다시 정치적 위기가 온다. 이 때문에 육윤을 따라 교주에서 여대를 격파한 마속과 대치하고 마속에게 투항을 권유받으나 거절한다. 전쟁이 끝나고 마속에게 진 책임을 지고 위온, 육윤과 함께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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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온
대만원정 실패의 책임으로 처형당할 뻔한 것을 마속에 의해 구출되어 요동행을 하다 마속과 함께 고구려를 방문하여 왜곡된 기록을 남긴다.[119] 육윤과 제갈직을 따라 교주에서 여대를 격파한 마속과 대치하고 역시 마속에게 투항을 권유받으나 거절한다. 전쟁이 끝나고 마속에게 진 책임을 지고 제갈직, 육윤과 함께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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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각
제갈근의 장남. 북벌 문제로 육손을 만나려는 마속에게 기밀을 알려고 한다며 따진다. 제갈근이 아들을 꾸짖고 물리지만 사실은 아들의 코치대로 움직이며 철면피 신공을 시전한다. 그 뒤 육손이 죽자 숙이려는 아버지와 반대로 오히려 야심을 드러내며 그로 인해 제갈각이 네가 우리 가문을 망치겠구나라 말하지만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후 스스로 정치세력을 만들고 나이가 든 아버지를 대신해 정계에서 활동한다. 손권의 동맹 파기를 지지해 대군을 이끌고 상용으로 진격한다. 도착하기 전에 미리 오군에게 실수를 가장해 국경을 넘으라고 시키는 등 모략을 꾸몄으나 상용에는 이미 군기에 충실한 장익이 있었기에 진격은 막혔으며 비의가 끌고 온 수만 대군과 맞선다. 비의를 얕보았으나 기본적 군재는 가진 비의를 상대로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을 벌였고, 양군 모두 수천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다. 결국 강유를 비롯해 계한의 군세가 증가하기 전에 철퇴한다. 이에 국가의 체면조차 버리고 두 나라가 협공까지 했는데 계한에게 패퇴한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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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달
수군을 이끌고 요동원정군에 지원군으로 가서 공손연을 위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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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
80대 노장이지만 마속의 사주로 교주에 반란이 일자 직접 일군을 이끌고 진압하러 온다. 하지만 교주의 반란이 마속의 사주를 받은 것은 알지 못한 상태에서 반란을 빠르게 마무리하기 위해 가느다란 진형을 펼쳐 반란군을 포위하려 하나 마속 휘하의 촉군에 의해 진형의 양익이 꽤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그래도 어느 정도 진형을 수습해 반란군을 계속 유인 공격하며 후퇴할 틈을 만들려고 하지만 포위의 실패로 우익의 병사들이 지친 것을 포착한 왕준의 돌격으로 양익이 돌파당하고 중앙까지 공격당해 병력의 반을 잃는 패배를 당하고 자신은 오군의 후퇴를 위해 버티다 사로잡힌다. 마속은 향후를 위해 그를 살려 두려 했지만 교주 호족들의 강력한 요구에 그를 참수하게 한 뒤 사지를 찢어 교주 각지에 보내게 한다.[120] 여담으로 포로로 잡혔을 때 먼저 배신한 것은 자신들이면서 마속에게 왜 배반했냐며 매도하고 나중에는 아예 아몰랑 상태까지 가서 마속은 그냥 교주 호족들이 하자는 대로 해야 했다는 후회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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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
제갈각과 상용 공략에 나서나 실패하고 후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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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윤
마속의 계한군 1만과 동맹을 맺은 교주 조국달 세력이 봉기해 여대를 격파하는 등 사태가 심각해지자 백제성의 7만 대군 중 1만 5천명 가량을 나누어 달려온다. 정치적 입지가 불안해진 제갈직과 위온을 데려와 대치 중. 마속의 이간계도 개의치 않는 대범한 모습을 보여준다. 장기전이 될수록 교주 현지의 세력들이 조국달과 계한에 붙을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단기전이 급한데, 나헌이 있는 백제성의 철통방어를 믿는 마속은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장기전을 마음먹은 상태. 결국 전쟁이 잘 풀리지 않아 시간만 허비하자 교주와 형남을 상실할까 걱정한 오나라 조정과 백제성을 뚫지 못한 책임을 돌리려 한 주연과 전종의 압력으로 불리한 위치에서 공격을 하게 되고 패전해 도망친다. 독자들은 이제 패전 책임을 뒤집어쓰게 될 육윤을 동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들이맞아 마속에게 진 책임을 뒤집어쓰고 제갈직, 위온과 함께 유배되었다.
다만 어찌 보면 수혜자일 수도 있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숫처녀인 조구의 공세를 막지 못해서 물러나게 하려고 병사들이 홀딱 벗고 춤추는 섹시코만도 짓까지 하는 민망한 꼬라지였지만 여기서는 조구와 만나지도 않아 체면은 지켰다.
2.5. 손패파
기존의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요동 문제에서부터 손권편을 들고 있다.-
전종
동오의 숙장이자 손권의 사위이며 충신. 손권의 명령으로 7만 대군을 몰고 백제성을 공격하면서 첫 등장. 나헌이 주연의 항복 권유에 기나긴 연설로 화답하자 알아채고 공격을 권유한다. 그러나 나헌과 백제성 계한군의 방어는 굉장히 건실했던 탓에 공세는 실패가 확정되자 '그때 이야기는 끝까지 들을 걸 그랬다'면서 의기소침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른 장수들과 머리를 맞대고 전력을 다했으나 가망이 없어보이자, 육윤을 희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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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즐
전종과 같은 손패파의 멤버. 장소가 노환으로 죽고, 제갈근도 심로와 병으로 쓰러진 이후 오나라 정계의 중심이 된다. 오나라의 목적인 권역 수호와 강국 견제에 충실한 신하로, 손권의 사실 정치회의에도 참가한다. 기록관이 나헌을 속여 후퇴에 성공했다고 기록하는 것을 보고 안도한다.
2.6. 오국팔절
촉한이 북벌에서 성공을 거두고 잘나가자 오나라가 땡깡(...) 삼아 기예 대결을 펼치려 촉을 찾아온다. 8가지 기예 중 해몽과 관상은 대결하기 어려워 제외되고, 기상예측과 산술은 촉이 이겼다고 나오나 묘사되진 않는다.-
황상
오나라의 서예가로 촉과 대결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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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
오의 천문관으로 촉과 대결해 이긴다. 천문은 본토인 촉한이 이길 줄 알았던 마속은 크게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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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불흥
오나라의 화가로 촉과 그림대결을 펼친다. 촉의 화가들은 조불흥의 그림을 보고 기권할 정도로 뛰어났지만, 마속이 서막의 그림을 가져와 깨뜨리는 데 성공한다. 다만 당시 촉에게 감금당해 있던 사정까지 겹친 서막의 그림이 워낙 훌륭했던지라 쿨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결과에 승복하는 모습을 보였다.[122]
3. 조위
하남 평야의 대부분과 하북 평야, 관중 분지를 차지하여, 삼국 중 압도적인 국력을 가진 강국( #1, #2, #3). 촉과 오가 그나마 위나라와 엇비슷한 싸움이 성립했던 시기는 적벽대전부터 한중 공방전까지의 시기밖에는 없지만 오나라가 촉을 뒤통수치면서 시간을 가지게 된 위는 압도적 국력을 바탕으로 우위에 섰다.그러나 촉의 북벌에 연달아 당하면서 세수도 인구도 적지만 군사적 요충지인 옹주와 량주를 빼앗겨 촉의 영토와 운신 범위가 크게 늘었고 유목민들과 요동 방면까지 적으로 돌아서면서 다면 전선이 형성,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의 유지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결국 장안과 양번을 각각 촉과 오에 빼앗기면서 삼국지는 위나라 압도에서 제대로 된 삼세력 승부 판도가 그려지고 만다. 그럼에도 151화까지 진행된 작중에서도 촉과 오가 힘을 합쳐야 승부가 되는 막강한 국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빼앗긴 장안과 나머지 영토를 되찾기 위해 대전을 준비중이다. 이를 위해 지난 전쟁에서 여러번 변수가 되었던 병주의 이민족들을 대거 토벌하는 중이나, 이 과정에서 손속도 가리지않아 촉의 원군과 다시 충돌하는 등 전초전이 벌어지고 있다. 내부에서는 난세시엔 유능한 군주였던 조예와 그 충신들이 하나둘씩 노환이나 전사, 병사 등의 악재로 사라지고, 이제는 사마씨 가문이 득세할 수 있는 상황. 그러나 연이은 패배로 수도인 낙양 지척까지 위험해져서 여유가 없다.
오나라가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근시안적 안목과 수군에 비해 약한 육군(육손 제외), 촉나라가 불리한 전력과 제갈량의 신하란 한계상 모험을 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면, 조위는 너무 엄격한 군율과 경직된 정치판이란 분위기로 장수들에게 자비가 없다는 단점이 있다고 한다.[123] 또한 우연이기는 하지만, 황제들의 2대에 이은 짧은 수명과, 뒤를 이은 황제 조방의 어린 나이로 황권이 약해지고, 제갈량 같은 신하가 없어 정치적 혼란이 격화되고 있다.
그러다 결국 조상이 운하 시설을 감독하러 간 사이, 사마의 일파가 임시수도인 업을 공격해 조상파를 쓸어버리고 원 역사대로 위의 정권을 장악했다. 마속의 마지막 북벌군 12만명을 상대로 대등 이상의 전력을 끌고 맞서지만 내부의 갈등으로 전력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전황을 보인 끝에 패배하고 낙양과 사예주마저 빼앗긴다. 사마의는 온갖 대전에서의 연전연패로 위신이 크게 깎였지만 다른 군부 장수들이 전사했기에 대항할 사람이 없어 더욱 강력한 정권을 구축하고 서진을 세운다. 그러나 이십 년이 지나 황위를 계승받은 사마염은 결국 패배해 멸망한다. 사마의가 원 역사와 달리 전쟁영웅의 권위가 없다보니 반발하는 세력이 더욱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3.1.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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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
위의 2대 황제. 제갈량의 1차 북벌 시기엔 제위를 이어받은지 얼마 안 된 젊은 사내였기에, 전쟁이 길어지고 장안이 위협받자 자신의 황권이 동요하는 것을 걱정해 장안까지 직접 달려와 전쟁을 지휘할 정도로 과단성이 있으며 군사적 능력도 있어서 촉한의 2차 북벌시기에도 직접 친정해 역시나 친정을 온 손권의 군대를 박살내버린 인물이다. 제갈량 사후엔 조비가 생전에 지명한 탁고대신인 조진, 조휴, 진군, 사마의가 죽거나 은퇴하거나 패배의 책임을 지고 유배를 가서 모두 조정에서 물러나고 촉한이 한나라의 옛 수도 장안을 탈환해 낙양까지 칼을 들이미는 상황에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고 촉한을 상대하기 위해 국력을 기울여 전쟁 준비를 진두지휘 하고 있어 촉한 중신들이 위협감을 느끼는 상황이다. 게다가 위나라 각 전선에서 위군이 패배하는 와중에도 조예가 친정한 합비 전선은 위군이 손권을 격퇴했기에 조예의 위상이 원 역사보다 높아지기도 했다. 이러한 부분은 실제 역사에서 난국시엔 유능한 군주였던 조예의 면모를 보여주는 셈이다. 이후 병에 걸려 쓰러지는데, 이때 자신이 제일 신뢰하던 사마의가 자신의 죽음에 따른 혼란을 전제로 한 오와의 동맹이라는 계책을 세웠음을 깨닫고는, 충신이라면 주군의 죽음까지 이용해 계획을 짤 수 있겠냐며 섬뜩해한다. 때마침 사마의를 경계하라는 조진의 유언까지 떠올려 사마의를 부르려 하나, 이미 늦어 말을 할 수 없게 된 뒤였기에 그대로 쓰러져서 병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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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방
조예의 후계자. 그러나 혈통 불명의 양자라 조위의 불안정을 부채질했다. 즉위 초에는 조상의 꼭두각시였다가 사마의의 정변 이후에는 사마의의 꼭두각시가 된다. 결국 사마소에게 나라를 빼앗긴다.
3.2.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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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
위의 진왕(陳王).[124] 제갈량과 서신을 교환하며 역사 논쟁을 벌인다.[125] 물론 간첩질이나 정치적 공작이 아니라 순수한 학자로서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당연히 조위 황실에는 비밀로 해야 하는 위험한 일이다. 제갈량은 조식도 이게 위험한 일인 걸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한다고 웃는데 왜냐하면 이것도 못하면 조식의 이름은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인공은 아무리 그래도 사람의 절박함을 정치공작용으로 써먹냐고 제갈량의 사악함에 혀를 내두른다. 본래 조식은 원 역사에서도 형을 제치고 후계자에 걸맞은 인물로 조조의 총애를 받은 재능 있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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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
위나라의 대장군. 위나라 조조의 혈족이며 사마의를 경계하고 있다. 상당한 능력을 가진 장군이지만 촉나라의 제갈량, 마속 등의 장수들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고 이때마다 신하라면 낼 수 없는, 내선 안되는 계책으로 난국을 타개하는 사마의를 미심쩍어 했다.[126] 사로병진 전투에서는 후방의 진창성에서 전장을 지휘하다가 곽회가 무너지고, 마속과 강유가 공격해오자 몸을 빼서 장합에게 합류, 위연군을 먼저 무너뜨리는 것으로 역전하려 했지만 마속과 제갈량의 행동이 더 빨랐던 탓에 위연과 지원을 온 강유가 버티는 사이에 진창이 넘어가고, 사마의가 패전하고 만다. 이에 병력을 온존해 다시 방어선을 형성하기 위해 분통을 터뜨리며 병력을 무른다.
