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가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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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가비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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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 |||||||||||||||||
1981 |
1974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MVP | ||||
( 신시내티 레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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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가비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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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모건 ( 신시내티 레즈) |
1978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MVP | ||||
더스티 베이커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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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가비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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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 스타젤 ( 피츠버그 파이리츠) |
1984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MVP | ||||
게리 매튜스 ( 필라델피아 필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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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가비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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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 스미스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1974년 ~ 1977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1루수 부문 골드 글러브 | ||||
마이크 조르겐슨 ( 몬트리올 엑스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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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가비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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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에르난데스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바비 본즈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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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가비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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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매드락 ( 시카고 컵스) 존 매틀락 ( 뉴욕 메츠) |
돈 서튼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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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가비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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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브 파커 ( 피츠버그 파이리츠) |
필 니크로 (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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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가비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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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싱글턴 ( 볼티모어 오리올스) |
1978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안타왕 | ||||
데이브 파커 ( 피츠버그 파이리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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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가비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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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리 템플턴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1980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안타왕 | ||||
개리 템플턴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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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가비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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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라델피아 필리스) |
보유 기록 | |
내셔널 리그 연속 경기 출장 | 1,207경기[1]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번호 6번 | ||||
론 페얼리 (1961~19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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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가비 (1969~19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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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버트 카브레라 (2003)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등번호 6번 | ||||
팀 플래너리 (1980~19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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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가비 (1983~1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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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모어랜드 (1988) |
키스 모어랜드 (1988) |
→ | 영구결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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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f241d><colcolor=#ffffff>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No. 6 | |
스티븐 패트릭 "스티브" 가비 Steven Patrick "Steve" Garve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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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1948년 12월 22일 ([age(1948-12-22)]세)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플로리다 주 탬파 |
