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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영화)/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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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예고편3. 인터뷰4. 영화 본편
4.1. 영화와 역사적 사실의 차이
4.1.1. 영화속 묘사4.1.2. 실제 역사적 사실
4.2. 영화적 불가피한 각색여부
4.2.1. 타 영화와 비교4.2.2. 실제 감독의 발언과 인식

1. 개요

2019년 개봉한 한국 영화 봉오동 전투에서 표현된 점들에 대한 고증을 검토한 문서.

2. 예고편

2.1. 독립군

2.2. 일본 육군

2.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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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터뷰

실제 역사이기 때문에 왜곡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말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극중 인물의 옷차림부터 머리 스타일까지 조심스럽지 않은 게 없었다. 그런 부분은 철저히 사진 사료 등을 통해서 신경 써서 만들었다. 명확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상황을 재구성을 했을 뿐 삼군자 전투의 승리부터 죽음의 골짜기에서의 대승까지 모두 사료에 기록된 부분이다.
감독의 발언 스포츠조선
그런데 아래에서 보듯이 실제로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맞지가 않는다.
예컨대 이 영화에서 일본군들이 조선 양민을 학살하는 장면들은 실제 자료 사진들을 참조해서 각도까지 일치시키려 했다. 일본군이 조선인의 목을 베어 들고 포즈를 취한 사진, 그런 것들은 잔인함을 보여주기 위한 잔인함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우리가 견뎌야 할, 그래서 이겨야 할 잔인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잔인함에 당위가 분명한 응징을 보여주기 위한 표현들이었다.
감독의 발언 스타뉴스
일본군이 중국인을 학살한 사진에는 그런 내용이 있다. 그러나 조선인의 목을 베서 손에 든 채로 포즈를 취한 사진은 확인되지 않는다. 일본군이 중국 영토에서 중국인의 목을 베서 들고 있거나 포즈를 취한 사진이라면 여러 개가 있으나 조선인 관련 사진은 확인되지 않는다. 포즈를 취했다는 내용은 아무리봐도 일본군의 중국인 학살 사진과 매우 유사하다. 일본군의 중국인 학살 사진, 위키피디아에 있는 일본군의 중국인 학살 사진 혹시 글을 읽는 사람 중 일부 사람들은 '피해자의 국적은 상관없다'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국적에 상관없이 일본군의 중국인 학살을 규탄하면 될 텐데 왜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중국인 사진을 조선인으로 소개하는가?

