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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나치 독일 부역자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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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블라소프 재판2.2. 크라스노프 재판
3. 송환되지 않은 러시아계 인물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얄타 회담에 따라 송환된 러시아 국적 포로들에 대한 소련의 재판

2. 상세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이 시작되고 미국에 의한 계속재판이 이루어졌듯 각 국에서 연속된 후속 전범재판이 이루어졌다. 소련도 마찬가지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과는 별개로 소련 영토 내에서의 전쟁범죄에 대해 전범재판을 단행하였다. 종전 직후의 재판은 대부분 나치 독일, 헝가리 등 유럽 전역에 대한 재판 위주로 진행되었으며, 40년대 중후반에는 일본 제국 국적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관동군 사령관 및 731부대에 대한 하바롭스크 재판이 있다.

일련의 전범재판의 일환으로 나치 독일에 부역한 러시아 제국, 소련 국적자들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졌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블라소프 재판과 크라스노프 재판이다. 안드레이 블라소프 표트르 크라스노프 대전 끝자락에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에서 활동하였지만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로 결집되기 전까지의 나치 독일 아래에서의 활동도 달랐다.

안드레이 블라소프 러시아 내전 당시 적군 소속이었고 표트르 크라스노프는 백군 소속인데다 카자크였었다. 블라소프는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1942년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생포되어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가 수립되는 1944년 전까지는 소련군 출신 장교들과 함께 선전부에 소속되어 심리전에 주로 활용되었다[1]. 반면 반공주의, 복고주의자였던 크라스노프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이를 해방운동으로 생각하고 1941년부터 카자크족들을 나치 독일의 아래로 결집하는 데에 앞장섰으며 그렇게 결성된 카자크 기병여단에서 일찍이 활동하였다. 1941년부터 활동하여 점차 카자크족을 부분 규합하여 세를 불려나갔으며 2개 사단규모의 군단으로 편성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비슷하지만 성향과 행보가 달랐기 때문에 블라소프 재판은 소련군 출신의 부역자집단, 크라스노프 재판은 카자크족 중심의 부역자집단에 대한 재판으로 구분되어 진행된다.

다른 공통점은 얄타 회담에서 소련, 러시아 국적자는 소련으로 송환된다는 약속이 이뤄진 것을 몰랐다는 점이다. 블라소프가 이끌던 러시아 해방군은 프라하 봉기에서 나치 독일에 반기를 든 이후, 영미 진영에 투항해야 일말의 안전이 보장될 것이라 판단하고 서부전선을 향하여 진격하였으나 정작 미군은 투항을 거절하였고, 결국엔 소련군에게 포획된다.

크라스노프와 추종 세력 또한 동일한 판단을 하였고 1944년에 이미 스위스 산악지대에 정착지를 마련하는 등 대책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연합국이 이탈리아에서 밀고 올라오면서 오스트리아 린츠 일대로 이전하게 되고 이후 일대를 점령한 영국군에게 소련에 송환되지 않는 조건으로 항복하였다. 하지만 영미는 얄타 회담 조약 내용을 준수하였던 입장이었다. 다만 영국 외무부에서는 국적 판단을 소상히 조사하라고 지시하였으나 일선 부대에서는 매 건 판단할 수 없다며 의심스럽다면 그냥 보내는 쪽으로 결정하였고 조금이라도 러시아 제국, 소련과 관련있다 싶으면 죄다 송환하였다. 투항 이후 올라탄 열차는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향했고 카자크들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때문에 조금이라도 이 사실을 알았던 사람들은 탑승을 거부하거나 자살하는 등의 소란을 일으켰고 영국군은 이를 몽둥이로 때려가며 진압하였다. 또 일부는 부역자가 아닌 민간인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백군 출신, 카자크족 측에서는 이 사건을 카자크의 배신, 린츠에서의 학살이라고도 한다. 이 이후로도 킬하울 작전(operation keelhaul[2])이라는 이름으로 소련계 투항자들의 소련 송환이 1947년까지 이루어졌다. 크라스노프 또한 이러한 송환을 피할 수 없었고 1947년 재판에 회부된다.