학력 | 미시간 주립대학교 |
신체 | 178cm / 87kg |
포지션 | 1루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68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3번 ( LAD) |
소속팀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69~1982)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1983~1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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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뛰었던 미국의 前 야구선수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활동했다. 주 포지션은 1루수.다저스 시절이 전성기였고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영구결번이기도 하다. 선수 시절의 별명은 'Mr. Clean(바른 생활의 사나이)'으로, 깨끗한 사생활과 야구밖에 모르는 이미지로 인해 붙여졌다. 하지만 이 별명은 은퇴 후 무색해지고 마는데, 자세한 것은 후술. 또한 개인 성적 측면에서도 세이버메트릭스의 도입으로 선수 시절의 평가와 현 시점에서의 평가가 꽤나 달라진 선수이기도 하다.
통산 성적은 19시즌 .294/.329/.446, OPS 0.775, 순장타율 .152, BB/K 0.48, wRC+ 116, 2599안타 272홈런 1308타점 83도루.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플로리다 주 탬파 출신으로 뉴욕 주 롱아일랜드에서 이주해 온 부모님[2] 밑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부터 브루클린 다저스와 뉴욕 양키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등의 메이저리그 팀 스프링캠프에서 배트보이 역할을 하며 야구와의 인연을 시작했고, 다저스 스프링캠프에서 길 호지스를 본 뒤 그처럼 되겠다며 야구 선수의 길을 지망하게 된다. 이때 부모님에게 야구가 하고 싶다며 했던 말이 참으로 걸작이다.[3]이후 챔벌레인 고등학교에 진학해 야구부에서 맹활약하던 도중, 1966년 드래프트에서 미네소타 트윈스에 3라운드 전체 60순위로 지명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미시간 주립대학교(MSU)로 진학한다. 가비는 여느 1라운더들이 그렇듯, 대학교에서 야구선수로서도 탁월한 기량[4]을 뽐냈지만 미식축구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코너백, 그 중에서도 주로 디펜시브 백으로 활약한다.[5] 이런 만능 스포츠맨 가비를 그냥 보고만 있을 메이저 리그 구단들이 아니었고, 결국 1968년 드래프트에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가 그를 1라운드 전체 13순위로 지명하며 가비는 어린 시절 배트보이를 했던, 그리고 아버지가 열성적으로 응원했던 그 팀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6]
2.2.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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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절. |
이후 1972년까지는 주로 백업 3루수로 출장[7]하면서 입지를 넓혔으나 불안한 수비를[8] 보여줬고, 1972년 시즌 후 팀의 주전 1루수였던 웨스 파커[9]가 은퇴를 선언하면서 1루에 빈 자리가 생기자 3루수에서 1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하며 그 자리를 채운다. 1루 전향 후 첫 시즌인 1973년, 가비는 비록 규정 타석은 채우지 못했지만(366타석) .304의 타율에 8홈런, 50타점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렇게 맞이한 1974년, 가비는 자신의 1루 첫 풀타임 시즌을 최고의 해로 만든다. 타율 .312에 정확히 200안타를 치며 정교함을 과시했고, 21홈런과 111타점을 기록하면서 파워와 클러치 면에서도 빼어난 모습을 보이며 내셔널 리그 MLB MVP에 올랐다.[10][11][12] 뿐만 아니라 그 해 올스타전에 선발 출장해 동점 2루타를 뽑아내는 등 4타수 2안타 1타점의 활약으로 올스타전 MVP에 올랐고, 내친 김에 골드 글러브까지 수상하며 수비 능력 또한 인정받았다. 다저스가 지구 우승을 거두며 올라간 생애 첫 포스트시즌에서도 가비는 NLCS에서 타율 .389에 2홈런, 5타점을 기록하며 맹활약[13]했고, 이어진 월드 시리즈에서도 타율 .381의 맹타를 휘둘렀지만 당시 상대는 한창 최강팀 포스를 풍기며 직전 2년 간 우승을 거머쥐었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결국 첫 월드 시리즈는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이후로도 그는 전성기를 맞이하며 1970년대 내셔널 리그 서부지구의 패왕으로 군림하던 다저스의 1루를 굳건히 지킨다. 1977년을 제외하면 1974년부터 1980년까지 매 해 3할이 넘는 타율과 200안타[14]를 기록했고, 매 시즌 평균 20홈런-100타점 내외를 기록하는 등 장타 및 클러치 스탯에서도 중심 타자다운 면모를 이어갔다. 이 기간 동안 7년 연속으로 올스타전에 선발 출장한 것[15]은 덤이다. 또한 1974년부터 1977년까지 4년 연속 골드 글러브를 수상하면서 다저스 황금 내야진(스티브 가비(1루), 데이비 롭스(2루), 빌 러셀(유격), 론 세이(3루))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여기에 가비는 잘생긴 외모와 특유의 붙임성 좋은 성격으로 팬과 기자들과도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기에, 야구도 잘하고 외모도 출중한데다 팬들과도 소통할 줄 알고 바른 생활 사나이였던 그가 다저스 최고의 인기 선수로 올라서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16] 다저스는 이런 가비의 활약에 고무되어 1977년 시즌 시작 전에 6년 197만 1천 달러 짜리 장기계약을 가비에게 안겨주며 대박 계약까지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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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뉴욕 메츠와의 원정 경기 전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가비. 이렇듯 그는 인기 스타였다. |
콩라인의 시련을 뒤로 하고 맞이한 1981년, 가비는 선수노조 파업으로 시즌이 어수선하게 진행된 점을 고려하더라도 커리어 로우급 성적을 찍으며(타율 .283, 10홈런 64타점) 풀타임 출장 이후 처음으로 OPS 0.8 이하를 기록하는 등 조금씩 내리막을 걷기 시작한다.[18] 하지만 다저스가 전기리그에서 우승한 덕에 다시 밟은 포스트시즌 무대에서 가비는 자신이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면서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NLDS에서 타율 .368에 홈런 2개를 기록하며 팀을 NLCS로 이끌었다. 이어진 몬트리올 엑스포스와의 NLCS에서는 잠시 주춤했지만[19] 팀은 5차전 9회에 터진 릭 먼데이의 솔로포 덕에 간신히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고, 가비는 월드 시리즈에서 3년 만에 만난 숙적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타율 4할대의 맹타로 한풀이를 한다. 팀도 이런 가비의 활약에 힘입어 시리즈 2패로 먼저 몰려 있다가 내리 4연승을 거두며 1965년 이후 16년 만에 왕좌에 올랐고, 가비 자신도 4번째 도전만에 첫 우승반지를 얻었다. 여기에 시즌 종료 후에는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수상하며 그야말로 야구 선수로서 이룰 만한 것들은 거의 다 이루게 된다.
하지만 포스트시즌에서의 활약과 우승이라는 해피엔딩과는 별개로 가비의 성적은 분명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이어진 1982년 시즌에서도 타율 .282에 16홈런, 86타점이라는 예년에 비하면 부진한 성적을 찍으며 반등의 기미를 보이지 못했고 올스타 연속 선정 기록 또한 중단된다. 시즌 종료 후 가비는 FA(자유계약) 선수로 풀렸고, 다저스는 최대 4년 500만 달러의 계약을 제시했지만 더 긴 계약기간(5년)을 원했던 가비와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결국 유년 시절부터 20여 년 간 이어온 가비와 다저스와의 인연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2.3.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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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시절. |
파드리스에서 맞이하는 첫 해였던 1983년, 가비는 타율 .294에 14홈런, 59타점을 기록했고 1980년 이후 3년 만에 OPS 0.8 이상을 찍으며 전성기보다는 못하지만 팀의 타선을 이끌며 분투했고, 내셔널 리그 연속 경기 출장 기록도 경신[21]하며 활약했지만 안타깝게도 7월 29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홈경기에서 홈 쇄도 도중 손가락 골절을 당하며 시즌과 연속 경기 출장 기록 모두 마감해야 했다.