촉과의 2번째 전쟁과, 요동 방면에서 관구검이 대패하는 등 다시 대전쟁의 조짐이 다가올 때 나이와 심로가 겹쳐 병사한다. 죽기 직전 조예에게 사마의를 경계하라고 조언하지만 사마의를 굳게 신뢰하고 있던 조예였기에 결국 그를 설득하지는 못하고 사망한다.[127] 이후 조예는 죽기 직전에야 조진의 유언을 떠올리고 사마의의 위험성을 짐작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결국 조진의 우려대로 사마씨는 위나라를 찬탈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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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후무
위의 황족이자 조조의 딸 청하공주의 남편. 가정에서부터 주인공에게 첫 승리를 헌납한 장본인이다. 촉이 쳐들어오자 어쩔 줄을 몰라하며 장안으로 온 걸 후회한다. 본래도 군사에 아는 것이 없었지만 첫 북벌에서 가정의 촉군에게 호되게 당한 후에는 군사부분에서 발을 빼고 싶어했지만 장안에 고위인사를 배치해야 한다는 위의 정책 때문에 실패하고 2차 전쟁에서도 마속에게 속아 위군의 혼란을 더한다.
3.3. 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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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합
위나라의 장수이자 오자양장 중 하나로 꼽히는 명장. 옹주를 공격하는 제갈량을 막기 위해 5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가정을 돌파하기 위해 진군한다. 가정이 좁기는 했지만 있는 것이라곤 낡은 토성과 산뿐이고, 마속의 병력은 겨우 7천여 명이라서 어느 정도 시간은 들더라도 원 역사대로면 못 이길 싸움은 아니었다. 그러나 원 역사에서는 마속이 산에 올랐다가 아무것도 못해보고 죽지만, 미래인이 빙의된 마속이 산에서 내려왔고 왕평이 지휘를 맡아 악착같이 버티면서 시간을 지나치게 소모했으며, 화공이 실패하고 곽회에게 요청한 원군까지 패퇴하면서, 결국 제갈량이 보낸 촉의 원군까지 오자 후퇴한다. 이후 동관대전에서 가정에서 자신을 패배시킨 마속을 보고 복수심에 이를 갈면서 그를 반드시 죽이려 했지만[128] 위연에 의해 제지되고 위연과 서로 상대방에게 무기를 찔러넣어 함께 전사한다. 사실 어찌보면 위연 못지 않게 자신감이 넘치는 성격으로 자신이 조조 시절부터 싸워온 1세대 무장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로 인해 자신을 패배시킨 마속에게 이를 갈고 달려들었으며 결국 위연을 잡았지만 자신 역시 죽게 되었으니[129] 사실상 둘 다 그 끝없는 자신감이 둘 모두를 죽게 만든 셈. 다만 각 군에서의 위상의 차이 때문에 촉군은 위연이 죽고도 오히려 더욱 불타올랐지만[130] 위군은 거의 장합에 의존하고 있던 탓에 장합이 죽자 전열이 무너져 패배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사후 그의 시신은 제갈량이 수습해 신비를 통해 위나라에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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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회
위나라의 장수. 국경에서 촉한의 전쟁 준비와 제갈량의 능력을 눈 앞에서 보고 있었기에 몇 번이나 증원군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고, 결국 눈 앞에서 제갈량의 침공을 보게 된다. 상규성에 틀어박혀 방비를 굳힐 작정이었지만 장합이 가정의 마속을 뚫기 위한 원군을 청하자, 고민하다가 어차피 옹주를 구원하지 못하면 국경이 위태롭다는 생각에 1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진군하다가 길을 막은 위연과 오의와 야전을 치렀으나, 오천이나 되는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촉군이 개발한 팔진도의 제물이 되어 패배하고 만다.
군법에 따른 중벌을 진작에 증원을 청한 것이 감안되어 면제받고, 위의 4로 병진에 참전해 3만 대군을 이끌고 촉을 공격, 마속과 강유의 군단 2만과 싸우며 우세를 점하지만 제갈량의 계책으로[132] 순식간에 판이 뒤집혀 대패해 군이 괴멸당했고, 위연과 싸우던 장합과 조진의 군에 합류한다. 그러나 다른 전선에서도 제갈량이 사마의를 패퇴시키고 마속의 특공 작전으로 인해 장안이 위협받아 정상적인 군사 행동이 불가능해지게 된다. 그러자 2번이나 우세한 병력으로도 패배한 것에 따른 책임을 지기 위해 후방에서 촉한군의 추격을 막아내다가 위연에 의해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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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소
위의 난공불락 진창성의 성주이자 대체역사의 최대 피해자 중 한 명. 원 역사에선 새로 튼튼한 성을 짓고 1000명의 병력으로 수만 대군도 막아낸 장수지만, 여기선 하필 미래인이었던 마속이 학소를 성 하나 막겠다고 무덤이나 도굴하는 놈이라고 욕하자[133] 속으로 당황하며 혹시라도 파묘 행위가 들킬까봐 비석이라던가 증거들을 버렸는데, 하필 이 행동이 오히려 눈에 띄어 백성들에게 꼬리를 잡혀 분노한 주민들의 궐기로 성문이 뚫리고 사망한다.[134]
그나마 주민들의 궐기까지는 마속 측에서 이를 함정이라 오판해 내분을 진압할 시간을 벌어 진압을 잘해내고는 있었는데, 남문에 촉한의 주력군이 달려들면서도 하필 북문에 성동격서용 미끼로 일부 병사들을 보내 둔 상황이었고 이를 간파한 학소가 남문에 주력군을 두고 북문의 경계를 게을리 했는데 하필 북문에 간 그 일부의 촉한군에 머리 좋은 나헌이 있었고 그가 북문의 방비가 허술함을 간파하고 북문 병력 지휘관인 황습에게 북문을 넘어야 한다고 말해 하필 평소 마속의 등산질로 단련된 병력들이었던 군사들이 그냥 성벽을 암벽등반하듯 넘어서 성내로 진입해 버렸다. 일부라 해도 그 수가 800명이라 성 내 병력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니 마속의 돌입 이전에 제압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135] 성이 함락당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휘하 2천 병력이 전부 죽을 때까지 저항해 마속이 치를 떨게 만든다. 정말 수없는 불운이 겹쳐서 당한 셈. 주인공은 파묘 행위 때문에 저주라도 받은 건가 하며 찜찜해하며 정중하게 장사지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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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개
학소의 아들. 아버지의 명령대로 도굴한 증거들을 버리려다가 들키고, 끝내는 진창성 주민들의 궐기에 아버지와 함께 항전하다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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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예
위의 원로 무장. 오나라의 요동 진공 기후를 예측하고 당시 내륙에서 기다리는 계책을 세워 기다린다. 실제 역사에서는 대성공을 거둔 계책이었으나 역사를 알고 있는 마속은 이미 역풍항해술을 개발하여 전예가 대기하고 있는 장소를 피해서 요동까지 항해하는 데 성공하고, 오히려 빈 배에다가 '님이 모른 척 해준 덕분에 편하게 갑니다. 촉빠 전예 장군 최고^^' 같은 편지를 잔뜩 실어서 보내 의심을 사게 만든다. 결국 의혹을 피할 수도 없게 된 전예는 마속의 반간계로 인해 자살하고 일가도 사마의에 의해 몰살당한다.[136] 사실상 헌제, 학소와 함께 대체역사의 최대 피해자 중 한 명. 참고로 전예는 작가의 전작인 ' 삼국지 풍운을 삼키다' 에서는, 긴 수명과 지장의 면모 등으로 주인공 진현승의 후계자로 낙점되어 작중 대체역사의 최대 수혜자급 인물이었는데 본작에서는 정반대의 처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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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총
위나라의 사로 진격에서 계한군에게 대패해 관중이 위험한 상황에 합비로 쳐들어온 손권을 무찔러 제갈량을 당황하게 한다. 때문에 형주의 육손은 마속과 짜고서 한 달 이상을 전장에서 버텨야 했다. 이후로도 오나라를 경계하느라 대촉 전선에 도움을 주지 못했으며, 업도로 천도를 논할 당시 병이 깊어져서 은퇴했다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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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검
전예가 죽은 일로 마속을 잡아 죽이려 하지만 제갈량이 초원길로 보낸 요화에 의해 실패하고 2만 명의 군대도 패배하여 퇴각한다. 이후 오랜 기간 등장이 없다가 낙양 전선에서 재등장. 제갈탄과 함께 진태의 편을 들고, 장완의 지원군으로 인해 판이 완전히 기울자 혈전 끝에 겨우겨우 살아남아 도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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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태
2차 북벌, 촉과의 3번째 전쟁에서 마속과 왕평이 장안 구원을 위해 도강하려는 것을 막자 3만에 달하는 대군으로 맞서 싸우나 마속의 계책에 서로 장군멍군을 외치는 상황이 버러지며[137] 시간이 끌리고 마속이 동관의 제갈량을 지원하러 간 이후에는 왕평의 철벽 방어를 뚫지 못하고[138] 그사이 동관 대전을 승리한 마속이 돌아오는 바람에 패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장안 탈환전을 위한 전초전이기도 한 후방 확보와 촉군 약화를 노리고 병주에서 이민족들을 대거 토벌하기 위해 5만명의 군단을 이끌고 병주원정을 떠난다. 그리고 이민족 구출작전을 펼치는 마속을 방해하지만 현대과학의 지식을 이용한 마속에게 당하면서 결국 실패하고 상당한 손해만 보고 후퇴한다. 일단 병주의 친촉파 이민족들 대부분이 사라졌으니 후방의 안전이나 공격로는 확보되었지만, 촉군의 전력 약화는 실패했고, 병주 전투에서 교환비도 상당히 손해를 봤다. 자신은 패배했다고 여기지만, 연이은 패배가 군기에 좋지 않다고 여긴 위나라에 의해 승장으로 상을 받는다.
계한의 20만 대군이 침공하고 조상이 그에 맞설 20만 대군 사령관이 되자, 수도가 위태로운 판에도 정치판의 논리에 갇힌[139] 위나라의 정치혼란에 탄식한다. 그래도 제갈탄, 문흠 등의 위나라 올스타들이 모였으므로 수비전이라면 피해없이 막아내리라 여겼지만 조상이 군사적인 식견이 부족해 진태처럼 경험많은 장수의 조언에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사실이 제갈탄에게 들통나자, 다른 장수들도 앞다퉈서 조언이란 빌미로 위군의 진형을 입맛대로 뜯어고치려 한다. 그 결과 위나라군은 대전 경험이 없는 장완이 보기에도 개판 5분 전의 진형이 되어 계한이 치기 좋은 위치마다 최소한의 군사만 배치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만일 진태가 어떻게든 이를 수습하려 들었다면 희망이 있었지만 그랬다가 불리한 위치에 자기 군단이 끌려갈까 두려워 결국 입을 열지 않았고 위군은 대패한다. 그 후 천도에 관해 논할 때도 사마의를 경계해서 군사를 맡기지 않고, 자신에게 낙양의 방어를 맡기면서도 하후패와 등양을 남겨 자신을 감시하려고 하는 조상에게 분노하지만 말하지 못한다. 정변 이후 사마의의 저택에서 조상이 탁고를 받았음을 언급하나 위의 이유로 조상에게 악감정이 있었기에 이내 조상 일가를 멸하는데 찬동한다.
