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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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벤투스 FC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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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콘테 (1996~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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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2001~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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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루이지 부폰 (2012~2018) |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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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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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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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96 · 1996-97 · 1997-98 |
Player of the Year 1995 | ||
수상 잔루카 비알리 |
2위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
3위 위르겐 클린스만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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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前 축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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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1] Alessandro Del Pier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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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74년 11월 9일 ([age(1974-11-09)]세) | |||
베네토주 트레비소도 코넬리아노시 | ||||
국적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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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74cm / 체중 73kg | |||
주발 | 오른발 (양발) | |||
직업 |
축구 선수 (
공격수[2] / 은퇴) 축구 해설가[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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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유스 |
AC 산 벤데미아노 (1981~1988) 칼초 파도바 (1988~1993) 유벤투스 FC (1993~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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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
칼초 파도바 (1991~1993) 유벤투스 FC (1993~2012) 시드니 FC (2012~2014) 델리 다이너모스 FC (2014) |
|||
국가대표 | 91경기 27골[4] ( 이탈리아 / 1995~2008) | |||
정보 더 보기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eeeeee,#191919> 등번호 |
유벤투스 FC - 10번[5] 이탈리아 대표팀 - 7번, 10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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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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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前 축구 선수 출신 해설자.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 유럽에서는 줄여서 "알레"라는 이름으로 많이 부른다.데니스 베르캄프, 라울 곤살레스와 더불어 세컨드 스트라이커의 시대를 연 선수로, 드리블 능력, 테크닉, 득점력, 이타적인 플레이,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 능력까지 갖춘 공격의 토탈 패키지 같은 선수였다. 이탈리아 판타지스타 계보의 적통 계승자이며, 사실상 마지막 판타지스타.[6] 여기에 더해 선수 시절에나 지금 현재나 의리와 투지가 넘치고 넉넉한 인품을 가진 유한 성격으로도 유명하다.
골을 넣으면 혀를 내밀고 그라운드를 질주하는 특유의 세리머니로 유명하다.[7]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자세한 내용은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클럽 경력 문서 참고하십시오.2.2. 국가대표 경력
클럽에서의 활약과는 대조되는 국가대표팀 활약상 때문에 저평가를 받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첫 메이저 대회는 유로 1996이었지만 첫경기에만 출전했을 뿐 별다른 활약은 없었다. 또한 이탈리아가 독일, 체코와 한조에 묶이면서 결국 3위로 조별 리그 탈락을 하게 되었다. 이후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는 팀의 에이스로 주목 받으며 좋은 활약을 보여줄거라 기대했으나 대회 직전 부상의 여파로 대회 초반에는 로베르토 바조가 대신 출전했고 이후 출전한 경기에서는 무득점. 1개의 도움이 전부였고 팀은 8강에서 탈락했다.[8]그가 진짜 활약을 해야할 대회가 바로 유로 2000이었는데 정작 감독이었던 디노 조프는 프란체스코 토티를 주전으로 기용했고 부상 여파로 폼이 좋지 않았던 델 피에로는 토티의 백업이 된다. 그래도 조별 리그 3차전에서 코너킥으로 도움을 기록하고 후반에는 득점에도 성공하며 메이저 대회 첫 골을 신고한다. 8강전도 교체출장하며 컨디션을 찾아갔고, 4강전에서는 선발출장했지만, 잠브로타가 퇴장당해 수적으로 불리해진 대표팀을 이끌고 인자기와 함께 단둘이서 공격진을 이끌었고, 토티와 교체되었다. 문제는 바로 프랑스와의 이 결승전. 교체투입이 된 직후 델 베키오가 선제골을 넣어 리드를 지켜가는 상황에서 그에게 두 번의 완벽한 노마크 찬스가 왔지만 두번 다 무위로 날려버렸고 결국 프랑스가 대역전극을 연출하며 우승해버린다.
