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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하철 참사/관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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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하철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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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례
2.1. 굿데이 강수진 기자의 몰지각한 기사2.2. 녹취록 조작 사건2.3. 희생자를 2번 죽인 증거인멸2.4. 지하상가의 문제2.5. 생존자들의 후유증2.6. 기적의 사진2.7. 대형 낚시에 성공한 글짓기2.8. 조희팔에 속아 넘어간 유가족2.9. 희생자 개인정보 유출 사건
3. 사건 이후
3.1. 고인드립
3.1.1. 안양 LG 치타스 서포터의 불전동차 드립
3.2. 추모공원, 위령탑 문제3.3. 사건 이후 문화의 변화3.4. 사건 이후 방송 편성3.5. 통곡의 벽3.6. 유족과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인근 상인회의 갈등
4. 유사 사례5. 관련 문서

1. 개요

대구 지하철 참사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실은 문서다.

2. 사례

2.1. 굿데이 강수진[1] 기자의 몰지각한 기사

연예 > 굿데이 2003년 2월21일 오전 10:54
지하철 참사 " 파이브 오빠들이 저를 살렸어요"

"파이브 오빠들이 저를 살려줬어요!" 올 상반기 최고의 신인으로 각광받고 있는 4인조 R&B 그룹 파이브의 한 팬이 대구 지하철 참사와 관련해 감사의 편지를 보내와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 18일 "명랑해영" 이라는 닉네임의 이 팬은 파이브의 공식 홈페이지에 "오빠들 덕분에 살았다" 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글에 따르면 이 팬은 사고가 나기 바로 직전 대구 중앙로역 입구 계단을 반쯤 내려가고 있었다. 그때 중앙로역 부근 레코드 가게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파이브의 "걸" 이 울려퍼지자 이 노래를 듣기 위해 계단을 되짚어 다시 올라갔다.

이 팬은 "오빠들의 노래를 그냥 지나칠 수가 있나. 다시 계단을 올라가 레코드점 앞 TV모니터로 오빠들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펑" 소리가 났고 검은 연기가 솟구쳤다" 며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당시를 회상했다.

"생명의 은인으로 평생 기억하겠다" 는 이 팬은 최근 소속사 측에 "꼭 한 번 찾아가 고마움을 표시하겠다" 는 약속을 남겼다.
이 기사의 오류는 근처에 레코드 가게가 없었다는 것과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은 폭발 사고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안 한 인터넷 사이트가 이에 대해 추궁했고 결국에는 부풀려진 이야기였음이 확인되었다. 당사자는 노래가 아닌 지인의 휴대전화로 피해를 모면했다는 것이다.[2]

당시 근거 없는 찌라시성 연예 기사로 인해 비난을 받고 있던 굿데이(現 스포츠경향)와 강수진 기자는 이후 더욱 거센 비난을 받았다. '펑' 하는 소리가 팬터그래프와 가선 사이에서 발생한 스파크로 인한 폭발음이라는 얘기도 있기는 하지만 지하철이 LPG통이나 석유 탱크라도 실어 나르고 다니는 게 아닌 이상 팬터그래프 스파크로 인한 폭발음은 절대로 밖에서 들릴 정도까지 크지 않다.

2.2. 녹취록 조작 사건

대구지하철 참사 / 사령팀장이 녹취록조작 지시, 조직적 공모 확인
경향신문 2003-03-04 (사회) 19면 45판 815자 스크랩

대구 지하철공사 종합 사령팀장이 기관사와 운전사령 간의 유·무선 교신 내용을 기록한 테이프 녹취록 조작을 지시하는 등 간부와 직원들이 조직적으로 녹취록을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을 수사중인 대구 지방 경찰청은 3일 "사고 발생 후 종합 사령팀장인 곽모씨(51)가 운전사령 조모씨를 통해 통신사령 한모씨에게 '(녹취문을 작성할 때)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없애라' 고 지시한 사실을 확인했다" 고 밝혔다.