이후 계한의 5번째 공격에 선봉장으로 나서서 왕준의 선봉대를 역으로 몰아붙였으나, 왕평의 후방 기습을 맞게 된다. 군을 물리고 낙양 남쪽 수비를 담당해 왕준, 장익, 양직의 맹공을 막는 기염을 토하지만 왕준의 도발에 넘어가 정면에서 성문을 열고 돌격했다가 작지 않은 손해를 보고 복귀한다. 이후 책임을 묻는 사마의와 대립하지만 제갈탄과 문흠이 편을 들어준 덕에 무사히 넘어간다. 이후 궁성에서 낙양 시가전을 벌이던 중 업성의 예비병력도 전부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것을 두려워 한 사마의 탓에 실패한다. 결국 계한에서 장완이 이끄는 원군이 먼저 도착하면서 열세에 처하고 사마의를 원망하면서 다시금 원군을 부르자고 주장한다. 낙양이 함락될 때 사마의를 구해주기 위해 전군을 끌고 돌격해 사마의를 탈출시키지만 그 대가로 하후패와 마충에게 포위당하고 하후패에게 다시금 귀부를 권유받지만 결국 항전하기를 택한다. 진태는 권력보다는 순전히 나라에 충성할 뿐이었기에 위나라의 최대 인재이자 현재 위나라의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인 사마의를 살린 것이지만, 그렇기는 해도 본인도 이미 사마의가 역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를 살리면 황실은 또 어찌 되겠냐며, 자신이 뭘 어찌 하는 것이 맞았던 거냐며 심란해하다 탈진해 병사들과 같이 허망하게 전사한다. 또한 아버지 진군이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정작 위나라에 충성하는 자신의 모습이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자조하지만 결국 위나라를 향한 충성을 버리지 못했고 사마의는 변하지 않고 찬탈을 저지르면서 그의 죽음은 의미를 잃고 만다.[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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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요
장합의 부장. 가정 전투에서 가장 먼저 마속에게 털려서인지 마속을 상대로 신중한 모습을 보인다. 동관 대전에서 장합과 같이 일군을 맡아 분투했으나, 제갈량의 팔진도를 끝내 무너뜨리지 못한다. 장합이 죽고도 군을 수습했지만 위연의 죽음에 눈이 뒤집히다시피 한 마속과 강유의 맹공에 결국 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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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
동관에 진출한 제갈량을 격퇴하기 위해 사마의가 정예 위군 10만명 중 5만 5천명을 데리고 나서자 남은 4만 5천명으로 이엄과 마충의 10만 촉군을 막아선다. 그러나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사마의가 패전하고, 정병들이 사마의를 따라 대부분 빠진 위군으로선 이엄과 마충의 공세를 견디지 못했고 결국 패배해 군사를 수습하는 것에도 실패한다. 결국 방어선이 무너져서 장안까지 촉군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패전이 확실시되자 하후무에게 퇴각을 결정할 것을 떠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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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초
농서군 태수로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에도 한 달을 버티자고 했지만, 가정의 역사 개변으로 촉군의 옹량 장악이 확실해지면서 공포를 견디다 못한 농서 주민들의 반란으로 전사한다. 제갈량은 그 시신을 수습해 장합에게 건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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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후현
당시 조위의 2대 명사로 유명하다. 조상의 측근이지만 학문과 군략 모두 최고라기엔 하나가 모자란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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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흠
동관대전에서 진태와 같이 도강을 시도했지만 마속와 왕평에게 결국 밀려난다. 장완의 북벌 당시 마충의 공격을 막는데 성공하지만 촉한의 공세에 위군의 진영이 무너지자 결국 후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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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경
장완의 북벌에서 다른 위의 장수들이 자신들에 유리한 진형을 짜게 압력을 넣는 와중에 착한 성격 때문에 그저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 결과 최전방에서 지원없이 세 배에 달하는 촉한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으며 후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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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탄
조위의 장군. 당시 조위의 2대 명사로 유명하다. 부하들을 아끼는 덕장으로 포상에 더해 사재까지 털어서 병사들을 도와주기에 병사들의 충성도와 전투력이 매우 높다고 한다. 조상의 하동군 방어전에 종군했으나, 조상의 능력과 상황을 깨닫고는 자신이 공을 세우기 위해서 조상을 부추겨 대형을 꼬아버려서 20만 대군이 허무히 붕괴하는데 일조한다.
마속의 북벌에서는 위의 선봉장으로 죽림칠현을 데려와 나헌의 기를 죽이고, 등애에게 측면을 기습시켜 우세를 점하지만 황숭의 원군이 도착해 실패하고 낙양성에서 다시 맞붙는다. 이후 군의에서 진태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사마의에게 맞서서 그를 비호한다. 금용성을 지키다가 수세에 몰리자 귀부를 거부[141]하고 창으로 자결한다. 사망 직후 충의에 경의를 표한 왕평이 따로 관을 마련해 시신을 수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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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애
장완의 북벌 때 왕경의 부장으로 압도적인 촉한군의 공격을 어느정도 막아내나 워낙 수와 질에 차이가 많아 결국 후퇴한다. 제하론을 올려 운하건설의 계기를 마련한다. 5차 북벌 당시에 제갈탄의 부장으로 동행해 절벽을 기어올라 넘어서 나헌의 군대를 기습했지만 황숭의 반격에 당해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한다.
낙양 전선에서는 왕평과 강유를 상대로 북망산의 수비를 맡지만 마속이 만든 포원기환과 청강족 병사들의 힘을 십분 이용한 왕평의 공격으로 시간벌이 이상은 실패한다. 낙양대전에서 조위가 참패했지만 어찌어찌 살아 돌아간다. 등산가라는 점에서 독자들 사이에서는 마속과 라이벌 기믹이 있다. 다만 본작에서는 별로 강조되지는 않았고 낙양이 무너질 때 간신히 도망치는 것으로 등장 종료.
3.4. 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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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군
위나라의 중신. 전예가 마속의 모략과 사마의의 강변 때문에 한때 유비를 섬겼다는 이유로 죄를 뒤집어 쓰고 그와 그의 가족들이 죽자 자신도 유비를 섬긴 적이 있다며 의심을 피하기 위해 정계를 은퇴한다. 이후 죽기 전에 촉한과 대적하기 위해 조언을 구하러 위나라 중신들과 대면한 자리에서 유비를 떠난 이유를 설명하는데, 유비가 간옹 같이 별 볼일 없는 인물까지 어떻게든 끌고 가는 게 싫었고 자신이 합리적 의견을 내도 유비 집단은 명분을 중시했다며 그게 싫어서 떠난다고 말하며 백성들에게는 그게 좋아 보이겠지만 결국 명분만으로 전란을 부르는 집단이며 그 명분이 촉한을 무너뜨릴 것이라 디스한다. 하는 말을 보면 자신은 그런 유비 집단 내에서도 합리적인 인물이었다며 자뻑하는 모습도 보이는데 정작 그렇게 말하는 마지막에 '합리야말로 위나라의 대의'라고 말하며 대의명분을 찾는 모순적 인물로 나와 그런 위의 신하들이 원 역사에서 사마씨를 앉히고 팔왕의 난으로 다 같이 망했고 여기서는 그 촉한에게 망할 것이라며 독자들의 조롱을 한 몸에 받았다.
사실 작중에도 나오고 실제 역사에서도 그랬지만 조위 정권이 성립할 수 있었던 계기는 작중 진군이 그리 부르짖는 합리 때문이 아니라 후한으로부터 선양받은 정통 왕조라는 명분 덕분이었다. 그런 주제에 자신들에게 명분이 불리해지자 바로 불리한 명분의 원천이 되어버릴 수 있는 헌제를 몰래 암살한, 명분을 무시하고 합리를 부르짖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 누구보다도 명분을 두려워하는 내로남불 투성이로 작중 조위 정권의 모순을 보여주는 인물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작중에서는 아들 진태가 아버지의 유언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모습이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자조하면서도 위나라를 향한 충성을 버리지 못하고 죽었다. 이런 아들의 모습을 진군이 봤다면 자신의 모순점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이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는 진군이 유비를 떠난 게 아니라 유비가 여포에게 배신당하고 도망치면서 진군을 챙기지 못했고, 진군은 그 이전에 원술과 여포를 조심하라고 진언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본작의 피해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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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
위나라 원로. 계한의 별동군에게 동관이 점령당하고, 모든 장군들이 전선에 달려가자 지휘할 사람이 없는 상황이 되자 직접 군을 이끌고 동관을 탈환하려 하나 고상과 마충의 철통 방어로 실패하고, 원군을 몰고 온 제갈량을 꾸짖으나[142] 제갈량은 그에게 장합의 시신을 관째로 건네주는 여유를 보여준다. 이에 이미 동관과 옹량 토벌이 어려움을 깨닫고 후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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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
위의 청주자사. 의심스럽게 군을 움직인 전예를 체포한다. 예의를 지키긴 했으나, 전혀 손속이 없었기에 전예는 바로 독을 마시고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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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
황숭의 아버지. 원 역사대로 위나라에서 복무 중이며 황숭 때문에 몇 번 언급된 걸 빼면 사실상 존재감이 없다. 원 역사에서도 위나라 복무 때는 외지로 좌천될 정도로 불우하기도 했고, 소설상에서는 유비 휘하에서 복무했던 경험이 있는 전예가 험한 꼴을 당하고 진군도 이 경력 때문에 결국 은퇴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유비의 참모진이었고 유비가 죽을 때 유일하게 슬퍼하기까지 했던 황권은 여기선 더 불우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계한의 4차 북벌 도중에 죽었는데 사마의는 이를 이용하여 촉의 내부 분열을 유도하는 한편 휴전을 맺는다.[143]
3.5. 사마씨 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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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
위의 표기대장군이자 본작의 최종 보스.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옹주를 비롯한 전선에서 장기전 외의 해법이 없자[144], 조예에게 방어선을 풀고 전군을 모아 진군할 것을 주장, 제갈량이 모험을 하지 않아 성공적으로 촉군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 후 4로를 통한 위의 대규모 공격에서도 4개 주력군 중 한 군단을 맡아 제갈량과 야전을 치른다. 팔진도가 기병과 수레, 궁노와 창, 칼을 든 보병 등의 복잡한 유기적 연계를 토대로 싸운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의 실력이면 팔진도의 빈틈을 기병으로 찔러 무너뜨릴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직전까지 장익과 요화를 밀어붙이며 휘하 군사들이 공세적인 태도로 헐거운 진을 유지하는 게 습관이 되어있었던 탓에 팔진도를 뚫지 못했고 결국 패배한다. 장안에서 위나라 중신이라면 말할 수 없는 강수를 두어[145] 촉을 퇴각시킨다.
제갈량의 약점을 알고 있어 자신이 한 수 아래인 건 맞더라도 최종적인 승리자는 자신이라고 확신했지만... 스스로의 약점을 알던 제갈량이 다른 사람이 세운 작전 계획을 따른다는 강수를 두면서 제대로 약점을 저격당해 동관이 당하고 장안이 위기에 몰린다. 이에 군단을 끌고 나가 우세한 병력을 바탕으로 제갈량과 맞서지만, 극에 달한 제갈량의 능력과 마속과 왕평 등의 활약에 의해 대패하고 아들들과 함께 간신히 도주한다. 이후 패배의 책임을 지고 유배된다. 독자들은 이 때문에 사마가의 정치적 위치 변화가 더욱 빠를 거라고 추측한다. 원 역사와는 달리 하후씨 일파도 계속해서 전장에 나섰고, 조예가 친정해서 손권이 친정한 동오 군대를 압도적으로 밀어버리는 업적을 올려서 사마씨가 군권을 쥐기엔 여러가지로 전황이 좋지 않은지라 재기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황제 조예가 여전히 신뢰하는 장군이고 결국 사마의만큼 대전략을 짤 수 있는 지휘관이 부족한지라 위나라의 최종보스로서 촉한과 대적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유배를 가서도 진태에게 촉에게 한 방 먹일 계책을 조언하기도 하는 등 여전히 존재감을 과시 중이며 결국 복귀하게 된다.
그러다 황제 조예가 죽게 되고 조상과 함께 탁고를 받게 되는데, 사마의는 조예의 죽음을 이용한 동오와의 동맹이라는 계책을 짜내는 냉혹한 모습을 보이며 본격적으로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본인은 조예의 뜻대로 적당히 조상과 아웅다웅하며 살고 싶지는 않고, 한 번만이라도 절대 권력을 쥐고 싶다는 야심을 갖고 있는 상황. 조예의 죽음을 틈타 장완이 대규모 북벌을 시도하자 야망을 위한 포석으로 자신이 직접 나서야 계한을 막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오와의 동맹을 추진한다는 핑계로 참전하지 않고 동오로 내려간다. 이후 손권과의 만남에서 현란한 말솜씨와 조상의 지리멸렬한 지휘로 인한 참패라는 상황까지 이용해 한오동맹을 파기시키는 것에 성공하고 장완의 북벌군을 퇴각시키는 것까지 성공... 했다고 생각했지만, 오나라 쪽은 마속의 교주 공작으로 인해 효과를 보지 못하고 관중 전선 역시 장완이 군사를 퇴각시키는 것으로 위장하고 기습을 가해[146] 홍농까지 함락당하며 관중 전체를 빼앗긴다. 그래도 한오동맹을 파기시키는 성과를 거두고 조상의 지리멸렬한 참패로 인해 위나라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실하게 굳히는 것에는 성공한다.
낙양 방어군의 강력한 후보지만 조상의 견제로 업으로의 천도에 함께 가게 된다. 낙양은 사마가에게도 중대한 땅인데도 여유작작한 태도를 보인다.[147] 이후 본격적으로 역심을 드러내고 독발부를 지원해 계한을 묶어둔 뒤 정변을 앞당겨 조상이 운하 건설을 감독하러 간 사이 옛 부하들 수천을 모아 업도를 들이쳐 조상 일파를 쓸어버린다. 정변 이후에는 중신들을 모은 자리에서 조상 일가를 멸하겠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사마의도 조상 일가와 그 일파 몇몇만 숙청하고 끝내려는 조짐을 보인다.
그 후 승상의 자리에 오르고, 마속이 마지막 북벌을 감행해 대군을 일으키자 이를 막기 위해 출격. 자신의 뛰어난 분석력을 믿고 마속에 대해 조사해 그의 패턴을 파악하려 하나 마속의 행보에 아무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어 당황한다.[148][149] 마속 본인도 사마의는 범재인 자신과 비교할 수 없는 천재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상대를 읽어내고 그에 맞는 대응을 해내는 장점을 역으로 이용하며 치열한 수싸움을 벌인다. 그러나 본 전투가 시작되자, 사마의가 전쟁에 집중하지 못해 점차 밀리기 시작한다. 정치판이 안정된 계한과는 달리 위나라는 정치판이 안정되지 못해 전쟁 중에도 정치를 고려해야 돼서 집중을 못한 것.[150] 결국 그 틈을 타 초전에 마속에게 읽혀 피해를 입은 군이 마속의 최후의 예비병력에 돌파당해 도망친다. 남양군을 미끼로 오나라를 끌어들여 계한의 공세를 중지시키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마속의 칼에 스쳐 머리카락이 풀리고, 장남 사마사가 죽었으며 가문의 영지마저 잃어 마속에게 원한을 불사르며 등장은 끝난다. 이후에도 마속이 주둔한 낙양 인근에 수만 단위 군을 출현시켜서 계한의 군비 소모를 유도했다고 한다. 또한 진태와 제갈탄처럼 전사한 군부의 반 사마의 세력도 책임을 뒤집어씌워서 마저 정리할 것을 결심한다.