4. 영화 본편

4.1. 영화와 역사적 사실의 차이

4.1.1. 영화속 묘사

봉오동 전투 이전 전투 묘사
* 영화 시작 장면의 일본군의 참수 사진은 일본군의 중국인 학살 사진으로 보인다. 일본군의 중국인 학살사진 위의 인터뷰에서 말한 조선인 학살 사진이 일본군의 중국인 학살 사진이라면 고증오류다.
* 도입부에서 어째서인지 일본 육군 3명이 사복을 입고 육군 군복을 감춘 채 유해진과 동생의 안내를 받아 강을 건너는데, 공작 임무 등을 하고 싶으면 그렇게 힘들게 강 넘어갈 거 없이 그냥 사복 차림에 기차 타고 넘어가거나 뱃삯 주고 건너면 됐다. 당시 조중 국경은 특히 중국 쪽은 거의 방치되어 있었던 데다, 양국 간 전쟁 중도 아니라서 오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 초반 장면에서 독립군이 경계하는 일본 육군 초소를 습격해서 소년병 하나 제외하고 쓸어버린다. 생포된 소년병 유키오 일등졸은 칼라의 병과 표지가 검정, 즉 헌병인데, 육군 헌병은 타 병과 상등졸들 가운데서만 선발했으므로, 고증 오류이다. 또한, 당시 독립군이 습격한 곳은 육군이 아닌 경찰 초소였고, 전과도 경찰 부상 1명이 전부였다.
* 일본 육군 하사관 병사들의 머리 길이가 너무 길다. 동 시기 일본 육군은 사병 전원, 장교도 나이와 계급에 따라 눈치껏 기르지 않는 한 삭발이 원칙이었다. 작중 지위에 맞는 머리 모양을 한 일본군은 야스카와 소좌 뿐이다.
* 중간에 야스카와 소좌가 아라요시 중위에 대한 징벌로 왼손 검지를 군도로 잘라 버리고는 "성공해서 돌아오면 도로 붙여 주마." 같은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암만 막장 일본군이어도 총, 칼을 사용해 부하를 상해하는 행위는 구타 등과 달리 용인될 수준이 아니었고, 그 자리에서 헌병에게 체포되어 상해죄로 재판에 회부될 중범죄다.
* 일본군 남양수비대가 한인 민간지역을 습격하고 학살하는데 독립군이 그런 남양수비대를 발견하고 일방적으로 쓸어 버린다.
* 일본군을 일방적으로 쓸어버리는 독립군 유격대도 비현실적이지만 해당 지역에 유격대가 있는데도 학살하는 현장에서 지나치게 헛점이 많고 시간을 끌면서 하고 있다.
* 뉴시스에선 "15세 이상 관람가라는 상영 등급을 고려해 볼 때, 좀 더 은유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할 수 있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고 하였고 씨네21에선 "몇몇 장면들은 지나치게 잔혹하다. 서사를 위해 장르를 활용했다기보다는 장르적 쾌감을 위해 역사적 사건을 끌고 들어왔다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고 하는데 틀린 말이 아니다. 봉오동 전투 전후의 학살방식은 무차별 발포인데 불필요하게 고어물 수준으로 묘사했다.[6] 고어 수준으로 묘사할 거면 봉오동 전투가 아니라 간도참변으로 설정해야 옳다.
* 그리고 일본군의 학살을 묘사한다면 히어로 영화식 이야기는 포기해야 한다. 실제로 독일군의 학살을 다룬 컴 앤 씨도 현지 빨치산들은 독일군의 학살을 막지도 못하고 독일군을 쓸어버려도 전혀 유쾌하거나 통쾌하게 묘사되지 않고 현실의 전쟁처럼 우울하게 묘사한다. 실제로 전쟁 속 학살을 묘사할 때는 이렇게 묘사하는 게 정상이다. 영화 봉오통 전투처럼 극적 쾌감을 주는 히어로 영화식 전개는 나오지 않는다.
* 이와 별개로 위의 인터뷰 내용과 영화 오프닝에서 실제 참수 사진을 보면 일본군의 중국인 학살 사진을 조선인 학살 사진으로 착각 혹은 고의로 왜곡한 것으로 보인다.

봉오동 전투 묘사
이쯤 되면 람보 2가 봉오동 전투보다 현실적이다. 람보 2와 비교는 아래 '영화적 불가피한 각색여부' 설명 참고.

총에 반동이 없다.

4.1.2. 실제 역사적 사실

봉오동 전투 이전 기준에는 비슷한 사건도 없다. 봉오동 전투 이전에 전투는 있었다.

1920년 6월 2일. 만주에 있던 항일군대 60여 명은 국내로 들어와서 오후 4시 30분에 종성군 풍곡면 동포 경찰주재소 남쪽 6km지점으로 내려왔다. 항일군인들은 일제군경과 총격전을 벌여서 경찰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러자 일제는 종성에서부터 경찰 14명과 헌병 3명을 보내올렸다.[9]

6월 3일. 신민단원 약 30여 명이 두만강 북안의 삼둔자 마을에 머물렀고 지휘자는 박승길이다. 항일군인들은 온성군 남양동 상류의 강양동대안에서 두만강을 건너 온성과 종성일대로 나아갈 예정이다. 다음 날 오전 5시. 온성군 남양의 두만강 상류에 약 15 지점인 강양도에서 였다. 일제군인들은 주변을 수색하다 무언가를 발견했다. 두만강남안에 쪽배 2척이 있던 것이다. 이걸보자 일제군경들은 항일부대원들이 올 것을 느끼고 부근을 수색했다. 그러던 차에 삼둔자 마을에서 약 17~18명이 두만강을 건너오는 걸 발견했다. 일제군경들은 바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신민단 부대는 건너는 걸 중지하고 삼둔자 부근 두만강 북안에 있는 버들방천에 은폐하였다. 그리고 일제군경을 대응사격을 하였다. 총격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다. 신민단 병사들은 삼둔자 상촌(삼둔자 마을은 상 중 하촌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18호였다.)에서 큰 기와집인 김명오 노인집에 들어가 쉬기로 했다.[10]

