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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3 17:57:50

몽테스팡 후작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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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메트레상티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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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CB9D4><colcolor=#000000> 몽테스팡 후작부인
프랑수아즈 드로슈아르 드모르트마르
Madame de Montespan
파일:Marquise of Montespan.jpg
이름 프랑수아즈아테나이 드로슈아르 드모르트마르[1]
Françoise-Athénaïs de Rochechouart de Mortemart
출생 1641년 10월 5일
프랑스 왕국 뤼삭 레 샤토
사망 1707년 5월 27일 (향년 65세)
프랑스 왕국 부르봉라르샹보
배우자 몽테스팡 후작 루이 앙리 드 파르다이앙 드 공드랭
(1663년 결혼 / 1691년 사망)
자녀 마리 크리스틴, 루이 앙투안, 루이즈 프랑수아즈, 루이 오귀스트, 루이 세자르, 루이즈 프랑수아즈, 루이즈 마리 안, 프랑수아즈 마리[2], 루이 알렉상드르
아버지 모르트마르 공작 가브리엘 드 로슈아르
어머니 디안 드 그랑세뉴
형제 루이 빅토르, 가브리엘, 마리 크리스틴, 가브리엘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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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Françoise-Athénaïs de Rochechouart de Mortemart, Marquise de Montespan

루이 14세 로얄 미스트리스로 그의 2번째 정부였다.

2. 생애

1663년 22세의 나이로 몽테스팡 후작과 결혼했다. 남편은 군인이었으며, 부부가 씀씀이가 헤퍼 빚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원정을 나가느라 집에 별로 붙어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몽테스팡 부인은 결혼한 이듬해(1664년) 루이 14세 왕비였던 마리 테레즈 시녀로 뽑혀 궁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왕의 첫 번째 정부였던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와 친분을 쌓은 그녀는 서서히 자신의 친구를 밀어냈다. 그녀는 또한 남편의 애인에게 상심한 마리 테레즈 왕비에게 루이즈의 욕을 해 왕비의 환심을 샀다. 한번은 루이즈와 마리 테레즈 왕비가 둘 다 임신해 왕을 모실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두 사람은 각각 몽테스팡 후작부인을 왕에게 추천했고, 루이 14세는 그녀에게 빠져들어갔다.

1667년 마침내 루이 14세의 연인이 되는 데 성공했다. 왕의 총애를 확신한 몽테스팡 후작부인은 왕과 함께 라 발리에르에게 갖은 모욕을 가했고, 결국 라 발리에르가 수녀원에 들어가 칩거하게 되자 왕의 공식적인 정부가 되었다. 순진한 마리 테레즈 왕비는 그제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친구인 줄 알았던 여인이 남편의 애인이 되어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을 눈물로 봐야했다.

유부녀였으니 몽테스팡 부인의 남편이 이 상황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아내를 빼앗긴 몽테스팡 후작은 주변 사람들에게 부인을 뺏긴 것에 대한 동정을 호소하고 다니는 한편, 마차에 사슴뿔을 단 채 입궁하고[3], 왕 앞에서 칼을 부러뜨리는데다가[4], 멀쩡히 살아있는 아내의 장례식을 치르는 등, 온갖 기행을 벌이고 다녔다. 결국 1668년 루이 14세는 몽테스팡 후작을 기옌으로 추방해 버렸고, 부부는 그로부터 몇년 후인 1674년에 공식적으로 별거하게 되었다.

사실 왕이 유부녀를 건드리는 사례는 꽤 있었고, 오히려 유부녀를 왕의 연애 상대로 권장하기도 했다.[5][6] 남편들은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거나, 오히려 그 대가로 받는 떡고물[7] 때문에 내심 좋아하기까지 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차피 남녀 할 것 없이 결혼은 정략으로 하고 연애는 따로 하는 주의였기에, 질투심때문에 무려 왕에게까지 대놓고 분노한 몽테스팡 후작이 특이한 경우였다. 다만 루이 14세도 찜찜했는지(…) 몽테스팡 후작의 아들이었던 루이 앙투안 드 파르다이앙(1665~1736)을 공작으로 임명했다.[8]

어쨌든 공식 정부가 된 몽테스팡 후작부인은 루이 14세와의 사이에서 7명의 아이를 낳으며 10년 동안 사교계에서 화려하게 활약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왕의 총애를 잃을 것을 경계한 몽테스팡 부인은 미신에 매달리게 되었다. 결국 1680년 경 라 부아쟁이라는 마녀가 검거당했을 때[9], 몽테스팡 부인이 그녀의 주요한 고객들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라 부아쟁의 딸의 증언에 따르면 몽테스팡 부인은 그들과 함께 흑미사를 올리고, 왕의 총애를 되돌리기 위해서 가루약을 받아갔다고 한다. 귀족들과 왕의 정부까지 연루되어 귀족사회를 뒤흔든 충격적인 사건이라 위키백과에 별도 항목이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내역을 알게 된 루이 14세는 몽테스팡 부인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총애는 몽테스팡 부인의 자식들을 돌보던 유모 맹트농 부인에게로 옮겨가게 되었다.

