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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4 23:15:55

발터 첼로트

발터 첼로트(Walter Zellot : 1920년 10월 6일~1942년 9월 10일)

1. 출생2. 2차 대전3. 몰타 항공전4. 전공에 대한 탐욕5. 규칙을 버리고 맞은 최후6. 서훈

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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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56b94> ▲ 87~113위
순위 이름 국적 격추 수 비고
116위 헬무트 메르텐스 독일 97대
헤르만 슐라인헤게 독일
118위 디트헬름 폰 아이헬-슈트라이버 독일 96대
하인리히 회페마이어 독일
지크프리트 렘케 독일
121위 레오폴트 뮌스터 독일 95대
122위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 핀란드 94대 비독일계 1위
비공인 격추까지 합하면 126기
루돌프 뮐러 독일 101기 격추 기록 존재
124위 루돌프 레슈 독일 93대 스페인 내전에서 1기 격추
하인리히 클뢰퍼 독일
헬무트 베네만 독일
에트문트 로스만 독일
지크프리트 슈넬 독일
129위 게르하르트 로스 독일 92대
오스카르 롬 독일
131위 안톤 레슈 독일 91대
게오르크 셴트케 독일
133위 하인츠 케메트뮐러 독일 89대
134위 요제프 예네바인 독일 86대
안톤 마더 독일
울리히 뵈네르트 독일
137위 게르하르트 쾨펜 독일 85대
발터 첼로트 독일
139위 하인츠 에발트 독일 84대
페터 칼덴 독일
베르너 콰스트 독일
▼ 142~177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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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

1차 대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20년 10월 6일에 오스트리아 남부의 슈피탈 안 데어 드라우(Spittal an der Drau)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발터 첼로트는 전쟁 동안 제53전투항공단( JG 53)에서 줄곧 근무하면서 서부전선 동부전선에서 86대를 격추한 수퍼 에이스 중에 하나였다. 그는 이런 혁혁한 무공을 거두기 위해 296회의 실전 출격을 거듭했지만, 결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지 못하고 스러져간 수많은 조종사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2. 2차 대전

전투비행학교로 입교하여 독일 공군에 발을 디딘 첼로트가 1940년에 소위 계급장을 달고 첫 자대로 임관한 곳은 도버 해협에서 영국 공군과 연일 혈투를 벌이고 있던 JG 53이었다. 그렇지만 신참 소위인 그에게는 적기에게 사격할 기회가 좀체로 주어지지 않았고, 그의 첫 격추 경험은 이듬해 동토의 땅, 러시아에서 이루어졌다.

독소전 개전 이틀째인 1941년 6월 22일에 발터 첼로트 소위는 저공에서 얼간이처럼 일직선으로 날고 있던 폴리카르포프 I-16 전투기를 덮치면서 난생 처음 혼자서 적기를 격추시켰다. 7월 11일까지 3대의 소련 공군기를 떨군 그였지만, 그 무렵 격추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던 루프트바페에서 그 정도 전적으로는 한 사람의 조종사 몫을 할 수 있다고 평가받을 정도일 뿐, 그다지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오스트리아 억양에 성격조차 내성적이어서 전우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첼로트 소위는 3번째 승리를 거둔 후부터 공중전의 감각을 터득했는지 격추 페이스가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고, 8월 초순까지 12대 기록을 세워 에이스 칭호를 가질 자격을 갖추게 된다.

