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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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83D8B><colcolor=#fff> 고장후(姑臧侯) 樊世 | 번세 |
|
시호 | 없음 |
작위 | 고장후(姑臧矦) |
성 | 번(樊) |
휘 | 세(世) |
자 | 불명 |
생몰 | ? ~ 358년 9월 |
출신 | 악양군(略陽郡) 임위현(臨渭縣) |
[clearfix]
1. 개요
전진의 인물. 저족 호족 출신으로 경명제 부건이 관중을 평정할 때 공을 세웠던 개국공신.2. 생애
황시 원년(351년) 정월, 마침내 장안성을 함락시킨 부건이 천왕(天王), 대선우에 즉위하면서 전진 정권이 세워졌다. 이때 관중 평정에 큰 공을 세웠던 번세는 특진(特進)에 임명되고 고장후(姑臧侯)에 봉해졌다.영흥 2년(358년) 9월, 폭군 부생을 몰아낸 천왕 부견이 왕맹을 재상으로 삼아 신임하였고, 이에 따라 전진의 종친과 옛 공신들 중에서 갑자기 등장한 왕맹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이가 많았다. 번세는 이들 무리의 대표로 나서서 왕맹을 업신여기며 말했다.
"우리는 선제와 더불어 사업을 일으킨 공이 있음에도 국가의 권력을 함부로 장악하지 않았소. 한데 그대는 전투에서 아무런 공을 세운 바가 없으면서 어찌 감히 홀로 중대한 임무를 처리하려 하는가? 이는 우리가 밭을 갈아 농사를 다 지어놓았더니, 그대가 죄다 먹는 꼴이 아니더냐!"
왕맹이 답했다."그렇다면 마땅히 사군을 재부(宰夫)로 삼아 경작과 동시에 요리도 함께 할 수 있게 해주겠소."
이에 번세가 대로하여 말했다."네놈의 머리를 베어 장안성 문에 매달아 놓으리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내가 도저히 이 세상에서 살 수가 없을 것 같구나!"
왕맹은 더이상 번세를 상대하지 않고 바로 부견에게 아뢰었다. 이를 전해들은 부견 역시 노하여 말했다."반드시 저 저족 늙은이를 죽여 백관을 조용히 시키겠소."
다음 날, 조회에 참석한 천왕 부견이 왕맹을 향해 말했다.
"짐은 양벽(楊璧)을 부마로 삼을 생각이다. 양벽은 어떤 인물인가?"
그러자 이미 양벽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낸 번세가 왈칵 성을 내며 부견에게 항의하였다."양벽은 신의 사위입니다. 이미 혼사가 정해진지 오래인데 어찌 이제와서 그가 폐하의 부마가 될 수 있습니까!"
그때 왕맹이 번세를 꾸짖었다."폐하께서는 천하의 제왕이므로 그대가 감히 혼사를 다투려 함은 곧 천자에 맞먹으려 한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천자가 둘이면 어찌 천하의 위아래가 올바로 잡힐 수 있겠는가!"
번세가 너무 분한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나 왕맹을 폭행하려 하니, 좌우에서 그를 붙잡아 말렸다. 그 와중에도 번세는 부견이 보는 앞에서 왕맹을 향해 큰소리로 아주 심한 욕설을 하였다. 결국 분노한 부견이 명을 내려 번세를 체포하였고, 이내 번세는 서쪽 마구간에서 참수당했다. 번세가 죽은 후에 그를 따르던 저족 공신들이 부견에게 몰려와 왕맹의 목을 베어야 한다며 따졌다가, 오히려 부견의 노여움을 사 권익이 부견을 말리기 전까지 전정(殿庭)에서 공개적으로 채찍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