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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맥아더/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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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복무 미합중국 육군 ( 연합군 최고사령부 ·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 필리핀 자치령 육군
관련 인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기타 인천상륙작전(영화) · 인천상륙작전(웹툰)
참전한 전쟁에 대한 내용은 더글러스 맥아더/생애 4·5·6·8번 문단 참고
6.25 전쟁에 관련된 문서는 틀:6.25 전쟁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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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초기 생애3. 군인으로서의 초기4. 제1차 세계 대전5. 전간기
5.1.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장5.2. 최연소 장군5.3. 보너스 군대 유혈진압 사건5.4. 루스벨트와의 갈등5.5. 필리핀 육군 원수
6. 제2차 세계 대전
6.1. 1차 필리핀 전역6.2. 코코다 트랙 전투6.3. 뉴기니 전역6.4. 2차 필리핀 전역
6.4.1. 불필요한 전투였는가?
7. 연합군 점령하 일본 최고사령관8. 6.25 전쟁
8.1. 인천 상륙 작전8.2. 원산 상륙 작전8.3. 삼팔선 돌파8.4. 1950년 겨울의 참극
8.4.1. 맥아더만의 실책인가?
8.5. 해임8.6. 정말로 핵 공격을 고집하다 해임되었는가?
9. 말년10. 진급 이력11. 참고문헌

1. 개요

더글러스 맥아더의 생애에 대해 설명하는 문서.

2. 초기 생애

더글러스 맥아더는 1880년 1월 26일 아칸소 주 리틀록의 병영에서 미군 장군 아서 맥아더 주니어와 메리 핑크니 하디 맥아더(별칭은 "핑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스코틀랜드계 이주민 출신으로,[1] 할아버지 아서 맥아더 시니어 위스콘신 주의 주지사였고, 아버지 아서 맥아더 주니어는 남북 전쟁 때 명예훈장을 받았고 미국-스페인 전쟁 미국-필리핀 전쟁에 참전했으며 1900년 필리핀의 군정 총독으로 재임했다. 또한 핑키는 1852년생으로 버지니아 주 노퍽의 저명한 가문 출신이었으며, 그녀의 형제 중 2명은 남북전쟁 때 아메리카 연합국측에서 참전하였다. 심지어 핑키가 13세 때인 1865년에는 북군이 버지니아까지 침입해와 고향도 위협받은 일이 있었다. 아서와 핑키는 아서 맥아더 3세(1876년 8월 1일 출생), 말콤(1877년 10월 17일 출생), 그리고 더글러스 등 3형제를 낳았다. 그러나 그들이 살았던 올드 웨스트는 상당히 낙후되고 비위생적인 환경이어서 가족의 삶은 상당히 고달팠고, 더글러스의 둘째 형 말콤은 1883년에 홍역에 걸려 요절했다. 맥아더는 훗날 회고록에서 어린 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읽거나 쓰기도 전에, 심지어 걷거나 말하는 게 가능해진 때와 거의 동시에 말을 타고 총을 쏘는 법을 배웠다."

1889년 7월, 그의 가족은 워싱턴 D.C. 상경했다. 맥아더는 포스 공립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이수하다가 1893년 9월 그의 아버지가 텍사스 주 샌 안토니오에 배속되었을 때 그 지역 명문 사립학교인 서부 텍사스 군사 중학교(the West Texas Military Academy)에 진학했다. 맥아더는 중학교에서 "학식과 몸가짐 우수자"로 선정되어 골드 메달을 수여받았으며 학교 테니스 클럽에 참가하였고 학교 미식축구 팀에서 쿼터백을 수행했으며 야구 팀에서는 유격수를 수행했다. 그는 최종 년도에 100점 만점에 평균 97.33점에 달하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졸업했다.

그후 더글러스는 어머니 핑키 맥아더가 인맥을 동원해 테오발트 오트옌(Teobald Otjen) 하원 의원과 접촉하면서 테오발트 의원의 추천을 받고 미 육군 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에 진학할 기회를 얻어냈다. 다만 테오발트 의원은 자신의 추천을 희망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시험을 통해 최종 추천자를 선정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더글러스는 어머니가 섭외한 밀워키 고등학교 교장 게르트루드 헐(Gertrude Hull)의 지도를 받으며 시험을 준비했고, 그 결과 100점 만점에 93.3점을 받아 시험에 합격하면서 테오발트 의원의 추천서를 받고 결국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나중에 이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그것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교훈이었다. 준비는 성공과 승리의 열쇠다."
파일:웨스트포인트 대학 시절 맥아더.jpg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 사관생도 맥아더
1899년 6월 13일, 맥아더는 미 육군 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에 입교했다. 이때 그의 어머니 핑키도 사관학교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크레니 호텔의 스위트룸에 자리잡고 맥아더를 그곳에 투숙시키고 일거수일투족을 감독했다. 이후 그는 육군 장군이자 미국의 제18대 대통령 율리시스 S. 그랜트의 손자인 급우 율리시스 그랜트 3세와 함께 일명 '장군의 아들'로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던 1901년, 사관생도 오스카 부즈(Oscar Booz)가 선배들로부터 체벌을 빙자한 가혹 행위를 받고 학교를 떠났다가 결핵에 걸려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의 지시로 의회에서 청문회가 열려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 사관학교의 체벌 문제를 조사했다. 맥아더는 이 청문회에 출두했고, 웨스트포인트의 체벌 실태에 대해 상세히 증언했다. 청문회는 웨스트포인트의 "폭력적이고 학대적이며 부끄럽고 모욕적인 행위"를 금지하기로 결정했지만, 이후에도 웨스트포인트의 폭력 문제는 지속되었다.

1903년 6월 11일, 맥아더는 93명의 졸업생 중 가장 높은 졸업성적인 2470점 만점에 2424.12점을 기록하며 여단장생도 겸 수석졸업 생도로 졸업했다. 이는 웨스트포인트 역사상 세 번째로 높은 점수의 졸업생인데, 웨스트포인트 역사상 그보다 높은 졸업 성적을 기록한 이는 단 2명 뿐이었다.[2] 가장 높은 졸업 성적을 기록한 사관생도가 미국 육군 공병 병과를 받는 것이 당시 관례였기 때문에, 맥아더는 공병 소위로 임관하였다.[3]

3. 군인으로서의 초기

1903년 10월, 맥아더는 필리핀으로 파병되는 제3공병대대에 부임했다. 그는 일로일로에 파견되어 캠프 조스만에서 부두 건설을 감독했으며, 타클로반, 칼바옥, 세부 시의 조사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1903년 11월, 기마라스에서 일하고 있던 그는 필리핀 게릴라 두 명에게 매복 공격을 당했다. 그는 자신의 권총으로 그들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2명 모두 사살하는 활약을 선보여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후 그는 1904년 4월에 중위로 승진했다. 1904년 10월, 그는 마닐라에서 조사를 벌이는 임무를 수행했지만 말라리아와 도비 가려움증에 걸려 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아야 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그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캘리포니아 여단에 배속되었다가 1905년 7월에 태평양 지부의 수석 기술자가 되었다.

1905년 10월, 맥아더는 그의 아버지의 보좌관으로서 도쿄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후 그는 아버지와 함께 일본 군사 기지가 있는 나가사키, 고베시, 교토를 방문한 후 홍콩, 자바섬, 싱가포르를 거쳐 1906년 1월 캘커타에 도착한 뒤 인도에서 마드라스 투투쿠디, 퀘타, 카라치, 노스웨스트 프론티어, 그리고 카이바르 고개를 차례로 순회했다. 그후 그들은 중국으로 가서 방콕과 사이공을 경유했고 6월에 일본으로 돌아오기 전에 칸톤, 칭다오, 베이징, 톈진, 한코우, 상하이를 순회했다. 7월에 그들은 미국으로 돌아갔고, 아서 맥아더는 포트 메이슨에서 대대의 지휘관을 맡았으나 아들 맥아더를 여전히 보좌관으로 삼았다. 그해 9월, 맥아더는 워싱턴 병영에서 제2공병대대에 전속하여 미 육군 공병학교 입교 명령을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백악관을 돕는 보좌관"도 역임했다.

1907년 8월, 맥아더는 그의 부모가 살고 있는 밀워키의 공병 지구 사무실로 보내졌다. 그리고 1908년 4월, 그는 레번워스 요새에 부임하여 제3공병대대 K중대장직을 맡다가 1909년 대대 전속부관이 되었다. 그후 1911년 2월 대위로 승진되어 야전공병학교 군사공병반장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그는 1911년에 텍사스의 샌 안토니오에서 기동훈련에 참가했으며 1912년 1월과 2월에 파나마에서 개별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1912년 9월 5일, 그의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했고 어머니가 중병에 걸렸다. 이에 맥아더는 워싱턴에 양해를 구해 허락을 받고 어머니가 입원한 존스 홉킨스 병원 근처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1914년 4월 21일,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베라크루스로 미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5월 1일에 현장에 파견된 맥아더는 베라크루스로 진군하는 군대에 대한 물류 지원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철도의 사용이 필요하다는 걸 파악했다. 그는 베라크루스에서 열차를 많이 발견했지만 기관차는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베라크루스의 알바라도에 많은 기관차가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그는 150달러 상당의 금화를 주고 3명의 무장 해제된 멕시코인으로부터 기관차를 구입했다. 그런데 베라크루스로 돌아가던 중, 그의 팀은 5명의 게릴라들에게 습격당했다. 일단 이들을 격퇴하긴 했지만, 얼마 안가 15명의 기병대 무리의 습격이 이어졌다. 맥아더는 옷에 세개의 총알 구멍이 생길 정도로 공격당했지만 무사했고 4명을 사살해 적을 달아나게 했다.

얼마 후, 맥아더 일행은 기병대 3명의 공격을 받았다. 맥아더는 그의 셔츠에 또다른 총알 구멍을 얻었지만, 철로 핸드카를 사용해 2명을 사살하고 한 명을 도망치게 만들었다. 이후 그들은 말의 시체를 철로에서 제거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맥아더의 활약상은 훈장 수여를 고려받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사회는 "맥아더가 사전에 허가를 받지 않고 무리하게 작전을 수행했다."며 "이 상을 수여할 경우 비슷한 조건하에서 부관들이 현지 지휘관을 무시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맥아더는 아무런 상도 받지 못했다.

4. 제1차 세계 대전

파일:더글러스 맥아더 1917년.jpg
1917년 프랑스에서.
1차 세계대전은 맥아더가 촉망받는 군인으로 두각을 보이며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나서도 미국은 3년 이상 직접 전쟁에 참전하지 않으며 중립을 지켰다. 맥아더는 1915년 12월 11일에 소령으로 승진해 전쟁부로 부임했다. 이 기간동안 맥아더는 워싱턴의 총참모부에서 근무하며 정규군 확대나 방위계획 수립에 참여했다. 1916년 6월에는 뉴튼 D. 베이커 전무 장관의 배하에서 정보국장을 지내며 육군성과 언론간의 연락 업무를 수행하는 직책을 잠시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던 1917년 4월 6일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미국도 유럽에 병력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많은 군인들이 전공을 세울 수 있는 유럽 파견을 희망했고 맥아더 역시 유럽 전선에 나가길 원했다. 참전결정 이후 윌슨 대통령은 웨스턴 프런트의 방위군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맥아더는 특정 주에 대한 편애 논란이 불거질 것을 우려해 여러 주 단위로 구성된 군대를 파견할 것을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베이커 전무 장관은 제42 사단이 된 이 방위군의 창설을 승인하고 방위군 책임자 윌리엄 A. 만을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또한 맥아더는 이 사단의 수석 참모가 되었다. 제 42사단은 1917년 7월과 8월에 뉴욕의 밀스 캠프에서 훈련을 받고 1917년 10월 18일 뉴저지주 호보켄에서 프랑스 선박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12월에 프랑스에 도착했다. 그해 12월 19일, 찰스 T. 메노허 소장이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곧 맥아더를 마음에 들어하며 그에게 지휘권을 일정 부분 위임했다.

제42사단은 1918년 2월 루네빌 지역에 진입했다. 2월 26일, 맥아더 대령이 이끄는 42사단은 프랑스군과 함께 진군하여 다수의 독일군 포로들을 확보했다. 그리고 3월 9일, 맥아더는 42사단을 이끌고 제168보병사단과 함께 Salient du Feys의 독일군 참호에 3차례 공격을 감행했다. 이때 그는 사단 참모였음에도 불구하고 후방 진지에서 책상에 편히 앉아 서류나 끄적이는 걸 혐오하고 전투 현장으로 가서 부하들을 지휘하기 일쑤였다. 그는 전투 시 헬멧도 쓰지 않고 가벼운 전투모만 착용한 채 전방에서 권총으로 적을 향해 쏘며 부하들에게 "전진! 전진!"을 외쳐댔다. 이에 대해 부하들이 위험하다며 헬멧을 착용할 것을 요청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어떤 독일군 폭탄도 나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독가스 마스크도 착용하길 거부하고 맨얼굴로 부대를 지휘하다가 2차례 가스 공격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쇼'가 그의 부하들에게 감동을 줄 거라며 이같은 기행을 전쟁 끝까지 지속했다. 미군 국방부는 이러한 그의 무공을 기리기 위해 수훈 십자장을 수여했다.

1918년 6월 26일, 맥아더는 38세의 나이에 준장으로 승진했다. 그후 제42사단은 6월 하순에 독일군의 제2차 마른 강 공세에 대항하기 위해 샬롱 앙 샹파뉴로 이동했다. 프랑스 제4군의 지휘관 앙리 구로(Henri Gouraud)는 최전선을 가능한 얆게 유지하고 두번째 방어선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한 후 반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그의 전략은 성공을 거두었고, 맥아더는 성공적인 반격 작전을 수행한 공적을 인정받아 두번째로 은성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제42사단은 연합군의 백일 공세에 참가해 독일군을 효과적으로 밀어붙였고, 맥아더는 7월 29일에 세번째로 은성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틀 후, 맥아더는 로버트 A 브라운 장군을 대신해 제84보병 여단의 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적이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8월 2일에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현장으로 향했다. 훗날 그는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그날 아침 3시 30분, 나는 세르지의 우측면에서 임무를 시작했다. 나는 각 전초기지 연락부대의 병사들과 함께 무인지대를 지나가던 그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시체들이 우리 주위에서 너무도 많이 쌓여 있었다. 적어도 2000개가 넘은 시체들이 산산조각나 있었다. 나는 독일 최고의 6개 부서의 휘장을 확인했다. 악취는 질식할 정도로 진동했다. 부상당한 사람들의 신음소리는 도처에서 울렸다. 저격수의 총알은 성난 꿀벌처럼 윙윙거렸다. 나는 거의 수백개의 다양한 크기의 무력화된 총들과 수많은 버려진 기관총들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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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9월 프랑스 샤토에서.
맥아더는 돌아와서 헌터 리게트 중장에게 독일군이 실제로 철수했음을 보고했다. 그 공로로 맥아더는 네번째로 은성훈장을 수여받았으며, 프랑스 무공 십자훈장[4]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수여받았다. 그후 제42사단은 몇주간 휴식을 취한 뒤 1918년 9월 12일 셍미이엘 전투에 참가했다. 연합군의 진격은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맥아더는 84보병 여단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여 독일군을 격파한 전공을 인정받아 다섯번째 은성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9월 25~26일 밤에 야습을 성공적으로 감행했고, 이 전공으로 여섯 번째 은성훈장을 수여받았다. 제 42사단은 9월 30일 밤에 공세를 중지하고 아르곤 구역으로 이동했다.

