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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20:29:07

랄피 비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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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부(Ministério da Ciência e Tecnologia) (1985~1989)
초대
헤나투 아르세르
2대
루이스 엔히키 다시우베이라
3대
루이스 안드레 히쿠 비센치
4대
랄피 비아시
5대
호베르투 카르도수 알베스
개발상공사무국으로 통합 (1989)
과학기술특별사무국(Secretaria Especial da Ciência e Tecnologia) (1989)
6대
데시우 레아우
(1998~1990)
과학기술사무국(Secretaria da Ciência e Tecnologia) (1991~1992)
7대
주제 골덴베르그
8대
에지송 마샤두 지소우자
9대
엘리우 자구아리비
과학기술부(Ministério da Ciência e Tecnologia) (1992~2011)
10대
주제 이스라에우 바르가스
11대
루이스 카를루스 브레세르-피레이라
12대
호나우두 사르덴베르그
13대
호베르두 아마라우
14대
에두아르두 캄푸스
15대
세르지우 마샤두 헤젠지
16대
알로이지우 메르카단치
과학기술혁신부(Ministério da Ciência, Tecnologia e Inovação) (2012~2016)
17대
마르쿠 안토니우 라웁
18대
클레리우 캄포닐라 디니즈
19대
알두 헤벨루
20대
셀수 반세라
직무대행
에밀리아 마이라 시우라 히베이루 쿠리
과학기술통신혁신부(Ministério da Ciência, Tecnologia, Inovações e Comunicações) (2016~2019)
21대
질베르투 카삽
22대
마르쿠스 폰치스
과학기술부(Ministério da Ciência, Tecnologia e Inovação) (2022~)
23대
파울루 세사르 알빔
24대
루시아나 산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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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제4대 과학기술부장관 랄프비아시.jpg
국적 브라질 파일:브라질 국기.svg
출생 1947년 10월 11일
브라질 마라냥주 상루이스
사망 2017년 8월 4일 (향년 69세)
브라질 상파울루주 상파울루시
학력 상파울루 대학교 종합기술대학 (토목공학 / 학사)
경력 Rawa Engenharia 과장 (1970~1972)
상파울루주 아메리카나 시장(1973~1977)
Unicasa Construtora Ltda 이사 (1977)
Comercial e Construtora Eical Ltda 이사 (1977)
오사스코-상파울루통합위원회 의장 (1978)
제46,47,48대 브라질 대의원
상파울루주 과학기술사무국 국장(1987)
상파울루주정부 과학기술부 장관
제 4대 브라질 과학기술부 장관
정당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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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 민주운동당 소속의 정치인이자 공학자. 3선 대의원이며, 제4대 과학기술부 장관을 역임했지만, 후술할 논란으로 과학기술부를 갈아엎게 만든 장본인이 되어버렸다.

2. 생애

1947년 상파울루주 아메리카나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학창시절 상파울루 대학교의 폴리테크닉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다. 졸업 이후 아메리카나로 돌아와 작은 건설회사의 과장으로 커리어를 시작했으나, 1972년 브라질 군부독재가 한창이던 시기 민주화운동에 사활을 걸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브라질민주운동에 입당했다.

브라질민주운동 아메리카나지역대표로 선출되었고 1972년 지방선거에서 자신의 고향인 아메리카나 시장에 당선되면서 발걸음을 떼었다.[1] 4년간의 재직기간동안 브라질의 군부독재당인 중앙정부의 ARENA는 지방정부에 사사건건 개입하였는데, 이때마다 랄피는 그들을 설득해 여러 건설 프로젝트를 따내는 등 젊은 나이네 비해 정치적 식견이 두텁다는 것을 증명했다.

1977년 아메리카나 시장자리에서 내려오고난 이후 여러 민간건설기업의 이사로 활동하기도 했고 상파울루 인근의 위성도시 오사스코의 도시계획위원회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78년 출사표를 던져 브라질민주운동소속 상파울루지역구 브라질 대의원에 당선되었고 처음으로 중앙정부에 입성했다. 곧 양당주의가 폐지되고 정당활동이 정상화되자 브라질민주운동의 후신인 브라질민주운동당에 합류해 정치생활을 이어나갔다. 특히 젊은 에너지를 이용해 광산에너지분야, 경제산업분야, 상업분야 등 여러 중요한 위원회에 동시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외국의 기술발전사례 등을 전수받기 위해 1980년부너 2년동안은 거의 브라질에 머문 적이 없었다.

브라질 민주화가 가까워지자 랄피는 브라질의 유력한 민주화인사 율리시스 기마랑이스를 지지하면서 1982년 재선에 성공했다. 초선의원때와 마찬가지로 경제산업위원회에서 열심히 활동하였다.

1984년 율리시스 기마랑이스를 필두로 그의 지지자들과 대통령 직선제를 위한 수정안을 통과시키는데 노력하였지만, 근소한 차이로 부결되어 민주화의 숙원이 한걸음 멀어져버렸다. 대통령후도로 탄크레두 네베스를 지명하여 선거내내 그를 지지했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탄크레두가 대통령직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1987년 무난히 3선에 성공했고, 드디어 민주화를 맞은 브라질의 개헌의회가 출범하는데 힘을 쏟았다. 노련한 3선 의원답게 이번엔 노동계쪽으로 시선을 돌려 최저임금보장, 부당해고방지법 제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88년 상파울루 주정부의 부름을 받고 의원자리를 휴직한 뒤 상파울루 주정부의 과학기술국장이 되었다. 이때 상파울루 동부권역에 노동자계층을 위한 직업대학을 고안해냈고, 일부 부실대학등을 통합하는 작업을 주로 수행했다. 랄피를 주 정부로 부른 사람은 53대 상파울루주지사를 지낸 오레스테스 케르시아인데, 오레스테스주지사는 대통령 조제 사르네이와 매우 각별한 관계였다. 상파울루 주정부에서 이룬 랄피의 업적은 당연히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되었고, 마침 모종의 사연으로 공석이 된 과학기술부 장관에 랄피 바이시를 임명하기에 이른다.

1988년 8월 제4대 과학기술부 장관이 되었을 때 브라질은 과학보다는 경제에 더 집중해야 할 시기였다. 인플레이션의 전운이 감돌고, 긴축정부체제로 돌어서는 와중이었다. 랄피는 과학기술부의 예산을 10%나 삭감하고, 1951년부터 브라질 과학기술개발에 지대한 공헌을 해온 국가과학기술개발위원회를 폐지하는 시도를 보이는 등 예산감소 측면에만 초점을 맞춘 강경책을 내세웠다.

하지만 과학계의 큰 반발을 사게 되었고 랄피 바이시는 그 책임을 물어 1989년 장관직을 사임했다. 이후 과학기술부는 역할이 매우 축소되어 1992년 장관급기관으로 격상되기 전까지 대통령직속의 사무국으로 남아있게 된다.

이후 조용한 말년생활을 보내다 2017년 폐기종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1] 당시 그의 나이는 고박 25살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