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시어도어 프렐링후이슨 Theodore Frelinghuysen |
|
|
|
출생 | 1787년 3월 28일 |
미국 뉴저지 프랭클린 타운십 | |
사망 | 1862년 4월 12일 (향년 75세) |
미국 뉴저지 뉴브런즈윅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NNNcm, NNkg, 혈액형 |
가족 | 이름 (관계) |
학력 | 뉴저지 대학교 (법학 / 학사) |
종교 | 네덜란드 개혁교회 |
직업 | 정치인 |
최종 당적 |
|
서명 |
|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정치인.2. 생애
2.1. 초기 생애
1787년 뉴저지 주 소머셋 카운티의 프랭클린 타운십에서 명문가[1]의 자제로 태어났다. 1804년 뉴저지 대학교[2]를 법학과를 졸업했고 그의 형 존과 변호사 출신 상원의원인 리처드 스톡턴에게 법률 공부를 받은 후 1808년 변호사가 되었다. 1809년 샬롯 머서와 결혼했으나 그 해 사별했으며 친자식을 보지는 못했고 요절한 동생의 아들을 입양해 길렀다. 미영전쟁이 발발하자 자원병을 이끌고 참전했다.2.2. 정치 활동
1817년 뉴저지 주 법무장관이 되었고 1829년에는 뉴저지 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앤드루 잭슨의 인디언 추방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대했지만 잭슨 측은 프렐링후이슨이 자신의 복음주의 종교관을 정치와 연결시켜 정교분리를 무시했다고 비판했고 인디언 추방법은 방해 없이 통과되었다.상원의원 퇴임 이후에는 1837년부터 1838년까지 뉴어크 시장을 지냈고, 184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휘그당의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러닝메이트는 헨리 클레이로 도덕성에 설왕설래가 있었는데 청렴하고 정직한 이미지의 프렐링후이슨을 붙이면 클레이의 이런 약점을 보완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과거의 인디언 추방 반대로 남부 유권자의 외면을 받았고, 가톨릭을 극도로 적대시하는 근본주의 개신교 단체의 수장임이 드러나자 뉴욕주에 대규모로 거주하던 아일랜드계 미국인의 분노를 사 본선에서 낙선했다.
2.3. 기타 활동
1839년부터 1850년까지 뉴욕 대학교 총장을 지냈고, 이후 1862년까지는 럿거스 대학교의 총장을 지냈다. 미국해외선교위원회 위원장, 미국성경협회 회장, 미국소책자협회 회장, 미국주일학교연맹 부회장, 미국식민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미국식민협회 소속으로 유색인종 자유민을 해외로 이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1862년 4월 12일 뉴브런즈윅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