2.1. 블라소프 재판

파일:223928.jpg
블라소프 일파의 재판[3]
이름 계급 혐의 판결
이반 알렉세예비치 블라고베셴스키[4] ROA 소장
前 소련군 소장
1~5 유죄 사형
세르게이 쿠즈미치 부냐첸코 ROA 소장
前 소련군 대령
1~5 유죄
안드레이 안드레비치 블라소프 ROA 중장
前 소련군 중장
1~5 유죄
게오르기 니콜라예비치 질렌코프[5] ROA 중장
前 소련군 여단 인민위원
1~5 유죄
드미트리 에피모비치 자쿠트니[6] ROA 소장
前 소련군 소장
1~5 유죄
그레고리 알렉산드로비치 즈베레프[7] ROA 소장
前 소련군 대령
1~5 유죄
블라디미르 데니소비치 코르부코프[8] ROA 대령
前 소련군 중령
1~5 유죄
빅토르 이바노비치 말체프[9][10] ROA 공군 소장
前 소련군 공군 대령
1~5 유죄
바실리 페도로비치 말리쉬킨[11] ROA 소장
前 소련군 소장
1~5 유죄
미하일 알렉셰비치 메안드로프[12] ROA 소장 1~5 유죄
표도르 이바노비치 트루힌 ROA 소장
前 소련군 소장
1~5 유죄
니콜라이 스테파노비치 샤토프[13] ROA 대령 1~5 유죄

1946년 7월 30일부터 8월 1일에 걸쳐 안드레이 블라소프, 세르게이 부냐첸코 등 12인에 대하여 반소련 선동선전, 테러행위, 반역 등의 혐의로 기소하고 재판을 진행하였다. 대부분 공개재판이 진행된 반면 이 재판은 반소련적 발언이 나올 것을 우려해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재판기간이 짧은데 이는 소련 수뇌부가 이미 1946년 4월에 사형시킬 것을 정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기소된 혐의는 1. 소련 정부 및 정당, 조직에 대한 테러행위, 2. 공공재산에 대한 테러행위, 3. 반소련 선동 선전, 4. 이상의 행위에 대한 공모, 모의, 5. 군인의 반역 행위였으며 추가로 1943년 제4차 하리코프 공방전에서 하르키우를 탈환하고 이루어진 나치 독일 전범자 재판에서 규정된 나치 및 부역자들에 대한 처벌 조항까지 겸하여 재판이 진행되었다.

기소된 12명 모두 사형을 판결받고 8월 1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 교수형 사진 펼치기 ]
파일:6786786.jpg
파일:attachment/Andrei_Vlasov_hanging.jpg
교수형 직후의 사진. [14]

이후 2001년에 블라소프를 비롯한 이 재판 관련 인물들에 대한 복권을 시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만 기소된 3항 반소련 선동선전은 이 때에 일괄적으로 무혐의로 바뀌었다.

2.2. 크라스노프 재판

파일:767671123.jpg
크라스노프 일파의 재판[15]
이름 계급 혐의 판결
1 2 3 4
티모페이 니콜라예비치 도마노프[16] 독일국방군 소장
前 백군 소트닉[17]
사형
술탄 킬리치 기레이[18] 북캅카스-산악캅카스 군단 부대장
前 백군 소장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크라스노프 돈 군 아타만, 독일군 카자크부대장
러시아 제국군 기병대장
세묜 니콜라예비치 크라스노프[19][20] 독일군 카자크부대 참모장
前 백군 대령
헬무트 폰 판비츠 독일국방군 중장
안드레이 그리고리예비치 슈쿠로[21] 독일군 카자크 예비군 사령관
前 백군 중장
혐의 : 공란- 불기소, 유- 유죄

1947년 1월 15일, 16일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진 백군계열[22] 부역자에 대한 재판이다.

