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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부(Ministério da Ciência e Tecnologia) (1985~1989) | |||
초대 헤나투 아르세르 |
2대 루이스 엔히키 다시우베이라 |
3대 루이스 안드레 히쿠 비센치 |
4대 랄피 비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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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호베르투 카르도수 알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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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상공사무국으로 통합 (1989) | ||||
과학기술특별사무국(Secretaria Especial da Ciência e Tecnologia) (1989) | ||||
6대 데시우 레아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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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1990) | ||||
과학기술사무국(Secretaria da Ciência e Tecnologia) (1991~1992) | ||||
7대 주제 골덴베르그 |
8대 에지송 마샤두 지소우자 |
9대 엘리우 자구아리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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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부(Ministério da Ciência e Tecnologia) (1992~2011) | ||||
10대 주제 이스라에우 바르가스 |
11대 루이스 카를루스 브레세르-피레이라 |
12대 호나우두 사르덴베르그 |
13대 호베르두 아마라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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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에두아르두 캄푸스 |
15대 세르지우 마샤두 헤젠지 |
16대 알로이지우 메르카단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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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혁신부(Ministério da Ciência, Tecnologia e Inovação) (2012~2016) | ||||
17대 마르쿠 안토니우 라웁 |
18대 클레리우 캄포닐라 디니즈 |
19대 알두 헤벨루 |
20대 셀수 반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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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무대행 에밀리아 마이라 시우라 히베이루 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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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통신혁신부(Ministério da Ciência, Tecnologia, Inovações e Comunicações) (2016~2019) | ||||
21대 질베르투 카삽 |
22대 마르쿠스 폰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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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부(Ministério da Ciência, Tecnologia e Inovação) (2022~) | ||||
23대 파울루 세사르 알빔 |
24대 루시아나 산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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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브라질 |
출생 | 1922년 7월 10일 |
브라질 마라냥주 상루이스 | |
사망 | 1996년 6월 20일 (향년 73세) |
브라질 상파울루주 상파울루시 | |
학력 | 해군사관학교 (졸업) |
경력 |
해군 중령 제40,41,42대 브라질 대의원 마라냥주 부지사 (1950~1955) 국제원자력기구브라질 대표(1956~1958) 브라질 외무부 외무차관 (1961~1962) 브라질 민주운동당 창립 초대 브라질 과학기술부 장관 (1985~1987) 제8대 브라질 사회보장부장관(1987~1988) 브라질통신회사 회장 (1992~1994)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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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의 군인이자 정치인. 초대 브라질 과학기술부 장관이었다.2. 생애
마라냥주 주지사 세바스치앙 아르세르 다시우바(Sebastião Archer da Silva)의 아들로 태어난그는 어렸을 때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는데, 아버지의 권유로 1941년 해군사관학교에 입대하였고, 곧 아버지가 주지사로 있는 마라냥주에서 첫 공직생활을 시작했다.[1]그의 아버지는 헤나투에게 정치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마라냥 주지사 자리를 자신의 정치적 동료인 사회민주당[2]소속 유지니우 바호스가 주지사에 도전하길 원했고, 런닝메이트인 부지사 후보로 자신의 아들인 헤나투를 추천했다. 헤나투는 덕분에 1950년 12월 마라냥주 부지사로 공직에 입문하였다.
1954년 브라질 대의원선거에서 그는 사회민주당소속으로 마라냥주 지역구에 선출되었고, 다음해 4월에 해군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운좋게도 사회민주당엔 강력한 대권주자인 주셀리누 쿠비체크가 속해있었고, 헤나투는 친 쿠비체크 의원들의 모임인 Ala Moça소속으로 그를 열정적으로 지지했다.1955년 브라질 대통령선거에서 쿠비체크가 당선되자 헤나투의 당내 입지가 굳어졌다. 1956년 부지사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당시 쿠비체크가 극성적으로 강조하던 브라질 인프라 개발을 위해 브라질원자력조사위원회소속으로 활동하는 데 매진했다. 그 결과 국제원자력기구가 출범하는 때에 맞추어 쿠비체크느느 헤나투를 브라질 대표로 임명했으며, 이후 2년동안 활동하게 된다.
1958년 브라질 대의원선거에서 브라질 노동당 소속으로 마라냥지역구에 출마해 재선에 성공하였고, 1962년 주앙 굴라르정권에서 외부무 외무차관[3]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1964년 군사쿠데타로 내각의 입지가 흔들리자, 외무부를 떠나 1965년 치러질 지방선거에서 마라냥 주지사자리를 놓고 조제 사르네이와 경쟁했는데 득표율은 3위에 그쳐 낙선하였다. 이후 1965년 10월 27일 군사정권에 의해 발효된 제도법 제 2호[4]에 의해 브라질 노동당이 해산되자, 원내에 유일한 야당인 브라질민주운동으로 당적을 변경하여 1966년 브라질 대의원선거에 도전했다.
점점 더 심해지는 여당의 정치적 박해에 주앙 굴라르, 주셀리누 쿠비체크, 카를루스 라세르다 등의 영향력있던 인물들을 다시 정계에 복귀시키려는 조직인 광역전선을 조직해 정치민주화 운동에 힘썼다. 안타깝게도 제도법 5호가 발령되었는데, 헤나투가는 민주화에 몸을 담았다는 이유로 대의원에서 해임되었고, 10년간 정치적 권리를 박탈 당했다. 암암리에 공직생활을 이어가려 했지만, 1970년 체포되어 약 한달간 행방불명되는 일이 있었는데, 그 이후 헤나투는 민간부문에 몸을 담아 민주화운동을 지속해왔다.
10년의 참정금지기간이 끝나자마자 1978년 민족민주화전선에 참여하여 활동을 재개했고, 곧 양당주의가 종식되면서 브라질 민주운동당을 창당해 다시 정계로 돌아왔다. 지난 마라냥 주지사 선거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다시 도전했으나, 사회민주당의 루이스 로샤에게 패배해 낙선했다.
이후 자신의 이전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조제 사르네이가 부통령 후보였음에도 런닝메이트인 탄크레두 네베스 선거캠프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하였고, 우연히도 탄크레두 네베스가 건강상의 이유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자, 조제 사르네이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는데 덕분에 초대 과학기술부장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이타마르 프랑쿠정권에서는 EMBRETAL[5]이란 브라질 국영통신회사의 회장으로 재임했다.
1995년 건강상의 이유로 국영통신회사 사장자리를 내놓은 헤나투는 상파울루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96년 사망했다.
3. 여담
그의 이름을 딴 헤나투아르세르정보기술센터[6]가 상파울루시 인근 캄피나스시에 위치해 있다.
[1]
당시까지만 해도 브라질에선 군인신분으로 정치적 활동이 가능했기에, 이후 1961년 자연스럽게 예편될 때까지 그는 해군소속이었다.
[2]
사회민주당(PSD)이라는 정당이 브라질 사회민주당(PSDB)과 따로 존재하는데 서로 다른 정당이다. 참고로 PSD도 이름과 달리 보수정당인 민주당(DEM)에서 갈라져 나온 우파 정당이다.
[3]
당시 브라질 외교라인에서 대통령,외무부장관에 이어 다음가는 자리였다.
[4]
다당주의 금지, 간접선거제 실시, 지방정부에 대한 연방정부의 개입강화
[5]
현재 민영화되어 브라질 통신 BIG 3사인 CLARO소유의 기업이 되었다.
[6]
Centro de Tecnologia da Informação Renato Archer, 브라질 산업수요를 주제로 하여, 시장이 요구하는 기술을 개발하는데 주력하는 브라질정부 산하기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