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바둑/국가별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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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국 이전
한국 바둑은 바둑 항목에서 알 수 있듯 삼국시대부터 전해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다.[1]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바둑에 대한 기록은 백제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장수왕이 승려 도림을 백제에 보내 개로왕과 바둑을 두게 하는 한편 백제를 염탐하게 하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이다.신라의 경우 5세기 고분으로 추정하는 황남대총과 천마총에서 나온 자갈돌이 바둑돌로 사용된 것이었을 거라고 추정되고 있으며[2] 황남대총에서 같이 출토된, 이 바둑돌을 담았던 그릇으로 추정되는 중국산 칠기에는 3~4세기 중국 서진시대의 바둑 고수로 '기성'(棋聖) 칭호를 받았던 마랑(馬朗)의 이름이 새겨져있기도 했다. 이러한 바둑 용품이 황남대총에 부장품으로 묻힌 것을 볼 때 황남대총의 주인공도 생전에 바둑을 좋아했고 이미 당대 신라에도 백제처럼 바둑이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7세기 초에 사망한 신라 귀족의 무덤인 경주시 용강동 고분 6호 석실에서도 신라 때 바둑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갈돌들이 발견되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바둑은 성행해 궁녀들도 바둑을 취미로 많이 뒀다고 하지만, 일단 정부 차원에서는 조선 시대 바둑을 기예(技藝)로서 낮게 여겨 조선왕조실록에서 검색해보면 바둑의 폐해를 까는 기사도 제법 보인다. 그러나 워낙 재밌다 보니 취미로 즐기는 사람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 말기에 가면 순장바둑이 대세가 된다.
2. 광복~1970년대 이전
광복 후 일본에서 프로 初단을 따고 귀국한 조남철의 주도로 1945년 11월 한국기원의 전신인 '한성기원'이 설립되며 한국 현대바둑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3] 조남철은 당시까지 면면이 이어지던 순장바둑의 폐지 및 일본식 바둑룰의 도입, 체계적인 승단 시스템 및 현대적 바둑 대회의 도입 등 면밀한 계획을 통해 현대 한국바둑의 토대를 닦았다.1954년 사단법인 한국기원의 출범과 함께 제1회 승단대회를 개최, 1956년에는 최초의 본격적 프로기전인 국수전이 시작되어[4] 프로체제가 완전히 본 궤도에 올랐다. 초기에는 조남철의 독주체제가 계속되다가 60년대 중반 이후부턴 김인, 윤기현 등 일본 유학을 거친 신진 기사들이 주도권을 잡게 된다. 1970년대 초까지는 일본에서 바둑을 배운 이들 1세대 기사들이 바둑계를 지배했다.
1968년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삼일대로17길 16)에 5층 높이의 한국기원 건물을 준공하여, 여기저기 세들어 살던 신세를 청산했다. 1994년 성동구로 이전하기까지[5] 이 건물을 사용했고, 이 사이의 시기는 '관철동 시대'로 불리기도 한다. 한 일화로, 이 건물은 당시 한국기원의 이사장이던 이후락[6]이 건설에 물밑 도움을 줬는데, 조남철 九단은 이 건물의 기공식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아직 건물은 남아있으나 리모델링되어 모습이 많이 다르다.
1967년부터는 한국기원의 기관지인 월간 <바둑>이 출간되기 시작했고, 현재까지도 나오고 있다.
여담으로 초창기 조남철의 바둑 내적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그가 쓴 『위기개론』은 바둑공부의 바이블로 통했으며, 그가 八단으로 승단한 것이 1960년대 초반인데 당시 조남철을 제외하면 최고단이 四단이었다나. 이 때문에 한동안 그는 八단 승단을 거부하려고도 했다고.[7][8] 당시 아마추어 기사들끼린 바둑 형세가 불리할 때 '조남철이 와도 안 돼'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후에는 시대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조남철이 조훈현, 이창호 등으로 바뀌긴 했지만...