경찰은 종합 사령실 3명과 감사부 직원 3명 등 적어도 6명이 공모, 1080호 기관사와 운전사령 간의 휴대전화 통화 내역을 녹취록에서 누락시킨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삭제 경위를 조사 중이다. 특히 경찰은 2개 부서 간부와 직원들이 녹취록 조작에 개입한 데다 곽씨가 사고 발생 이후 수시로 윤진태 전 사장에게 사고 관련 내용을 직접 보고한 점 등으로 미뤄 윤 전 사장 등 경영진과 고위 간부들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이 날 윤 전 사장 등을 재소환, 조사를 벌였다. 경찰은 종합사령팀장 곽씨가 '마스콘 키' 와 관련한 구체적인 부분에 대한 삭제를 지시했는지, 포괄적인 삭제 지시를 했는지에 대한 당사자들 간의 진술이 엇갈려 이 부분에 대해 대질 심문 등을 벌였으며 구체적인 역할과 경위가 드러나는 대로 증거 인멸 혐의를 적용, 사법 처리할 방침이다. 또 윤 전 사장과 감사부장 오모씨 등 고위 간부들에 대해서도 녹취록 삭제 지시나 개입 여부가 드러나는 대로 사법 처리키로 했다.

한편 이번 사고로 중상을 입고 대구 동산의료원에서 치료를 받아오던 이순자씨(63.여)가 이 날 숨짐에 따라 사망자는 추정 198명으로 늘어났으며 부상자 수는 145명으로 집계됐다. 최슬기 기자
피해가 커진 이유 중에는 기관사의 무책임한 대응도 포함되어 있다. 화재가 발생한 역을 지나치거나 재빨리 발차했다면 피해가 줄었겠지만 정차한 뒤 문을 닫고 마스콘 키를 뽑은 뒤 도망친 행위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변명의 여지가 없다. 단, 한 가지 간과해야 되고 그에게 변명의 여지를 줘야 하는 것은 그 상황에서 기관사는 아무런 권한도 없었다는 것이다.

해당 지휘 통제실에서 늑장 대응을 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게다가 언론에 공개하지 않았던 녹취록에서는 '통제실에서 차를 죽이고(키를 빼고) 나가라'는 지시를 한 것이 확인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관사의 행위가 용서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기관사가 모든 것을 뒤집어쓴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당시 관련자들의 처벌이 어떤가 하면 1080호 기관사 최상열은 열차의 출입문을 닫아버려 승객들의 탈출을 막아 많은 사상자를 내게 한 점에서 금고 5년이, 1079호 기관사 최정환과 가장 먼저 화재 사실을 연락 받은 관제사 방정민에 대해서는 초동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각각 금고 4년, 홍순대 등 나머지 관제사들에 대해서는 각각 금고 3년에서 1년 6개월이 선고되었으며 그 밖의 역무원이나 시설 책임자들에 대해서는 직접 책임이 없다고 하여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이에 대해 '다른 국가라면 이런 약한 처벌은 없었을 것이다' 등의 비판이 가해지기도 했다.

