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320><tablebordercolor=#e10510><tablebgcolor=#e10510> |
포뮬러 1 월드 챔피언십 역대 컨스트럭터 챔피언 |
[1]
10라운드 이탈리아 GP 연습 주행 도중 사고로 사망
[2]
14라운드 이탈리아 GP 레이스 도중 사고로 사망
[3]
5라운드 벨기에 GP에서 예선 도중 사고로 사망.
[4]
3라운드 산 마리노 GP 레이스 도중 충돌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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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월 Vanwall |
|
국적 | (영국) |
본부 | 영국 런던 액튼 |
팀 수장 | 토니 반더벨 (Tony Vandervell) |
섀시 | 스페셜(1954). VW 55(1955), VW 2(1956), VW 5(1957~1958), VW 59(1959), VW 11(1960) |
엔진 | 반월 L4 |
주요 인물 |
콜린 채프먼 (Colin Chapman)[1] 프랭크 코스틴 (Frank Costin) 스털링 모스 (Stirling Moss) 스튜어트 루이스에반스 (Stewart Lewis-Evans) 토니 브룩스 (Tony Brooks) |
레이스 참가 횟수 | 29회 |
그랑프리 우승 | 9회 |
폴 포지션 | 7회 |
패스티스트 랩 | 6회 |
첫 경기 | 1954년 영국 GP |
마지막 경기 | 1960년 프랑스 GP |
우승 기록 | |
드라이버 챔피언 (0회) |
- |
컨스트럭터 챔피언 (1회) |
1958 |
1. 개요
2. 역사
1954년 영국의 사업가 토니 반더벨이 본인의 가문에서 생산하던 얇은 '신월(Thinwall)' 베어링과 본인의 성씨인 반더벨을 혼합하여 지은 명칭인 '반월'을 내걸고 설립하였다. 반더벨은 따지자면 엔진 제작자에 가까웠다. 그는 이전부터 페라리의 차량을 기반으로 신월 베어링을 차량에 적용하여 꽤 좋은 성과를 낸 바가 있었는데, 이는 주로 BRM과의 협업이었고 반더벨은 BRM을 후원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다 BRM의 운영 방식을 지켜 보던 와중 모종의 이유로 성에 안 찼는지 후원을 때려치우고(...) 자신만의 팀을 설립한 것인데, 혼자서 모든 것을 담당할 순 없으니 외부 인사들에게 도움을 적극적으로 요청해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엔진 제작은 모터사이클 제조사 노턴과 롤스로이스, 해리 위슬레이크[3]의 도움을 받았으며 섀시는 쿠퍼로부터 제공받았다.처음에는 정규 시즌에 참전도 그리 많이 하지 못했고 참여한 대부분의 경기조차 리타이어로 마감하는 작은 팀으로 시작했으나, 반더벨은 본인 가문의 베어링 시스템에 더불어 디스크 브레이크나 연료 분사 같은 이런저런 선진 기술들을 적용했기 때문에 차량은 꾸준히 개선되고 있었고, 참전 2년차인 1955년에는 논챔피언십 레이스[4]에서 미국인 드라이버 해리 셸(Harry Schell)이 2번의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시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아 하나하나 고쳐 나가기엔 역부족이었고 큰 한 방이 필요했다. 반더벨은 여기저기서 유능한 사람들을 끌어모은 만큼 사람 보는 눈이 아주 좋았는데, 아직 기를 펴기 전이었던 로터스를 주목했다. 하여 반더벨은 1956년 로터스의 콜린 채프먼에게 새로운 섀시를 제작해 달라고 외주를 주었고, 여기서 채프먼과 그가 추천한 프랭크 코스틴[5], 그리고 위슬레이크가 주요 개발자로서 일하게 된다.
