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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저커버그/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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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유소년기2.2. 페이스북 설립2.3. 페이스북 설립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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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Meta Platforms의 CEO이자 의장인 마크 저커버그의 일대기를 서술한 문서.

2. 생애

2.1. 유소년기

1984년 유대계 미국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 에드워드 저커버그는 치과의사였고 모친 캐런 캠프너는 정신과 의사 출신이었기에 고소득 중산층인 전문서비스업계 집안에서 금전적으로 풍족하게 자랐다.[1] 따라서 당시에는 전문가와 괴짜 애호가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PC와 주변장치인 모뎀 둘 다 갖고 있었다.[2] 이러한 환경 덕분에 어려서부터 컴퓨터에 익숙해지며 뛰어난 재능을 보여, 이미 11살 때 부친이 사내 통신을 위한 인터넷 인터폰 프로그램을 구축할 당시 기계들을 연결해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한다.[3]

이후 아즐리공립고등학교를 다니던 저커버그는 고급반과 AP 과정이 명문대에 진학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느끼며 명문 보딩스쿨인 필립스 엑세터로 전학을 간다. 이곳에서 훗날 영혼의 콤비가 되는 애덤 디엔젤로와 친구가 되었으며 프로그래밍 기반 프로젝트[4]와 비디오 게임 외에도 수학과 과학, 고전 수업, 펜싱 등을 즐겼다고 한다.

2.2. 페이스북 설립

2002년 9월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디엔젤로와 앞서 개발한 Synapse-ai[5]를 비공식 출범시킨 것을 시작으로 과목 선택 공유 프로그램[6], 이상형 월드컵 프로그램[7], 온라인 스터디 프로그램[8] 등 각종 소셜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이후 2003년 11월 근신 기간 도중 디브야 나렌드라라는 학생의 제안으로 소개팅 기반의 커넥션 웹인 윙클보스 형제의 하버드 커넥션에 개발자로 참여했으나, 두 달이 채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소셜 기능이 탑재된 온라인 사진첩 아이디어를 차용하여 서비스를 독자적으로 개발하는데, 그것이 바로 페이스북이다.[9][10] 드디어 2004년 1월 Thefacebook.com으로 도메인을 등록하여 학부 기간 내내 진행해온 여러 소셜 프로젝트를 통해 축적한 교훈들[11]을 총망라한 사업이 시작되었다.

2.3. 페이스북 설립 이후

2004년 2월 대학생들을 대상[12]으로 더페이스북을 공식으로 출범시킨 이후 동년도 6월 피터 틸에게 첫 번째 외부 투자를 받은 뒤 사업을 본격적으로 확장시켰다.

2000년대에 폭발적인 성장을 거두었으며, 2008년에 이미 1억 유저를 달성했다. MTV, 야후 등으로부터 인수 제안을 받았으나, 전부 거절하고 독자적으로 계속 성장해 나갔다. 이 처럼 페이스북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매체와 사회, 정치 등 21세기 현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시대적 패러다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힘입어 저커버그는 2010년, 20대의 젊은 나이에 타임지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13]

2012년 기초물리학, 수학, 생명과학 분야의 발전에 대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유리 밀너, 래리 페이지, 앤 워치츠키 등과 함께 브레이크스루상을 설립했다.

2016년 필리핀 대통령 선거,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등을 통해 페이스북을 악용한 가짜뉴스 공작, 데이터브로킹, 개인정보 유출 등의 악재가 한 번에 터져나오자,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2017년 전미 경청 투어를 시작했다.