정확한 판단을 위해 자세한 내용도 적는다.
서론
09시 53분에는 1079호 열차의 화재가 났었다. 09시 53분 1079호 기관사는 '불이야!'라는 소리를 듣고 시민과 함께 화재진압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09시 54분(추정) 승객들을 대피시켰다. 1079호 열차 기관사는 관제실에 보고를 하지 않은 잘못으로 금고형을 살게 되었다. 1080호 기관사는 중앙로역 진입 시 화재상황을 보고 자동운전에서 수동운전으로 전환 후 재빨리 발차하려고 했으나 단전되었다.
09시 55분~09시 58분까지의 본론
09시 55분에 중앙로역 역무원은 화재사실을 관제사에게 신고 1080호 열차는 대구역(09시 55분)에서 중앙로역(09시 56분)으로 도착하게 되었다. 여기서 관제사는 대구역 발차 직전에 모든 기관사에게 중앙로역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조심하라고 말한다. 기관사는 역사에 진입하면서 화재의 심각성을 느끼게 된다. 그 이후 출입문을 바로 닫았고, 수동운전으로 전환했다. 관제사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보고하고 발차(09시 57분)하고자 하였으나 단전이 된다. 09시 57분~59분 중앙로역에서 승객들이 대피·급전하여 화재현장의 이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급전도 순간적으로 된다. 결국 열차발차에는 실패하게 되었다.
09시 59분~10시 03분까지의 본론
대구 지하철 참사에서 제일 주목할 부분이 여기이다. 기관사는 매뉴얼대로의 전동차를 되살리는 방법을 선택하였지만 실패하였다. 따라서 열차발차 실패를 인정하고 승객대피를 해야 했지만 관제사의 지시를 받기 위해 3분을 기다리게 되었다. 관제사 또한 다른 열차와의 통화를 하게 되면서 정작 위급한 열차에 대한 지시를 내리지 못하게 되었다.
결론
1080호 기관사는 관제사로부터 휴대전화를 통하여 지시를 받게 되었다. 모든 출입문을 개방하였고 대피방송을 하였다. (하지만 몇 칸은 열리지 않음) 또한 당시 철도청 및 대구 지하철 직원이 수동으로 출입문을 개방하여서 승객들과 함께 대피했다. 일부 시민들은 창문을 부숴서 대피했다. 1080호 열차 기관사는 일부 승객을 역사 밖으로 안내하였고, 다시 전동차로 돌아와 MC KEY(10시 10분)를 수거하였다. 여기서 2번째 문제가 발생한다. 세월호(배)와 달리 열차는 직원 1~2명이 사람들의 목숨을 책임진다. 일부 승객의 역사 밖으로의 대피 안내보다는 전동차에 남아 있는 승객의 대피를 해야만 했다.

2.3. 희생자를 2번 죽인 증거인멸

원래 화재가 일어난 후에는 생존자의 구조와 시신, 증거물 수습, 현장 기록을 모두 다하고 난 뒤에 장소를 치워야 하는데 대구광역시 측은 그 다음날 공무원, 군 병력 등을 동원해 현장을 물 청소하는 증거인멸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기겁하거나 분노한 실종자 가족들은 사건 현장을 인간 띠로 둘러싸기도 했고 안심차량기지사업소 쓰레기 더미까지 가서 유해 14구의 일부 및 유류품 146개를 수거해갔다. 당시 논란이 일자 대구시는 "물청소 안 했다"든가 "청소는 유가족이 동의했다"고 발뺌했다. 출처

정치권의 대응도 뭐 같았는데, 사고 당시 자성론을 내세우던 한나라당은 시민들의 조해녕 시장 퇴진 요구에 반발해 '마타도어(흑색선전)'이라고 비난했고 지역 유력 일간지 매일신문은 칼럼 <잃어버린 8년>을 통해 대구 유니버시아드를 들먹이면서 참사 책임 소재 및 구조적 문제 규명을 '진보적 시각'이라고 보며 철 지난 색깔론을 주장했으며, 매일신문의 사장인 정재완 신부(니꼴라오)까지 유가족 농성에 대해 " 미국 같았으면 총 맞아 죽었다"고 비난 발언을 하여 물의를 빚었다.

2.4. 지하상가의 문제

위에서 잠깐 언급한 문제인데, 지하 1층 상가로 통하는 방화 셔터에서 사람들이 많이 사망했을 때 그 방화 셔터 바로 옆 가게 쪽 벽에 개폐 스위치가 있어서 빨리 열어놨다면 인명 피해가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근처 가게 상인들이 연기가 가게에 들어올까봐 그냥 방치하고 튀었다고 한다.[3]

이 방화벽 그을음은 재개장 후에도 청소하기 미묘한 구석에 1년 넘게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꾸준한 청소와 세월의 힘으로 지워져서 보기 힘들다.

