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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바비 브라운 Bobby Brow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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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로버트 바리스포드 브라운 Robert Barisford Brown |
별명 |
뉴 잭 스윙의 왕 King of New Jack Swing |
출생 | 1969년 2월 5일 ([age(1969-02-05)]세) |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 |
직업 | 싱어송라이터, 래퍼, 작사가, 댄서 |
장르 | R&B, 뉴 잭 스윙 |
소속 | 뉴 에디션 (1981~85, 1996~97, 2005~) |
활동 | 1978년 ~ 현재 |
신체 | 178cm |
배우자 |
휘트니 휴스턴 (1992년 ~ 2007년, 이혼) 앨리샤 에더리지 (2012년 결혼)[1] |
자녀 |
장남 랜든 브라운 (1986년생)[2] 장녀 라프린시아 브라운 (1989년생)[A] 차남 바비 브라운 주니어 (1992~2020)[A] 차녀 바비 크리스티나 브라운 (1993~2015)[5] 삼남 (2009년생)[B] 삼녀 (2015년생)[B] 사녀 (2016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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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표곡 중 하나인 < Every Little Step>. 그루브의 진수를 보여주는 몸놀림.
미국의 가수 및 싱어송라이터.
2. 경력
2.1. New Edition
뉴 에디션의 멤버로써 어린 시절에 가요계에 데뷔했다. 뉴 에디션 시절부터 춤으로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마이클 잭슨이 뉴 에디션 멤버들과 이 바비 브라운을 자신의 저택에 초대하여 춤을 배웠다고 할 정도로 당대 모든 가수들을 통틀어 가장 춤을 잘 추는 사람 중 하나였다. 동시에 노래도 상당히 고평가받았던 인물 중 하나인데, 이로 인하여 1980년대를 대표하는 댄스 가수로 자주 꼽혔고 폴라 압둘과 자넷 잭슨의 인기에 대항 가능한 흔치 않은 가수로 밀리 바닐리와 함께 꼽혔다.[8]자넷 잭슨, 폴라 압둘과 더불어 R&B와 힙합을 합친 뉴 잭 스윙 음악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미국 대중음악의 아이콘이었다. 이 분야의 거장인 베이비페이스, 테디 라일리와 함께 1980~90년대 초반의 음악시장을 선도하였다. 특히 솔로 2집 앨범 Don't Be Cruel은 초메가히트 앨범으로[9] 대부분의 곡들이 히트쳤으며, 대표곡인 My Prerogative는 1980년대 최고의 히트곡으로 자주 꼽힌다. 데뷔 앨범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그 다음 앨범들로 가면 갈수록 흥행이 떨어졌지만, 1990년대 초까지 큰 인기를 가진 가수였다.[10] 국내에서 바비브라운의 영향을 받은 가수로는 ' 현진영과 와와'가 있다.
소위 말하는 흑인 특유의 힘이 넘칠듯한 오버스러운 댄스는 바비 브라운이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깝침이 과도하여 무대를 보면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넘쳐흐른다. 무대에서는 자주 객석에 드나들며 관객 앞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얼굴을 들이대 팬서비스를 해주는데 당시 빈약했던 관중과의 소통 등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다만 본인의 트레이드마크인 토끼춤이 워낙 체력적으로 힘든 춤이라 립싱크를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로 마약 중독으로 인하여 옛날의 미성이 사라졌으며 목소리가 아주 걸걸하게 변하게 되었다. 동시에 외모가 많이 변해서 지금은 후덕한 아저씨이다. " Humpin' Around"부터는 토끼춤이 아닌 직접 개발한 파워댄스로 탈바꿈하였다. 바비 브라운을 대놓고 벤치마킹한 현진영 역시[11] 오래 가지 못해 마약에 손을 대어 인기와 인생을 말아먹었다.