10월 14일, 제42 사단은 두개의 여단과 함께 모이젠-아르곤 대공세에 참여했다. 그날 저녁 열린 회의에서 샤티용 북동쪽 철조망에 틈이 있음을 보여주는 공중 사진이 검토되었다. 제167 보병사령관 월터 E. 베어 중령은 이 방면으로 공세를 집중할 것을 제안했고 맥아더는 이를 채택했다. 그의 군대가 철조망의 틈의 존재를 확인했을 때, 맥아더는 상처를 입었지만 심각하지는 않았다. 이후 맥아더는 공세를 성공적으로 달성하는 데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두번째로 수훈 십자장을 수여받았다.

맥아더가 이끄는 제42사단은 1918년 11월 4~5일 밤에 마지막으로 스당을 향한 공세 작전을 수행했다. 맥아더는 훗날 이 작전에 대해 "미국 역사에서 큰 비극 중 하나였으나 거의 잊혀졌다."고 술회했다. 이 작전에서 각각의 미군 부대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맥아더는 졸지에 제1사단의 병사들에 의해 포로로 잡혀 독일군 장군으로 취급당했다. 그래도 맥아더는 마스 강 공세에서 성과를 거두어 7번째로 은성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후 맥아더는 휴전이 합의된 날로부터 하루전인 11월 10일에 제42사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제84보병여단의 보좌관으로서 공로를 인정받아 수훈 십자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1차 세계대전에서 15개의 훈장을 수여받았는데, 이는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미군 사단장 중 가장 많은 수상 기록이다.

맥아더의 직속 상관이었던 메노헤르 소장은 전쟁이 종결된 이후 1919년 10월 30일 유럽 지역 미군 총사령관인 퍼싱 장군에게 맥아더의 소장 진급 추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비록 소장진급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맥아더는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년간 유럽에서 주둔군 임무를 수행했다. 원래 전시의 임시 진급은 종전 이후 이전 계급으로 환원되어야 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주둔군 임무 수행으로 준장 계급을 계속 유지했고 이 덕택에 전간기에도 다른 동기들보다 빠른 진급이 가능해졌다.[5] 맥아더는 1차 세계대전을 통해 젊고 유능하며 전선에서 솔선수범하는 장군이라는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확실히 심어줄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미군에서 전시 진급한 장성급 장교는 51명이었지만 맥아더만큼 언론의 집중적인 보도와 관심을 받은 이는 없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미국 유럽원정군 사령관 존 조지프 퍼싱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는 벨로 숲에서 퍼싱이 "군인은 모름지기 당당하게 서서 총을 쏴야 한다."며 미군 수천명을 순식간에 죽게 만든 것에 대해 맥아더가 미친 짓거리 그만하라고 일갈했던 것의 영향이 크다. 이 일을 계기로 퍼싱은 맥아더와 사이가 매우 안 좋아졌다. 문제는 퍼싱이 미군 내에 최대 파벌을 이끌고 있었던데다 1940년대까지 생존했다는 것. 이러한 이유에서 퍼싱이 맥아더의 군 경력에 두고두고 장애요인이 되었다는 설도 있긴 한데 별로 설득력은 없다. 군 경력에 장애를 그것도 육군 최대 거물로부터 받은 사람이 승진과 보임마다 최연소 타이틀을 갈아치운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뒤에 나오지만 최연소 대장 진급기록도 맥아더가 가지고 있다.

그런데 맥아더는 의외로 자신의 가장 큰 정적이었던 퍼싱을 개인적으로는 존경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훗날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자신을 6성 장군으로 봉하려고 하자 정중히 거절하면서 "미국 역사상 6성 장군은 조지 워싱턴 대통령과 존 조지프 퍼싱 원수님 밖에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만 이 일화는 맥아더를 높이기 위한 썰일 가능성이 높다. 늘 맥아더와 긴장 관계였던 트루먼이 규정도 전례도 없는 6성 장군을 만들어 맥아더를 추대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워싱턴과 퍼싱 역시 경칭으로 대원수였을 뿐 원수의 상위 계급인 6성의 대원수였던 것은 아니다. 트루먼이 중공군의 개입 이후 그의 명예로운 은퇴를 종용하던 시절의 얘기에 살을 좀 많이 붙였다고 봐야 할 듯하다.

5. 전간기

5.1.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장

파일:320px-Douglas_MacArthur_as_USMA_Superintendent.jpg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장 맥아더 준장
1919년, 맥아더 준장은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장으로 부임했다. 이때 그의 나이 39세로, 1817년 부임한 실바누스 세이어 이후 최연소 교장이었다. 그는 독일 점령지를 통치하던 미 군사정부의 많은 웨스트포인트 졸업생들이 군사학 이외의 분야에 대해 거의 또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사관학교 교육을 다양화 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또한 당시 웨스트포인트는 전시 수요에 맞추느라 2년에 5개 기수씩 속성으로 장교를 배출하는 사관후보생(OCS) 과정으로 축소되어 사관후보생과 교직원의 사기는 바닥을 찍었다. 이에 맥아더는 4년제로 회복을 요청했지만 의회는 이를 3년 과정으로 조정했다. 이렇게 교육기간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는 동안, 뉴욕 타임즈 지는 웨스트포인트에서 생도들의 가식적이고 비민주적인 삶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또한 민간대학들이 1869년 하버드 대학을 시작으로 학업 성과만으로 점수를 매기고 있었지만, 웨스트포인트는 오래된 "완전한 인간" 교육 개념을 유지했다.

맥아더는 시스템을 현대화하여 '군인의 정신'의 개념을 군인다운 태도, 리더십, 효율성 및 스포츠맨십을 포함하도록 확대했다. 또한 그는 1922년에 생도 명예규정을 제정했다. 명예규정을 위반하면 사관생도들에 의해 선출된 생도 명예협의회가 판결이 없는 일종의 대배심으로 작동하여 지휘관에게 규정위반 사실을 보고하도록 했다. 또한, 신입생도들이 받는 가입교 훈련 및 기초군사훈련을 고학년 생도가 담당하는 전통이 후배 괴롭히기로 변질되었다고 보아 훈련을 현역 장교들이 담당하도록 변경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포트 클린턴에서 하던 하기군사훈련을 현역 부대인 포트 딕스로 옮겨 현역 훈련부사관에게 최신 무기 조작법 등 현대적인 훈련을 받도록 했다.

또한 맥아더는 교양 과목, 정치학 및 경제 과정을 추가해 커리큘럼을 현대화하고자 노력했으며, 군사학 이론수업에서는 오래된 남북전쟁에 대한 내용 대신 최신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내용을 배우도록 했다. 역사 수업에서는 극동 아시아에 더 중점을 뒀으며, 스포츠 프로그램을 확대하여 교내 스포츠 클럽의 수를 늘리고 모든 사관생도가 참여하도록 했다. 그밖에도 고학년 생도의 휴학제도 신설, 생도신문 발행 승인, 미국축구 관람을 위한 휴가제도 및 매월 5달러(현재 가치로 월 70달러 정도)의 경기관람 수당을 새로 만들었다.

맥아더의 이러한 급진적인 교육 개혁은 교수진과 동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맥아더의 임기 만료 이후 그의 개혁의 대부분은 곧바로 폐기되었지만, 그후 몇 년 동안 그의 정책이 공감을 받아 웨스트포인트는 결국 맥아더의 개혁을 받아들였다.

5.2. 최연소 장군

이 시기 맥아더는 사회운동가이자 백만장자 집안의 여식인 루이즈 크롬웰 브룩스와 사랑에 빠졌다. 어머니 핑키 여사는 남편에게 순종적인 여인을 며느리감이라고 여겼기에 이미 한번 결혼했다가 이혼한 경력이 있고 사회운동가로서 드센 성격이라고 생각되는 여자가 아들과 결혼한다는 것에 거세게 반대했다. 루이즈의 집안인 크롬웰 가문 역시 한낱 스코틀랜드계 이주민 출신인 맥아더 가문이 자신들의 귀한 여식과 결혼한다는 것에 탐탁치 않아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1922년 2월 14일 플로리다 주 팜 비치에 있는 가족 별장에서 결혼했다.

1922년 10월, 맥아더는 웨스트포인트를 떠나 루이즈와 그녀의 두 자녀 월터와 루이스와 함께 마닐라 군대 지휘권을 맡기 위해 필리핀으로 향했다. 이에 대해 일전에 루이즈에게 구혼했던 적이 있던 존 조지프 퍼싱 장군이 맥아더에게 "루이즈와 결혼하면 필리핀으로 추방하겠다."고 협박했다가 진짜로 결혼해버리자 가차없이 필리핀으로 보내버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퍼싱은 이 소문에 대해 "모두 빌어먹을 헛소리다!"라며 부인했다. 이후 맥아더는 필리핀에서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다가 1923년 2월과 3월에 심장병으로 고통받는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심장병에서 회복했으나 12월에 맥아더의 형 아서가 갑자기 충수염으로 4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6]

1923년 6월, 맥아더는 제23보병여단의 지휘를 맡았다. 그런데 1924년 7월 7일, 그는 필리핀 척후병장군사이에서 임금 및 수당에 대한 불만으로 반란이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맥아더는 200명이 넘는 이들을 체포하여 폭동을 잠재운 후 필리핀 군대의 봉급을 향상시키려 노력했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미 군부 내 인종적 편견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후 1925년 1월 17일, 맥아더는 44세의 나이에 육군 최연소 소장이 되었으며 5월 2일에 조지아 애틀랜타의 맥퍼슨 요새에 있는 4군단 지역을 지휘했다. 그러나 그는 연방군 장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남부인들의 "다른 곳으로 가라"는 요구에 시달렸고 몇달 후 매릴랜드 주의 3군단 지역으로 재배치되었다. 맥아더는 훗날 이 일에 대해 "내가 받은 가장 불쾌한 명령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

1927년, 맥아더는 루이즈와 별거했고 8월에 미국 올림픽위원회의 윌리엄 .C 프라우트 단장이 갑자기 사망하자 위원회의 긴급 요청을 받고 새 단장에 선출되었다. 그의 주요 임무는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1928 하계올림픽에서 미국 팀을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미국 팀은 이 올림픽에서 24개의 금메달을 따냈고 17개의 올림 신기록과 7개의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이후 마닐라로 돌아온 맥아더는 1929년 루이즈와 이혼했다. 그리고 1930년, 맥아더는 50세에 미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이는 미 육군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대장이 된 사례였다. 이후 맥아더는 1930년 9월 19일 필리핀을 떠나 샌 프란시스코와 9군단 지역 지휘부를 이끌었고 11월 21일 미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이렇듯 승승장구하는 군 경력을 보내고 있던 그는 무한한 자부심에 빠져들었다. 그는 남들과 대화할 때도 스스로를 '맥아더'라고 불렀고[7] 자신의 이미지를 미국 대중들에게 홍보하기 위해 홍보 직원들을 고용했다.[8] 맥아더는 공산주의를 혐오했고 그들이 미국을 좀먹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강건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러한 그의 사고관은 뒤에 있을 대형사고를 초래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5.3. 보너스 군대 유혈진압 사건

파일:보너스 군대 진압작전 당시 맥아더.jpg

1932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퇴역한 병사 2만 5천여 명이 보너스 지급을 요구하며 워싱턴으로 상경했다. 정부는 퇴역병들에게 기차표를 주며 돌아가라고 했지만 약 6천명만 돌아가고 나머지는 남아서 시위를 계속했다. 맥아더는 이 시위가 공산주의자들과 평화주의자들에 의해 진행될 가능성을 우려했지만, 실제로는 극히 일부만 공산주의자였고 나머지는 일반 퇴역병들이었다. 맥아더는 수도를 무질서로부터 지키기 위해 비상 계획을 검토했다.

그러던 1932년 7월 28일, 경찰이 진압을 시도했다가 대규모 폭력 사태가 벌어졌고 경찰관 두 명이 건물에 감금되었다. 그 중 한 경찰관이 겁먹은 나머지 발포해 시위대 두명을 살해했다. 이로 인해 사태가 악화되자,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연방군을 동원하기로 결정하고 맥아더 대장에게 시위대를 가능한 평화적으로 진압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선동당하고 있는 시위대'를 강경진압하기로 결정하고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소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6대의 탱크와 조지 S. 패튼[9] 소령이 지휘하는 3기병대를 선두로 1개 보병연대를 투입해 강경 진압작전에 돌입했다.

병사들은 비록 총을 쏘진 않았지만 총검과 세이버를 앞세워 시위대를 공격했다. 또한 최루가스가 사용되어 보너스 군대 캠프에 뿌려졌다. 그 와중에 가스통이 폭발해 화재가 발생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아기 두명이 최루가스에 질식사했고 임산부 한명은 유산하는 등 5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1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진압군에서도 6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조사결과, 시위대의 95% 이상은 진짜 퇴역병과 가족들이었고 5%는 신원 확인 불가 또는 사회운동가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후버는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유혈진압을 감행한 맥아더에게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고, 공화당 골수 지지자들로부터 "미국을 공산혁명에서 구해낸 위대한 장군."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 때문인지 훗날 맥아더는 "후버는 나쁘지 않은 대통령이었다."고 회고했다.

1934년, 맥아더는 보너스 군대에 대한 처우가 "부당하고 불필요하며 가혹하고 잔인한" 것으로 묘사한 언론인 드류 피어슨과 로버트 알렌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그러나 그들이 맥아더가 필리핀에서 정부로 삼았던 이사벨을 증인으로 삼겠다고 위협하자, 맥아더는 피어슨에게 1만 5천 달러를 지불하고 소송을 취하했다.

5.4. 루스벨트와의 갈등

1932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민주당 후보는 허버트 후버를 꺾고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루스벨트와 맥아더는 처음엔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그들은 1차 세계대전 이전에 함께 일한 바 있었고 정치적 견해 차에도 불구하고 친구로 지냈다. 맥아더는 민간인 유지 군단을 운영함으로서 뉴딜 정책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국방 예산을 줄이려는 루스벨트의 정책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육군 예산의 51%를 삭감하겠다는 루스벨트의 제안에, 맥아더는 분노의 일갈을 날렸다.
"우리가 다음 전쟁에서 패했을 때, 적의 총검으로 배가 찔러 진흙탕에서 누워있는 미국인 소년이 마지막으로 저주의 말을 내뱉을 것입니다. 맥아더가 아닌 루스벨트에게 말이오!"