일제 군경부대인 남양수비대(남양수비대 10명, 헌병 경찰 7명 합계 17명)는 추격대를 조직했다. 신미(新美 일본어 이름은 니이미로 추정)중위는 추격대를 인솔해서 오전 11시경에 두만강을 건너갔다. 화룡현 삼둔자로 침공했다. 중국 지역을 침범한 것. [11]

당시 일제는 항일군("불령선인")이 있을 장소라 생각하면 들어가기전에 총을 쏘며 '위력수색'을 했다. 일본군은 이걸 '암탐사격'이라 했다. 의심이 되는 인원이 있으면 무조건 쏘고봤다. 그러다 민간인들이 놀라 도주를 하면 그 사람들 체포해 심문하려했고 여의치 않다고 생각하면 현장에서 바로 사살했다. 말이 통하지 않을경우도 쉽게 처리하기 위해 그대로 사살해버렸다. 일제군경은 이런 방식을 당연히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12]

일제군인들이 침공한 삼둔자는 한인 농민들이 정착하면서 만든 마을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남양수비대는 이곳을 주요 독립군 근거지라 판단했다. 일본군은 그 마을 수색하면서 무차별로 발포했다. 일본군은 이 마을주민들을 독립군의 주요 지원세력이 생각했고, 또한 항일군과 지역주민들은 어차피 구별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해서 무차별 발포와 사살을 하였다. [13]

도중 남양수비대는 한 농민에게 정보를 얻었다. 신민단 부대원들이 쉬고있던 집이 어딘가하는 내용이다. 남양수비대는 삼둔자 서쪽 산기슭을 따라 전진하면서 김명오 노인의 집으로 다가갔다. 포위해서 공격하려 하였다. 신민단원들은 일본군경들이 온 것을 눈치챘다. 얼른 집에서 빠져나와 서남쪽 마패방향으로 후퇴했다.[14] 남양수비대는 포위하면서 집을 공격했다. 김명오 노인의 아내와 장남은 그자리에서 즉사하고 노인 아들인 김종식의 아내와 손자는 중상을 입고 결국 사망했다.[15] 날이 저물자 남양수비대는 부근 산중에 야영하며 상부의 명령을 기다렸다.[16]

일본군은 적은 병력으로는 항일군("불령선인")을 토벌할 수 없다고 판단해 병력을 증원했다. 일제군경들은 야스카와 추격대대(월강 추격대대)를 편성해서 6월 7일 새벽에 후안산쪽으로 침공했다. 추격대는 길 안내자 찾기위해 병사 1명을 보냈다. 당시 후안산에선 신민단 부대원들 14~15명이 최진포라는 사람 집에서 쉬고있었다. 최진포의 아내와 형수는 불을 켜놓고 식사준비했다. 마침 그 집이 일제 병사의 눈에 띄었다. 일제병사는 그 집으로 들어갔다 뭔가 의심이 들었다. 함부로 남의 집 방문을 열었다. 누워있는 신민단원이 있다. 신민단원 1명은 그자리에 바로 총을 쏘아 일제병사를 쓰러트렸다. 신만단원들은 바로 뒷문으로 빠져나가 봉오동으로 후퇴했다. 항일군과 일제군은 갑작스런 상황에 맞닥뜨렸다. 둘은 제대로 준비못하고 총격전을 벌였다. 양쪽 다 피해는 거의없었다. 그러나 민간인이 희생됐다. 최진삼의 아내(최진포의 형수)는 집으로 돌아가기위해 집밖으로 나왔다가 일본군에게 사살당했다. 그리고 일본군은 무고한 민가인 6명을 체포했다.(박창욱, 2000, 110~111)[17]

이에 대해 강룡권 연구원의 조사자료도 참고해보자.

삼둔자 전투 설명:
『삼툰자전투의 규모를 살펴보면 <독립운동사>[1975년 발행한 독립운동사 제5권을 말함]에는 "5, 6일동안 있었던 두 차례의 싸움(삼툰자전투와 안산전투 - 저자)에서 독립군은 적병 1백 20여명을 사살했다"라고 적혀 있다.

두차례 전투에서 1백 20명을 사살했다고 하니 삼툰자전투 한 차례만으로는 얼마나 되겠는가? 절반이라면 60명, 3분의 1이라해도 40명가량 된다. 당시 강양동습격적에 동원되였던 독립군이 모두 40명이였는데 상대적으로 우세한 병력과 접전하여 아군의 병력만큼 적을 소멸한다는 것은 대단한 고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전투문제를 둘러싸고 안화춘 선생이 수차 조사 방문하여도 이런 격렬한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낼 수는 없었다. 필자 역시 안화춘 선생의 아래와 같은 판단에 동의하는 바이다.