어쨌건 조남철 이후 한국기원과 일본기원의 실력 차이는 약간 좁혀졌다. 이후 일본 유학 출신의 프로 기사들이 병역법 때문에 한국으로 귀국하여 활약함으로써 일본기원과 한국기원의 실력 차이는 좀 더 좁혀지게 된다. 다만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조남철은 일본기원에서 입단했지만, 조남철 이후 한국바둑 1인자 계보를 이어간 기사인 김인, 윤기현, 조훈현 3인은 모두 한국기원에서 입단하고서, 즉 이미 프로 기사 신분으로 일본으로 유학 갔다. 그 와중에 독학 국내파로 최상위권 선수가 된 서봉수가 어찌보면 희귀 케이스.
3. 1970~80년대
1970년 재단법인 한국기원이 출범했다.1971년 신인 서봉수 二단(결승 진출 당시에는 初단)이 조남철 八단을 꺾고 명인전을 우승하는 대이변이 벌어졌는데, 이는 1세대 유학파 프로기사들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일본바둑에서 五단을 딴 조훈현의 귀국,[9] 정창현, 김희중 등 신진급 기사들의 등장으로 한국바둑계는 몇 년간 춘추전국시대를 맞게 된다. 이는 조훈현이 한국 적응[10] 및 군복무 등으로 제 기량을 완전히 꽃피우지 못했고, 서봉수 역시 명인전 우승 이후에는 잠시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가능했던 일종의 과도기였다.
1974년 한국바둑계 최대 사건인 '기계(棋界)파동'이 발생했다. 한국기원이 프로기사들의 권익을 충분히 보호하지 못하는 데 대해 불만을 키우던 중 소장파 기사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기원 사무국과 충돌했고, 이 과정에서 기사들이 한국기원을 검찰에 고발하고 한국기원은 조남철, 윤기현[11], 김수영[12] 홍종현[13], 노영하[14] 등 5명을 주동자로 몰아 제명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만다.
당시 67명의 프로기사 중 조훈현, 서봉수를 포함하여 전체의 2/3을 넘는 46명은 한국기원을 탈퇴한 후 결집, '대한기원'을 창립하며 한국기원과 맞짱을 뜨게 된다. 두 기원은 기관지도 따로 발행하고 입단대회도 별도로 하는 등 극한 대립을 하였으나,[15] 2년 후인 1976년 전격적으로 재통합에 합의하며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이 사태를 계기로 프로기사들의 처우가 크게 향상되었고, 한국기원 내에서 기사들의 발언권이 막강해지게 되었으니 최종적으로는 프로기사들의 승리로 끝난 셈.
1976년 조훈현(당시 六단)이 하찬석(당시 六단)을 꺾고 국수전 타이틀을 차지하면서 '조훈현-서봉수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했고, 이는 1980년대 말까지 계속된다. 이 과정에서 조훈현은 1980년(9개 대회), 1982년(10개 대회), 1986년(11개 대회) 3회에 걸쳐 모든 국내기전을 우승(전관왕)하는 위업을 달성하고, 서봉수는 그때마다 조훈현을 끌어내리고 천하의 형세를 양분하는 역할을 맡았다.[16] 당시에는 이들을 제외하면 우승은 커녕, 결승에 진출하는 선수 자체가 거의 없었고 그나마 기대를 모았던 도전5강( 강훈, 서능욱, 김수장, 장수영, 백성호)은 끝까지 이들을 넘을 엄두도 내지 못하며 조훈현과의 치수고치기에서 두 점으로까지 떨어지는 굴욕을 당하는 등 번번이
그나마 가능성을 보였던 게 1980년대 중후반 등장하여 '신풍3강'이란 닉네임을 얻었던 세 명의 신인 - 유창혁, 양재호, 조대현 - 이었는데, 이들은 조훈현과의 치수고치기 10번기에서 호선과 정선을 넘나드는 싸움을 펼치며 주목을 받았다.[17] 이들 중 유창혁과 양재호는 실제로 1990년대 이후 정상급 기사로 성장하게 된다.[18]
1982년 조훈현이 한국 최초의 九단이 되었다. 여기에는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한국바둑의 개척자인 조남철이 최초의 九단이 되지 못했던 것. 이는 사실 조남철의 주도로 만들어진 승단대회의
이 시기까지 한국바둑은 세계에서는 듣보잡 신세를 면치 못했다.
