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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현대 기준 일본에서 Ethnic nationalism이 아닌 단순 Nationalism을 지칭할 때에는 '민족주의'(民族主義)라는 용어보다는 '내셔널리즘'(ナショナリズム)이라는 용어가 선호된다. 일본에서 '민족주의'는 전적으로 Ethnic nationalism을 의미하는데, 이는 과거 천황제 파시즘과 결합해
야마토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웠던 극우 민족주의를 연상시키는 데다가, (야마토 민족이 아닌)
류큐인이나
아이누인같은 전통적 일본 내 소수민족까지 배제하기 때문에 현재의 주류 보수우익에서 거리를 두는 편이다. 보수주의/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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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수방류(保守傍流)는 일본 자유민주당의 파벌 노선 중 하나이며, 상반되는 계파로 보수본류가 있다. 사실 요시다 시게루와 그의 정치적 후계자들을 지칭하는 보수본류와는 달리 보수방류는 자칭이 아니라 보수본류와는 다른 정치적 노선을 가졌던 정치인/파벌들을 외부에서 통칭해서 부른 표현이라, 방류들 사이에도 정치성향이 모두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1]방류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20세기까지만 해도 본류에 밀려 자민당 내 비주류로 있던 시절이 더 많았으나, 21세기 들어 세를 넓히는데 성공해 본류 세력들과 공존하고는 있지만 거의 20년 동안 자민당의 실권을 잡고 있었다. 다만 2022년 이후로는 아베 신조 피살 사건, 통일교 게이트, 정치자금 문제 등 여러 악재로 인해 보수방류계가 직격탄을 맞아서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이었고, 2024년 유일한 방류 파벌이었던 세이와 정책연구회가 해산하면서 가토의 난 이후 20년 넘게 당 내 주류였던 방류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성향
보통은 일본 내셔널리즘, 역사수정주의, 자주외교, 국민보수주의적 행보를 띄는 편이라고 여겨진다. 이들의 이론상 주된 목표는 자위대를 군대로 전환시키고 전쟁이 가능한 일본을 만드는 방향의 평화헌법 개헌이다. 경제적 노선의 경우 과거에는 소위 수정자본주의라 불리는 관치경제, 경제적 개입주의[2], 보호무역주의 성향이 강했으나, 거품경제 붕괴 이후 본류고 방류고를 막론하고 모든 자민당 파벌이 신자유주의를 디폴트로 받아들였던 데다가 오히려 본류인 기시다 후미오가 소득주도 성장을 내세우는 등 좌경화되었기에 별 의미는 없어졌다.강경파가 주류이긴 하지만 온건파도 있다. 예를 들어 부친 후쿠다 다케오 때문에 방류 출신이긴 했지만 본인 성향은 온건파라 할 수 있는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가 있다. 그래서 야스오와 아베 신조는 의외로 같은 파벌[3]이었다. 이쪽은 오히려 본류 출신이라는 아소 다로보다도 본류 노선에 더 가까웠고 오히려 아소 다로가 성향은 방류에 더 가까웠다. 즉, 계보도적으로만 일괄적으로 볼건 아니고 개인 성향 차이도 있을 순 있다.