이후 2002년 한일 월드컵에도 출장하지만, 아주리 군단의 에이스 자리, 등번호 10번은 프란체스코 토티에게 내주고 등번호 7번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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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를 상대로 동점골을 넣은 델 피에로 |
그리고 유로 2004 예선에서는 5골을 넣는 활약으로 이번엔 토티와 공존에 성공하여 첫 경기부터 당당하게 선발출장했다. 그러나 1차전에서 토티가 상대선수에게 침을 뱉어 퇴장당하는 변수가 발생했고, 이탈리아도 1, 2차전을 연달아 비기는 졸전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과 덴마크에 밀려 탈락하고 만다. 델 피에로 본인도 무득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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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을 상대로 쐐기골을 넣은 델 피에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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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마지막 메이저 대회가 된 유로 2008에선 부상으로 빠진 파비오 칸나바로를 대신하여 주장 완장을 찼지만 무득점에 그쳤고, 이탈리아도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 패배하여 탈락했다.
A매치 통산 91경기 27골, 이탈리아 역대 득점 4위로 단순히 스텟만 보면 나쁘지 않지만 메이저 대회에선 월드컵 12경기 2골, 유로 13경기 1골로 300골 가까이 기록한 유벤투스에서의 활약과 비교하면 이름값에 걸맞은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2002 월드컵 예선, 유로 2004 예선에서 모두 각각 5골을 넣는 등 적어도 메이저 대회 예선에선 뛰어난 모습을 보였고 본선에서 넣은 골들도 모두 중요한 순간에 나온 골들이었다. 그 이름값에 걸맞지 않은 활약조차 2연속[10] 월드컵 조별 리그 탈락 후 2연속[11]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한 2022년 현재의 이탈리아 공격진과는 비교불가 수준의 활약이기에 이탈리아 팬들은 델 피에로를 그리워하고 있다.
3. 플레이 스타일
자세한 내용은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플레이 스타일 문서 참고하십시오.4. 기록
4.1. 대회 기록
- 유벤투스 FC (1993~2012)
- 세리에 A: 1994-95, 1996-97, 1997-98, 2001-02, 2002-03, 2011-12
- 세리에 B: 2006-07
- 코파 이탈리아: 1994-95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995, 1997, 2002, 2003
- UEFA 챔피언스 리그: 1995-96 / 준우승: 1996-97, 1997-98, 2002-03
- UEFA 인터토토컵: 1999
- UEFA 슈퍼컵: 1996
- 인터컨티넨탈컵: 1996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2006
4.2. 개인 수상
-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 1997-98
- 세리에 A 득점왕: 2007-08
- 세리에 A 도움왕: 1999-00
- 세리에 A 올해의 이탈리아 선수: 1997-98, 2007-08
- 세리에 A 가장 사랑받는 선수: 2001, 2008
- 세리에 A 올해의 득점자[12]: 2008
- A리그 올해의 팀: 2012-13
- A리그 올해의 골: 2012-13
- A리그 올스타: 2014
- A리그 10년의 팀[13]: 2015 (서브)
- 세리에 B 득점왕: 2006-07
-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 2005-06
- 인터컨티넨탈컵 MOTM: 1996
- 툴롱 토너먼트 득점왕: 1997
- FIFA 100: 2004
- 유니세프 유럽 올해의 축구 선수: 1995-96
- 시드니 올해의 선수: 2013
- 유벤투스 명예의 거리: 2011
- 유벤투스 올타임 XI: 2017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7
- 시드니 명예의 전당: 2015