뉴 잭 스윙 시대의 대명사로 꼽히는 가수이며 1980년대 한국 댄스가수들의 롤모델이었지만 1990년대 들어 한국에서는 서태지의 출현으로 인해 인기가 바랜 면이 있다. 그리고는 본인의 사생활이 점점 막장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본토에서도 잊혀졌다. 한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빌보드 올타임 아티스트 순위에서도 볼 수 있듯 에드 시런이나 더 위켄드 등의 기라성같은 가수들의 순위와 비슷한데,[12] 1980년대 말 당시 바비 브라운의 임팩트는 엄청났다.[13] 폴라 압둘과 더불어 1980년대 말 짧은 인기를 누리고 인기가 하락한 케이스로 꼽히지만 아메리칸 아이돌 심사위원으로 젊은 세대에게 인지도가 아주 높고 춤 실력도 여전한 폴라 압둘과 달리 바비 브라운은 사생활 문제+중년기부터 시작된 비만으로 인하여 젊은 시절의 포스를 내고 있지는 못한다. 그래도 여전히 꾸준히 앨범을 내고 있기는 하지만 Don't Be Cruel 시절과는 목소리가 많이 다르다. 나이가 들어서 살이 쪄서 그런지 춤을 추지는 않지만 반대로 나이가 들면서 공연에서 라이브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인하여 80~90년대 올드팬들에게는 잘 알려져있지만 반대로 이후 세대에게는 거의 인지도가 낮은 가수이다. 그러나 바비 브라운이 뉴 잭 스윙의 대표주자였던 것만큼은 사실이며 빌보드 올타임 순위에서도 볼 수 있듯 당시 미국 대중음악계를 휩쓴 인물이다.
2.2. 솔로 시절
뉴에디션에서 솔로로 전향한 후 1988년부터 1993년까지 " Don't Be Cruel", " My Prerogative", " On Our Own", " Every Little Step", " Roni", " Rock Wit'cha", " She Ain't Worth It", " Humpin' Around", " Good Enough", "Get Away" 등으로 활약하며 전성기를 누렸다.1989년은 바비 브라운이 최전성기를 맞은 해인데, 솔로 2집 앨범 Don't Be Cruel은 1989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1위에 오르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재닛 잭슨, 폴라 압둘, 뉴 키즈 온 더 블락, 밀리 바닐리 등과 함께 1989년 미국 음악계를 지배했다.
1989년도에 히트한 바비 브라운의 곡들은 " My Prerogative", " On Our Own", " Every Little Step", " Roni", " Rock Wit'cha"인데 이 다섯 곡은 모두 같은 해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의 100위 권 안에 진입했다. 이 중에서 "My Prerogative"는 빌보드 핫 100 1위,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2위를 기록했으며, "On Our Own"은 빌보드 핫 100 2위, 그리고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19위를 기록하는 등 바비 브라운의 최고 전성기였다.
MC 해머와 라이벌이였으며 그를 MMA같은 공개석상에서 몇차례 꺾기도 했다. 그러나 MC 해머의 Please Hammer Don't Hurt 'Em 이후로 하락세를 타는 듯 했으나 1992년 3집 앨범 "Bobby"로 다시 한번 정상의 자리에 오른다. 라이벌이었던 MC 해머는 저 곡 이후 2년 정도 최전성기를 누렸지만 1992년 말 닥터 드레와 스눕 독의 등장으로 힙합의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며 인기가 하락했다.
MMA에서는 프리스타일 랩으로 저렴한 속어를 구사하여 되려 상을 받고도 야유를 받은 적이 있다.
2.3. 앨범
- King of Stage (1986)
- Don't Be Cruel (1988)[14][15]
- Dance!...Ya Know It! (1989)[16][17][18]
- Bobby (1992)[19][20]
- Forever (1997)
- The Masterpiece (2012)
2.4. 히트곡
- Girlfriend (1986)
- Don't Be Cruel (1988)[21][22][23]
- My Prerogative (1988)[24][25]
- Roni (1989)[26]
- Every Little Step (1989)[27][28]
- On Our Own (1989)[29][30][31]
- Rock Wit'cha (1989)[32][33]
- She Ain't Worth It (1990)[34]
- Humpin' Around (1992)[35][36]
- Good Enough (1992)[37][38]
-
Get Away (1993)[39]
2.5. 몰락
한때 대중음악의 아이콘이었지만 행실 문제로 인하여 악마의 재능을 거론할 때 자주 언급된다. 이로 인하여 전성기가 빨리 끝나고 몰락해버렸다. 휘트니 휴스턴과 결혼했었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결혼생활 내내 크고 작은 사건을 일으키며 타블로이드 지, 찌라시에 가십 거리로 자주 올라왔다. 특히 바비의 폭행으로 부부간 불화가 잦았고 결혼 생활 말엔 바비 브라운이 외도를 하기도 했으며 그 외에도 시민과의 몸싸움, 소속사 직원 성희롱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결국 둘은 이혼.휘트니는 신혼여행지에서 바비가 깨뜨린 유리잔으로 얼굴에 상처를 입어 흉터 제거 수술을 받기도 했고, 왼쪽 뺨이 멍든 상태로 법원에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후 2009년 컴백과 함께 이루어진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비는 휘트니에 대한 질투와 자격지심에 휘트니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정신적 폭력도 가했고 그 때문에 휘트니의 음악 활동에 대한 의지가 거의 사라졌다.
