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 邊燧[1]樹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 Pyon Su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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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원주 변씨 호군공파(護軍公派)[3] |
초명 | 변훈(邊勳) |
자 | 한명 (漢明) |
호 | 소천(小泉), 양석(養石) |
출생 | 1861년[4] 10월 14일 ( 음력 9월 11일) |
사망 | 1891년[5] 10월 22일 (향년 30세) |
미국 메릴랜드 칼리지 파크[6] 시 칼리지 역[7] | |
열차 사고로 사망 | |
직업 | 관료, 역관 |
학력 | 메릴랜드 대학교 농과대학 졸업 |
국적 | 조선 |
주요 경력 |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군국사무아문 주사 외아문참 미국 농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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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개화기 조선의 관료, 역관이자 미국의 공무원[8]. 한국인 최초의 미국 학사 학위 취득자[9]로 1891년 5월 농학 학사학위를 받았다.2. 생애
1861년 음력 9월 11일 역관 출신의 아버지 변진환(邊晉桓, 1832. 9. 18 ~ 1878. 5. 11)과 어머니 강릉 최씨(1835. 10. 8 ~ 1894. 8. 10)[10]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자주 드나들었던 변수는 아버지의 친구였던 강위(姜瑋)[11]를 스승으로 모시며 수학하였는데, 강위가 김옥균과 절친한 사이인 연으로 1882년 4차 수신사로 파견되는 김옥균의 수행원으로 발탁되어 처음으로 일본에 방문했다. 변수는 이를 계기로 일본 교토 소재의 실업학교로 유학하여 양잠과 화학[12]을 배웠다.
1883년에는 보빙사의 수행원으로 미국을 방문하였고[13],그의 학문에 대한 열의는 여러곳에 기록되어 있다.
서광범과 변수는 내가 백과사전을 번역하여 설명해주면 자기 나라에 유용한 사항을 노트에다 적는데 지칠 줄 모르는 열의를 보였다.
포크 해군 무관의 보고서 (1884년 12월)
포크 해군 무관의 보고서 (1884년 12월)
1884년 갑신정변에 참여[14]했다가 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 후[15] 1년 뒤 미국으로 이주했다.
2.1. 미국 생활
미국 벌리츠 어학원[16]에서 영어를 배우며 공부하던 그는 1887년 메릴랜드 대학교 농학과에 입학하여 한국인 최초로 미국 대학에 입학한 사람이 되었다. 이 때 농과대학에 입학한 학생은 총 46명이었는데, 변수와 함께 입학한 또 다른 한국인의 이름이 확인 된다. 그의 이름은 훗날 민상호로 개명하고 친일파의 길을 걷게 되는 민주호[17]인데 김옥균의 주선으로 변수와 함께 미국으로 망명한 상태였다.미국 유학 중에는 Penn Su[18]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1891년 6월에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졸업식에서 상업(Commerce)을 주제로 졸업생 대표 연설을 하였고, 졸업 1달 전에 미국 농무부에서 동아시아 농업 통계 관련 자료 정리를 위한 촉탁[19]으로 근무하였다. 당시 미 농무부에는 동아시아 농업 통계 자료들이 쌓여가고 있음에도 이를 정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없었는데, 조선에서 관료를 지냈고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가 모두 가능한 변수는 해당 직책에 가장 적절한 인물이었다. 변수는 일본어로 작성된 농업자료 통계를 정리하여 3개월만에 영문보고서로 제출[20]하여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정규직 계약을 제안받게 된다.
3. 사망
일본 농업자료를 영문보고서로 정리한 성과로 다음 프로젝트인 '중국의 농업 보고서' 정리를 맡게 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만 3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해 10월 22일 중국의 농업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모교를 찾았다가 저녁 귀가 중에 칼리지 역(College Station)[21]을 지나던 급행열차에 치어 사망하였다. 당시 변수의 사망소식은 뉴와크 데일리, 보스턴 글로브, 뉴욕 타임즈, 시카고 트리뷴, 워싱턴 포스트 등 여러 매체의 단신으로 다뤄졌다. 미국 정부는 그의 사망 후 즉각 조선공사관에 사망소식을 알렸으나, 주미조선공사관은 그에 대해 아는바가 없다고 답하며 후속조치를 거부했는데, 이는 변수가 갑신정변에 참여하여 수배령이 떨어진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유해는 고국 땅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인근 벨츠빌(Beltsville)에 소재한 성 요셉 카톨릭 공동묘지(St. Joseph Cemetery)[22]에 묻혔다. 묘지 정보4. 사후
그의 사망 20여 년 만인 1910년 7월 18일 그는 신원되어 대한제국은 그를 규장각 부제학으로 추서[23]했다. 다만 날짜를 보면 알겠지만 경술국치에서 불과 40일쯤 전이었다.(...)1994년 메릴랜드대학에서는 그의 생애가 상징하는 한 세기를 기념하여 '변수장학금'을 설립 하였다.
