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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30 23:29:19

루이스 데 라 세르다

파일:루이스 데 라 세르다.jpg
성명 루이스 데 라 세르다
Louis de la Cerda
생몰년도 1291년 ~ 1348년 7월 5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사망지 프랑스 왕국 라모트뒤론
아버지 알폰소 드 라 세르다
어머니 브리엔의 마틸드
배우자 레오노르 데 구즈만, 기오트 뒤제스
자녀 루이스, 후안, 이사벨라
직위 클레르몽과 탈몽의 백작, 포르투나 공, 프랑스 해군 제독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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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스티야 연합 왕국 프랑스 왕국의 영주이자 프랑스 제독. 백년전쟁 시기에 프랑스 해군을 이끌고 잉글랜드 해군에 맞섰다.

2. 생애

조부 페르난도 데 라 세르다는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알폰소 10세의 장남으로, 왕위 계승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던 1274년 11월, 그는 아버지가 신성 로마 제국 독일왕이 되기 위해 독일로 떠났을 때 카스티야의 섭정이 되었다. 1275년 5월 마린 왕조 나스르 왕조와 손잡고 카스티야 왕국을 침공하자, 그는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1275년 6월 25일에 비야레알에서 병사했다.

알폰소 10세는 장남 페르난도의 아들 알폰소 데 라 세르다를 차기 국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차남 산초 4세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세비야 궁정에 유폐하고 자신이 카스티야 왕위에 오르면서 실패했다. 이후 알폰소 데 라 세르다는 왕위를 되찾기 위해 아라곤 왕국의 지원을 받으며 산초 4세와 산초 4세의 아들 페르난도 4세에 맞서 싸웠으나 끝내 실패했다.[1] 1305년,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4세는 아라곤 왕국과 엘체 조약을 체결해 평화를 이루었다. 이때 아라곤 왕국의 지원을 받으며 카스티야 왕위를 지속적으로 노렸던 알폰소 데 라 세르다는 카스티야 왕위 계승을 더이상 주장하지 않는 대가로 알바, 베야르 및 지브랄레온 일대의 영주권을 확보했다.

한편, 알폰소는 외 백작인 브리엔의 장 1세의 딸 마틸드와 결혼했고, 1303년에 카스티야군의 공세를 피해 프랑스에 일시적으로 피신한 뒤 프랑스 국왕 샤를 4세로부터 뤼백 남작위를 수여받았다. 그 후 알폰소 데 라 세르다의 후손들은 프랑스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알폰소 데 라 세르다의 장남이자 루이스의 형인 알폰소는 뤼넬 남작이자 파리 대주교를 역임했다.

루이스는 1291년경 프랑스 왕국에서 출생했으며, 1306년 카스티야 왕국의 무슬림군의 침략에 대항하는 변경군 사령관인 알폰소 페레즈 데 구즈만의 딸인 레오노르 데 구즈만과 결혼했다. 그는 이를 통해 데자, 엔시소 및 엘 푸에르토 데 산타마리아의 영주가 되었다. 1312년 알폰소 11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뒤 기사 작위를 받았다. 1333년 알폰소 11세가 지브롤터 공략 작전을 벌였을 때 일부 함대를 이끌고 해상 봉쇄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프랑스로 돌아간 루이스는 1338년 또는 1339년에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로부터 클레르몽 백작이자 탈몽 백작에 선임되었다. 필리프 6세는 클레르몽과 탈몽을 가스코뉴에서 프랑스 본토로 쳐들어오는 잉글랜드군을 저지하는 기지로 사용하고자 했고, 루이스에게 이 임무를 맡겼다. 1339년, 프랑스군은 릴을 방어하기 위해 그의 성인 탈몽에 주둔했다. 1340년, 슬로이스 해전에서 전사한 위그 키에레의 뒤를 이어 프랑스 해군 제독에 선임되었다. 그는 해군을 재건하기 위해 프랑스의 모든 항구에서 사용할 수 있는 선박을 총동원해 군함으로 개조했고, 새로운 선박을 건조했으며, 바스크 지방의 해안 주민들 사이에서 승무원을 모집했다.

1341년 3월 해군 제독직을 사임한 뒤 1342년 봄 샤를 드 블루아의 군대에 입대해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엔봉 시를 포위한 레온의 에르베에게 12개의 투석기를 보내줬고, 잉글랜드군이 개입하기 전에 가능한 빨리 함락시키려 했다. 수비대가 항복 의사를 밝히면서 목표를 달성하는 듯했다. 그러나 월터 매니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수비대가 항복하기 전에 도착하면서 항복은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 월터 매니는 잉글랜드 궁병대 300명을 이끌고 야밤을 틈타 성을 빠져나온 뒤 투석기를 지키고 있던 적병들에게 일제 사격을 가해 몰아낸 후 투석기들을 모조리 파괴하고 적진에 불을 지른 뒤 프랑스군의 추격을 회피하고 귀환했다. 결국 루이스는 군사 회의를 소집한 뒤 논의 끝에 엔봉 공략을 포기하고 오레를 포위하고 있던 샤를 드 블루아와 합세하기로 했다.