여담으로 조예가 죽은 다음부터 조상파를 속일 때, 묘하게 성씨가 같은 사마휘처럼 호호선생화 되어 말끝마다 호호호를 붙이는데 야심을 숨기고 연기하는 거라 그렇기는 하지만 엄청 깬다. 그런데 이게 처음도 아닌 게 작가는 전작인 백제의 이름을 잇다에서도 연개소문의 웃음소리를 깔깔깔이라고 표현했었다.노인인 장미도 와이와이 라고 계속 말하지만 장미는 미친 노인이라 그렇다고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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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사
아버지 사마의와 함께 여러 전장에 나서며 아버지의 부관 노릇을 한다. 동관대전에서 패배한 아버지를 동생 사마소와 같이 반강제로 끌어내서 퇴각시켜서 목숨을 건지기도 한다.
원 역사에선 사마씨 가문의 국가 찬탈에 지대한 역할을 한, 어쩌면 아버지 사마의를 능가하는 권력의 화신이지만 본작에서는 아직 그런 면모를 보이지 않았다. 근래 이어지는 위나라의 연이은 악재[151]에 불안해하며 군사능력이 미비한 조상에게 위나라의 20만 대군을 맡겨도 될지 불안해한다. 계한의 홍농 군영에 거기장군 황권의 장례를 알리는 사자로 온다. 정변이 성공하고 나서 조상의 무능을 지적하며 사마의에게 관용을 베풀기를 권한다. 마속의 12만 대군이 북벌해오자 마속을 만만히보는 사마의에게 마속도 결코 하수가 아니라고 불안해한다.[152] 전투에서 사마씨 가문의 가병들을 지휘하며 싸웠으나 외성이 점령당한 후반부에 피난민들을 풀어서 마속의 진로를 방해하고 아버지와 퇴각하다가 자신은 추적을 막다가 창에 맞아 전사한다.[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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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소
형보다 많이 어려서 작중에서는 계속 아버지 사마의를 수행하기만 하고 별다른 활약이 없지만, 후일담에서 원 역사대로 서진을 세운다. 사마씨는 계속해서 제갈량과 마속에게 밀리면서 조위의 목숨줄만 간신히 붙여줄 문제적 계책만 내왔지만, 그 과정에서 업을 비롯해 위나라 정계를 이미 장악했기에 계속된 실정으로 탄핵받기 전에 먼저 찬탈을 저지른 듯. 원 역사와 달리 전쟁 영웅의 권위도 뭣도 없는 탓에 혼란만 벌어지다가 사마염의 대에 계한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154][155]
3.6. 조상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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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
조진의 아들. 사마의와 함께 조예에게 탁고를 받고, 이후 조예의 죽음을 틈타 장완이 북벌을 개시하자 이에 맞서 20만 대군을 이끌고 사마의 대신 출전했다. 처음에는 자신도 군재가 없다는 것을 알아 진태의 말에 잘 따랐으나 제갈탄을 필두로 자신의 공을 탐낸 부하들이 자기 입맛에 진형을 짜도록 압력을 넣어 지휘가 사분오열된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마충의 탐색 공격을 문흠이 간단히 격퇴하자 전세를 오판하여 무리하게 진격하고 그 결과 진형 간의 연계가 무너진 위군은 대패한다. 그럼에도 실권을 쥐고 전횡을 저지르며 업으로의 천도를 지휘한다. 운하 건설을 감독하러 간 사이 사마의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일가가 멸족된다.
그야말로 최악의 총사령관인데, 군재가 없다면 차라리 유능한 사람의 말 하나만을 듣는 것이 그나마 차선이었는데, 이 사람 저 사람 말을 다 듣다보니 군의 지휘가 다 망가진 것. 진태의 표현으론 차라리 무능한 조상이 직접 지휘하는 것만 못한 상태라고.
다만 원 역사에서 사마의의 정변에서 맞서볼 만했는데도[156] 항복한 점을 보면 조상이 권세를 쥐었다면 조방의 안위는 확실했을 거라고 한다. 조예의 안목이 좋았던 경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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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안
진태가 장완의 북벌에서 입은 손해를 언급하자 진태의 책임을 언급하고 받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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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
장완의 병을 언급하며 계한 정벌을 제의한다.
3.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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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
양주의 친위파 호족. 사마의의 사주를 받고 봉기를 일으키나 이 사태를 예견한 제갈량의 작전으로 진압된다. 애당초 사마의와 위나라의 계략을 예상하고 양주의 반촉파를 쓸어버릴 빌미를 위해 일부러 방치해둔 것. 자신의 질문에 솔직히 대답해준 성의에 왕평은 그들에게 밥과 술을 주고 독살시킨다.[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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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적,
산도
투 머치 토커 나헌을 공략하기 위한 사마의의 맞춤 전술대로 제갈탄이 동원한 죽림칠현. 사마의의 기대대로 설전에서 거침없이 나헌을 발라버린다. 나헌은 이게 어지간히 분했는지 다시 군세를 이끌고 제갈탄과 맞붙으면서 죽림칠현을 데려오라고 악을 쓴다.
4. 기타 인물
4.1.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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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제 유협
후한의 마지막 황제이자 위나라의 산양공. 촉한에서는 공식적으로는 헌제가 죽었다고 여겨 민제라는 시호를 올린 다음 유비가 황제가 되었으므로 헌제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았어도 정통성 문제로 대놓고 황제라 지칭하진 않고 '그분'이라고만 부른다. 2차 북벌 과정에서 위기에 몰린 사마의가 제갈량을 막을 계책으로 등장한다. 모습을 내보인 건 아니지만 헌제의 명의로 된 군기가 보이자 마속은 신음하고 제갈량은 부채를 떨어뜨린다. 결국 제갈량은 병사들에게 큰절을 올리게 하고 눈물을 흘리며 퇴각한다.[158] 이렇게 촉한 10만 대군을 물러나게 하지만 존재감이 커져서 한 황실 추종자들의 준동이 일어나고, 결국 231년에 사망한다. 정황상 위나라에서 암살한 것으로 보인다.[159]
4.2. 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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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연
의심 많은 성격으로 오나라를 배신하고 재물만을 취하려고 한다. 하지만 오나라가 고구려와 친교를 맺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과 마속이 전해준 역풍항해 기술로 오군이 추가로 도착한 사실을 듣고 경악한다. 그러다가 마속이 겉으로 복속하면서 뒤에서 호박씨까라라고 바람을 불어넣은 덕에 일단 겉으로는 오나라에 복속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뒤에서 호박씨를 까는 중이다. 위나라가 공손연 세력만으론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병력으로 계속해서 위협전을 벌이는 중이라 오나라에 계속 지원을 청해 오나라의 정치 혼란을 가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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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배를 타고 온 오나라 사신들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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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직
공손연의 친위파 부하로 외왕내제를 하라는 마속에게 반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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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범
공손연의 친위파 부하로 마속을 처형할 것을 주장한다.
4.3. 고구려
원 역사에 비하면 수혜자(?). 본래대로라면 관구검이 이끄는 위나라군에 의해 수도까지 큰 피해를 입을 시기가 가깝지만 마속에 의해 관구검이 대패하고 요동 일대에서 위나라가 쫓겨나면서 나라의 성장과 국격이 한층 더 빠르고 높아졌다. 오나라와의 협조 관계도 맺었으니 한반도 쪽의 역사도 격변할지도 모른다.-
동천왕
온화하고 선량한 성품으로 오나라 사신단을 환영하며 국교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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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 우씨
동천왕의 적모. 소태후와 동천왕 모자를 미워하여, 동천왕을 괴롭히려고 말의 갈기를 잘랐다. 여기서는 왕의 생모를 공경한다는 명분으로 소태후를 예우한 마속에게 한 방 먹는 모습을 보인다. 실제 역사에서도 산상왕을 옹립하고 2대에 걸쳐 왕후로 재위했던 여걸인 만큼, 마속도 우씨를 처음 봤을 때 눈매가 날카로워 한 성깔 할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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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
고구려의 조의. 요동에 온 오나라 사신단을 환도성으로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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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후[162]
동천왕의 생모. 마속이 자신의 한국사 지식을 이용해 왕의 친어머니께 예우를 다한다는 명목으로 예물을 바쳐 태후 우씨를 당혹스럽게 만들었고, 소태후 본인도 정치판에서 항상 소외되어 있어서 당황한다 물론 동천왕은 그런 마속의 행동에 기뻐했다.
4.4. 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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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제
촉에서 강왕의 벼슬을 받은 부족장. 제갈량과 함께 마속을 구원한다. 하지만 마속의 이민족 구출작전엔 부족의 이익을 생각해 참가를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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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웅
마속과 함께 왕쌍과 교전하나 패하고 부상을 입는다. 마속의 이민족 구출작전 당시 마속과의 의리를 내세워 직접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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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라발능
독발수전의 난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킨다.
4.5. 선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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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비능
선비족의 군장. 요동으로 기병을 보내 마속을 구원했다. 3차 북벌에서 촉의 기병을 지원한다. 동관 전투 이후 병주장악을 노린 위에 암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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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발수전
독발부의 수장으로 위나라의 사주를 받아 량주를 침공했다. 토벌을 위해 파견된 강유를 애먹게 할 정도로 능력이 뛰어나나 원 역사의 손자가 그랬던 것처럼 마속이 들고 온 제갈량의 팔진도에 완벽히 당해 대부분의 군대를 잃고 도망치지만 추격의 끈을 늦추지 않은 계한군에 의해 전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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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발수기능
원 역사에선 독발수기능의 난을 일으켜 진나라를 수십년 간 애먹였던 장본인이자 독발수전의 손자이다. 여기서는 마속에 의해 독발부가 멸망하면서 포로로 잡히게 되는데 마속이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골치 아파하는 장면이 나왔다. 후일담에서는 계한 쪽에 귀부하거나 등용되었는지 계한의 번장으로 합비 방면에서 오나라를 공격한다고 나온다.
4.6. 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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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
원 역사대로 반란을 일으키지만 마속에게 진압되고 처형당한다. 사실 반란의 속사정을 보면 지난 북벌간 남만 일대에서 엄청난 물자를 짜냈고, 옹량주란 큰 성과를 얻어놓고도 돌아오는 게 없어 참다 못해 반란을 일으킨 것인데, 비슷한 시간에 조정에서는 "그러고 보니 이제 옹량주도 먹어서 새로운 기병 공급처가 생겼는데 남만에서 무리하게 군마 키울 필요가 있나요?"라는 의견이 대세가 되고 있었기에 조금만 기다리거나, 상소문 비슷한 것부터 올렸다면 군마 면제란 큰 성과가 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타이밍 운이 더럽게 없었던 것이고 마속도 우습게 되었다고 동정한다.
4.7. 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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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달,
조구
남매가 세트 메뉴로 같이 나온다. 오나라의 배신을 대비해 주인공이 교주의 반란을 사주하려 할 때 협력할 현지 유력자로 등장. 남만 여자들의 복식이 한나라 기준으론 다 벗은 모습이나 마찬가지라 다들 눈둘 데를 못찾자 현대 매체로 여인의 벗은 모습에 익숙했던그리고 집에 절세미녀가 아내로 있는주인공이 미인을 곁에 두고도 눈길 하나 안 주던 미축을 본받으라며 한소리 하지만 정작 자신도 남만 최고 미인인 조구를 만나자 눈이 흔들린다... 교주를 푸대접하는 오나라 정권에 반감을 가지고 반란을 계획한다. 다만 조국달이 교주 전체의 유력자 수준은 아니고[163] 가장 잘 개발된 일부 현의 유력자라서 교주 전체의 호응을 기대하기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코끼리 부대를 제외한 타 군사들은 제대로 된 훈련이나 경험이 부족해 계한의 조력이 절실했다.[164]
마속 역시 착취 따위에 관심이 없었기에 서로 동맹을 맺고 원수였던 여대의 토벌군을 대파한다. 교주 전체의 세력가는 아님에도 2만여 명에 달하는 대군을 모았지만, 훈련도 안 되었고 사기도 낮았던지라 마속은 내심 기대 이하라면서 계획보다 급히 나서서 전장을 받쳐줘야 했다. 계한군의 활약으로 여대를 처형하고 다시 달려온 육윤의 군사와도 맞선다. 장기전이 되면서 훈련을 받다가 오나라 조정에서 명령을 받고 무모하게 덤비는 육윤까지도 격파하면서 교주는 오나라의 군대를 완전히 몰아낸다. 이후 마속이 다시 계한으로 돌아가게 되자, 급하게 달려와서 계한이 자신들을 외면하는 게 아니냐고 매달린다. 마속은 이번 전쟁의 승리로 백제성에서 형주 쪽을 공략할 수 있는 길이 열려서 교주가 공격받으면 언제든지 후방을 들이쳐 교주를 구할 수 있으므로 괜찮다고 그를 달랜다.
