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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16:19:23

모든 국가는 그에 걸맞은 정부를 가진다

1. 개요2. 유래3. 유사한 말4. 이 용어를 비판하는 입장5. 이 용어를 옹호하는 입장6. 관련 문서

1. 개요

모든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Toute nation a le gouvernement qu'elle mérite.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프랑스계 보수주의자 조제프 드 메스트르 1811년 러시아 헌법 제정에 관한 토론 도중 한 발언.

2. 유래

《Lettres et Opuscules》에 인쇄된 드 메스트르의 "Lettre 76"( 1811년 8월 27일)에서 나온 문구다. 왕정이든 민주주의든 국가를 건설하면 그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는 뜻. 이후 1859년에 새뮤얼 스마일스(Samuel Smiles)의 자기개발서 《자조론(自助論)[1]》에서도 다시 등장했다. 오늘날 흔히 통하는 뜻으로는 아마 이쪽이 더 자세하고 더 정확할 듯하다.
정부는 그 나라를 구성하는 개인들을 반영한다. 국민보다 수준이 높은 정부라 하더라도 결국에는 국민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려지게 마련이다. 국민보다 수준이 낮은 정부가 장기적으로는 국민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지듯이 말이다. 한 나라의 품격은 마치 물의 높낮이가 결정되듯이 자연의 순리에 따라 법 체계와 정부 안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 고상한 국민은 고상하게 다스려질 것이고, 무지하고 부패한 국민은 무지막지하게 다스려질 것이다.
《자조론》, p.29
다시 말해, 사회가 성숙하려면 그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이 성숙해야 하며, 거꾸로 사회 구성원의 수준이 낮으면 그 사회 역시 수준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말도 된다. 책의 이름이 Self-Help인 것도 이 때문.

또한 이 말은 이념에 좌우되지 않고 사회계약론이나 사회유기체설의 관점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사회계약론에서는 구성원들 간의 합리적인 계약이 이뤄져야 사회 발전이 이뤄질 수 있다고 보고 있으며, 사회유기체설에서는 각 구성원간의 분업과 협동을 통해서 같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구성원들 사이에 계약이 불합리적으로 이뤄지거나 구성원 간 분업 및 협동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그것이 곧 사회적 갈등으로 번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한국에서 프랑스의 정치학자이자 자유주의자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는 말을 했다고 와전되어 있다. 심지어 언론에서조차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말로 잘못 언급하기도 하는데, 토크빌은 저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드 메스트르와 토크빌이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인데다 조제프 드 메스트르가 워낙 인지도가 떨어지는 인물이다보니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드 메스트르의 이 금언은 민주주의에 한정한 것이 아니라 독재주의에도 적용이 가능하며, 굳이 정치에 한정할 필요도 없다. 사람들이 정치, 특히 민주주의에만 한정해서 그렇게 오용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government(정부, 통치, 체제 등)나 nation(국민, 종족 등)이 의미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기에, 사실상 모든 '사회'에 적용이 가능하다.

다만 이러한 말들은 정작 '미개한 정치'를 한 엘리트들의 병폐와 무능을 일반 대중에게로 전가시키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이 말을 한 스마일스는 유명한 수구주의자로 프랑스 대혁명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유명하다.

