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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01:18:37

동팡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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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前 축구 선수
파일:dong.jpg
이름 둥팡줘
董方卓 | Dǒng Fāngzhuó
출생 1985년 1월 23일 ([age(1985-01-23)]세)
랴오닝성 다롄시
국적
[[중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82cm | 체중 74kg
직업 축구 선수 ( 스트라이커 / 은퇴)
소속 선수 다롄 싸이더룽 (2000~2001 / 유스)
다롄 싸이더룽 (2002)
다롄 스더 (2002~200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04~2008)
로열 앤트워프 FC (2004~2006 / 임대)
다롄 스더 (2008~2010)
레기아 바르샤바 (2010)
포르티모넨스 SC (2010~2011)
미카 FC (2011)
후난 샹타오 (2012~2013)
허베이 종지 (2014)
국가대표 파일: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3경기 1골 ( 중국 / 2005~2008)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평가5. 오해6. 비슷한 경우7.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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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의 前 축구 선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 입단한 아시아 최초의 선수이다.[1]

영국 언론들이 이름의 병음 표기인 Fangzhuo를 Fangzhou로 자주 잘못 쓴 탓에[2] 주로 영문 기사를 번역해서 보도하는 한국에서도 '동팡저우'라고 알려졌지만 '둥팡줘'로 쓰는 것이 맞다. 심지어 맨유 공식 프로필에서도 오타로 기재되었다.

2. 클럽 경력

2.1. 다롄 스더

2000년에 U-17 축구 월드컵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그는 2002년에 다롄 싸이더룽에 입단하고 다롄 싸이더룽의 갑B 리그( 중국 갑급 리그의 전신)의 우승을 도왔다. 이 계기로 실력이 인정되어 U-23 축구 국가대표팀이 되고, 2004년에는 중국 슈퍼 리그의 명문 구단이었던 다롄 스더[3]에 입단하였다.

알려진 바와는 달리 둥팡줘는 중국에서도 유망주로만 평가받았을 뿐, 포텐을 터트린 적은 없다.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중국리그를 씹어먹고 유럽가서 벤치행이라는 이야기는 잘못 알려진 이야기이다. 2002년 프로데뷔후 다롄 싸이더룽 시절에도 19경기 출장에 2골 넣은 것이 전부였고, 유럽 진출 직전인 2003년 다롄 스더에서는 8경기 출장해서 한 골도 넣지 못했다. 이 당시 다롄 스더는 중국 리그 최강팀이었기 때문에, 둥팡줘는 주전으로 출장 기회를 잡기가 힘들었다.

2.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입단

이렇듯 중국에서의 활약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2004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게 된다. 결국 맨유에서 최초의 아시아 선수이자 동시에 중국 선수가 되었다. 맨유에 입단할 수 있었던 이유는 EPL이 중계권 및 굿즈로 중국에서 엄청난 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에 마케팅적인 측면이 컸겠지만, 선수 자체의 성장 가능성도 나름대로 염두에 뒀을 것이다.[4]

하지만 국가대표 경력이 적어서, 프리미어리그에선 유독 얻기가 까다로운 취업비자를 받지 못해서 벨기에 프로리그 로열 앤트워프 FC[5]로 임대된다. 이 시점까지만 해도 실력이 너무 노답이라 보냈다기보단 아예 뛰질 못하니 일단 출전기회를 보장해 줘서 실력 키우라고 벨기에로 보낸, 흔한 유망주 테크트리였다.