이번에는 변속기에 싱크로메시까지 장착하였는데, 이게 발목을 잡았다. 이것 때문에 파워트레인을 욱여넣기가 어려워서 차량의 높이가 상당히 높아져 버린 것.[6] 천하의 채프먼이 만든 작품임에도 코너링 성능에 결함이 있는 차량이었으나 직선에서만큼은 아주 빨랐고, 직선 성능이 중요한 실버스톤 서킷에서의 인터내셔널 트로피 레이스에서 스털링 모스가 폴 포지션, 패스티스트 랩, 우승을 모두 차지해 내면서 그 잠재력이 드러났다. 이 경기는 모스가 1956년에 반월 소속으로 참가한 유일한 경기였는데, 1957년에 또 한 번 타 보더니 반월 팀의 잠재력을 눈치채곤 이미 잡혀 있던 마세라티와의 계약을 중단하면서까지 반월의 정규 시즌 드라이버로 합류하였다.
그렇게 1957년부터 영국인 삼총사 스털링 모스, 토니 브룩스, 스튜어트 루이스에반스가 위대한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7] 모스야 말할 것도 없고, 브룩스는 데뷔 초기부터 굉장한 페이스를 보여 주던 신인이었으며, 루이스에반스는 정규 시즌에 이제 막 데뷔하는 영 건이었다. 반더벨이 모집한 인원들답게 세 드라이버 모두 굉장한 성과를 보여 주어 구멍이 없는 구성이었는데, 이게 이듬해의 컨스트럭터 챔피언십 우승의 큰 열쇠가 된다. 차량 또한 성능과 내구성 모든 부문에서 여전히 굉장히 빠르게 성장하였고, 1956년 챔피언십 시즌에서는 해리 셸이 달성한 한 번의 포인트 피니시밖에 없었던 반면 1957년에는 참전한 6개의 경기에서 2번의 폴 포지션과 3번의 우승을 획득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영국 팀 최초의 F1 챔피언십 경기 우승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모스는 5경기 참가하고 우승을 3번이나 해서 더 많은 경기에 참전했던 후안 마누엘 판지오의 뒤를 이어 챔피언십 2위에 랭크되었다. 그렇게 반월은 화려한 성적을 기록하기 시작하였고, 대망의 1958년이 다가왔다.
1958 시즌을 앞두고 F1에서는 큰 부분들 몇 가지가 바뀌었다. 가장 큰 변화점은 바로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의 신설이었다. 이전까지는 드라이버 챔피언십만이 존재했는데, 해당 연도부터는 팀들만의 챔피언 경쟁 또한 개막한 것. 또 하나의 변화점은 연료 규정의 변경이었다. 이 때문에 반월의 차량은 오히려 전년도에 비해서 출력이 떨어져 버렸는데, 페라리와 마세라티 등의 경쟁자들은 모두 6기통 엔진을 사용하였지만 반월은 직렬 4기통 엔진을 사용 중이었기 때문에 타격이 특히 컸고[8] 상당히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1957년 모델 체인지를 거치면서 기존에 지적되었던 코너링 문제도 해결되었고 반더벨이 설립 초기 이것저것 때려 박던 신기술들이 빛을 발해 변속기와 디스크 브레이크 기술력도 무르익었기 때문에 이번엔 코너에서 불안정하지만 직선에서 압도적이었던 1956년과 반대로 출력이 낮고 코너링이 우수한 모델이 탄생하게 되었다. 반월은 출력 문제를 최대한 극복하기 위해 트랜스미션에 굉장히 많은 공을 쏟아붓고 공력 설계에도 힘을 실었다.
11라운드까지 늘어난 캘린더에 맞추어 이번에는 바다 건너 아메리카에서 열린 아르헨티나 그랑프리와 인디 500을 제외한 모든 경기에 참가했으며, 모스가 3승, 브룩스도 3승을 하여 무려 6승을 거두며 승률 50%를 넘겼다. 사실 1958 시즌의 반월은 리타이어가 굉장히 많았는데, 세 명의 드라이버가 모두 최고의 기량을 보여 준 덕에 두 명의 드라이버가 리타이어해도 한 명의 드라이버만큼은 포디움에 들고야 마는 선순환이 반복되면서 아주 안정적인 포인트 운영이 가능했다.[9] 2위를 하긴 했지만 챔피언에는 도전도 못했던 1957년의 드라이버 챔피언십과는 달리 모스 또한 마지막까지 챔피언의 자리를 놓고 격돌하였는데, 최종전 모로코 그랑프리에서 단 1포인트 차이로 페라리의 마이크 호손이 1958 드라이버 챔피언이 되었다.[10] 드라이버 챔피언십은 아쉽게 놓쳤지만 드라이버들의 활약으로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을 우승해 내며 포뮬러 1 역사상 최초의 컨스트럭터 챔피언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 짧은 전성기 동안에 고른 퍼포먼스를 보여 주는 안정적인 드라이버 라인업을 확보했고, 딱 그 사이에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이 신설됐으니 큰 운이 따라 준 셈.
