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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A8AA><colcolor=#000000> 보포르 여공작 가브리엘 데스트레 Gabrielle d'Estrées, Duchesse de Beaufo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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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가브리엘 데스트레 (Gabrielle d'Estrées) |
출생 |
1571년/
1573년 프랑스 왕국 쾨브르 |
사망 |
1599년
4월 10일 (향년 25~28세) 프랑스 왕국 파리 |
배우자 |
니콜라 다메르발 드 리앙쿠르 (1592년 결혼 / 1595년 무효화) |
자녀 | 세자르, 카트린 앙리에트, 알렉상드르 |
아버지 | 쾨브르 후작 앙투안 데스트레 |
어머니 | 프랑수아즈 바부 드 라 부르데지에르 |
형제 | 프랑수아즈, 마르그리트, 디안, 프랑수아 아니발, 프랑수아 루이, 안젤리크, 줄리앤 히폴리트, 마리 카트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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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Duchesse de Beaufort and Verneuil, Marchioness of Monceaux프랑스의 국왕 앙리 4세의 애첩. 앙리 4세의 수많은 정부들 중 가장 사랑받은 여인이다.
2. 생애
가브리엘 데스트레는 쾨브르 후작 앙투안 데스트레의 4녀로 태어났다. 가브리엘은 밝은 금발과 크고 푸른 눈, 예쁜 코를 가진 미인이었다. 가브리엘에게는 6명의 자매가 있었는데, 가브리엘의 어머니 프랑수아즈는 아름다운 자신의 딸들을 궁으로 밀어넣어 고위 귀족들과 관계를 맺게 했다. 이 때문에 가브리엘의 가족들이 살던 쾨브르 성은 매음굴이라고 불리고 프랑수아즈는 매음굴의 안주인이라는 별명이 붙는 등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다.가브리엘은 앙리 3세 때부터 궁에 출입했다. 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칭송받던 가브리엘은 자신의 정부를 만들며 영향력을 쌓아갔다. 그러던 중 1590년에 가브리엘은 자신의 정부인 벨가르드 공작의 소개로 프랑스의 국왕 앙리 4세를 만나게 되었다. 아름다운 가브리엘에게 반한 앙리 4세는 그녀를 하급귀족인 니콜라 다메르발 드 리앙쿠르와 결혼시켜 궁에 자유롭게 출입하게 한 뒤 자신의 정부로 삼았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가브리엘의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1595년에 앙리 4세는 니콜라 다메르발의 성기능 장애를 이유로 결혼을 무효화시키고 가브리엘을 자유롭게 해줬다.
호색한으로 유명한 앙리 4세였지만 가브리엘만은 누구보다 소중히 대했다. 앙리 4세는 늘 가브리엘을 가까이 했으며 전쟁터에도 그녀를 데려갔다. 앙리 4세는 가브리엘에게 고민을 털어놓았고, 현명한 가브리엘은 왕의 조언자 역할을 했다. 지적이며 헌신적인 여성이었던 가브리엘은 앙리 4세를 물심양면으로 보살폈다.
1594년에 가브리엘은 앙리 4세의 첫 아이인 세자르를 낳았다. 늘 아들을 원했던 앙리 4세는 크게 기뻐하며 가브리엘을 프랑스의 왕비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앙리 4세는 허구한 날 애인들한테 결혼해주겠다고 공수표를 날리곤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앙리 4세는 차근차근 가브리엘을 왕비로 맞아들일 준비를 했다. 1596년 3월 가브리엘은 앙리 4세로부터 몽소 여후작 작위를 받았고, 1597년 7월에는 보포르 여공작에 임명되었다. 또한 앙리 4세는 가브리엘에게 많은 성과 영토를 하사했다. 이를 시기한 궁중 사람들은 가브리엘을 국가의 부를 축내는 악녀로 묘사했으며 가브리엘을 '쓰레기 공작부인(la duchesse d'Ordures)'이라는 멸칭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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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데스트레 자매의 초상, 1594년경,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가브리엘을 묘사한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 오른쪽의 여성이 가브리엘이고 왼쪽의 여성은 가브리엘의 동생 빌라르 공작부인 줄리앤 히폴리트다. 빌라르 공작부인이 가슴을 꼬집는 건 가브리엘이 임신했음을 나타내며, 가브리엘 손의 반지는 앙리 4세와 결혼을 약속했음을 의미한다. 뒤쪽의 시녀는 아이의 옷을 만들고 있다. |
1599년 3월, 앙리 4세는 왕비의 방탕한 생활 등을 이유로 왕비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의 결혼을 무효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가브리엘은 파리에서 앙리 4세의 네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퐁텐블로에 있던 앙리 4세는 결혼 반지와 식을 올릴 대관식을 준비하며 결혼식을 기다렸다. 그러나 1599년 4월에 가브리엘은 아이를 사산하고 그 다음날에 숨을 거두었다. 뒤늦게 파리에 도착한 앙리 4세는 가브리엘의 죽음을 접하고 크게 절망했다. 가브리엘이 죽은 다음날 앙리 4세는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 '내 사랑의 뿌리는 죽어버렸으며 다시는 살아나지 않을 것이다.(La racine de mon cœur est morte et ne rejettera plus.)'라고 썼다.[1]이후 가브리엘의 장례는 왕비의 예로 치러졌다.
3.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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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돔 공작 세자르 드 부르봉 | 카트린 앙리에트 드 부르봉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방돔 공작 세자르 (César, Duke of Vendôme) |
1594년 6월 3일 | 1665년 10월 22일 |
로렌의 프랑수아즈 슬하 2남 1녀 |
1녀 |
엘뵈프 공작부인 카트린 앙리에트 (Catherine Henriette, Duchess of Elbeuf) |
1596년 11월 11일 | 1663년 6월 20일 |
엘뵈프 공작 샤를 2세 슬하 3남 |
2남 |
슈발리에 드 방돔 알렉상드르 (Alexandre, Chevalier de Vendôme) |
1598년 4월 19일 | 1629년 2월 28일 |
장남인 세자르는 태어나자마자 앙리 4세의 아들로 인정받았다. 앙리 4세는 세자르를 방돔 공작으로 임명하고 그를 매우 아꼈다. 세자르는 어머니의 작위인 보포르 공작위를 역임하고 당시 사교계 최고의 상속녀였던 프랑수아즈 드 로렌과 결혼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610년에 아버지 앙리 4세가 사망한 후 얼마 안 가 여러 음모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히고 망명 생활을 하는 등 수모를 겪었다. 1650년이 되어서야 다시 프랑스에 자리를 잡은 세자르는 군인으로 활약하다가 사망하였다. 여담이지만 그의 직계후손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명장인 방돔 공작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이다.
둘째인 카트린 앙리에트는 오빠의 영향으로 '마드모아젤 드 방돔'이라고 불렸다. 어머니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카트린 앙리에트는 기즈 가문에 시집을 갔다.
셋째 알렉상드르는 '슈발리에 드 방돔'이라고 불렸으며 캉의 영주를 지냈다. 형 세자르와 함께 리슐리외 추기경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함께 감옥에 갇혔다가 옥사했다.
[1]
저래놓고 실제로는 얼마 안 가서 정부들을 잘만 사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