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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서울대학교/학내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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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신문 大學新聞 SNU News |
창간 | 1952년 2월 4일 |
설립 | 2014년 3월 1일[1] |
발행인 | 유홍림[2]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 18동 |
분류 | 주간지 |
홈페이지 | www.snunews.com |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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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잠들지 않는 시대정신
“대학시절을 허망하게 날려버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대학신문 기자가 되지 않는 것이다. 머리는 차갑고 가슴이 따뜻한 당신, 우리는 곧 만나게 될 것이다.”
{{{#!wiki style="text-align:right"
- 신형철 문학평론가 (전 『대학신문』 간사)}}}{{{#!wiki style="text-align:right"
서울대학교의 학보사. 1952년 2월 4일 창간되어 2019년 대한민국 학보사 최초로 지령 2000호를 돌파했다. 2022년 창간 70주년을 맞이했다.
2022년 현재 서울대학교 정규학기에 매주 월요일 16면을 발행하며, 발행부수는 9천부이다. 코로나19로 발행부수를 줄이기 전에는 매주 1만 8천부를 발행해 광역시급 지역신문, 중견 경제지에 버금가는 규모를 자랑했다.[3]
서울대학교의 다른 학내 언론과 달리, 서울대학교 총장을 발행인으로 하는 학내 기관이자 서울대학교의 유일한 공식 언론이다. 서울대 조직도
2. 역사
- [ 연혁 펼치기 · 접기 ]
- ||<tablealign=center><tablewidth=85%> 연도 || 내용 ||
1952. 2. 4. 부산 전시연합대학 신문으로 출범하다 1953. 10. 서울 환도 이후 각 대학이 자체 신문을 복간하며 서울대 신문으로 탈바꿈하다 1956. 5. 제3대 대선 부정선거를 비판한 기고문으로 말미암아 학생처 주관으로 제작, 편집의 독자성을 잃다 1960. 4. 4.19 혁명으로 기존의 편집위원회가 자진 해산, 다시 편집국과 학생기자가 편집권을 전담하다 1966. 11. 어용화 시비로 학생기자가 총사퇴하다 1977. 6. 20. 지령 1,000호를 맞이하다 1979 10.26 사태로 모든 언론이 계엄당국의 검열을 받는 와중에도 '계엄철폐', '유신잔재일소' 등을 주장하다 1980. 5. 12. '민주화 열기 날로 고조'라는 제목으로 최초의 호외를 발행하다 1981. 11. 학생 편집권이 제한되자 학생기자가 총사퇴해 무기정간하다 1982. 3. 학부생 기자의 편집권이 크게 제한된 사칙으로 신문 수령거부사태가 발생하다 1986 학생처에서 분리독립하다 1988 학생기자가 편집장을 맡아 편집 자율화를 이루다 1989 가로쓰기를 도입하다 1993 최초로 기자 찬반 투표로 학생 편집장을 선출하다 1995 한글 전용을 시작하다 2002 한국 언론 최초로 만우절 특별호를 발행하다 2004 기사형 광고 게재에 반발해 학생 기자들이 무제호 신문을 발행하다 2017. 3. 13. 학교 당국의 편집권 침해로 1면 백지 발행을 단행하다 2019. 12. 8. 지령 2000호를 맞이하다 2020 종전의 사회부, 문화부, 학술부가 사회문화부로 통합되고, 뉴미디어부가 사진부에서 독립하다 2022. 3. 21. 창간 70주년을 맞이하다
대학신문의 전신은 『서울대학신문』이다. 1946년 서울대가 개교한 이후 한동안 문리대, 사범대, 상과대 등 단과대학별로 신문을 따로 발간했으나, 1949년 3월 종합대학 성격을 강화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각 단과대 신문을 흡수한 서울대학신문이 출범했다. 그러나 서울대학신문은 17호까지 발행한 후, 6.25 전쟁이 발발하며 발행이 중단되었다.
현재의 대학신문은 1952년 2월 4일 부산에서 창간되었다. 당시 6.25 전쟁으로 인해 부산으로 피란 온 각 대학이 전시연합대학으로 통합되었는데, 이 전시연합대학에서 대학 당국과 학생간의 의사소통 기구로써 만들어진 것이다. 1953년 10월 수도를 다시 서울로 환도한 이후 각 대학이 본래 소재지로 복귀하며 차례로 자체 신문을 복간했고, 이에 대학신문은 '서울대 신문'으로 전환되었다.