사실 둥팡줘의 당시 나이를(만19세) 보면 성장을 위해 하위리그로 임대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역사에 남을 만큼 역대급 천재가 아닌 이상 이 나이에 빅리그, 그것도 빅클럽에서 덜컥 주전이 된다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더 나아가 20대 초반이 되어도 임대를 전전하는 선수들이 있는만큼 20세도 아닌 유망주가 영입과 동시에 임대를 가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당시 여러 여건상 인터넷 상에 퍼지는 정보들은 필터링을 제대로 거치지 못한 것이 많고, 매우 단편적인 내용들이 많아 워크퍼밋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당장 최근까지도 동팡저우로 기억할만큼 이름도 잘못 알려졌었고, 중국 리그에서의 기록조차 제대로 알 수 없이 뜬 소문처럼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어렴풋이 아는 축구 팬들에겐 이런 속사정에 대해 알려지기 어려웠고 그저 실력이 부족해 임대를 간 것으로 보였다. 이후의 행보를 생각하면 맨유에서 뛰기엔 애초에 부족했던 것이 맞긴 하지만, 이때의 임대 자체는 합당한 것이었다.

2015년 퍼거슨 감독이 저술한 서적 '리딩'에 당시 04/05 시즌을 앞두고 회의자료가 담겨 있는데 동팡줘에 대해선 '검증 안됨(Unknown Quality)' 과 '취업비자 문제'가 적혀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베베처럼 퍼거슨이 보지 않고 영입한 선수로 보이며 취업비자 문제도 무시하고 영입한 선수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참고로 박지성의 경우 취업비자 문제로 이적 자체가 물건너 갈 뻔 했으나 맨유 구단과 박지성의 매니지먼트사가 나서서 해명 자료를 준비하고 유력한 전문가들[6]의 추천서까지 제출하여 취업비자가 발부된 바 있다. 동팡저우 본인의 잠재력이나 기대치에 대한 평가는 어느 정도 갈리고 최근엔 동정론도 있지만, 애초에 감독이 원하던 선수도 아닌데 팀이 마케팅을 주 목적으로 덜컥 영입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려져버렸기에 여러모로 체면을 구긴 케이스.

2.3. 로열 앤트워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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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벨기에 1부에 있던 앤트워프에서는 03-04 시즌 후반기에 출전하여 9경기 출장 1골을 넣는 등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는데, 앤드워프는 2부로 강등되고 만다. 하지만 벨기에 2부에서는 포텐을 터트리면서 04-05 시즌에는 19경기 출장 6골, 05-06 시즌에는 28경기 출장 18골을 넣었다. 이때 그는 벨기에 2부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7]

심지어 이 중에는 해트트릭도 두 번이나 있었으며[8], 그래서 로열 앤트워프에서는 둥팡줘를 팀의 레전드로 생각했다고 한다.

앤트워프에서의 06-07 시즌에서도 반 시즌 동안 14경기 출장 10골을 넣는 등 골넣는 감각은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리그 수준을 감안해도 거의 1.5경기당 1골이라 매우 우수한 성적이다.

결국 벨기에에서 4개 시즌 동안 71경기 출전해서 34골을 넣었고, 벨기에에서의 활약으로 다시 원소속팀인 맨유로 복귀했다.

2.4. 맨유로 복귀

이후 2006년에야 EPL 워크퍼밋이 나왔고, 맨유는 둥팡줘를 불러들였다. 둥팡줘는 벨기에 2부에서 보여준 활약을 높이 평가한 구단측과 3년 6개월 계약 350만 파운드(약 60억)에 정식 계약했다.

프리 시즌 남아공 투어 경기 카이저 치프스 FC전에 후반 38분, 결승골을 넣어 승리의 일등공신이 된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둥팡줘에 대해 "빠르고 체력이 좋다."라고 덕담. 앤트워프에서 2007년 1월 맨유로 복귀했고 등번호는 21번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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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 감독과 함께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벨기에 2부 리그에서 잘했다고 당대 최강의 팀이던 맨유에서 자리잡긴 어려웠고, 그다지 활약을 보이지 못하면서 결국 후보만을 전전했다. 맨유로 돌아온 시기도 한창 경쟁하기 바쁜 겨울 이적 시장이었고, 이럴 때 유망주나 후보에 불과했던 둥팡줘가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었다.

