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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1:17:15

쑤치

蘇起(소기) / Su 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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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저서4. 기타5. 선거 이력

1. 개요

대만의 정치인, 관료. 1990년대 이래 중국(즉,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양안관계 정책에 관한 다수의 직책을 역임했다. 중국국민당의 외교안보 브레인이다.

그의 경력이 곧 중국과 대만 양안의 대화, 교류, 협력 역사와 거의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양안관계에 큰 성과를 남겼다. 반대로 민주진보당으로 대표되는 대만 독립 진영에 반대하는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중국 본토의 저장성에서 이주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71년 국립정치대학 외교학과를 졸업했고, 이후 미국으로 유학하여 1980년과 1984년에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정치학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하다가 1984년 귀국했고, 모교 산하의 국제관계연구중심(國際關係研究中心)에서 5년 동안 연구원 생활을 했다.

1990년대 초 리덩후이 총통이 중국과의 양안 교류, 대화를 본격화하면서 정계에 본격 입문하기 시작했다. 1992년 집권 중국국민당의 대륙공작회 부주임에 임명되었고, 1993년부터는 대만 정부의 양안관계 전담 부처인 행정원 대륙위원회(한국의 통일부에 해당) 2인자인 부주임위원(즉, 차관)으로 3년 동안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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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대륙위원회 재직 시절)

리덩후이의 임기 말기인 1999년에는 대륙위원회 위원장(장관 격)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양안 정책의 책임자로서, 이 무렵부터 대만 독립성향을 점차 드러내기 시작한 리덩후이 총통과 시각 차이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퇴임하기 직전, 1992년에 중국과 합의된 "하나의 중국에 동의하되, 해석은 각자의 편의를 따른다"(一個中國,各自表述)는 원칙을 92공식(九二共識. 1992 Consensus)으로 처음 명명했는데, 이 표현은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2004년 민진당의 천수이볜 총통이 재선에 성공한 같은 해, 국민당 소속의 입법위원으로 당선되어 대만 독립에 대한 정치적 반대를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천수이볜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대형 무기도입 사업(예: P-3 대잠초계기, 재래식 잠수함, 패트리어트 요격 미사일, 슝펑 순항미사일)이 "국방을 핑계로 분리 독립을 추구하려는 속셈"이라면서 관련 예산의 배정을 봉쇄, 무산시켰다.[2] 2005년에는 롄잔 국민당 주석의 대륙방문에 동행했다.


(총통부 국가안전회의 비서장 시절. 마잉주(오른쪽)와 함께)

2008년 마잉주의 총통 당선으로 국민당이 다시 집권하면서 총통부 국가안전회의 비서장(한국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 해당)에 임명되었고, 이후 양안관계 정상화 및 발전을 비롯한 마잉주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 노선을 주도했다. 그 결과 2008년 말 중국 본토와의 무역, 우편, 왕래를 전면 개방하는 대삼통이 성사되었고, 2010년에는 양안 자유무역협정이라고 할 수 있는 ECFA가 타결되는 초석을 닦았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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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에는 또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과 회담을 가졌다. 공직을 떠난 후에도 타이페이 포럼(台北論壇)을 창립,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며, 대만의 대표적인 양안관계 전문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민진당의 차이잉원이 차기 총통으로 당선된 지 1개월 후인 2016년 2월 23일, 강연을 통해 "'유사시 중국이 대만에 군사력을 동원하지 않을 것'이라거나 '미국이 대만을 군사적으로 도와줄 것'이라는 오판은 위험하다", "양안 문제는 이미 대만이 무엇을 하느냐 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중국이 대만의 언행을 믿어주느냐 여부에 달려있다"면서 우려를 표명했다. 관련 내용

3.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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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타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4 제6대 중화민국 입법위원 선거(비례대표 13번) 중국국민당 3,190,081 (32.83 %) 당선 초선

[1] 공교롭게도 마오쩌둥이 본토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바로 그날이다. [2] 당시에는 천수이볜의 민진당이 입법원에서는 과반 미달이었기 때문에, 국민당이 반대하는 예산은 통과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3] 그러나 2010년 2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인한 여론의 비판으로 사임했고, 결국 ECFA가 체결된 그해 6월에는 공직을 떠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