3. 유사한 말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플라톤
사실 플라톤의 이 말은 국민이 아니라 소수 엘리트들을 대상으로 쓰인 말이다. 플라톤의 《국가》 1권 347p를 참조해 말하자면 소수 엘리트들은 돈과 명예를 탐한다는 오명을 쓰기 싫어 정치를 꺼리는데, 그랬다가는 엘리트가 아닌 미개한 군중들이 정치를 맡아 중우정치로 흐르게 되므로 엘리트들은 어쩔 수 없이 정치에 손을 대야 한다는 맥락에서 나왔다. 플라톤은 엘리트주의자지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는 통치에 적합하고 본질적으로 우월한 소수의 통치 계급, 곧 ' 수호자(Guardian)'를 상정하고 이들만이 정치 권력을 잡아 다른 모든 (열등한) 이들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즉 이 격언은 "본질적으로 우월한 소수의 잠재적 수호자들이 통치를 포기하면 저질의 다수 대중에게 지배받는다"는 뜻으로, 아예 뿌리부터 반민주적인 의미를 내포한 금언이다. 게다가 플라톤은 처음부터 국민을 우매(愚昧)한 대상으로 상정했기에, 국민 대다수가 엘리트인 경우를 설명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엘리트"는 상대적인 개념이라 국민 대다수가 엘리트인 국가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엘리트는 보통 학력, 경제력, 사회적 영향력 같은 기준을 통해 상위에 있는 소수 그룹을 지칭하는데, 국민의 대다수가 그렇게 분류된다면 이미 그 기준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예를 들어, 학력이 높은 국가라도 국민 대부분이 고등 교육을 받았다면, 오히려 더 높은 기준이 필요하게 된다. 결국, 엘리트라는 개념은 상대적으로 평가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엘리트로 만들 수는 없다.

정작 플라톤은 자신이 생각한 이상국가에서 모든 시민들이 평등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플라톤은 그렇게 교육을 받게 해서 우수한 순대로 통치자-수호자-생산자 식으로 계급을 나누자고 했다. 현대의 경우에 같은 공교육을 받는다고 모두 능력이 똑같은 건 아니고 성적에 따라 대우도 다른 걸 감안하면 나름 비슷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같은 공교육을 받는데도 저질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꼴통인 사람들이 (공교육에 문제가 없는 게 아닌 이상) 많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교육의 결과가 삼각형 꼴이냐(상위<중위<하위) 아니면 마름모 꼴이냐(상위<중위, 중위>하위)의 차이일지도. 전자의 경우라면 이른바 '저질'들이 많으므로 이런 저질들에게 휘둘릴 가능성이 높겠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적어도 그 저질들은 사회의 소수이므로 그들이 사회든 정치든 휘두를 힘이 없다.

한마디로 현대에는 플라톤의 의도와 정반대로 인용되고 있는 셈. 하지만 정치적 무관심을 멀리하여 저질스러운 자들의 통치를 막자는 맥락은 변하지 않으니까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열심히 써먹는 격언이다.
지금 이 순간, 내 입을 막으려고 누군가 전화통에 고함을 질러대고 곧 총 든 사람들이 오겠죠.
왜일까요? 정부가 대화 대신 곤봉을 휘둘러도 언어의 강력한 힘이 의미 전달을 넘어서 들으려 하는 자에게 진실을 전해서죠.
그 진실이란 이 나라가 단단히 잘못됐단 겁니다.
잔학함, 부정, 편협함, 탄압이 만연하고 한땐 자유로운 비판과 사고, 의사 표현이 가능했지만 이젠 온갖 감시 속에 침묵을 강요당하죠.
어쩌다 이렇게 됐죠? 누구 잘못입니까? 물론, 가장 큰 책임은 정부에 있고 대가를 치르겠지만,(Most certainly there are those who are more responsible than others, they will be held accountable.)
진실은 말이죠, 그 원흉을 찾고 싶을 때 거울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But again truth be told if you're looking for the guilty, you need only look into a mirror).
- 브이 포 벤데타의 한 장면

파일:der_untergang.png
난 그들을 동정하지 않습니다.
Ich kann kein Mitgefühl empfinden.

다시 말하지만 난 전혀 그들을 동정하지 않는다고![2]
Ich wiederhole, Ich kann da kein Mitgefühl empfinden!

독일 국민들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정했소. 이 사실에 놀랄 인간들도 있겠지. (하지만 당신은) 스스로를 기만하면 안 된다[3]고!
Das Volk hat dieses Schicksal selbst gewählt! Ja, das macht für manche Leute ein Überraschung sein. Geben Sie sich keinen Illusionen hin!

