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총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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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파키스탄 총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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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알리 진나 محمد علی جناح | Muhammad Ali Jinna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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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c1a><colcolor=white> 본명 |
마호메드 알리 진나바이 (મહમદ અલી ઝીણાભાઇ / Mahomedali Jinnahbha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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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6년 12월 25일 | |
인도 제국
카라치 (現 파키스탄 신드 주 카라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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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8년 9월 11일 (향년 71세) | |
파키스탄 자치령
카라치 (現 파키스탄 신드 주 카라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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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법조인, 정치인 | |
학력 |
링컨스 인(Lincoln's Inn)[1]
(변호사 자격 취득) (18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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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정당 | (1906년 – 1920년) | |
[2] (AIML) (1913년 – 1947년)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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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키스탄의 초대 총독. 인도·파키스탄의 독립운동가이자 이슬람교도의 지도자였으며 인도 국민회의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그는 부유한 이슬람 가정에서 태어나 인도 민족주의자가 되어 영국으로 유학,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귀국하여 무료변론을 하였다.인도 국민회의의 힌두 편향에 반발하여,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음을 주장하며 별개의 나라를 세우자는 '2국가 이론'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따로 독립한 이후에도 인도와 파키스탄은 수차례 전쟁을 치르며 현재도 평화가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물론 독립을 안 해도 내부갈등이나 내전으로 평화가 자리 잡지 못하겠지만.
1930년대부터는 이슬람 분리독립운동을 추진, 영국 정부와 총독부를 상대로 인도 총독부와는 별도로 이슬람 거주지 총독부 설치 및 독립을 설득하여 1947년 파키스탄, 발루치스탄 및 동벵골 지역에 따로 파키스탄 자치령을 설치하고, 인도와는 별도로 독립을 약속받는다.
파키스탄이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 1956년)하는 것을 보지는 못하고 1948년 죽었다. 다만 파키스탄이 1947년에 별도 자치령 지정을 받아 실질적인 독립은 이루었고, 자치령에서 영국 국왕이나 파키스탄 총독은 실질적 권한이 없었고, 현지의 직선 의회에서 선출된 총리가 내정은 물론 군사, 외교에서도 실질적 권한을 가진 상태였다.
2. 생애
청년 변호사 시절의 진나 |
처음에는 인도의 민족주의와 이슬람의 이익이 상충되지 않는다고 믿고 인도 국민회의 활동과 인도의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그러나 그는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운동을 비판하였다. 자와할랄 네루 역시 비폭력 운동에는 비판적이었다.
진나는 힌두교 중심적인 인도국민회의에 반발하여 결국 1930년대부터 영국 총독부와 별도로 교섭, 이슬람 신자가 많이 살고 있던 인도 서북부와 동북부 지역을 인도와는 별개의 독립국가로 독립시켜줄 것 또는 인도 총독부와는 별도의 총독부를 세워주고 자치권을 준 뒤 독립시켜달라고 호소했다.
1920년대에 그는 인도 국민회의를 탈퇴한다. 그러나 3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슬람-힌두교 간 타협이 가능하리라 믿고 중재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20년간의 화합 노력이 힌두 중심적인 인도국민회의에 의해 끝내 좌절된 것이다. 1930년대에 가면 그는 별도의 이슬람 민족운동을 지도한다. 자료 이때문에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된다.
그의 설득은 받아들여져 1947년 영국은 파키스탄 지역과 동벵골(현 방글라데시) 지역 등 이슬람 인도인들이 많이 사는 곳에 별도의 파키스탄 자치령을 설치하고, 인도와는 별도로 독립시켜준다고 약속하였다.
그는 이슬람 지역 총독부 설치 및 분리독립을 주장하고 영국의 인도 총독들도 설득했다. 1947년 영국은 파키스탄, 발루치스탄과 아프간- 인도의 국경지대, 동벵골을 포괄한 지역에 새로 파키스탄 자치령을 세운다. 그리고 군사권과 외교권까지 포함한 자치권을 허용하면서 총리와 의회 설치까지 허용한다. 영국의 자치령은 1931년의 웨스트민스터 헌장에 따라 내정에 대한 권한뿐만 아니라 군사권과 외교권도 가지게 되었다.
파키스탄 자치령의 총리(형식상 영국 국왕이 임명하는)는 파키스탄 자치령의 초대 총독으로 진나를 추천했고, 그는 1947년 8월 14일 초대 파키스탄 자치령 총독으로 부임한다. 이로서 파키스탄은 인도와의 별도 자치령 설치와 동시에 인도와는 다른 나라로 독립하는 것이 확정된다.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 등은 이에 대해 크게 반발하였다.
그는 인도 각지 및 인도차이나 주변 지역, 히말라야 등에 흩어져 있던 무슬림들을 끌어모아 정착을 지원했고,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했다. 오랫동안 결핵과 폐렴을 앓아왔던 그는 총독으로 재직 중이던 1948년 9월 11일 카라치에서 71세로 사망한다.
