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반진전쟁(反秦戰爭) / 진말민변(秦末民變)시기: 기원전 209년 음력 7월~ 기원전 207년 음력 11월 17일
반진전쟁은 진나라 말기에 벌어진 전쟁이다. 반진봉기로도 불리며 중국에서는 진말민변(진나라 말 민란이라는 의미)로 불린다.
2. 배경
2.1. 진시황의 전국통일
진왕 영정( 진시황)은 왕위를 노렸던 노애의 난을 진압하고 상방 여불위를 제거하면서 실추되었던 왕권을 회복하는데 성공하게 된다.진나라는 소양왕 시기부터 쌓아온 국력을 바탕으로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함양과 촉에는 각각 운하인 정국거, 제방인 도강언을 건설해 각각 물자운송과 곡창지대를 만들게 했다.
한편 6국의 대신들을 매수해 6국을 이간질시켰고, 그 결과 6국은 진나라의 침공 때 분열되면서 서로 돕지 못하게 되었다.
진나라는 기원전 230년 한를 시작으로 조(기원전 228년), 위(기원전 225년)]], 초(기원전 223년), 연(기원전 222년), 제(기원전 221년]]를 차례로 멸망시키면서 전국통일을 이루었다.
이 과정에서 6국 통일전쟁 중 초나라 최후의 명장 향연의 분전, 형가의 진시황 암살시도 등이 있었지만 진나라를 막는데는 모두 실패하게 된다. 통일 이후 진나라는 6국 유민들을 각종 토목공사, 군역, 각종 세금, 대외 원정[1]등에 동원하면서 비참한 삶을 살게되면서 진나라에 대한 반감이 커진 상태였다.
2.2. 호해의 폭정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전국 순행 중 사구라는 곳에서 사망하게 된다. 환관 조고, 승상 이사는 진시황의 유지를 조작해 태자 부소가 아닌 호해를 황제로 추대했고, 태자 부소와 몽염을 시황제의 명령을 조작해 자결하게 만들었다.( 사구정변)이세황제로 즉위한 호해는 선대 진시황의 대규모 토목공사들(만리장성, 진시황릉 건설)을 계속 이어나가면서 백성들의 불만은 커져가게 된다. 정통성이 부족했던 점 때문인지 호해는 형제자매들(진시황의 아들과 딸들)을 모조리 처형해버린다.
이후에는 자신의 즉위에 기여한 승상 이사를 죽였다. 그리고 모든 국사를 조고에게 맡기고 흥청망청 놀아버리면서 중앙정부의 기능상실을 불렀고, 이는 진승의난 때 장한의 반격 이전까지 진나라가 제대로 대응을 못하게 한 원인이 된다.
3. 전개
3.1. 진승·오광의 난
반진전쟁의 서막을 알린 전쟁으로, 진승의 장초국은 초반에 잘나갔으나 세력 이탈과 장한의 활약으로 1대 6개월의 단명 왕조로 멸망했다.그러나 진나라가 장초군을 진압하는 사이 6국(연, 제, 초, 조, 위, 한)의 후예들은 혼란을 틈타 6국을 재건운동에 참여하면서 6국 대부분이 부활하고 만다.
3.2. 6국의 부활
- 연나라
- 조나라왕 무신의 부하였던 한광이 연나라왕을 자칭하며 자립했다.
- 조나라
- 진승의 수하였던 무신이 조나라땅을 차지하고 조나라왕을 자처했고, 진승도 어쩔 수 없이 무신을 인정하게 된다.[2]
- 조나라왕으로 즉위한 무신은 한광을 연나라로, 이량을 상산(常山)으로, 장염(張黶)을 상당(上黨)으로 파견해 해당 지역들을 점령하게 했다. 이중 연나라 땅을 차지한 한광은 연나라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연왕을 자칭, 무신으로부터 자립했다.
- 무신은 자립한 한광을 공격했으나 한광에게 사로잡혔다가 풀려났다. 이후 태원(太原)을 점령하려 보내졌다가 귀환한 이량한테 무신의 누이가 폭언을 퍼부은 일로 앙심을 품은 이량은 무신의 누이와 무신을 죽이고 진나라 장한에게 투항했다.
- 무신이 사망하자 장이, 진여는 조헐을 조나라 왕으로 추대했다.