"1백 50명을 소멸했다는 봉오동전투를 당시 <독립신문>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반면 그보다도 앞서 1백 20여명을 설멸했다는 삼툰자전투는 크게 알려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전투는 소수병력의 접전으로서 섬멸전이 아니고 쌍방간의 사격전후에 삼툰자북방으로 퇴각한 전투로 판단된다."』
(강룡권, 『동북항일운동유적답사기』, 연변인민출판사, 259~260)

안산전투 설명:
『(...)이때 사망한 부녀의 아들 최상준(1909년생, 안산전투 당시에 12살)로인이 생존해 있었다. 필자는 1987년부터 1989년까지 3년사이에 세번 방문하여 그 자세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 최상준 로인은 당시의 전투과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5호동네는 최진욱, 최진삼, 최진국 3형제의 가족과 최원준, 최성일 등 다섯 최씨가 살고있는 동네였다. 나의 아버지는 최진삼(둘째)이고 어머니는 김숙정이다. 경신년(1920년) 음력 4월 20일 밤에 조선으로 모연하러 나갔던 신민단 대원 10여명이 피륙과 신을 둘러메고 돌아와 나의 삼촌 최진국의 집에 묵었다. 밤이 깊었고 또 시장기와 피곤에 지쳤으니 밤을 지내고 이튿날에 봉오동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삼촌댁 혼자서 10여 명의 밥을 짓기 힘드니 나의 어머니를 불러 함께 밥을 지었다. 바로 이때 일본군이 왔다. 독립군들은 되는대로 누워자고 있었고 모연대를 환영하러 온 신민단 안산책임자 최명극과 그 외 두세명이 자지 않고 앞으로의 문제를 토론하고 있었다. 일본군 병졸은 불쑥 머리를 들이밀며 들어오다 놀라 소리를 지르며 오던 길로 달아났다. 최명극이 뛰어난 사격술로 한방에 그놈을 처치하자마자 그 총소리가 신호가 되어 일본군들이 삼촌 최진국의 집에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옷도 벗지 않고 자던 독립군들은 뒷문으로 빠져 밀림속으로 들어갔다. 철퇴하던 독립군 중 한명이 전사했다는 말을 들었다. 집안에 있던 독립군들이 다 나가자 나의 어머니와 삼촌댁 두 부녀자만 집안에 남았는데 총알이 쉴새없이 문과 벽을 뚫고 들어오니 너무도 무서워 백부 최진욱의 집으로 가자고들 했다. 삼촌댁이 먼저 뒷문으로 빠져 시형네 집으로 가는 데 성공했다. 집안에 홀로 남은 나의 어머니가 뒤따라 달려나오다가 백부와 삼촌집 중간거리에서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이때는 벌써 어슴푸레 새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일본군들은 독립군들이 빠져나간 뒤에 5호 동네에 들어와 최진동, 최진삼, 최진국(최진포라고도 불렀음) 3형제와 신민단 안산책임자 최명극과 모연대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왔던 안산 아랫마을의 김환영 등 5명을 체포하여 평양감옥으로 압송했다. 》

이것이 소위 《안산전투》의 전모이며 이것은 도문시 곡수에 계시는 리종만, 잡혀간 5명 중의 최명극의 아들 최해룡(74), 김환영의 손녀 김귀인(77)등에 의하여 확인되었으니 이로보아 독립군들이 먼저 매복하여 왜군이 오기를 대기한 것으로 아니었고 산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도 아니었음을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안산전투》라고 명명하는 것 보다 독립군과 일본군의 작은 마찰이라고 함이 더 적절한 것이다. 이 마찰에서 일본군 1명 즉사, 독립군 1명 전사, 최상준의 어머니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일본 측의 보고서류에 《아군(일군)병졸 부상1인, 불령선인 즉사 1인, 지방인 즉사1인, 포로 6명》이라고 씌여진 사상자는 최상준을 비롯한 최해룡, 김귀인, 리종만 노인들의 구술과 일치한다.