게다가 2007년 3월 14일, 유럽연합과의 친선 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4:3으로 리드하고 있는 후반 90분 추가시간에 앤드루 콜의 패스를 받은 둥팡줘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들어가는 공을 골키퍼한테 주는 어이없는 실책을 저지른다. "13억 인민 좌절슛"이라는 치욕적인 슛으로 불린다. 친선 경기였기에 사실 별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안 좋은 의미로 눈도장을 찍은건 확실한 상황이었다.

또한 유일한 EPL 출장기록인 2006-07 시즌 첼시와의 원정 경기[9]에서 선발 출전했지만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고, 본인은 평점 5점밖에 받지 못했다. 이후 2007-08 시즌도 스쿼드에 포함되었으나 리그 경기는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고, 리그컵 1경기와 UEFA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6차전 AS 로마와의 경기에 교체 출전하여 시즌 총 2경기 출전에 그쳤고 남은 시즌을 리저브에서만 보내다가 2008-09 시즌이 시작되기 직전,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부상으로 스쿼드에서도 사실상 제외되고 등번호도 하파엘 다 실바가 가져가며 없는 선수 취급 받다가 8월 계약해지로 팀에서 방출된다.

그리고 맨유 시절의 활약이 미미한 탓에 다롄 스더는 이적료 50만파운드 전액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환불했다. #기사

2.5.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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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3일 창사 진더(현재 광저우 푸리)전에서 안정환(30번)의 결승골에 간만에 어시스트하고 기뻐하는 둥팡줘(9번). 다롄 스더의 1-0 승리.

다롄 스더에 복귀했으나, 유리몸이었기 때문에 죽은 폼은 돌아오지 않았고, 계속 잔부상에 시달렸다. 마침 2009년 다롄에 입단해서 박성화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안정환과 함께 투톱으로 자주 나섰으나, 다롄에 있던 2008년과 2009년 결국 한골도 기록하지 못하고[10] 다롄에서도 방출되었다. 이때 축구선수로서는 한창인 20대 중반이었으나, 다롄 스더에서조차 거의 활약을 못했기 때문에, 중국 구단들조차 퇴물취급하며 아무도 찾지 않았고, 둥팡줘는 선수생활을 이어가기 위해서 저니맨 노릇을 하면서 유럽의 군소 리그를 전전하게 된다.

2010년 폴란드 레기아 바르샤바에 입단했으나 겨우 두경기 출전했고, 2011년에는 1부리그로 승격한 포르투갈 리그의 포르티모넨스 SC에 입단했으나, 3경기 출전만 했다.

이어 2011년에는 미키타리안의 나라 아르메니아로 진출했다. FC 미카에서 2011-12 시즌 24경기 4득점을 기록하고 한 시즌만에 떠났다. 그래도 아르메니아 FA컵 결승전에서 골을 넣어 팀의 우승에 기여하는 등 나름의 활약은 했다.

2012년 1월 다시 중국 리그로 돌아왔으나 이미 그는 슈퍼리그에 뛸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평가를 받아서, 슈퍼리그 팀은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다. 하는수없이 그는 중국 갑급 리그의 후난 샹타오와 2년 계약을 맺었다. 여기서 2년간 43경기에 출전 9골을 넣는 평범한 활약을 하고, 2014년 같은 갑급리그의 허베이 화샤 싱푸(당시 허베이 중지, 시즌중 화샤그룹에 인수되어 개명)[11][12]에 입단했다. 허베이가 당시 2부리그에 있었음에도 7경기밖에 출전을 못했다. 2골 기록.