손가락 부상에서 돌아온 1984년에는 타격 부문에서는 타율 .284에 175안타, 86타점[22]을 기록했고 수비에서는 1루수로서 무실책 시즌이라는 단일 시즌 150경기 이상 1루수로 출장한 선수 중에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유일한 기록을 세우며 견고한 수비를 뽐냈다. 소속팀 파드리스도 NL 서부지구 우승을 차지하며 창단 첫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고, 가비는 또 한 번 다저스 시절처럼 NLCS에서 4할의 맹타를 휘둘러[23] 팀을 창단 첫 월드 시리즈 진출로 이끈다. 하지만 월드 시리즈에서는 잭 모리스가 이끄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게 1승 4패로 패하며 개인 통산 4번째 준우승을 적립한다.
이후 1985~1986년에도 가비는 각각 17, 21홈런을 기록하며 타선의 구심점 역할을 했고, 1987년 어깨 부상으로 인해 성적이 떨어지면서 후배 선수들에게 자리를 내주며 19년 간의 선수생활을 마치게 된다.
3. 은퇴 후
가비의 은퇴 후, 파드리스에서는 팀의 첫 지구 우승과 첫 월드시리즈 진출을 이끈 공로로 1988년 가비의 등번호였던 6번을 영구결번했다. 이는 파드리스 구단 최초의 영구결번.가비는 파드리스 입단 직후부터 Garvey Media Group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딴 스포츠 마케팅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고, 은퇴 후에는 아예 이쪽 계열을 업으로 삼아 그룹 내의 Garvey Communications[24] 대표를 맡았고, 미국 내 유수의 기업들에 초청 강사로 불려가기도 했다.
또한 1990년부터 Baseball Assistance Team이라는 비영리 단체에서 활동하며 전직 메이저 리거나 마이너 리거, 니그로 리거들을 재정적/의료적으로 지원해주는 역할을 맡은 바 있다.
이외에도 정계 입문에 대한 야망이 있어,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의 취임식이나 슈퍼볼 등 국내 주요 행사에 참석하거나 NBC 시트콤 <Just Shoot Me!>에 본인 역으로 출연하는 등 대중들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 외에 2011년 친정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가 구단주 프랭크 맥코트의 막장 행보로 매각되었을 때 또 다른 다저스의 레전드 오렐 허샤이저와 손을 잡고 구단 인수를 계획하기도 했었다. 마지막에 매직 존슨이 공동대표로 있는 구겐하임 컨소시엄이 최종 인수하며 없던 일이 되었지만.
한편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는 15수까지 갔으나 2007년 마지막 투표에서 21.1%의 득표율로 끝내 투표로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지 못했다.[25] 다만 2021년 현재까지도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입성할 후보로는 현지 언론에서 꾸준히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베테랑 위원회로의 입성은 여전히 노려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지만,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요소가 있으니...
3.1. 뒤늦게 드러난 막장 사생활
선수 시절의 Mr. Clean(바른 생활의 사나이)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26] 사생활이 아주 문란했다. 선수 생활 동안에는 어찌어찌 숨길 수 있었지만 은퇴 이후 정계에 진출하려고 하자 그동안 숨겨졌던 막장 행보들이 다 드러났는데, 아내[27] 몰래 자기의 어시스턴트와 바람을 피우다가, 그 어시스턴트를 임신시킨 게 들통나서 1983년 이혼당했고, 그 와중에 임신 중인 어시스턴트를 놔두고 또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워서 어시스턴트와도 헤어지고... 사생활 자체가 막장 드라마였다. 더 자세한 것은 링크된 기사의 스티브 가비 단락 참조. 당연히 정계 입문의 꿈은 박살나버리고 그간 선수 생활로 번 돈도 다 이혼 소송, 위자료, 양육권 소송 등으로 다 날려버렸다고 한다.3.2. 다시 도전하는 정계의 꿈
그동안 정계의 꿈을 버리지는 않았는지, 2024년 11월5일에 있을 대선에 캘리포니아주의 상원의원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했다. 그가 출마한다고 하자 민주당에서는 처음에는 '상대가 다른사람도 아니고 가비라서 다행이다 ㅋㅋㅋ'였지만, 의외로 선전을해서 결국 떨어지기는 했지만 40%이상의 표를 얻었다.[28]4. 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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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타격 영상 모음. |