그러면서 맥아더는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루스벨트는 "당신, 대통령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돼!"라고 소리쳤지만 사임을 받아들여주지 않았고, 맥아더는 백악관에서 비틀거리며 걸어나와 계단에서 구토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1년 더 참모총장 임기를 연장받았고 자성훈장 2개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병력의 감축, 그중에서도 특히 단시간에 양성이 불가능한 장교단의 감축을 줄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며 기동전을 시험해 보기 위해 소규모의 차량화 부대와 전차 부대를 창설했고, 이는 알보병 일색이던 미군에게 기동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5.5. 필리핀 육군 원수

1935년, 필리핀 자치령 대통령 마누엘 케손은 자신의 친구인 맥아더가 필리핀 군대의 창설을 감독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맥아더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승인을 받고 필리핀 연방 정부의 군사 고문 겸 원수에 취임했다. 그는 1935년 10월 그의 어머니와 시누이, 그리고 아이젠하워[10]와 함께 필리핀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핑키 여사는 항해 도중에 중상을 입었고 1935년 12월 3일 마닐라에서 사망했다. 케손 대통령은 1936년 8월 24일 말라칸 궁전에서 맥아더에게 육군 원수에 대한 공식 표창을 하고 독특한 제복을 선물했다.

필리핀 육군은 징병제로 구성되었다. 훈련은 정규 간부에 의해 수행되었고 필리핀 육군 사관학교는 웨스트포인트의 방식에 따라 설립되었다. 그러나 맥아더와 아이젠하워는 상황이 안 좋다는 걸 알아챘다. 훈련 캠프는 거의 건설되지 않았고 2만 명의 훈련생 충 첫번째 그룹은 1937년 초까지 보고되지 않았으며 장비와 무기는 쓸모없게 되었으며 6백만 달러의 예산은 완전히 부적절한 곳에 쓰였다. 맥아더와 그의 해군 고문 시드니 L. 허프 중령은 PT 보트의 발족을 설득했지만, 미 군부는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필리핀 비행 중대를 설립하려 했지만 1938년까지 이러한 공군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미국은 필리핀에게 드럼 요새 같은 중장갑 요새시설을 구축했으니 안심해도 좋다고 했지만, 그 정도로는 방어에 불충분하다고 판단한 맥아더는 상당히 분노했다고 한다.

맥아더는 1937년 4월 30일에 여행가 겸 문필가 진 페어클로스와 결혼했다. 그 후 그해 12월 31일, 맥아더는 공식적으로 육군에서 퇴역했다. 그는 미국 정부의 군사 고문으로 대표하는 것을 중단했으나 민간 차원에서 케손의 고문으로 남았다. 그렇게 그는 필리핀 육군 원수로서 군 장군 경력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듯했다. 그러나 1941년 진주만 공습이 벌어지면서, 그의 운명은 전환점을 맞이한다.

6. 제2차 세계 대전

6.1. 1차 필리핀 전역

파일:Macarthur&wainwright.jpg
웨인라이트와 맥아더

일본과 미국 간의 전운이 감돌고 있던 1941년 7월 26일 루스벨트 필리핀군을 연방군으로 조직하고 퇴역 장군인 맥아더를 동원소집하여 극동군 미 육군 사령관으로 지명했다. 맥아더는 7월 27일 중장으로 승진했고 12월 20일에 대장으로 승진했다. 1941년 7월 31일 필리핀 방면군은 2만 2천명을 배정받았는데 그 중 1만 2천명은 필리핀 척후병으로 조나단 M. 웨인라이트 소장의 지휘를 받았다.

1941년을 전후로 일본 제국과 미국의 외교 협상이 실패로 끝나자 미국은 일제가 선제 공격을 감행할 것을 염두에 두고 레인보우 계획에 이를 반영한다. 당시 미국의 필리핀 방어 계획은 전쟁이 발발하면 마닐라만 바로 옆, 마닐라 항을 봉쇄할 수 있는 천혜의 요충지인 바탄 반도로 후퇴하여 본토에서 지원군이 도착할 때 까지 일본군의 공세를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지연전 대신 필리핀 전역의 해안 지대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고 공군력을 사용하여 루손 섬에 접근하는 일본 선박을 침몰시키는 계획으로 변경했다. 맥아더는 워싱턴 D.C.의 의사 결정권자들에게 자신의 계획이 일본이 전쟁을 선택하는 것을 막고 전쟁이 더 악화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는 최선책을 제시했다고 설득했다. 1941년 7월에서 12월까지 필리핀 수비군은 8500명의 증원을 받았으며 많은 장비들을 선적했는데 11월까지 1100만 톤에 달하는 장비가 미국 항구와 창고에서 필리핀으로 운송해줄 선박을 기다리고 있었다. Station CAST라고 알려진 섬의 해군 요격 기지에는 일본의 외교 소식을 해독하는 1급 비밀암호시스템과 최신 JN-25 해군 코드의 코드북이 있었는데 서덜랜드는 이 Station CAST에서 해독한 정보를 맥아더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41년 12월 8일 3시 30분( 하와이 시각으로 12월 7일 9시) 민간 라디오로 진주만 공습 소식을 확인한 리처드 서덜랜드는 이 사실을 맥아더에게 알렸다. 극동 공군 지휘관 루이스 H. 브레레턴은 전쟁 전 계획인 레인보우 5대로 대만을 공습하자는 건의를 하기 위해 5시에 맥아더를 방문했지만 서덜랜드가 이를 막아세운다. 5시 30분 미국 육군 참모총장 조지 C. 마셜은 맥아더에게 레인보우 파이브를 시행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브레레턴은 추가 명령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고 기다리는 동안 활주로에서 비행기가 파괴되지 않게 하라는 헨리 아놀드의 지시가 오전 8시에 있은 후 극동 공군의 폭격기와 전투기들이 이륙한다. 맥아더는 10시가 지나서 공습을 거부하지만 몇 분 후 명령을 번복하고 늦은 오후에 있을 공습을 준비하기 위해 10시 15분부터 B-17들이 클라크 비행장에 착륙하고 전투기 편대들은 중간에 재급유를 하면서 순찰을 계속한다. 하지만 안개로 인해 늦어진 일본군의 공습이 클라크 비행장을 덮칠 때 전투기들은 완전히 이륙한 상태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일본군 항공기들의 이동을 놓친다. 진주만 공습 9시간 후인 12시 40분 일본 제11항공 함대 소속 폭격기가 이바 필드에서 클라크 필드와 근처 전투기 기지를 공습했다. 그 결과 35대의 B-17 폭격기 중 18대가 파괴되고 107대의 P-40 전투기 중 53대가 파괴되었으며 3대의 P-35 전투기와 25대의 다른 비행기들이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8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150명이 부상당했는데 몇 번의 공격에서 남은 14대의 B-17 폭격기들은 호주로 퇴각하고 극동 공군의 남은 전투기도 몇 주 안에 모두 손실되었다.

맥아더는 전술한 대로 일본군의 상륙을 해안 방비로 저지하려 했으나 전쟁 전 계획했던 것과는 달리 해상과 공중에서 미군이 크게 밀리면서 미국의 해군과 공군은 일제의 상륙을 방해하는데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고 필리핀 해안 전체를 지키려는 맥아더의 계획은 미국-필리핀 연합군을 지나치게 분산시켜 전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손자는 "모든 곳을 지키고자 한다면 모든 곳이 약해진다."라고 말했다. 요컨데 잉여 병사를 만들지 말고 병력을 집중하라는 건데, 이에 따르면 맥아더의 전략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즉, 루손 섬의 작은 부분인 바탄 반도를 요새화하면 이 지역에만 방어 자원을 집중시킬 수 있을텐데, 해안에서 일본군을 요격하는 작전계획은 넓은 해안[11] 전역으로 병력과 방어 자원을 흝뿌려야 하기 때문에 설령 제해권과 제공권을 모두 장악한 시점에서도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전력인데다, 미국의 예상과는 달리 태평양전쟁 초창기 일제의 해/공군 전력은 미국을 압도하고 있었다. [12] [13]

12월 21일 일본군 제16사단이 링가옌 만에 상륙한 후 급속히 진격해오고 마닐라 남쪽의 라몬 만에도 상륙해 북상하자 맥아더는 필리핀 군대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그는 일본군이 상륙한지 2일만에 바탄에서 일본군을 저지하면서 구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기존의 계획으로 되돌아갔다. 이에 대부분의 미군과 일부 필리핀 군대가 바탄으로 철수했지만 거의 모든 물자들이 해안 지대에 남겨졌기 때문에 바탄에는 물자가 매우 부족했으며 마닐라는 12월 24일 자정에 아시아 함대를 지휘하는 토머스 C. 하트 제독과 상의없이 무저항 도시로 선포되었다. 12월 24일 저녁 맥아더는 그의 본부를 마닐라 베이에 있는 코레히도르 섬 요새로 옮겼는데 이후 일본군의 공습으로 섬에 있는 모든 노출된 구조물이 파괴되었고 본부는 다시 말린타 터널로 이동했다. 다수의 사령부 인원은 바탄에 남았고 맥아더는 소수의 참모와 필리핀 정부 인사들과 함께 방공호 속에 계속 있었는데 이에 병사들은 그를 "덕아웃 더그(Dugout Doug)"라고 조롱했다.

한편 일본군은 1942년 1월 7일에서 14일까지 필리핀 침공을 위한 정찰과 전투 준비에 착수했다. 그 후 일본군은 공세를 개시했지만 바탄 현지 미군 장교들의 독려에 힘입은 미국-필리핀 연합군의 반격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필리핀 침공군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는 일본군의 세력을 재편하기 위해 공격 작전을 중지할 것을 명령했지만 일본군은 20사단의 3개 대대가 궤멸되는 등 막심한 손해를 입고 전선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일본군은 제65여단 단독으로 포위를 계속했고 전투는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3월 19일 맥아더가 코레히도르를 떠난 후 일본군은 점차 증강되었고 3월 말부터 100문이 넘는 야포로 포격을 계속한다. 4월 3일 일본군은 100대의 항공기와 300대의 야포의 지원 아래 65여단과 4사단을 선두로 전면 공격을 실시하는데 전투로 피해를 입고 물자 부족으로 인한 질병과 영양실조를 겪어 온 미군과 필리핀군의 전선은 무너졌으며 반격은 후속 공격에 막혀 실패했다. 패배의 와중에도 맥아더는 1942년 1월 1일 필리핀의 마누엘 케손 대통령으로부터 전쟁 전 공적에 대한 포상금으로 자기 참모진과 함께 50만 달러를 챙겨 큰 빈축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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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2월 맥아더는 루즈벨트로부터 호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보다 앞서 루즈벨트는 바탄에서 힘겹게 버티는 맥아더가 미국인들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 그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될 경우 정치적으로 문제가 크고 미국인들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질거라 판단해 그를 호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조지 C. 마셜 육군참모총장은 "맥아더를 호주로 보낼 수 있느냐"는 루즈벨트의 질문에 "그는 그 곳에서 죽으려 합니다. 그를 바탄 반도에서 빼내려면 강경한 어조로 명령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으며 이에 루즈벨트는 강경하게 호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통령으로부터 이 같은 명령을 입수한 맥아더는 웨인라이트 장군에게 지휘권을 넘긴 뒤 가족 전속부관 등 소수의 인원만 대동한채 미 해군 어뢰정 2척을 타고 심야에 호주로 탈출했다. 그는 민다나오의 델 몬테 비행장에 도착하여 B-17 비행기를 타고 호주로 날아갔으며 3월 20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의 테로위 기차역에 도착한 그는 기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여기에 왔고, 나는 돌아올 것이다.(I came through and I shall return.)"

워싱턴 행정부는 맥아더에게 "우리가 돌아올 것"이라는 약속을 수정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그는 이를 무시했다. 그 후 바탄의 미군-필리핀 연합군은 4월 9일 항복했고 코레히도르 섬은 5월 9일 항복했다. 맥아더는 필리핀의 패망을 초래한 책임이 컸지만 필리핀에서 3개월간 별다른 지원도 받지 못하고 일본군에게 항쟁한 영웅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그에게 책임을 물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컸기에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명예훈장을 수여받기까지 했다. 이후 맥아더의 "나는 돌아올 것이다."는 말은 일본에 저항하는 세력의 상징이 되었다.

6.2. 코코다 트랙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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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4월 18일, 맥아더는 남서 태평양 지역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조지 H. 브렛 중장은 연합군부대 사령관이 되었고 허버트 F. 레어리 부대장은 연합군 해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의 군대는 호주군과 미군이 주를 이루었지만, 네덜란드령 동인도, 영국, 및 기타 국가 출신도 소규모나마 가담했다. 맥아더는 호주 총리 존 커틴과 긴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서 호주군을 자신의 입맛대로 부려먹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또한 맥아더는 조지 브렛의 능력을 불신해 1942년 8월 조지 케니 소장이 그를 대신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맥아더는 중앙 정보국으로 알려진 자신의 통신 정보 조직을 구성해 필리핀 정보기관들과 필리핀에서 탈출한 미국인 암호 전문가들로부터 정보를 얻었다.

그러던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이 참패했다. 이에 맥아더는 태평양 지역에서의 제한된 공세를 고려했다. 그의 이러한 계획은 육군 장성이 수륙 양동작전을 수행하는 것에 반대하는 해군의 반발에 부딪쳤다. 이후 협상 끝에, 툴라기 지역에 대한 첫번째 공세를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수행하고 맥아더는 그 다음에 공세를 이끌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먼저 공세를 개시해 7월에 부나에 도착했고 8월에 밀른 베이에 상륙했다. 이에 호주군은 밀른 베이에서 일본군을 격파했지만 코코다 트랙 전투 초기에 일본에게 연이어 패배해 사기가 떨어졌다.

이 패배의 원인은 맥아더의 상황 파악 미비에 있었다. 맥아더는 지형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고 현지 시찰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는 초기에 병력을 배치할 때 "해당 지역으로 가면 작은 구렁텅이가 있으니 그곳에서 방어하라."고 지시했으나, 그 작은 구렁텅이는 7마일이 넘는 계곡으로 밝혀져 도착한 부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게다가 맥아더는 아군 병력이 적보다 훨씬 많아 전황이 유리한데 병사들이 무능하고 용기가 없어서 진격하지 않는다는 착각에 빠져서 군대에게 진격을 독촉하기 일쑤였다. 급기야 그는 워싱턴에 무전을 보내 호주군 병사들을 투지가 없다고 비난했다.

8월 30일, 맥아더는 워싱턴에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뉴기니의 아군이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후 그는 미군 지휘관이 이끄는 호주군으로 구성된 제32보병사단을 부나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군대는 훈련이 잘 되지 않은 민병대였다. 이후 부나-고나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 호주인들은 미군을 비판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고집을 꺾지 않고 로버트 L. 아이켈버거 중장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부나를 되찾아라. 그러지 못하면 다시는 살아서 돌아오지 마라."

하지만 현지 지휘관들은 공세를 독촉하는 맥아더의 명령을 무시하고 게릴라 전술로 일본군을 괴롭혔다. 여기에 일본군이 정글과 산악지대를 무리하게 돌파하다가 엄청난 피해를 입음으로서 전세는 미군에게 유리해졌다. 뉴기니 전역에 동원된 일본군 20만 명 중 18만 5천여 명이 전사 또는 실종되었는데, 대다수는 전투가 아닌 질병이나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반면 미군과 호주군 연합군의 손실은 미군 사상자 1만 2291명(전사자 4684명), 호주군 사상자 2만여 명이었다.