시즌 종료 이후 갑급리그에서도 뛸만한 실력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아 방출되었고, 재기를 모색했으나 2년후 2016년에 은퇴를 선택했다. 영화배우로 전업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잊혀졌던 그가 언론에 오랜만에 보도되었는데 2022년 4월, 중국 '즈보 닷컴'은 30일(한국시간) "중국의 과거 국가 대표팀 출신이었던 동팡줘는 자신과 비슷한 타입의 선수로 손흥민(토트넘)을 택했다"라고 보도했다. 동팡줘는 "나는 어렸을 때는 손흥민과 같은 타입의 선수였다. 나도 공을 잡고 자신있게 드리블할 수 있었다"라면서 "리듬이 비교적 빠르고 돌파와 슈팅 능력도 좋았다"라고 주장했다. 물론, 중국 측에서도 어이가 없는지 추가로 질문한 손흥민과 자신의 차이에 대해서 동팡줘는 "나는 그처럼 육체적으로 완성되어 있지 않다. 피지컬이 나보다 뛰어나고 자신감이 있다"라고 평가했다. 사실 플레이 스타일은 같을 수 있고 어린 시절로 따지면 손흥민이 서브였던 시절도 있었으니 틀린 얘기라고만은 할 수 없다.

3. 국가대표 경력

2005년에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국가 대표팀으로 차출되지만 벤치신세로 한경기도 뛰지 못했다.

A매치 첫 골은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1골을 넣었는데, 경기는 4:1로 패배. 이후 2007년 아시안컵에도 출전하였다.

2008 베이징 올림픽 축구종목에서도 출전했는데, 1차전 뉴질랜드전에서는 후반 33분 교체출전하여 팀이 0:1로 뒤지던 상황에서 후반 43분 극적인 헤딩 동점골을 넣어 1:1로 비겼다.

2차전 벨기에전에서는 후반 시작과 함께 교체투입되었으나 0:2로 패했고, 3차전 브라질전에서는 선발출전하여 후반 27분까지 뛰었으나 팀의 0:3 패배를 막지 못했다. 당시 중국 올림픽 축구대표팀은 개최국 자격으로 자동출전하여 브라질, 벨기에, 뉴질랜드와 함께 C조에 편성되었는데, 당시 분위기는 정예멤버가 아닌 브라질, 당시만 하더라도 별 특출나게 이름난 선수가 없었던 벨기에[13], 그리고 오세아니아의 뉴질랜드와 만나게 되어 잘만 하면 8강 진출은 가능하겠다...라는 식의 반응이었는데, 브라질은 그렇다 치더라도[14] 묘하게도 당시 벨기에 올림픽 대표팀은 토마스 베르마엘렌, 케빈 미랄라스, 무사 뎀벨레, 뱅상 콩파니, 마루앙 펠라이니, 얀 베르통헨 등 몇 년만 있으면 벨기에 황금세대를 구축할 특급 유망주들이 진을 치고 있던 무시무시한 팀이었다.

어쨌든 중국 올림픽 국대는 홈에서 1무 2패의 망신을 당했는데 둥팡줘의 골이 올림픽에서의 유일한 골이었다.

그런데 이 올림픽에서 둥팡줘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고, 애초에 후보 신세였는데 부상까지 겹친 둥팡줘는 결국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맨유와 계약을 상호 해지한다.

4. 평가

매우 큰 기대를 모았으나, 벨기에 2부 리그를 제외하면 그다지 좋은 활약을 보여준 바 없다. 분명히 중국리그에서 뛸 때 보여준 포텐은 있었고, 벨기에 2부에서 보여주었듯이 아주 재능이 없는 선수도 아니었겠지만, 유럽 1부리그 팀에서 주전을 먹을 수준까지는 성장을 못하고 멈춰버린 경우[15]. 중국에서는 역대급 재능의 기대주였던데다가, 지금 봐도 상당한 엘리트 코스를 타고 해외 진출한 편이니 유럽에서의 초라한 경력이 더욱 아쉬울 것이다.