- 시드니 10년의 팀: 2015
- ESM 올해의 팀: 1995-96, 1996-97, 1997-98
- 옹즈 드 옹즈: 1995
- 가에타노 시레아 경력모범상[14]: 2008
- 팔로네 디아르젠토: 2008-09
- 브라보 상: 1996
- 골든풋: 2007
- 글로브 사커 어워즈 플레이어 커리어 어워드: 2012
4.3. 수훈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5등급: 2000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4등급: 2006
4.4. 출전 기록
시즌 | 구단 | 소속 리그 | 리그 | FA컵 | 대륙 대회 |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1991/92 | 파도바 | 세리에 B | 4 | 0 | 0 | 0 | - | - |
1992/93 | 파도바 | 세리에 B | 10 | 1 | 0 | 0 | - | - |
1993/94 | 유벤투스 | 세리에 A | 11 | 5 | 1 | 0 | 2 | 0 |
1994/95 | 유벤투스 | 세리에 A | 29 | 8 | 10 | 1 | 11 | 1 |
1995/96 | 유벤투스 | 세리에 A | 29 | 6 | 2 | 1 | 11 | 6 |
1996/97 | 유벤투스 | 세리에 A | 22 | 8 | 4 | 0 | 6 | 4 |
1997/98 | 유벤투스 | 세리에 A | 32 | 21 | 4 | 1 | 10 | 10 |
1998/99 | 유벤투스 | 세리에 A | 8 | 2 | 1 | 0 | 4 | 0 |
1999/00 | 유벤투스 | 세리에 A | 34 | 9 | 2 | 1 | 9 | 2 |
2000/01 | 유벤투스 | 세리에 A | 25 | 9 | 2 | 0 | 6 | 0 |
2001/02 | 유벤투스 | 세리에 A | 32 | 16 | 4 | 1 | 10 | 4 |
2002/03 | 유벤투스 | 세리에 A | 24 | 16 | 4 | 0 | 13 | 5 |
2003/04 | 유벤투스 | 세리에 A | 22 | 8 | 0 | 0 | 4 | 3 |
2004/05 | 유벤투스 | 세리에 A | 30 | 14 | 4 | 3 | 8 | 2 |
2005/06 | 유벤투스 | 세리에 A | 32 | 12 | 1 | 0 | 7 | 3 |
2006/07 | 유벤투스 | 세리에 B | 35 | 20 | 2 | 3 | - | - |
2007/08 | 유벤투스 | 세리에 A | 37 | 21 | 3 | 2 | - | - |
2008/09 | 유벤투스 | 세리에 A | 31 | 13 | 1 | 2 | 9 | 6 |
2009/10 | 유벤투스 | 세리에 A | 23 | 9 | 2 | 0 | 5 | 0 |
2010/11 | 유벤투스 | 세리에 A | 33 | 8 | 4 | 0 | 10 | 3 |
2011/12 | 유벤투스 | 세리에 A | 23 | 3 | 4 | 0 | - | - |
2012/13 | 시드니 FC | A 리그 | 24 | 14 | - | - | - | - |
2013/14 | 시드니 FC | A 리그 | 24 | 10 | - | - | - | - |
2014 | 델리 다이나모스 | 인도 슈퍼리그 | 10 | 1 | - | - | - | - |
5. 관련 언사
자세한 내용은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관련 언사 문서 참고하십시오.6. 여담
- 2002 한일 월드컵 끝나고 2003년에 지상파 스포츠뉴스 1주년 특집으로 이탈리아 현지 방문해서 이탈리아 선수 인터뷰를 요청하였는데 유일하게 인터뷰를 해준 선수이기도 하다. 한국이 강해서 이겼다고 립서비스까지 해준 알레의 멘탈은 한국 축구 팬들에게 감동을 주었다.[15]
-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인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기립박수를 받은 여섯 명 중 한 명이다.[16]
- 프로 데뷔는 다른 곳이었지만, 현재는 그냥 유벤투스 그 자체. 유벤투스 클럽 역사상 최다 출장 및 최다 골, 역대 최장기간 주장 역임 등 나서는 경기 하나하나가 현재 유벤투스의 역사가 되었다.
- 세리에 A에서만 통산 187골로, 이는 역대 세리에 A 최다 득점 9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그리고, 이것저것 대회 다 포함해 비안코네리 유니폼을 입고 "그려넣은" 전체 골 수를 따지면 통산 290골. 세리에 A의 전설 주세페 메아차의 기록(인테르, 282골)을 깨버렸던, 세리에 A 역사를 통틀어 단일 클럽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이후 이 기록은 프란체스코 토티에 의해 경신되었다.
- 선수 통산 클럽 기록은 호주 리그, 인도 리그 포함 777경기 316골 156도움이다.