그후 1943년 1월 3일 부나를 되찾는데 성공한 맥아더는 정확한 작전 수행을 완수한 12명의 장교에게 수훈 십자장을 수여했다. 그런데 이 상을 수여받은 이들 중 로버트 아이켈버거와 조지 알란 바시 등 현장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악전고투한 이들은 서덜랜드와 찰스 A. 윌러비 같이 현장에서 싸우지 않은 이들이 자기들과 똑같은 훈장을 받은 것에 분노를 토로했다. 한편 맥아더 자신은 세번째 수훈 십자상을 수여받았고 호주 정부는 그에게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했다.

6.3. 뉴기니 전역

1943년 3월, 합동참모본부는 태평양 군사회의에서 맥아더의 '개구리 뜀뛰기 작전'을 승인했다. 그는 자신의 작전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파푸아 전역 이후에 개략적으로 제시된 태평양 전역에 대한 전략적 개념은 주요 전략 목표에 대대적인 공세를 시행하고 함대가 기습 및 공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직접적인 정면 압력에 의해 적을 점차적으로 밀어낼 수 있지만, 수많은 사상자를 양산할 것은 분명합니다. 요충지는 당연히 취해야 하지만, 적의 대군이 주둔한 섬들을 습격하는 것을 회피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입니다. 엄청난 손실과 느린 진전은 가능한 빨리, 그리고 싸게 전쟁을 끝내려는 제 생각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조건은 해결책과 새로운 무기를 필요로 합니다."

이후 그는 뉴기니 전역을 계획했다. 도로가 없는 뉴기니에서 대량의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수송선들이 오스트레일리아의 전 항구에서 제작되었고 1943년 초에 월터 크루거 중장이 이끄는 제6군 본부가 도착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단 3개의 미군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고 부나-고나 전투와 과달카날 전투에서 소모되었다. 따라서 1943년 남서 태평양 지역의 군사 공격은 주로 호주군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했다.

공세는 1943년 9월 4일 호주군 제9사단의 레이 만 상륙으로 시작되었다. 다음날, 맥아더는 503공수연대의 나자브 상륙을 지켜봤다. 오스트레일리아 7사단과 9사단은 9월 16일에 레이에 모였다. 맥아더는 제7사단에게 카이아피트와 둠푸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제9사단에겐 핀샤펜에 대한 수륙 양동 공격을 지시했다. 이때 맥아더는 필샤펜에 주둔한 일본군이 350명만 있다고 파악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5천명에 달했고, 이로 인해 9사단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11월 초, 뉴기니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필리핀으로 향하는 작전이 시행되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맥아더는 애드미럴티 제도에서 적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항공모함의 보고를 받았다. 이에 맥아더는 에드미럴티 제도 확보를 위한 수륙 양공 작전을 지시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군이 섬 각지에 숨어 있었고, 미군은 제도를 완벽히 장악할 때까지 6주간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했다.

한편, 맥아더는 대단한 이미지 어필과 홍보 능력을 발휘해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전쟁 영웅으로 각광받았다. 이에 1943년 말과 1944년 초, 공화당 내 보수파 세력은 1944년 대통령 선거에 대비하기 위해 맥아더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려 했다. 당시 그들은 공화당의 공식 지명자인 토머스 듀이가 너무 자유주의적인 인물이라며 불만을 품고 맥아더를 대안으로 점찍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1944년 초 필리핀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전까지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후 맥아더는 힌시 만과 웨와크에 주둔한 일본군을 우회하여 자야푸라와 아이타페로 진격했다. 해안에서 600마일을 과감하게 진군하는 맥아더의 이같은 공세는 적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일본군 사령부를 혼란에 빠뜨리게 만들었다. 이 공세는 도박성이 짙었지만 결과적으로 완벽하게 성공했다. 맥아더는 아다치 하타조 중장이 이끄는 일본군 제18군을 웨아크 지역에서 고립시키게 만들었으며 뉴기니를 짧은 시일 내에 성공적으로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6.4. 2차 필리핀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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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7월, 루즈벨트 대통령은 하와이에서 "일본에 대한 공세의 순서"를 결정하기 위해 맥아더를 불러들였다. 니미츠 제독은 대만을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맥아더는 필리핀을 해방시켜 미국의 도덕적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해 9월, 윌리엄 홀시 제독은 필리핀에 공습을 가했다. 적의 반발은 미약했고, 홀시는 레이테 만이 "개방적이고 무방비한 상태"라고 결론을 내리고 레이테 만에 대한 공격에 찬성했다. 이에 루즈벨트는 맥아더의 뜻대로 필리핀 탈환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1944년 10월 20일, 크루거의 제6군이 레이테만에 상륙했다. 맥아더는 경비함 USS 내쉬빌에서 상륙 과정을 지켜봤다. 그날 오후, 그는 해변에 도착했다. 그는 두 무릎이 깊이 빠진 채로 해안으로 걸어간 뒤 미리 준비된 연설을 발표했다.
"필리핀 시민들이여, 저는 돌아왔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군대는 우리 두민족의 피로 봉헌된 필리핀 토양에 다시 섰습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의 일상 생활에 대한 적의 통제의 모든 흔적을 파괴하고 불멸의 힘의 기초, 즉 여러분의 자유를 되찾는 것에 전념하고 헌신할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 육군항공대는 맥아더가 본부를 설립하기로 결정한 타클로반과 바다 위에 있는 미군 함대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전인 레이테 만 해전의 결과 일본 해군 수상함대는 궤멸되었지만, 필리핀에 주둔한 40만에 달하는 일본군은 미군을 상대로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여기에 맥아더와 니미츠 사이에서 호흡이 잘 맞지 않는 일이 종종 벌어져서, 미군의 공세는 지체되었다. 12월 말, 맥아더는 레이테 만에 5천명의 일본군이 남아있다고 판단했고 12월 26일엔 "이번 전역은 사소한 충돌을 제외하고는 끝났다고 간주할 수 있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아이첼버거의 제8군은 1945년 5월에 전역이 끝날 때까지 레이테 만에서 2만 7천명에 달하는 일본군을 전사시켰다.

아무튼 레이테 만을 어느 정도 장악한 맥아더의 다음 조치는 비행장이 있는 민도로 섬 공략이었다. 일본군은 섬 공략을 위해 술루 해에 진입한 미 해군에 카미카제 공격을 감행했고, 이로 인해 미군 133명이 사망하고 190명이 부상당했다. 하지만 섬 공략은 무사히 완수되었고 호주와 미국의 공병들은 2주 내에 3개의 활주로를 운영가능하게 만들었다. 이후 루손 탈환을 착수하기 전, 윌러비는 루손에 주둔한 일본군의 규모를 13만 7천명으로 추정했고 6군은 23만 4천명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루손에 주둔한 일본군이 윌러비의 추정치보다도 훨씬 낮다고 지레짐작하고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루손에 주둔한 일본군의 규모는 28만 7천명 이상이었다.

맥아더의 주요 관심사는 미래의 작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마닐라 항과 클라크 비행장 점령이었다. 그는 현지 지휘관들에게 하루 속히 두 곳을 공략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마닐라를 지키던 이와부치 스지 제독은 미군이 2월 3일 마닐라 북부 경계에 도착하자 마닐라를 죽음으로 지키기로 결정했다. 이후 3주 동안 마닐라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맥아더는 마닐라 주민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공습을 금지했지만, 일본군의 마닐라 대학살로 인해 수십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사망했다. 그후 마침내 마닐라 탈환에 성공한 그는 세 번째로 수훈 십자장을 수여받았다.

마닐라를 취한 후, 맥아더는 그의 필리핀 친구인 마누엘 록사스를 만났다. 록사스는 케손의 뒤를 이어 필리핀 대통령이 된 인물이었고 일본이 필리핀에 세운 괴뢰 정부에서 일하면서 일본군의 지배에 협조했다. 맥아더는 록사스가 미국의 후원자였으며 극비리에 일본군에 대한 사보타주를 이끌었다고 주장하며 그를 보호했다. 이에 대해 역사가 게르하르트 와인버그는 맥아더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고 밝혔으며 이 일은 맥아더가 전후 일본을 어찌 통치할 지를 암시하는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아무튼 마닐라 전투를 마친 맥아더는 중부와 북부 산지로 후퇴한 야마시타 도모유키에게 관심을 돌렸다. 야마시타는 서서히 밀려나면서도 맥아더가 이끄는 미군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맥아더는 필리핀의 나머지 지역을 해방시키기 위해 힘을 기울였고 1945년 7월 5일에 열린 연합군 최고사령부 성명서에서 필리핀이 해방되었고 모든 작전이 끝났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야마시타는 여전히 북부 루손에서 저항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1945년 5월부터 호주군을 보르네오 섬 공략전에 투입해 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공략했다.

이후 미국의 일본을 향한 최후의 일격인 몰락 작전에서, 맥아더는 제20공군을 제외한 태평양의 모든 군대와 육공군 부대의 지휘를 맡았다. 이와 동시에 니미츠는 모든 해군의 지휘를 맡았다. 맥아더는 일본의 침공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워싱턴에 있는 의사결정자들에게 소련이 만주의 관동군을 공격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루즈벨트가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에게 소련의 전쟁 참여 약속을 받아냈고, 소련은 1945년 8월 8일 만주를 전격 침공했다. 결국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1945년 9월 2일, 여전히 산악 지대에서 미군에 저항하고 있던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천황으로부터 항복 명령을 접수하자 산에서 내려와 1만여 명의 잔여 병력과 함께 미군에 항복했다. 이 2차 필리핀 전역에서 투입된 미군의 수는 40만 명이었는데 사상자 및 실종자가 8만여 명이었다. 반면 이에 맞서는 일본군 역시 약 40만 명이었는데 그중 39만 명의 사상자 및 실종자가 발생했고 그중 대다수는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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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2일, 맥아더는 전함 미주리 함에서 정식으로 일본의 항복을 접수했다. 미 해군은 그의 해군 전략가로서의 역할을 인정하여 해군 공로 메달을 수여했다.

6.4.1. 불필요한 전투였는가?

비판자들은 맥아더가 전쟁 후반 자신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대만에 비해 상대적으로 군사, 지리적 가치가 떨어지는 필리핀에 해군의 반대[14]를 무릅쓰고 상륙 계획을 감행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맥아더가 명예회복을 위해 필리핀 탈환을 갈망했다고 보며, 필리핀은 전략상 아무 의미가 없는 전투이기에 대부분의 2차대전 역사책에서는 필리핀 전투가 아예 빠져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맥아더가 40만 일본군을 상대로 39만 명의 사상자 및 실종자를 발생시키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8만에 가까운 전투 손실도 간과할 수 없으며 필리핀 전역에 동원되었던 40만 대군이 오키나와, 이오지마 같은 진짜 필요한 전선에 투입이 되었다면 태평양 전쟁이 1944년 말이나 1945년 초에 이미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필리핀 공방전에서 맥아더가 비판을 받는 또 하나의 원인은 필리핀 전역에서 일본군을 몰아내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필리핀은 전세계에서 섬이 가장 많은 나라이다. 이 때문에 미군의 40만 대군은 소모전을 벌여야 했다. 맥아더가 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호평받는 부분은 '개구리 뜀뛰기 작전'을 기획하여 일본군의 주요 부대와 요새화된 거점을 우회하여 꼭 필요한 섬만 점령하고 일본의 주요 부대들은 고립시켜 말려 죽이며 미군의 희생을 피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필리핀 전투에선 수천개의 섬을 점령하라는 지시를 내려 미군에게 불필요한 희생을 강요하였다. 비판자들은 그동안 개구리 뜀뛰기 작전으로 얻은 이미지를 이 전투를 통해 깎아먹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전국의 주도권은 사실상 태평양 전쟁에서 사라진 맥아더 대신 태평양 전역사령부의 니미츠 제독이 쥐었으며, 필리핀 전투는 쓸데없이 피를 흘린 전투라고 비판한다.

맥아더는 미합중국 해병대에게도 상당히 미움을 받았는데 이는 그가 적전 상륙은 해병대에게 맡겨 온갖 고생 다 시키고는 잔적 소탕과 점령 임무는 휘하 육군에게 맡겨 언론의 주목을 받게하는 수법을 종종 써먹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맥아더가 태평양 전쟁에서 해병대를 대규모로 써먹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니미츠의 해군이 가용 가능한 해병대를 모조리 챙긴 탓이며, 맥아더는 미 육군과 호주 육군만 거느리고 싸워야 했다. 맥아더의 구역에서 해병대가 전투를 한 것은 카트휠 작전의 후반부인 뉴 브리튼 섬 전투가 유일한 사례이며[15] 나머진 니미츠 제독의 구역에서 전투를 치렀다. 다만 뉴 브리튼 섬 작전 막바지에 맥아더가 해병대를 돌려주기 싫어서 일정을 지연시킨 기록은 있다. 어차피 미군 총원 중 해병대는 소수라 니미츠 제독이 직접 굴리기도 모자라, 태평양 전선에 참전한 상륙작전 동원 병력 수만으로도 육군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필리핀 탈환전이 맥아더의 스포트라이트를 위한 무대라는 주장은 지나친 억측이다. 우선 태평양 전쟁 말기의 전황변화와 진행양상은 미국이 필리핀 탈환의 필요성을 느끼게되는 쪽으로 조성되고 있었다. 원래 육군이 주역이 되는 필리핀 탈환에 대안으로 미해군은 대만 침공 쪽을 지지하고 있었다. 대만 침공의 명분과 근거는 대만을 점령함으로써 중국에 있는 지나파견군을 압박할 수 있고 중국군과 협력하여 중국을 해방시키고 일본군을 격파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일본군의 대륙타통작전으로 인해 중국군이 해안선 일대를 대부분 상실하고 전력도 큰 타격을 입으면서 의미가 급격히 퇴색되었다.[16] 결과적으로 대만 침공 계획의 대안으로 오키나와 침공을 염두에 두던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정도를 빼고는 대만 침공에 목을 메고 있었던 해군수뇌부 전체가 난감한 처지에 빠졌다. 미해군이 맥아더의 필리핀 진공보다 설득력있는 대안을 제시하기 어려워진다면 향후 태평양 전쟁의 주도권을 육군과 맥아더에게 내 줄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다급해진 해군은 육군의 본토침공론을 받아들여 대만을 포기하고 이오지마와 오키나와를 다음 전장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필리핀 탈환전 역시 명분과 근거가 충분히 있었다. 정치적인 명분으로는 대선을 앞두고 있던 미국 정치권이나 직접 전투를 수행할 육군에게도 어딘지도 모를 대만(포모사)보다는 인지도가 있는 필리핀이 더 나았다.[17] 미국 입장에서 필리핀의 중요성은 대만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당시 필리핀은 독립이 예정되어 있지만 사실상 미국의 식민지 또는 영향권이나 다름 없었고, 군대를 보내서 해방시키는 쪽이 향후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는데 도움이 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 대만은 명백히 중국 땅이었으므로 해방시켜봐야 미국에게 돌아올 정치적 이익은 거의 없었다.