이렇게 성장이 멈춰버린 이유는 원래 재능의 한계도 있었겠지만, 유리몸이어서 부상을 계속 달고 다녔기 때문이기도 하다. 맨유 시절에도 자체 연습경기중 부상당한 경우가 여러번이었고, 가장 빛나던 시기였던 벨기에 2부 리즈시절일 때도 부상으로 결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 멘탈도 약해서 자신에 대한 비난여론이나 언론의 악의적인 기사에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에 더 문제였다. 차라리 그냥 중국에 남아 있었다거나 혹은 좀 덜 주목을 받는 해외클럽으로 갔다면 포텐을 터트려 더 좋은 선수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축구선수로는 한창일 20대 후반에 중국 2부에서도 안통하는 퇴물로 전락해 쓸쓸히 은퇴했다.[16]

대런 플레처는 동팡줘에 대해 재능은 충분했으나 적응 문제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레알 마드리드의 중국 투어 시절 호날두는 아는 중국선수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으나 얼굴은 아는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겠다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카가와 신지는 맨유에 입단할 당시, 박지성 이전에도 맨유에서 뛴 아시아 선수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생 처음 듣는다고 반응했다.

사실, 해외 리그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중국선수는 대표팀에서 주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쑨지하이였다. 크리스탈 팰리스 FC 임대 시절 준수한 활약을 펼쳤고 다시 EPL로 복귀한 후 맨체스터 시티 FC에서 2002년부터 2008년까지 여섯 시즌이나 뛰면서 총 130경기를 뛰었다. 팀이 암흑기에 빠져있던 시기에 활약하여 탁신 친나왓이 인수했던 시기 전후로는 후보로 밀려났으나 뛸 때마다 활약은 여전히 괜찮았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순지하이는 이후 2012년 에티하드 스타디움을 방문했을 때도 맨시티 팬들의 성대한 환영을 받았고, 2015년부터 맨체스터 시티의 앰버서더로 임명되었다. 이외에도 리톄 정즈도 아주 오래는 아니지만 에버튼과 찰턴에서 2-3년간 어느정도 활약을 했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로 중국 슈퍼 리그에서 오가는 돈이 웬만한 유럽 리그 뺨치는지라, 웬만한 중국 선수들은 둥팡줘를 보고 유럽리그에서 모험을 하기보다는 이제 자국리그에 붙박혀 나오지 않고 있다. EPL에서 이적 제의가 왔으나 거부하고 있는 우레이가 대표적 경우. 그러다가, 우레이는 18-19년 겨울 이적시장에서 RCD 에스파뇰로 이적했다...만은, 결국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오며 2020년대 이후 빅리그에서 뛰는 중국 선수는 하나도 없다.

둥팡줘의 실패는 본인에게도 큰 불행이었겠지만, 이런 실패 때문에 중국 후배 선수들의 해외 진출에도 나쁜 선례로 작용하고 있는 게 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축구계에선 역대급 재능이었던 선수가 이런 굴욕이나 당하고 돌아왔으니, 해외 나가서 도전한답시고 고생은 고생대로 할 바에 자국에서 대접받고[17] 돈도 더 버는 게 속 편할 테니 도전할 이유 자체가 없는 상황이다.

5. 오해

"유니폼 팔이"라는 비하를 받던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불성실하다"[18], "사치가 심하다"[19] 그에 대한 악의적인 보도나 근거없는 네티즌들의 극딜이 상당히 많았고, 이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기대가 컸기 때문에 포텐을 터트리지 못해 기대를 저버리자 오히려 자국 팬들의 증오의 대상이 된 대표적인 경우다.