결국 1980년대에는 국내파 서봉수와 유학파 조훈현 간의 치열한 승부기질과 천부적 재능 간의 정반합(正反合)적인 일대 투쟁의 효과로 한국 바둑은 알게 모르게 일본 바둑을 바짝 추격하게 된다. 적어도 수뇌급인 조서 둘은 이미 일본 초일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실력. 그 당시 네임밸류에서 밀린지라 대부분 사람들이 미처 그걸 인지하지 못했을 뿐. 그리고 마침내 조훈현의 응씨배 우승으로 '한국기원도 할 수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4. 1990년대
1988년 방위병으로 복무하던 유창혁(당시 三단)이 조훈현을 꺾고 대왕전 타이틀을 차지하며 세대교체의 서막을 열었고, 조훈현의 내제자였던 이창호는 KBS 바둑왕전을 우승하며 최연소 타이틀 획득기록을 경신,몇 년간 계속된 항쟁의 최종 승자는 결국 이창호였다. 노쇠한 서봉수가 가장 먼저 밀려나고, 조훈현 역시 20여 년만에 무관으로 전락했으며 유창혁 정도가 근근이 버텼지만[26] 이창호와 호각으로 싸우지는 못했다. 그나마 이들은 그래도 완전히 추락하지는 않아서 이창호는 최전성기에도 조훈현처럼 전관왕까지 차지하지는 못했다.
한편 밖으로는 과거의 굴욕에서 완전히 벗어나 한국바둑이 일본바둑을 넘어 세계바둑의 최강으로 우뚝 서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1회에 이어 2회 응씨배에서 서봉수가 우승하고, 후지쓰배에서는 한국 기사들(조훈현, 유창혁)이 2년 연속으로 결승전을 치렀으며, 연승식 국가대항전[27]인 진로배[28] 대회에서는 한국이 매년 우승하며 일본과 중국을
그나마 여기에 대항했던 기사가 '이창호 킬러'로 유명한 요다 노리모토와 중국의 당대 1인자 마샤오춘 정도였는데, 요다는 조훈현 등의 다른 한국기사들에게 번번이 가로막혔고 마샤오춘은 이창호에게 말 그대로 처발리면서[29] 좌절한 끝에 아예 은퇴해버렸다.
1994년에는 김우중 총재가 건물을 기부하면서 한국기원의 본산을 관철동에서 성동구 홍익동으로 이전했다. 또한, 이 해 바둑TV가 창설되어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5. 2000년대
영원할 것 같던 이창호 독주시대는 연구생 제도를 통해 유입된 새로운 세대의 기사들에 의해 결국 끝이 오게 된다.[30] 목진석이 2000년 이창호를 꺾고 KBS바둑왕전 타이틀을 차지한 것을 시작으로[31], 이세돌, 최철한 등 새로 등장한 천재기사들이 맹활약하며 이창호를 최강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것. 하지만 이창호는 후배들의 거센 공격에도 순순히 항복하지는 않아서 이후로도 계속 정상권을 맴돌았고 지금도 호각지세로 맞서고 있다. 지금은 많이 멀어졌지만 조훈현 역시 2000년대 초반까지는 타이틀을 노릴 정도의 위치를 지켜냈고 유창혁 역시 마찬가지.2000년대 중후반이 되면 이세돌을 필두로 하는 10대 중후반~20대의 젊은 기사들의 시대로 완전히 넘어간다. 이들은 4인방의 뒤를 이어 국제대회를 휩쓸며 한국바둑의 시대를 이어갔고, 승단대회를 등한시하는 등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양상도 보였다.[33] 결국 한국기원은 승단대회 대신 공식전과 대회 성적을 반영한 승단 시스템을 새로 도입하는 등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기에 이른다.[34] 기존의 강자들 중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은 정상권에서 밀려났고 이창호 정도만이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반대로 말하면 중국이나 일본의 기사들 입장에선 이제 4천왕과 싸울 만하겠다 싶으니 새로운 끝판왕들이 떼로 등장한 격이었다.