미혼이었던 그는 후손도 없이 잊혀져 있다가 2002년에 와서야 그의 묘소가 한인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 2003년에 무덤 비석도 새롭게 세워지고[24][25] KBS에서 그에 대하여 간략하게 보도되기도 했다.
2021년 10월 메릴랜드 대학은 새로 지은 기숙사의 이름을 변-첸 홀 (Pyon-Chen Hall)로 명명했다.[26] 메릴랜드 대학은 인종차별을 허물었던 두 명의 아시아 유학생이었던 한국 출신 변수와 최초의 농과대학 중국인 유학생 첸(Chunjen Constant Chen)을 기리는 사업으로 두 사람의 이름을 따왔다고 밝혔다. 한국어 기사 대학 안내문
[1]
[2]
대학 학적과 그의 예전 묘비에는 Penn Su로 기록되어 있다.
[3]
18세 火변 항렬.
[4]
철종 12년
[5]
고종 28년
[6]
College Park
[7]
College Station
[8]
다만 변수가 미국 망명 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9]
최초의 미국 유학생은
유길준이나 유길준은 대학에 입학하지 못하고 귀국했다.
[10]
최익의 딸이다.
[11]
강위의 가계는 조선 중엽부터 문관직과는 거리가 멀어져 완전히 무반신분으로 굳어진 상태였다. 신분상의 제약을 깨달은 강위는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과 문학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가 스승으로 모셨던 민노행과
김정희는
청의
고증학을 받아들인
실학자들이었는데 이것이 김옥균과의 친분, 그리고 변수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훗날 함께 수학하던 정건조와는 일생의 벗으로 지냈는데, 정건조는 훗날 이조판서 자리에 오른다.
[12]
농업의 기술적 발전을 위해서는 화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13]
미국 입국을 요코하마~샌프란시스코 정기선을 통해 하였고, 출국은 대서양~유럽 루트로 하였기 때문에 조선인 최초의 세계일주를 경험했다. 대서양 횡단은 미국 대통령 전용 군함인 트렌턴 호에 탑승했다
[14]
일본군의 출동에 대한 교섭과 연경당(演慶堂)의 경비를 맡았다.
[15]
도쿄도
미나토구 시바우라 1쵸메 4 부근에 거주했다.
[16]
막시밀리안 베를리츠(Maximilian Berlitz 1852~1921)가 1878년에 설립한 어학원으로 현재도 한국을 포함한 70여개 국에 500여개의 곳에서 영업중이다.
[17]
입학 당시 이름은 閔周鎬, Min Chou Ho.
[18]
그의 학적기록과 묘비는 Penn Su라는 이름이 사용되었고, 입학 전과 사후에는 Pyon Su라는 이름으로 발견된다.
[19]
임시계약직
[20]
그의 보고서는 1891년 9월 농무성 통계국 월보 제89호에 <일본의 농업>이라는 글로 게제되었다.이에 대해 미국 농림부 차관보 윌리트가 그의 보고 능력을 극찬한 사실이 1891년 10월 23일 워싱턴스타지에 실렸다.
[21]
College Park 시 소재
[22]
De La Salle Cemetery로도 알려져 있다.
[23]
당시 기록으로는 '특증'
[24]
그의 기존 묘비에는 메릴랜드 대학 재학 당시 사용하였던 영문명 Penn Su와 함께 한글이름이 '벤수'로 적혀있다.
[25]
기존 묘비 뒤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26]
그 이전에는
메릴랜드 소속 카운티들의 이름을 따 건물 이름을 붙이곤 했다.
서울대학교로 치면 건물 이름이
종로관,
용산관,
영등포관 식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