휘트니는 이혼 후 재기했으나 이미 마약과 결혼 생활에서 받은 각종 스트레스 때문에 그 아름답던 목소리가 망가졌고 결국 오래가지 못해 휘트니는 생을 마감하게 된다.
휘트니는 바비를 만나기 훨씬 전인 16살에 생일선물로 마리화나와 코카인을 접했고 이미 가수 데뷔 시기부터 줄곧 마약을 흡입해왔다. 이는 그녀의 일생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휘트니에서 친오빠들과 주변 지인들의 증언으로 밝혀진 사실이다.
심지어 친오빠들이 해당 영화에서 밝힌 바로는 바비 브라운은 마약을 그렇게 하던 사람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본인들과 바비가 어울리다보니 복용량이 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바비의 타고난 마약 복용량이 대단치 못해서 휘트니 휴스턴과 그 형제들이 마약을 하는 타이밍에는 따로 빠져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술로 치면 주량이 대단치 못한 셈. 즉, '바비 브라운이 아무것도 모르던 휘트니에게 마약을 건네줬다'는 둥의 얘기는 루머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바비 브라운은 자서전에서 코카인 판매책이었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10세 때에는 코카인을 밀가루로 착각해 프라이드 치킨을 만든 적이 있을 정도로 마약을 접하기 쉬운 환경에서 자랐으며, 휘트니와의 교제 이전 어린 시절부터 마약을 했다고 고백했다.
가족 전체가 저주받았다고 평가되는데 전처 휘트니 휴스턴이 2012년 2월에 사망했으며 2015년 7월엔 그녀의 딸 바비 크리스티나가 약물중독과 침수로 사망했다. 2020년 1월엔 사위던 닉 고든이 약물과다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2020년 11월엔 아들 바비 브라운 주니어도 약물과다로 사망하며 비극이 됐다.
더욱 상세한 정보: 기사1 기사2
3. 기타
화장품 메이커인 Bobbi Brown과는 발음은 같지만 전혀 관련이 없다. 스펠링도 다르고 이쪽은 창립자인 메이크업 아티스트 '바비 브라운'의 이름을 딴 것이다.젊은 시절에는 상당히 잘 생긴 외모에 뛰어난 댄서였지만 현재에는 나이도 많은데다 살도 많이 쪄서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일본의 장수 댄스그룹 J Soul Brothers의 탄생에도 관련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초대 멤버 다섯 명이 브라운의 방일 공연 당시 댄스 팀으로 나왔던 인연에서 이름을 J Soul Brothers라고 지어준 것이 지금의 EXILE의 전신을 만들어 준 셈이다.
[1]
본인 매니저이며 2007년 휘트니 휴스턴과 이혼 후 2010년에 청혼 후 2012년에 재혼했다.
[2]
휘트니 휴스턴과의 결혼 이전에 연인이었던 멜리카 윌리엄스 슬하.
[A]
휘트니 휴스턴과의 결혼 이전에 연인이었던 킴 워드 슬하.
[A]
[5]
휘트니 휴스턴 슬하.
[B]
앨리샤 에더리지 슬하.
[B]
[8]
밀리 바닐리는 립싱크 가수이므로 사실상 바비 브라운이 거의 인기와 실력 모두 80년대 말 기준으로 가장 뛰어난 가수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9]
1989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 1위
[10]
1992년 앨범인 Bobby의 수록곡 One More Night는 School Boy Crush의 리프를 샘플링하였는데, 80년대 힙합 팬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에릭 B&라킴의 대표곡 중 하나인 Microphone Fiend가 바로 그 노래를 샘플링하였다.
