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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10:57:18

세실 켈리

Cecil Kelley
세실 켈리
<nopad> 파일:Cecil Kelley.jpg
왼쪽 사진에 있는 인물이 세실 켈리. 오른쪽 사진은 사고가 일어난 혼합탱크이다.
<colbgcolor=#000> 본명 <colbgcolor=white,#1f2023>Cecil warren Kelley
세실 워런 켈리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출생 1920년 10월 16일
사망 1959년 1월 1일 (향년 38세)[1]
직업 원자력 기술자

1. 소개2. 로스 앨러모스 임계 사고3. 음모론4. 소송5. 여담6.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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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미국 원자력 기술자.

생전에는 그냥 로스 앨러모스에서 원자력 관련 직종에 종사했던 유능한 기술자였다. 이 사람의 문서가 작성된 이유는 밑에 거론될 원자력 사고( 임계사고)로 인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방사능 피폭을 당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2. 로스 앨러모스 임계 사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이 문서는 세실 켈리 임계사고를 다룹니다. 로스 앨러모스 핵실험 사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루이스 슬로틴 문서
번 문단을
로스 앨러모스 핵실험 사고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958년 12월 30일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의 플루토늄-239 재회수용 혼합탱크에서 벌어진 초임계 사고로 피폭당했다. 세실은 플루토늄이 포함된 용액을 탱크에 붓고 프로펠러를 돌려 이를 섞는 작업을 수행했는데, 탱크 안에는 상정한 이상으로 많은 플루토늄이 들어 있었고, 탱크 하부에 가라앉아 있던 플루토늄이 교반 작업에 의해 떠오르면서 새로 추가한 플루토늄과 만나 임계에 이르렀다.

인류 역사상 공식적으로 가장 높은 수치의 방사선 흡수량인 120시버트(그레이 단위로는 36그레이)를 상반신에 뒤집어썼고, 그 순간부터 살아있는 원자로나 다름없는 상황에 처했다. 8시버트만으로도 인간은 거의 100% 사망하는데,[2] 그 15배의 수치인 120시버트라면 단 하루도 못 버티는 상황이다. 관련 pdf 문서 영문 위키피디아 세실 켈리 관련 내용

일반인의 1년 허용 기준량이 1밀리시버트[3]임을 생각해보면 켈리는 보통 사람이 12만 년 동안 받아야 하는 방사능을 몇 초 만에 받아버린 것이 된다.

피폭 직후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으나 바로 착란 상태에 빠져서 "내 몸이 불타고 있어! 불타고 있다고!!"[4]를 계속 외쳤다고 한다. 이후 눈이 쌓인 곳 위에서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착란 상태가 이어지며 몸이 뜨겁다고 느끼고 계속 눈속을 뒹굴었다고 한다.[5] 당시엔 약간의 화상과 건물 밖으로 뛰어 나왔을 때 입은 상처 외엔 외견상 멀쩡해보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피폭만으로 화상을 입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증상이 즉각적으로 나타날 정도로[6] 크게 피폭당했다는 뜻이기 때문에, 이미 이 시점에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그 후 1시간 40분 동안이나 구토와 착란 증세를 보이다가 페티딘 투여 후 의식을 찾고 정상적인 대화를 하는 등 회복된 모습을 보였으나 정밀검사에서 심박수는 분당 160회인데 혈압80/40이라는 비정상적인 수치를 보였다.[7] 이것만으로도 그의 몸이 상식을 벗어난 상태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켈리의 몸에서는 엄청난 양의 감마선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며 대소변에서마저 엄청난 양의 방사선이 뿜어져 나왔다고 한다. 대소변에서 검출된 방사선량은 밀리시버트 단위가 아닌 시버트 단위로 검출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수천년 간 보통 사람들이 받는 방사선의 양이 켈리 한 사람의 대소변에서 나왔다.

켈리는 백혈구, 적혈구, 세포, 염색체 가릴 것 없이 모든 것이 짧은 시간 안에 거의 몰살되어버렸고 몸 안에 있던 나트륨은 실로 어마무시한 방사능을 내뿜는 나트륨-24가 되어버렸다. 피폭 6시간 만에 림프구가 사라졌고, 골수는 적혈구를 생성하지 못해 채혈을 하면 혈장 수준의 투명한 혈액이 나왔다고 한다. 장기에 산소를 전달해 줘야 할 적혈구들이 모두 전멸해 더 이상 장기들에게 보내줄 산소와 피가 없어지자 장기가 서서히 망가지고 이후 심장도 작동불능이 되어 더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다. 더불어 혈액 검사 결과 혈소판이 모두 전멸했다고 한다.