결론적으로 삼툰자 전투와 안산전투에서 적 1백 2여명을 섬명했다는 기록은 실제 사실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강룡권, 『동북항일운동유적답사기』, 연변인민출판사, 261-262)

봉오동 전투는 역시 영화와 실제가 너무 다르다.

홍범도 부대는 일제추격대가 오는 걸 알게됐다. 추격대를 격퇴할 준비를 하였다. 당시 봉오동은 분지(산지역으로 둘러싸였고 지역 안은 평평한 지역)형태였고 입구에서 안쪽까지는 골짜기가 25리정도 형성되어있다. 골짜기 안에는 마을 세 개가 있다. 홍범도 부대는 지형을 고려해서 4개 중대로 편성했고 각 중대를 포위하는 형태로 갈라놓아 배치하였다.[18] 당시 홍범도 부대들은 신식 총기로 무장했지만 기관총 같은 무기를 가졌던 일본군과 비교하면 화력이 딸렸다. 거기다 일본군은 포병을 지원부대로 쓸 수도 있다. 그러나 홍범도 부대가 대기하고 있던 장소는 기관총을 쓰기 어려운 장소다. 또한 매복을 할 경우 피아구별이 힘들어서 일제군이 포병을 쓰기 힘들다. 홍범도는 의병시절 부족한 화력을 극복했던 방법을 봉오동에도 그대로 적용했다.[19] 그리고 일제군을 기다렸다.

대기하던 남양수비대는 야스카와 추격대대가 오자 그쪽으로 합류했다. 추격대는 8시 30분경부터 봉오동 하촌에서 집집마다 수색하였다. 그러다 자기네들이 보기에 의심되는 민간인이 있으면 바로 사살했다.[20]

그탓에 조선인 민간인들을 집을 빠져나와 피난을 갔다. 많은 집들은 사람이 없어 비워있었다. 석현주재 중국인 순경들은 순찰하다 일제추격대를 발견했다. 중국인 경찰들은 일제추격대에게 자신들 땅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제추격대는 중국 경찰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더욱 침입하였다.[21]

추격대는 늦은 아침을 지어먹고는 한 농민에게 가서 수레에 기관총을 실으라 요구했다. 수색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다 다시 마을주민들을 발견했다. 추격대는 그 마을을 향해 "암탐사격"을 하며 무차별로 쏴갈겼다. 피난가지 못한 한인 민간인들은 기관총에 살해됐다.[22]

오후 1시경 추격대 척후병이 매복지점으로 다가갔다. 항일군인들은 그 척후병을 그대로 보내줬고 추격대 본대를 기다렸다. 추격대 본대는 그 장소에 들어기전에 다시한번 '암탐사격'(위력수색)을 했다. 여러 곳에 무차별 사격을 했다. 그러나 홍범도 부대는 대응하지 않았다. 일제군 내부 자료에 따르면 당시 추격대는 행군종대 대형이었다. 추격대는 홍범도 부대가 매복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매복 성공 여부가 아니다. 병사들이 홍범도의 사격 통제를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홍범도 부대는 짧은 기간에 모집해서 편성한 부대였으나 훈련은 제대로 받은 부대였다.[23]

추격대가 매복장소로 다가왔다. 홍범도가 총을 쐈다. 동서남북에 매복하던 항일군이 사격을 퍼부었다. 일제군인들은 화력이 우세했으나 지형문제 때문에 그 화력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제대로 반격도 못 하고 퇴각했다. 그러다 오후 4시 20분경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렸다. 폭우가 쏟아졌다. 항일군 지휘부에서 파란 손깃발을 흔들었다. 항일군인들은 물러났다. 일제군인들은 6월 7일 밤 함북 온성 유원진 건너편까지 철수했고 사단 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다시 철수했다.[24]

전문가들의 의견을 보자.

박창욱 교수
제2북부 지방회의 통보에서 대대장 1명이 죽었다는 것은 오보이다. 대대장 이라면 안천(야스카와 - 글쓴이)소좌를 말하는데 안천은 그 후 돌아가서 전투 상황을 보고했다. 거기다 같은해 10월 21일 청산리전역서는 백운평 전투에서 선봉추격대 90명을 거느리고 직소에서 북로군정서의 교성대와 싸웠다. 어떤 자료에서는 안천소좌가 거느린 1개 대대병력이 참가하였다고 나오는데 과장된 것이다. 당시 일본군의 평시 편제에 근거하면 보병 1개 대대는 600~700명의 병력이다. 이런 과정으로 하여 전과에서도 "120명 또는 150명을 섬멸"하였다고 하는데 실제에 부합되지 않는다.』
(박창욱,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연구, 한국사연구 (111), 2000, 117)