또, 군사적인 관점에서도 미국에게 있어 대만은 미지의 땅이며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꾸준히 식민지화해왔기 때문에 과연 그곳 주민들이 미군을 적대하지 않고 작전에 장해요인이 되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반면, 필리핀에는 1944년에 이미 26만이나 되는 필리핀 게릴라 조직이 일본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반일 지하활동을 하던 사람들은 그보다도 많았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전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10만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수치였다. 필리핀 탈환시에 현지인의 적극적인 협력을 기대해 볼 수 있었고, 실제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밖에도 남방자원 지대와 일본 본토와의 연결을 완전히 작살낼 기회와 필리핀에 주둔한 일본군 40만 병력이 본토나 오키나와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할 수 있었다. 연합함대를 결전장으로 나오도록 강요하여 최후의 일격을 먹인 레이테 만 해전이 미군의 필리핀 탈환에서부터 비롯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동남아시아에서 일본 본토로 연결되는 자원줄을 끊기 위해 필리핀이든 대만이든 하나는 점령할 필요가 있긴 했다.[18] 군사적으로만 따지면 대만쪽이 더 유리한 측면이 있었지만 필리핀 점령도 나름 근거와 이유가 있었다는 점이다. 해군에서도 홀시처럼 처음부터 필리핀 공략을 찬성한 사람도 있고, 어니스트 킹 제독이나 니미츠 제독 역시 나중에는 동의했다. 즉 미국 최상층부에서 이미 필리핀 공략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필리핀 공략을 주장하고 주도한 것은 맥아더지만 킹이나 니미츠 역시 동의했고 최종적으로 결정한 건 대통령인 루즈벨트이다. 루즈벨트가 맥아더와 니미츠를 불러 의견을 들어보고 최종 결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루즈벨트와 맥아더의 관계는 썩 원만하지 않았다. 그런 루즈벨트가 순전히 맥아더의 체면을 살려주려고 40만 미군을 투입하는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면 이는 명백히 비상식적인 견해이다. 결론적으로 필리핀 진공은 당시 미국의 전쟁 지도부에서 합리적인 대책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더욱이 태평양 전쟁의 진행에 있어서 미국의 전략은 어떤 결정적 역할을 한 '개인'이 수립한 것이 아닌, 합동참모본부나 위원회 등의 집단 의결로 전략을 결정했고 필리핀 탈환 역시 같은 과정을 거쳐 결정되고 진행되었다.[19] 따라서 필리핀 탈환이 그저 맥아더의 독단과 개인적 영달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

7. 연합군 점령하 일본 최고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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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와 쇼와 덴노
1945년 8월 29일, 맥아더는 워싱턴으로부터 히로히토를 포함해 일본 정부 기관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도록 명령받았다. 맥아더는 연합군 최고사령부 본부를 도쿄의 다이치 생명보험 빌딩에 두고 천황을 명목상 일본의 군주로 남기면서도 일본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그는 이러한 통치 방식이 일본인들을 효과적으로 복종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맥아더는 1931년 만주사변 이래 일본을 장악한 몇몇 군국주의 극단주의자들이 일본을 망국으로 이끌었고 천황은 군국주의자들을 막을 힘이 없던 친서구적 '온건파'였다고 주장하며 천황을 보호했다.

이와 동시에, 맥아더는 천황의 신성성을 깎아내림으로써 일본이 다시는 천황을 내세워 전쟁을 벌일 생각을 품지 못하게 만들기로 했다. 그는 히로히토를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불러서 시종들을 모두 물리치고 둘이서 함께 사진을 찍고 이를 신문에 실어 일부러 일본 전역에 배포했다. 이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맥아더 장군과 미군이 일본에 들어온 지 1달이 넘었는데도 천황 쪽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연락을 취할까 했는데 천황 스스로 직접 맥아더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렇게 맥아더를 만나러 왔으나 맥아더의 비서도 아닌 군의관이 그를 맞이했다고 한다.[20] 천황 입장에서는 최악의 모욕을 받은 셈이었으나, 패전국의 수장이라 힘이 없었기 때문에 대놓고 항의하지는 못했고, 대화 자체는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고, 금방 감정을 풀어버렸다고 한다.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신처럼 모시던 천황이 직접 최고급 양복까지 차려입고 불려간데다가 당시 맥아더는 정복도 아닌 (당시에는 규정상 전투복을 겸할 수도 있던) 넥타이도 생략한 육군 열대용 약식 근무복 차림[21]에 시큰둥한 표정과 짝다리 짚고 주머니에 손 넣고 찍힌 사진을 봤으니 진정한 멘탈붕괴의 현장이었다. # 라이프지 사진은 더하다 여기에 1946년 1월 1일 히로히토가 인간선언을 발표하면서 국가신토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었다.

맥아더의 이러한 조치는 내가 일본의 천황보다 위다. 내가 일본의 최고지도자다.라고 한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때문에 역효과가 났는데, 일본인들이 맥아더를 신처럼 숭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천황을 더 이상 신성시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 대상이 맥아더로 옮겨간 것이다. 40만 통이 넘는 팬레터에 엄청난 선물이 맥아더에게 배달되었다고 한다.

일이 이렇게 되자 맥아더도 이건 좀 문제가 있다 싶었는지 그때부터 천황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천황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못하도록 막았고 미국 정부의 천황에 대한 어떠한 조사도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1946년 1월 워싱턴에 천황을 전쟁 범죄로 기소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천황은 살려주는게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기소는 의문의 여지없이 일본 국민들에게 엄청난 반발을 일으킬 것이며, 그 반향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는 모든 일본인을 하나로 묶는 상징이다. 그를 파괴하면 국가가 붕괴될 것이다. (중략) 무수한 기간동안 유지되어야 할 수백만명의 구심점은 필요하다.

한편, 맥아더는 극동 국제 군사재판소에 기소된 전쟁 범죄자들에 대한 형을 확인하고 집행할 책임이 있었다. 1945년 후반 동양 각지의 연합군 군사위원회는 전쟁 범죄로 기소된 5700명의 일본인, 대만인 및 한국인을 심판했다. 약 4300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거의 1000명이 사형을 선고받았고 수백 명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 혐의는 난징 대학살, 바탄 죽음의 행진, 마닐라 대학살 등의 사건으로 발생했다. 이때 맥아더는 이시이 시로와 다른 세균학자들에게 인간의 실험에 근거한 세균전 데이터를 제출하는 대가로 형사 기소에서 제외시켜 후세의 비판을 두고두고 받고 있다. 또한 그는 전쟁 범죄에 연루된 천황과 모든 황실 구성원들을 형사 기소에서 면제시켰다.

맥아더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자로서 일본의 재건, 군국주의의 근절과 민주주의의 도입, 정치 시민의 자유 증진, 민주 정부의 운영을 위한 정책을 수행했다. 1946년 맥아더가 이끄는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천황의 정치적 권한을 완전히 박탈하는 새로운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다. 1947년 5월 3일에 효력이 발생된 이 헌법은 의회의 제정 제도를 확정했으며, 천황은 장관들의 정책에 간섭할 수 없었다. 또한 헌법 제9조엔 전쟁행위 자체를 불법화했으며, 여성의 인권 보장, 기본권 보장, 인종 차별 금지, 의회와 내각의 권한 강화, 경찰과 지방정부의 분권화 등을 명시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울프 라데진스키의 토지개혁도 실시했다. 1947년에서 1949년 사이, 정부의 개혁 계획에 따라 집주인으로부터 약 4,700,000 에이커 (1,900,000 헥타르), 즉 일본 토지의 38%가 구입되었으며 4,600,000 에이커 (1,860,000 헥타르)가 농장 주인에게 재판매되었다. 1950년까지 모든 농지의 89%가 소유자에게 운영되었고 11%만이 임차인에게 운영되었다. 그리고 맥아더의 노동 조합 가입 장려는 큰 성공을 거두어 1947년까지 비농업 인력의 48%가 노조에 가입했다. 그리고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점령 기간 동안 일본의 침략 전쟁을 지원한 거대 재벌들의 해체를 단행했으나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고, 이후 과거의 재벌들은 좀더 느슨한 기업 연합체로 탈바꿈했다.

1948년, 맥아더는 미국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후보자로 거론되었다. 맥아더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들은 미국 중서부의 공화당 보수파들이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미국 대통령직에 그다지 의욕을 보이지 않고 일본에서 절대권력을 누리는 것에 만족했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맥아더 숭배' 현상이 일었다. 불과 3년 전까지 1억 총옥쇄를 외치며 미국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저항을 했던 일본인들은, 정작 항복이후 맥아더가 천황을 눌러버리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에도 막부에 이어 마치 GHQ 막부처럼 점령군 사령관을 ' 외국인 쇼군'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로 인해 일본인들의 세계관에 맥아더가 일본의 지배자로 교체되자, 많은 일본인들이 맥아더에게 편지와 선물을 보냈다. 편지는 점령 첫 해에 가장 많은 양이 배달되었는데, 당시의 우편물 접수 대장은 SCAP(연합군최고사령부)의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1946년 9월부터 1951년 5월까지 연합국 번역통역반(ATIS)에서 44만 1,161통의 편지 엽서를 읽고 처리했다는 공식 기록이 남아 있다. 발신인의 신분은 다양했으며 영어로 씌어 있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일본어였다. 소데이 린지로 교수는 일본 성인 인구의 약 0.75%가 자발적으로 편지와 엽서를 보낸 셈이며, 정복자와 피정복자 사이의 이와 같은 교류는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했다.[22]

거기에는 맥아더에 대한 존경심과 그의 관대함에 대한 감사의 말들로 가득했으며, 편지의 발신인은 맥아더 장군의 '신령님 같은 자비'를 찬양하고, 그를 '살아있는 구세주'라 불렀다.[23] 전쟁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자들은 상관과 천황의 명령이었을 뿐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고 변명하기 급급했다. 심지어 아오모리 현의 한 노인은 "예전에는 아침저녁으로 천황 폐하의 초상을 신처럼 모셨습니다만 지금은 맥아더 장군님의 사진을 향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쓰기도 했다.[24] 농담이 아니라 맥아더는 연합군 최고사령부 최고사령관 시절 일본인들에게 아예 푸른 눈의 덴노 또는 가이진노 쇼군(外人の将軍, 말 그대로 외국인 쇼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을 정도이다. 출처

맥아더는 1949년에 일본 정부에게 권력을 넘겨줬지만 1951년 4월 11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해임할 때까지 일본에 머물렀다. 1951년 9월 8일에 서명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연합군의 일본 주둔의 종말을 고하게 했다.

한편 1945년 9월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했을 때 이른바 맥아더 포고령 혹은 맥아더 포고령 제1호가 발표되었다. 이 포고문을 통해 미군이 직접 한반도를 통치하는 미군정을 선포하였으며, 건국준비위원회는 물론 인민위원회, 자칭 ' 조선인민공화국'은 부정되었고, 심지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그 후 포고령 제2호를 통해 일제강점기 시절 때 일제에 부역행위를 한 인사들이 대거 미군정에 고용되어 편입되었다. 당시 미군은 한반도에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었고 구체적인 통치계획도 없었다. 따라서 미군 입장에선 기존 관료기구를 활용하는게 가장 효율적이었다. 이와 별도로 미군과 대화가 되고 미국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인물들, 즉 미국 유학파 한국인 박사들을 찾아서 미군정 고문에 임명한다. 대체로 개신교회 미국 선교사의 후원으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들이 미군정 치하에서 강력한 실세로 부상한다.

다만 실제 한국에 맥아더의 권한이 미쳤는지는 미지수이며,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한국에 얼마나 관여를 했는지는 아직 실증 연구가 부족하다. 맥아더 자신도 일본의 통치에 집중하여 한국까지 손대려고 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한국에 관심을 보인 것은 6.25 전쟁이 발발한 후의 이야기다. 따라서 맥아더가 해방에서 6.25 전쟁 전까지의 혼란한 한국 정계에 영향을 준 것은 저 포고령 2개 밖에 없었다.

8. 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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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와 이승만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의 남침지시와 함께 북한이 대한민국을 침략했다. 전쟁을 전혀 대비하지 않고 있던 대한민국이 전쟁 3일만에 수도인 서울을 뺏기고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게 되자,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는 유엔군의 한국군 지원을 승인하는 결의안 82를 통과시켰다. 유엔은 미국정부가 지휘관을 선임하도록 권한을 부여했으며,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만장일치로 맥아더를 추천했다. 이로서 맥아더는 일본에서 USAFFE의 사령관을 지내는 동시에 유엔군 사령관이 되었다. 여기에 모든 한국군도 그의 지휘하에 배치되었다.
그 후 6.25 전쟁 초기에 한강 방어선이 붕괴될 위험에 처하자, 맥아더는 이승만이 보는 앞에서 한국군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채병덕은 "200만 남한 청년들이[25] 모조리 징집해서 훈련시키면 침략을 알아서 격퇴해 준다."고 대답했다. 설상가상으로 채병덕은 영어를 거의 못해 통역을 하느라 계속 끊어졌다. 맥아더는 이를 지켜보고 그의 부하인 에드워드 알몬드 육군 소장에게 "저 인간은 구제불능이야."라고 속삭였다. 맥아더는 면전에서는 채병덕을 크게 칭찬하며 돌려보냈지만, 그날 저녁 이승만을 찾아가 채병덕을 보직해임시키라고 요구했다. 이에 이승만은 다음날 아침 기상하자마자 채병덕을 보직해임시키고 정일권을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8.1. 인천 상륙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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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앞바다에 떠 있던 USS 마운트 매킨리급 상륙지휘함 갑판에서 전황을 살피고 있는 맥아더
1949년 오마 브래들리 육군 참모총장은 "대규모 수륙 양공 작전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1950년 7월 무렵 그러한 작전을 계획했다. 맥아더는 낙동강 전선에서 고착된 전황을 확실히 뒤집기 위해서는 적 후방에서 상륙하여 조선인민군을 협공해 섬멸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가 정한 상륙지점은 인천이었다. 이에 워싱턴의 미 국방부와 합참본부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인천 상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상륙이 쉬운 군산에 작전을 수행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군산에 상륙할 경우 적의 보급선을 절단하지 못하고 적의 병력을 포위하지 못해서 비효율적이니 인천에 상륙해 서울을 단숨에 공략함으로서 적의 보급선을 완벽하게 틀어막고 적을 협공해 섬멸해야 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후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는 동시에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 삼척, 남포, 군산에 폭격을 가해 적의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또한 해리스 윌튼 워커 미8군 사령관은 기자회견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은 10월 중순 즈음에 총반격을 감행할 것이다."라고 발언해 적을 속이려 했다. 또한 9월 12일에 루이스 엘리 대령이 지휘하는 미 육군 제1레이더스 중대와 영국 해병대 제41코만도 부대가 군산에 기습 상륙을 시도했다가 철수하고 9월 14일 학도병이 장사 상륙 작전을 시행해 적을 기만했다.