우린 국민들에게 우리에게 표를 던지라고 강요한 적이 없소이다. 그들이 우리를 뽑았고 그 덕분에 그들은 지금 (양 손으로 목이 잘리는 제스처를 취하며)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니까 말이오.
Wir haben das deutsche Volk nicht gezwungen. Es hat uns selbst beauftragt hat. Jetzt wird ihnen eben das Hälschen durchgeschnitten.
영화 몰락에서 파울 요제프 괴벨스(울리히 마테스 扮)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에서, 마르틴 니묄러

4. 이 용어를 비판하는 입장

(파시즘에 대해) 환호하는 군중의 이미지는 몇몇 유럽 내 민족들이 선천적으로 파시즘적 경향을 띠고 있으며, 그런 민족적 특성 때문에 파시즘에 열광적으로 반응한다는 가정에 힘을 실어준다. 이 가정으로부터 한 나라의 결함 있는 역사가 파시즘을 탄생시켰다는 겸손한 듯 오만한 믿음이 따라 나온다. 이러한 믿음은 쉽게 파시즘을 방관하는 국가들의 알리바이로 바뀔 수 있다. 즉, 자기네 나라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 로버트 팩스턴, 《파시즘》 국역본 39p.
파시즘에 대해 세계적인 권위자 중 한 사람인 역사학자 로버트 팩스턴의 주장을 원용하자면, '모든 국가는 그에 걸맞은 정부를 가진다'라는 명제는 인종차별주의적인 주장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할 수 있다. 즉, 어떤 나라에 파시즘이나 그와 유사한 악독하고 폭력적이거나, 반동적이고 억압적인 정치체제가 집권하게 되는 상황에 대해 '그 나라 사람들이 미개하고 무식해서 그런 일'이라고 퉁치는 것은, 일종의 민도드립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독일이나 이탈리아·일본이 파시즘적·군국주의적 국가로 전락할 때, 같은 시대의 영국·미국·프랑스 등은 파시즘이 집권하지 않고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했는데, '모든 국가는 그에 걸맞은 정부를 가진다'라는 식으로 퉁치고 넘어가면 '독일·이탈리아·일본 사람들은 무식하고 미개하기 때문에 파시즘을 택했고, 미국·영국·프랑스 사람들은 똑똑했기 때문에 파시즘에 넘어가지 않았다'라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고, 이는 팩스턴이 경계한 것처럼 하나의 인종차별주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팩스턴은 파시즘을 분석하면서 '시민 사회의 미약함'을 다소 중점을 두고 분석하기는 하지만, 무슨 '모든 국가는 그에 걸맞은 정부를 가진다'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서 '국민성이 저꼴이니까 파시즘이 집권하는건 당연'하다는 식으로 '이게 다 국민 탓이다'라고 거칠게 단순화하지 않는다. 팩스턴은 파시즘의 탄생과 집권기를 설명하면서 근대적 국민국가 체제의 수립, 제1차 세계대전에서 생겨난 유럽 전체에 남은 상흔, 초기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나온 유럽국가와 그 국민들의 경제적인 격변·대공황, 공산주의의 위협, 대의민주체제의 무능함 등을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특정 국가에서 파시즘이 부상하고 집권하는 데는 다양한 요인이 있었으며, 단순히 국민성 따위 등 단일한 이유만으로 일반화할 수 없다고 결론내린다.

아래 옹호론에서 제시하는 북한이나 중국을 예시로 들면서 '반항할 생각을 안하니까 당하는 거다'라는 주장을 내세우지만, 타당한 반박이 될 수 없다. 애초에 국가는 여러 계급, 계층으로 갈라져 있으며, 정부는 모든 계급, 계층을 아우를 수 없다. 따라서 특정 계급, 계층에 맞는 정부는 다른 계층, 계급에 사실 맞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가령 보수계층에게 있어서 진보 정권은 성향에 맞지 않고, 반대로 진보계층에게 있어서 보수 정권 또한 성향에 맞지 않는다. 단지 어느 정도 이상까지 침범하지 않으면 정권이 불만족스럽더라도 참는 것 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전근대 시절 동양의 전제 군주[6], 그리고 독재자들 또한 자신들이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을 강조해서 정권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데 이용해왔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 국가들은 인민을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집권은 인민들의 지지로 이루어진 것이며, 따라서 독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국민이 그에 걸맞은 정부를 가진다는 이론은 독재 정권의 정당화에 사용될 수도 있다. 반대로 '민주주의는 국민성에 근거해서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다'는 이론대로라면 외부의 도움으로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해봐야 수준 낮은 국민성 때문에 다시 독재로 돌아갈 것이니 외부에서 민주화 운동이나 혁명 등을 지지할 명분도 사라져 버린다.