2.1. 사후
카라치에 위치한 모하마드 진나 영묘 (마자르 에 카이드)
그는 이슬람 인도인들의 국가 건설론을 주장했고, 영국령 인도총독부와는 별도의 이슬람 거주지 총독부 설치를 영국 정부에 청원하여 별도의 파키스탄 총독부를 설치하게 했다. 이는 파키스탄이 인도와는 별도로 독립하는 근거가 됐고, 진나는 생전에 파키스탄의 완전독립을 보지는 못했지만 파키스탄에서는 그를 국부, 건국의 아버지로 칭송한다. 그의 생일은 파키스탄의 공휴일 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다. 날짜가 공교롭게도 12월 25일, 즉 크리스마스와 같다. 이 때문에 이슬람권이라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서 기념하지 않는 파키스탄인들도 정작 12월 25일 당일에는 쉬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3. 기타
카라치에 있는 파키스탄 최대 국제공항의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따서 진나 국제공항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파키스탄 루피의 앞면 도안은 시리즈 및 권종 관계없이 전부 그의 얼굴이다.그는 이슬람 모더니즘에 입각한 비교적 세속적인 정책을 취하여 기독교인이나 힌두교인 소수종교에도 관용을 베풀고 배려해주었다. 그래서 파키스탄이 독립 이후 70년대까지 어느 정도 세속적인 나라였던 게 그의 정책이 컸다.
하지만 파키스탄은 아불 알라 마우두디로 대표되는 이슬람주의 세력이 점점 판치게 되었다는 게 문제였다. 이 사람은 "이슬람의 발전은 바라지만 서구화는 반대한다."는 미명하에 군사독재 정권의 우민화 정책을 지지한 어용 신학자이다. 이슬람주의는 민주주의를 수단으로 삼아 이슬람 신정 정권을 수립하려는 현대 정치사상이다.[3]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원래는 진나보다 훨씬 더 개혁적이고 힌두교에 유화적인 사람이었으나, 생애 말년에 이슬람주의로 전향해 파키스탄 자치령 시절 아흐마디야를 전멸시킬 것을 주장하는 팜플렛을 배포했다가 진나 정권 치하에서 감옥에 갇혀 사형 선고를 받았다 풀려났다.
진나가 추구했던 이슬람 모더니즘이 서서히 쇠퇴하다가 근본주의 성향을 가진 군부의 쿠데타로 무너지면서 오늘날 파키스탄은 이슬람 근본주의가 만연하게 되어 심각한 종교차별, 성차별 국가이고 여성 인권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얻었으며, 아흐마디야 신도들이 파키스탄의 수니파 근본주의 정책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진나는 방글라데시에서는 우르두어 강요로 평가가 안좋다고 한다. 방글라데시 내에서 진나를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절대다수가 소수의 무하지르계· 펀자브계 무슬림들이다.
4. 매체에서
리처드 애튼버러 감독의 영화 간디(영화)에서 조연으로 등장한다. 인도의 배우인 알리크 파담시(1928~2018)가 분했으며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는 고집스러운 인물로 표현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이 영화를 본 파키스탄인들이 상당히 분노를 표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인도에서 개봉했을 때는 진나에 대한 묘사가 사실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렇다고 악역은 아니고 단지 생각의 차이에 의한 노선 차이일 뿐으로, 일단 결정된 비폭력 투쟁에 확실히 따르는 동지이다. 인도의 독립이 확정된 후에 간디와 확실하게 결별하는데, 간디에게 무슬림들은 힌두교 신자를 영국에 이은 새 지배자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으니 갈라서자고 요구한다. 간디가 타협책으로 인도의 첫 내각을 모두 무슬림으로 구성해주겠다고 호소하자 마음이 흔들리지만, 자와할랄 네루가 힌두교도들이 무슬림 내각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면서 간디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지적하자, 마음을 굳혀 분리된 인도와 파키스탄과의 내전 중에 선택하라고 간디에게 통보한다. 이후 파키스탄의 총독으로 부임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퇴장한다. 즉 악당이 아닌 반동인물에 가깝다.
1998년 제작된 파키스탄 영화인 진나에서는 이름처럼 주인공으로 나온다. 배우는 놀랍게도 크리스토퍼 리. 재미있는 점은, 상술한 간디에서 마하트마 간디 역을 맡은 벤 킹슬리는 인도계 영국인인데 비해, 진나에서 모하마드 진나 역을 맡은 크리스토퍼 리는 잉글랜드계- 이탈리아계 혼혈 영국인으로, 인도인이나 파키스탄인의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근데도 둘 다 실제 인물들과 싱크로율이 너무 높아서, 간디와 진나를 실제로 만나봤던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 영화가 개봉할 당시 파키스탄에서는 간디가 영화로 나왔을 때의 인도처럼 엄청난 호응을 보냈는데 그래서인지, 로튼 토마토의 평점이 84%다. 영국과 합작으로 음악이나 여러 쪽은 영국인이 맡았고, 감독과 제작자, 제작사 모두 파키스탄 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