그러나 같은 날 9월 14일, 앞서 첩보 수집을 위해 투입되었던 임병래 중위의 해군 공작조가 북한군에게 발각되자 위기에 놓였고 퇴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임병래 중위는 홍시욱 하사와 둘이 남아 북한군과 교전하였다. 그가 벌어준 시간 덕분에 해군 공작조는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북한군에게 생포되었을 경우, 고문당하여 정보를 누설할 것을 염려하여 마지막에 자결하였다. 후에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의 전공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고, 2012년에는 윤영하급 고속함 10·11번함 PKG-722·723에 그들의 이름을 붙였으며 미국 정부 역시 은성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한편, 조선인민군을 은밀히 지원하고 있던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 마오쩌둥 김일성에게 남포, 원산, 군산 중 하나에 유엔군이 상륙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고 저우언라이는 "인천을 조심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를 주의깊게 듣지 않았고 낙동강 전선이 고착화되자 경기도 일대에 주둔했던 병력까지 모조리 투입하는 바람에 인천에 주둔한 조선인민군은 월미도의 해군 육전대 2개 중대와 인천 시가지의 2개 대대 병력밖에 없었다. 물론 북한도 이런 경고를 아예 귓등으로 흘려보내진 않아서 소련 해군의 도움을 받아 주요 항구에 기뢰를 부설했지만 너무 늦어서 몇개 부설하지도 못했고 그나마도 거의 다 발견되어 조기에 제거되었다.

그리하여 1950년 9월 15일,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과 한국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서울로 진군하여 9월 28일 서울을 완전히 수복했다. 낙동강 전선에서도 인천상륙작전과 비슷한 시기에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었고, 조선인민군은 인천이 공략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체 붕괴되어 낙동강 전선 일대의 조선인민군 병력 중 2만 정도의 병력만이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귀환할 수 있었으며 만 명 가량의 병력은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이 되었다.

8.2. 원산 상륙 작전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서울을 수복하는데에 성공한 맥아더의 앞에는 크게 세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제 10군단을 비롯한 38선 이북으로 북진시키는 것, 하나는 춘천을 중심으로 한 영서지역으로 진출해 북쪽으로 퇴각하고 있었던 북한의 잔존 주력 병력을 추격 섬멸하는 것, 다른 하나는 기존에는 형성되지 않았던 제 3의 전선을 여는 것이었다.

우선 춘천을 중심으로 한 영서지역 진출을 통해 조선인민군의 잔존 병력을 섬멸하는 계획은 사후 6.25전쟁을 평가한 일본측의 주장이나 이는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당시 조선인민군은 대오를 갖춘 질서정연한 후퇴가 아니라 중장비를 버린 채 소총 한자루만 쥐고 태백산맥을 따라 후퇴하는, 얼마 뒤 중공군이 발각되지 않고 연합군과 대치하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이런 병력을 섬멸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실질적으로 작전을 지휘했던 워커 미 8군 사령관의 계획은 첫 번째, 즉 서울에서 대기하고 있던 10군단을 북진의 선봉으로 세우려는 것이었다. 당시 낙동강 전선을 넘어 북상하고 있던 미 1군단은 이제 막 경기도를 향하던 참이었고, 미 9군단은 군산에 있었던 만큼 가장 전방에 있던 10군을 평양으로 진격시키고, 올라오고 있던 1군단을 태백산맥이 열어준 유일한 길인 추가령 구조곡을 따라 원산으로 진격시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미국 합참이나 현장 지휘관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 계획이 성공하면 한반도를 세로로 잇는 가장 짧은 축인 평양~원산 라인을 가장 효과적으로 장악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세 번째 옵션, 즉 제 3의 전선을 여는 길을 선택했다. 10군단을 육로를 따라 북진시키는 대신 병력을 다시 인천에서 선박에 태워 부산을 거쳐 한반도를 크게 우회한 다음 원산 앞바다까지 이동해 원산 상륙 작전을 펼치는 계획이었다.

결과부터 말하면 대단히 성공적이었던 인천 상륙 작전과는 달리 맥아더의 다음 선택이었던 원산 상륙 작전은 처참한 실패로 마무리됐다. 이미 인천에서 당해본 북한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원산에서 다음 상륙 작전이 있으리라는 것을 정확하게 예상하고 수천 기의 기뢰를 원산만에 깔아놓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10월 19일 미국 함대가 원산 앞바다에 도착했으나, 기뢰를 넘지 못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기뢰 제거를 위해 일본에서 소해정[26] 8척까지 동원했으나 기뢰 제거 작전 과정에서 미군 2척, 한국 1척, 일본 1척의 손실까지 봐야했고, 원산 상륙은 그만큼 지연됐다.

그러는 동안 원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면... 이미 한국군 1군단이 동해안을 따라 쾌속 북진하며 원산을 점령했다.(...) 그것도 무려 보름 전에.[27]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당시 미군은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38선을 넘지 않고 있었으나 38선 인근 방어진지를 공격하게 해달라는 한국군의 요청을 대수롭지 않게 수락해버린 워커 사령관 덕분에 동해안에 있었던 국군 1군단이 38선을 돌파, 38선 이북에 있던 양양에 입성했다.여담으로 38선을 돌파한 날이 10월 1일인데, 이 날을 기려 지금도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아무튼 미국보다 좀 더 빨리[28] 38선을 넘어 진격한 국군은 조선인민군의 주력이 낙동강 전선 근처에서 와해된 만큼 동해안을 따라 쾌속 북진할 수 있었고, 대단히 손쉽게 원산을 점령한 것이다. 그동안 동해바다 위에서 고생한 미 10군단은 10월 25일이 되어서야 국군이 이미 뒷정리까지 모두 마친 원산에 '상륙'할 수 있었다.

만약 10군단이 한반도 해안선을 훑으며 원산 앞바다까지 가서 대기하느라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진공상태였던 평양을 향해 육로를 따라 쾌속 진격했다면 10월 19일에야 평양을 점령할 수 있었던 시기를 훨씬 더 당길 수 있었다는 주장도 여기서 나온다. 고작 보름 남짓한 기간이 뭐가 중요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으나, 훗날 중공의 총공세로 다시 38선 이남까지 밀려 내려간 것이 불과 두 달 뒤인 12월 중순이었다. 만약 한반도에서 가장 세로선이 짧은데다 탁 트인 평야지대라 미국의 압도적인 화력과 공군력을 효과적으로 투사할 수 있어 방어에 매우 유리한 전선이었던 평양 ~ 원산 지역을 조기에 점령해 방어선을 구축했거나, 더 빨리 압록강에 도달해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면 불과 두 달 사이에 한반도 전역 수복을 눈앞에 두고 다시 38선이 재붕괴되는 상황을 막거나 최대한 저지해 UN연합군이 훗날 빠르게 무너지다 리지웨이 장군이 부임한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는 상황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맥아더는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전황 역전과 북진의 기회를 만들었지만, 동시에 UN연합군의 핵심 전력 중 하나였던 미 10군단을 원산 상륙 작전으로 크게 우회시키는 바람에 군사적 성공을 결과로 완성시키지 못한 실수를 함께 범한 셈이다.

8.3. 삼팔선 돌파

9월 11일, 트루먼은 38선까지 진격하되 그 이상으로 진군하지 말고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맥아더는 동해의 원산 항에 상륙 작전을 지시했으나 전술된 단락과 같이 실패한다. 그후 9월 27일, 맥아더는 국가안정보장 회의에 "38선 돌파로 소련이나 중국 공산주의 세력이 개입할 위험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각서를 발송했다. 이에 조지 C. 마셜 국방장관은 맥아더에게 "우리는 38선 이북으로 진군하기 위해 전술적 또는 전략적으로 방해받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9월 30일 저우언라이가 미국에게 "38선을 넘으면 중국이 한국에 개입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10월 1일 유엔군 사령부는 38선을 돌파하기로 결정하고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10월 2일, 한국군은 동해안을 따라 육로로 이동해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하였고 서부전선에서도 동부전선에서 공세가 개시된 뒤 10일 후에 북진을 개시했다. UN군과 한국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10월 19일 평양을 공략하고 11월 말에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이르렀다. 이에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만주에 망명정부를 세우라는 지령을 내렸고 김일성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어쩔 수 없이 따르겠다."며 수긍했다가 중공군이 개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중단했다.

1950년 10월 15일, 맥아더는 웨이크 섬 회의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접견했다. 대통령으로부터 다섯번째 수훈 십자장을 수여받은 맥아더는 중공이나 소련의 한국 개입 가능성이 얼마나 되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거의 없습니다. 그들이 전쟁 첫번째 또는 두번째 달에 간섭했다면, 그것은 결정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이상 그들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이상 모자를 쓰지 않습니다. 중국인들은 만주에 30만 명의 군대를 두고 있습니다. 그중 아마도 10만에서 11만 5천명이 압록강을 따라 분포되어 있을 것입니다. 압록강을 가로지를 군대는 5만에서 6만명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공군이 없으며 중국 공산당이 평양으로 남하하려 한다면 우리는 공군을 동원해 가장 큰 도살을 벌일 것입니다."

맥아더는 제8군이 연말까지 일본에서 철수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브래들리가 한 부서가 유럽으로 파견될 수 있는 지 물었을 때, 맥아더는 1월에 사업부를 개설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다만 그는 중공보다는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보다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그러던 10월 말 안산 전투를 수행하던 유엔군은 중국군과 접전을 벌여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맥아더의 부관 찰스 A. 윌러비는 중국의 전쟁 개입에 대한 증거를 무시했다. 그는 7만여 명 정도의 중국군이 북한에 들어갔을 거라고 추정하면서도[29] 그것은 전형적인 중공의 '생색내기'일 뿐 중공이 진정으로 유엔군과 대적할 리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11월 24일 중앙 정보국은 트루먼에게 "한국에 20만 명의 중국군이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중국 공산당이 주요 공세 작전을 개입한다는 증거는 없다."고 보고했다.

한편 맥아더는 11월 24일에 워커의 본부를 방문했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 이 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5시간 동안 전선을 둘러봤다. 나는 부관들과 이야기하면서 크리스마스까지 2개의 사단이 집으로 돌아가길 희망하는 브래들리 장군의 소망을 전했다. 내가 전선에서 본 것은 나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한국군은 아직 상태가 좋지 않았고 전체 전선은 개탄스럽게도 약했다. 중국군이 실제로 강력한 압박을 가한다면, 나는 우리 군대를 철수시키고 북쪽으로 이동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곘다고 결심했다. 나는 정찰을 하고 내 눈으로 보려고 노력하고 내 자신의 오랜 경험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해석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가 회고록에서 저술한 것과는 달리, 당시 맥아더는 자신의 최전방을 시찰했지만 중국군이 북한에 들어왔다는 것을 확인하지 못하고 크리스마스 전까지 압록강 일대를 평정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중국군은 밤에 은밀히 이동하고 낮에는 일반 북한인들 처럼 행동했기에 찾아내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파멸의 순간이 찾아온다.

8.4. 1950년 겨울의 참극

1950년 11월 25일, 중공군 제13군단이 한국군 2군단을 청천강에서 요격하면서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당시 중공군은 산악지대를 통해 신속하게 우회하여 UN군의 후미와 측면에 있는 보급로와 퇴로 등을 차단하며 공격했으며 산지에 매복해 있다가 야간에 기습했다. 또한 그들은 모든 면에서 자신들보다 열세인 한국군 사단부터 격파한 뒤 유엔군을 포위섬멸하는 전술을 효과적으로 실시했다. 이러한 중공군의 포위섬멸전술에 말려든 유엔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평양은 도로 적에게 내줘야 했으며 미군 제8군은 계속 밀린 끝에 12월 중순에 38선 이남으로 퇴각했다. 게다가 1950년 12월 23일 미 육군 제8군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면서 유엔군의 사기는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한편, 맥아더는 11월 28일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에 대해 "전투 상황은 우리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났다.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그는 중공군의 진격속도를 늦추기 위해 압록강 건너편 다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트루먼은 고문들과 긴밀히 의논한 뒤 이를 승인하지 않을 것라고 선언했다. 이에 맥아더가 항의하자, 대통령과 합참의장은 중국의 공역을 침해하지 않는 조건하에 다리를 폭격할 수 있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이지 않은 작전이었고, 중공군에게 완벽하게 압도당한 유엔군과 한국군이 12월 말에 전면 철수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만약 연합군이 청천강에서의 패배 이후 평양을 사수하며 제대로 된 방어선을 펼쳤다면 중공군의 보병 기동전을 차단하며 전세를 유리하게 펼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의 도쿄 사령부는 별다른 대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했으며, 그 결과 미군이 지휘체계도 회복하지 못한 채 대공황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다.[30] 무엇보다 맥아더는 6.25 전쟁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상주하고 있었으며, 그가 한국에 머문 시간은 전쟁중 다 합쳐봐야 몇 주일에 불과했다.

아무튼 상황이 이토록 안좋아지자, 맥아더는 핵 공격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사실 핵 공격은 트루먼 대통령도 고려하고 있었다. 1950년 11월 30일 기자회견에서, 트루먼은 핵공격을 암시하는 발언을 했다.
기자: 대통령님, 원자폭탄에 대한 언급을 되집어 볼 수 있을 지 궁금합니다. 원자폭탄의 사용이 적극적으로 고려되고 있음을 분명히 이해하셨습니까?
트루먼: 늘 해왔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무기 중 하나입니다.
기자: 그것은 대통령님께서 군사적 목적이나 민간인에 반하여 핵을 사용한다는 의미입니까?
트루먼: 군인들이 결정해야 할 문제입니다. 나는 그 일을 통과시키는 군사 전문가가 아닙니다.
기자: 아마도 대통령님이 직접 의견을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트루먼: 저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자: 대통령님은 이것이 UN의 행동에 달려있다고 말했습니다. UN의 승인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트루먼: 아니,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공산주의 중국에 대한 행동은 국제 연합의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현장의 군사령관은 항상 무기 사용에 대한 책임을 맡을 것입니다.

대통령의 이 같은 말은 현재 핵무기를 사용할 권한이 맥아더의 손에 달려있음을 의미했다. 이에 백악관은 "대통령만이 원자폭탄의 사용을 허가할 수 있고 그러한 허가는 주어지지 않았다."며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이 논평은 여전히 국내외의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트루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간 군사 관계에서 가장 민감한 사안 중 하나인 핵무기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었다.
"민간인이 1946년 원자력법에 기술된 권한에 따라 핵무기를 통제한다."