기소된 혐의는 위의 블라소프 재판과 비슷하지만 위 3항 반소련 선동선전, 5항 군인의 반역행위는 적용되지 않았고, 대신에 반역행위, 간첩, 비밀누설자의 해외 도피에 대한 조항이 추가되었다. 1. 반역, 간첩 행위자의 해외 도피, 2. 간첩행위, 3. 소련에 대한 테러행위, 4. 각 사항에 대한 공모 모의로 각기 기소되었다.

티모페이 도마노프는 소련국적이었고 킬리치 기레이, 표트르 크라스노프, 세묜 크라스노프, 안드레이 슈쿠로는 무국적자였지만 이전 국적을 따지면 소련 국적자에 준하게 처리할 수 있었기에 소련 내국인법으로 처벌하였다. 다만 원래 송환 대상이 아니였던 독일인 헬무트 폰 판비츠는 내국인법이 아닌 1943년에 최고 소비에트 상임위에서 제정된 나치 전범에 대한 법령에 의해서 유죄를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기소된 6명 모두 16일 레폴토보 교도소에서 교수형되었다.

헬무트 폰 판비츠는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소련인, 무국적 카자크인 등이 소련으로 송환될 때에 이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사고락을 함께한 부대원을 버릴 수 없다며 스스로 소련행을 수락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1996년에 판비츠에 대한 복권이 요청되자 러시아연방 군사검찰은 무죄로 복권해주었으나 2001년에 번복되었다.

한편 카자크 출신 인물들에 대한 복권도 판비츠의 복권시점에 즈음하여 빗발쳤는데 이들에 대한 복권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90년대부터 카자크족의 사회, 문화 등의 보전과 권리보호를 위해 카자크 사회(Казачье общество) 등을 법으로 보장하였는데, 그 중 하나인 대 돈 군(All-Great Don Army) 코자크 협회 및 이와 관련된 러시아 정교회 세력에서 2000년대에 들어 표트르 크라스노프, 안드레이 슈큐로, 티모페이 도마노프 등에 대한 복권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당시 국가 두마 의원이자 대 돈 군의 아타만이었던 빅토르 보돌라츠키가 이를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백군계 후손이나 러시아 정교회 일각에서는 크라스노프를 포함하는 백군계 인물들( 표트르 브란겔, 알렉산드르 콜차크 등)에 대한 추모비 건립을 요구하고 있다.

3. 송환되지 않은 러시아계 인물

얄타 회담에서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카자크계 부역자들을 소련으로 송환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여기서 국적이 문제가 되었다. 완전히 소련 국적인 경우에는 얄짤없이 송환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소련 성립 직전을 즈음하여 이탈한 백군계였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는 이 조항에 저촉되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영국 정부는 국적에 대해서 면밀히 검토할 것을 일선 부대에 지시하였으나 실제로는 무국적자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범 러시아계 부역자 내지 포로들을 송환하였으며, 일부는 부역자가 아닌 민간인임에도 송환되었다. 송환 사실을 알게된 일부는 저항하거나 자살하는 등 저항을 하자 영국군은 무력으로 소란을 진압할 수 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학살, 배신 등의 표현으로 이 송환 사건을 일컫기도 한다.

반면에 러시아 내전 말미에 정식으로 미국이나 타국으로 국적을 바꾼 백군출신 부역자들은 송환되지 않았다. 미하일 스코로두모프와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1943년에 나치독일에 합류한 쿠반 카자크 출신의 뱌체슬라프 나우멘코(Вячеслав Григорьевич Науменко)는 1945년 영국군이 아닌 미군에 항복하는데 성공하였는데 미군은 송환에 엄격하지 않았으며 오래지않아 석방되었다. 종전 후 미국에 정착하여 남은 여생을 카자크족에 관한 지원과 저술활동에 전념하였고 특히 린츠에서의 송환과정을 고발하는 서적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한편 나치 독일과 크라스노프의 회유가 있었지만 부역에 가담하지 않았던 백군 출신 망명자인 안톤 데니킨은 명목상 해당사항이 없었지만 후환을 우려하여 종전 후 또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기도 하였다.