『대학신문』은 그러므로 종래에 흔히 있었던 어느 한 대학의 교수와 학생간의 동인지와 같은 체제와 내용을 떠나서 범 대학의 공기(公器)로 출발한다. 이리하여 각 대학의 석학 독학들의 주장·견해·연구보고는 물론이요, 국내의 문교행정면(文敎行政面) 학계의 뉴-스와 해외의 학계·문화계의 동향도 수시로 보도하고 그 위에 대학생활 전반의 이모저모를 지면에 수놓아 가면서 서상(敍上) 대학 임무 완수의 협조에 매진하려한다.
{{{#!wiki style="text-align:right"
- 1952년 2월 4일자 『대학신문』 창간호 발간사 중
링크}}}{{{#!wiki style="text-align:right"
당시에는 대학신문뿐만 아니라 서울대의 각 단과대학에서 자체적으로 발행하는 학보도 있었다. 그러나 환도 이후 대학신문이 서울대 전체를 포괄하는 신문으로 발전하며 각 단과대 신문의 필요성은 점차 감소해, 학보나 교지 등으로 통합되었다.
전후 서울대 신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한 후,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를 관통하며 대학신문은 많은 부침을 겪었다. 서울 환도 이후 연건동 서울의대 구내에 위치했던 대학신문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 첫 필화사건을 겪었다. 1956년 5월 28일자 신문에 제3대 대선에서의 자유당 부정선거를 비판한 법대 황산덕, 한태연 교수의 기고문이 문제시 된 것이다. 당국은 신문 인쇄를 중단시키고, 배포된 신문을 회수한데 이어 편집국장을 사퇴시키는 소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학신문은 학생처가 제작, 독자적인 편집권을 상실했다. 학생처의 개입 외에 1949년 서울대 개교 직후 설치된 학도호국단도 학생의 언론활동을 제약하는 요소였다.
1959년 연건동 서울의대 구내에 자리잡은 대학신문사 사옥 전경
1960년 4.19혁명은 대학신문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기존의 편집위원회가 자진해산하며 다시 편집국장과 학생기자가 편집권을 갖게 되었다. 학도호국단이 해체되며 단과대 학생회와 총학생회가 조직되고, 덩달아 학생 언론의 자율권 역시 크게 신장됐다. 그러나 1년 남짓 지나 발생한 5.16 쿠데타 국면에서 쿠데타 세력을 옹호하는 기사가 실리며 대학신문의 비판정신이 급격히 후퇴했다. 이후 대학신문은 고취된 대학생들의 정치적 요구와 대학 당국 및 정부의 압력 사이에서 방황하다, 1966년 11월 대학신문 어용화 시비가 터지며 학생기자가 총사퇴하는 파국을 맞이했다. 이후 대학신문은 사회 비판의 기능을 급격히 상실하고, 학술 보도 위주의 신문으로 변화했다.
1975년 박정희 정권이 발동한 긴급조치 9호로 인해 1976년 학생회가 다시 학도호국단으로 개편되고, '학생간행물 발간지침'이 학장회의에서 확정되며 언론 활동에 심각한 제약이 가해졌다. 학생간행물의 수록 내용은 학술 활동으로 제한되었고, 간행물 발간 전체 과정에서 총장 또는 학장이 임명한 지도위원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 오직 승인을 받은 내용만이 보도될 수 있었고, 편집 학생은 평점 2.3(C+) 이상이면서 징계 이력이 없는 학생으로 제한됐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가 극에 달했던 이 시기 대학신문은 사회 비판의 기능을 거세당한 채 가장 어두운 나날을 보냈다.
이무렵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대학신문도 함께 터를 옮겼다. 종전 서울의대에 자리잡았던 대학신문은 새로 지은 관악캠퍼스 정중앙에 위치한 중앙도서관 6층으로 이사했다.