오류가 하나 있는데, '구'는 이름이 아니고 대충 '여사님'과 비슷한 의미의 존칭이다. 즉, 조구는 그냥 '조씨 여사님'이란 의미라 자칭으로 쓰기는 영 애매한데, 작중에서는 그냥 본인이 자기소개를 조구라고 한다. 실제 조구의 본명은 조씨정(趙氏貞)이라고도 하는데 신빙성에 논란이 조금 있다.
[1]
3번째 전쟁이지만 2번째 전쟁은 위나라의 선공이므로, 촉이 주도한 북벌로만 치면 2번째다.
[2]
서막은 촉의 영향력이 미비하던 남중의 군현들까지 제대로 정비해 국력 신장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3]
정확히는 오의도 있긴 하지만 나이가 많은데다 외척의 입장이라 군에 대한 전권을 쥘 수 없는 상황상 제갈량의 이후 세대 중 군부에서 가장 핵심인 마속의 역할이 중요했다.
[4]
사실 마속은 진작에 도망치려 했지만, 난데없이 고대 세계, 그것도 전쟁터 한가운데에 떨어진데다 밥이란 것이 대충 만든 주먹밥이다 보니 넘어가질 않아 며칠간 물밖에 못 마셨다. 그래서 도망치려다 힘에 겨워서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지휘권을 넘겨준 거야 미래 왕평의 진가를 알기에 그랬고.
[5]
제갈량이 노숙이 했던 괄목상대라는 말이 허언인 줄 알았다가 왕평을 보고 그 말이 맞았음을 깨달았다고 하니 그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정작 마속은 일단 왕평은 원래 똑똑했으니 핀트가 어긋났다고 속으로 깐 뒤에 왕평을 데려가면 난 누구 데리고 싸우냐고 불평했다. 그래도 제갈량이 강유를 붙여주겠다고 말하자 바로 풀리긴 했지만...
[6]
보다 정확히는 군사학은 마속이 붙여준 강유에게 배웠다.
[7]
본격적으로 붙기 전에 설전에 들어가는데, 나헌이 촉한의 정치 상황을 설명한답시고
삼고초려부터 시작해서 한 시진(2시간)동안 투머치 토킹을 시전하고, 듣다 못한 오군이 빡쳐서 공격을 시작한다. 심지어 백제성에서 오군이 철수할 때는 역으로 투머치 토킹을 유도하며 퇴각할 시간을 버는데, 나헌도 런각을 잡으려는 수작임을 눈치채지만 백제성 주둔군의 숫자가 너무 적다보니 괜히 추격하다 실수해서 백제성을 잃으면 여태 버틴 게 말짱 도루묵이 되기에 그냥 오군의 퇴각을 묵인하고 설전을 즐기기로 결정한다.
[8]
실제로는 이릉대전에서 촉한으로의 퇴로가 막혀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그렇다고 방금까지 싸운 적수인 오나라에 항복할 수 없어 차악으로 택한 것이며 이후 유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위나라의 다른 이들이 모두 좋아할 때 홀로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촉한에 대한 충성심도 남아있었다. 그래서였는지 위나라에서도 실권은 없는 신세로 지냈고 결국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9]
더구나 마속을 제외한 시험관들도 차마 뽑을 수 없어 어물거리던 중 이막이 "우리 승상도 오에 형이 있고 위에 친척이 있는 부역자 아니냐? 기회는 주자"라고 말한 다음에 바로 저렇게 취급당한 거다... 당연히 시험관들은 너나없이 이막은 대체 사람의 마음이 있는 거냐고 경악한다.
[10]
군부 최고 권력자인 마속과 연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군부 내에서 중진이 될만했다. 거기다가 본인도 무능하지는 않고 적당히 무난한 장수 정도는 됐으니, 군부 내에서 꺼릴 이유도 없었다.
[11]
극읍. 나름 고위직이고 계한에서 조위로 투항한 항장인데, 계한 전선에 배치된 하후패는 물론, 그 누구도 기억 못할 정도로 중용받지 못해 이제는 살아있는지도 모르게 되었다.(실제로도 사망년도 미상) 황숭의 아버지인 황권도 항장이 되고 나서는 진남장군을 거쳐 거기장군으로 중용받았지만 실권은 없이 쓸쓸히 죽었으니 결국 위나라의 약점을 잘 보여준 것.
[12]
물론 온화한데다 공사구분도 잘 되는 장완이기에 매우 불쾌해하긴 해도 등용을 안 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이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누가 그를 제대로 등용할 수 있을지....
[13]
정확히는 삭방 일대의 석성들을 지은 재료가 석회암인데, 석회암은 산에 변질되기 쉽다. 이를 미래인의 지식으로 알고 있던(환생한 뒤 세월이 많이 지나 원리는 까먹었다고 한다.) 마속이 맹화유궤를 이용해 군수물자로 지니고 다니던 식초(원래는 군량의 역할을 담당한다.)를 분사하게 해 석회암으로 지어진 석성을 무너뜨린 것이다.
[14]
왕준의 자는 사치. 즉 왕사치.
[15]
심지어 마속이 위장군에서 대홍려로 한 직급 낮아지고 군부에서 실각한 것처럼 보이자, 찾아가서 대놓고 큰일난 게 아니냐고 한탄해 눈총을 산다. 마속은 대홍려라도 천거권 정도는 넘치고 일부러 물러난 것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권세가 떨어진 건 맞지 않냐고 한탄해서 마속이 어이를 날려버린다. 그도 그럴 게 대홍려도 장관급 고위직이다.
[16]
이때 그의 능력을 인정한 진태가 항복을 권하지만 단호히 거절했다. 이미 계한의 마속에게 패배하고 귀순해 큰 공을 세우고 간신히 인정받았는데, 여기서 또 패배하고 귀순한다면 철새라고 평생 조롱거리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17]
이때 마속을 우러러보며 승상(제갈량)도 우러러 볼 정도가 아니냐고 극찬해서 원 역사의 마륭의 공을 빼앗은 것을 찔리게 만들었다. 마속이 찔려한 이유는, 팔진도를 비롯한 보병의 대 기병 전술에 선비족이 대처할 방법을 몰라 진 것이라 1회성 전략에 가까운데 이걸 먼저 선수친 것이기 때문. 미래인의 특권
[18]
주인공이 표현하기를 고난이 없었으면 되었을 유비의 모습. 때문에 조운이 선제(유비)의 풍모를 가지셨다고 칭찬했던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19]
특히 황호는 마속과 동윤이 요주의 인물로 주목하고 있다. 작중에서는 원 역사에 비해 북벌이 잘 진행되어 승상부의 권위가 높아진 덕에 환관의 전횡을 막을 법안을 통과시켜 황호의 전횡을 막을 여지를 남겼다.
[20]
정확히는 안전불감증에 가깝다. 그래도 유선이 평정심을 놓지 않은 덕분에 중신들의 동요가 어느 정도 진정되는 효과는 있었다.
[21]
당장 비의 역시도 꾸준히 자신이 촉한을 재상으로서 이끌어가고 싶어하는 모습이 제갈량의 생존 당시부터 드러났다. 황제에게 전권을 받아서 자신이 원하는 정치를 펼칠 수 있는 재상 자리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하여 열정적인 신하들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위치다. 물론 현대인 소시민 마인드인 마속은 과로사하기 좋은 자리라 여긴다.
[22]
실제로 적은 분량에 비해 연의에서나 사서에서나 눈에 띄는 단점 없이 제 몫 이상을 해내는 것으로 고평가 받는 지휘관이다. 유관장이나 황충, 조운 등의 원로들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23]
비공식적 서열 1위는 마속이다. 오의가 거기장군이고 마속은 당시 위장군이었기에 공식적 서열은 오의가 높다. 능력만 보자면 강유, 왕평 등도 뛰어나긴 하지만 이 둘은 아직 경력이 짧은 편이라 군부의 수장을 맡기에는 손색이 있다.
[24]
마속의 평으로는 제갈량이 마음 먹으면 못 자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황제에 준하는 권력을 가졌으면서도 워낙에 힘을 아껴서 티가 안 난다고 한다. 그러면서 언뜻 보기엔 큰 차이 안 나보였던 이엄과 위연 등이 훅 하고 가버린 것을 거론한다.
[25]
승상으로서 촉한 국경의 모든 주력군단 지휘권을 가졌고, 익주목을 겸임하면서 수도 인근의 병력도 전부 관할한다. 심지어 어림군 지휘관 상총도 제갈량의 사람이다. 본인이 독재하는 티를 안 내려고, 업무가 느는 걸 감수해가면서 절차와 법도를 전부 지켜서 실감이 안 나는 거라고 한다.
[26]
이때 헌제가 곧 위나라에게 죽을 것이라 예측하고 슬퍼한다.
[27]
이때 계책을 짜내라고 외딴 곳에 마속, 왕평, 마충, 강유를
납치해 가둬놓고 만두만 줬다
[28]
계책을 수립한 것에 제갈량의 의사가 단 1도 들어가 있지 않았으나, 수립한 계책은 어느 정도는 미흡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런 결점들을 제갈량이 본인의 능력으로 죄다 메워버렸다.
[29]
다른 사걸인 마속, 장완, 비의가 모두 제갈량의 후계자이자 직속 수하였던 것을 감안하면 중흥사걸의 필두로 취급될 것이다.
[30]
실제로 장완은 마속의 처형을 반대하며 살려달라 제갈량에게 청했었다.
[31]
위연이 죽은 후, 군부의 압도적인 실권자가 된 마속이 먼저 장완을 집정으로 추대하는 모습을 제갈량의 앞에서 보여주는 것으로 그를 지지함을 선언했기에 본래 눈에 띄지 못한 공로만 있던 장완의 입지가 급상승했다. 물론 다른 장수들은 군부에 힘이 약한 장완은 제갈량처럼 간섭을 해오지 않을 것이라 여겼지만, 제갈량의 유언에서 마속 등과 논의해서 하라는 것처럼 정작 군부의 최고 권력자인 마속이 장완을 지지하기에 장완은 이후에도 군권에서 문제를 겪을 일이 없었다.
[32]
관직명을 부르지 않고, 자를 부른 것은 친구로서 부른 것이다. 존경하다못해 숭배하는 제갈량이 사망을 앞두고 자신을 생각도 못해본 후계자로 지명한 데다가 군부의 최고 권력자가 된 친구가 자신을 촉한 최고 권력자로 추대해주는 상황에 복잡한 기분이 된 것.
[33]
마속 덕분에 장완은 원 역사와 달리 북벌의 공로로 입지가 비대해진 군부에서 불만세력이 나오지 않은 덕도 보았다. 사실 이도 제갈량의 의도인 것이 보급 위주로 일을 한 탓에 군부에 영향력이 없던 장완과 비의의 입지가 매우 부족했기에 제갈량은 장수들이 보는 앞에서 장완을 후계자로 정했고, 군부의 최고 권력자인 마속이 절친한 친구인 장완을 앞장서서 추대하는 것을 구도를 원했던 것. 물론 마속에게 따로 명령을 내리진 않았지만, 마속이 눈치껏 파악해서 제갈량 생전에 군부의 장수들이 모두 장완을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34]
물론 마속이 속으로 태클 걸듯이 제갈량이 최상류층에 걸맞지 않게 검소하게 살긴 했어도 남긴 유산은 한 마을의 지주 쯤은 되는 재산이었기에 제갈량의 가족들이 먹고 살기에 사실 큰 문제는 없었다. 즉, 장완의 걱정은 괜한 걱정.
[35]
사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마속은 역사를 아는 만큼, 평시에 오나라 싫단 소리를 그렇게 하면서도 정작 북벌 기회를 놓치기 싫어 이성적 생각을 못하는 계한 수뇌부에 답답함을 느꼈지만, 굳이 제갈량 사후 간신히 안정된 계한 정계에 분쟁을 일으켜가며 정책을 주장할 필요는 없다고 느껴 위장군 직위까지 반납하며 오나라 전선에 집중했다.
[36]
장완은 과거의 자신의 행적을 유비에게 목이 안 날아간 것이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대체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자신은 오만함이 마속보다 더했다고 여기고 있다.
[37]
마속은 제갈량의 후계자 자리에 올라서 계한의 최고권력자가 되면 그냥 과로사하기 딱 좋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역사에서 제갈량, 장완, 동윤 등 줄줄이 과로사로 죽어나간 자리가 촉한 최고 권력자이기 때문에...
[38]
마속은 대장군 다음가는 표기장군만 해도 충분히 높은 자리인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표기장군이 높은 자리이기는 하지만 대장군 자리를 자기가 차지하겠다고 선언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마속의 공적이 너무 컸고 비의는 공적이 부족했기 때문에 장완이 감격한 것.
[39]
실제로 외부에서도 보기에도 마속이 권력에 초탈한 것은 특이한 것으로 취급된다. 당장 작중에서 오나라를 속이기 위해서 마속이 장완의 만류에도 스스로 위장군 자리에서 물러날 때, 오나라의 손권과 위나라의 조상은 장완과 마속이 권력다툼을 하다가 마속이 밀려났다고 생각해 두려워하던 유능한 장군인 마속이 없어졌다고 여겨 만만하게 보고 군사를 일으켰다가 대참패를 당했다.