강룡권 연구원
『봉오동 전투는 점심 때쯤부터 시작되었다. 보리저격때가 되여 쾌청하던 하늘에 먹장구름이 몰려와 소낙비와 우박을 억수같이 퍼부으니 삿갓에 구멍이 난 것은 물론 머리위에 이고 있던 함지도 깨질 정도였다. 소나기가 내리면서부터 총소리가 멎고 싸움이 끝이 났다. 일본군들은 호박골로 퇴각하면서 조선 풍리로부터 두만강을 건너오던 지원병과 피파골에서 저들끼리의 싸움이 붙었다.

최상준의 증언-도문시 오공촌

(...)전투 당시 애기주먹만 한 우박이 쏟아져 한메터앞도 보이지 않으니 싸움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싸움을 끝내고보니 독립군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일본군들은 땅에 풀썩 주저 앉으며 "독립군들이 안개 타고 하늘에 올랐다"고 하며 한탄했다고 한다. 어두워서야 호박골로 후퇴하던 일본군은 피파골에서 오는 자기 쪽 지원군들과 오해로 말미암아 전투가 있었다.

리종만의 증언 - 도문지 홍광향 홍위촌(곡수)

경신년에 나는 13살이었는데 관개지땅에서 농사지었다. 일본토벌군은 하전자에서 5호동네를 거쳐 남봉오골마을엔 들리지 않고 고개 하나 넘어서 마촌에 당도했다. 그때 우리 집은 마촌에 있었는데 전날에 벌써 피난가고 마도윤노인 혼자만 남아있었다. 일본군은 마촌에서 아침을 지어먹은 후 마도윤 노인을 협박하여 서수레에 경기관총 2정을 싣고 봉오동으로 갔다. 첫 총소리에 말탄 일본군관이 쓰러졌다는 말을 들었다. 싸움을 몇시간 하다가 천지를 분간할 수 없이 폭우가 쏟아지며 우박까지 퍼붓는 통에 어느 편도 총을 쏠 수가 없었다. 누구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천지신명이 독립군을 도와주었다. 소낙비가 그치자 독립군들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일본군은 손실을 입고 호박골로 후퇴하면서 산중에 피난갔던 백성들에게 분풀이를 하며 18명이나 참살했다. 이와 같이 백성을 마구 죽이던 놈들이 얼마 못 가서 저들끼리 싸워 떼죽음을 당했다. 그것을 봉오동에서 전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지원하러 오던 일본군과 피파골로 후퇴하던 일본군이 서로 마주치자 상대방을 독립군으로 알고 격렬한 싸움을 벌인 것이다. 싸움에서 큰 손해를 본 일본군은 두만강을 건너가지 못하고 용배미(훈춘시 양수진 경영촌)에 천막을 치고 3일이나 묵어있다가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는지 배를 타고 돌아갔다.

그 외에도 안산의 김동진(1986년에 72세), 남봉오동의 한동선(1986년도에 75세), 김리환(1986년에 75세)등 노호들을 방문했는데 '''그들 모두는 폭우가 전투를 종결지었다고들 했다.'''

이처럼 실제조사자료를 종합해보면 봉오동전투는 일제의 퇴각과 독립군의 추격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독립군의 주동적인 매복적으로부터 시작하여 독립군의 주동적인 후퇴로 끝난 것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강룡권, 『동북항일운동유적답사기』, 연변인민출판사, 264~266)

실제 현지주민들에게 조사한 바에 따르면 독립군이 주도적으로 매복해서 독립군이 주도적으로 후퇴해서 끝난 것이며 현지주민들 사이에선 정작 독립군이 일본군을 몰살했다는 증언이 확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군 끼리 오인 사격을 해서 사망자가 더 생긴 것이라는 증언도 나온다.

