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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흘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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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여러 세력의 각축장2.2. 아흘라트샤 왕조2.3. 중근세2.4. 근대2.5. 현대

1. 개요

Ahlat

튀르키예 동부 비틀리스도에 속한 도시로, 인구는 약 2만 8천 명이다. 중세 시기 아흘라트샤 왕조의 수도로 번영했다. 주민은 쿠르드-튀르트계가 반씩 구성하며, 20세기 초까지는 40%가량의 아르메니아인도 있었다. 일대에는 중세 아르메니아-셀주크 양식의 유적들이 많다.

2. 역사

고대와 중세 시기 아르메니아어 이름은 칼라트 혹은 킬라트였고, 아르메니아 왕국 시기 브즈누닉군의 일부였다. 로마 제국의 지배를 지나 645년, 당시 시리아 총독이던 무아위야 1세가 (혹은 칼리파 우스만의 직접 지시로) 파견한 하비브 빈 마슬라마 알피흐리에 의해 이슬람 제국령이 되었다.

이후 4세기간 아랍 총독 혹은 카이스 부족의 아랍인 에미르 혹은 아르메니아 왕공들이 통치하다가 8세기 초 일대에 아랍 부족들이 정착하였고, 카이스 부족의 토후국이 들어섰다. 10세기 지리가 이븐 하우칼이 마야파리킨~우르미아 간 무역로상의 중요한 중간 거점이라 묘사하였다. 중세 시기 지명은 클라트였다.

2.1. 여러 세력의 각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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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기의 묘비들

10세기 후반 아르메니아계 바스푸라칸 공국이 점령했다가 983년경 쿠르드 부족장 바드(아르메니아어: 바트)가 통치했고, 그는 10여 년 후 디야르바크르를 점령하여 마르완 왕조를 세웠다. 998년 겨울 바그라투니 가문의 이베리아 왕국(조지아 왕국의 전신)의 군주이자 쿠로팔라테스인 다비드 3세가 클라트를 포위했으나 그의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차별 때문에 주민들이 무슬림 수비대와 협력하여 항전하였기에 점령에 실패하였다. 1057년 동로마 제국에 반기를 든 노르만 용병대장 에르베 프랑코포울로스 토벌군에 패한 후 3백의 동료 기사들과 아흘라트로 피신했으나 에미르 아포노사르(아부 나스르)에게 배신당하여 미카일 6세에게 넘겨졌다. 이 무렵 도시는 튀르크식 지명인 아흘라트로 불리게 되었다.

11세기의 지리가 나시르 호스로는 자신의 저서 사파르나마에서 아흘라트(اخلاط)는 하란 다음 도시로 언급되며,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들의 경계이고, 왕공 나스룻다울라는 백 살이 넘었는데 아들들에게 영토를 분할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나시르 호스로는 또한 지명에 대해 성내에서 아랍어 & 아르메니아어 & 페르시아어 등 다양한 언어가 쓰이기에 아랍어로 '섞인'이란 의미인 아흘라트로 명명된 것이라 추정하였다. 마지막으로 무역 거래는 동로마 화폐 혹은 아르메니아의 로텔로 이루어지며, 후자는 300 디르함과 같다고 덧붙였다.

2.2. 아흘라트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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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세기 일 칸국기에 세워진 영묘들. 기존 샤아르멘 왕조기의 양식을 답습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후 셀주크 제국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이 친히 나아가 점령한 후 튀르크멘 맘루크 지휘관 쇠크멘 엘쿠트비에게 영지로 하사했다. 이후 그는 마야파리킨 등 완호 일대 및 디야르바크르 평원 일부를 점령했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봉토를 세습하여 샤아르멘 혹은 아흘라트샤 왕조로 불렸다. 아흘라트샤들은 셀주크 제국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다만 북쪽의 살투크 왕조와 연합하여 조지아 왕국을 공격하는 등 자체적인 활동에 나설 때도 있었고, 서남쪽 마야파리킨의 아르투크 왕조와도 좋은 관계를 맺어 아나톨리아 동부와 메소포타미아 북부 간의 연결로 역할을 하였다.