[40]
비의도 후보에 올랐지만, 이 사신으로 갔다간 친오파 낙인이 찍혀 비의가 꿈꾸는 재상 자리는 물건너가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제갈량에게 살려달라면서 애걸복걸하면서 거부했다. 그로 인해 마속이 가게 된 것. 마속은 마속대로 '이거 갔다 오면 출세길이랑 명예는 개박살나는데, 그 대신 금전적인 보상은 섭섭찮게 해줄 거 아냐? 어차피 난 출세고 명예고 관심 없으니까 개꿀 아닌가?'라는 마인드로 좋아했다.
[41]
실제 역사에서도 비의는 암살당한다. 그것도 본래는 유선을 노렸지만 틈이 안 생겨서 꿩 대신 닭으로 타겟이 된다.
[42]
마속은 이 계획을 위해 '대홍려배' 바둑 대회까지 열었는데 비의는 이걸 보고 마속에게 감탄하면서 장완에게 요청해 대사마배 바둑대회를 정기적으로 열 계획까지 짠다. 후일 본인이 대장군이 된 걸 감안하면 진짜로 해마다 열었을지도.
[43]
사실 비의 뿐만이 아니라 장완과 서막, 왕준 등 계한의 다른 인재들과 장수들 모두 오나라의 배신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마속 본인도 자신이 미래 지식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예측할 수 있던 것이지 아니었으면 비슷한 의견이었을 거라고 자평한다.
[44]
제갈각은 비의가 사신으로 오를 찾아왔을 때 그를 만난 적이 있어 깔봤지만, 비의는 군대를 다루는 데도 재주가 있었고 결과는 당연히 오의 공격 실패였다. 참고로 비의는 흥세산 전투에서 왕평과 함께 위군의 진격을 크게 저지한 실적도 있는 사람이다.
[45]
대장군의 자리이기는 하지만 군권은 실질적으로 마속에게 있었다. 마속이 사용하질 않아서 그렇지, 마음만 먹었다면 군부의 장수들이 모두 마속을 따르기 때문. 그러나 비의도 이를 경계하지 않았으며, 실질적으로 비의는 이름만 대장군인 재상의 위치였다. 다만, 군부를 장악한 마속이 비의의 친구이자 지지자이기에 어떻게 보면 군권을 쥐고 있는 것도 맞다.
[46]
이때는 군부에서 물러나 사도로 있는 상태였다. 전쟁 후 군부의 최고 권력자이자 주전파의 거두인 마속이 또 전쟁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한 조정에서 마속이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군부에서 떼어놓기 위해 사도로 추천한 것. 그리고 마속 역시 더 이상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기에 순순히 물러났다. 물론 이때 마속이 사도 임명을 전하는 초주에게 주전파의 거두인 자신을 군부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것이냐고 웃으며 말하자 초주가 당황하는 등, 마속이 거부한다면 답이 없었지만 마속은 순순히 군부에서 물러났다.
[47]
전쟁이 벌어지면 연전연승의 명장(?) 마속을 총사령관으로 계속 쓸 생각이었다. 비의 본인도 군사적 재능은 있는 편이지만 마속만큼은 아닌지라 마속이 은퇴하여 떠난다고 하자 불안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절친한 친우이기도 했던 마속이 떠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둘은 서로간에 공통점도 많은 수십 년을 함께 나라를 이끌어온 친구 사이였다.
[48]
이때도 마속이 붙여준 바둑 잘하는 호위를 데리고 있다. 마속의 뜻을 이미 알고는 있지만, 바둑을 잘하다 보니 마음에 들고 마속의 배려도 생각해서 줄곧 데리고 있는 것.
[49]
원 역사와 달리 암살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갈량 사후 12년만에 사망한 장완과 달리 더 오래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정치가 안정된 덕에 정적도 없었으며, 군부 역시 마속 이후에 군부의 새로운 수장이 된 강유도 정치에 관심이 없는 순수한 장수였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50]
양의는 야심이 컸지만 군사 관련해서는 보급 외에는 딱히 군공을 세울 기회가 없었고, 때문에 자기와 같이 행정가 출신이면서 남만에 이어 가정에서도 제갈량에게 중용된 마속을 질투하고 있었다.
[51]
허나 둘이서 같이 마속을 깎아내린 것도 잠시, 마속이 그만 실수로 '가정은 누구라도 지킬 수 있는 땅이었다.'라고 하는 바람에 양의는 그 대답에 만족한 방면, 위연은 발끈했고 그로 인해 둘이 다시 다투게 되었다.
[52]
위연은 양의가 군사작전을 대하는 태도부터 막되먹었다고 깠고, 처음엔 흘려듣던 마속도 양의가 서막은 난이도에 비해 별로 큰 공도 못된다고 불만을 토하자 위연이 맞다고 인정했다.
[53]
다만 마속도 순순히 당해준 건 아니고 강제기부를 안 당하려고 튀려고 하거나 경제가 정상화되면 깍은 돈 준다는 각서를 받아냈다. 장예 왈 이런 대응을 한 건 마속이 처음이라고.
[54]
량주 자사가 되면, 전쟁복구가 주 목적이라서 옹량주 전체를 탈탈 털어야 하는데, 그러면 실질적으로 촉한 내에서 넘버2 수준의 실권자가 된다. 그래서 이엄과 위연이 탐냈는데 장예라면 위에 적힌 마속의 말대로 권력 논란이 없으므로 적합했던 것. 물론 전선지역에 군사 경험 없는 그가 간다는 것은 불안하지만, 마속이 천수 태수를 자청한 것이 하필 그때였던 바람에...
[55]
마속은 장금이 이것들이 돈 아끼겠다고 신참 관리들을 일부러 험지로 내몰아서 못 버티게 만드는 거 아니냐고 뒷담을 깠다.
[56]
여기서 중앙으로 오면 남은 생 동안 관직 진출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라고 마속이 언급했다.
[57]
참고로 장완과 비의는 마속이 나라를 생각해서 마병을 핑계로 옹량주의 군사적 부분을 담당하려고 일부러 직급을 낮춰 천수 태수까지 자청한다면서 감탄했다. 마병이 나이가 몇이고, 아빠가 마량에 삼촌이 마속인데 설마 그딴 편지나 보냈겠냐고, 그럴 리가 없겠지만 진짜였으면 감찰을 해서 해고해버렸을 것이라고 마속 앞에서 농담 같은 진담을 했다.
[58]
이를 두고 마속은 권력자 집안이 되면 부정부패를 안해도 이런 혜택도 있다고 속으로 한탄한다.
[59]
사실 이 연회는 이막을 살려주기 위해 마속이 짜놓은 판이었다. 일부러 장완에게 제갈량을 떠올리게 해서 연회자리에서 제갈량과의 추억담을 꺼내게 만들었는데, 배알이 뒤틀린 이막이 막말을 시전한 것. 막말을 해도 공적인 자리에서 맨정신으로 대놓고 하는 막말과 사적인 연회 자리에서 술 들어가서 생각없이 내뱉은 막말은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으니, 사형까지는 가지 않고 유배형으로 끝난 것이다. 따라서 마속은 이막이 계속 저러다간 언젠가 반드시 사형을 당할 테니 멀리 유배를 보내 더 이상 어그로를 못 끌게 하면서 쓸데없는 살생은 피하도록 판을 짠 것이다. 물론 다른 중신들은 마속이 이막을 숙청하려고 짜놓은 판이라고 착각하지만....
[60]
마속이 오나라와 가까이 지내다보니 오나라 통수를 잘 쳤다는 말을 마속 앞에서 하고, 마속에게 열렬한 환영을 하는 백성들을 보고 북쪽의 장군들이 더 잘 했는데 백성들이 무지해 오나라에게 망신 준 것을 더 좋아한다고 말한다.
[61]
일단 친가 쪽으로 찾아가 집을 구할 때까지 살 생각이었는데, 친척들이 현 계한 군부 톱인 마속이 겁난다고 쫓아냈다고 한다... 이 시점에서 마속은 작정하면 언제든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가능한 포지션이었고, 연좌제가 당연시되던 시절이라 이막을 도와줬다간 친척들까지 화를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62]
엄밀히 말하면 고증오류다. 조운의 생년이 불명이긴 하나 170년 무렵으로 추정되므로, 따라서 1차 북벌 당시 조운은 60세도 안 되었다. 다만 이는 북벌 당시의 조운을 칠순 노장으로 묘사한 연의를 따라가느라 그렇게 된 것이다.
[63]
기주는 점령도 못한 상태이기에 다스릴 땅 따위는 없는 직위다. 따라서 업무는 보통 기주 출신의 노병들을 돌보는 것.
[64]
원래 연의에선
청강검이다, 작가의 오류.
코에이 삼국지 등에서 청공검으로 나올 때도 있어서 실수한 듯.
[65]
이때 주인공이 의욕을 잃고 물러나려는 의도를 간파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본인 말로는
첫 전투 후 무상함을 느껴 그런 식으로 물러난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또한 본인 역시 유비에 대한 충성이 흔들리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형주에서 백성들을 이끌고 피난을 할 때, 군사들에게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하면서도 백성들을 버리지 않아서 결국 백성들과 군사들 대부분을 잃게 되고, 본인도 청강검과 명성을 얻었지만 이에 염증을 느끼고 의욕을 잃었지만 결국 형주를 차지하게 되면서 백성들을 다시 되찾게 된 것을 보고 유비를 계속 따르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66]
공을 세운 마속에게 시비를 거는데 경험 없는 마속이 뭘 할 수 있었겠냐고, 기절이나 안 하면 다행이고 왕평이 다했을 거라고 하는데 이에 마속은 뜨끔하면서 감탄했다. 감탄한 이유는 자신에게 악의적이지만 군사에 능한 위연답게 진상을 파악했다는 것. 양심이 찔린 마속도 자신이 공을 세운 게 아니라 왕평을 비롯한 이들이 다 했다고 하는데 속으로 이게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67]
다만 마속이 출세에는 시큰둥하고, 위연도 정치엔 재주가 없어 견제의 효과는 미미했다. 전공을 깎아내리려 해도, 위연처럼 숙련된 장군에게는 장합을 상대로 열세에도 버틴 전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는지라 그저 왕평이 다했으리라고 공을 돌리기만 하느라 오히려 공 자체를 저평가하던 양의와 시비가 붙었다.
[68]
실제로 장합과 동귀어진할 때 마속이 자신을 대신해 한실을 위해 뛰어줄 것이라 생각하는 걸 보면 마속의 능력 자체는 믿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69]
마속을 구하려는 건 제갈량 사후 후계자 경쟁에서 마속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빚지우기 과정이었다. 다만 동귀어진은 위연의 의도가 아니었는데 본인은 이기고 돌아올 줄 알았지만 예상과 달리 실력이 비슷했고 무기의 차이로 대도에 가슴이 베여진 장합은 바로 죽고 창에 뚫려진 본인도 곧 죽을 치명상을 입어버린 것.
[70]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헛된 죽음이었던 건 아니다. 무엇보다 원래 목적이던 마속 구출에 성공했고 위군의 장합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았던 탓에 전열의 붕괴로 이어져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마속도 평생의 죄책감이 될 것이라며 울분을 삼키고, 이후 자리에 걸맞은 장군이 된다.
[71]
이때 위연의 회상 속 유비의 말투는 연의 속 인의군자보다는
유비 패왕설에 더 가깝다
[72]
이때, 유비가 자신을 한중 태수로 발탁해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하고 있음이 나오며 여전히 유비를 주공이라 부르며 자신의 주인으로 여기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유비의 아들인 유선이 현 황제이긴 하지만, 위연은 한실부흥의 대의 자체보다도 아닌 척 해도 자신의 노력을 꼼꼼하게 살펴주면서 자신을 알아준 유비를 위해 모든 걸 걸었던 것. 제갈량처럼 위연도 유비의 사람 끌어들이는 힘에 깊이 매료되어 자신의 모든 걸 바친 인물 중 한 명인 셈. 제갈량 역시 마지막에 유비를 선제가 아닌 위연처럼 주공이라 부르며 자신의 주인으로 깊이 여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73]
덕분에 마속이 천수 태수, 강유가 량주 사마로 일할 때 평일에는 강유가 체력단련이라고 굴리고, 주말에는 마속이 휴식이라고 등산을 시키는 병사들에게 있어 환장의 콜라보가 이루어진다.
[74]
위나라의 침공은 물론 동관대전에서도 각각 보병과 기병을 운용하며 손발을 맞췄고, 병주 원정이나 독발수전의 난 등 마속과 최전방에서 콤비를 이뤄 싸우는 일이 가장 많았다. 또한 등장 자체가 마속의 뒤를 이은 후임 참군이니만큼 사실상 마속 라인이라고 봐도 무리는 없다.
[75]
알아서 한 건 아니고 제갈량이 시켰다.
[76]
제갈량의 사망 직전에는 마속이 군권을 이어받는 것을 알자 마속이 제갈량의 후계자가 된 것이라고 확신하며 이를 확정하라고 은근히 눈치를 줄 정도.
[77]
나머지는 오의, 마속, 강유, 왕평.
[78]
사마의는 원 역사에서도 제갈량이 지휘하는 촉군에게 고전하자 최대한 야전을 피하고 방어전을 주로 했지만, 다른 장수들을 대상으로는 고속 기동전도 꺼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확신하는 장익과 요화는 빠른 기동으로 압도했지만, 철두철미한 제갈량과 대치하자 그 빠른 기동이 독이 되어 제갈량에게 간격을 찔려 무너졌다. 아예 이것부터가 제갈량의 계획이라는 언급이 있다.
