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262626><colcolor=#fff> 로이 뷰캐넌 Roy Buchan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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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르로이 뷰캐넌 Leroy Buchanan |
출생 | 1939년 9월 23일 |
미국 아칸소 주 오자크 | |
사망 | 1988년 8월 14일 (향년 48세) |
미국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 | |
직업 | 싱어송라이터, 기타리스트, 이발사 |
장르 | 블루스, 블루스 록, 일렉트릭 블루스, 로큰롤, 로커빌리, 컨트리, 재즈 |
활동 | 1955년 ~ 198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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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타는 마음이고 성격이다. 기분이 울적할 땐 기타도 울적하고 기쁠 땐 기타도 노래를 한다. 자기의 마음 기분을 잘 반영할 줄 아는 연주인이 결국은 끝까지 남는 법이다.
로이 뷰캐넌
1960~
80년대의 전설적인
블루스 기타리스트, 가장 위대한 무명의
백인
블루스
기타리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전설적인
블루스 명연
The Messiah Will Come Again 의 주인공이고 숨겨진 명반 《You're Not Alone》의 〈Fly.. Night Bird〉 같은 소름 돋는 연주를 위시하며 많은 명곡을 남겼다.로이 뷰캐넌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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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의 로이 뷰캐넌 |
로이는 14살 때엔 이미 여러 곳을 떠돌아 다니며 재즈 기타리스트들과 교류하는 수준에까지 와 있었으며 얼마 후 로이 뷰캐넌은 〈Suzie Q〉로 잘 알려진 데일 호킨스를 만나 그의 백 밴드에서 3년 정도 일하게 되었다. 이 때 데일 호킨스 밴드에서 활동하며 명성을 쌓음과 동시에 데일 호킨스의 동생이었던 로니 호킨스와 함께 캐나다로 넘어가 그곳에서도 큰 인기를 얻으나, 곧 밴드를 탈퇴한다. 1960년에는 자신의 공연을 좋게 본 주디 오웬스라는 여성 관객과 교제하게 되었으며, 약 1년 뒤 이 둘은 결혼하여 곧 워싱턴 D.C.로 이주한다.
1964년부터 1968년에는 비틀즈를 시작으로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시작되었고, 더 후, 지미 헨드릭스같은 거장들이 출연하며 미국은 음악적으로 급격한 태동의 시기를 겪던 때였다. 로이 뷰캐넌은 비록 무명이었으나, 여러 공연들에서 이러한 곡들을 연주하고, 스타일을 적용시켰으나, 지미 헨드릭스의 공연을 직접 관람한 뒤, 그들과 대등해질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다시 본인이 가장 잘하는 '미국적'인 연주 스타일로 되돌아온다. 이러한 경험들은 이후 그가 만들어낸 특유의 스타일의 근원이 된다. 그러는 한 편, 그는 가족들을 부양할 몸이 되어있었고, 잠시 생업을 위해 기타 연주를 그만두고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한 이발 기술들을 배우기 시작한다.
1960년대 후반이 되어서 어느정도 여유가 생겼는지 그는 다시 기타를 잡는다. 이맘 때 즈음 그는 브라이언 존스의 사망으로 새로운 기타리스트를 필요로 하던 롤링 스톤스에게 자신들과 함께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이를 거절한다.
1970년대로 접어들자 로이는 기타리스트로 점차 명성을 얻어가 PBS에선 그의 연주를 담은 다큐멘터리 필름을 방영하기도 했다. 여기서 나온 '가장 유명한 무명의 기타리스트'는 그의 가장 상징적인 이명이 된다. 추후 이것이 계기가 되어 로이는 폴리도르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셀프 타이틀의 데뷔앨범 《Roy Buchanan》을 발표하였다. 1972년에 발표된 이 데뷔앨범에는 The Messiah Will Come Again같은 전설적인 명연이 수록되었다. 다만 이 곡이 본작의 모든 것이라고 이야기 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이 곡과는 상반된다 느껴질 정도로 컨트리 색이 짙은 앨범이다. 해당 앨범은 높은 평가를 받으며, 그의 연주에 감동한 영국의 기타리스트인 제프 벡은 자신의 앨범 《 Blow by Blow》에 〈Cause We've Ended As Lovers〉라는 곡을 수록하여 로이에게 헌정하였다. 로이 뷰캐넌 역시 제프 벡의 이러한 헌정에 답하기도 하였다.
1980년에는 경찰과의 다툼 끝에 구치소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생존하였다.[1] 1985년에는 When a Guitar Plays the Blues로 그래미 어워드 최고의 블루스 앨범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일본, 호주등을 투어하는 등 활동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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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8월 7일에 찍힌 그의 사진. 사망 단 1주일 전에 찍힌 사진이다. |
3.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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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텍사스 오스틴에서의 The Messiah Will Come Again 라이브 |
그의 명연인 The Messiah Will Come Again은 블루스 넘버의 가장 대표적인 연주곡 중 하나가 되어 게리 무어같은 후대 거장들이 헌정 연주를 하기도 하였다.
4. 사용 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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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Fender Telecaster | Fritz Brothers Bluesmaster[3] |
1987년부터 사망 직전까지는 그 전까지 사용하던 텔레캐스터를 은퇴시키고 Fritz Brothers라는 미국의 소규모 공방에서 제작한 텔레캐스터형 기타인 Bluesmaster를 잠시 사용하였다.[5] 로이 뷰캐넌이 본인이 개발에 함께 참여하였으며, 내쉬빌 텔레캐스터처럼 세 개의 EMG 액티브 싱글 코일 픽업을 장착하였고, 금속 재질로 된 너트를 장착하여 강한 밴딩과 비브라토를 자주 사용하던 로이 뷰캐넌의 연주 습관에 최적화된 구성으로 고안되었다.
1992년에 촬영된 그의 기타들 #
[1]
실제 이러한 경력 탓에 그의 가장 유력한 사망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2]
그가 실제 본인의 의사로 자살했는지는 여전히 의혹이 있다. 사망 당시 그의 후두부에는 큰 상처가 있었는데, 이를 근거로 그가 경찰에 연행되기 전 누군가와의 시비로 인한 폭행을 당하여 사망했다는 설과, 자신을 연행하고 감금한 경찰관에게 폭행당한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일단 현재까지 그의 공식 사망 원인은 자살이다.
[3]
실제로 그가 사용하였던 악기는 아니며, 같은 회사에서 만든, 게리 무어가 소유하고 있던 거의 동일한 스펙의 제품이다.
[4]
커리어 초기에 사용하던 깁슨 할로우 바디 기타와 교환하여 얻게 되었다고 한다.
[5]
로이는 그 전까지 사용하던 펜더 텔레캐스터를 여러 번 도난당할 뻔 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때문에
레스폴이나
스트라토캐스터같은 여러 기타 모델들을 시험해보았으며, 최종적으로는 본인과 가장 잘 맞는 기타를 만들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