파일:attachment/대구 지하철 참사/관련 이야기/info0091.jpg

사실 이곳은 화재 발생 시 지하철에서 상가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지하상가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지하철 방향으로 이동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방화 셔터에 있는 비상구도 거꾸로 달려 있다. 이 문만 열었더라면 정말 많은 시민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2011년 3월 29일 MBC 히스토리 후 방송분에서 당시 셔터를 닫는 CCTV 장면[4]이 공개되었는데 터벅터벅 걸어가서 버튼 한 번 딱 누른 뒤에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 나가는 모습이 나왔다.

물론 화재에 방화 셔터를 내리는 건 당연한 행동이다. 방화 셔터의 존재 이유를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방화 셔터에 방화문이 있다는 교육이 미비한 걸 안타까워해야지 화재에 방화 셔터를 내렸다고 무분별하게 비난해선 안 된다.

2.5. 생존자들의 후유증


이후 참사 1주년을 맞이하여 생존자들의 모습이 방송된 적이 있었는데 밤에도 불을 환하게 켜놓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는 사람이 있었고 한 초등학생의 경우 게임을 할 때는 영웅이 나와서 사람을 구하는 스파이더맨 게임만 하게 되었다. SBS 궁금한 이야기 Y[5]에서는 한 생존자 여성을 취재했는데, 방에 불에 탈 만한 재질(벽지라든지 장판 수납장)은 하나도 없고 맨 방바닥에서 생활하는 여성의 모습을 취재했다. 게다가 이 여성은 사고 이후 심한 정신 질환까지 앓게 되는 바람에 가족들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고 평소 알고 지내던 이웃들도 매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2.6. 기적의 사진

파일:/image/021/2003/02/20/20030219005.jpg

이때는 디지털 카메라가 처음 보급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화재 당시 현장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사진이 남을 수 있었다. 위의 사진은 류호정 씨가 촬영한 2장의 사진 중 한 장으로 촬영자는 이 사진을 찍은 직후 질식해서 쓰러졌지만 다행히 누군가 문을 열어준 덕분에 무사히 구조될 수 있었다. 이 사진은 7명의 사람이 모두 식별 가능한데 모두 생존한 기적의 사진으로 불렸다. 촬영자 류 씨는 영남대병원, 나머지 5명은 파티마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생존이 불확실했던 나머지 한 사람도 후에 생존이 확인되었다.

여담으로 연기가 칸 내에 들어찼는데도 뭔가 사태를 알아보거나 탈출하려는 시도조차 없이 다들 좌석에 앉아만 있는 모습은 집단 심리의 무서움을 알 수 있다. 참사 후 이뤄진 여러 공개 실험에서도 유사 상황에서 비슷한 전개를 볼 수 있었다. 심각하면 직원들이 경보를 울리거나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당연한 상식이 무시된 탓도 크지만 말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앞서 언급된 내용처럼 전동차 출입문의 비상 개폐 기능이었는데 대다수 승객들은 이 기능을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소화기로 창문을 부수고 탈출했단 사례도 있었다.[6]

2.7. 대형 낚시에 성공한 글짓기

인터넷에서 조금만 검색을 하다 보면 대구 지하철 참사와 관련된 슬픈 이야기라고 해서 떠도는 글이 있다. 대충 내용을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수학여행 때문에 가방이랑 신발 새로 사려고 했는데 용돈을 너무 적게 주는 엄마한테 화를 내고서 시내로 나가 엄마가 보내는 문자도 무시한 채 아이쇼핑(구경)을 하다가 집에 왔는데 아무도 없었고 TV뉴스에서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나오길래 불안한 마음에 문자를 열어봤더니 엄마가 쇼핑 센터에서 가방과 신발을 사온다는 문자와 지하철 사고에 휘말려서 그걸 전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문자가 있었다.
이게 인터넷상에서 언제부터인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는데 대다수 사람들로부터 슬픈 이야기라는 공감을 얻어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군데군데 이상한 구석이 있다.