- 다만 클럽에서의 대활약과는 대조되는 국대 활약상 때문에 까이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골도 얼마 넣은 적이 없어서 월드컵에서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2002년 한일 월드컵, 2006년 독일 월드컵에 출장했으나 2002년 한일 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멕시코전에서 한 골, 그리고 2006년 독일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한 골이 전부다.[17]
- 역적질 중에서도 가장 뼈저린 것은 유로 2000 결승전에서의 역적질. 델 베키오의 선제골로 프랑스에게 불안한 리드를 지키고 있던 아주리에게는 두 번의 완벽한 노마크 찬스가 있었지만 한명의 선수의 연달은 실수로 당시 당대 최강이었던 프랑스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릴 확인사살 기회를 놓쳐버리는데 이것을 놓친 선수가 바로 델 피에로. 결국 프랑스가 대 역전극에 성공해 2:1로 우승해버린다.[18]
- 이전에는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상 때문에 로베르토 바조보다 저평가를 받는다고 평가되었으나, 바조는 클럽에서의 활약만으로도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한 시대를 지배했던 선수이기 때문에 이는 틀린 평가이다.[19] 둘은 나이 차이도 꽤 나기 때문에 라이벌로 불린 적도 없었다. 20대 초반 델 피에로의 잠재력은 바조를 뛰어넘을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결국 부상으로 인한 신체능력 저하로 인해 바조의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20대 초반에는 역대급 재능으로 평가받았지만, 결국 그 정도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한 웨인 루니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 지금도 높은 평가를 받는 선수이지만 젊은 시절의 잠재력은 엄청났다. 그의 센세이션한 등장은 당대 최고의 선수이자 유벤투스의 10번, 에이스였던 바조를 단번에 이적시키고 새로운 유벤투스의 상징으로 밀어줄 정도였다. 당시 상황을 서술하자면, 바조는 1993년 발롱도르 수상, 1994년 발롱도르 2위를 기록한 세계 최고의 선수였고 델 피에로는 세리에 A를 10경기 남짓 뛴 유망주에 불과했다. 당시 바조는 27세, 델 피에로는 고작 19세였다. 그러나 1994-95 시즌이 시작되며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는데, 바조가 부상을 겪으며 팀에서 이탈하는 동안, 고작 19~20세에 불과했던 델 피에로가 바조의 공백을 완전히 메꾸면서 해당 연도에 발롱도르 4위를 기록할 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펼쳤고, 시즌이 끝난 뒤 바조는 AC 밀란으로 매각되었다. 고작 20살의 나이에 당대 최고의 선수였던 바조를 이적시킬 정도로 뛰어난 실력과 잠재력을 보여준 셈. 물론 당시의 바조는 부상에 신음하던 시절이고 리피와의 불화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 묘하게도 AS 로마의 프란체스코 토티와 비슷한 축구 인생(?)을 살고 있다. 팀에 대한 충성심이나 비슷한 포지션, 그리고 젊은 시절부터 주장을 맡은 점과 '알레하면 유베, 유베하면 알레'[20] 하는 것들 등이다.[21] 차이점이라면 나이는 델 피에로가 2살 더 많고, 델 피에로는 파도바 유스에서 유베 유스로 옮긴 것인데 토티는 어릴 때부터 로마의 유스 팀에 속해있었다는 정도다.
* 그리고 알고보면 외모도 꽤나 잘생긴 편이다. 전형적인 이태리 미중년.
- 오아시스의 리더였던 노엘 갤러거와 친분이 있다. 오아시스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기도 했고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노엘을 독일과의 4강전에 초대하기도 했고 그 경기에서 이기니까 결승전에 노엘에게 같은 옷을 입고 와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 부폰의 2017-18 UEFA 챔피언스 리그 관련 항의성 발언들에 대해서 잔루이지 부폰에게 침착할 것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유벤투스 악성 팬덤에게 욕을 먹고 있다. 메드히 베나티아가 강간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고, 조르조 키엘리니가 마찬가지로 과도한 심판 비난으로 구설수에 오른 것에 비해서 델 피에로는 부폰이 너무 흥분해서 그렇다는 두둔과 자제를 둘 다 시도한 몇 안되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지 악성 울트라스들은 자기 팀 레전드를 까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 해당 경기 심판의 아내에게 살해 문자나 협박이 오고가는 마당에서 유일하게 침착하고 냉정한 판단을 보여줘서 알레의 멘탈은 다시끔 재평가받고 있다.
- 카잔의 기적을 보고 한국은 심한 농담을 만들어내는데 익숙한 팀이라고 말했다.[22] 사실 그는 한국과 악연이 있는데,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16강전에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싸워서 패배했고 당시 막장 심사를 했던 심판에게 강한 분노를 표출했다. 아마 그게 떠올랐던 모양.[23]
- 그러나 델 피에로도 2010년, 이탈리아의 예능 <키암브레티의 밤>에 출연해서 칼초폴리로 박탈된 2개의 스쿠데토까지 같이 센 적이 있다.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선수와 공격수 5인을 선정했는데, 2000년대 최고의 선수와 공격수들 중 4위에 이름을 올렸다.