아흘라트샤 왕조는 쇠크멘 2세(1128-85년)의 57년 치세에 전성기를 맞았다. 그는 살투크 2세의 딸과 결혼해 양국의 동맹을 굳혔으나 자녀를 남기지 못하여 사후 왕가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길만 장군들이 집권하였다. 그렇게 20여 년이 흐른 후 1207년 아흘라트샤 왕조는 오랫동안 아흘라트를 탐내던 아이유브 왕조에게 병합되었다. 아이유브조는 룸 술탄 카이쿠바드 1세의 동생이자 에르주룸의 멜리크 투으룰샤가 룸 셀주크의 명의로 마지막 아흘라트샤 이젯딘 발라반을 살해한 후 아흘라트 주민들의 초대를 받아 도시를 접수하였다.

2.3. 중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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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1년 백양조의 총독 바은드르가 건립한 영묘-모스크 단지

아이유브조는 룸 술탄 카이쿠바드 1세의 동생이자 에르주룸의 멜리크 투으룰샤가 룸 셀주크의 명의로 마지막 아흘라트샤 이젯딘 발라반을 살해한 후 아흘라트 주민들의 초대를 받아 도시를 접수하였다. 셀주크조의 쇠퇴와 호라즘 및 몽골 제국의 서진 속 혼란이 가중되던 13세기, 아흘라트는 아이유브 왕조와 룸 셀주크, 조지아 왕국 사이의 분쟁 지역이었다. 12세기 조지아가 지배할 때에는 아르메니아어 지명 칼라트를 변형한 칼라티로 불렀다. 13세기 후반부터 일 칸국령이 된 아흘라트에서는 칸들의 동전이 주조되었다. 함달라 무스타우피(~1349)에 의하면 당시 아흘라트의 세수는 51500 디나르였다. 일 칸국의 와해 후 일대는 잘라이르, 티무르조에 이어 백양 왕조에 속하였다.

16세기 초엽 찰디란 전투로 오스만 제국이 일시 장악한 이래로 오스만 vs 사파비 제국 간의 변경 지대로서 쟁탈전이 벌어졌다. 1526년 아흘라트는 재차 사파비령이 되어 델루 몬타샤 우스타즐루가 총독이었으나 1533년 오스만 대재상 이브라힘 파샤의 타브리즈 원정 시에 재점령되었다. 이후 1548년 사파비조가 수복하고 약탈했으나 1554년 쉴레이만 1세의 친정 시에 정복된 후 공고히 오스만령으로 남았다. 다만 실질적으로는 19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의 중앙 집권화 전까지 현지 쿠르드 족장들이 다스렸다.

2.4. 근대

19세기 말엽 중동을 여행한 프랑스인 지리가 비탈 퀴네는 당시 아흘라트 인구를 23,700명으로 추산하였고, 그중 70%는 무슬림이며 나머지는 아르메니아계 기독교도(대부분)라 추정하였다. 또한 옛 아흘라트는 버려져 '폐허 도시'란 의미인 카라브 셰히르라 불렸고, 동쪽 2km 지점의 완 호숫가에 새 도시가 세워졌다. 20세기 초엽의 혼란 후 1961년 아흘라트의 인구는 5천여 명이었다.

19세기 러시아 제국의 체르케스인 학살 시에 일부 체르케스인 난민들이 일대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후일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돌변하여 현지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가담한다. 한편 오스만 제국기인 1846년의 문서에서 이미 쿠르디스탄의 중심부에 위치한 아흘라트를 쿠르드인들에 대한 통제 거점으로 삼자는 시안이 있었는데, 이는 1916-34년의 쿠르드인 강제 이주 시에 실현되어 당시 현지 쿠르드 주민들은 통합 진보 위원회에 불복한 죄로 디야르바크르로 이주되었다. 이로써 아흘라트의 인구는 3만에서 5천 미만으로 급감하였다.

2.5. 현대

현대 들어 아흘라트시는 아흘라트샤 시절 세워진 옛 묘비들과 우라르투-오스만 시기 시타델을 묶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우선적으로 잠정 목록에는 오른 상태이다. 최근 들어 아흘라트 지역은 질 좋은 감자를 생산하며 농업 부문에서 수익을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