[11]
슬픈 마네킹 무대를 보면 옷부터 댄스까지 전부 바비 브라운을 따라하였다.
[12]
단 지금은 이 둘은 차트에서 다른 곡들을 많이 올렸으므로 지금 순위는 이들보다 낮다.
[13]
특히나
My Prerogative는 1980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어마어마한 초메가히트곡이었고, 나아가 그 앨범인
Don't Be Cruel은 1980년대 말 최고로 성공한 앨범 중 하나였다.
[14]
빌보드 200 6주 비연속 1위, 1989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 1위
[15]
RIAA 6x 플래티넘 레코드 (1990년 3월 9일에 기록), RIAA 7x 플래티넘 레코드 (1995년 4월 28일에 기록)
[16]
리믹스 앨범
[17]
빌보드 200 9위, 1990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 46위
[18]
RIAA 플래티넘 레코드 (1990년 1월 16일에 기록)
[19]
빌보드 200 2위, 1992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 82위, 1993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 52위
[20]
RIAA 2x 플래티넘 레코드 (1993년 2월 19일에 기록)
[21]
바비 브라운의 첫 번째 솔로 히트곡이었다.
빌보드 핫 100에서 8위에 올랐고
1988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79위에 올랐다.
[22]
같은 해(1988년)에 다른 그룹이 부른 같은 제목의 노래도 있었다. 그 다른 그룹은 유명한 미국의 락 밴드
Cheap Trick.
엘비스 프레슬리의
Don't Be Cruel을 커버한 노래인데 빌보드 핫 100에서는 4위까지 올랐다.
[23]
RIAA 골드 레코드 (1989년 1월 19일에 기록)
[24]
바비 브라운의 첫번째 빌보드 1위곡이자 대표곡으로, 1989년 초 1주 1위를 달성하였으며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2위를 기록한 1980년대를 통틀어 가장 크게 성공한 곡 중 하나이다. 동시에 뉴 잭 스윙 역사상 최대의 히트곡으로 폴라 압둘의
Straight Up, 자넷 잭슨의
Miss You Much와 함께 언급되는 기념비적인 곡이다. 후에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커버하였다.
[25]
RIAA 골드 레코드 (1989년 1월 10일에 기록)
[26]
빌보드 핫 100에선 3위를 기록했으며,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80위 권 안에도 진입한 히트곡이다.
[27]
빌보드 핫 100에서 3위를 기록했으며,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50위 권 안에 든 대히트곡이다.
[28]
RIAA 골드 레코드 (1989년 6월 16일에 기록)
[29]
빌보드 핫 100에서는 2위를 차지했으며, 이 곡의 인기는 대단해서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9위까지 올랐다.
[30]
또한 이 곡은 1989년 나온 영화
고스트버스터즈 2의 주제곡이다.
[31]
RIAA 플래티넘 레코드 (1989년 8월 25일에 기록)
[32]
빌보드 핫 100에서 7위를 기록했고,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100위 권 안에 들어가는 히트를 거뒀다.
[33]
RIAA 골드 레코드 (1989년 11월 14일에 기록)
[34]
글렌 메이드로스의 노래를 피처링한 것인데 피처링했기에 완전한 자신의 노래는 아니지만 이 곡 역시
뉴 잭 스윙 장르의 곡이며, 빌보드 핫 100 1위를 기록하고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30위 권 안에 드는 대히트곡이었다.
[35]
바비 브라운의 인기를 다시 끌어올려준 노래이며, 2집 앨범 Bobby의 리드 싱글이며, 빌보드 핫 100에서는 3위까지 올랐고 1992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도 33위를 기록한 대히트곡이었다.
[36]
RIAA 골드 레코드 (1992년 10월 13일에 기록)
[37]
빌보드 핫 100에서 7위를 기록했고,
199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도 50위 권 안에 든 히트곡이었다.
[38]
RIAA 골드 레코드 (1993년 1월 22일에 기록)
[39]
빌보드 핫 100에서 14위를 기록했으며, 바비 브라운의 사실상 마지막 히트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