왕으로부터 버림받은 이후에도 몽테스팡 부인은 10년이나 더 베르사유에 머물렀다. 왕은 그녀를 쫓아내지만 않았을 뿐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말도 안 걸고 무시하는 등 시간이 지나도 상황은 회복되지 않았고, 결국 몽테스팡은 자신이 쫓아낸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처럼 수녀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수녀원에서 몽테스팡 부인은 라 발리에르에게 지난 날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빌었고, 라 발리에르는 이를 받아들여줬다고 한다. 이후 자선활동을 비롯한 선행을 하며 살던 몽테스팡 부인은 1707년에 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죽었을 때 몽테스팡 부인이 낳은 루이 14세의 아이들 가운데 4명이 생존해 있었지만, 왕은 자녀들이 몽테스팡 부인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어차피 그녀는 자기가 낳은 왕의 서자들과도 사이가 안 좋아서 그녀를 어머니로 대하고 장례식에 참석해 울어준 자녀도 편애했던 전남편의 아들 뿐이었다.

몽테스펑 후작부인은 심약한 성격의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와는 정반대로 상당히 야심이 많은 성격이었던 모양이다. 라 발리에르도 꽤 괴롭혔지만 루이 14세의 왕비인 마리 테레즈에 대해서도 공공연히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순 시기[10]에 금육을 지키는 등, 꽤 신실했던 모양인데 미신에 빠져 인생을 말아먹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다.

3. 대중매체에서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또한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 [2]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의 아내. 프랑스의 마지막 왕 루이필리프 1세가 바로 프랑수아즈 마리의 4대손이다. [3] '아내가 바람난 남편'을 뜻하는 속담으로 한국에선 ' 오쟁이를 지다'라고 하는데, 서양에서는 '남편 머리에 뿔이 났다'라고 한다.(셰익스피어의 희곡에도 아내가 간통했다고 오해해 제 머리에 뿔이 났다고 한탄하는 남편의 모습이 종종 나온다.) 즉 후작은 대충 한국식으로 하면 오쟁이 가마에 걸거나 차에 매달고 다니는 식으로 내 아내가 왕이랑 바람났다고 자학하고 다닌 것이다. [4] 당시 칼은 일종의 정장이자 충성을 상징하는 증표였다. 군주가 기사 서임할 때 기사의 양 어깨에 칼을 대주기도 하고, 평민들이 왕궁 구경을 하러 입궁할 때도 칼 한 자루는 차야 입궁할 수 있었다.(그래서 왕궁 입구에서 칼 대여 장사를 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시대에 왕 앞에서 칼을 분지른다는 건 "이 개떡같은 놈아! 넌 내 군주도 아니야!"라는 뜻이었다. 아내를 빼앗은 루이 14세에게 어지간히도 분노했던 듯 하다. [5] 이는 처녀성을 중시하던 전근대적 풍조 때문이었다. [6]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퐁파두르 부인은 처녀 시절에 왕을 만났지만 왕의 애첩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 오자, 그녀의 후원자가 눈 가리고 아웅으로 자기 조카와 퐁파두르를 결혼시켜 애첩생활을 시작했다. [7] 가령 왕이 어떤 정부를 좋아해서 그 정부에게 백작부인 작위를 주려면 남편을 백작으로 만들어줘야 한다! [8] 당탱 공작(1711). 참고로 이 아들은 1683년 고향인 피레네에서 베르사유에 들어와서 궁정인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몽테스팡 후작부인이 이런 저런 지위와 군대의 지휘관 자리를 사 주고 나름 잘 대해 준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루이 14세의 파벌 중 가장 강한 파벌이었던 맹트농 부인의 파벌이 아니라 루이 왕태자와 이부처남인 오를레앙 공작의 파벌이었기에 그렇게 총애는 받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1706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라미예 전투에서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의 부사령관으로 부대를 지휘했지만 결과는 대패하고 말았고, 그 책임(사실 이는 총지휘관인 빌레루아의 책임이 컸다. 사실상 덤탱이 쓴 것이었다.)에 루이 14세의 몽테스팡 부인에 대한 괘씸죄까지 더해져 강제 전역을 당했다. 하지만 각종 건축에 소질이 있었는지 루이 14세가 진행하는 공사를 감독하게 되었다. 모친 사후 그 재산을 상속받고 1711년 루이 14세의 총애를 얻어 공작 작위를 받았다. 이후 이부처남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가 어린 왕 루이 15세의 섭정을 맡을 당시 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여담이지만 당시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사람은 재무장관 존 로와 미시시피 회사를 설립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미시시피 거품이었다. [9] 원래 점쟁이 여성으로, 화학 및 약학에 관심이 많아 이에 관련된 사업도 여럿 벌렸다고 한다. 다만 이런 관심이 독 제조로 이어졌고, 실제 당시 여럿 고객들에게 독을 판매했다. 검거된 계기도 다른 독살 건으로 검거된 독 사업 라이벌의 밀고때문이었다. [10] 가톨릭 교회가 파스카 축제를 준비하도록 마련한 기간으로 '재의 수요일'부터 주님 만찬 성목요일의 주님 만찬 미사 직전까지 계속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다리는 이 시기에는 보통 때보다 엄숙한 전례는 물론이고, 금육, 금식, 십자가의 길 기도 등 회개와 절제를 통하여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한다. [11] 그래도 자기를 배신한 하녀도 오죽하면 그랬겠냐며 용서해주고(이 하녀는 자기 연인이 몽테스팡과 바람났다고 믿고 질투심에 거짓 밀고를 했다. 몽테스팡은 덕분에 스페인으로 도주하는 신세가 되지만 자기도 사랑에 배신당해 봐서 그 심정을 안다며 대충 넘겨준다.) 평민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소탈한 인성의 소유자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