특별출연으로 나오는 홍범도는 신장이 190에 달하는 거구였다. 하지만 여기서 나오는 홍범도는 훨씬 작은 177cm이다.[25] 오히려 키가 185에서~190정도 되고 당시 스포일러와 나이대도 비슷한 차승원이나 박성웅, 송일국 같은 배우로 등장시켰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4.2. 영화적 불가피한 각색여부

4.2.1. 타 영화와 비교

영화와 현실은 다르므로 당연히 각색이 당연하고 현실의 물리효과와 인식등을 따지면 당연히 생략이나 어느 정도 과장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문제는 영화 봉오동 전투는 영화라는 점을 감안해도 실제 역사와 공통점이 전혀 없는 전투력과 전투묘사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영상매체에서 명작으로 평가받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도 이정도 황당한 전투 묘사가 없다. 똑같이 일본군을 상대로한 미국 드라마 더 퍼시픽 핵소 고지에도 봉오동 전투 같은 묘사나 설정이 없다. 미군의 전과를 과장한 미국 전쟁영화와 비교해도 수준이 다른데 위 워 솔저스 론 서바이버에서조차도 영화 봉오동 전투처럼 현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지는 않았다.

영화에 따른 불가피한 오류라면 위의 미국 전쟁영화들조차 봉오동 전투의 수준의 비현실적인 전투 묘사나 전투력 차이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한국 전쟁영화의 대표적 작품인 태극기 휘날리며 고지전에서도 봉오동 전투 같은 과장된 전투력이 없다.

한국 영화에서 사실과 달리 각색되었던 전쟁 영화를 들자면 명량을 꼽을 수 있는데, 명량은 전투가 가진 처절함을 강조하고 상업 영화로서의 흥행을 염두에 둬 대장선 조선군 사상자 5명에 일본군 피해율 10%에 불과했던[26] 명량 해전에서 선상 백병전이 일어났다고 각색했다. 봉오동 전투와는 완전 반대 방향의 각색이었지만 명량 해전이 얼마나 힘든 상황이었는지 이순신의 심리와 작중 묘사를 통해 드러내면서 어처구니없게 보일 수 있는 두 번의 백병전 씬이 대중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았다.(단 백병전 중 사실성이 너무 떨어지는 상황이 있어 비판도 많이 받는다.) 봉오동 전투의 경우 실제 전투와의 차이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으로 새롭게 조사된, 독립군 내부에 과도하게 퍼진 밀정 때문에 제대로 된 독립군의 집결은 불가능했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가 있기에, 한국과 일본간의 외교 분쟁이 해결되어 이성적으로 영화를 바라볼 수 있을 시기에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시기를 잘 만났지만 정작 제대로 된 역사적 사실, 상황 묘사에는 실패해서 관객수가 적어도 밀정까지는 갈 수 있었을 주제로 손익분기점을 돌파하는데 그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오락영화를 목적으로 한 액션영화와 비교하면 비슷하다고 주장할 수 있겠으나, 정작 이 영화는 애국심에 호소하는 전쟁 영화라는 점에서 그런 영화들과 성격이 전혀 다르다. 그리고 비현실적이고 과장된 오락영화이자 로널드 레이건 시대의 대표적 반공 작품인 람보 2조차도 봉오동 전투보다는 현실적이다. 의외로 기관총만으로 적들을 손쉽게 쓸어버리지 않으며 주로 칼과 화살로 잠입과 위장이나 매복을 하거나 싸운다 총을 사용할 때도 순간적으로 적들을 사살할 때 사용하지 봉오동 전투처럼은 아니다. 베트남 군인들을 쓸어버리는 장면도 사실 헬기 탈취 이후다. 람보가 헬기 탈취 전까지 죽인 숫자는 (아군이 사살하는 숫자까지 포함해서) 47명 정도다. # 헬기 탈취 이후 높은 화력으로 쓸어버리는 숫자까지 전부 포함해도 75명 정도다. 유해진 캐릭터의 무협액션장면(약 15여 명)이나 류준열 기관총 사격(약 60여 명)보다는 과장이 덜하다. 람보 2가 봉오동 전투보다 현실적이란 건 농담은 아닌셈이다.