- 시드니에서 두 시즌 간 뛰었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영어가 유창하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영어 인터뷰에도 무리없이 조리있게 대답하는 편.
- 2021년 11월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유벤투스 vs 첼시전을 관람하기 위해 런던에 왔다가 토트넘에도 방문해서 안토니오 콘테 감독을 만났고 손흥민, 해리 케인 등 훈련중이던 선수들과도 사진을 찍었다.
- 2023년 9월 칠리즈 행사로 방한하였으며 자신을 보러온 팬들에게 훌륭한 팬서비스를 보여주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날에도 인천공항에서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도 팬들에게 팬서비스를 해주고 출국했다고 한다.
-
넥슨 아이콘 매치에서 FC 스피어의 선수로 참가했다.
- 2024년 한국에서 유행한 삐끼삐끼 춤을 알고 있다. 상술한 아이콘 매치 섭외를 위해 슛 포 러브 촬영을 앞두고 씨잼철에게 이 춤이 뭔지 아냐고 먼저 물어보기까지 했는데 본인 인스타그램에 자주 떠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영상에서 델 피에로가 보여준 유쾌한 모습들에 많은 축구 팬들이 이렇게 유쾌한 선수인지 몰랐다는 반응이 많다.[24] 또한 영상에서 "신사는 숙녀가 필요로 할 때 떠나지 않는다."라는 본인의 명언을 활용해 재밌는 상황극을 보여주었는데, 여자가 어떤 부탁을 해도 떠나지 않고 다 들어주지만,[25]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것만은 도저히 못 참고 떠나버리는 결말.
6.1. 가족 관계
- 아버지는 전기 기술자, 어머니는 전업주부였고 형제가 많으며 루마니아계 의붓 여동생도 있다고 한다. 20세기에는 전기 기술자가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해 형편이 좋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의 호연지기를 키우기 위해 여행도 조금 다녔다고 한다. 아버지는 2001년에 돌아가셨다.
- 큰형인 스테파노는 UC 삼프도리아 유스팀에서 뛰다가 부상으로 축구를 그만두고 선수 에이전트를 하고 있다. 스테파노의 사진을 보면 알레산드로보다 좀 더 잘생겼다. 형제들이 모두 축구를 하고 싶어했지만 프로 선수까지 된 것은 알레산드로가 유일하다. 알레산드로는 10대 시절 프로 축구 선수가 되지 못하면 화물 트럭 운전 기사가 되어볼까 생각했다고 한다.
- 2005년 소니아 아모루소와 결혼했다. 배우자는 1996년부터 6년간 유벤투스 소속이었던 스트라이커 니콜라 아모루소와 혈연 관계라는 설도 있다. 2000년대 중반 유벤투스 선수들의 WAGs들은 대체로 유베 팬들에게 인기가 없었는데 아모루소는 이미지가 좋았다.
- 아들인 2007년생 토비아스 델 피에로도 축구를 하고 있으며 이외의 자녀로 딸 두 명이 있다.
7. 둘러보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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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소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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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베리니 · 6
바르잘리 · 7
델 피에로 ⓒ · 8
가투소 · 9
토니 10 데 로시 · 11 디 나탈레 · 12 보리엘로 · 13 암브로시니 · 14 아멜리아 · 15 콸리아렐라 · 16 카모라네시 · 17 데 산치스 18 카사노 · 19 잠브로타 · 20 페로타 · 21 피를로 · 22 아퀼라니 · 23 마테라치 |
로베르토 도나도니 |
[1]
로망어와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알레산드로 델피에로’가 된다.
[2]
주 포지션은
세컨드 스트라이커이나
중앙 공격수,
윙어 전부 소화할 수 있었다.
[3]
SKY 이탈리아
[4]
대표팀 역대 득점
공동 4위.
[5]
입단 초기에는 15, 16번을 달았다.