다만 이 시절엔 이전만큼 절대 강자가 존재하는 시절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절대강자에 가장 가깝던 이세돌은 갑작스런 휴직선언과 이를 둘러싼 징계 등의 굴곡을 겪었고, 다른 기사들 역시 이전 조훈현이나 이창호가 보여주던 압도적인 포스까지 보여주진 못하면서[35] 여러 기사가 타이틀을 나눠 가지며 우승자도 자주 바뀌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 와중에 중국 바둑이 정부 지원 등을 바탕으로 급성장, 한국과 대등하거나 오히려 한국을 근소하게나마 뛰어넘는 모습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일본처럼 한국에서도 젊은 층의 바둑 인기가 계속 떨어지고 있어서 대책이 요구되는 상황. 이 때문에 바투라는 변형 바둑게임이 만들어졌을 때 프로기사들이 많은 관심을 갖기도 했는데, 게임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6. 2010년대
2016년까지 한국 바둑기사 우승 경력 횟수. 보면 알 수 있듯 조훈현 - 이창호 두 명이 획득한 타이틀 수가 전 역사 우승 기록 수의 절반을 훨씬 넘는다. 저 그래프에 있는 것 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한국기원이 창립된 이후의 한국 바둑사 전체에서 말이다. 다만 이는 참고할 부분이 있는게, 당시엔 지금과 기전 횟수도 달랐고 도전기가 많아서 한번 우승하면 다음번엔 결승전에서 도전자만 상대하니까 상대적으로 우승이 쉬운 환경이긴 했다.[36]
2010년 중국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채택된 '바둑' 종목에서 한국이 3개의 금메달을 모두 가져갔다. 또한 여기서 이슬아 선수가 유명해지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바둑 참조.
점차 박정환- 이세돌- 김지석의 3강 체제가 뚜렷해져 갔으며, 한국기원 소속 기사가 300명을 넘어섰다. 여전히 국제 기전 우승은 한국-중국이 주고받는 양상. 하지만 중국의 세가 갈수록 세지는 상황이다. 2015년 이후로는 이세돌이 완만하게 전성기를 내려오고 있는 틈을 타 중국의 커제가 세계 최강으로 우뚝 섰다. 박정환이 한때 세계 최강자에 있었으나 스웨한테 약한 모습을 많이 보이는 틈에 커제가 치고나온 것이다.
2015년에는 한국기원이 40억원가량을 들여 제3의 바둑 방송을 만들어 이듬해 개국하는 것이 목표라고 해서 논란이 되고 있었으나 결국 바둑TV를 인수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관련 기사 참조. #1 #2
한국기원이 서울 성동구에서 경기 화성시로 이전을 추진한다고 한다. 2018년까지 '바둑의 전당'을 준공한다는 듯. #
2016년 3월에는 구글이 내놓은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의 AI vs 사람 대결이 글로벌 이목을 집중시켰다. 자세한 사항은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문서 참조.