[79]
유선의 아내는
장비와
하후씨의 딸로 유선의 아들은 하후씨의 외손자다. 또한 정군산 전투에서 황충에게 참살당한 친부
하후연의 시신을 하후씨가 거두어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묘소가 촉한에 있다.
[80]
가상인물. 실제 역사에서는 관흥의 아들 관이가 촉 멸망 때 살해당하며 관흥의 가문은 대가 끊겼다.
[81]
대도독은 형식상 황족인 북지왕 유심이 맡고, 부도독이 지휘권을 가졌음.
[82]
아직 마속과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었기에 원래는 잠만 잘 생각이었는데, 곽향의 미모와 살내음에 그냥 정신을 놓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하룻밤을 치른 상태였다.
[83]
현대로 치면 국립대학의 총장격.
[84]
여담이지만 실제 정사 삼국지에는 마속전이 없으며, '마량전'에 덤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쪽에서는 진수가 마속에게서 직접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므로 마속전 뿐 아니라 중흥사걸 항목들이 모두 원 역사보다 상당히 풍부해질 듯하다. 또한 촉한이 멸망하지 않았으니 유비 세력의 초기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있을 테고 마속이 중반에 기주 자사를 역임하면서 유관장과 오래 함께했던 조운은 물론 기주 출신 노병들과 많은 대화를 했으므로 마속이 이 이야기도 전했다면 촉서(여기서는 공식적으로 계한서가 되겠지만)가 전반적으로 더 두툼해질 것이다.
[85]
원 역사에서는 1차 북벌에 실패한 한이 오의 칭제를 대놓고 반대할 실리가 없어서 반대 여론이 크지 않았겠으나 주인공이 빙의하여 1차 북벌이 성공한 한나라 입장에서는 한적불양립 원칙을 내세우며 오나라와의 단교를 외치는 여론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마속이 은퇴를 목적으로 총대를 매고 오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86]
삼국시대에 폭탄주가 있을리가 없으니 마속은 양국의 동맹과도 같은 술이라며 '동맹주' 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하는데, 마속이 나중에 오나라에 다시 와 보니 술의 파괴력 때문에 현생과 같이 폭탄주라는 이름이 되어 있었다. 사실 삼국시대에 화약무기는 존재하지 않았으니 '폭탄' 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을 확률이 높아 고증오류라 할 수 있지만, 개그성 서술이라 그런지 깊이 따지지는 않는 분위기이다.爆彈이 아니라 暴呑일지도 모른다
[87]
물론 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높게 보는 건 용인술 한정이다. 육손만이 손권이 명군이라 믿을 뿐, 오나라의 신하들마저도 작중의 손권이 명군이라는 생각은 잘 하지 않는다. 반면, 역사를 알고 있는 마속 입장에서 손권이 이후 이궁지쟁을 일으킨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손권의 용인술에 비해 좀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88]
현대에서도 문제인 술 강요나 나이 차이가 20살이나 나는 유비와 조조를 막 부르는 행동 등으로 마속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89]
사실 성과라기엔 오나라의 국익에 도움되는 바는 거의 없다시피했다. 손권 입장에서는 자신의 권위가 일시적으로 올라간 셈이지만, 결국 이 권위를 바탕으로 소집한 대군으로도 합비를 뚫지 못해 기껏 올린 권위가 아무 소용이 없었기 때문.
[90]
다만 제갈각이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육손 숙청은 단순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육씨 가문을 시작으로 오나라 내에서 거대한 힘을 갖고 있는 오군 4대 호족들을 쳐낸 뒤 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궁의 변이 신권을 견제하기 위한 손권의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추정하는 쪽도 있으니 그럴 듯한 셈. 그러면서 그만큼 기득권이 없다시피하므로 손권에게 의지해야 하는 자신들 가문의 세가 더 커질 것을 예측한다.
[91]
그러나 육손의 부재로 오나라가 계한의 뒤통수를 치는 것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데다 오히려 마속의 안배에 교주와 형남을 털린 것을 보면 당장 자신의 권위를 얻자고 기둥뿌리를 뽑은 셈이 되어 실이 너무 컸다. 육손이 살아있었다면 백제성을 통한 익주 점령은 둘째치더라도 상용을 완전히 점령해서 한중을 노리거나, 마속의 교주 점령을 방어하는 정도는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 자신의 권위를 세우자고 유능했던 신하인 육손을 팽해버린 것은 득보다 실이 훨씬 컸다는 것이다.
[92]
이는 오나라가 계속해서 합비에서 막힌 것 때문에 장강 방어선의 중요도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장강 상류에 자리잡은 계한이 수군을 대대적으로 육성하면 파죽지세로 장강을 따라 진격할 수 있기 때문.
[93]
이 와중에 위나라의 20만 대군이 크게 대패하고 군주가 막 바뀌었으며 수도가 위험한 상황인데 어떤 감정도 내보이지 않는 사마의를 보며 뭐 이런 놈이 있느냐고 경계한다.
[94]
그나마 남양을 점령한 것이 손권 본인의 권위 상승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95]
손화의 첩인 하희의 아들인데 원 역사처럼 즉위한 것을 보면 원 역사에서 손화의 4남 중 손호를 제외하면 요절한 것으로 추정된다.
[96]
마속이 손권에게 시달리는 중신들을 구해주려고 폭탄주와 회오리주를 전해준 걸 손권을 꼬드겨 사치에 빠트리려 한다고 판단하는 등.
[97]
당시 양번과 상용은 위나라의 요충지였으므로 촉을 대놓고 배신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오나라에서 양번과 상용을 점령하면 장안을 공격할 길이 열린다. 그런 민감한 요충지를 동맹인 촉나라에 말도 없이 진행했다는 점에서 육손과 오나라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98]
거기다, 주인공이 빙의하기 전의 일이라서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지만 육손은 이릉대전에서 마속의 형 마량을 전사시킨 마속의 원수이기도 하다.
[99]
특히 양번 함락에서 이 사실이 두드러지는데 양양과 번성은 1천 년은 더 지난 뒤의 몽골군이 고대보다 더 뛰어난 공성술을 가지고도 6년이나 포위한 끝에 가까스로 점령한 철옹성이다. 그런 양번을 후대의 몽골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는 공성 기술에 위군보다도 떨어지는 오나라 육군으로 몽골보다 더 짧은 시간에 함락시킨 건, 육손의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증거이다.
[100]
다만 당시 제갈량이 이끄는 촉군과 손권이 이끄는 오군 본대가 각각 장안과 합비로 진군해 격전을 벌이고 있어 관우 때와는 다르게 위나라가 양번을 지원할 틈이 없었으며, 작중에서도 촉한이 장안을 함락시키자 양번의 위군이 동요해서 이룩한 성과이기도 하다고 언급되기에 약간 걸러서 볼 필요는 있다. 그래도 실제 역사에선 둘다 함락시키기는커녕 관우 같은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는 것과 양번의 견고함을 생각하면 이 작품에서 군사적 능력이 엄청나게 버프받았다.
[101]
마속이 육손이 확인할 것이라 예상하고 극정을 시켜 과거 제갈직과 위온에게 준 비단주머니를 받아오라 했는데 그것을 빼앗아 내용을 확인하는데 그 내용이 '그냥 안 될 것 같으면 요동에서 철수하는 게 최고다'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마속은 제갈직과 위온이 자신을 믿어준 데 대한 보답으로 괜히 안 될 싸움하다 죽느니 그냥 빤쓰런하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하려고 준 거였는데, 이게 어쩌다 보니 빠트리기 아주 좋은 함정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눈치챈 마속이 써먹은 것. 결국 육손은 그 편지를 이용해 손권의 요동 지배론을 반대했다가 손제리의 분노를 산다. 게다가 별 것도 아닌 걸로 꼴받는 손권의 성격을 노리고 깨알같이 육손이 국서를 교정할 권리를 행사하도록 유도해 손권의 속을 긁는다. 사실 후자의 경우 육손도 이전에는 행사한 적이 없는 권리라 유명무실한 것에 가까웠으나 마속이 한의 왕족 이름과 겹치므로 피휘해야 한다는 식으로 교정을 유도한 것이다.
[102]
황제가 보낸 편지를 일반 우편 받듯이 받을 수 없고, 하나하나 날씨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예법을 차려서 무릎 끓고,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받은 성지에 적힌 거라고는 유치한 모욕과 조롱뿐인 셈.
[103]
죽기 전 자신은 지금까지 유비를 한번도 영웅이라고 여기지 않고 사람 보는 재주만을 믿고 관우, 장비, 제갈량의 힘을 빌렸을 뿐이라고 여겼기에 유비를 이긴 사실을 대단히 느끼지 않았지만 오늘에서야 영웅으로 인정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자신을 믿지 못한 손권에 대해 굉장히 큰 충격을 느꼈고, 그에 대비되어 사람들을 믿고 맡겨주는 유비에 대해 인정하게 된 듯. 그의 마지막 말은
지인지감. 사람을 보는 눈도 없고, 신뢰도 주지도 받지도 못했던 자신에게 안목이 없었다고 자각한 것이다.
[104]
본인도 뒤늦게야 자신이 손권을 잘못 건드렸다는 걸 깨닫자 마속에게 오나라에 와서 중재 좀 해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물론 마속은 육손의 숙청이 목적이었기에 거절했다.
[105]
아닌 게 아니라 명군이라고 하기는 뭔가 애매한 손권을 명군이라고 진심으로 칭송하는 것은 작중에 육손 뿐이다. 제갈근도 장소도 그런 말은 안하는 판에. 손권의 편지 폭격도 자신이 겉으로나마 죄를 인정하고 군권을 반환했으면 실각은 해도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할 수는 있었으나 본인이 끝끝내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화를 보고 말았다. 결국 그 특유의 성격이 죽음으로 이어진 셈이다.
[106]
한편 누가 봐도 육손과 손권 둘의 혈족이나 동료들은 물론 본인들도 몰랐던 인격적 결점이 맞물려 시너지를 일으켜 발생한 참사였기에 일에 엮인 제갈직과 위온은 물론 이 일로 손권에게 실망하고 오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던 제갈근조차도 마속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제갈직과 위온은 후일 교주 전투에서도 적장 마속에게 막말을 하지 않고 예의를 차렸고, 육손의 부고를 전하러 왔던 제갈근은 아예 속내를 털어놓으면서 동생 가족의 신변을 부탁했을 정도.
[107]
"듣기 싫다! 공격해라!" 사실 나헌이 3시간 넘게 떠들었던지라... 역으로 나헌은 말해보라더니 기습을 가한다며 분개했다.
[108]
마속은 원 역사에 비해 지휘관의 능력 차이와 백제성의 대비 상태를 감안하면 절대 뚫릴 리가 없다고 확신한다. 실제로 백제성이 수비에 고난을 겪었다는 묘사조차 나오지 않는다.
[109]
만일 마속이 욕심을 내서 형북까지 북상했다면 주연에게 공격받았겠지만 딱 형남의 영릉, 계양, 무릉까지 점령하고 물러나는 바람에 실패했다.
[110]
정확히는 '넌 요동 원정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 이렇게 잘 풀렸잖음? 그러니 벌주나 먹어라.'라는 손권의 심중이 껴있었다.
[111]
마속이 이를 보고 손권이 강약약강 성향이라고 생각한다.
[112]
마속이 불교를 들인 목적은 옹양주에 영향을 끼치게 될 강저(羌氐) 등의 이민족 교화에 있었으나, 불교를 들이기 위해 본인의 이름을 딴 사찰을 건립하는 등 어느 정도 정성을 들일 필요도 있었다 보니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13]
마속은 자기랑 같은 사상이라 동질감을 느낀다.하도 징징대서 곧 사라지지만
[114]
원 역사의 장미는 마속과는 상관없이 요동에 파견갔다가 공손연의 배신으로 죽었기에 이 예언은 맞는 게 되었다. 장미 본인은 이 귀인이 마속이라는 걸 인정하지 못했지만.
[115]
주인공은 제갈근의 얼굴 생김새를 은근히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평범하게 깔끔해서 실망(?)한 듯하며, 저 별로 길지도 않은 얼굴을 갖고 당나귀 상이라 놀려서 후대에 길이길이 전해지게 만든 손권이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116]
이때 손권과 육손을 유비와 제갈량보다 뛰어나니 둘처럼 이상적인 군신 관계를 쌓을 수도 있다고 설득하지만, 손권의 대답은 "옆집에서 나무에 부딪치고 죽은 토끼를 얻었으니까, 나도 가만히 기다리라는 것인가?" 라면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일축했다. 심지어 그런 제갈근을 정말 순진해서 총애한다고 모욕에 가까운 발언까지 한다.
[117]
실제로 제갈근에게는
여동생이 2명 있었으며 두 사람 모두 형주의 명문가에 시집을 갔다.
[118]
사실 제갈량이
제갈첨을 너무 늦게 얻었기 때문에 제갈량은 제갈근의 차남
제갈교를 양자로 들인다. 제갈교는 제갈첨이 태어난 다음 해 죽지만 아들
제갈반을 남겼기에 나중에 제갈근 일족이 멸문하자 제갈반은 제갈근 가문으로 원복해 대를 잇는다. 보험은 준비해둔 것.