그러나 반월은 1958 시즌 직후 급격히 몰락했다. 모로코 그랑프리에서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달성하긴 했지만, 해당 경기에서 루이스에반스가 불타는 차 안에 갇히는 사고를 당해 6일 뒤 숨졌기 때문. 드라이버가 허구한 날 죽어 나가던 시절이라곤 하지만 그때도 역시 드라이버의 죽음은 크나큰 아픔이었기에 반더벨은 이에 아주 큰 충격을 받아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고 의사 또한 칩거하라고 조언하여 실질적으로 팀 수장의 자리에서 은퇴하였으며 스털링 모스마저도 팀을 탈퇴하면서 드라이버 라인업에도 브룩스만이 남게 되었다. 그렇게 팀이 순식간에 와해되어 풀 시즌 참전은커녕 한두 경기에 겨우 참가하는 수준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1959년 쿠퍼가 리어 미드십 최초의 챔피언십 우승을 달성해 내며 F1의 판도도 급속히 변화해 성과를 전혀 남기지 못하고 1960년을 끝으로 F1에 참가하지 못했으며, 팀 또한 1961년을 끝으로 해산되었고 반더벨도 1967년 사망하면서 슬픈 결말을 맞게 되었다. 그나마 모스와 브룩스는 이후로도 한동안 인상적인 커리어를 남겼고 둘 모두 2020년대까지 생존한 최후의 1950년대의 그랑프리 우승 경험자로서 남으며 90대까지 장수하였다.
3. 출전 드라이버 및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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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월 드라이버 및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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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0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rowcolor=#fff> 출전 시즌 | 드라이버 | 레이스 엔트리 | 레이스 스타트 | 우승 | 폴 포지션 | 패스티스트 랩 | 포디움 | 포인트 | 월드 챔피언 |
<colbgcolor=#4b5b5d><colcolor=#fff> 1954 | 피터 콜린스 | 3 | 2 | 0 | 0 | 0 | 0 | 0 | 0 | |
1955~1956 | 마이크 호손 | 3 | 3 | 0 | 0 | 0 | 0 | 0 | 0 | |
1955 | 켄 와튼 | 2 | 2 | 0 | 0 | 0 | 0 | 0 | 0 | |
1955~1956 | 해리 쉘 | 7 | 7 | 0 | 0 | 0 | 0 | 3 | 0 | |
1956 | 모리스 트린티냥 | 4 | 4 | 0 | 0 | 0 | 0 | 0 | 0 | |
1956 | 콜린 채프먼 | 1 | 0 | 0 | 0 | 0 | 0 | 0 | 0 | |
1956 | 호세 프로일란 곤잘레스 | 1 | 1 | 0 | 0 | 0 | 0 | 0 | 0 | |
1956 | 피에로 타루피 | 1 | 0 | 0 | 0 | 0 | 0 | 0 | 0 | |
1957~1958 | 스털링 모스 | 14 | 14 | 6 | 4 | 5 | 7 | 60 | 0 | |
1957~1960 | 토니 브룩스 | 16 | 16 | 4 | 1 | 1 | 5 | 35 | 0 | |
1957~1958 | 스튜어트 루이스 에반스 | 13 | 13 | 0 | 2 | 0 | 2 | 13 | 0 | |
1957 | 로이 살바도리 | 1 | 1 | 0 | 0 | 0 | 0 | 0 | 0 | }}}}}}}}} |
4. 부활
이후 F1 이외 모터스포츠계 그 어떤 곳에서도 반월이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도 없이 사장되어 묻혀있나 싶더니 WEC에 참전하는 LMH 팀인 바이콜레스가 2021년, 반월의 상표권을 인수하여 팀명을 반월로 리벳징하면서 62년만에 반월이란 이름이 모터스포츠에 다시 들려오게 되었다. 바이콜레스는 가장 먼저 LMH에 참전 의사를 드러냈던 팀 중 하나이지만 글리켄하우스에 비해서도 진도를 못 빼고 있는데, 아무래도 소규모 제작사도 아닌 커스터머 팀 출신이다 보니 차량 개발과 참가 명분의 측면에서 어려움이 많은 모양이다. 바이콜레스의 소식을 받아 보기는 하늘의 별 따기지만 가끔씩 근황이 전해지긴 하는 것으로 보아 꾸준히 개발 중인 모양. 그리고 2022년 초반, 차량을 완성하였고 2023년부터 본격적으로 WEC에 참가하게 되었다.