1950년 12월 9일,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핵무기를 사용할 재량권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 시도는 한국의 상황을 회복시키지는 못하지만 파멸적인 후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해 12월 24일, 맥아더는 한국, 만주 및 중국의 다른 지역에 핵을 떨어뜨림으로서 중공군의 진군을 지연시키는 작전을 작성했는데,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34개의 원자폭탄이[31] 필요했다. 코트니 휘트니 소장에 따르면, 맥아더 장군은 북한을 봉쇄하기 위해 방사성 폐기물을 사용해야 한다는 루이스 존슨의 제안을 고려했지만 합동 참모부에게 이를 제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해가 바뀌어 1951년 1월 4일, 유엔군은 서울에서 후퇴했다. 이제 미국 정부는 한국을 완전히 포기하거나 핵을 사용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들은 핵 사용이 중국과의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1950년 2월 소련과 중국이 상대방이 공격을 받으면 전쟁에 나설 수 있는 협정에 서명했기 때문에 소련이 뛰어들어서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한 1950년 12월 미국을 방문한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는 "맥아더 장군이 쇼를 벌이고 있다."는 영국 정부 및 다른 유럽 정부의 우려를 전달했다. 이에 미국 정부는 핵폭격을 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핵폭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32] 이로 인해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의 대립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8.4.1. 맥아더만의 실책인가?

미 극동사령부는 한국, 일본, 류큐 제도, 필리핀, 마리아나 제도, 보닌 제도 등 서태평양 지역의 육•해•공군, 해병대를 총 지휘하는 통합군사령부이고, 당시 맥아더는 이 사령부를 총괄하는 총사령관(CINC)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 내에서 벌어진 군사적 책임은 극동사령관이 지는게 당연하다. 당시 한반도의 미군도 전적으로 극동군에서 통제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 정황을 무시하고, 유엔군과 한국군의 무리한 북진을 고집하다가 일을 그르친 것은 맥아더의 명백한 실책이다.

그러나 이 명백한 실책이 맥아더'만'의 책임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1950년 10월~11월 당시 극동사령부에 정보를 제공하는 미 중앙정보부와 합참본부의 상황 파악은 맥아더보다 낫다고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맥아더의 낙관론에 적절히 조언할 권한이 있었지만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고, 소련과 중공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맥아더의 견해에 적극 동조했다. 실제로 기밀해제된 미 중앙정보부와 합참본부의 1950년 10월과 11월자 비밀문서 중 맥아더의 결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내용이 담긴 것은 거의 없다. 즉, 미 중앙정보부와 합참의 조언 기능이 적절히 작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맥아더 휘하 참모들도 자신들의 역할을 제대로 했다고 보기 어렵다. 가령 제10군단장 에드먼드 알몬드 소장은 중공군의 전면 개입으로 혼란이 극에 달했던 11월 말에도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속적인 공세를 강요했다가 막심한 피해를 초래하고 현지 장교들의 강력한 항의를 못이기고 철수를 허락했다. 그리고 맥아더의 오랜 부관인 찰스 윌러비도 상관의 뜻에 동조해 중공군이 적극 개입할 리 없다는 낙관론을 적극적으로 제기했다. 또한 맥아더의 참모들은 현지 지휘관들의 의견을 맥아더에게 전달하지 않고 자기들 선에서 커트하기 일쑤였고 맥아더가 상황 수습을 어려워하는 시기에 자신들이 대신 맡기는 커녕 같이 당황해했다. 즉, 극동군사령부의 참모들이 사령관의 부당한 명령에 불복종할 의무를 져버린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가 맥아더의 말을 믿었다가 뒤통수 얻어맞았다고 하지만, 그가 상황을 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기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9월 30일 저우언라이가 유엔군이 38선을 도하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위협했고 이후에도 마오쩌둥 등이 미군이 압록강까지 진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경고를 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맥아더가 낙관론을 제기하는 걸 별 의심없이 받아들였고 맥아더의 압록강 진군 요청을 수락했다. 유엔군이 압록강 근처까지 진군할 경우 중공이 심각한 위협을 느낄 것은 자명했지만, 그는 맥아더만 믿고 별다른 고민 없이 수락했다. 그는 훗날 자신은 맥아더가 유능한 군사 전문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믿었다고 밝혔지만, 이는 구차한 변명일 뿐 그는 1950년 겨울의 파멸을 초래한 장본인의 임명권자이기 때문에 그 역시 책임이 있다.

하지만 결국 평양을 점령한채로 더 이상 진군하지 않고 겨울을 보냈으면 설령 중공군이 들어왔어도 자멸할 확률이 높았으니 결국 누가 봐도 이 무모한 작전을 지휘한 맥아더가 뻘짓한거다.

8.5. 해임

1951년 1월, 미군 제8군은 리지웨이 장군의 지휘하에 중국인들을 북쪽으로 밀어냈고 3월에 서울을 탈환하여 38선으로 진격했다. 이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트루먼은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낼 기회를 모색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를 반대하고 중국과의 전면전을 주장했다. 4월 5일,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 조셉 윌리엄 마틴 주니어는 트루먼의 유럽 정책과 전쟁 전략을 비판하는 맥아더의 서신을 의회에서 낭독했다. 민주당 대통령이 임명한 사령관이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의 입을 빌려 대통령의 정책결정에 공개적으로 항명하는 정치적 스캔들을 일으킨 것이다.[33] 이것으로 맥아더의 경력은 끝장났다.

맥아더가 문민통제 원칙을 거스를 정도로 트루먼 행정부와의 정책에 대한 견해차가 크다는 점은 분명했다. 맥아더는 유럽에서의 공산주의 투쟁과 아시아의 투쟁을 분리할 수 없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중공이 소련의 위성국이 되기 위해 소련과 동맹을 맺었으며, 미국이 중국과 전쟁을 확대한다고 해도 소련이 미국과 적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의견은 트루먼 행정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공화당원들조차도 맥아더의 주장을 거의 지지하지 않았다.

또한 맥아더는 대만군의 지원을 요청하자고 주장했다. 1950년 12월 3일, 맥아더는 6.25 전쟁에 대만군대를 파병하고 싶어 하는 장제스의 제안을 받아들이자는 제안을 상부에 건의했다. 맥아더는 중국본토는 남쪽으로 대만군의 공격을 위해 널리 개방되어 있으며, 그와 같은 공격은 한국에 대한 중국군의 압력을 약화시킬 수 있기에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미 합동참모본부도 대만군의 전쟁 참가를 고려했다. 1951년 1월 12일 각서에서, '대만군의 작전에 대한 제반 제한사항을 일소하여 효율적인 대공작전에 기여하게 될 군수지원을 대만군에 제공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맥아더는 후에 청문회에서 자신은 이 문서에 기초하여 대중국 확전을 주장했다고 주장했지만 조지 C. 마셜 합참의장은 그 문서는 유엔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게 될 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 아래서 작성된 것으로 잠정조치에 지나지 않으며, 1월 중순에 한국의 군사적 상황이 호전되면서 이 제안이 무효화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1951년 4월 6일, 트루먼은 마셜, 브래들리, 애치슨, 해리만과 함께 맥아더 해임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해리만은 맥아더의 해임을 찬성했지만 브래들리는 반대했다. 조지 C. 마셜 국방장관은 이 문제를 고려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애치슨은 개인적으로 맥아더를 해임하는 것에 긍정적이었지만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는 트루먼에게 "맥아더의 해임은 행정부의 가장 큰 싸움이 될 것이다."고 경고했다. 다음날 두번째 회의에서, 마셜과 브래들리는 해임을 반대했다. 4월 8일, 합참본부 관계자들이 마셜과 만나 맥아더 장군의 해임은 "군사적 관점"에서 바람직하며 그를 해임시키지 않는다면 민간 당국은 더이상 군대를 통제할 수 없게 된다."고 설득했다. 이에 마셜은 마침내 맥아더의 해임에 동의했고 브래들리도 4월 9일 동의의 뜻을 밝혔다.

1951년 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은 브래들리의 서명하에 맥아더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려 해임시켰다.
"나는 당신을 연합군 최고사령관 직에서 교체하는 것이 미국 군대의 사령관으로서 내 임무가 된다는 것에 깊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매튜 B. 리지웨이 대장에게 즉시 지휘권을 넘기십시오. 귀하는 귀하가 선택한 장소로 여행하는데 필요한 명령을 발급할 권한이 있습니다. 귀하의 교체 사유는 상기 주문에 대한 귀하의 확인과 동시에 공개되며, 다음의 메시지에 포함될 것입니다."

1973년 12월 3일, 타임지 기사는 트루먼과 1960년대 초에 인터뷰한 내용을 실었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한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그가 대통령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고했다. 그는 개자식이었지만, 개자식이었다는 이유로 그를 해고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장군들 중 4분의 3이 감옥에 있었을 것이다."

맥아더의 해임은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여론 조사에서 미국인 대다수가 맥아더를 해임한 결정에 반대했으며 해임 9개월 후인 1952년 2월까지 트루먼의 지지율은 22%로 떨어졌다. 1951년 5월 3일부터 민주당의 리처드 러셀이 주재한 상원 의원위원회는 맥아더의 해임을 조사하고 "맥아더의 해임은 대통령의 헌법 권한 내에 있었지만, 그 상황은 국가의 자존심에 큰 충격을 줬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에 점점 더 인기없는 6.25 전쟁이 계속되었고 여러 차례의 부패 스캔들까지 발생하면서, 결국 민주당은 다음 선거에서 공화당에게 크게 패배했다.

8.6. 정말로 핵 공격을 고집하다 해임되었는가?

지금까지는 맥아더가 중공군을 몰아내기 위해 핵 공격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트루먼 대통령의 반감을 산 것이 해임의 원인으로 알려졌으나, 2020년 기밀이 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기사

오히려 처음에는 트루먼이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적극 언급했다. 그러나 극동사령관을 겸직한 맥아더는 핵무기 사용 여부를 놓고 신중하게 접근했다는 것이다.
맥아더는 6.25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상황이 아니라면 핵무기 사용이 필요하지 않다는 전략도 고려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워싱턴에서 이뤄진 핵무기 사용 논의를 바탕으로 실무적인 사용 계획은 준비했다. 1950년 12월 22일에 작성된 미군 문서에 구체적인 논의 과정과 내용이 담겨있다.

즉,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에서 쓸 카드 중 하나로 고려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트루먼이 핵무기 사용을 반대했기 때문에 핵 사용을 고집하는 맥아더를 해임하려 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다만, 기밀 해제 문서를 토대로 한 논문이 발표된 시기가 2020년이다 보니, 그 전에는 맥아더가 한반도에 핵을 떨구려 한 인물로 인식되었다.

맥아더를 해임한 트루먼 역시 인류 역사상 핵 사용명령을 내린 최초의 대통령이었고 동서냉전과 수소폭탄 개발을 주도한 강성 인물이었다.[34]

9. 말년

1951년 4월 18일, 맥아더는 미국을 떠난 지 14년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하루만에 워싱턴 DC로 날아와 1951년 4월 19일에 6.25 전쟁 수행에 대한 트루먼과의 의견 차이를 밝히고 미 의회에서 은퇴 연설을 했다. 그는 연설을 하는 동안 청중이 지나치게 흥분하는 바람에 50차례나 방해를 받았다. 그의 연설문 중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유명하다.
... but I still remember the refrain of one of the most popular barrack ballads of that day which proclaimed most proudly that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And like the old soldier of that ballad, I now close my military career and just fade away, an old soldier who tried to do his duty as God gave him the light to see that duty.

... 그러나 나는 당시 군대에서 유행하던 노래의 후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후렴의 자랑스러운 귀절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이 노래에 나오는 노병처럼 나는 이제 군인생활을 그만두고 신의 계시를 따라 자기 임무를 완수하려고 노력하여 온 한 사람의 노병으로서 사라져 갑니다.
1951년 4월 19일 미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서 발표한 맥아더 원수 퇴임연설 중...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라는 연설문의 마지막 인사말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연설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맥아더가 젊었을 때 유행하던 유행가(포크송) 가사라고 한다. 그 맥아더가 한 말이라 굉장히 의미심장한 뜻을 내포하는 듯 보이고 또 그렇게 해석되곤 하지만, 사실 원래 의미는 말 그대로다. 경험적으로 봐도 노련한 고참병들은 전투에서 잘 죽지 않고, 어리버리하고 미숙한 신병들만 항상 죽어나간다. 그렇게 고참병들은 신병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끝까지 살아서 무사히 제대하는 것으로 전장에서 사라질 뿐이라는 당연한 내용의 가사이다. 맥아더는 그 유행가 가사대로 오랜 군생활을 잘 마치고 무사히 제대한다는 의미로 인용한 것.

퇴임 직후 맥아더가 뉴욕에서 벌인 시가행진에 모인 사람의 수는 700만 명에 달했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이 기록적인 환영 인파에 정치인들은 크게 당황했다. 일설에 따르면, 차기 대권을 노리고 후보 지명을 기다리고 있던 아이젠하워는 그야말로 좌불안석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간의 우려, 혹은 기대와는 달리, 맥아더는 출마하지 않았다. 말년에 상술한대로 암암리에 문제가 많긴 했지만 어쨋든 많은 승전을 이룬 장수인 것도 맞기에 퇴임 직후 그 인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오르기는 했으나 일반적인 미국인들의 입장에서는 가까운 나라도 아닌 필리핀, 일본, 한국에서의 활약이 많았기 때문에 얼마안가 식어버렸고, 퇴임 전 정계 진출 운운한 스스로도 이를 느꼈는지 제대로된 정계 진출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에 전당대회에서 아이젠하워가 아닌 후보 로버트 태프트를 지지했으나 595:500으로 아이젠하워가 지명되었고, 그 해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후 맥아더는 6.25 전쟁 종식과 관련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요청을 수락하여 백악관으로 가서 의논했다.

이후 맥아더는 레밍턴 랜드 이사회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종신 복무가 가능한 원수 계급의 현역 군인 신분을 법적으로 유지하고 있었기에 받은 육군으로부터의 2만 달러의 급여와 수당 이외의 6만 8천 달러(2016년 기준 61만 2천 달러 상당)의 급여를 받았다.

1960년 맥아더 탄생 80주년을 맞이한 축하 행사에서, 그의 친구들은 맥아더의 명백한 건강 악화에 깜짝 놀랐다. 다음날, 그는 전립선이 심하게 부어올라 세인트 루크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맥아더는 회복 후 인생의 마지막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61년에 필리핀에 인생 마지막 여행을 가서 카를로스 P. 가르시아 대통령으로부터 명예훈장을 받았다. 또한 회고록을 작성하기 시작해 사망 몇개월 전에 완성했다. 그리고 1962년 10월부터 11월까지 미국을 방문 중이던 김종필을 만나 "한국이 하루빨리 통일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죽을 수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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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F. 케네디 대통령 재임 시기인 1961년 민간인 자격으로 자문을 했던 적이 있는데 바로 피그스만 사건 베트남 전쟁이다. 그는 피그스만 사건 실패에 오리발 내밀기에 급급한 펜타곤을 강도 높게 비판했고[35] 강력한 직접 개입을 주장했다. 또한 베트남에서도 더 이상의 개입을 중지하고 조속히 손을 떼야 한다고 역설했다. 도미노 이론에 대해서도 '핵(무기) 시대에 이 이론은 무의미하다'라며 회의적으로 평가했다. 또한 그는 죽기 직전 린든 B. 존슨 대통령에게도 비슷한 충고를 했다. 후일 베트남에 대한 지적은 미군의 패배로 맥아더의 시각이 옳았음이 증명된다.