전성기 시절에는 매 시즌 3할 타율과 200안타, 20홈런 100타점이 보장된 꾸준함의 대명사이자 안정적인 수비를 자랑하는 1루수였다. 주 활동 시기가 투고타저의 시기였던 데다 투수친화 구장인 다저 스타디움과 잭 머피 스타디움에서 뛰었고, 신체조건 또한 그렇게 특출나지는 않은 편에 속했음(178cm, 87kg)[29]에도 가장 많이 칠 때에는 33개의 홈런을 칠 정도로 갭 파워도 나름 인상적이었고, 1루수치고는 도루도 곧잘 해서 3번이나 두 자리수 도루를 기록[30]하기도 했다. 수비력 면에서는 1974~1977년 4년 연속 골드 글러브 수상과 1984년 무실책 시즌으로 설명 끝.[31] 또한 내셔널 리그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내구성도 굉장히 좋았다. 주전으로 자리잡은 이후 크게 당했다고 할 만한 부상은 파드리스 시절 얻은 손가락 골절을 제외하면 없을 정도.[32]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점은 큰 경기에서 굉장히 강했다는 점. 전술했듯 2번이나 NLCS MVP(1978, 1984)에 선정된 이력이 있으며 올스타전에서도 2번 MVP에 선정(1974, 1978)되는 등 스타 기질을 제대로 발휘했다. 통산 포스트시즌 기록을 보면 비록 월드 시리즈에서는 다소 퐁당퐁당+똑딱이 기질이 있었지만(통산 .319/.342/.407 36안타 1홈런 6타점) NLCS에서는 정말 괴물같이 활약했다. 5번의 시리즈를 치르면서 22경기 동안 슬래시라인 .356/.383/.678에 8홈런 21타점! 거기에 상기했듯 시리즈 MVP도 2회 차지했으니 그야말로 펄펄 날았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다. 이런 스타성이 가비가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게 만든 요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이버메트릭스가 등장하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바뀌게 되는데, 격하게 말하면 거품이 꺼졌다. 분명 3할 타율과 200안타는 현대 기준으로도 큰 업적이 맞지만, 가비의 커리어 통산 출루율은 .329로 통산 타율 .294와 3푼 5리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MVP 시즌이었던 1974년에도 출루율은 .342로 리그 평균보다 1푼 6리 높은 정도에 그쳤고, 가장 높은 출루율을 기록한 1976년도 .363였다. 실제로 생각보다 배드볼 히터 기질이 있어서 통산 BB/K는 0.48에 그쳤으며, 통산 BB%도 5.1%로 좀 낮은 편이다. (통산 K%는 10.6%로 평균보다는 낮음) 가장 많은 볼넷을 골라나간 시즌이 1976년의 50개가 최고일 정도. 또한 클러치 능력도 본인의 능력보다는 자기 앞의 타자들의 영향이 더 크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면서 타점 생산 능력도 다소 빛이 바랬다. 거기다 누적 스탯은 홈런을 제외하면 비교적 잘 쌓은 편이지만, 1루수라는 포지션을 고려해봤을 때 그의 통산 비율 성적(OPS 0.775, wRC+ 116)은 투수친화 구장에서 뛴 점과 투고타저 시대에 활약했음을 고려해도 다소 아쉬운 편.[33] 커리어 하이의 wRC+를 기록한 1978년에도 wRC+는 138에 그쳤다. 이러한 평가는 명예의 전당 투표율에도 반영되어 1993년 첫 투표에서 41.6%였던 득표율은 2001년까지 30% 초반대를 유지하다가 세이버메트릭스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2002~2003년 즈음부터 투표율이 급락, 결국 마지막 투표(2007년)에서 21.1%의 득표율로 탈락했다. 물론 앞서 말한 막장 사생활(...)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여러 모로 외화내빈이라는 말이 떠오르게 만든다.[34]
이렇게 가비와 유사한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 바로 '블랙 잭' 잭 모리스. 이쪽도 세이버메트릭스의 등장으로 투수 평가의 주된 요소가 승수에서 평균자책점, 탈삼진 등으로 옮겨가면서 부정적 방향으로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포스트시즌에서 강했으며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15수까지 간 끝에 물을 먹었다는 점도 비슷하다. 다만 모리스는 가비에 비하면 득표율 자체는 확연히 높았고, 2017년 12월에 베테랑 위원회로나마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지만 가비는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5. 이모저모
아일랜드계 미국인인지라, 아일랜드계 미국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있기도 하다. 함께 헌액되어 있는 멤버로는 다저스의 옛 구단주였던 피터 오말리, '다저스의 목소리' 빈 스컬리, '전사' 폴 오닐과 퍼펙트 게임을 날려먹은 희대의 오심으로 유명한 짐 조이스 심판 등이 있다.
상술했듯 팬들에게는 살갑게 대했던 덕에 이미지가 굉장히 좋았지만, 일부 동료 선수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가비의 행동이 구단 수뇌부의 총애를 얻기 위해 본심을 숨기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감을 사기도 했다.[35] 이것 때문에 2차례나 팀원들과 갈등을 빚었던 적이 있었다.