2010년대 들어서 한국 바둑 기전이 8개나 없어지는 등 침체기가 길어지고 있다. 십단전, olleh배, 천원전, 기성전, 여류기성전 등등 기전들이 후원 기업들의 후원 포기로 인해[37] 엄청나게 없어지고,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던 국수전 마저 폐지되었다. 이로 인해서 결국 한국 바둑이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국내기전이 줄어들자 대기업들이 후원하는 국제기전에서도 한국 기사들이 많이 떨어진다. 2013년 LG배에서는 16강에서 한국 기사가 전멸하고, 2016년 LG배 16강에서도 박정환과 신진서를 제외한 모든 기사가 탈락하는 등 침체가 심해지고 있다. 2010년대 초반까지는 중국에게 밀리면서도 박정환-김지석 등이 간간이 국제기전에서 우승을 해왔으나 201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완전히 밀리고 있는 모양새이다. 국가대항전 농심배 역시 2013년부터 4년 연속으로 중국에게 우승컵을 내줬다. 당장 한국 주최 국제대회는 삼성화재배, LG배(이상 개인전), 농심신라면배(국가대항전) 세 개밖에 안 남았다. 국내 기전 대부분의 총 상금은 5억원 미만으로 포켓몬 월드챔피언십 총상금(50만 달러)에 비해서도 작다.
이렇게 대회가 줄어들면서 신예 한국 바둑기사들이 경험을 쌓을 기회가 적어져서 작정하고 키우는 신진서, 이동훈, 신민준, 최정, 오유진같은 국가대표 차세대 주자를 제외한 나머지 기사들은 순식간에 생계가 곤란해지는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2013년과 2017년, 한국이 주요 세계대회 정상에 가지 못하고, 우승자는 모두 중국 선수가 되었다.
2018년 몽백합배를 박정환이 우승하며 오랜만에 다시 우승컵을 들었다. 농심배도 5년만에 중국에게서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커제가 주춤하는 사이 2017년 중반에 박정환이 세계랭킹 1위도 올라서며 반등의 기미가 보이고 있다.
현역 인공지능 '절예'를 바탕으로 하는 등 중국 바둑이 전반적으로 우세해지는 가운데, 이세돌이 은퇴하면서 한국 바둑의 2010년대도 함께 마무리됐다.
7. 2020년대
2020년 중국에서 시작돼 세계로 퍼진 코로나로 인해, 바둑 세계대회들도 자국에서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러한 상황에서 기계의 안정적인 운영이나 새로운 대국장에서의 쾌적한 환경 조성 등도 과제로 떠올랐다. 2020년 신진서 九단이 LG배를 우승하기도 했으나, 몽백합배에서 한국 기사들이 16강에서 전멸하는 등 여전히 암울한 시기를 보내는 듯 했다.2021년 2월 4일 신민준 九단이 커제 九단을 꺾고 제25회 LG배 조선일보 세계기왕전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신민준이 우승한 결승 3국은 시청률도 간만에 매우 높은 대국이었다. 신민준 3국 있던 날 바둑TV 하루 전체 시청률 0.215%, 전체 채널 중 무려 15위에 올랐다. 신민준 - 커제 3국의 중계 평균 시청률 0.414%, 1분 최고 시청률은 0.947%까지 치솟았다. 이 시청률이 대단하다고 봐야하는 이유는 무려 제한시간 3시간짜리 바둑이고 러닝타임도 길다. 프로농구, K리그는 이해하기도 쉽고 러닝타임도 짧은데도 시청률이 0.1%대다. 그만큼 바둑팬들의 충성심이 깊다는 것을 볼수있다. 기사
또한 2월 25일 신진서 九단이 5연승을 기록하며 농심신라면배를 탈환했다. 신진서 九단의 기력이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며 세계 최강자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고, 춘란배까지 우승했다. 또한 완만한 하락세를 그리고 있던 박정환 九단이 다시 한 번 좋은 모습을 보이며 어마어마한 포스를 뿜어내던 신진서를 잡고 삼성화재배를 우승했다. 이로써 6개의 메이저 기전 중 한국이 보유한 타이틀은 3개가 되었고, 중국과 동률이 되었다.