1979년 10.26 사태가 발생하자 대학 민주화의 열기가 들불처럼 퍼졌다. 당시 정국을 장악한 계엄당국이 모든 언론을 검열하는 와중에도 대학신문은 '계엄철폐', '유신잔재일소'등을 주장하며 '잠들지 않는 시대정신'의 귀환을 알렸다. 해를 넘긴 1980년 5월 12일에는 '민주화 열기 날로 고조'라는 제목으로 최초의 호외를 발행했다.
그러나 1980년 5.17 내란으로 전두환이 권력을 완전히 찬탈하며 대학 민주화는 또다시 좌절되고 말았다. 덩달아 대학신문도 편집권을 제한당했고, 신문이 다루는 사안은 학내 문제로 축소되었다. 끝내 1981년 11월 2일자 1면 기사인 대학축전기사가 문제가 되며 재직중이던 학생기자가 집단 사표를 제출하며 징계를 당해, 대학신문은 무기한 정간에 돌입했다. 1982년 3월 개강과 동시에 학부생 기자의 편집권이 심각하게 제한된 새 사칙 하에서 신문 발행이 강행되자 학내에서는 대학신문 수령거부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학당국의 어용신문이 된 대학신문은 서울대 학생 독자의 신뢰를 잃었고, 1982년과 83년 두 차례나 화형식을 당하기도 했다.
그 때 대학신문사는 시간의 한 가운데 떠 있는 하나의 섬과 같았다. 우리는 시간의 파도를 헤치고 도서관 6층의 대학신문사를 설산의 등반대처럼 악전고투하며 올랐다. 대학신문사 복도와 계단은 항상 어두웠고 실존과 역사의 무게는 어둠의 한 자락 끝에 덩이져서 우리의 내면에 달라붙었다. 퇴계로에서 악을 쓰면서 만든 신문은 그 다음날이면 불태워지거나 버려지거나 어용신문으로 매도당하기도 했다. 그 때 우리는 정말 어용신문을 만들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우리의 실존은 정말 형편없는 것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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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영복 문학평론가, 1985~1986년 학생기자}}}{{{#!wiki style="text-align:right"
1983년 12월 전두환 정권은 학원자율화조치를 발표하며 이른바 유화국면을 조성했다. 얼어있던 학생운동 세력은 차츰 전열을 가다듬었고, 1984년 3월 서울대생들은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해 본격적인 학생 자치, 민주화 운동에 나섰다. 대학신문은 이 과정에서 언론의 소임을 다하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학생 기자들의 편집권 제한은 차츰 해어되었고, 마침내 1986년 학생처에서 분리 독립하기에 이르렀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는 학내 민주화와 언론의 자유가 더욱 더 진전되었다. 1988년에는 학생기자가 편집장을 맡으며 편집의 자율화를 달성했고, 1993년에는 최초로 기자 찬반 투표로 학생 편집장을 선출하기 시작했다.
편집권을 확보하며 학생 언론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했지만, 대학신문에는 또다른 위기가 닥쳤다. 군사정권 시절 모든 언론이 검열을 당하는 와중에도 학생 언론은 정권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자연히 대학생 사이에서 기성 언론보다도 학생 언론을 선호하는 풍토가 생겼다. 이런 지지와 성원에 힘입어 전성기 대학신문은 10만부 이상을 발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언론 통제가 완화되고, 기성 언론이 제 목소리를 내면서 학생 언론이 설 자리는 서서히 좁아졌다.
이에 대학신문은 신문의 질을 제고하고자 스스로 혁신을 시도했다. 1989년에는 상당히 이르게 가로쓰기를 도입했고, 1993년에는 생생한 현장의 모습을 보도하기 위해 사진부를 신설했다. 1994년에는 책면과 과학면이 신설되었고, 사회부가 취재부에서 독립하며 보도의 전문성을 제고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1995년에는 한글전용을 시작했다.