포텐을 터트리지 못해 기대에 부응 못한 면은 있지만 매우 악의적인 인터넷 공격에 시달렸다는 점에서는 고종수와 어느정도 비슷한 듯. 불운하게도 한국에서는 같은 팀에 있던 박지성과 비교되어 "누군 티셔츠팔러 들어왔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비하당했다. 그냥 어렸을 때 기대를 받다가 성장이 기대에 못미쳐 사그러든 유망주였을 뿐인데 중국 언론의 과도한 비난이 한국에 여과없이 보도된 것. 일부 축구팬들은 둥팡줘를 다른 중국 축구선수와 혼동하여 실력도 없는데 허세만 가득한 선수 쯤으로 알고 있지만, 이 선수는 아예 언론이나 기자회견을 기피했기 때문에 언플 자체를 한적이 없다. 의외로 이렇게 잘못알고 있는 팬들이 한국에 상당히 많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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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베이 시절 네티즌에게 찍힌 왼쪽의 사진이 중국 언론에서 보도되어 자기 관리를 안해서 비만이 되었다는 설이 있었고, 한국에서도 비슷하게 보도되어 더 비웃음을 받았으나 비슷한 시기에 찍힌 다른 사진을 보면 실제로는 포즈의 문제일 뿐 체형은 멀쩡하다. 영화배우로 전직하려고 한다는 사람이 비만 체형이 되었을 리가 없다.[21]

본인은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서 아동 축구부들을 돌면서 지도하는 재능 기부도 하고 재단을 만들어 아동 환자를 돕는 일도 하긴 했지만, 워낙 인터넷 공격이 악의적이었기 때문에 별로 효과는 없었다.

은퇴 후에는 아마추어 친선 경기에 종종 나온다고 한다.

6. 비슷한 경우

사실 유소년 시절에 축구 신동이라고 불리다가, 성인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선수는 상당히 많다. 둥팡줘의 경우 맨유라는 빅클럽에 가게 되어 14억의 주목을 받은 게 문제였고, 그런 기대를 받다가 성장을 제대로 못해 퍼포먼스가 안 나오자 비난과 저주의 대상이 되었으나, 이런 일은 국적을 불문하고 축구계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한국에서도 이런 일이 많았으며, 2000년대 초반 월드컵 이후 여러 명의 한국 선수가 빅리그의 유소년팀에 입단해서 주목을 받았으나, 이런 선수들 대부분은 빅리그는 커녕 국내에서도 뛸 재목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아 흔적도 없이 사라진 바 있다. 오히려 둥팡줘는 잠시나마 벨기에 2부 리그에서라도 득점왕을 해봤고, 벤치 멤버였지만 당시 세계 최고 구단이었던 맨유에서 데뷔도 해 보고 중국 국가대표로도 뛰어봤으니, 이런 선수들에 비하면 사정이 나은 편이다. 둥팡줘가 이러한 이미지로 압도적이라 그렇지 한때 전세계급 유망주였던 하킴 마스투르는 모로코 2부 리그에서 간신히 프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고, 세계적인 빅클럽 유스 출신임에도 프로 데뷔도 못하고 쓸쓸하게 은퇴한 선수들도 있으니 둥팡줘는 오히려 양반이다.[22]

맨유에서 실패한 선수 중 가장 유명한 선수는 퍼거슨 시절 맨유에 들어왔다가 별 활약하지 못하고 나간 베베, 베베와 함께 베베르탕으로 묶였던 가브리엘 오베르탕, 유리몸의 대명사 오언 하그리브스, 요한 크루이프의 아들 조르디 크루이프 등이 있다. 특히 베베는 동팡줘, 마누초와 함께 맨유 역사상 최악의 영입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23][24]