2022년 2월 9일, 26회 LG배에서 신진서가 양딩신을 꺾고 우승했다. 특히 LG배는 평일 낮에 시작한 경기임에도 유튜브 시청자수가 2만명 넘게 보는 기염을 토했다. 2020년 이후의 세계바둑 타이틀은 한국이 압도적으로 우세를 가지고 있다. 특히 신진서는 중국기사 상대로 지지않는 엄청난 포스를 보여주고있고 천적인 커제 상대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진서는 응씨배 결승도 남아있다. 만약 아시안게임에서도 신진서가 제패한다면 신진서 천하통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2022년 삼성화재배는 여자 기사인 최정 九단이 여자 기사 세계 최초로 세계대회 결승전에 올라가는 쾌거를 이뤘다. 시청률도 따라서 대박.
2020년대 들어서 한국 바둑 대회가 급증하는 등 다시 바둑 인기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종합 기전은 회복세가 더디지만 각종 이벤트 기전을 합쳐서 2022년 바둑 대회가 무려 37개나 시행돼 프로 바둑기사들의 일정 및 컨디션 관리가 문제가 될 정도로 성황이다. 기사
[1]
다만 해방 전까지 한반도에서 유행한
순장바둑 룰이었는지는 논란이 있다.
[2]
이 자갈돌 유물을 실제로 보면 검은색과 흰색이 잘 구분되지 않는 자연석 상태라서 이게 어떻게 바둑돌이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신라고고학을 전공한 이은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연구과장은 원래는 흑백으로 칠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며 고분 내 환경적 요인으로 칠이 벗겨졌거나 발굴 이후 세척 과정에서 칠이 지워진 것으로 주장했다.
[3]
한국전쟁기에는 잠시 부산에 피난가 있기도 했다가(이때 조남철은
대한민국 국군에 징집되어 전투 중 부상을 입기도 했다) 휴전 이후 서울로 돌아왔다.
[4]
초창기 대회명칭은 '국수1위전'이었다.
[5]
한국기원
김우중 총재가 건물을 기증하면서 성동구 홍익동 사옥으로 이전.
[6]
전 중앙정보부장. 이른바 떡고물(...) 발언도 남기는 정권 실세 중 한 사람이었는데, 바둑광이어서 힘을 썼다고 한다. 좀 더 정확하게는 조남철한테 지도대국을 받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후락이 대국료를 주지 않자 빡친 조남철이 어느날 “낼 것은 내고 바둑을 배우라”고 일침을 가했다고 한다. 조남철에 따르면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던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고 속으로 ‘조금 심했나’ 싶었지만 어차피 엎지러진 물이라 그냥 있었다”고. 이후 이후락은 관철동 한국기원 회관 건설을 물밑에서 도와주는 것으로 대국료를 대신하였다.
[7]
이는 자신과 김인 정도를 제외하면 일본 프로기사들에게 정선 정도로 승부가 되는 기사조차 없었던 당시 한국바둑의 수준 차를 감안한 것이기도 했다고 한다.
[8]
조훈현 역시 한국기원에서 세계 최연소 입단 직후 일본으로 유학했는데 일본기원에서 그의 기력은 연구생 4급으로 깎이며, 일본의 프로기사들에게 몇 점 접어야 승부가 될 정도였다고.
[9]
군복무 문제 때문이었다. 조훈현은 공군부대에서 군 복무를 했다.
[10]
한국어를 상당 부분 잊어버려 말을 다시 배워야 했다고.
[11]
1960년대 국수전을 2연패하는 등 정상급 기사로 활약했다. 2007년부터 억대 바둑판의 행방에 관련된
소송에 휘말려 큰 논란이 일었고 2009년 소송에서 패배하자 기사직을 사퇴.
[12]
김수장 九단의 형. 조남철 문하에서 바둑을 배운 제자로 바둑해설과 방송출연 등으로 일반인에게도 상당히 유명했다. 2005년
췌장암으로 별세.
[13]
서울대 법대 출신 프로기사로 알려졌다.
[14]
KBS의 바둑 해설을 오래 맡은 것으로 유명하다.
