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데트 수비루
Bernadette Soubiro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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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a8e9d><colcolor=#000>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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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44년 1월 7일 ([age(1844-01-07)]주년) |
프랑스 왕국 오트피레네 루르드 | |
사망 | 1879년 4월 16일 (향년 35세) |
프랑스 제3공화국 니에브르 느베르 | |
종교 | 가톨릭 |
가족 |
아버지 프랑수아 수비루 (1807–1871) 어머니 루이스 수비루(1825–18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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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르나데트 수비루는 프랑스의 성녀이다.2. 생애
2.1. 유년기
베르나테드 수비루는 루르드 1844년 1월 7일에 태어났고,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인 1월 9일 지역의 조그마한 성당에서 유아 세례를 받는다. 그 당시 프랑스는 어려운 시기를 겪었고 그녀의 가족도 극심한 빈곤 속에서 살았다. 그녀는 유아 때 콜레라에 걸렸고 남은 평생 심한 천식을 앓았다고 한다. 당시 그녀의 집안은 형편이 매우 안 좋았고 결국 지역 주민들이 던전이라 부르는 조그마한 지하실 골방으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2.2. 성모 발현
그러던 중 1858년 2월 11일, 당시 열네 살이었던 수비루는 언니, 친구와 함께 마사비엘 동굴 근처에서 장작을 구하러 나갔다가 첫 환상을 경험했다고 한다. 베르나데트는 땔감용 나무와 수프 재료용 뼈 등을 모으러 돌아다니던 도중 가브 강을 건너려고 신발을 벗었을 때, 폭풍우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주변 나무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마사비엘 동굴에서 갑자기 빛이 비쳤다. 그리고 발끝까지 내려온 흰 드레스에 하늘색 허리띠를 두르고, 하얀 베일로 머리와 어깨를 덮었으며, 팔에는 묵주를 두르고 있고 발아래에는 노란 장미가 있는 모습을 한 여인이 나타났다. 베르나데트는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되어 자기도 모르게 묵주를 꺼내 기도를 바쳤다. 묵주기도를 끝마치자, 여인은 베르나데트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한 다음 순식간에 사라졌다.베르나데트는 이 일을 자기만이 아는 비밀로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여동생에게 그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나 그 비밀은 부모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그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로 체벌을 받았다. 3일 후, 베르나데트는 다른 2명의 소녀와 동굴을 다시 찾았는데, 베르나데트가 탈혼 상태에 빠진 것에 놀라 두 소녀가 몹시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녀들이 마을로 돌아왔을 때 베르나데트는 아직도 황홀경이 없어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2월 18일, 베르나데트는 부인에게서 "너는 앞으로 2주 동안 매일 이 동굴에 오너라."라는 말을 들었다. 이어서 "나는 너에게 이 세상의 행복은 약속하지 못하지만, 다음 세상의 행복은 약속하마."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지역 전체의 관심이 이곳에 집중되었다. 부모와 경찰은 베르나데트가 더는 마사비엘 동굴로 가지 못하도록 조치했지만, 베르나데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동굴을 찾았다.
2월 25일, 부인은 작은 흙탕물을 가리키며 베르나데트에게 가서 마신 다음에 씻으라고 지시했다. 베르나데트는 그대로 했고, 주변 사람들은 베르나데트가 미친 줄 알았지만 깨끗한 샘물이 갑자기 엄청난 양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시고 바른 사람들이 치유되기 시작했고 이 소식이 방방곡곡에 알려지면서, 많은 기적 사례가 보고되었다. 그들 가운데 7명은 1860년 베르게 교수에 의해 어떠한 의학적 설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샘물을 통해 치유된 것으로 인정받은 첫 번째 환자는 사고 후 오른손이 기형으로 변한 여성이었다.
3월 25일, 밤중에 베르나데트는 동굴에 갔으나 울타리가 쳐져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가브 강가에 무릎을 꿇고 동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베르나데트는 부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3번이나 되풀이하여 부인에게 이름을 물었으나 부인은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이 없었다. 마침내 4번째 물음에 그녀는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라는 부인의 대답을 들었다.[1]
4월 7일 주님 부활 대축일, 베르나데트를 관찰한 의사는 그녀가 탈혼 상태에 빠졌을 때, 촛불에 손을 뻗었는데도 화상을 전혀 입지 않았다고 보고하였다. 7월 16일, 베르나데트는 동굴에 마지막으로 찾아갔다. 부인의 미소를 보고 감탄한 그녀는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라고 회고했다.
2.3. 성모발현 이후
베르나데트는 성모발현 사건으로 시끄러워지자 주목을 받는 것을 싫어하여 느베르 자선 자매회가 운영하는 호스피스 학교에 갔는데 , 그곳에서 글을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그후 수비르는 가르멜회에 입회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건강에 엄격한 수도회의 내규상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1866년 7월 29일, 그녀는 다른 42명의 지원자들과 함께 수련자의 수도복을 입고 느베느 베르 에 있는 생 질다르 수도원의 자선 자매회 모회에 입회했다. 생질다르 수도원에서 병실 조수로 일했으며 나중에는 성구 관리자로 일하면서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그러나 수비루는 어린 시절 겪은 콜레라 때문에 심각한 만성 천식을 앓았고 결국 폐와 뼈 결핵에 걸렸다. 죽기 직전 몇 달 동안 수비루는 수도원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 결국 수비루는 1879년 4월 16일 부활절 수요일에 35세의 나이로 장기 질환으로 사망하고 만다. 수비루의 시신은 생질다르 수도원 부지에 있는 성 요셉 예배당에 안치되었다.
2.4. 사후
베르나데트 수비루의 관은 1909년 9월 22일, 1919년 4월 3일, 1925년 4월 18일 세 차례에 걸쳐 개봉되었다고 한다. 시성되려면 시신의 상태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1909년 첫 번째 발굴 당시에도 성녀 베르나데트의 피부색은 완벽하게 자연스러웠다고 한다. 입은 살짝 벌어져 있었고 이빨이 여전히 제자리에 있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당시 관을 개봉하는데 참관한 의사들은 시신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때문에 베르나데트 수비루스가 처음으로 관에서 발굴되었을 때 의사들은 시신이 "매우 잘 보존되어 있다"고 교황청에 보고했다.
베르나데트 수비루는 1925년 6월 14일 복녀품에 오른 후 그해 8월 3일, 유리와 청동으로 된 관에 담긴 채 생길다드 성당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후 1933년 12월 8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축일은 4월 16일이다. 한국 가톨릭에서 과거 표기인 '벨라뎃다(베르나데트)'를 세례명으로 쓰기도 한다.
[1]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루르드 동굴의 성모상 아래에도 이 구절 QUE SOY ERA IMMACULADA COUNCEPCIOU가 새겨져 있다. 베르나데트가
문맹이라서 루르드 등
프랑스 남부의 방언으로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