- 다저스 시절인 1976년 동료 선수였던 론 세이와 데이비 롭스[36]를 비롯한 몇몇 선수들이 지역 언론사에 가비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인터뷰를 했다. 이 문제로 월터 앨스턴 감독이 긴급 팀 미팅을 소집하자 가비가 "나한테 할 말이 있으면 나한테 직접 하라"고 일갈하며 분위기가 험악해지기도 했다. 당시 다저스 팀 동료였던 토미 존[37]은 훗날 "그 시점부터 앨스턴 감독이 선수단 장악력을 잃기 시작했던 것 같다"고 회상했으며 실제로 앨스턴은 1976년 시즌 종료 후 감독직에서 사임한다.
- 역시 다저스 시절인 1978년, 팀의 에이스 돈 서튼이 "가비보다는 레지 스미스가 더 나은 선수다", "(아부를 한) 가비만이 다저스에서 유일하게 유명해질 수 있었다"라며 비판하는 발언을 한 것이 기사로 실렸다.[38] 이후 이 기사를 본 가비가 라커룸에 인쇄된 기사를 들고 와서는 서튼에게 "정말로 네가 이런 말을 했냐"며 따졌고, 서튼이 그렇다고 응수하자 이내 둘은 레디 파이트.[39] 그나마 서로 다치진 않았고 이후 어찌어찌 서로 잘 해결한 듯 하다.
- 사족인데, 위의 일화들에서 언급된, 토미 존을 비롯한 모든 선수들의 WAR은 가비보다 높다. 당연히 명전에 입성한 감독인 월터 앨스턴은 제외긴 한데, 가비의 팀 동료이자 차기 감독 명전이 유력한 더스티 베이커가 가비와 통산 WAR이 거의 차이나지 않는다.
앞서 서술한 사생활 논란이나 팀메이트와의 불화 등 여러 트러블이 있긴 했지만 워낙 팬들 사이에서 이미지가 좋기도 하고 다저스 구단 측에서도 그의 공로를 잊지는 않고 있어서, 다저스에서 레전드 초청 이벤트를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또 그 이벤트들에서 현역 시절 갈등을 빚었던 동료들과도 잘 지내고, 가비가 다른 단체에서 활동할 때 다저스 시절 동료들이 축전을 보내는 모습 등을 보면 나름대로 화해를 한 듯 하다.
드래프트 1라운더이자 대도시 인기 구단의 4번 타자, 팬서비스는 좋았지만 사생활은 막장이었다는 점 등에서 KBO 리그 두산 베어스의 前 내야수 김동주와도 겹치는 부분이 많다. 우연찮게 우승 횟수와 준우승 횟수마저 같다![40]
그러나 차이점도 많이 있다. 가비는 세이버메트릭스가 등장하면서 평가가 떨어진 축에 속하지만 김동주는 오히려 세이버메트릭스 덕에 평가가 더욱 올라갔다.[41], 가비는 리그를 대표하는 철강왕이었지만 김동주는 잔부상의 대명사였다는 점도 다르다. 또 구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행사에 자주 얼굴을 비추는 가비와 달리 김동주는 선수 시절부터 연봉 및 FA 계약 문제 등으로 구단과 항상 마찰을 빚어와 은퇴 후로는 공식 석상에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는다.
