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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13:33:31

법흥왕릉

신라 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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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176호
경주 법흥왕릉
慶州 法興王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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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산63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고대
면적 72,816㎡
지정연도 1969년 8월 27일
제작시기 신라 법흥왕(서기 540년경)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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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tong.visitkorea.or.kr/1616831_image2_1.jpg

1. 개요2. 내용3. 외부 링크4. 사적 제1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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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法興王陵.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에 위치한 신라 제23대 국왕 법흥왕 김원종의 능이다. 1969년 사적 제176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

삼국사기에 의하면 법흥왕은 재위 27년 승하해 애공사(哀公寺) 북쪽 봉우리에 장사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서도 애공사 북쪽에 있다고 되어있으며, 현재 법흥왕릉 남쪽에는 애공사지 삼층석탑이 있어 법흥왕릉으로 비정된다.[1]

겉으로 잘 드러나진 않지만 봉분 북쪽에 받침석으로 보이는 괴석이 일부 드러나 있어 봉분 자락에 호석을 두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능 뒷부분은 반달 모양으로 토성 형태로 둘러싼 사성이 있는데, 이건 고려시대 이후부터 나타나는 현상이라 나중에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왕릉 이외에 주변의 상석을 비롯한 석물들은 조선 시대 이후에 추가로 설치한 것이다.

법흥왕릉은 신라왕릉 형태가 변화하는 경계에 있는 왕릉인데, 법흥왕 이전의 신라왕릉은 주로 경주 시내 중심가 근처 평지에 거대한 규모로 조성됐으나, 법흥왕릉부터는 능의 규모도 상당히 줄어들고 시내를 벗어나 근교의 산자락 아래에 조성된다. 그리고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법흥왕 이전 왕들은 승하한 후 어디에 왕릉이 있는지 제대로 설명이 안 돼 있는 게 많은데, 법흥왕부터는 어느 절이나 어느 산에서 어느 쪽에 장사지냈다는 식으로 기록이 상대적으로 자세하게 남기 시작한다. 덕분에 어디의 고분이 어느 왕 왕릉이라는 게 신빙성이 이전 시대보다는 대폭 늘어났다. 묘제도 이 때를 계기로 대릉원 스타일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굴식돌방무덤으로 바뀌어간다.

3. 외부 링크

4. 사적 제176호

신라 23대 왕인 법흥왕(재위 514∼540)의 무덤이다.

법흥왕은 신라를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체제로 완성시킨 왕이다. 왕권강화를 위해 상대등과 병부를 설치하였고, 520년 율령을 반포하였다. 532년 금관가야와 합병하여 낙동강유역에 처음 진출하였다. 신라 처음으로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중국 양(梁)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527년 이차돈이 순교하면서 불교를 국가종교로 수용하고 고대국가의 이념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높이 2m, 지름 14m로 삼국시대 신라 왕의 무덤으로는 작은 편이다. 무덤 아래에는 둘레돌을 받쳤던 자연석이 있다. 법흥왕 이전의 왕 무덤은 평지인 경주 무덤들에 밀집되어 있어 소재파악이 어려우나, 그 이후의 왕 무덤은 구릉이나 교외에 2∼3기씩 따로 자리하고 있으며 소재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변화는 왕 무덤의 형태 변화와도 연관되는 듯한데 그 변화의 시작을 법흥왕릉에서 찾아 볼 수 있어 중요한 곳이다.

※(신라법흥왕릉 → 경주 법흥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1] 한편 학계에서는 서악동 고분군의 4호분을 법흥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의 법흥왕릉은 현대처럼 체계적인 고고학적 지식이 존재하지 않았던 조선 영조대에 김씨 문중에서 비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