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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M : 해병대, H : 명예진급(비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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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arl Haig
KT GCB OM GCVO KCIE
파일:field-marshal-sir-douglas-haig-kt-gcb-gcvo-kcie-commander-in-chief-france-from-38befb.jpg
이름 Douglas Haig
더글러스 헤이그
출생 1861년 6월 19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사망 1928년 1월 29일 (향년 66세)
영국 런던
국적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복무 기간 1884년 ~ 1920년
최종 계급 육군 원수
(Field Marshal)
지휘 올더숏 사령부
(Aldershot Command)
제1군단
(I Corps)
제1군
(First Army)
영국 원정군
(British Expeditionary Force)
본토군 총사령관
(Commander-in-Chief, Home Forces)

1. 개요2. 생애3. 평가

[clearfix]

1. 개요

영국 육군의 장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서부전선에서의 승전을 이끈 장군이지만, 동시에 솜 전투 파스샹달 전투에서의 무의미한 손실로 인해 비난받기도 하는 복잡한 인물이다.

2. 생애

헤이그는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위스키 양조장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헤이그의 집안은 18세기부터 양조장을 운영해왔으며, 헤이그의 아버지 역시 연간 £10,000[2]의 수익을 벌어들일 정도로 부유했다. 하지만 헤이그의 부모님은 모두 헤이그가 18세가 되던 해에 사망했다.

헤이그는 이후 클리프턴 칼리지에 입학했고, 형과 함께 미국 여행을 다녀온 뒤에 옥스퍼드 대학교 브라스노즈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대학 시절에 헤이그는 승마와 폴로를 즐기고 프리메이슨에 입문하기도 했다. 이후 헤이그는 졸업 시험에 합격했지만, 병으로 인해 학기를 놓치면서 학위를 받지 못했다. 샌드허스트에 들어간 헤이그는 다른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상당히 우수한 성적으로 임관했다.

중위로 제7후사르연대에 배속된 헤이그는 미국을 순회한 후, 인도로 파병되었다. 인도에서 대위로 승진한 헤이그는 참모대학 입학을 준비했지만, 수학에서 낙제점을 받아 입학하지 못했다. 인도로 되돌아간 헤이그는 자신이 복무하던 기병대대의 부대대장을 지내다가, 영국으로 되돌아와 기병 감찰감의 부관이 되었다. 그리고 기병 감찰감의 도움으로 마침내 헤이그는 참모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참모대학에서 헤이그는 별로 인기 없는 사람이었고, 사냥 클럽에서도 에드먼드 앨런비에게 회장 자리를 내주기도 했다. 참모대학을 졸업한 후, 헤이그는 이집트로 파견되어 허버트 키치너 장군의 밑에서 마흐디 전쟁에 참전했다. 마흐디 전쟁 초기에 헤이그는 공식적인 직함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전투를 관전하면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후 헤이그는 이집트 기병여단의 참모장교로서 자신의 능력을 드러냈고, 부상자 구출에 힘써 주변에서 빅토리아 십자무공훈장을 받아야 한다고 믿을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옴두르만 전투 당시 기병대대장으로 예비대에 소속되어 있던 헤이그는 이후 임시 소령으로 승진했다.

헤이그는 전쟁성의 자리를 원했지만, 존 프렌치 장군이 지휘하는 제1기병여단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곧 정식 소령으로 진급했다. 곧 헤이그는 여단 참모장으로서 제2차 보어 전쟁에 참전했고, 지역 중령으로 진급함과 함께 기병사단의 부참모장이 되었다. 이후 헤이그는 잠시 제3기병여단장을 지낸 후 기병사단의 참모장이 되었고, 기병사단이 해산하자 지역 준장으로 진급해 게릴라 부대를 상대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가족의 로비를 통해 제17창기병연대장을 맡은 헤이그는 자신의 부대와 함께 남아프리카에서 영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헤이그는 임시 대령 계급을 받았다.

이후 헤이그는 계속해서 제17창기병연대장을 지내던 중, 인도 기병대 감찰감으로 임명되어 인도로 돌아가게 되었다. 인도에서 당시 최연소 소장으로 진급한 헤이그는 영국으로 돌아온 후, 폴로 경기에서 만났던 도로시 비비안과 결혼했다. 전쟁성 총참모부 군사훈련국장에 임명된 헤이그는 당시 할데인 개혁에 따라 새로운 영토군의 창설과 현역 군대의 재편을 주도했다. 헤이그는 참모국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기존에 사령관이 자신의 참모장교를 지명하던 관행 대신 할당된 참모를 데려가도록 했다.