피폭 35시간 뒤 이를 도저히 감당하지 못한 신체가 다발성 장기 부전 심부전을 일으키며 결국 켈리는 사망하였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의 피폭 사망자들이나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 피폭 사망자들, 기타 다른 방사선 피폭 사망자들에 비해 비교적 육체가 온전한 상태로 사망했는데, 이는 피해 정도가 약해서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피폭량이 너무 많았던 탓에 피부나 장기 등에 반응이 일어날 틈도 없이 체내의 면역 기능과 신체 기능이 완전히 파괴되어 빠른 시간 내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켈리가 사고를 당하기 12년 전에는 로스 앨러모스에서 핵 물리학자로 일하던 루이스 슬로틴이 21시버트라는 피폭을 당해 고통스런 최후를 맞이했다. 참고로 공식적으로 알려진 피폭 사고를 기준으로 할 때 한 사람이 받은 피폭량 역대 1위가 켈리이고, 2위가 슬로틴이다. 3위는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의 희생자인 오우치 히사시.

이 당시는 원자력의 위험성이 지금처럼 널리 알려지기 전이었으므로 치료에 동원된 의료진 역시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피해자 중 하나인 바실리 이그나텐코(14시버트)는 아내인 류드밀라가 직접 수발했는데, 바실리의 피고름을 빨고 뱉는 과정에서 대량의 피폭을 당해 뱃속의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죽었으며 본인도 지금까지 후유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의 피해자 오우치 히사시의 경우(18시버트) 가족들은 접근조차 허가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들이 이 정도인데 무려 120시버트를 받아버린 환자를 치료한 의료진과 의료장비는 엄청난 수치의 방사능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중 상당수는 피폭에 의해 크고작은 질병에 걸리거나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보면 단순 병사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3. 음모론

세실 켈리의 사후, 뇌와 각종 조직들, 장기 모두가 적출되어 어딘가에 보존되어 있음에도 당국은 유족 측에 이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았다. 애초에 고선량 피폭의 영향을 실험하고자 군과 당국에서 일부러 사고를 유도한 게 아니냐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사고가 나기 전까지 켈리는 10년 동안 한 번도 실수하지 않은 기술자였기 때문이다.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에서 보듯 핵물질 처리는 배합을 조금만 실수해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게되지만 능숙한 작업자가 늘 하던 대로 하던 중 일어난 사고였기 때문에 미심쩍은 면이 많다.

다만 만약 고의로 사고를 유도했다면 사고가 난 후에 바깥으로 못 나가게 막았을 것이다. 굳이 중요 인력을 실험용으로 낭비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반론 또한 존재한다. 애초에 실수라는 것은 이전까지 안 했다고 평생 안 하는 것도 아니니 진실은 본인들만 아는 셈.

또한 기왕 죽은 사람 연구자료라도 얻자는 식으로 장기 일부 등을 빼돌리는 불법행위는 의외로 다른 나라에서도 몰래 하다가 걸린 케이스가 많다. 법률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당연히 하면 안 되는 건 맞지만, 이게 살인의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다.

한편 시신은 다른 피폭자들과 마찬가지로 납과 콘크리트로 만든 관에 밀봉되어 매장되었다.