보수방류 파벌 중에서도 성향은 방류와는 반대이지만 니카이 도시히로를 바탕으로 한 지수회[4], 수장에 따라 성향이 왔다갔다한 청화회[5]가 있었다. 경우에 따라선 미키 다케오 계열 지분이 있는 지공회[6]를 보수방류로 치기도 하는데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3. 역사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부터 이어진 군사 포기와 경제중시 정책, 그리고 미군정이 만든[7] 평화헌법은 하토야마 이치로, 기시 노부스케를 중심으로 하는 구 일본 제국의 수뇌부 출신들에게는 엄청난 치욕이었다.[8]그래서 때마침 6.25 전쟁이 터지자 요시다 시게루와 보수본류 세력은 한국전쟁에서 UN군 지원 정도의 역할만 하고 전쟁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경제 회복에 힘쓰자는 주장을 하였다. 그런데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철수하고 공직추방령이 해제되자 기시 노부스케, 하토야마 이치로 등 전범으로 몰려서 추방되었던 강경우익 세력 2만여명이 일제히 사회에 복귀하였다. 이들은 반공을 외치면서 이 기회를 이용해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다시 재무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들은 1954년 일제히 탈당해서 일본민주당을 창당하고 본격적으로 개헌과 재무장을 외치면서 요시다 시게루가 이끄는 자유당과 대립하였다. 하지만 혁신계가 1955년 사회당으로 통합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보수대연합을 외치면서 자유당과 합당하고 자유민주당을 창당한다. 이때부터 자민당은 요시다 시게루의 보수본류와 하토야마 이치로/ 기시 노부스케의 보수방류로 세력이 구분된다. 경우에 따라선 같은 일본 민주당 계열인 미키 다케오 계열도 보수 방류로 친다.
그러던 와중 보수방류 계열은 1957년 드디어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가 되면서 정권을 장악했지만, 기대와 달리 미국이 버티는 상황에서 기시의 활동폭도 한계는 있었다. 기시는 집권 이후 자주개헌을 포기하고, 미국의 요구를 충실히 받아들여서 미일안보조약을 밀어붙이다가[9]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일어난 안보투쟁 여파로 정권이 무너지는 굴욕도 맛보게 된다. 그리고 기시가 실각하면서 보수방류는 꽤 오랜 기간 비주류로 지내야 했다. 중간에 기시의 후계자인 후쿠다 다케오가 총리를 지내기도 했으나 본류의 다나카 가쿠에이와 총리직을 걸고 치른 각복전쟁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이후로도 한동안 비당권파로 지냈다. 부활의 계기는 미국의 태평양 안보정책이 미국 직접 통제에서 점차 일본을 끼워넣은 간접 통제로 미국의 국방비 지출을 줄이려는 리처드 닉슨의 데탕트부터 시작으로, 1972년 오키나와 일본 반환을 시작으로 일본에 좀 더 동아시아 안보전략에 자율권을 주면서 성향이 맞는 보수방류에게 의도치 않게 기회가 온 것.
1984년 방류임에도 후쿠다와 대립한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다나카 가쿠에이의 지원 덕분에 집권에 성공하고 보수방류가 다시 개헌을 밀어 붙였지만 보수본류와 리버럴~혁신 야당의 반발로 좌절하고 만다. 나카소네 정권 붕괴 이후 다나카의 후계자인 다케시타 노보루에게 정권을 내주며 다시 비주류로 밀려났고, 그러다 1990년대에 록히드 사건와 리크루트 사건으로 보수본류 정권이 몰락하고 정권까지 야당에 내주는 위기에 몰리자 보수방류에 다시 기회가 오게 된다. 특히 부패스캔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당이 만신창이가 되자, 더 이상 자민당에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보수본류 계열의 소장파들[10]이 잇따라 탈당해 야당으로 넘어가면서 보수본류 계열은 상당히 위축된다. 그래도 한동안은 보수본류인 오부치 게이조가 다시 정권을 잡아 이들을 억누르나 싶었지만 오부치 총리가 뇌경색으로 급사하면서, 2000년대 모리 요시로 총리 시대부터는 지금까지 자민당 주류 계파로 이어지게 된다.
물론 모리 요시로 자체는 인기가 좋았던 인물은 아니었고 2000년 총선도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지만[11] 모리의 최측근이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꽤 인기를 끌면서 장기 집권하며 주류가 되었다. 그리고 고이즈미는 임기 중에 야스쿠니 참배를 6번이나 강행하며 외교적 파란을 일으킨다.
