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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9 14:36:52

쉴레이만샤(오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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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ayi.png
카이으 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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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 초대 제2대 제3대
쉴레이만샤 에르투으룰 오스만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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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영묘

1. 개요

SüleymanŞah[1]
(생몰년도: 1167년(?) ~ 1236년)

에르투으룰 부친이자 오스만 1세 조부로, 카이으 부족의 지도자이며 오스만 제국 황실 시조(始祖)다.

2. 생애

1214년 부친 카야 알프에 이어 오우즈족 아래의 카이으 부족장이 되었고, 1220년 무렵 몽골-호라즘 전쟁을 피해 5만에 달하는 투르코만을 이끌고 서아시아로 이주하였다. 도중 수천의 무리가 에르진잔 아흘라트에 정착하였고, 또다른 무리는 자지라 지방에 정착하였다. 잔여 세력과 함께 룸 셀주크령으로 향하려던 쉴레이만샤는 1227년 1월, 아이유브 왕조 라카 인근의 자바르 성채에서 사망하였다.

사후 카이으 부족은 쉴레이만샤의 장남 귄도으두 베이 및 차남 순구르테긴 베이와 삼남 에르투으룰 및 사남 뒨다르 베이의 세력으로 나뉘었다. 1천에 달하는 전자의 무리는 아흘라트를 거쳐 고향인 중앙아시아로 향하였고, 지금도 그 후손들은 튀르크메니스탄에 살고 있다. 후자의 4백여 무리는 시바스를 거쳐 쇠위트로 향하여 오스만 베이국을 이루었다.

3. 영묘

유프라테스 동안의 자바르 성채에 매장된 쉴레이만샤의 무덤은 1921년 앙카라 조약과 1923년 로잔 조약에 의거하여 시리아 령임에도 튀르키예의 월경지로 남았다. 1973년 아사드 댐의 완공으로 인해 자바르 성채가 섬이 되자 무덤은 85km 북쪽의 만비즈 코바니 사이의 유프라테스 동안 언덕으로 이전되었다. 하지만 시리아 내전 발발 후 영묘는 물에 이어 이번에는 다에시 세력에 둘러싸여 고립되었고, 증원된 38명의 수비대가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4개월이 지난 후 튀르키예 정부는 샤 유프라테스 작전에 착수, 수백의 병력과 탱크까지 동원하여 주둔 병력과 시신을 코바니 서쪽의 시리아-튀르키예 국경지대로 옮겨졌다. 비록 시리아 령이긴 하나 튀르키예 국경 바로 건너편에 있고 튀르키예 군인 40명이 주둔하며 지키고 있다.
[1] 다만 이름 자체는 사료에 따라 '귄뒤즈 알프(Günduz Alp)'로도 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