귀환 길에 오른 루이스는 디낭을 포위해 4일만에 수비대가 대장을 죽이고 항복하면서 무혈 입성했고, 상업도시 게랑드를 포위한 끝에 스페인과 제노바 용병들을 활용해 공략에 성공했다. 이때 많은 스페인과 제노바인이 도시를 약탈하던 중 교회 다섯 곳을 파괴하고 불태운 사건이 벌어졌다. 루이스는 이 사실을 샤를 드 블루아에게 알렸고, 샤를은 주범 24명을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루이스는 전리품을 싣고 게랑드를 떠나 여전히 오레 성 공략에 임하고 있던 샤를 드 블루아와 합류했다. 루이스는 약탈을 이어가기 위해 용병들을 이끌고 소형 함대에 몸을 실은 뒤 캉페를레로 이동해 약탈을 자행했다. 월터 매니는 이 소식을 접하자 엔봉을 떠나 루이스의 함대가 아직 해변에 있던 킹페를레를 급습해, 방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던 많은 선박을 파괴하고 약탈자들을 수색했다. 여기에 지역 농민도 월터 매니에게 가세해 루이스의 군대를 패주시켰다.

루이스는 이때 중상을 입고 도주한 뒤 렌에서 회복했고, 6주 후에 샤를 드 블루아와 합세한 뒤 엔봉을 재차 공략하려는 샤를의 원정에 가세했다. 엔봉 수비대가 자신을 향해 조롱을 퍼붓자, 그는 이에 분노했다. 연대기 작가 장 르 벨과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봉사에 대한 보답을 해주길 부탁했고, 샤를 드 블루아는 어떤 요청이든 받아들이겠다고 답했다. 이에 그는 포로로 잡힌 2명의 잉글랜드-브르타뉴 기사인 장 르 부테이예르와 휴베르 드 프레네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을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난 뒤 성벽 앞으로 데려가서 참수하겠다고 밝혔다. 샤를 드 블루아는 이에 화들짝 놀라 두 사람은 무어인이 아니라 기독교인이라며 만류했지만, 루이스가 "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군대를 즉각 떠나겠다"라고 위협하자 침묵했다. 그러나 사전에 샤를 진영에 숨어있던 첩자로부터 이 정보를 입수한 월터 매니가 일부 부대로 하여금 적의 시선을 잡아끌게 한 뒤 빈 숙영지를 급습해 두 기사를 탈환했다고 한다.

이후 2번째 엔봉 공방전에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장 드 블루아는 엔봉 공략을 포기하고 쥐공으로 이동했고, 그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카레로 이동해 그곳에서 잉글랜드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건지 섬 인근에서 잉글랜드 함대를 습격하여 4척의 배를 나포한 프랑스 함대에 병력과 물자를 제공했다. 그는 4척의 배에 들어있던 물자를 대거 가져가면서 큰 부자가 되었다.

그 후 루이스는 휴전이 맺어지면서 백년전쟁이 중단된 틈을 타 카나리아 제도로 눈길을 돌렸다. 당시 카나리아 제도는 1336년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4세의 후원을 받은 제노바 상인들에 의해 발견되고 1341년 지형 조사를 위한 탐험이 이뤄진 이래 많은 유럽 상인들의 관심을 받았다. 유럽인들은 이곳에 사는 관체족을 잡아들인 뒤 노예로 판다면 막대한 수익을 챙길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루이스는 그 전에 움직이기로 마음먹고, 아비뇽에 있던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카나리아 제도를 정복하고 관체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겠다고 제안했다. 교황은 이에 혹해 1344년 11월 15일 교령 <Tuae devotionis Sinceritas(당신의 헌신의 진실성)>을 공표해 루이스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카나리아 제도의 영구적인 권한을 부여했으며, 포르투나 공이라는 칭호와 주화 주조 및 기타 왕실 특권에 대한 부수적인 권리를 수여했다. 루이스는 그 대가로 관체족을 개종시키고 매년 성 베드로와 바울 축일(6월 29일)에 납부해야 하는 400 금 플로린을 교황청에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1345년 1월 클레멘스 6세는 교령 <당신에게서 온 믿음(Prouenit ex tue)>을 공표해 루이스의 원정을 십자군으로 선포하고, 여기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면죄부를 부여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포르투갈, 카스티야, 아라곤, 프랑스, 시칠리아, 비엔, 제노바의 통치자들에게 루이스의 직함을 인정하고 루이스의 웜정에 물질적 지원을 제공하라고 요청했다. 아폰수 4세는 카나리아 제도는 자기들이 먼저 발견했는데 어째서 루이스의 소유가 되느냐며 반발했고,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1세도 카타니라 제도는 본래 서고트 왕국의 영토였으며, 교회가 레콩키스타를 벌이는 자국에 준 특권에 의거해 카나리아 제도는 카스티야 왕국의 관할권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루이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아라곤 왕국으로부터 갤리선을 제공받기로 약속받고 원정을 준비했지만, 1346년 백년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 왕실을 위해 군 복무를 재개하면서 카나리아 원정이 보류되었다. 그는 노르망디 공작이자 왕위 계승권자인 의 군대에 들어가 에기용 공방전에 참여했다.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그는 이 공방전에서 에기용 성벽을 타고 올라가며 용맹을 떨쳤다고 한다. 그러나 에기용 공략은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1348년 7월 5일 라모트뒤론에서 사망했고, 랑그독의 생질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당대 사람들은 끝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알폰소 데 라 세르다를 계승하지 않은 자라는 의미의 '엘 데세레다도(el Desheredado)라는 별칭으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