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ff><colcolor=#0039A6> 러시아 보호군 사령관 보리스 알렉산드로비치 시테이폰 Бори́с Алекса́ндрович Ште́йфон Boris Aleksandrovich Shteif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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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1년 12월 6일 |
러시아 제국
하리코프 (現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주 하르키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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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5년 4월 30일 (향년 63세) |
크로아티아 독립국
자그레브 (現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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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
학력 |
추구예프 군사학교 니콜라예프 총참모부 사관학교 |
직업 | 군인 |
최종 계급 |
대령 (러시아 제국 육군) 중장 (러시아 해방군) |
참전 |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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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의 군인. 러시아 혁명에서 백군에 가담하였으며, 이후 세르비아로 이주하여 2차대전기에는 독일 국방군 지휘 아래에서 러시아 보호군 사령관을 맡았다.2. 생애
1881년 하리코프에서 정교회로 개종한 유대인 중산층의 자제로 태어났으며, 1902년 추구예프 군사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였다.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만주지역에 투입되어 정찰작전에서 성과를 거두어 성 블라디미르 훈장을 수훈받았다. 군사학교 및 전공 덕분에 니콜라예프 황립 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으며 1914년에 졸업 후 대위로 진급하였고 투르키스탄 군관구에서 근무하였다.2.1.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니콜라이 유데니치의 참모로서 캅카스 전역에 투입되었다. 에르주룸 공세에서 데베보이누 산맥의 진지를 정찰하고 점령하는 작전을 입안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 전공으로 시테이폰은 성 게오르기 훈장을 수훈받았다. 1916에 러시아 제국 육군 제1군단의 참모로 배치되었으며, 1917년에는 제3핀란드소총사단 참모장이 되었고 그 해에 대령으로 진급하였다.2.2. 러시아 내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고 쿠반 지역에서 안톤 데니킨이 이끄는 의용군에 참여하였다. 고향이었던 하리코프를 되찾는 데에 전공을 거두었으며, 회고록에서 많은 지역민들이 백군을 해방군으로서 환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본인이 이끄는 자원부대의 인원이 가장 많을 때에는 약 4,000여명에 이르렀다.하지만 백군은 점차 남쪽으로 패주하였으며, 다른 백군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세바스토폴에서 철수하여 갈리폴리로 대피하게 된다. 시테이폰은 불가리아 왕국으로 망명하였으나 친 공산주의 성향의 알렉산더르 스탐볼리스키 총리가 집권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엔 유고슬라비아 왕국[1]으로 추방당하게 된다.
2.3. 제2차 세계 대전
밍명 이후부터 한동안은 군사(軍史) 및 군사학 연구에 전념하면서 군사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1941년에는 나치 독일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 점령하게 되면서 시테이폰은 자신의 유대인 혈통을 숨겼다. 1943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위시한 공산주의 파르티잔이 활동하기 시작하자 전직 러시아 제국 군인인 미하일 스코로두모프 장군의 제안을 따라 러시아 보호군의 지휘관으로 참여하게 된다.러시아 보호군의 창설에 즈음하여, 스코로두모프 장군을 비롯한 지휘관들은 나치 독일의 온갖 검증을 통과해야 했다. 러시아 제국 출신 자원부대의 백계 러시아인 지휘관들은 투철한 반공주의 및 러시아 제국에 대한 모종의 재건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나치 독일의 입장에서는 다소 독립적으로 움직이려는 러시아 보호군을 고깝게 바라보았고 러시아 보호군의 결성 및 창설에 주도적이었던 스코로두모프를 해임시키게 된다. 게슈타포의 검증을 통과한 시테이폰은 스코로두모프를 대신하여 러시아 보호군을 이끌게 된다.
시테이폰은 독일 국방군에 동부 전선으로 파견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여느 나치에 부역한 러시아계 자원부대들이 그렇듯이 아돌프 히틀러 및 수뇌부가 불신하였기 때문에 동부전선에는 투입되지 않았다. 대신 동남부 유럽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공산주의 파르티잔을 토벌, 진압하는 데에 주로 투입되었고 러시아계 나치 부역 자원부대의 지휘관들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의 연장선에서 투철히 공산주의 파르티잔을 토벌하는데 앞장섰다. 특히나 러시아 보호군은 일련의 활동이 끝나면 러시아로 돌아가 공산주의를 몰아낼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던 탓도 있다.
전황이 독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1944년에는 당도한 소련군에 대적하기도 하였으며, 이 해에 시테이폰은 국방군으로부터 중장으로 진급하게 된다. 또한 시테이폰은 안드레이 블라소프 중장을 만나 러시아 해방군에 합류하는 것에 합의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독일군의 전황이 완전히 패색이 짙어지자 시테이폰이 이끄는 러시아 보호군을 비롯하여 러시아 해방군은 생존을 위해 독일군과도 손절하였고, 영국군과 미군을 찾아 항복을 위해 싸워나갔고 영국군에 항복한다. 그나마 러시아 해방군과 달랐던 점은, 러시아 보호군 소속의 군인들은 완전히 이민하여 국적을 바꿨기 때문에 얄타 회담에서 논의된 소련 또는 러시아 제국 국적자들의 소련 송환에 저촉되지 않았다.
나치 독일이 항복을 일주일 앞둔 1945년 4월 30일에 심부전으로 자그레브에서 사망한다. 당시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었던 백계 인사였던 알렉세이 폰 람페는 회고록에서 시테이폰이 군의관에게 약물투여를 요구하였으며 투약 후 그대로 사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대인의 혈통이었음에도 이를 숨기고 나치 독일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류블랴나의 독일군 묘지에 묻히게 되었다.
3. 기타
HOI4의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 러시아 공화국의 장군으로 등장하며, 전차 지휘관 특성을 달고 있다.4. 둘러보기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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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52b1e><colcolor=#FFF> 성격 | 나치 독일의 괴뢰국 |
성립 배경 | 러시아 내전 | 제2차 세계 대전 | 독소 전쟁 | |
주요 이념 | 파시즘 | 반소주의 | 반자본주의 | 러시아 내셔널리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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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사건 | 러시아 해방운동 | 프라하 봉기 | 소련의 나치 독일 부역자 재판 | }}}}}}}}} |
[1]
당시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