유사하게,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서 나온 '국가발전의 5단계' 설[7]의 경우에도, 현대의 좌파들마저 "국가발전의 5단계설이 '동아시아 국가들은 자본주의로 이행하지 못하고 여전히 전근대적 체제에 머무르고 있다'는 식의 오리엔탈리즘적 주장에 사용되었다"는 비판을 제기하는 것이 현황이다. '모든 국가는~'식의 주장은, 특정 국가의 후진성을 국민성이라는 것 단 하나에 국한시킴으로서 감정적으로 통쾌하고, 공격해야 될 대상을 명확하게 '설정'해 주기는 하지만, 팩스턴과 같은 석학들에 따르면 그러한 '설정' 자체가 부정확한 것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민중 봉기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표면적으로나마 집회의 자유가 있는 민주국가에서도 사회의 부조리를 바꾸려면 매우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또 그런다 한들 바뀌리라는 보장도 없다. 단적으로 대한민국의 병역 문제만 봐도 그렇다. 민주국가에서는 전례 없는 병역 제도가 유지되고 있음에도 비복무자들의 외면, 복무자들의 물귀신 심보와 보상심리 때문에 거의 바뀌지 않고 있다. 엄청나게 비판을 듣긴 하지만 단지 그 뿐. 2023년까지 흔들림 없이 유지되고 있다. 옹호론의 논리대로라면 전 국민이, 하다못해 해당 년도 입영 대상자들만 다같이 병역 거부하면 순식간에 끝나는 문제다. 그러나 그러한 민주 봉기를 일으키기란 민주국가에서도 매우 어렵다.

하물며 독재국가에서는 민중 봉기를 일으키기란 불가능에 어려울 정도로 가깝다. 멀리가지 않아도 일제시대 역사를 돌아보면 압제자들의 눈을 피해 민중 봉기를 일으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독립운동가들이 미개해서 반세기 가까이 주권을 되찾기 못했다기보다는, 그만큼 조선총독부와 일본 제국 체재가 흔들림 없이 단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태평양 전쟁의 영향으로 일본 제국이 무너지자 조선은 독립을 찾을 수 있었다. 특히 현대에 와서 기술의 발전으로 군대와 일반인의 무장 수준이 더 크게 차이나고 민중에 대한 감시, 통제 또한 더 깊고 넓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더 어렵다.

사실 "모든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고 말하는 사람치고 " 나에겐 이 정도 정부가 딱 어울린다"고 당당히 인정(?)하는 사람은 없다. 처음부터 그 정부에 투표조차 하지 않았다면 그런 말이 안 나오는 게 당연하지만, 분명 지지한 사람이 지지하지 않은 사람보다 많았을 테니, 결국 이 말을 인용하는 사람의 과반수는 제 수준을 망각했다고 볼 수밖에.