6. 연도별 기록
스티브 가비의 역대 MLB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팀 | G | PA | H | 2B | 3B | HR | R | RBI | SB | BB | SO | AVG | OBP | SLG | OPS | fWAR | bWAR |
1969 | LAD | 3 | 3 | 1 | 0 | 0 | 0 | 0 | 0 | 0 | 0 | 1 | .333 | .333 | .333 | .667 | 0.0 | 0.0 |
1970 | 34 | 100 | 25 | 5 | 0 | 1 | 8 | 6 | 1 | 6 | 17 | .269 | .310 | .355 | .655 | 0.1 | -0.2 | |
1971 | 81 | 249 | 51 | 12 | 1 | 7 | 27 | 26 | 1 | 21 | 33 | .227 | .290 | .382 | .673 | 1.6 | 1.5 | |
1972 | 96 | 317 | 79 | 14 | 2 | 9 | 36 | 30 | 4 | 19 | 36 | .269 | .312 | .422 | .734 | 1.9 | 1.6 | |
1973 | 114 | 366 | 106 | 17 | 3 | 8 | 37 | 50 | 0 | 11 | 42 | .304 | .328 | .438 | .766 | 1.4 | 1.2 | |
1974 | 156 | 685 | 200 | 32 | 3 | 21 | 95 | 111 | 5 | 31 | 66 | .312 | .342 | .469 | .811 | 3.8 | 4.4 | |
1975 | 160 | 704 | 210 | 38 | 6 | 18 | 85 | 95 | 11 | 33 | 66 | .319 | .351 | .476 | .827 | 4.8 | 5.1 | |
1976 | 162 | 696 | 200 | 37 | 4 | 13 | 85 | 80 | 19 | 50 | 69 | .317 | .363 | .450 | .813 | 4.6 | 4.7 | |
1977 | 162 | 696 | 192 | 25 | 3 | 33 | 91 | 115 | 9 | 38 | 90 | .297 | .335 | .498 | .834 | 3.8 | 3.8 | |
1978 | 162 | 689 | 202 | 36 | 9 | 21 | 89 | 113 | 10 | 40 | 70 | .316 | .353 | .499 | .852 | 4.8 | 4.7 | |
1979 | 162 | 697 | 204 | 32 | 1 | 28 | 92 | 110 | 3 | 37 | 59 | .315 | .351 | .497 | .848 | 3.4 | 2.9 | |
1980 | 163 | 704 | 200 | 27 | 1 | 26 | 78 | 106 | 6 | 36 | 67 | .304 | .341 | .467 | .808 | 3.1 | 3.0 | |
1981 | 110 | 461 | 122 | 23 | 1 | 10 | 63 | 64 | 3 | 25 | 49 | .283 | .322 | .411 | .732 | 1.5 | 2.0 | |
1982 | 162 | 660 | 176 | 35 | 1 | 16 | 66 | 86 | 5 | 20 | 86 | .282 | .301 | .418 | .718 | 1.6 | 1.9 | |
<rowcolor=#de6108> 연도 | 팀 | G | PA | H | 2B | 3B | HR | R | RBI | SB | BB | SO | AVG | OBP | SLG | OPS | fWAR | bWAR |
1983 | SD | 100 | 425 | 114 | 22 | 0 | 14 | 76 | 59 | 4 | 29 | 39 | .294 | .344 | .459 | .802 | 1.2 | 1.5 |
1984 | 161 | 653 | 175 | 27 | 2 | 8 | 72 | 86 | 1 | 24 | 64 | .284 | .307 | .373 | .680 | 0.3 | 0.4 | |
1985 | 162 | 699 | 184 | 34 | 6 | 17 | 80 | 81 | 0 | 35 | 67 | .281 | .318 | .430 | .748 | 1.5 | 1.6 | |
1986 | 155 | 584 | 142 | 22 | 0 | 21 | 58 | 81 | 1 | 23 | 72 | .255 | .284 | .408 | .692 | -0.8 | -1.3 | |
1987 | 27 | 78 | 16 | 2 | 0 | 1 | 5 | 9 | 0 | 1 | 10 | .211 | .231 | .276 | .507 | -0.6 | -0.7 | |
MLB 통산 (19시즌) |
2332 | 9466 | 2599 | 440 | 43 | 272 | 1143 | 1308 | 83 | 479 | 1003 | .294 | .329 | .446 | .775 | 37.8 | 38.1 |
7.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2024 | 미국 연방상원의원 보궐선거 | 캘리포니아 |
|
- (%) |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 (%) |
[1]
1975년 9월 3일~1983년 7월 29일. 가비보다 많은 연속 경기 출장을 기록한
칼 립켄 주니어(2,632경기)와
루 게릭(2,130경기),
에버렛 스캇(1,307경기)은 모두 아메리칸 리그 소속으로 기록했다.
[2]
아버지가
브루클린 다저스의 광팬이었다. 가비가 다저스 스프링캠프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 덕분.
[3]
어머니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가지고 싶은 게 뭐냐고 묻자 '야구 글러브'라고 답했는데, 글러브 값은 25달러로 당시 화폐가치를 감안하면 꽤 비쌌다. 그래서 놀란 어머니가 머뭇거리자 가비는 "엄마, 지금 25달러를 투자하면 나중에 25,000달러를 받게 되실 거예요."라며 당돌하게 글러브를 요구했다고 한다. 될성부른 떡잎
[4]
공식경기 첫 타석에서 경기장을 넘어 학교 뒷편의 강가까지 뻗어가는 대형 만루홈런을 뽑아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5]
이런 가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MSU는 그를 2010년에 학교 명예의 전당에 헌액했고, 2014년에는 아예 그의 재학 시절 등번호인 10번을
영구결번했다. 아마추어와 프로 두 레벨에서 모두 영구결번이 된 흔치 않은 사례.
[6]
이 해 다저스의 드래프트는 역대급 드래프트로 평가된다. 이 해에 뽑았던 선수들 중 나중에 주전으로 자리잡게 되는 선수들(
빌 버크너,
데이비 롭스,
론 세이,
조 퍼거슨 등)이 문자 그대로 한 트럭이었기 때문. 여담으로
바비 발렌타인도 이 때 다저스에 지명됐다.