당시 베트남에 대해 맥아더가 케네디에게 한 발언들을 보면, 앞에서 쭉 언급한 여러가지 독선을 저지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상황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베트남을 비롯해서 아시아 지역에 더 이상의 미군을 추가 파병하면 안됩니다."
“to avoid a U.S. military build-up in Vietnam, or any other part of the Asian mainland,"
"(베트남에) 지상군 전력을 파병하려는 자의 머리통을 확인해야 할 짓입니다."
"Anyone wanting to commit ground troops to Asia should have his head examined"
(베트남에 개입하는 것은)수백만 명의 장병을 도탄에 빠뜨리는, 결코 이길 수 없는 행위이며 제2차 세계 대전 때의 일본과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입니다."
If you do, you will be repeating the same mistake the Japanese made in World War II—deploying millions of soldiers in a futile attempt to win a conflict that cannot be won."
(출처: theamericanconservative.com)

맥아더가 은퇴 후 갑자기 개심하거나 안목이 열린 것은 아니다. 현역 시절이나 민간인 시절이나 여전히 일본이나 필리핀을 제외하고는 아시아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서 피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베트남은 무가치한 부동산일 뿐이었고 차라리 주변국의 연합체로서 수비하거나 잃거나 해도 좋은 나라였다. 문제는 미국 정계와 군계의 유력한 사람 중에 맥아더 정도의 인식 수준을 가진 이조차 거의 없었다. 즉 대부분이 맥아더 수준 미만이었다는 것이 비극이었다.

게다가 베트남을 정말로 잃어버려도 아무 일도 없었다. 매카시즘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지만, 사실 펜타곤의 베트남 정책도 베트남 자체에 대하여 중대한 이권이 걸려 있고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게 아니라 공산화된 중국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견제 심리만으로 무조건 도미노 이론과 연관된 대중 포위망 형성이란 피상적인 대국 전략만 생각하고 설립된 것이었다. 아시아 역사에 대해서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아무리 표면적으로는 같은 공산권이라 해도 베트남이 중국을 덜컥 신뢰하고 그 세력권에 자발적으로 들어간다는게 얼마나 허황된 소리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매카시즘 광풍이 한차례 불고 지나간 미국의 정계와 지식인 사회는 그만큼의 초보적인 현지 사정도 모르거나, 아는 관계자들이 조언을 해도 묵살해버렸다.

그런데, 아시아에 대한 저런 몰이해는 현대의 한국을 보는 미국 정치가 학자들의 시각과도 공통점이 있는데, 90년대 후반에 출판되어 국내 번역된 미래학자, 경제학자들의 전망에는 일본은 독립 경제문명권으로 남을 것이며 반면 한국은 19세기 이전으로 돌아가 거부감없이 중국의 위성국으로 회귀할 것이라 예상한 책이 많았다. 물론 미국의 지도자층이 다 바보는 아니라서 전략적, 전술적으로 베트남전을 비판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매튜 B. 리지웨이였다. 그는 한국에서의 경험을 비추어 제한전 상황에서의 공군력의 우위는 허상이라는 이론으로 북폭을 비판했는데 그게 정확한 지적이었다.

1962년 웨스트포인트는 맥아더에게 실바누스 세이어 상을 수여했다. 맥아더는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의무, 명예, 국가"라는 주제를 가진 연설을 사관 후보생들 앞에서 발표했다.
"내 그림자는 길어집니다. 황혼이 왔습니다. 내 오랜 날은 색조도 빛깔도 사라졌습니다. 그것들은 존재했던 것들의 꿈 사이를 일렁이며 사라졌습니다. 그 기억들은 눈물에 물들고 또 지난 날의 웃음에 위로받고 어루만져져 놀랍게 아름답습니다. 나는 이제, 희미한 기상 나팔 소리를, 멀리서 들려오는 드럼 소리를 그리운 귀로 듣습니다. 내 꿈에서, 나는 또다시 총들의 부딪힘을, 소총의 요란한 아우성을, 이상하고 슬픈 전장의 음울한 속삭임을 듣습니다. 그러나 내 기억의 황혼에서 나는 항상 웨스트 포인트로 돌아옵니다. 그곳에서는 또다시 메아리칩니다: 의무, 명예, 국가라는 단어들이 말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을 부르는 내 마지막이 될 겁니다. 그러나 내가 강을 건널 때에 내 마지막 생각은 부대와, 부대와, 부대(The corps, and the corps, and the corps)가 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파일:258at.jpg
맥아더의 장례식
1964년 4월 5일, 맥아더는 담즙 경변증에 걸려 윌터 리드 육군 의료센터에서 사망했다. 향년 84세.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암살되기 전에 그의 국가 장례식을 승인했으며, 존슨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이 모든 국민이 떠나간 영웅에게 부여할 수 있는 모든 영예와 감사를 베풀며 묻히도록 명령했다. 4월 7일, 그의 시신은 뉴욕시로 이송되어 제7연대장에서 12시간동안 공개되었고 그날 밤 유니언 스테이션 장례식장에서 국회의사당으로 옮겨졌다. 이때 15만 명의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가했다. 맥아더는 버지니아주 노퍽에 묻혔고 4월 11일에 그의 장례식이 노퍽의 세인트폴 성공회 교회에서 개최되었다. 그의 몸은 마지막으로 더글러스 맥아더 기념관 원형 홀에 안장되었다.

10. 진급 이력

11. 참고문헌


[1] 맥(Mac)은 주로 켈트족 계열 아일랜드, 스코틀랜드계 인명에 흔히 사용되는 접두사이다. [2] 바로 1829년에 각각 수석과 차석으로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찰스 메이슨과 로버트 E. 리였는데, 포병, 전술, 행동 부문에서는 메이슨과 리가 공동 선두를 지켰지만 다른 모든 과목에서 메이슨이 리를 꺾고 46명의 졸업생 중 2000점 만점에 1995.5점으로 웨스트포인트 역사상 가장 높은 점수로 졸업했으며, 리는 찰스 메이슨에 이어 46명의 졸업생 중 2000점 만점에 1966.5점으로 웨스트포인트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점수로 졸업했다. [3] 미군은 초창기부터 상비군이 적고 격오지의 경비와 진지 구축, 영토 개척의 임무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공병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래서 공병에 가장 우수한 장교들을 배치하였는데 맥아더 시절에도 그 전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4] Croix de Guerre [5] Schaller, Doglas MacArthur :The Far Eastern General,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pp 10 [6] 이때만 해도 충수염은 주된 요절의 사유이기도 했다. 형과는 사이가 좋았는지 각자의 조카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여줬다. 나중에 친아들인 아서 맥아더 4세는 이 이름을 버리고 잠적했지만. [7]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러한 표현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갈리아 전기의 표현도 "카이사르는~"과 같이 3인칭 서술로 되어 있다. [8] 맥아더는 자신을 촬영한 사진을 '검열'했다. 위엄있는 모습으로 잘 나온 사진만을 골라 보도하게 했다. 이는 일본 점령군 사령관 시절과 한국전쟁시 유엔군사령관 시절에도 계속되었다. [9] 가장 유명한 일화로, 조 안젤로(Joe Angelo)라는 병사는 세계 1차대전 때 패튼의 목숨을 구하고 패튼에게 개인적으로 "용감하다"라고 칭찬받은 군인이었지만, 민간인으로 돌아온 이후 대공항 때문에 일자리가 없어서 보너스 군대에 참가했다. 조 안젤로가 개인적으로 패튼을 설득하러 갔을 때 패튼은 "난 이 새끼 모르니까 당장 쫓아내라"라고 주문했다. 패튼은 후에 "내가 그 새끼 전쟁 이후에 돈도 대주고 얼마나 잘 해줬는데 뒷통수친다"하고 투덜거렸다고 한다. [10] 아이젠하워는 맥아더가 참모총장이던 시절 워싱턴 D.C에서 5년간 부관을 맡았고 필리핀에서 4년간 부관을 맡으면서 총 9년간 맥아더의 옆에 있었다. 맥아더는 아이젠하워를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 중 최고의 사무원."이라고 평가하며 그를 중용했고 아이젠하워가 필리핀을 떠났을 때 그의 대령 진급을 요청했다. [11] 마닐라가 있는 루손 섬의 면적은 남한 전체보다 더 넓은 109,965 km²에 달한다. [12] 여담으로, 제한된 전력을 가지고 지연전을 펴는 대신에 대담하게 해안에서 요격하겠다는 전술적 삽질은 얼마 뒤의 일제가 태평양 전선에서 그대로 되풀이했고, 그때마다 미군에게 처참하게 짓밟힌다. 맥아더의 실수에서 배우지 못한 일제는 매번 많은 피를 흘리고 동남아시아 전역을 대부분 상실한 뒤에야 해안 방어에서 내륙 종심 방어로 교리를 바꾸었고, 그 이후인 이오지마 전투부터는 상륙전을 수행하는 미군에게 큰 피해를 입힌다. 물론 거기에 질려버린 미국은 몰락 작전 대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로 대응했지만. [13] 다만 이러한 비판은 다소 과도한 부분이 있다. 맥아더의 계획은 레인보우 5 에 비해 효과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못했으며 이후의 코코다 트렉 등에서의 맥아더의 행적을 보면 그의 군사적 능력 자체에 의구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애초에 필리핀 방어군이 처한 상황은 중과부적이었다. 레인보우 5의 골자는 지연전이었고, 이는 증원군이 도착할 동안 바탄반도와 코레히도르 섬에서 최대한 버티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구원투수가 될 증원군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부재했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보급 계획도 증원 계획도 대체로 태평양을 건너는 플랜이었는데, 미해군의 태평양 함대가 진주만에서 싸그리 수장당하고 서태평양의 주도권을 미군이 일시적으로 상실해 충분한 보급도 증원도 불가능했다는 말이다. 동남아의 기타 연합군 식민지 혹은 호주를 통한 보급 계획도 존재는 했으나 싱가포르와 말레이 모두 바탄반도가 버티는 와중에 차례로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호주는 증원군 파견 이전에 스스로를 지켜낼 걱정을 해야할 처지였다. 결국 태평양 함대를 상실한 시점에서 증원은 절망적이었고, 보급도 한정되었기에 필리핀의 운명은 결정되었고 맥아더의 방어 계획은 이를 조금 앞당긴 것 뿐이었다. [14] 윌리엄 홀시 제독은 맥아더의 계획에 찬성해서 해군 장성임에도 불구하고 육군인 맥아더와 사이가 굉장히 좋았다고 한다. [15] 더 퍼시픽에 묘사된 그리고 랙키가 정신줄 놓고 요실금을 얻은 글로스터 곶 전투가 이곳. [16] 의외라고 여길 수 있겠지만 1944년도의 미 해군은 일본에 직접적 침공보다는 중국 해방을 우선으로 여겼다. 왜냐면 본토의 일본군을 미군 혼자 상대하면 병력이나 정치적으로 손해가 크지만, 중국에서는 장제스라는 파트너와 손해를 나눌 수 있고 약체화가 되어가고 있는 지나파견군이 상대하기 더 수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7]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라는 말을 상기해보자. [18] 대만도, 필리핀도 점령하지 말고 곧바로 오키나와 및 일본 본토를 공격하자고 주장한 사람도 있기는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조지 C. 마셜. 하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지나치게 모험적인 전술이라고 판단하여 지지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다만, 현대 군사학자들의 연구로는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고 판단하는 경우도 많다. [19] D. Clayton James, Startegies in the Pacific, pp 731 [20] 천황가의 예법에 따르면, 아랫사람이 천황에게 전할 말이 있으면 시종에게 말한 다음, 그 시종이 시종장에게 전달해서 최종적으로 시종장이 천황에게 말한다(반대의 경우엔 역순). [21]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미군 절대 다수가 입었던 주류 복제로 육군과 해병대의 근무복(해군의 카키 근무복과 동일)으로는 병사부터 장군까지 이렇게 입었다. 해군의 경우 역시, 거의 유사한 카키 근무복(견장이 없고 주머니 덮개모양이 다른)이 CPO 이상~제독들까지 착용했다. 열대 지역의 환경을 감안하여 유럽 전선의 미군과는 다르게 넥타이 착용이 별로 없었다. 착용 사례가 궁금하다면 일본의 항복식이 열렸던 전함 미주리 호 함상에서 도열한 미군 육해군 장성의 복장을 보면 된다. 대일 폭격의 책임자로 유럽 전선에서 활약하다 태평양으로 전출온 르 메이 장군도 유럽 전선에선 넥타이 착용에 정복 자켓을 착용했지만 태평양에선 맥아더의 복장처럼 흔히 다녔다. [22] 맥아더가 해리 트루먼으로부터 해임 통보를 받자 일본 전역이 충격을 받았고, 천황이 위로차 맥아더를 방문했을 정도이니... [23] 이는 사실 전근대적 믿음과도 관련이 있기도 했다. 당시 일본에도 천황을 신들의 도움을 받는 사자로 혹은 진짜 신으로 생각하던 사람들도 없던 것은 아닌데 그 신이 통치하는 나라를 이겼으니 맥아더도 신 혹은 구세주와 같은 인물이 된 것이다. [24] 존 다우어 <패배를 껴안고> 최은석 옮김, 민음사 펴냄 [25] 100만명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26] 기뢰를 제거하는 임무를 가진 작은 군함 [27] 10월 11일 저녁엔 이미 원산에서의 시가전까지 끝나고,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원산비행장도 10월 13일에 이미 국군이 접수한 뒤였다. [28] UN에서 북진을 승인한 결의가 나온건 10월 7일이다. 즉 국군의 북진은 사후 승인인 셈. [29] 실제로는 30만 명에 가까웠다. [30] 심지어는 지평리 전투에서 패배할 경우 연합군은 한국에서의 철수도 고려하고 있었다. 이렇게 됐다면 그야말로 지금처럼 분단국으로나마 존속하는게 아니라 북한에 의한 통일로 통일전쟁이 끝났을 것이다. [31] 브루스 커밍스는 26개의 원자폭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32] 당시 많은 미군 장성들과 정치인과 언론인들도 이에 동조했다. [33] 가까이는 오바마 행정부의 아프간 정책을 비판한 뒤 해임된 스탠리 매크리스털 아프간 주둔군 사령관의 사례에서, 멀게는 남북전쟁 당시 노예해방에 반대하고 링컨 대통령을 비판하다가 그랜트 장군에게 북군 사령관 직을 넘긴 조지 매클레런까지 미군의 문민통제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심지어 전자는 오바마 행정부 내 안보팀 인사와 결탁한 사례였으며, 후자의 경우 사석에서의 발언이었다. 그런데 맥아더는 야당원내대표와 결탁하여 대통령을 공격하였으니… [34] 다만 트루먼은 본인이 승인한 두 차례의 핵무기 사용으로 인해 발생한 엄청난 민간인 피해에 대해서는 큰 책임감을 느꼈다고 한다. 결국 소련이 원폭 개발을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더 강한 위력의 수소폭탄을 개발하도록 명령했지만. [35] 반면 케네디에겐 '대통령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 건 아니다'라며 비교적 호의적으로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