4. 소송

1993년 뉴멕시코주 지역 언론사인 앨버커키 트리뷴(Albuquerque Tribune)의 미국 내 방사능 인체 실험[8] 보도 후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가 공개한 당시 문서 기록과 유족의 계속된 정보 공개 요청으로 세실 켈리의 시신 중 뇌, 척수, 근육, 뼈 등 주요 장기와 조직이 유족의 동의 없이[9] 미국 전역에 연구용 샘플로 보내졌다는 걸 알게 된 유족은 1996년 사후 부검을 실시한 내과의이자 병리학자 클라렌스 러시바우(Clarence Lushbaugh), 그가 일한 로스 앨러모스 메디컬 센터, 연구실 운영 주체[10] 캘리포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California, UC)을 상대로 집단 소송[11]을 걸었다. 러시바우는 재판에서 시신에서 8파운드 가량의 장기와 조직을 떼어낼 권한을 누가 줬냐는 질문에 " 신이 내게 그 권리를 줬다."라고 말하는 등, 자신의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법원에 의해 2002년에 950만 달러, 2007년에 다시 80만 달러, 총 1,030만 달러에 합의하게 된다. 그러나 피고 중 누구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러시바우는 2000년에 이미 사망해서 한 푼도 내지 않았고, 모든 보상은 로스 앨러모스 메디컬 센터와 캘리포니아 대학교가 했다.

5. 여담

지역 공중 보건 부서의 공직도 겸해 카운티 소속 검시관이기도 했던 러시바우는 이 사건을 계기로 앨러모스 메디컬 센터에서 실시하는 모든 부검 시 시신에서 조직을 떼어내는 걸 표준 절차로 만들었고 로스 앨러모스 직원들의 시신[12]과 그냥 카운티에서 살다 자연사한 평범한 주민들의 시신[13]을 비교해 방사능 노출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했다.

참고로 이 '로스 앨러모스 인체 조직 분석 프로그램'은 그 후 35년 동안 1520구의 시신을 대상으로 했고 위에서 언급한 특별 조사위원회의 관련자 면담 및 조사와 기밀 문서 공개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여론의 시신 탈취(bodysnatch)라는 비난을 받자 1995년 이 프로그램을 21년간 이끌었다는 연구 책임자는 엄밀히 말해 이것은 '인체 실험(experiments on human)'이 아니며 당시 유족에게 우편으로 동의서[14]를 받는 절차가 있었고 지역 사회 분위기도 과학 발전에 관심이 많아 호의적이었다고 해명했다. 무엇보다 이 연구로 방사능이 정확히 어떻게 인체 내에서 대사 작용하는지, 내부 장기에 어느 만큼 손상을 주는지 알게 됐고 방사능 물질을 다루는 직종에서 작업자의 안전 기준을 세우는 데도 기여했다고.

이후 러시바우는 연구 대상을 사망자의 시신으로만 한정한 로스 앨러모스를 떠나 1964년 오크 리지 국립 연구소로 자리를 옮겼고 1960년부터 14년 간 암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전신 방사선 노출 실험[15]에도 다른 과학자들과 같이 참여했다. 질소 겨자가스를 이용한 인체의 반응에도 관심을 가지는 등 초기의 항암 방사선 요법에 이름을 남긴 선구자였고 이후 체르노빌 사고 때 미국 정부가 주 소련 미국 대사관으로 보낸 파견단 중 한 명일 정도로 방사능 병리학의 전문가로 인정받았지만 이렇게 논란의 여지도 있는 인물이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공수부대원으로 자원 입대하여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과 전투한 전적이 있다.[16] 출처

세실 켈리는 결혼하여 아내와 두 자녀가 있었는데, 유족들에게는 세실 켈리가 사망한 후에야 위의 사실이 통보되었다. 그리고 연구소 측에서는 금전적인 보상을 약속하면서 소송을 걸지 말아달라고 유족들을 회유하였는데 정작 유족들은 사고 이후 연구소 측으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상술한 소송도 사고로 인한 소송이 아니라 유족의 동의없이 부검한 것에 대한 소송이다.