첫 번째로 대구 지하철 참사는 2003년 2월 18일에 발생했는데 왜 이때 수학여행을 가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일각에서는 2월에 수학여행을 갈 수 있지 않느냐는 억측을 하지만 통상적으로 2월에 초중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진급 및 교사들의 전출입 등의 업무가 많기 때문에 수학여행을 갈 여력이 없을 뿐더러 그나마 있는 봄방학인데 이때 수학여행을 간다고 하면 좋아할 학생들이 몇이나 될지도 의문이다. 또 한국은 2월 졸/종업, 3월 입학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2월 중순이면 이미 대부분의 학생들이 졸업 내지 종업을 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아직 3월이 되지 않았으므로 공식 진급은 하지 않은 상황이라 학생들은 공식적으로 소속된 반이 없으며 따라서 담임 교사가 없다. 그렇기에 새 학년이 되고 난 뒤인 4월에 주로 수학여행을 가는 것이다.

두 번째로 대구 지하철 참사가 발생한 시각은 아침이었고 이게 뉴스 속보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12시 무렵이었다. 그야말로 대형 사고였기 때문에 주변에 떠들썩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낮에 대구 시내에서 쇼핑을 즐기는 와중에 전혀 소식을 몰랐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세 번째로 사건이 발생한 시각은 오전 10시가 되기도 전이었다. 이때 쇼핑센터에서 벌써 나와서 지하철을 탔다는 얘기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된다. 딸이 정말 갖고 싶어하는 가방과 신발이라면 엄마 입장에서 결코 대충대충 고를 리가 없으니 쇼핑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1~2시간 정도다. 쇼핑센터가 지하철역 바로 앞이라고 가정한다 해도 오전 8시에서 9시 사이에 쇼핑센터에 들렀다는 소리인데, 2003년 당시에는 대형 마트조차 이 시간에는 영업을 안 했다.[7]

결국 이 글은 픽션이었음이 드러났는데, 화성시의 어느 여고생이 쓴 글짓기가 2003년 7월 27일자 한겨레 신문 교육 섹션에 실린 게 실화인 양 와전된 것이다. # 당시 한겨레의 교육 섹션에는 학생들이 쓴 글을 싣고 교사가 평가해 주는 코너가 있었는데 그 코너에 실린 것. 지면상에서야 이게 실제가 아니고 그냥 학생이 쓴 글이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었겠지만 인터넷 기사로 실리면서 문제가 된 거다.

인터넷 기사 첫 머리에 영화나 소설처럼 픽션임이 명백하다는 것을 밝혔으면 없었을 일이었겠지만 지어낸 글이라는 걸 알 수 있는 표지가 달랑 '글짓기교실'이라는 제목의 모호한 것 하나뿐이었으니 낚일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대형 낚시질이 발생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꽤나 씁쓸한 대목인데 실제로도 이 글에 대해 비극적인 사고를 이용해 억지 눈물을 만들려고 한다는 비난이 인터넷상에서 꽤 나오는 편. 애초에 실화라고 해도 가슴이 아플 터인데 군데군데 허점이 있는 낚시글이니 좋게 봐주기는 어려운 대목이다.

참고로 이 낚시글은 대구경북 지역 학교 수련회 밤에 선생님이나 교관이 들려주는 1순위 이야기이기도 하다. 덤으로 이 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항상 촛불을 켜놓는다.

2.8. 조희팔에 속아 넘어간 유가족

그런가 하면 또 하나의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는데, 이 사고의 유가족 이순향 씨가 희대의 사기꾼 조희팔에 속아 재산을 잃은 사건이 있었다. 이순향 씨는 이 사고로 딸을 잃은 어머니였는데 2008년 6월에 친구의 권유로 조희팔이 운영했던 의료기 재임대 업체에 무려 2억 4,000만 원을 투자했다고 한다. 이 2억 4,000만 원이란 돈의 출처는 바로 이 사고로 숨진 딸의 보상금이었다. 이순향 씨의 딸은 2003년 2월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경찰이 되겠다고 신체검사를 받으려고 집을 나서 지하철에 탔다가 이 사고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 사고로 2억 4,000만 원의 보상금을 받았고 이후 이순향 씨는 조희팔이 운영하는 의료기 임대 사업에 투자하면 매 달 연금을 받듯이 수입이 생긴다는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그 돈을 투자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희팔은 5조 원에 가까운 돈을 홀랑 해쳐먹고 중국으로 도주해 버렸고 투자자들은 피 같은 돈만 날려버렸다. 조희팔이 조 단위의 사기를 치고 중국으로 밀항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도 2012년에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2015년 10월,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조희팔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이순향 씨가 중국 네티즌들에게 조희팔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내용을 적은 스케치북을 펼쳐보일 때마다 모든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2.9. 희생자 개인정보 유출 사건