7. 같이 보기



[1] 동팡줘 이후로 맨유에 입단한 아시아 선수는 한국의 박지성, 일본의 카가와 신지가 있다. 다만 기대에 비해 큰활약을 못하고 묻혀서 한국에서는 박지성이 최초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2] 비슷한 사례로, 삼국지 동탁(董卓)도 Dong Zhuo가 맞는데 Dong Zhou로 잘못 표기되기도 한다( 사례). [3] 현재는 재정난으로 완전 몰락하고 다롄 차오웨로 재창단되었다. [4] 단순히 유니폼 판촉용으로 영입할만큼 빅리그 팀이 한가한건 아니다. 어느 정도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에 영입을 한 것이다. 결국 둥팡줘가 그만한 역량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긴 하나, 당시 맨유가 아스날과 함께 리그를 양분하던 시기임을 생각하면 '중국 마케팅 하는 김에, 가능성도 있긴 하니 이왕 데려온 거 터지면 더 좋은' 전략인 것. 애초에 빅클럽들이 유망주 한 둘 사오는 것도 아니니, 아무리 동팡저우가 특수한 케이스라 한들 재능이 전혀 없던 선수라고 단정지을 필요까진 없다. [5] 2000-01 시즌 설기현이 벨기에로 처음 이적하여 뛰었던 팀이다. 설기현은 25경기에 출전하여 12골을 기록하는 맹활약을 했고 다음 시즌 주필러 리그 강호인 RSC 안데를레흐트로 이적한다. [6] 퍼거슨 감독 본인,히딩크 감독, 요한 크루이프. [7] 이게 유럽에 진출했던 중국인 선수들 중 최초이자 유일한 유럽 리그 득점왕 기록이다. 사실 한국 역시 손흥민이 2022년 프리미어 리그에서 공동 득점왕을 차지 하기 전까지 전무했다. 그 외, 이란 알리레자 자한바크슈(네덜란드)나 사르다르 아즈문(러시아)이 유럽 1부 상위리그 득점왕이고, 메흐디 타레미가 포르투갈에서 공동 득점왕을 수상한 경우처럼 이란은 유럽 리거 득점 1위 기록을 3명이나 가지고 있다. 물론 각 리그 수준차는 감안해야 한다. [8] SK Deinze와 KVSK United를 상대로 넣었다. [9] 이 경기 직전에 맨유의 리그 우승이 확정되어 이 경기에서는 양팀 모두 2진 선수들을 대거 출전시켰다. [10] 이에 반해 전성기가 한참 지났던 안정환은 주전으로 입단한 2009년에도 6골, 2010년에는 10골을 넣었다. 2011년에는 넬로 빙가다 감독이 팀 리빌딩 차원에서 유망주들에게 기회를 주면서 노장인 안정환을 뻈고, 그래서 두골만 기록했다. [11] 나름 중국의 레전드 선수 출신인 리톄가 감독을 맡고 있었다. 리톄는 과거 에버튼에서 뛰기도 했다. [12] 우리나라에는 허베이 중지로 알려진 팀으로 2015년 여름 전북 현대의 공격수 에두가 이 팀으로 엄청난 이적료와 연봉을 받고 이적했다. 허베이 화샤로 이름을 바꾼 후에 황사머니를 시전했고, 중국 슈퍼 리그에 올라온 이후에는 유럽의 주전들을 끌어왔을 뿐만 아니라 맨시티의 명장 페예그리니까지 데려올 정도로 돈을 썼다. [13] 흔히 생각하는 벨기에의 황금세대 선수들은 이 당시 유망주에 불과하거나 데뷔도 하기 전이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벨기에는 그냥 유럽의 흔한 중위권 전력을 가진 국가였고 국대는 당시 혼란기를 겪고 있었던 일본에게 4:0으로 패하는 등 크게 주목받진 못하는 수준이었다. 흔히 황금세대라 불리는 막강한 벨기에 국대는 2010년대 초중반에 들어서야 구축된 것. [14] 아무리 정예멤버가 아니라 할 지라도 호나우지뉴라는 어마무시한 존재와 티아고 실바, 하피냐 등등 이름난 선수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브라질은 워낙 국가대표 최정예에 소집되기 어려운 나라이다 보니 소집되지 못한 선수들로 팀을 꾸려도 다른 나라들의 대표팀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하다못해 자국민들도 아무리 개최국이고 자신감이 넘친다 한들 양심상(..) 