이 단어를 비판할 수 있는 또 다른 관점이 있다. 드 메스트르가 말한 내용의 요지는 '국민의 수준에 맞게 정부의 수준이 정해진다'로, 국민의 수준을 독립변수(변인)으로, 정부의 수준을 종속변수(변인의 변화에 따른 결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정부 또한 자신들의 입맛에 걸맞게 국민들을 길들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보통 부정적인 용어로 쓰이는 우민화 정책이라는 용어를 예로 들어보자. 우민'화(化)' 라는 것은, 우민이 아닌 사람들을 우민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만일 처음부터 국민이 우민들이었으면 우민화 정책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떠한 정치체제던 간에, 해당 정치체제는 오직 통치자의 의지만으로 존재할 수 없고, 그 체제를 지지하는 하부층의 지지(또는 노골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음)가 있는 하에만 존속할 수 있다. 만일 하부층이 체제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그 체제는 붕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예전의 왕정들을 두고 '왕이 절대자로 군림하는 체제'라고 하지만, 실제로 왕이 자기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한 것은 아니다. 최소한 자기를 지지하는 측근들 몇 명은 두고, 그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어떠한 체제건 간에 하부층의 지지, 또는 최소한 묵인은 얻어내기 위해서 다양한 정책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정부 또한 자신들의 입맛에 걸맞은 민중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대체적으로 민주국가의 시민일 가능성이 높고, 다수결의 원칙, 인권 존중, 개인의 자유에 대한 중시, 표현과 양심의 자유 등을 원칙적으로 동의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당신이 가진 이 의견들이 '최소한의 민주적 교양' 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부가, 당신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길들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가 느껴지지만, 원칙적으로 세뇌 교육은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민주 체제건 독재 체제건 시민들이 현 체제를 지지하도록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나마 선진적인 민주 국가의 정치세력이라면 선거를 통해 집권하고, 국민들에게 이득을 주는 정책을 실시하고 이를 통해 국민의 만족을 얻어 지속적인 집권을 확보하는 정도의 '온건하고 상식적'인 방법을 쓸 것이고, 권위주의적인 독재 국가라면 프로파간다, 여론조작, 노골적인 탄압 등을 통한 반대자 억압 등을 통해서 체제를 지지하도록 '세뇌' 하거나, 최소한 반항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즉, 어떤 비민주적 독재 국가의 국민들이 그 체제를 자발적으로 지지하거나, 혹은 반발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부가 자신들에게 걸맞은 국민을 만들어낸 결과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8]

5. 이 용어를 옹호하는 입장

우선 (민주 국가에서) 대통령·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은 더 이상 세습도 아니며, 수입산(…)은 더욱 더 아니다. 국민들이 자국 내에서 선출한 것이다. 설령 어떤 정치인을 본인이 찍지 않았어도 상관없다. 그 역시 유권자인 다른 국민들이 선출한 것이다. 정치판이 썩었다는 말은 정치인들이 썩었다는 뜻이고, 썩은 정치인은 썩은 국민이 뽑거나 개표자가 조작하는 것이다.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려 하는 저항 정신이 민주주의 국가를 구축하는 데 필수적이며 권력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국민들을 두려워하고 존중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하루아침에 저절로 생겨나지 않으며, 국민성의 자질도 저절로 갑자기 생겨나지 않고, 선진 민주주의 국민들의 국민성도 갑자기 뚝딱 생겨나지 않는다. 오랜 세월에 가축처럼 길들여져 온 나머지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할 생각 자체를 못 하는 민중은 여전히 노예보다 못한 가축으로 참혹하게 살아온 반면, 끝까지 부패한 권력과 부조리한 압제에 저항하며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온 민중들은 상식이 기능하는 건강하고 우수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게 되었다는 역사들을 결코 간과해선 안 된다. 프랑스만 하더라도 프랑스 혁명을 거쳐 무수히 많은 피를 뿌려가며 민중 스스로의 권리를 쟁취하고 지켜내려고 얼마나 처절하게 몸부림을 쳐왔는가? 아니, 대한민국에서도 4·19 혁명, 민주화 운동 등을 거쳐 얼마나 처절하게 몸부림을 쳐왔는가? 그러나 여전히 독재의 망령으로 인해 허우적거리는 열악한 국가들이나 국민들을 볼 때,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기 위해 부당한 권력과 폭정에 대항하려는 엄두 자체를 전혀 내지 않는다. 스스로 노력해야 얻을 수 있다는 자각 자체가 없는 국민은 참담한 독재자와 독재 세력의 암흑 공포통치 아래서 신음할 뿐이며, 자각이 있어도 나쁘면 엄두를 내는 척하면서 자신의 살 길을 심지어 약자들에게서도 지키려 애를 쓰기도 하고, 같은 민중끼리 싸우며 충성 경쟁을 할 수도 있으며, 그래서 독재 세력의 감투와 포상을 받기도 한다.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도 이 모습이 나온다. 잠깐만 이문열인데
정부의 형태를 놓고 어떤 사람이 민주 정치를 수립할 것을 요구하자 리쿠르고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가서 그대의 가정에 먼저 민주주의를 이룩하시오."
p.199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권」 중에서
한 마리를 물가로 끌고 와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듯, 아무리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 이념을 전달해도 국민성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이룰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고 하면 소용이 없다. 아무리 좋은 벼슬, 아무리 좋은 권리도 줘봐야 받는 입장에서 그게 좋은 것인지 뭔지도 못 구별하면 헛된 노력일 뿐인 것이다. 공산주의, 반자본주의가 실패한 원인이기도 하다. 오히려 그 권리를 같은 국민을 착취하는 데에 악용하면서 자신이 주장하는 민주주의를 스스로 짓밟을 수도 있다. 가정과 일반 사회, 나아가 온라인의 SNS 등에서도 민주주의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나, 정작 그곳들에서는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그곳에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권력자가 되어 국민들에게 복수할 위험도 있으며, 그런 사례가 ' 막장 부모' 문서에도 많다. 관련 속담으로 ' 곳간에서 인심난다'도 있다.