2005년 4월 12일에 모 흥신소 업자가 대구지하철참사 유가족 대책위원회 사이트 등지에 접속해 해당 참사 및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 희생자들의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정보를 유출해 대포폰을 개설시키다가 경찰에 체포된 바 있었다. 해당 사건을 계기로 사후 디지털 개인정보 관리 문제가 논의되어 2010년대 들어 '디지털 장례식'이 일반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3. 사건 이후

3.1. 고인드립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지역드립/경상도 문서
4.1.1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1.1. 안양 LG 치타스 서포터의 불전동차 드립

파일:ycOktzX.jpg

2003년 7월 4일에는 안양 LG 치타스 서포터즈인 RED (현재의 FC 안양 서포터스)가 안양 LG 치타스 서포터 홈페이지에 경기 일정을 소개하면서 대구 FC와의 홈 경기를 두고 vs 불전동차라는 고인드립을 쳤다. 사고 발생 후 5개월이 지났지만, 전 국민적 큰 충격을 주었던 사고를 희화화하는 고인드립에 분노한 대구 시민들은 크게 분노했고, 이 소식이 인터넷을 통해 전국으로 퍼지면서 안양 LG와 서포터즈는 전국민에게 분자가 되도록 제대로 까였다. 결국 RED의 대표가 대구를 방문하여 고인들을 추모하고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

이 사건 이후, 축구 응원에서 지역드립하는 것은 금기시 되는 문화가 생겼다. 물론 오프라인과 규정이 엄격한 인터넷 커뮤니티 이야기. 디시인사이드 같이 별다른 제재가 없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종목 불문 다를 바 없다.

3.2. 추모공원, 위령탑 문제

사건 이후 대구광역시과 유족들 사이에 진상규명, 추모공원, 위령탑 건립, 추모재단 신설을 전제로 유족들과 합의했다. 하지만 대구광역시는 유족들과의 약속인 위령탑과 추모공원 건립을 안 지켰고, 그 때문에 무려 12년 동안 대구지하철참사대책위는 계속 대구광역시에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를 했다. 결국 12년이 지나서야 위령탑, 추모공원 문제에 대한 유족들의 의견이 수용되었다. 기사, 또 다른 기사

또 2010년에는 대구안전테마파크(사실상 추모공원의 역할을 해야 하는 곳)에 유골을 안치했다는 이유로 대구광역시가 대구지하철참사대책위에게 고소했고 결국 4년 뒤에 대구지하철참사대책위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기사 2016년에는 '218안전문화재단'이 발족되었다.

3.3. 사건 이후 문화의 변화

당시 전기가 내려가고 연기가 가득 차서 어둠 속에서 길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랜턴의 대용품으로 활약했던 것이 당시 막 보급되기 시작했던 컬러 액정 휴대폰이었다. 그 이후로부터 재해 대비 매뉴얼로 휴대폰의 액정 빛을 랜턴 대용으로 쓰는 것이 추가되었다. 2004년 이후 출시되는 휴대폰에 카메라 기능과 함께 LED 플래시가 달린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다. 2010년대부터는 스마트폰에 플래시 기능이 다 있으니 뭐...