[15]
단 기전 출전은 함께 했다.
[16]
1980년에는 타이틀 판세를 5:4까지 만들기도 했다.
[17]
재미있게도 여기서 유창혁은 정선으로 두어 모두 승리, 양재호는 호선으로 두어 모두 패배했다.
[18]
조대현은 평범한 기사로 남았다. 양재호가 1994년, 유창혁이 1996년에 九단으로 승단한데 비해 이들보다 늦은 1999년에 九단으로 승단했다. 유창혁이 통산 다승 4위(1,365승), 양재호가 975승인 반면 조대현은 통산 575승으로 이들에 비하면 부족한 성적이다.
[19]
그래서 한국은 九단의 숫자는 가장 적었지만 그 만큼 권위는 상당히 컸다. 이 흐름은
유창혁과
이창호가 1996년 여름에 九단으로 특별승단이 이뤄지고, 2003년을 끝으로 승단대회가 폐지되면서 바뀌게 된다.
[20]
다만 김성룡의 말에 의하면, 당시에도 일본이 1위인건 인정하지만 중국한텐 크게 밀린다는 인식은 없었다고 한다.
[21]
사실 최초로 개최되어 결승까지 치른 대회는 후지쯔배였으나, 이 대회는 당시에는 응씨배가 출범하는 것을 보고 일본이 최초 세계대회라는 명예를 양보하기 싫어서 급조한 대회였다. 물론 이후에 성공적으로 정착해서 권위 있는 세계대회의 하나가 되긴 했다. 2011년 폐지됐다.
[22]
심지어 미국과 호주 대표도 한 명씩 있었다. 게다가 대만 대표는 3명. 이것은 잉창치씨가 대만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 바둑의 당시 위상을 잘 나타낸다.
[23]
이때 한국기원은 이런 사태를 항의했으나, 주최 측은
일본기원 소속인
조치훈의 국적이 한국이니 사실상 한국 대표가 2명이라는 일종의 궤변을 하며 한국기원을 달랬다. 또한
조훈현을 출전 선수로 선발하고, 부상 등의 이유로 예비 1번을
서봉수를 주었는데 응씨배가 최초의 세계기전이라는 점, 그리고 당시가 두 사람의 자존심 싸움이 치열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히 조훈현이 이를 포기할 리가 없었다. 서봉수도 시드 배정도 아닌 예비 1번에 화가 났는지 거절한다.
[24]
그래서 응씨배 2회는 출전 기사의 숫자가 늘었는데, 서봉수가 우승하면서 또 한국 기사가 우승컵을 가져간다. 잉창치: 어 이게 아닌 것 같은데 심지어 3, 4회 우승자도 유창혁,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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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그걸 모르고 붙였는데, 그래서 훗날 4천왕(天王)이라는 적절한 이름으로 바뀌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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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유창혁은 왕위전을 연속우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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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덕들은 '세 팀이 번갈아가며 선수를 내는 위너스리그'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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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이후 진로그룹이 부도나면서 농심신라면배로 스폰서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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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전적이 무려 6승 25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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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창호 역시 초창기 연구생 출신이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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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목진석은 다음 우승에 15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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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수는 이미 2000년 전후쯤에는 정상권에서 좀 멀어져 있었는데 2003년 이혼을 겪으며 완전히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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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의 경우 아예 승단대회를 개무시했기 때문에 국제대회를 휩쓰는 와중에도 단수는 三단에 불과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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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의 변경과 함께 이세돌은 단숨에 九단으로 승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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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상대평가로 보면, 바둑붐으로 인해 뛰어난 기량을 가진 기사들이 그만큼 많아진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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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우승해도 본선 16강에서 시작해 그만큼 타이틀 따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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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바둑 인구가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발생함에 따라 한국 바둑에 대해 후원할 이유를 못 느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이미지' 광고를 하는 것이 대회 후원 분야인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젊은 층의 관심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