[7]
가끔 2루수 알바도 뛰었다.
[8]
대학 시절 미식축구를 하면서 얻은 부상 때문에 수비 범위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1972년에는 85경기에만 나왔는데도 28개의 실책을 기록하는 막장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9]
이 쪽은 은퇴 후 경기 분석가 일을 하다가 뜬금없이 1974년
일본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10]
다만, WAR만 놓고 보자면 가비의 MVP 수상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데, 당시 가비의
WAR은 4.4(bWAR)/3.8(fWAR)로 해당 시즌 NL WAR 1위였던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마이크 슈미트의 9.8(bWAR)/9.4(fWAR)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이버메트릭스적 요소를 제외하고 보더라도 슈미트는 해당 시즌 홈런왕(36홈런)이었던 데다 20-20에 116타점을 달성하는 등 클래식 스탯에서도 가비보다 나은 점이 많았다.
[11]
사실 1974년 당시에도 꽤나 논란이 되었던 MVP 수상이었다. 당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루 브록이 35살의 나이에도 3할 타율에 194안타, 그리고
라이브볼 시대 이래 당시 기준으로 역대 한 시즌 최다
도루였던 118도루를 기록하며 전인미답의 성적을 올렸기 때문. 이 해 MVP 투표에서 브록은 가비에 37점 뒤진 233점으로 2위를 했다. 브록은 다음 해(1975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도루에 대한 과거의 안 좋은 (사리사욕을 위한, 팀에 도움이 안 되는 기록이라는) 선입견이 MVP 투표 결과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라며 "내가 가비를 이기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진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발언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물론 만일 브록이 MVP를 탔더라도 그건 그거대로 현 시대에 와서 논란이 되었겠지만(시즌 fWAR 3.0, bWAR 3.5) 적어도 도루 기록 경신이라는 스토리 덕에 변호거리는 있다. 하지만 굳이 브록이 아니더라도 그 아래 순위에 있는
자니 벤치, 짐 윈,
조 모건, 심지어는 10위권 타자들까지도 가비보다 성적이 좋거나 비슷했다.
[12]
그나마 가비를 위한 변호를 하자면, 200안타도 매 해 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적은 타자들만이 달성할 수 있는 기록이며, 당시는 타율, 타점, 홈런 등의 직관적인 스탯들에 대한 평가가 훨씬 더 우세했기에
WAR은 고사하고
OPS, 심지어
출루율도 고려가 거의 안 되던 시절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럼 나는 왜?? 그런 의미에서 가비의 스탯은 3할-20홈런-100타점이라는 아주 이상적인 중심타자에 가까웠고,
마이크 슈미트는 타율 낮은 공갈포이자
루 브록은 대단한 기록을 세웠으나 장타력 없는 선수라는 인식이 기자들 사이에서 강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팀 성적이 MVP 투표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커서, 소속팀인 다저스의 지구 우승을 이끄는 데 공헌했다는 이미지도 한 몫 했다. 이런 팀 성적 버프로 MVP를 수상한 대표적인 선수가 2013년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20년 만의 플레이오프 진출의 주역이었던
앤드류 맥커친. 그리고 MVP 투표 시 고려해야 할 사항 중에는 선수의 인격과 노력도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Mr. Clean(바른 생활의 사나이) 이미지가 있던 가비가 한 발 앞서 있었던 것도 플러스 요인이었다.
[13]
OPS는 1.199에 달했다.
[14]
2번의 최다 안타(1978, 1980) 포함.
[15]
1978년 올스타전에서는 다시 한 번 MVP에 선정되기도 했다.
[16]
사실 이렇게 가비가 큰 인기를 끈 데에는 당시 미국의 사회적 분위기도 한 몫 했다. 1970년대 미국의 젊은층은 오르지 않는 임금에 비해 계속 오르는 세금으로 힘들어했고, 격동의 1960년대를 보낸 반작용으로 그 때 유행했던 히피적 분위기, 즉
마약과 프리섹스로 대표되는 퇴폐적 이미지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 결과 시대적으로는 오히려 더욱 자유로워졌음에도 그들은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정치 성향도
민주당에서
공화당 지지로 돌아서는 보수화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는 스포츠계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레지 잭슨과 같은 거침없는 이미지의 선수보다는
놀란 라이언 등의 점잖고 건전한 이미지의 선수로 슈퍼스타의 칭호가 옮겨가고 있었는데, 그 시기에 가비가 적절하게 등장한 것.
[17]
두 번의 NLCS에서 가비는 타율 .354를 기록했고, 1978년 NLCS에서는 4경기 동안 무려 4홈런에 7타점, OPS 1.611이라는 미친 활약을 선보이며 시리즈 MVP에 올랐다.