3.4. 사건 이후 방송 편성

< 미디어오늘> 2003년 2월 20일자 보도에 따르면 지상파 방송 3사는 사고 발생 30분 뒤에 늦게 속보를 내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KBS는 사고 발생 39분 후 속보 자막을 내보냈고, 정오뉴스에서 또 속보를 띄우고 오전 정규 방송을 끝냈다가 낮 2시 48분부터 재난 방송을 개시했다.

MBC는 오전 10시 25분에 속보 자막을 내보낸 후 11시 19분경 다큐멘터리 《약초》 방영 도중 뉴스속보를 방영했고 재난 방송은 정오, 특별 편성은 오후 4시 가서야 했다. SBS는 《뉴스와 생활경제》 도중 오전 10시 25분경 단신으로 보도하고 12시 30분경에 15분 보도 후 관련 보도를 안 하다가 오후 3시 50분 이후에야 특별 편성을 개시했다.

당시 MBC와 SBS는 사고 희생자가 증가한 오후 2~3시 사이에 여자 프로농구 겨울 리그와 SBS배 전국검도왕대회 중계 방송을 각각 방영해 욕을 먹었는데 이를 대구MBC 및 TBC에 그대로 방영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이외에도 인기리에 방영되던 몇몇 오락 프로그램들이 지역 방송으로 대체되는 일까지 벌어졌다.[8]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 대구MBC에서는 슬픈 음악과 함께 지하철 사고 현장의 모습들을 보여주며 추모하는 캠페인 광고를 방송하기도 했고 1주기였던 2004년 2월 18일에는 대구 전역에서 묵념 사이렌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교회, 성당, 사찰 모두 타종했던 데다 이 날 대구 지역 방송 3사[9]는 이때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추모 특집 방송을 중계했다.

3.5. 통곡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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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10주기였던 2013년 공개된 통곡의 벽
파일:중앙로역 추모공간.jpg
2016년, 추모 공간으로 리모델링된 모습

사고 이후 대구교통공사(당시 대구지하철공사)는 전소된 중앙로역 역사를 리모델링하였다. 그러나 2층 대합실 일부분은 현장 보존을 위해 남겨 놔야 한다는 유족들과의 합의 끝에 보존하기로 하고 리모델링하지 않았다. 재개통된 뒤에는 이 공간을 흰색 철문으로 막아 놓고 자물쇠를 채워 놓았는데 사전 허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이 공간에 들어갈 수 없어 사실상 방치된 상태였다. 매년 2월 18일 추도식 후 헌화를 하러 오는 유족들이나 현장을 방문하는 정치인들만 출입할 수 있을 뿐이었다. 대구 시민들은 중앙로역의 이 철문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며 기억했고 유가족들 역시 매 년 시민 헌화 공간을 이 통곡의 벽 앞에 마련해 두었다. 해당 공간이 현장 보존의 가치라는 본래의 목적에 맞지 않게 방치되자, 통곡의 벽을 그 본래의 가치에 맞게 활용해야 한다는 언론과 시민, 단체들의 건의와 주장이 이어졌다.

결국 2015년 연말부터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갔고 2016년 2월 18일 13주기에 맞춰 시민들에게 상시 개방되었다. 정식 개방되기 2개월 전인 2015년 12월 28일에는 권영진 대구시장과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을 열었다. 공식 명칭은 '2.18 대구지하철참사 추모공간'이며, 지하철이 운행하는 시간에는 상시 개방되어있다. 대현프리몰 지하상가로 가는 개찰구로 나오면 바로 보인다.

추모 공간 안에는 불타 버린 벽과 ATM, 공중전화[10], 구멍가게, 광고판, 혈압 측정기, 물품보관함 등이 있으며 벽에는 유가족들과 당시 시민들이 직접 자필로 적은 추모 메세지가 적혀 있다. 이러한 물건들 밑에는 사고 당시 상황과 이 후 조치 등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부착되어 있으며 옆에는 추모 영상을 볼 수 있는 스크린도 있다. 반대편 벽면에는 대구시장, 시민대표 등 각계 인사들의 추모 메세지가 기재되어 있다. 추모 공간 입구에는 희생당한 192명의 이름이 적힌 공간 옆에 헌화할 수 있는 헌화대가 마련되어 있다.