러시아 해방군의 요주의 인물 중 유일하게 체포되지 않고 송환에서 벗어나 도피에 성공한 사례가 있는데, 바로 이반 코노노프이다. 뮌헨에서 1948년까지 거주하였다고 하며 40년대 말에 호주로 이주하는데까지 성공하였다. 소련에 의해 수배령이 내려졌지만 체포되지 않았고, 1967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물론 이 죽음도 소련에 의한 암살이 아닌가하는 의견이 있었지만 확실하지 않다.
[1] 블라소프 본인도 공산주의에 대해 애매한 포지션을 취했다고하며 더구나 그를 따르는 항복한 소련군 출신들은 더러 공산주의적 성격이 있었고 유대인에 대해서도 무관심했다. 때문에 심리전에 활용되기 전까지 많은 심문과 조사가 이루어졌었고 독일 수뇌부는 투항한 소련군을 활용하는 데에 부정적이었다. 이는 전황이 불리해진 1944년이 되어서야 소련군 포로를 적극적으로 병력으로 구성시키는 데에 직접적 원인이 되었고 또 블라소프에게 병력 통솔권을 부여하는 것에 주저하였던 이유기도 하다. [2] 킬하울은 용골쓸기라는 형벌을 의미한다. [3] 재판정 사진에의 앞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안드레이 블라소프, 바실리 말리쉬킨, 표도르 트루힌, 게오르기 질렌코프, 안드레이 블라소프의 왼쪽 뒤로 드미트리 자쿠트니와 세르게이 부냐첸코, 말리쉬킨의 뒤로는 미하일 메안드로프, 트루힌의 왼쪽 뒤는 이반 블라고베셴스키이다. [4] Иван Алексеевич Благовещенский [5] Георгий Николаевич Жиленков [6] Дмитрий Ефимович Закутный [7] Григор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Зверев [8] Владимир Денисович Корбуков [9] Виктор Иванович Мальцев [10] 대숙청 시기에 체포되고 무죄를 받았으나 계급이 복권되지 않았다. 이후 얄타 아에로플로트 소속 요양소에 있다가 1941년에 독일군이 얄타를 점령할 때에 가담함 [11] Василий Фёдорович Малышкин [12]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Меандров [13] Николай Степанович Шатов [14] 재판정 배석순서와 비슷한 순서이다. 윗 사진의 오른쪽부터 안드레이 블라소프, 표도르 트루힌, 바실리 말리쉬킨, 게오르기 질렌코프, 드미트리 자쿠트니, 미하일 메안드로프.
아래쪽 사진에서는 왼쪽부터 니콜라이 샤토프, 블라디미르 코르부코프, 세르게이 부냐첸코, 이반 블라고베셴스키, 빅토르 말체프, 그레고리 즈베레프 순서이다. 다만 불분명한 것은 아래쪽 사진의 오른쪽 세번째 인물인데 이를 안드레이 블라소프라고 하기도 한다.
[15] 앞줄: 표트르 크라스노프, 안드레이 슈큐로, 술탄 클리치 기레이, 뒷줄: 헬무트 폰 판비츠, 세묜 크라스노프, 티모페이 도마노프 [16] Тимофей Николаевич Доманов [17] 아타만 같은 카자크의 계급으로 백인대장의 의미 [18] Клыч Султан-Гирей [19] Семён Никола́евич Красно́в [20] 표트르 크라스노프의 조카이다. [21] Андре́й Григо́рьевич Шкуро́ [22]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이 패배한 이후 유럽권 등지로 이민한 집단이면서도 대체로 카자크족과 관련된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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