4.2.2. 실제 감독의 발언과 인식

감독은 실제 (영화매체 가능한 범위에서) 고증에 맞췄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역사적 사실로 영화를 만들 때 작업하는 거보다 수집에 많은 공을 들이고 많은 시간을 써야 한다. 그래야 영화로 내놓을 수 있다. 봉오동 전투 경우 자료 수집 과정 고증하는 과정에서 많은 벽에 봉착했다. 사료들이 많이 있지 않다. 조선시대, 고려시대의 자료가 많이 남아있을 정도다. 봉오동 전투 경우 일제강점기 시대로 일본으로서는 우리나라의 승리의 감정을 축소하고 왜곡되어야 하는 일이다. 철저하고 숨겼고, 왜곡해 자료가 남지 않았다. 독립신문에 보면 봉오동 전투의 승리와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독립신문 기록을 근거로 해서 만들었다. 고민을 많이 한 부분이다. 할 수 있는 고증은 다 했다. 그러나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시대적 배경에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왜곡이 없게끔 노력했다. 그렇게 비워있는 부분이, 밖으로 드러나면서 봉오동전투에 대해서 더 알려졌으면 한다
2019년 7월 29일 오후 서울 광진구 건대입구롯데시네마에서 열린 영화 ‘봉오동 전투’의 언론배급시사회 #
실제 역사이기 때문에 왜곡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말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명확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상황을 재구성을 했을 뿐 삼군자 전투의 승리부터 죽음의 골짜기에서의 대승까지 모두 사료에 기록된 부분이다.
2019년 8월 5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진행되는 라운드 인터뷰 #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영화이기 때문에 왜곡이나 고증 오류로 비칠까 조심했다(...)고증오류나 왜곡은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하고 조사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숨겨져 있을 수 있어서 조심하게 되죠. 그리고 역사적인 사실을 기반으로 한 영화는 창작 작업으로 만들어낸 것보다 더 제한돼있죠. 창작 작업을 통한 영화는 관객이 생명력을 부여하고 함께 융화되는 등 각자 의미를 부여하는 확장성을 갖고 있지만, 역사 기반 영화는 조심해야 할 부분이 많거든요.
2019년 8월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 인터뷰 #

감독 발언에 근거하면 (사건의 재구성이나 과장 정도를 제외하면) 영화 매체 한계 내에서 고증에 맞게 영화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실제 영화는 재구성이나 과장 수준이 아니다.

그리고 위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독립신문 88호' 문제에서 보듯 감독은 자꾸 중요한 사료를 무시하고 엉뚱한 사료를 이야기하고 있다. 심지어 이미 약 20년 전에 논문에 소개가 된 중요자료들조차 언급하지 못 하고 있다. '영화매체에 따른 불가피한 과장이나 왜곡'으로 보기엔 조사를 성실하게 했는지 의심이 드는 부분이다.

[다만] 봉오동부근전투상보에는 기관총을 동원했단 내역이 전무하다. [다만] 그 당시는 고등학교 진학률이 미친듯이 낮아서 고등학생들 또한 지금과 똑같이 생각하면 안된다. [3] 나중에 고증 관련 논란 때 인터뷰에서 역덕에게 검증 받았다고 밝혔다(...). [4] 인터뷰로 말할 때는 국민회나 중국 연길 측의 보고서 등으로 짧게 말할 수도 있다. [5] "어떤 분"을 기자가 오타낸 것으로 추정 [6] 여담으로 작중에서 유해진이 일본군의 그것을 뜯어버리는 장면도(...) [7] 1919년 11월 15일 일본 고경측 32500호 기록 [8] 일본군의 저격총 도입은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반에 스코프를 달 수 있게 개조한 38식 보병총을 극소수 배치한 것이 시초로 작중 시점에서 거의 10년 뒤의 일이다. [9] 박창욱,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연구, 한국사연구 (111), 2000, 104 [10] 박창욱, 2000, 107-108 [11] (박창욱, 2000, 110) (신효승, 석사학위논문 - 한말 일제초 홍범도 의병의 활동과 전략 변화,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2012, 65) [12] (신효승, 35) [13] 신효승, 66 [14] 박창욱, 2000 108 [15] 박창욱, 2000 110 [16] 박창욱, 2000 108 [17] 신효승, 66 [18] 신효승, 66 [19] 신효승, 68 [20] 박창욱, 2000, 114, 116 [21] 박창욱, 2000, 114 [22] 박창욱, 2000, 114 [23] 신효승, 69~70 [24] (신효승, 67)(박창욱, 2000, 114~115) [25] 하지만 최민식이 62년생인 것을 고려해보면 177은 오히려 큰 키이다. 다만 너무 실존 인물에 비해 작게 나왔다는 것이 문제. [26] 화포로 공격하는 원거리 교전이 주였고 근거리에서는 판옥선으로 들이받아 적선을 깨부수는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