추모 공간 밖에도 당시 불타 버린 역사의 기둥과 추모 메세지, 사고 당시 사진들과 이 후 안전 캠페인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는 대현프리몰 지하상가로 향하는 입구까지 이어진다. 사고 당시 지하상가를 동해 탈출하려던 시민들이 방화 셔터와 유독가스에 막혀 죽음을 맞이했던 그 현장이 시간이 흘러 그 당시의 참상을 기억하는 추모 공간으로 발전한 것이다. 중앙로역 대구 동성로 한복판에 있는 이용 승객이 많은 역이기 때문에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당시의 참사를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역대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대형 참사들 중 가장 추모 공간을 잘 갖춘 케이스로 뽑힌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11], 성수대교 붕괴 사고[12], 세월호 사고[13] 등 역대 대형 참사들의 경우 추모 공간 하나 제대로 마련되어 있는 게 없는 걸 생각하면 대비될 정도다. 물론 중앙로역 내 추모 공간 역시 유족들이 10년 이상을 대구시, 도시철도공사와 분쟁하며 얻어낸 결과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3.6. 유족과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인근 상인회의 갈등

2023년 2월 18일 대구시민안전테마크에서는 유족들이 모여 추모식을 진행했지만 추모식 시작 직후 인근 상인회에서 음악 등을 틀면서 추모식을 방해하는 행위가 벌어졌다.

팔공산 동화지구 상가번영회 측은 추모 관련 사업, 공간 등을 반대했으나 대구시와 관광 활성화를 위한 보상을 얻으며 추모 사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협약을 맺었었으나 대구시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추모식을 방해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대구 지하철 참사 유족들은 당사자인 본인들과 협의도 없이 이루어진 대구시와 상인회간의 협약도 납득하기 어려운데 그에 따른 갈등에 피해까지 입고 있어 유감을 표한다는 입장을 표했다.

4. 유사 사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대구 지하철 참사/유사 사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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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련 문서


[1] 성우, 배우, 발레리나와는 동명이인이다. [2] 만약 당사자가 파이브의 노래 덕에 피해를 모면한 게 맞아도 그 사실을 제목으로 사용해 기사를 작성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에 추가해 기사를 작성했어야 했다. [3] 광주방송에서 취재. [4] 여담으로 상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10시가 돼서야 출근한다는 증언이 있었다. [5] 해당 회차가 방영되었을 당시는 '당신이 궁금한 그 이야기 큐브'. [6] 물론 출입문 비상 열림을 시도해 봤는데도 화재 때문에 고장 나서 안됐다는 생존자의 증언도 있다. 당시에는 문 옆에 달랑 스위치 하나 붙여놓은 꼴이었으니 당연히 사고로 인한 고장 확률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이후로 비상 장치를 좌석 안에 배치하고 이 탈출법을 열차 내에서 정기적으로 방송하고 있다. [7] 중앙로역 인근에 있는 더현대 대구 롯데백화점 대구점 오픈 시간은 10시 30분이다. [8] 일요일 일요일 밤에, 느낌표 등은 그대로 방송했다. [9] KBS대구, 대구MBC, TBC. [10] 승강장에 있던 공중전화와 대합실에 있던 공중전화 모두 전소되었고 이곳 추모 공간에 전시되어 있다. 화재 당시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플라스틱이 녹아서 공중전화 수화기 아랫부분이 축 늘어진 채 간신히 달려있는 형상으로 보존되어 있다. [11] 사고 현장에서 떨어진 양재 시민의 숲 인근에 추모비가 세워졌으며 삼풍백화점의 옛 터에는 주상복합공간인 아크로비스타가 들어서 있다. [12] 추모비가 설치되어 있긴 하나 구석진 곳에 세워져 있어 확인하기도 쉽지 않고 차량 없이는 접근도 불가능한 곳에 설치되어 있다. [13] 아직 추모공원 터를 정하는 문제도 협의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