결국 오랜 세월에 얻어진 뼈아픈 경험과 노력을 통해 얻어진 것이고, 성숙한 국민성의 자질이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 정부를 가질 자격이 생기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관련 내용은 ' 문화 지체' 문서의 '시민 의식' 문단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각자도생, 먹고사니즘, 약육강식, 황금 티켓 증후군, 황금만능주의 관련 글.

6. 관련 문서


[1] 이걸 스스로를 비웃는다는 뜻인 자조(自嘲)로 오해하면 아예 뜻이 달라진다. [2] 그동안 잔잔하게 말하다가 여기서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거의 광기에 가깝게 연출되어 공포심을 자아낸다. [3] 그 역시 슈츠슈타펠 장성으로 나치 간부이니 불편한 진실을 모를 리 없다는 의미. [4] 그렇지 않고 남북한 지역이 국민성에서 큰 차이를 가졌다면 국민성 이론에 따라서 진작에 분단되고 각자 입맛에 맞는 정부를 수립하고 살았을 것이다. 오히려 남북한에서는 모두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세력과 평화적 통일을 추구하던 세력만 존재하였다. [5] 당장 미국부터 그렇다.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당시에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권력에 욕심을 품지 않고 모범적인 선례를 남겼기 때문에 민주적인 분위기가 정착할 수 있었다. 국민성 때문에 어차피 이루어질 민주주의였다면 워싱턴이 위인으로 추앙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6] 서양은 그나마 군권신수를 주장해서 민심을 덜 강조했다. 동양도 하늘의 뜻을 강조하긴 했으나, 민심 또한 중요한 요소로 봤다. [7] 원시 공산 사회-고대 노예제 사회-중세 봉건 사회-근대 자본주의 사회-현대 공산주의 사회로 5단계로 사회가 '발전'한다고 주장하는 설 [8] 당장 나치 독일도 마찬가지다. 나치당은 집권하기 전까지, 공정한 투표를 통해서는 절대로 단독 집권에 성공한 적 없다. 하지만 당시 프란츠 폰 파펜이나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등이 좌파를 견제할 목적으로, 나치당을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쓰기 위해 나치에게 권력을 주었다가, 도리어 통수를 맞은 것이다. 그 후에서야 나치는 장검의 밤등을 통한 반대파 숙청, 그리고 1930년대 2차대전 이전 집권기 대공황을 극복하는 면모 등을 보여준 후에야 우리가 아는 '나치를 열렬히 지지하는 독일인' 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또한 나치가 자신들에게 걸맞은 국민을 만든 결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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