[119]
동천왕이 타는 말의 갈기가 잘린 것에 대해 고구려 관리에게 물어봤었다. 역사적 사실은 우 태후가 동천왕을 괴롭히기 위해 일부러 자른 것이지만 그걸 밝힐 순 없던 고구려 관리가 왕의 위엄을 보이기 위함이라고 거짓말을 했고 위온은 그것을 그대로 적었다...
[120]
이것도 원래는 거열형에 처하라는 것이 마속이 어찌어찌 달랜 결과이다. 사섭의 일가를 몰살한 자신의 죄에 대한 댓가를 받은 것.
[121]
이것 때문에 마속과 독자들도 비의가 역대급으로 추하게 보인다고 속으로 생각했을 정도다.
[122]
물론 오나라에선 무효로 처리해 조불흥의 승리로 포장한다.
[123]
곽회는 패전 책임을 지기 위해 후미를 맡다가 죽었고, 진군은 이간책에 걸린 전예를 보며 과거 유비를 섬긴 점이 꼬투리 잡힐까봐 스스로 은퇴했다. 죄 없는 전예의 가족들은 무고함이 밝혀졌음에도 조위의 정치적 체면을 위해 처형당했다.
[124]
여기서 약간 옥의 티가 있는데, 장완이 조식을 두고 진사왕이라고 칭한다. 조식이 진왕(陳王)에 봉해진 것은 232년이고, 사왕(思王)은 조식이 죽은 후에 받은 시호이다. 당시 시점은 228년에 벌어진 1차 북벌이 끝나고 1년 가량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조식의 영지는 진이 아닌 동아(東阿)였으며, 따라서 진왕이 아닌 동아왕으로 서술해야 맞는 말이다. 물론 현대인인 주인공이나 소설을 보는 독자들 입장에서야 상관없지만, 명백히 작품 속의 고대인인 장완이 당시 조식을 진사왕이라 부르는 것은 오류.
[125]
실제 역사에도 있었던 일이다. 자세한 것은
문서의 3.2 문단을 참조.
[126]
황제가 뒤에 있는데 도박수인 결전을 제안하거나, 자신들의 건국 명분을 위태롭게 만드는 헌제 유협을 앞세우는 등. 실제로 헌제의 경우는 위나라 내의 한실 지지 잔존세력을 움직이게 만들어 주살하는 강수를 두게 만들어, 위의 국제적인 위신을 크게 손상시켰다. 게다가 무고한 전예의 가족들을 조정의 체면을 위해 모조리 주살하자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제대로 위기감을 가진 모양.
[127]
이에 조예는 제갈량을 발굴한 유비를 예로 들며 사마의를 변호했으나, 조진은 밑바닥부터 시작해 무일푼으로 온 천하를 떠돌며 안목을 기른 유비가 인재를 보는 통찰력만큼은 조예보다 뛰어남을 지적했다.
[128]
개인적인 복수심도 있었지만 그 역시도 가정에서의 패전이 장안의 위기를 가져온 흐름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위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 가정에서의 패전을 안겨준 장본인인 마속을 죽이려 했던 것.
[129]
둘의 실력은 비슷했지만 둘 모두 자신감이 넘치는 성격 탓에 상대를 가볍게 여겨 간단히 이길 줄 알았다. 사실 장합은 그냥 말을 몰아 병사들에게 도망치면 그만이었지만 자존심 탓에 굳이 일기토에 응했다. 위연도 그걸 예상하고 도발한 것.
[130]
게다가 애초에 위연의 목적은 마속을 구하는 것이였으니 목적을 달성했지만 장합은 마속을 잡으려다 죽었으니 상황 자체도 촉이 유리했다. 마속군을 몰아넣던 장합군은 장군이 죽자 지휘의 혼란에 빠진 반면, 마속은 위연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에 열세에 몰리던 군을 정비해 순식간에 장합군을 역으로 몰아쳤다.
[131]
왕쌍의 기병술에 호응을 해주며 말을 지치게 만들고 왕쌍이 다시 돌아올 때 여물을 뿌려 말의 기동을 막았다.
[132]
촉군의 진지를 점령해 사용했는데, 진지의 창고에는 천장 위쪽에 시간이 지나면 오물을 뿌리는 장치가 숨겨져있었다. 해당 장치가 작동되자 위군이 넣어둔 식량에 오물이 뿌려져 상당량이 썩어버린다. 이러한 상황에선 마속과 강유를 패퇴시킨다하더라도 더 이상의 진군은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고 당연히 이때를 노린 촉군의 맹공에 패퇴한다.
[133]
도굴은 정말 심각한 수준의
패드립 +
고인드립이다. 효렴이라고 해서 효도만 잘해도 관직에 추천받을 수 있었던 후한~삼국시대 기준 가치관으로는 당장 찢어 죽여도 아무 말 못할 중죄. 오히려 마속의 동료들이 도굴꾼이라니, 아무리 도발이라도 그렇지 그런 패드립은 좀...이라며 마속을 말린다
[134]
학소가 있던 진창성이 큰 성이 아니라서, 비석 같은 큰 물체들을 버리는 것이 들키기 쉬운 환경이긴 했다. 차라리 끝까지 모르는 척 했으면 오히려 들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35]
원 역사와 달리 진창성에 위군이 1천명이 늘어서 총 2000명 정도가 있었지만, 그래도 성 안에 적군이 800명이나 진입했으니 질 수밖에...
[136]
이때 적인 마속만이 자신의 진짜 의도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허탈해한다. 일가 건은 안타까운 것이 전예는 반년만 있다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으니 가족들이라도 그때까지 형을 미뤄달라고 유언을 남겼고, 그대로 증명되었으나 사마의는 조정의 체면을 위해서 그들을 전부 죽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결국은 죽여버렸다.
[137]
마속이 수비자 입장이라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다. 특히 상류에서 배로 도강하려는 것처럼 짰을 때는 마속의 주력이 낚여서 그대로 왕평의 잔존 병력을 격파하고 도하에 성공할 뻔 했으나, 역풍항해를 연구하느라 배에 익숙해진 마속이 먼 발치에서 얼핏 보기만 하고도 가짜라는 걸 눈치채고 돌아오는 긴급히 복귀하는 바람에 성공 직전에 실패한다.
[138]
물론 진태도 유능한 장수인데다가 왕평의 병력이 겨우 5천명이라서 압도적으로 몰아붙이기는 했다.
[139]
위나라 최고의 군사는 사마의지만 촉한의 제갈량에게 대패한 경력이 있고 때마침 손권을 설득하기 위해 오나라로 나가 있어 제외되었다.
[140]
심지어 반 사마씨 파벌이던 장군들은 전쟁 이후 사마의에게 숙청당했다.
[141]
권하는 왕평이 제갈량하고 친척이라고 하자 본인 스스로가 제갈량 같은 역적하고 같은 가문인 게 수치스럽다고 외친다.
[142]
이때 계한만 아니었으면 천하가 평화를 맞을 것이라고 한다. 조위의 많은 선비들은 관도대전 이후 중원 제일세력이던 조위를 지지하는 것이 난세를 마치고 천하를 위한 것임이라 생각했다고. 이에 제갈량은 그 명분이면 조위가 자기들 힘으로 해결 못해서 헌제까지 내세운 시점에 끝장난 것 아니냐고 반박한다.
[143]
다행히 내부 분열은 장완이 적절하게 대응해서 막아냈다.
[144]
장기전으로 가도 이긴다는 건 아니다. 이미 기세를 탄 촉군이 하나하나 위의 성을 함락하고 있는지라 그냥 시간을 끄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지킬 것만이라도 지키면서 위나라가 우세한 국력을 촉나라 방면에 제대로 투사할 시간을 벌자는 의도.
[145]
헌제 유협에게 군대를 맡겨 촉군을 막게 한 것. 이는 명분을 중시하는 촉의 약점을 찌른 것이다. 물론 사마의 본인도 이것이 너무나도 초강수인 것을 알고 있는지라 이 계책을 듣고 조예가 자신의 목을 치더라도 원망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146]
정확히는 비의와 군사 일부를 떼어 상용으로 보낸 것은 맞다. 그러나 빗자루 등을 이용한 눈속임으로 대군이 움직이는 것처럼 위장한 뒤, 그대로 위나라의 긴장이 풀릴 때까지 매복하고 홍농을 기습한 것.
[147]
일단 위나라라는 왕조 자체가 안전해야 나중에 찬탈을 하든 실권자가 되든 할 것이기에 당장 군사적 가능성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소와의 대화에서도 위나라는 그렇게 쉽게 망할 국가가 아니라며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148]
미래지식을 알고 미래 명장들의 방식을 활용한 것이거나 미래지식을 기반으로 전투 상황에 따라 다르게 움직이다 보니 일정한 스타일이 없는 마속이 어떤 인물인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아 제갈량과 육손도 알 수는 있었다며 당황하고, 전쟁 내내 마속이 어떤 유형의 인물인지 끝내 파악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한다. 그런다고 행보를 기반으로 적을 간파하는 능력이 어디가는 건 아니라서 나헌이나 왕준은 사마의의 맞춤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으며 각기 마속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149]
본작의 사마의는 상대방을 분석해서 맞춤 전술을 구성하는 것이 주특기다. 그런데 본작 마속의 스타일은 미래 지식을 통해 상대방의 행보를 알아서 그걸 토대로 맞춤 전술을 구성하는 것. 사마의의 주특기에 미래의 지식이 더해진 상위호환이므로 더러운 미래인 치트에 밀려버린 것이다. 물론 이런 거 빼고 기본기로 정직하게 붙으면 마속이 밀리겠지만, 이미 최종전이라 딱 한 번만 사마의를 흔드는 정도로도 충분했으므로 딱히 상관이 없었다.
[150]
진태의 의견대로 형북의 위군은 오나라 때문에 데려올 수 없지만, 업 주변의 병력은 데려올 만도 했다. 그러나 사마의는 바로 얼마 전에 업을 기습적으로 공격해서 조상을 실각시키고 위나라의 권신이 되었던 탓에 똑같은 짓을 절대로 할 수 없었다. 도리어 그런 말을 한 진태를 경계한다.
[151]
촉과의 전쟁 3번에서 연이은 패배 + 위나라 정계의 혼란 등.
[152]
사실 순수한 군사적 소양과 지략만 따지면 사마의가 더 뛰어날 수도 있겠지만, 마속의 진정한 강점은 언제든 (역사 속의 다른 명장들을 본떠서) 타입을 바꿔가며 전략전술을 세울 수 있는 점이었기에 사마의에게는 제갈량보다도 더욱 난적이었다.
[153]
198화에서는 막바지에 아버지와 합류해 도망치는 장면이 있었는데, 작가도 여기까지 사마의에게 우세한 장면을 만들어주는 건 불공평하다고 여겼는지 다음 화에 돌아와서 싸우다 죽었다.
[154]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원 역사에서 서진의 건국은 (조모 시해는 넘어가더라도) 촉한을 정벌한 공헌이 아니었으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런데 작중에서는 위나라의 영토 회복 없이 벌어진 일이 되니 역적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게 되었다.
[155]
위나라에서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던 하후씨의 하후패가 계한에 귀순했고, 우대받는 상황에서 아무런 정당성도, 내세울 공로도 없는 것을 넘어서 탄핵받아 마땅한 사마씨가 멋대로 찬탈을 했다 보니 위나라의 귀족층들이 반발해 차라리 계한에 내통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156]
낙양이 사마씨의 병력에 장악당했을 때 조상은 낙양 외부에 적잖은 병력과 무엇보다 적법한 황제 조방을 데리고 있었다.
[157]
이때 까막눈인 왕평이 제갈량의 명령서를 읽는 고증오류 장면이 있다. 뭐 고상과 같이 읽었으니 그냥 고상이 읽어줬다고
뇌내보완하면 전개상 허점이 생기는 오류는 아니다.
[158]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운 것은 이렇게 된 이상 헌제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 뻔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159]
실제 역사에선 제갈량과 같은 해인 234년에, 암살당한 것도 아니고 조용히 자연사했다. 졸지에 명줄이 3년이나 줄어들었으니, 대체역사의 피해자라면 피해자. 실제로 주인공도 자신이 역사를 바꾸는 바람에 유협이 애꿎은 희생을 당한 게 아니냐며 내심 씁쓸해했다.
[160]
사실 대체역사로 인해 중국의 삼국시대 역사가 격변했기에 당연히 그쪽과 맞닿아있는 한반도의 삼국시대 역사도 크게 변할 것이 뻔하기에 작품이 복잡해지는 걸 막기 위해 일부러 뺐다고 볼 수 있다.
[161]
중국어를 못하다보니 손권의 술 강요가 노신을 공경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162]
성이 소씨인 태후가 아니라 작은 태후라는 뜻의 小太后.
[163]
교주 전체의 유력자라고 할 수 있는 사섭과 그 가문 사람들은 과거 여대에 의해 비참하게 죽었다. 만약 살았다면 통솔력 있는 지도자 밑의 교주가 지금처럼 차별받거나, 미개척 상태로 남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다만 이 때문에 교주 사람들이 손오에 이를 갈게 된 것이기도 하다.
[164]
다만 원 역사에서는 사마씨의 진나라가 교주의 반란을 유도해놓고는 나몰라라 하는 바람에 큰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작중에서도 계한 최고의 장수인 마속이 아니었으면 아무리 꼬셔도 봉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