3. 몰타 항공전

1941년 가을, 그가 속한 제53전투항공단 제1비행단(I./JG 53)은 지중해 전역으로 사냥터를 옮기게 되었고 발터 첼로트 소위는 시칠리아 섬에 둥지를 틀고 전투 출격을 계속했다. 그는 몰타 상공에서 1942년 4월에 2대의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전투기를 격추시켰는데, 그중에는 첼로트의 동료 전우들을 9명이나 장사지낸 RAF 제601스쿼드론의 에이스 편대장 존 D. 비즈디(John Derek Bisdee : 1916~2000) 대위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즈디 대위는 발터 소위에게 격추 당하기 직전에도 융커스 Ju 88 폭격기 1대를 바다에 수장시킨 후였는데, 피격되자 곧바로 뛰어내례 낙하산 탈출을 했으나 하네스가 다리에 얽혀 익사할 뻔 했다. 그는 바다에서 건진 판자를 노로 삼고 6마일이나 떨어진 몰타 섬으로 직접 헤엄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같은 해 5월에 첼로트는 비행단 대원들과 함께 다시 동부전선으로 되돌아갔다. 재미있는 것은, 우수한 전투기와 조종사들을 갖춘 영국 공군과 지중해 전역에서 싸운 일이 일종의 경험치로 작용했는지 발터 첼로트는 러시아로 돌아온 뒤로 신들린 듯한 격추행진을 이어간다. 중위로 승진한 그는 불과 석 달만에 트리플 에이스에서 69대까지 자신의 기록을 끌어올린 것이다.

그는 제2비행단장을 맡고 있던 클라우스 콰엣-파즐렘(Klaus Quaet-Faslem : 1913~1944 : 49대 격추) 대위가 1942년 8월 19일에 제3전투항공단( JG 3)으로 전속을 가자 비행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루프트바페 전투항공단에서 중대장이 된다는건 더 많은 격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발터 첼로트는 그렇게 했다. 8월 1일에 이미 교전 한 번에 3기를 잡아버린 그는 이튿날에도 또 3대를 떨궜고, 7일에 또다시 3대, 9일에는 4대를 격추하는가 했더니 13일에는 5대를 자신의 전과에 보태버렸다. 불과 보름도 안되는 사이에 야구로 치면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는 진기록과 하루만에 에이스가 되는 진기록을 동시에 세워버린 것이다 ! 그 뒤로도 23일에 4대, 28일에 3대를 잡은 첼로트 중위에게는 9월 3일에 기사철십자훈장이 주어졌으며, 이때까지 그의 기록은 84대로 불어나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승리를 거두는 동안에도 끈덕진 소련 공군 조종사들의 기량은 점점 나아지고 있었고, 그들이 타는 전투기들도 점차 메서슈밋 전투기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첼로트 중위가 격추 행진을 계속하던 기간인 8월 19일에 그가 타고 있던 Bf 109G-2(WNr.14189)도 탁월한 솜씨를 지닌 소련 전투기에게 피격당해 비상착륙을 해야만 했다. 그의 격추 행진에 제동을 건 제929 전투기연대 소속 Yak-1에 타고 있던 소련 조종사는 장차 에이스로 성장하게 되는 보리스 M. 바실리예프(Борис Михайлович Васильев : 1913~1955 / 21대 격추)였다.

4. 전공에 대한 탐욕

8월 19일의 피탄으로 인한 불시착은 하나의 불길한 전조였음이 드러났다. 점점 1기를 잡아내는데 필요한 시간이 늘어나고 있었고, 비행장에 돌아와 착륙한 그는 극도의 긴장감과 피로에 녹초가 되어 비행복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항공단 사령관이던 귄터 폰 말트찬(Günther Freiherr von Maltzahn : 1910~1953 / 68대 격추) 중령이 첼로트 중위의 지나치게 잦은 출격을 만류했던 일화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에게는 심신을 재충전시켜줄 휴식이 절실히 필요했지만, 발터 첼로트의 목전에는 100대 격추라는 대기록을 세운 조종사만 그려넣을 수 있는 센튜리 마크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이런 공명심은 순간의 판단 실수가 승패를 가를 수도 있는 공중전에서 결코 좋은 영향을 끼칠 리가 없었다. 이제 그는 적기 뿐만이 아니라 조바심에 시달리던 자신과도 싸워야만 했던 것이다.