[18]
그 와중에 감독 추천으로 올스타전에는 출장해 올스타 연속 선정 기록을 8년으로 연장했다.
[19]
그래도 4차전에서 8회에 결승타가 되는 2점 홈런을 터뜨리며 포스트시즌의 사나이다운 모습은 이어갔다.
[20]
파드리스의
잭 매키언 단장도 "가비에게 .330의 타율과 30홈런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그가 젊은 선수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기만 한다면 지난해(1982년)의 성적을 찍어줘도 행복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21]
종전 기록은
빌리 윌리엄스의 1,116경기. 기록을 갱신한 경기는 공교롭게도 친정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원정경기였다.
[22]
다만 장타력은 급감해 8홈런이라는 커리어 로우 기록을 세웠다.
[23]
특히 4차전의 끝내기 투런 홈런이 그 백미로 이 홈런 덕에 시리즈 MVP에 오른다.
[24]
주로 TV 프로그램 제작을 맡던 회사다.
[25]
사실 그가 1루수였다는것을 감안하면, 그의 누적 스탯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에는 확실히 모자란다.
[26]
어느 정도였냐 하면, 당시 다저스의 감독이었던
토미 라소다는 '내 딸이 이 사람을 데이트 상대로 집에 데려오면 문을 잠그고 그를 절대로 집에 못 가게 하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즉, 당장 사위로 삼겠다는 뜻.
[27]
Cynthia Truhan이라는 방송인으로 가비와는 1971년 결혼. 슬하에 자녀 둘이 있다.
[28]
캘리포니아는 민주당에 강세이기때문에 공화당 후보가 누가 되었던지 당선될 가능성은 크지 않기는 하지만, 이점을 감안하면 꽤 선전한것.
[29]
한때
같은 팀에서 뛰었던 'The Toy Cannon(장난감 대포)'
지미 윈과도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다.
[30]
다만 성공률은 그다지 높지 못했다.
[31]
근데 이것도 1루수 한정이고 본래 포지션이었던 3루수로서는 움직이는 화약고 급 수비였다.
[32]
다만 신인 시절인 1971년에 뼛조각 문제로 수술을 받느라 약 한 달여를 결장한 적이 있고, 말년인 1987년에도 어깨 부상으로 출전 시간이 크게 줄어들었다.
[33]
가비의 통산 순장타율은 .152인데, 동시대 슬러거라고 불리던 선수들의 통산 순장타율이 .200 안팎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34]
프레드 맥그리프가 기자단 투표로는 못 들어가고 베테랑 위원회로 겨우 입성하고,
조이 보토도 누적이 모자라다는 말이 나오는 게 최근의 1루수 명예의 전당 컷이다. 원래 가비 정도의 스탯으론 어림도 없는데, 그나마 꾸준함과 성실함 버프로 비벼보려 했던 것이 사생활이 드러나며 무산되었다. 후대 비슷한 유형의 1루수들 중 가비보다 세부적으로 성적이 좋거나 비슷했던
존 올러루드,
윌 클락,
세실 쿠퍼 등이 첫 해 광탈한 것을 보면 답이 나온다.
[35]
은퇴 후 정계로 진출하려고 했던 것과, 향후 밝혀진 가비의 막장 행보를 보면 어느 정도 들어맞는 듯 하기도 하다.
[36]
이 둘은 1972년부터 1981년까지 다저스에서 호흡을 맞췄던 내야진의 일원이다. 이후 흩어져 1987년을 끝으로 셋 다 동시에 은퇴했다. 공교롭게도 이 둘의 클래식 스탯은 가비보다 뒤쳐졌지만, 이후 개발된
WAR에 따르면
가비보다 뛰어난 선수들이었다.
[37]
토미 존 수술의 그 토미 존이 맞다.
[38]
스미스는 당시 팀의 주전 우익수로서, 그 역시 가비 못지 않은 강타자였다. 이전에는
보스턴 레드삭스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뛰다가 1976년 시즌 중 다저스로 이적했다. 참고로 스미스의 WAR은 60 중반, 가비는 30대 후반이기 때문에 현대야구에서는 위 둘은 비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39]
들리는 이야기로는 가비가 서튼을
토미 존의 라커에 냅다 집어던져버렸다(!!)고 한다. 토미 존은 무슨 죄
[40]
가비는 1981년 우승+1974, 1977, 1978, 1984년 준우승. 김동주는 2001년 우승+2000, 2005, 2007, 2008년 준우승.
[41]
누적스탯 기준으로도 가비는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선수들과 비교해도 별볼일 없는 선수가 맞다. 반면 김동주는 아직도 팀 기록이나 리그 기록 곳곳에서 이름을 올려놓고 있으며, 경기수가 늘어나 스탯 누적이 유리해진 현재의 KBO 타자들과 비교해도 커리어가 뒤쳐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