전쟁성에서 일한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은 헤이그는 인도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었고, 중장으로 진급했다. 인도에서 헤이그는 대규모 전쟁 시 인도군을 파병하기 위한 계획을 구상했으나 이는 총독에 의해 거부되었다. 영국으로 돌아와 올더숏 사령관에 임명된 헤이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영국 원정군이 편성되자 제1군단장으로 프랑스에 파병되었다.

헤이그는 전쟁 초기에 제1군단을 이끌고 우세한 전력을 가진 독일군을 막아냈으며, 영국 원정군의 확장과 함께 제1군사령관에 임명되고 대장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전쟁이 지속되면서 헤이그는 보병의 높은 사상률에 충격받아 공격 작전을 자제한 프렌치 총사령관에 의심을 드러냈고 정치적 공작을 통해 프렌치를 해임시켰다.

프렌치의 후임 총사령관이 된 헤이그는 솜 전투를 기획하고 실행했다. 영국군은 솜에서 첫 날에만 영국군 19,240명이 전사하고 35,493명이 부상당하는 피해[3]를 입었고 전략적 목표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지만, 장기적으로 독일군을 소모시켰으며 피를 통해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참호전 능력을 상승시키는 결과를 얻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수상에 취임한 후, 로이드 조지가 영국 원정군을 프랑스군 휘하에 두려고 하면서 1917년 당시 원수로 진급했던 헤이그와 갈등을 일으켰다. 그러나 니벨 공세의 대실패 이후 프랑스에서 혼란이 지속되자 로이드 조지는 프랑스와의 협력을 재고했고, 헤이그는 파스샹달 전투를 기획한 후 실행했다. 그러나 파스샹달 전투에서의 손해에 경악한 로이드 조지에 의해 헤이그의 뒤를 받혀주던 윌리엄 로버트슨 제국총참모장이 사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본토에서의 지원이 축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헤이그는 다시 캉브레 전투를 기획하고 실행했다. 캉브레에서 영국군은 대규모 기갑세력의 집중 운용으로 초기에 성과를 냈지만, 곧 성과를 모두 잃었다.

루덴도르프 공세 초반 영국군은 제5군이 일시적으로 해산하기까지 하는 등,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결국 헤이그는 페르디낭 포슈의 연합군 총사령관 임명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독일군은 제2차 마른 전투에서 한계를 드러냈고, 영국군은 백일 공세 당시 큰 성과를 내면서 승전을 이끌 수 있었다.

종전 직후 로이드 조지는 헤이그에게 자작의 작위를 제안했지만, 헤이그는 이를 거부했고 결국 헤이그 백작, 다윅 자작과 버윅 카운티의 배머사이드의 헤이그 남작(Earl Haig, Viscount Dawick and Baron Haig, of Bemersyde in the County of Berwick)에 서임되었다. 영국 원정군의 해산 이후 헤이그는 잠시 본토군 총사령관을 맡은 후 1920년에 퇴역했다.

퇴역 이후, 헤이그는 영국 군단을 조직해 궁핍한 상이군인을 돕기 위한 활동에 전념했으며,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의 총장을 맡았다. 그리고 6촌의 죽음으로 헤이그 클랜의 족장 자리를 계승받기도 했다.

헤이그는 1928년 66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작위와 가문의 당주 자리는 헤이그의 네 자식 중 유일한 아들이었던 조지 헤이그가 계승했다.

3. 평가

종전 직후 헤이그는 공개적으로 찬사를 받았으나, 솜과 파스샹달에서의 사상자 수가 주목을 받으면서 비판을 받아 솜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윈스턴 처칠 역시 헤이그에 비판적이었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리델 하트 역시 헤이그를 매우 비판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도 주당 사상자는 비슷했고 오히려 같은 지역 출신을 같은 부대에 배치하던 당시 영국 육군의 제도에 의해 과장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헤이그가 사용한 소모전 전략은 당시 가능했던 유일한 전략이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동시에 무능한 장군들을 후원했다는 점에서 비판받기도 한다. 그리고 헤이그는 신기술에 도입에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도입된 신기술의 사용을 권장하는 모습을 보였고 공군 전차의 후원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1] 백작 본인에 대한 경칭 [2] 2018년 기준으로 약 £1,160,000에 이르는 금액이다. [3] 즉 사단 3개분의 병력이 불구가 되거나 전사했다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