2023년에 불거진 정치자금 문제로 인해 다음 해 1월 19일 유일한 방류 파벌이자 당시 자민당 내 최대 계파였던 세이와 정책연구회가 해산을 선언하였고, 2월 1일에 공식적으로 완전 해산되면서 보수방류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마찬가지로 본류 파벌 5개 중 3개가 해산하였기에 나머지 파벌인 지공회와 헤이세이 연구회가 방류 쪽으로 틀어지지 않는 이상 방류가 역사 속에서 그대로 사라질 수도 있다. 물론 지지층 자체는 밑바닥에 어느정도 남아있겠지만 정계에서 이들의 구심점 역할을 할 유의미한 세력이 없어진다는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1]
대표적으로
각복전쟁 당시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보수본류인 다나카 가쿠에이의 손을 잡고 후쿠다 다케오와 적대한 것을 들 수 있다. '보수지류' 라고 불린
미키 다케오도 있는데, 이 사람은 보수 중에선 꽤 혁신적인 사람이다.
[2]
케인즈주의라는 간단한 용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케인즈주의라고 정의하지 않는 이유는, 보수 방류가
후쿠다 다케오 시절부터 케인즈주의식 확장재정에는 부정적인 경향이 옛날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3]
두 사람의 아버지들인
후쿠다 다케오와
아베 신타로 모두 청화회 회장을 지냈다.
[4]
근본은
하토야마 이치로 -
나카소네 야스히로 파벌이라 보수 방류는 맞는데, 오히려 현재는 자민당 내부에서 가장 왼쪽에 있는 파벌로 꼽힌다. 이는 파벌 자체가 이합집산을 많이 겪으며 보수본류 출신의 인물이 많이 섞였기 때문. 현 파벌 수장인 니카이 도시히로부터가 본류 파벌인
헤이세이 연구회 > 오자와 하타 파벌 출신이며,
신생당,
신진당,
자유당을 거쳐 당내 기반이 취약한 편인 니카이 도시히로가
호소노 고시로 대표되는 민주당이나 민진당 출신의 인물들도 많이 끌어들였다.
[5]
기시 노부스케 - 후쿠다 다케오 계열
[6]
미키계(번촌정책연구소)와 아소계(위공회)의 합병으로 출발했으나, 이 합병을 추진한 사람이
아소 다로이고 아소의 영향력이 아직도 대단히 강하므로 보수본류로 보는 시각이 주류.
[7]
사실 이건 일본 내에서도 민감한 문제다. 우익들은 이걸 핑계로 평화헌법을 개정하려 하지만, 호헌측은 당시 평화헌법은 일본 인사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자주적인 헌법이라고 쉴드치는 편이다.
[8]
기시 노부스케는 2키 3스케로 불리는
만주국의 5대 실세 중 한 명인 동시에 고위 관료로서 만주국의 여러가지 경제정책을 주관했다. 전쟁 이후엔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전쟁 범죄 용의자(평화에 관한 죄)로 구속수사를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고 살아남았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모든 비극의 원흉이 된 셈.
[9]
이 미일안보조약 개정안 자체가 일본과 미국이 상호 방위한다는 대등한 입장의 개정안이었기에 자주외교라는 노선을 어긴 것은 아니다
[10]
대표적으로
오자와 이치로. 목요회의 후계자이자,
경세회의 유력 주자로서 자민당의 간사장까지 역임했을 정도로 실세였던 오자와의 탈당은
55년 체제의 붕괴를 불러왔다. 이때 정치개혁을 내걸고 자민당을 탈당했던 보수본류 계열 유력 주자들인
하타 쓰토무, 와타나베 고조, 오쿠다 게이와 등 다케시타파 7봉행 맴버와 소장파 의원들인
하토야마 유키오,
오카다 가쓰야 등은 이합집산을 거듭하다가 2009년
민주당 간판으로 정권교체를 실현하지만, 결국은 폭망하고 2012년 다시 야당으로 돌아간다. 현재 이때 이탈한 본류 세력들은
(신) 입헌민주당과
(신) 국민민주당에 흩어져 있고, 일부는 자민당으로 돌아갔다.
[11]
이것도
공명당과의 연합 때문이지 공명당과 연합하지 않았으면 정권 상실까지 했을 레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