6. 관련 링크



[1] 1958년 12월 31일에 사망한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세실 켈리의 묘비에는 1959년 1월 1일로 적혀있다. # [2] 참고로 지금까지 8시버트 이상에 피폭되어 살아남은 사람은 전혀 없다. 7시버트에서 한 명 생존했을 뿐이다. 그 사람이 고이아니아 방사능 유출사고를 일으킨 장본인이긴 하지만. 현 시점에선 12시버트까지는 생존 가능성이 있다는 IAEA/WHO 보고서가 있기는 하지만 지금 시대에 그 정도의 공식적 피폭자와 치료 사례가 없어 실증례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3] 1000밀리시버트가 1시버트이다. [4] 원문은 "I'm burning up! I'm burning up!" [5] 다만 말이 착란 상태지 피폭 직후부터 체내의 백혈구, 림프구, 적혈구, 혈소판 등 체내의 세포들이 실시간으로 싹 다 죽어나가고 있었으니 실제로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6]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 피폭자들도 사고 1주일까지는 멀쩡했다. 그들의 사인도 피폭 자체로 몸이 손상된 것이 아니라, 피폭된 뒤 DNA 설계도를 잃어버린 몸이 새로운 세포를 만들지 못해 서서히 몸이 붕괴되어 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경우는 피폭만으로 몸이 직접 손상될 정도였다. 비유하자면 아주 작은 총알을 발사하는 기관총에 온 몸을 난사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고 보면 된다. 온몸에 초미세 구멍이 수천억개가 뚫린 셈이다. [7] 정상 상태의 분당 심박수가 60-100회로, 분당 160회는 마라톤을 해야 나오는 정도의 수치이다. 혈압의 경우 정상은 120/80(수축기/이완기), 저혈압은 100/60 미만이므로 80/40은 엄청난 저혈압이다. 한마디로 심장은 미친듯이 뛰는데, 정작 혈압은 낮은 상태라는 모순된 수치가 나타났다. 이 미증유의 현상은 혈관이 파괴되어 혈액이 조직으로 마구 누출되면서 혈액 내 수분량이 급격히 감소한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18시버트의 피폭을 당한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 피해자인 오우치 히사시(大内 久)도 피폭 이후 4일부터 가장 이상을 보였던 게 이 심박수인데 오우치의 경우는 120을 넘나들었다. 같은 희생자인 시노하라 마사토(篠原 理人) 역시 사고 이후 심박수가 100 ~ 110을 오갔다. 혈압이 자잘한 몸 상태나 심지어 기분에 따라서도 변한다고는 하지만 30대 후반의 남성이 이 정도로 혈압이 떨어지면 명백한 비정상이다. [8] 1945년부터 47년까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한 의사들이 18명에게 동의 없이 플루토늄을 주사한 실험. 이전에도 관련 내용이 몇 번 보도됐지만 이 언론사 기자인 아일린 웰섬은 이들 중 일부의 실제 이름과 의료기록, 실험 후 피해자들과 가족의 삶이 어떻게 변해갔는지 등을 추적해 3부작으로 연속 보도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그 해 12월 미국 에너지부 장관이 자국 시민 8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방사능 생체 실험 사실을 인정하고 보상을 약속했다. 이듬해 웰섬은 퓰리처상을 받았으며 이 보도를 계기로 클린턴 대통령은 같은 해 1월 특별 조사 위원회를 발족하고 160만 건의 기밀 문서를 공개했는데 이 중에는 영유아와 어린이, 임산부, 군인, 흑인 암환자, 미국 원주민을 대상으로 한 인체 실험과 미국- 캐나다의 여러 도시에서 한 방사능 고의 유출 실험 기록도 있었다. 윗 문단의 음모론은 이런 어두운 냉전 시대라는 배경과 역사적 사실에 일정 부분 기인했다. [9] 켈리의 부인이 부검 동의서에 서명한 건 맞지만 변호사는 그 동의서가 사인을 밝히는 용도의 부검이지, 실험용으로 쓴다는 설명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10]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는 국가 소유지만 연구와 운영은 캘리포니아 대학교가 맡음. [11] Class action. 법원이 요청을 받아들이면 다른 유족들의 대표격이 된다. [12] 연구직과 상관없는 경리나 경비 등 일반 사무직도 포함해서. [13] 이들은 직업적으로 방사능에 노출될 일이 없으니 대조군이 된다. [14] 그러나 일각에서는 러시바우처럼 카운티 소속 검시관이라면 유족의 동의 없이도 부검이 가능했다고. [15] 단순 항암 시술이라고 위장했기 때문에 당연히 환자와 가족의 동의를 받지 않았고 방사선이 나오는 챔버도 평범한 병원 진료 대기실처럼 보이게 특수 제작했다. [16] 공수부대는 2차세계대전에 처음 생겼으며 육군 중 최정예부대로 꼽히는만큼 공수부대원들의 자부심도 엄청나다. 전쟁드라마의 영원한 명작으로 꼽히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가 바로 2차세계대전 실제 미국 공수부대원들의 활약상을 그린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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