상황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위기는 항상 있어왔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 위기는 존재하는 그 모든 것에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위기가 있었기에 저항이 있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발전 혹은 진보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위기가 없는 것은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요. 저는 이것을 ‘운동’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선배들은 매학기를 ‘최악의 학기’라 이름 붙였습니다. 그만큼 신문사의 위기는 매학기 있어왔고, 보기에는 아래로 끝없이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항상 절망적이었고, 때로는 패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선배들은 언제나 해답을 찾았습니다. 학생편집권도 되찾았고, 사회부도 건설했고, 고학번 기자를 뽑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번 주까지 우리는 대학신문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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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용, 1997년~2000년 학생기자}}}선배들은 매학기를 ‘최악의 학기’라 이름 붙였습니다. 그만큼 신문사의 위기는 매학기 있어왔고, 보기에는 아래로 끝없이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항상 절망적이었고, 때로는 패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선배들은 언제나 해답을 찾았습니다. 학생편집권도 되찾았고, 사회부도 건설했고, 고학번 기자를 뽑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번 주까지 우리는 대학신문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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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후반부터는 인터넷의 보급으로 학생 언론의 위기가 심화되었다. 편집권 분쟁과 예산 축소, 학생들의 무관심 속에서 많은 대학 언론이 존폐의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도, 대학신문은 여러 차례의 지면 개편을 단행하며 국내 최고 학보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2002년에는 한국 언론 최초로 만우절 특별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서구에서는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기획이지만, 비교적 경직된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시도는 파격이었다. 만우절 대학신문은 학내외에서 큰 화제가 되며 관련한 연구가 아뤄지기도 했다.
2004년에는 한차례 편집권 분쟁이 발생했다.
2005년 농생대 옆 75동 건물로 이전했다.
2017년 편집권 분쟁이 또다시 발생하며 초유의 백지 발생 사건이 발생했다.
2019년 지령 2,000호를 돌파했다.
2020년 1학기 초유의 코로나19 사태로 3월부터 4월 초까지 발행에 차질을 빚었다. 이 기간 지면은 발행되지 않고, 온라인 기사가 업로드되었다.
2021년 초 75동 건물의 재건축이 되며 18동 임시 사무실로 이전했다.
2022년 창간 70주년을 맞이했다.
2.1. 참고
서울대인의 목소리 - 학생간행물 둘러보기(1)서울대인의 목소리 - 학생간행물 둘러보기(2)
대학신문 안내데스크 - 연혁
3. 현황
2023년 현재 학생기자단은 편집장단 아래에 취재부, 사회문화부, 사진부, 뉴미디어부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대 재적 학부생과 대학원생 중 공개모집으로 선발하는 학생기자단 외에 서울대 조교 신분으로 임명되는 간사단, 서울대 교수가 임명되는 주간단,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업무국이 있다. 전체 인력은 약 50명 수준이다.- 집장단 - 편집장, 부편집장
- 취재부 - 학내 사안을 다룬다.
- 사회문화부 - 종전의 사회부, 문화부, 학술부가 통합된 부서로 학외 사안을 다룬다.
- 사진부 - 사진 보도를 담당한다.
- 뉴미디어부 - 사진부에서 독립한 부서로,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운영 및 영상 보도를 담당한다.
36명 내외로 구성되는 학생기자단은 매 학기 공개 모집을 통해 선발한다. 본래 학기가 시작되는 3월과 9월 무렵에 공채 기자를 모집하고 결원이 생기는 경우 특채 기자를 모집했으나, 2022년부터 신입 기자의 의무활동 기간이 종전 4학기에서 3학기로 줄어들며 모집 시기가 6월과 12월로 바뀌었다.
사무실은 서울대 18동 자연과학관1을 임시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본래 농생대에 위치한 75동 2층을 단독으로 사용했으나, 75동 재건축 공사가 시작되며 현 위치로 이사했다. 2024년 중순 재건축 공사가 완료되면 75동으로 복귀할 예정이다. 새로 건축되는 75동에는 대학신문사 회에도 총동창회, 서울대 역사관 등이 입주할 계획이다.