비비지 못할 수준. [15] 리그 차를 감안하고서라도 맨유에서 나와 중국에 복귀했을 때는 오히려 벨기에 시절보다도 퇴보했다. [16] 당시 둥팡줘와 국대와 EPL에서 뛰던 정즈(당시 찰턴 애슬레틱 FC)는 2018년 현재에도 광저우 헝다에서 주전으로 활약중이다. 그밖에 2008년에 중국 올림픽 국대였던 펑샤오팅, 가오린도 2018년 현재 광저우 헝다의 주전으로 뛰었다. [17] 특히 중국처럼 돈과 인구는 많고 폐쇄적인 국가에서는 굳이 바깥 세상으로 눈 돌릴 필요가 잘 없는 게 현실이다. [18] 중국 기레기들이 이 선수를 취재하기 위해서 진을 치고 있었는데, 아래도 나오지만 이 선수가 매우 낯을 가리고 언론을 기피했기 때문에 기자들과 매우 사이가 나빴고, 취재에 잘 응하지 않는 와중에 주전도 아니고 후보를 전전하자 기레기들이 상상력을 덧붙인 악의적인 기사를 써대기 시작했다. 이런 기사가 한국에까지 여과없이 보도되어 이 선수가 "불성실한데다가 허세만 가득한 선수"로 잘못 알려졌다. [19] 계약금을 가지고 아우디 R8을 구입했는데,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여론재판을 당했다. 사실 아우디 R8이 당시 60억원의 계약금을 받았던 둥팡줘가 무리해서 탈만큼 딱히 비싼차가 아닌데도(한국의 시가로 약 2억원이다.), 중국에서는 개티즌들이 극딜한 것. [20] 사실 어찌보면 비슷한 시기 맨유에 입단해 유의미한 활약을 한 박지성으로 생겨난 불의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물론 박지성 본인이 아닌 팬덤에 의한 피해다) 당시 박지성이 네덜란드에서 맨유로 이적하면서 열등감을 가진 중국팬들이 박지성 폄훼와 동팡저우를 지나치게 올려쳤고, 이에 반발한 한국 팬들 사이에서 그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아진 것. 그런데 박지성이 자리를 잡고 팀에 공헌을 하는 동안 별 임팩트 없이 사라졌으니 그에 대해 악감정이 있던 한국팬들과, 실망한 중국팬들 양쪽으로부터 욕을 먹게 된 것이다. 이런 여론을 이용해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마구 써댄 언론의 탓도 있다. 사실 동팡저우 본인은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을 뿐이지 딱히 잘못한 게 없다. [21] 왼쪽 사진을 자세히 보면 삐딱하게 앉아있기에 복부가 앞으로 나왔을 뿐 복부가 굴곡지지 않고 평평한 걸 볼 수 있다. 얼굴과 턱에 나이살이 붙어 살이 쪄보일뿐. [22] 장결희만 봐도 프로 데뷔는 못해보고 결국 세미프로리그인 K3리그에서조차 벤치 멤버로 전락했다. [23] 조르디 크루이프는 적어도 부상 당하기 전까진 현지 언론들로부터 크루이프의 재림이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잠시나마 잘했었던 기간이라는 게 존재했고, 나름 4년 동안 맨유에 몸 담으며 57경기 8골을 기록했다. 결과적으로 맨유에서 실패한 것은 사실이나 요한 크루이프의 아들이라는 유명세 때문에 맨유에서 10경기도 뛰지 못하고 방출된 동팡줘, 베베와 함께 최악으로 엮는 것은 조르디 크루이프에게 매우 실례되는 언사이다. [24] 오언 하그리브스 역시 부상으로 고생하기 전까진 좋은 활약을 보인 기간이 어느 정도 존재했고 맨유에서 4년간 39경기를 뛰었기 때문에 동팡줘, 베베와 비교를 거부한다. 다만 기대가 컸던 만큼 퍼거슨 감독은 가장 실망스러웠던 영입 1위로 꼽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