- 위나라
- 진승이 부하인 주불을 위왕으로 삼으려고 했다가 주불이 사양했고, 위표의 형 위구가 위왕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위구는 임제에서 장한군에게 포의당했다가 자결했다.[3]
- 제나라
- 제나라의 옛 왕족 전담(田儋)이 제나라 동쪽땅을 평정하면서 봉기했다. 전담은 임제 전투에서 장한에게 전사했다. 전담의 사촌동생 전영은 전담의 패잔병을 수습해서 동아로 도주했다.
- 제나라 사람들은 마지막왕 전건의 동생 전가(田假)가 왕으로 추대하면서 전각(田角)을 재상, 전각의 동생인 전간(田間)을 장군으로 삼았다.
- 전담의 동생 전영은 전가가 왕이 된 것에 분노해 전가 세력을 공격했고, 전담의 아들 전불을 제왕으로 삼고 동생 전횡을 장군으로 삼는다. 전가는 초나라로, 전각과 전간은 조나라로 망명한다.
- 전영은 초나라와 조나라에게 전가 일행을 죽이라고 요구했으나, 항우는 이를 거절했다. 조나라가 장한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전영은 조나라 구원에 나서지 않았는데, 전영의 부하 전도가 반발해서 독자적으로 조나라 구원에 나서게 된다.
- 초나라
- 진승의 부하 갈영이 양강(襄强)을 초왕으로 추대했다가, 진승이 초왕을 칭했다는 말을 듣고는 양강을 죽였다. 그러나 갈영도 진승에게 살해당했다.
- 진승이 장초를 건국하면서 왕으로 즉위했다.
- 진승 사후, 진가(秦嘉)는 경구가 초왕으로 추대했다. 경구는 북상하던 항량과 싸우다가 패배했고, 도주하다 양(梁) 땅에서 처형당했다.
- 회계군에 웅거한 항량은 회계태수 은통을 제거하고 회계군을 장악한다. 진승이 패망한 후 초나라 왕족인 웅심을 초왕으로 추대했으며, 이후 북진해 초왕을 자처한 경구와의 싸움에서 승리했으며, 경구 휘하에 있었던 유방과 장량 등을 흡수한다.
- 한나라
- 한나라 왕족 한성이 추대되어 한왕이 되었다.
3.3. 유방, 항우의 활약
4. 결과와 영향
- 이 전쟁으로 기원전 221년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는 3대 15년 만에 멸망했다. 환관 조고를 처단한 진왕 자영은 즉위 46일만에 유방에게 항복하였으나, 함양에 입성한 항우에 의해 일족이 멸족당했다.
- 진나라가 멸망한 후, 항우는 기원전 206년 2월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을 단행하면서 7국의 땅들을 분할했다. 그러나 분봉에 불만을 품거나 소외된 이들이 많았고, 이는 초한전쟁의 원인이 된다.
- 반진전쟁 동안 상징적인 맹주 역할을 한 후초 회왕 웅심은 전쟁이 끝난 후 기원전 206년 정월 항우에 의해 의황제(義皇帝)로 높여졌으나, 1달 후 항우가 자신의 제후국인 서초의 수도를 팽성(彭城)으로 정하면서 팽성에서 쫓겨나 침성(郴城)으로 향하게 되었다. 웅심은 강을 건너던 도중 항우의 명을 받은 형산왕 오예, 임강왕 공오, 구강왕 영포의 공격을 받아 사망하게 된다.
- 남해군위 임효와 부관인 용천현령 조타는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자립을 시도한다. 기원전 207년, 임효가 병사하자 뒤를 이은 조타는 남해, 계림, 상 3군을 장악하고 왕을 칭하면서 남월을 건국했다.
- 월왕 구천의 후예로 각각 동구, 민월의 건국자인 요(搖)와 무제(閩越)는 진나라가 민중군을 설치하면서 왕위에서 폐위되었다가, 반진전쟁 때 오예에게 합류해 진나라에 맞섰다.
- 염철론에 따르면 고조선, 남월, 동월(동구, 민월)은 반진전쟁 - 초한전쟁 시기 혼란을 틈타 인근 지역을 점령하거나 약탈했다고 한다. 흉노의 묵돌 선우도 비슷한 시기 주변 유목민족들을 복속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1]
몽염의 흉노 정벌, 백월 정벌이 있다.
[2]
이는 장이와 진여에 의한 것으로 처음에 이들은 진승의 칭왕을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괘씸함을 느껴 무신에게 독립을 부추긴 것.
[3]
위표는 달아났고 이후 항우에게 붙었는데 덕분에 항우가 제후왕을 분봉할 때 서위왕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