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영국의 해군 제독.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2. 일생
2.1. 초기 경력
호크는 1705년 런던에서 변호사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720년 14세의 나이로 해군 장교 후보생으로 입대했다. 1725년 시험에 합격해 중위가 되었지만 평화 시기였기 때문에 1729년에야 배를 이끌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그의 경력은 순조롭게 이어져 1734년 대위가 되었고 1739년 젠킨슨 귀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상선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카리브해 함대에 배속되었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유감없이 잘 수행해 이때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호크는 1737년 부유한 여성인 캐서린 브룩과 결혼했는데,이 결혼은 그가 출세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줬다.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44년, 호크는 툴롱 전투에 참가해 스페인 상선 포더 호를 사로잡는 전공을 세웠지만 이후 프랑스 해군에 의해 파괴되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해군 제독 토머스 매튜스는 툴롱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경질되었지만, 호크는 책임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호크는 1747년 후위대 제독으로 진급했고 같은 해에 피터 워런 제독을 대신해 서부 함대 사령관으로부임했다. 서부 함대는 프랑스 항구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호크는 이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선원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그들의 애국심을 도취시켰다.
그러던 1747년 가을, 프랑스 함대가 서인도 제도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접한 호크는 즉시 출격하여 이들을 기다렸고 그해 10월 2차 케이프 피니스테레 해전에서 프랑스 함선 6척을 나포했다. 프랑스는 이 전투로 인해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이는 그들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1]를 석권하고도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에서 오스트리아에게 돌려줄 정도로 평화를 간절히 원하는 태도를 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호크는 공로를 인정받아 호크 남작에 임명되었다. 이후 호크는 신임 영국 해군 총사령관 안슨 경과 함께 영국 해군 강화에 주력했다.
2.2. 7년 전쟁
1754년 경 북미 식민지를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의 갈등이 고조되자, 호크는 서부 함대의 활동을 재개하라는 명령을 받고 프랑스 해안을 순찰하며 프랑스 항구로 향하는 배들을 나포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이 임무를 매우 성공적으로 수행해 300척 이상의 상선들을 나포했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분노해 상선들을 돌려보낼 것을 요구했으나 영국은 듣지 않았다. 이후 양국의 적의는 급속도로 치솟았고 결국 1756년 초 프랑스는 영국에 선전포고했다.1756년 5월 존 빙 제독의 영국 함대가 메노르카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에게 격파되었다. 이에 영국 해군부는 호크에게 메노르카 섬을 구원하는 임무를 맡겼지만 호크가 막 메노르카 섬 인근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메노르카 수비대가 프랑스군에게 항복한 뒤였다. 이에 호크는 3개월 동안 메노르카 섬과 마르세유 사이를 항해하며 프랑스 상선들을 나포한 뒤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메노르카 섬이나 툴롱 항구 중 어느 한 곳을 봉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존 빙의 지지자들로부터 비난받았다.
1757년 로슈포르를 봉쇄한 호크는 그해 연말에 프랑스 해안에 대규모 육군을 상륙시킬 해군 호위대 사령관으로 발탁되었다. 이 작전은 프랑스 후방 해안에 상륙해 마을을 급습하고 항구를 파괴함으로서 프랑스군이 프로이센이나 하노버를 공격하기 위해 파견했던 병력을 자국 해안선을 지키는 데 빼내게 유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호크는 이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지만 명령에 복종하여 11월에 육군을 호송하여 로슈포르해안에 도착하여 일드엑스 섬을 점령했다. 그러나 육군 사령관 존 모던 경은 프랑스 본토 상륙을 망설였다. 제임스 울프 대령은 로슈포르 항을 충분히 점령할 수 있다고 보고했지만, 모던 경은 여전히 공격을 망설였다. 그러자 호크는 지금 당장 공격하지 않으면 철수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모던 경은 영국으로 철수하는 쪽을 택했다. 이 일로 호크와 모던 경은 군사 재판에 넘겨졌지만 애초에 로슈포르 항을 공격하는 것부터가 무리였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호크는 로슈포르 항을 공략하지 못한 것에 매우 실망해 사람들이 이 일을 언급할 때마다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1758년, 호크는 6개월 동안 브레스트 항의 봉쇄를 지휘했다. 그러나 그는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상급 지휘관의 깃발이 아닌 자신의 깃발을 배에 꽂는 짓을 저질렀다가 심한 질책을 받고 현역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다가 9월 11일 영국 함대와 육군이 프랑스 해안 상륙 작전을 진행하던 도중 생 카스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참패한 후, 호크는 해군에 복귀했다. 1759년, 호크는 프랑스 함대가 영국 본토로 침략하는 것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브레스트와 툴롱 항구에 있는 프랑스 대함대가 서로 합류하는 것을 막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브레스트 항구를 봉쇄했다. 그러다가 폭풍이 몰아치자 이를 피하기 위해 일부 함대를 제외한 나머지 함선들을 채널 제도로 대피시켰던 호크는 11월 20일 브레스트로 복귀하던 중 프랑스 함대가 브레스트 항을 나선 것을 보고 즉시 요격에 나섰다. 이리하여 벌어진 키브롱 만 해전에서, 그는 6척의 전열함을 난파 또는 파괴시키고 1척을 나포시켰으며 2,500명에 달하는 적 병사들을 사살시키거나 익사시키는 대전과를 거두었다.[2] 이 전투는 라구스 해전과 더불어 프랑스의 영국 본토 상륙 작전을 결정적으로 무산시켰으며, 프랑스 해군은 막심한 손해를 입어서 영국 해군이 자신들의 해양 무역을 완전히 차단하는 걸 막지 못해 국내 경제가 피폐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후 호크는 던커크에서 마르세유에 이르는 프랑스 해안을 모조리 봉쇄했고 비앵 하구에 갇힌 프랑스 소규모 함대를 파괴하기 위해 작전을 지휘하다가 대(大) 윌리엄 피트로부터 벨 섬을 공략하라는 명령을 접수받았다. 호크는 이에 대해 안슨 경에게 "벨 섬 공략은 시기상 좋지 않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가 이 내용이 세간에 유출되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피트는 호크에게 벨 섬 공략 작전을 계속 맡기기로 했고, 호크는 1761년 4월 섬 공략에 착수했으나 큰 손해를 입고 실패했다가 6월에서야 공략에 성공했다. 이후 1762년 스페인이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자, 호크는 스페인 상선들을 나포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시기에 그는 스페인 보물선을 노획하는 데 성공했고, 그는 보물선에서 노획한 재산을 토대로 영국 제일의 갑부 중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