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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00:54:30

즈지스와프 벡신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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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즈지스와프 벡신스키/136482_artist.jpg
즈지스와프 벡신스키
Zdzisław Beksiński[1]
출생 1929년 2월 24일
사망 2005년 2월 21일 (향년 76세)
국적 파일:폴란드 국기.svg 폴란드
직업 화가, 사진가, 조각가
가족 부모 스타니스와프 벡신스키, 스타니스와바 벡신스키
자녀 토마시 벡신스키
1. 개요2. 일생3. 작품 세계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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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요 작품
파일:AE73_lowres.jpg
파일:AA84_lowres.jpg
<rowcolor=#333,#ddd> Untitled[2]

폴란드 초현실주의 화가, 사진가, 조각가이다.

2. 일생

폴란드 제2공화국 남동부의 사노크(Sanok)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대부분을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암울하게 보냈다. 크라쿠프(Kraków)에서 건축학 전공하고 1955년 사노크로 돌아와 건축현장 감독 일을 했다. 몇 년을 그렇게 지낸 후 건축 설계에 대한 압박감과 지겨움으로 건축을 그만두고 예술 작업을 시작했다.

1977년, 바르샤바 이사하면서 많은 그림을 뒷뜰에서 손수 태웠다. 너무 사적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였다. 심지어 설명이나 그림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말년에는 서방에도 이름을 알린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고, 화풍도 '환상적인 기간'과 달라졌다. 작품들은 조형성이 강조되고 배경도 없어지고 색도 많이 쓰지 않았다. 이때 남긴 본인의 말에 따르면 배경을 극단적으로 제거하고 형태, , 그림자 왜곡시켜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말년은 나쁜 일의 연속이었다. 1998년에 아내 조피아 헬레나 벡신스키(Zofia Helena Beksińska)[3]와 향년 70세에 사별했고, 이듬해 1999년에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들 토마시(Tomasz)가 자살했다. 특히 현장을 직접 목격한 벡신스키는 죽을 때까지 이때의 충격 회복하지 못했고, 그 자신도 삶을 비관해 미리 유서까지 준비했다. 결국 2005년 2월 21일, 76세가 되었을 때 자신의 생일 사흘 전에 바르샤바 아파트에서 오랜 지인의 아들과 친척인 10대 2명에게 살해당했다. 17번이나 에 찔렸는데 이 중 2번이 치명상이었다. 범인 중 한 명에게 돈 수백 즈워티[4]를 빌려주기를 거부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벌어진 일이었다. 범인들은 범행을 저지른 뒤 도주했다가 폴란드 경찰 추적으로 모두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범인 로베르트 쿠피에츠(Robert Kupiec)에게는 25년형, 공범 우카시 쿠피에츠(Łukasz Kupiec)에게는 5년형이 선고되었다.[5]

작품들이 독특하다 보니 인터넷에서는 그의 작품들이 ' 우울증 걸린 사람이 그린 그림', '자살한 사람이 그린 그림' 등으로 알려졌다. 정작 벡신스키는 꽤 유쾌하고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다만 부끄럼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는지 외출을 꺼리고, 전시회 박물관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3. 작품 세계

파일:912135df361eba5191_ipad.jpg

벡신스키 스스로는 자기 작품을 바로크 고딕으로 정의했는데, 일반적으로는 누구나 그렇듯이 초현실주의라고 평가받는다. 다만 전문 분야에서는 벡신스키와 그를 따르는 유파들을 환시미술이라 일컫는다.
초기에는 건축가로 활동하며 취미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위의 그림 작품처럼 사진 작품 또한 빛과 그림자가 과장된 것들이 많고, 얼굴이 뜯긴 인형이라든가 하는 음침한 피사체들이었다. 이후 추상화로 종목을 바꾸고 1960년대 쯤에 환시미술로 갈아탔다. 회화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건축일을 했던 특성상 일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통 카드보드에 유화로 그렸다. 아크릴 물감도 종종 썼다고 한다.

조용한 것을 싫어해서 작업 중에는 항상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았다고 한다. 록 음악도 좋아했다고 하며, 음악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1958년, 비평가들로부터 그의 작품들이 호평을 받기 시작한다. 1964년에 개최한 개인전이 성공하며 현대 폴란드 예술계에서 우뚝 서게 되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그 스스로가 '환상적인 기간(Fantastic Period)'이라 부른 이 때에 우리가 아는 많은 작품들을 그렸다.

작품 대부분이 매우 황량하고 음침한 분위기를 띈다. 공포감마저 불러일으키는 통에 세간에서 많은 오해를 사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그의 그림을 두고 ' 세 번 보면 죽는 그림'과 같은 도시전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다만 정작 본인은 자기 작품이 긍정적이고 유쾌하다고 말한다. 본인 말로는 '꿈'을 그렸다고(...). 그의 작품에는 모조리 제목이 없는데, 이는 화가 자신도 그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뜻을 찾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림의 특징이라면 인체 활용이다. 거의 모든 그림에 인간이 등장하는데, 절대 멀쩡한 인간은 등장하지 않는다. 등장하는 인간은 깡마르고 죽었는지 아닌지 분간이 안 가는 상태의 모습이며[6] 주로 한 덩이의 무언가[7]로 합쳐지고 있다. 한편 이와 대조되는 고요하고도 웅장한 배경이 자주 그려지는데, 고딕풍의 건축물과 곡선 형태의 인간이 합쳐지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기괴함을 선사한다. 딱 그로테스크, 프롬 소프트웨어 게임에서 접할 법한 분위기이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지면 어느 순간 어딘가 초현실적인 편안함과 차분함을 선사한다. 이 때문에 몇몇 작품은 유사하게 그로테스크한 작품이 많은 H. R. 기거와 혼동되기도 하였다.
파일:bexa-komp9.jpg

1990년대부터는 디지털 열풍이 붐에 따라 시대의 흐름에 맞춰 포토샵 작업을 시도했는데, 인체와 무생물을 이어붙이는 그로테스크 기법은 여전했다.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그의 팬들 사이에서 가장 호불호가 심히 갈리는데, 결국 그도 이러한 기법이 자신과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2000년대에는 기존의 작풍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작풍을 지켰다.

4. 기타


[1] [ˈzd͡ʑiswaf bɛkˈɕiɲskʲi\] [2] 작품 제목 대부분이 'Untitled'이다. 이유는 작품 세계 문단에 서술함. [3] 혼전성은 '스탄키에비치(Stankiewicz)'. [4] 미국 달러로 치면 100달러이다. [5] 성을 보면 알겠지만 둘은 형제이다. [6] 절멸수용소 유대인의 모습을 생각하면 된다. [7] 건물, 가구, 거대한 생명체 등 다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