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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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릉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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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사적 제181호 | ||
신문왕릉 神文王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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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453-1번지 |
분류 | 유적건조물/무덤 | |
면적 | 15,463㎡ | |
지정연도 | 1969년 8월 27일 | |
제작시기 | 통일신라 | |
위치 |
神文王陵
사적 제181호
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신라 제31대 국왕 신문왕 김정명의 능.
2. 역사
신문왕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낭산 동쪽에 장사지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신문왕릉은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전 시대의 신라왕릉보다 좀 더 장식물이 늘어나고 섬세해진 것이 보인다.[1] 경주시와 울산광역시를 잇는 7번 국도 바로 옆에 있고 신문왕릉 정류장에 서는 경주시 시내버스도 대단히 많아서 접근성은 매우 좋은 편이다. 인근에 경주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선덕여왕릉, 효공왕릉 등의 유적이 있으며 동해선 철길에서도 상당히 가깝다.2.1. 효소왕릉설
사실 이 곳은 신문왕의 능이 아니라 아들인 효소왕의 능이라는 견해가 있다.[2] 신라왕릉은 각자 수 년~수십년의 텀을 두고 만들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양식이 변하는 흐름이 존재하는데, 일단 이 무덤은 주인이 명확하게 밝혀져 있는 두 왕릉인 무열왕릉과 성덕왕릉 사이 어떤 왕의 왕릉인 것은 거의 확실하다. 둘레돌 같은 석물 형태가 두 시대 사이 과도기기 때문이다.효소왕릉설의 근거는 황복사 3층 석탑의 금동사리함기에 새겨진 명문에 두고 있는데, 본래 황복사 삼층석탑은 신문왕이 692년 7월에 죽자 왕후와 왕위를 계승할 효소왕이 건립하였고, 몇년 뒤에 신목왕후와 효소왕이 죽자 706년에 신문왕의 차남 성덕왕이 불사리나 다라니경을 넣어 죽은 신문왕, 신목왕후, 효소왕의 명복을 빌었다는 것이다.
황복사는 원래 가장 먼저 승하한 신문왕을 위해 건립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경주 낭산[3] 동쪽에 있는 황복사 터 옆에 당시 신라 왕릉 주변에 장식하던 십이지신상이 파괴된 채로 흩어져 있으며 봉분도 무너진 채 남은 능터가 하나 있다. 그것이 진짜 신문왕의 능이고 배반동의 신문왕릉은 사실 효소왕의 능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배반동의 신문왕릉은 낭산의 '남쪽'에 위치한다. 그러나 구황동 왕릉지라고 불리는 이 유적을 2017년 발굴조사했는데, 이 과정에서 여기가 실제로 왕이 묻힌 무덤이 아닌 미완성된 왕릉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 매장 주체부가 확인되지 않고[4] 일부 석재는 통일신라 시대 건물지의 기단을 보수하는 데 사용된 점 등을 고려하면 이 유적은 신문왕릉이 아닌 효성왕의 가릉으로 여겨지는 것이 맞다.
2.2. 진평왕릉설
다른 의견으로는( 이근직 전 경주대 교수의 견해) 황복사 터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진평왕의 능 진평왕릉이 위치하고 있는데, 사실은 이 진평왕릉이라 전하는 능이 신문왕의 능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5] #
[1]
예를 들면 여기서 가까운
선덕여왕릉과 비교해 봐도 그렇다.
[2]
이근직 교수는 현재
효소왕릉으로 알려진,
경주시
조양동에 있는
성덕왕릉 옆의 대형 고분은 실제로는 효소왕이 묻힌 것이 아니라 어느 신라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하였다.
[3]
남산이 아니며 낭산이 맞다.
[4]
왕릉의 둘레를 이루는 호석만 발견되었다.
[5]
사실 이건 신문왕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라왕릉 중 능 주인이 정확히 확인되는 왕릉은 몇 기 안 된다. 능의 주인이 비교적 정확하게 밝혀진 건 위치상 거의 확실해 보이는
선덕여왕릉이나, 신라 당시 왕릉비의 일부가 발견된
무열왕릉과
흥덕왕릉 등이 있다. 그 외에
원성왕릉,
성덕왕릉과
헌덕왕릉도 실제 그 왕의 능이 확실하다고 인정되는 편. 그 외 대부분의 신라 왕릉은 '전(傳) ~왕릉'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