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공주[1]이자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비이다.2. 망국의 공주
소피아 팔레올로기나는 1449년[2]에 모레아의 데스포티스이자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막내 동생인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의 딸로 태어났고, 당시 이름은 조이 팔레올로기나였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며 동로마가 멸망하고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전사하자, 토마스와 그의 또다른 형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가 명목상의 제위를 계승했다. 이후 토마스와 디미트리오스는 마지막 까지 싸우다 전사한 형과는 다르게 권력 투쟁을 벌이다가, 1460년 디미트리오스가 오스만 제국을 끌어들이는 바람에 제국의 마지막 잔재인 모레아 전제군주국은 허무하게 멸망했다.[3]이후 조이는 아버지 토마스와 남동생 안드레아스, 마누일 팔레올로고스와 함께 모레아를 탈출하여 교황령으로 망명했는데, 교황은 명목상으로나마 토마스에게 황제 대접을 해주었고[4], 조이 역시 공주 대접을 받으며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다. 물론 교황이 순수하게 호의나 동정심 때문에 망명을 받아준 건 아니었는데, 망명을 받아주는 조건으로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조이는 가톨릭 세례를 받고, 그리스식 이름인 조이 대신 소피아[5]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평범한(?) 망국의 공주지만, 이후 그녀의 인생과 앞으로의 역사를 바꿀 큰 사건이 일어났다.
3. 이반 3세와의 결혼, 제3의 로마
1469년에 교황 바오로 2세는 소피아에게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와 결혼할 것을 요구했는데, 그 목적은 바로 동서 교회의 통합이었다. 동서 대분열 이래 가톨릭과 정교회는 여러 차례의 통합 시도가 있었으나 십자군이 저지른 역대급 사건과 동서 교회 양측의 통합 반대파들 때문에 번번이 좌절당했다. 그리고 1448년 피렌체 공의회에서 논의된 통합 시도마저 정교회의 맹주인 동로마가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하는 바람에 좌절되고 말았는데, 이제 가톨릭이 통합을 위해 마지막 카드로 내세운 인물이 바로 소피아였다. 소피아는 동로마의 마지막 황녀로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인물이었기에, 동서 교회 통합의 상징으로 내세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소피아의 결혼 상대로 지목된 대상은 바로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였는데, 당시 동로마를 비롯한 발칸 반도의 정교회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하거나 종속된 것과 달리, 모스크바 대공국은 오스만 제국과 거리가 멀다는 지리적 이점과 추운 기후 덕분에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바실리오스 베사리온 추기경[6] 비롯한 수행단을 이끌고 로마를 떠나 모스크바로 향했고, 1472년에 이반 3세와 정식으로 혼인하여 대공비가 되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교황청의 계획이 거의 성공한 듯했으나, 반전이 있었으니 사실 이반 3세는 동서 교회의 재통합을 시도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소피아와 결혼한 목적은 바로 동로마의 마지막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이슬람의 지배에 들어간 옛 동로마 영역 대신 정교회의 맹주라는 명분을 획득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베사리온 추기경을 비롯한 수행단이 돌아가자, 통합 시도를 없던 일로 하여 교황청에 통수를 날렸고, 소피아는 정교회로 다시 개종함으로써 남편과 함께이후 이반 3세는 모스크바를 로마와 노바 로마[7]의 뒤를 이은 제3의 로마로 선포하고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차르를 칭했으며[8], 동로마의 상징인 쌍두독수리 문장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소피아는 동로마 황실의 예법을 모스크바의 궁정에 도입함으로써 남편의 이러한 정책을 뒷받침했다. 그리고 이반 3세와 소피아 사이에서 태어난 바실리 3세가 모스크바 대공위를 계승함으로써, 러시아의 류리크 왕조에는 동로마의 마지막 왕조인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피가 흐르게 되었다. 다만 그 과정이 썩 좋지는 않았는데 당시 이반 3세는 후계였던 맏아들이 통풍으로 죽자 맏아들의 아들인 드미트리(곧 이반 3세에게는 손자)와 바실리 중 누굴 후계로 할지 고심하다가 드미트리를 선택했는데 이에 격분한 소피아는 반란을 꾀했으나 발각되어 추방당하고 만다.[9] 이후 바실리는 자신의 힘으로 1500년에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고 나서인 1502년이 되어서야 간신히 후계자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소피아 팔레올로기나는 아들이 후계자 자리에 오르는 걸 보고 나서 1년이 지난 1503년에 눈을 감는다. 비록 말년에 후계자 자리 다툼 과정에서 밀려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지만 그래도 아들이 최종 승자가 되는 것을 보았기에 편히 눈감을 수 있었을 것이다.
[1]
동로마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자식이 없었고, 그의 동생인 토마스가 명목상의 제위를 계승했다. 그래서 토마스의 딸인 소피아가 마지막 공주라곤 하지만, 제국 멸망 이전에 황제의 딸로서 공주 대접을 받은 적은 없다.
[2]
다만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아니다.
1450년대에 태어난 남동생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와
마누일 팔레올로고스보다 먼저 태어난 것만 확실하고,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3]
디미트리오스는 토마스를 축출하고 모레아의 단독 통치자가 되기 위해 조국
동로마 제국과
형의 원수인 오스만 제국을 끌어들였는데,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모레아
를 직할령으로 삼고
디미트리오스를 가택연금에 처했다. 결국 디미트리오스는
아드리아노플에서 감금 생활을 하다가
1470년에
비참하게 사망했다.
[4]
다만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로마 황제가 아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Imperator Constantinopolitanus)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5]
사실 소피아도
그리스어로
지혜를 뜻하는 단어지만, 그리스어권에서만 쓰이는 조이와는 달리 기독교 문화권 전체에서 널리 쓰이는 이름이다.
[6]
본래
정교회
수도자로서 동로마 멸망 이전에는 수도원장을 지낸 인물이다.
오스만 제국에 맞서 서방의 지원을 얻기 위해서는 동서 교회의 통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동로마 멸망 이후에는
교황령으로 망명한 후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7]
라틴어로 새로운 로마를 뜻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정식 명칭이다.
[8]
다만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모스크바 대공 칭호를 더 자주 사용했고,
차르가 모스크바 대공 칭호를 완전히 대체한 시기는 그의 손자
이반 4세 시대부터다.
[9]
이때 소피아가 반기를 든 이유는 후계자로 선정된 드미트리가 자신의 친손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드미트리의 아버지이자 이반 3세의 장남인 이반 이바노비치는 소피아의 아들이 아닌 그녀 이전에 이반 3세의 부인이던 마리야 보리솝나의 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