이후에도 크리스 와일리와 프랜시스 하우겐 등의 내부자고발로 인해 기업 이미지가 악화되자, 2021년 10월에는 메타버스 시장에 본격적으로 집중하겠다는 취지로 페이스북의 사명을 메타로 변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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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커버그의 부모님 둘 다 도시 외곽의 일반서비스업 노동자 계층 집안 출신이나, 전문서비스업자가 되면서 계층 이동에 성공한 케이스다. [2] 부친인 에드워드는 어린 시절 기술 업계 분야를 갈망했으나, 부모님의 권유와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전문서비스업 직종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치과의사였음에도 각종 치과 신장비들을 들여왔을 뿐만 아니라 직접 프로그래밍을 독학하여 환자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기도 했다고 한다. [3] 시드 마이어의 문명을 즐겼으며 이후 기초적인 코드를 독학한 뒤에는 가정교사로부터 매주 수업을 들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방과후 지역대학에서 관련 강좌까지 섭렵했다고 한다. [4] 디엔젤로와 함께 졸업 과제로 Synapse-ai라는 음악 자동추천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저커버그의 전기에 따르면 당시 코딩 실력이 더 뛰어났던 디엔젤로가 알고리즘을 짰고, 저커버그는 인터페이스를 만들며 역할을 분담했다고 한다. [5] 2003년 4월 슬래시닷에 Synapse-ai를 추천한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온 이후 꽤나 승승장구했으며 한 기업으로부터 인수 이후 3년간 근무한다는 조건으로 100만 달러의 제안을 받기도 했으나,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프로젝트를 접었다고 한다. [6] 코스 매치라는 프로그램인데, 하버드 웹에서 해당 학기 수업 목록을 추출한 뒤 가입한 학생들에 이름과 이메일, 신청 과목을 입력하게 한 뒤 이를 공유하는 방식이었다. [7] 페이스매시(facemash.com)라는 프로그램인데, 웹에서 저커버그가 속한 기숙사의 여학생 인명록을 끌어와 이들의 외모를 1:1 데스매치로 평가하는 방식이었다. 저커버그의 전기인 <메타 페이스북>에서는 해당 프로그램으로 인해 하버드 웹 트래픽이 심각한 문제를 겪었으며 표적이 되어 극단적인 선택을 한 학생까지 발생했는데, 저커버그는 이러한 인식 자체를 못하고 한낱 프로젝트이자 재밋거리 정도로 여겼다며 비판적인 서술을 취한다. 페이스매시로 인해 저커버그는 자문위원회에 소환되며 퇴학은 면했으나, 6개월 근신 처분을 받았다. [8] 각종 프로젝트를 하느라 학업에 소홀했던 나머지 '아우구스투스 황제 재위기의 회화와 유물 분석'이라는 고전수업 강좌에서 학점을 따기 위해 시험공부용으로 만들었으며 그 결과 해당 강좌에서 1등을 했다고 한다. [9] 저커버그가 필립스 엑세터 고등학교에 재학할 당시 크리스 틸러리라는 학생이 교내에서 사진 주소록 검색 프로그램을 '틸러리 페이스북'이라는 이름으로 출시한 적이 있는데, 페이스북이라는 사명을 여기서 가져왔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10] 한편 저커버그가 하버드 재학생인 윙클보스 형제의 하버드 커넥션과 애런 그린스펀의 하우스시스템 측과 온라인 상으로 거듭 교류하며, 이들의 아이디어를 페이스북에 차용한 것은 사실에 가까우나, 사실 이러한 방식의 소셜 웹 개념 자체는 이미 주류 대학가에 퍼져 각종 프로그램이 난무했으며 프렌드스터라는 전국구 흥행 서비스가 이미 존재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작정 아이디어 도난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경향이 있다. 아이디어 도난보다는 저커버그가 겉으로는 그들과 교류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흑심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비판을 가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11] 사용자들은 관련인들의 사소한 면면을 보고싶어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컨텐츠 및 데이터를 제공한다는 사실. [12] 이 당시에는 대학교 이메일로 인증된 사용자만 가입이 가능했다. [13] 세계화 가속화, 인간관계의 통합, 광고 시장 확장 등의 긍정적 평가가 있는 반면, 가짜뉴스 양산, 짙은 상업성, 고객 데이터 유출, 타인과의 비교 조장과 이로 인한 현대인의 우울증 심화 등 부정적인 평가도 동시에 받으며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