게다가 항공단에서 격추 행진을 하고 있던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제3비행단(3./JG 53)의 톱건 빌헬름 크리니우스(Wilhelm Crinius : 114대 격추)와 그 뒤를 바싹 쫓고 있던 볼프강 토네(Wolfgang Tonne : 122대 격추)가 첼로트 중위와 막상막하로 경쟁하고 있었고, 그 뒤로는 하인츠 골린스키(Heinz Golinski : 47대 격추) 중사와 제2비행단(2./JG 53)에서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던 알프레트 프랑케(Alfred Franke : 59대 격추) 중사를 포함하여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에이스들이 JG 53의 전과 그래프를 이끌어 올리는 일등공신들이었다. 이 5명의 에이스들은 계급과는 무관하게 100기 격추라는 목표를 향해 치열한 격추 경쟁을 벌이면서 상대의 전적에 신경을 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5. 규칙을 버리고 맞은 최후

기사십자장이 목에 걸린 후 일주일이 지난 1942년 9월 10일 이른 아침, 발터 첼로트 중위는 스탈린그라드 북쪽으로 오전 초계를 나갔다. 오전 6시경에 야크기로 구성된 편대와 마주친 그는 그중에 1대의 Yak-1을 6시 3분에 시가지에 거꾸로 처박았지만, 교전을 치르면서 건물 높이 정도로 낮은 고도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또 한 대의 야크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뒤에 바짝 붙으며 조준경에 온 신경을 집중하던 첼로트는 자신이 적기의 함정에 빠진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무심코 야크기를 따라간 지역에는 소련군의 대공포대가 진을 치고 있었고, 낮게 나는 첼로트가 탄 Bf 109G-2(W.Nr. 13 487)에게 각종 대공포탄과 소화기탄이 한꺼번에 퍼부어졌다. 깜짝 놀란 그는 조종간을 당겨 위험 지역을 벗어나려 했지만, 꼬리날개가 대공포탄에 맞고 날아가버렸다.

또다른 주장에 따르면, 첼로트는 우군기를 적기로 착각한 독일 제6군의 대공포대에 의해 피격되었다고도 하지만 어쨌든 확실한 것은 그는 적기가 아닌 대공사격에 의해 격추되었다는 사실이다. 미익을 잃고 더 이상 조종이 먹히지 않자 첼로트 중위는 캐노피를 열고 비상탈출했으나, 고도가 너무 낮아 낙하산이 충분히 펼쳐지지 않은 채로 지상에 격돌했다. [1]
평소의 그였더라면 교전으로 고도를 잃은 후 다른 적기를 쫓는 대신 곧바로 고도와 속도부터 회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첼로트 중위는 그렇게 하지 않고 눈 앞에 보인, 손아귀에 들어온 제물을 쫓다가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사실 무리도 아닌 것이, 그에게는 14번만 더 승리하면 100기 격추라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물이 오를대로 오른 그의 전투감각으로 인한 격추 페이스가 계속 유지되었다면 모르긴몰라도 1~2주일 정도만 더 출격을 계속했더라도 달성했을 목표였다. 발터 첼로트 또한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격추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고, 그 댓가로 그만 불귀의 객이 되고 만 것이었다.

6. 서훈

파일럿 뱃지(Flugzeugführerabzeichen)
파일:attachment/BmEKII.jpg 철십자 훈장 2급 / 파일:attachment/BmEKI.jpg 1급
공군 명예컵 (1942. 8. 31)
독일금십자훈장 (1942. 10. 15)
전선 비행기장
동부전선 메달
아프리카 전역 이탈리아-독일 메달
파일:attachment/BmRKEL.jpg 기사철십자 훈장 (1942. 9. 3)




[1] 옆으로 열리는 Bf 109의 두껍고 무거운 캐노피는 고속으로 날고 있을 때라면 계기판 왼쪽 상단으로 손을 뻗어 투기 레버만 당기면 풍압을 이용해 간단히 분리시킬 수 있었지만, 저속이라면 팔힘만으로 열어야만 했다. 고도가 낮은 상황에는 이것이 상당히 위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