[6]
델 피에로의 노쇠화, 그리고 은퇴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후계자가 될 이탈리안 판타지스타의 재목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건 재능문제가 아니다. 축구전술의 흐름상 안 나오는게 당연하다. 판타지스타라는 스타일 자체가 유기적인 압박이 중시되는 현대 축구에서 주류가 될 수 없는 스타일이다. 멀리갈거 없이 원조
판타지스타
로베르토 바조조차
아리고 사키,
파비오 카펠로,
마르첼로 리피같은 당대 최고의 명장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받으며
볼로냐와 같은 중하위권 팀으로 떠나야했다. 즉 재능적으로는 델 피에로, 판타지스타와 유사하거나 동일 혹은 넘어선다 하더라도 현대 축구에서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흡사한 축구 스타일을 앞세워 새로운 판타지 스타, 제2의 델 피에로라 불렸던 유벤투스 후배
파울로 디발라가 있긴 했지만 디발라 또한 맞춤 전술이 필요하다는 까다로운 한계가 있다. 다만, 전술의 흐름을 떠나서, 결과적으로 재능은 있었더라도 만개한 실력 기준으로 보았을 때 델 피에로에 근접했던 활약을 꾸준히 보인 이탈리안 또는 비안코네리 후배도 분명 없었다고 보는게 옳다. 전술적으로 판타지스타와 같은 스타일이 쓰기 어려워진 것도 있지만,
안토니오 카사노,
파울로 디발라,
페데리코 키에사 등 이후 선수의 기량이 역대 판타지 스타급(바조, 델 피에로 등) 선수와 비견했을 때 떨어지는 것도 분명 사실이다.
[7]
본격적으로 해축이 보급된
2000년대 중반부터
세리에 A 중계가 거의 없었고 이탈리아 국대 방송 또한 잘 틀어주지 않았기에 유벤투스 팬이거나 그 나이대가 아닌 대다수의 국내 해축 팬은 알레에게 전용 세리머니가 있는 줄 모른다.
[8]
같은 포지션의 바조가 2골 2도움을 기록하는 등 더 좋은 활약을 보여줬음에도 당시 감독인
체사레 말디니는 델 피에로를 주전으로 기용했다.
[9]
다만 G조 다른 경기에서 에콰도르가 크로아티아에 1:0으로 승리하면서 델 피에로의 골이 없었더라도 이탈리아의 16강 진출은 무리가 없었다.
[10]
2010, 2014
[11]
2018, 2022
[12]
연간 최다 득점자
[13]
2005-06~2014-15
[14]
Premio Nazionale Carriera Esemplare "Gaetano Scirea"
[15]
당시 이탈리아 멤버들이(부폰, 말디니, 비에리 등) 해당 경기의 판정에 대해서 불만을 드러냈고, 델 피에로도 판정 자체에는 불만이 있었으나 한국의 경기력을 칭찬했다.
[16]
나머지 다섯 명은
요한 크루이프,
디에고 마라도나,
호나우지뉴,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프란체스코 토티.
[17]
연장 후반 119분 파비오 그로소의 골이 터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추가시간에 역습으로 집어넣으며 독일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18]
심지어 프랑스의 골은 후반 추가시간 라스트 미닛 동점골과 경기를 끝내는 골든 골이었다.
[19]
물론 바조는 판타지스타로서 이탈리아를 위기에서 구해내는 영웅적 기질도 강했다. 특히 1994 미국 월드컵 토너먼트에선 보여준 전설적인 활약은 그를 비운의 선수로 남게 했다. 16강전 역전승, 8강전 결승골, 4강전 멀티골로 결승전까지 팀을 멱살잡고 캐리했음에도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키커로 실축하며 온갖 비난을 받았다.
[20]
토티도 로마나 마찬가지이다.
[21]
다만 비슷한 포지션이라 해도 델 피에로는 좀 더 섀도우 스트라이커로 한정된다. 토티의 경우는
공격형 미드필더부터 최전방 스트라이커까지 소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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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라고 해도 믿기지 않을 만큼의 기적적인 이변이라는 뜻이다.
[23]
지금도
이탈리아인들은 당시 심판을 씹어대고 있지만, 사실
크리스티안 비에리의 코뼈 부러뜨리기에 경고 하나 안 하는 등 한국과 이탈리아 모두에게 막장 심사를 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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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댓글은 내 안에서 전설적인 존재였던 델 피에로가 유튜브 나와서 삐끼삐끼 추고 있을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했다고 올렸는데 상당히 많은 공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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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했다가 돈을 다 날렸다던가,
산 시로에 갔다가
인테르 팬이 되버렸다던가, 델 피에로의
차를 훔쳤다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