1990년대부터 지속되어 온 학생 언론의 침체로 인해 많은 학보사들이 축소 운영되고고 대학 본부로부터 편집권을 침해받는 와중에도 수십년에 걸친 편집권 확보 노력으로 오늘날 서울대 본부로부터의 절대적인 독립을 보장받고 있다. 일부 대학 학보사들이 사실상의 대학 본부 기관지로 전락한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4. 특징
5. 사건 사고
5.1. 2004년 무제호 신문 발행 사건
2004년 11월 15일에 제호와 광고, 기고문이 모두 삭제되고 학생 기자들이 작성한 기사와 칼럼만으로 '무제호 대학신문'이 발행되었다. 서울대 동창회보의 기사형 광고를 게재하라는 당시 주간 교수의 지시에 학생기자들이 반발하면서 발생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한동안 대학신문 발행이 중단되었고, 당시 총장을 비롯한 많은 관계자의 합의가 이뤄진 후에야 다시 정상 운영되었다. 참고5.2. 2008년 허위 인터뷰 사건
2008년 일부 기자가 기사를 작성하며 인터뷰에 응하지 않은 학생의 이름을 무단 도용해 실제 말하지 않은 내용을 마치 해당 학생이 말한 것처럼 보도해 논란이 일었다. 서울대 자치언론인 서울대저널의 취재 결과 이전에도 유사한 사례가 몇건 더 있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결국 해당 기자에 징계 조치가 내려졌고 대학신문은 지면에 사과문을 게재했다. 서울대저널 보도 한겨례, 서울대 대학신문, 허위 인터뷰 게재 '물의'5.3. 2017년 편집권 침해 및 백지발행 사건
2016년 1월부터 계속되어 온 주간 교수와 대학 본부의 편집권 침해에 함의해 대학신문 학생 기자단이 2017년 3월 13일자 신문의 1면, 광고, 사설 등을 백지로 발행한 사건이다.당시 편집권 침해를 주장한 기자단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 삼성전자 반도체 산업재해와 시민단체 반올림을 다룬 기사의 게재를 당시 주간이 "논점이 노동자의 입장에서만 작성되었다"는 이유로 거부함
- 데스크는 사측의 입장을 추가하겠다고 밝혔지만, 주간은 끝내 기사 게재를 거부하며 해당 기사는 보도되지 못했다.
- 해당 기사 게재를 거부한 배경과 관련해 삼성의 광고를 수주한 정황이 있다.
- 주간이 기자단에 알리지 않고 독단적으로 서울대 개교 70주년과 관련해 학기당 5개의 기획 기사를 내보내고, 그 대가로 지원금을 받은 계약을 서울대 본부와 체결했다.
- 2016년 10월 시흥캠퍼스 추진 논란에 대한 전체학생총회가 성사되었는데, 기자단은 이를 취재한 기사를 1면에 배치했다. 그러나 주간은 1면에 전체학생총회 사진과 서울대 개교 70주년 기념 사진을 같이 실을 것을 요구하고, 몇몇 기사의 단어를 바꾸라고 지시했다. 이에 편집장은 대학신문의 편집권이 학생기자단에 있다고 항의했으나 주간은 발행인인 총장에게 최종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다. 시흥캠퍼스 논란은 2017년 3월 서울대학교 본부 폭력 사태 참고.
- 위 사건들에 항의하는 서한을 주간에게 보냈으나, 오히려 예산과 인사 권한을 무기로 기자단을 압박했다.
대학신문 운영위원회는 위와 같은 편집권 침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편집권과 관련해 사칙을 개정할 필요성은 인정한다는 취지의 결정을 기자단에 통보했고, 이에 기자단이 호응하며 4월 3일부터 정상 발행됐다.
서울대저널, 협력부처장실 확대간부회의 메모, 본부 <대학신문> 통제 의혹
경향신문, '백지발행'서울대 대학신문 편집장 "주간교수, 삼성 광고 따온 후 반올림 기사 누락"
동아일보, 서울대 학보, 65년만에 1면 백지 발행
5.4.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설문조사 보도 논란
6. 출신 인물
7. 기타
이름에 '서울'이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창간 당시 6.25 전쟁으로 인해 여러 대학이 함께 있던 전시연합대학의 학보였기 때문이다.2002년 만우절이 대학신문 발행일인 월요일과 겹치자, 대학신문은 1573호 마지막 면인 12면을 서울대의 현안문제를 풍자하는 기사로 채워 발행했다. 학보사는 물론 기성 언론을 통틀어 만우절판이 발행된 것은 대한민국에서 전례가 없는 일로, 발행 당시 큰 화제가 됐다. 관련하여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진이 논문을 내기도 했다. 만우절판 『대학신문』의 가상기사에 대한 수용과 반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