[1]
팀 로터스의 설립자. 반월의 차량 개발에 관여했다.
[2]
댄 거니와
캐롤 셸비가 주도하여 설립한 AAR F1 팀에 엔진을 공급하여 레이스 우승을 달성한 적이 있다.
[3]
'위슬레이크'라는 당대에는 나름 성공적이었던 엔진 제작사를 설립한 이름 있는 인물이다.
[4]
F1 경기이긴 한데 정규 챔피언십 시즌에는 포함되지 않는 독자적인 경기들이다. 챔피언십 경기들은 말 그대로 '국가를 대표하는' 그랑프리들인 데에 반해 논챔피언십 경기들은 대부분 도시, 서킷 이름을 사용하거나 아예 그랑프리의 이름을 쓰지 않기도 했다. 지금은 이런 논챔피언십 경기가 없지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논챔피언십 경기가 챔피언십 경기보다 많았다.
[5]
항공기 출신 엔지니어로, 당시에는 로터스 소속이었다. 훗날 아는 사람들은 아는 회사인 마르코스를 설립하기도 하며, 그 유명한
코스워스의 공동 설립자인 마이크 코스틴의 형제이기도 하다.
[6]
물론
리어 미드십 구조로 만들면 해결되는 문제지만 당시는 아직 미드십 엔진이 F1에서 주류가 되기 전이었다. 현대식 미드십 엔진의 선구자인
쿠퍼가 무쌍을 찍게 되는 것은 반월의 성공 직후인 1959년.
[7]
여기까지 함께했던 협력자들도 죄다 영국인들이었고 전성기의 드라이버들도 전부 영국인이었다는 점에서 반월이 얼마나 영국적인 팀이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1957~58년의 드라이버 라인업은 1950년대 최고의 드림 팀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라인업을 갖췄는데 성공까지 한 영국 팀은 이전까지 F1에서 없었다. 반월이 상징적인 이유.
[8]
4기통 엔진들은 실린더 하나의 용량이 더 크기 때문에 냉각 등의 부분에서 더 불리하기 때문이다. 반월은 최대 회전수도 낮춰야 했고 출력도 하향시켜야 했던 반면, 페라리의 V6 엔진은 출력이 전혀 떨어지지 않았고 여전히 고회전을 유지했다. 반월과 페라리 디노 엔진의 출력차는 무려 20~30마력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출력이 300마력에도 미치지 못하던 당시 F1에서는 천지차이였다.
[9]
특히 당시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은 팀의 드라이버 중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한 드라이버의 결과만 인정하여 컨스트럭터 포인트로 집계했기 때문에 반월은 이 구조의 이점을 톡톡히 봤다.
[10]
그리고 이때가 모스가 챔피언에 가장 근접했던 해였다. 또 한 번만 우승한 호손과 달리 모스는 쿠퍼 소속으로 참가했던 아르헨티나 그랑프리까지 우승하여 4승을 거두었고 타이틀 결정전이 되었던 최종전에서도 우승했기 때문에 모스에겐 굉장히 아쉬운 시즌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여담으로 마지막에서 세 번째 경기였던, 즉 챔피언십 경쟁이 한창 무르익었던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호손이 트랙 복귀 과정에서 역주행을 했다는 혐의로 실격당했으나
모스가 호손을 변호하여 실격이 번복되었던 일이 있었다. 해당 경기에서 2위를 했던 호손이 그대로 실격당했다면 모스가 챔피언이 될 수 있었기에 그의 신사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