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다카마쓰노미야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高松宮宣仁親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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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이름 | 노부히토(宣仁) | ||
미야고 | 다카마쓰노미야(高松宮) | ||
출생 | 1905년 1월 3일 | ||
도쿄부
도쿄시 아카사카구
아오야마 동궁어소 (現 도쿄도 미나토구 아카사카 어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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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7년 2월 3일 (향년 82세) | ||
도쿄도 시부야구 일본적십자사 의료센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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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어칭호 | 테루노미야(光宮) | |
신위 | 친왕(親王) | ||
경칭 | 전하(殿下) | ||
부모 |
부친
다이쇼 천황 모친 데이메이 황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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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형
쇼와 천황 형 야스히토 친왕 남동생 다카히토 친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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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키쿠코 비 | ||
자녀 | 없음 | ||
학력 |
가쿠슈인 초등과 (졸업) 가쿠슈인 중등과 (졸업) 일본해군병학교 (졸업) 해군포술학교 (졸업) 해군대학교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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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신토 | ||
오시루시 (お印)[1] |
매화나무(若梅) | ||
군사 경력 | |||
임관 | 해군병학교 (52기) | ||
복무 | 일본 제국 해군 | ||
1924년 ~ 1945년 | |||
최종 계급 | 대좌 | ||
병과 | 포술과 | ||
근무 |
후소급 전함 군령부 대본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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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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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쿠타이(束帯)를 입은 노부히토 친왕 |
다카마쓰노미야의 문장[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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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지, 다이쇼, 쇼와 시대에 걸쳐 살았던 일본의 황족.2. 탄생과 유년 시절
1905년 1월 3일, 도쿄 황거의 아오야마 동궁어소(青山東宮御所, 현재 아카사카 어소)에서 다이쇼 천황과 데이메이 황후의 3남으로 태어났다.
노부히토(宣仁)라는 이름을 하사받기 전에는 데루노미야(光宮)라는 어칭호로 불렸으며, 1913년에 다카마쓰노미야(高松宮)라는 이름의 궁가를 창설한다. 궁가의 이름은 당시 단절 예정이었던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 가문의 옛 칭호인 다카마쓰노미야(高松宮)를 그대로 사용했다. 다카마쓰노미야는 1625년 고요제이 천황(後陽成天皇)[3]의 7남 요시히토(好仁) 친왕이 친왕가를 창설하면서, 자신의 할머니인 신죠토몬인(新上東門院)이 기거하던 거처의 이름인 다카마쓰도노(高松殿)를 그대로 친왕가의 이름으로 정했던 데서 유래한다.
당시 황실전범상 천황의 아들은 친왕가( 미야케)에 입양될 수 없었기 때문에, 기존 친왕가의 이름을 자신의 궁호로 사용하여 그대로 계승하는 형식으로 했다. 다이쇼 천황이 친왕가의 단절을 안타깝게 여겨, 대신 자신의 3남으로 하여금 아리스가와노미야를 계승하게 한 것이다.[4]
1920년에 가쿠슈인 중등과를 중퇴하고 여느 일본의 남성 황족처럼 군인의 길을 걷는다. 육군 사관학교를 선택한 두 형과 달리, 일본해군병학교에 입학한다. 1924년에 졸업하고 1925년에 일본 해군 소위로 임관한다. 병과사관으로 그는 특기로 포술과를 골랐다.
3. 결혼
딱 봐도 어머니인 데이메이 황후를 거의 판박이 수준으로 빼다 박았다.
1930년 2월 4일, 6살 연하의 도쿠가와 키쿠코와 결혼한다. 이 두 사람의 결혼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우선 노부히토 친왕은 단절된 아리스가와노미야의 실질적 계승자였다. 키쿠코 비의 아버지는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7남인 도쿠가와 요시히사(徳川慶久) 공작이고, 어머니는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의 차녀인 미에코 여왕(実枝子女王)이다.
따라서 노부히토 친왕과 키쿠코의 조합은 어떻게 보면 매우 조화로우며(?) 공과 무의 합체(公武合體)의 의미도 지닌다. 노부히토 친왕은 황족이므로 '공(公)'이라 할 수 있고, 키쿠코 비는 쇼군의 손녀로 '무(武)'가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키쿠코와 같이 영국을 방문한 동영상이 있다.
하지만 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노부히토 친왕이 일본해군병학교 재학 당시 한 동기생과의 동성애 성향 때문이라고도 한다. 자녀를 낳지 못한 키쿠코 비는, 대신 조카 아키히토 황태자의 아이들을 손주처럼 귀여워하며 애정을 쏟았다. 후미히토 친왕에게는 친정어머니 미에코로부터 배운 서예[5]를 가르치기도 했으며, 나루히토 황태자의 장녀 아이코 공주의 탄생과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의 결혼까지 지켜보고 2004년 사망한다.
4. 군인의 길
만주국의 수도 신경(新京)[6]에 위치한 신경역(新京驛)에서 마지막 청나라 황제이자 당시 만주국의 황제였던 아이신기오로 푸이(溥儀)와 만나는 노부히토 친왕.[7] |
당시에 그는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東久邇宮 稔彦王), 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三笠宮 崇仁親王)와 같이 미국과의 전쟁에 반대한 몇 안 되는 황족 중 하나였다. 측근들과 함께 당시 일본의 패전이 거의 확실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전쟁을 진행하던 장본인이자 태평양 전쟁의 원흉인 도조 히데키 당시 일본 총리를 암살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쟁의 원흉인 도조 히데키를 암살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이후에는 도조의 최측근을 비롯한 주전파 대다수를 제거하고 군부 정권을 무너뜨려 전쟁을 멈추는 대규모 쿠데타까지 계획 중이었다고 한다.
무조건 항복 후 미군이 일본에 들어왔을 때, 그는 당시 일본 총리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의 부탁을 받아, 끝까지 미국에 대해 항전을 주장하는 한 해군 항공대에 찾아가서 마음을 누그러뜨리도록 설득하기도 하였다. 특히 설득 내용이 대박인데, 그 항공대 대장이 "부하들을 카미카제로 보내야 한다"고 헛소리를 하자 "그럼 저 부하들을 이와모토 테츠조처럼 훈련시키고 카미카제를 시키는 건 어떤가?"라고 하자 말문을 닫아버렸다. 참고로 이와모토 테츠조는 일본군의 베스트 파일럿이었다.
5. 전쟁 후, 노년과 죽음
전쟁이 끝난 후 미군이 다이쇼 천황의 직계들 이외의 모든 황족들과 화족들을 신적강하시킬 때, 자신의 관저에 미군 간부들을 초청하여 쇼와 천황의 의사를 전하고 황실의 유지에도 노력했다. 1970년 영친왕이 사망하자 한국에 조문을 오기도 하였다. 영친왕비 이방자(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사가 일본 방계 황족 출신이고, 형수인 고준 황후의 사촌언니였기 때문이다.
1953년에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秩父宮 雍仁親王)이 결핵으로 사망했을 때, 전염을 우려한 의사가 문병을 극구 반대하여 쇼와 천황은 동생 야스히토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것을 후회하면서, 노부히토 친왕이 폐암으로 투병할 때 3차례씩이나 문병을 왔다. 마지막 문병을 갔던 1987년 2월 3일은 노부히토 친왕이 위독한 상태였다. 당시 쇼와 천황이 노부히토 친왕을 보았을 때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쇼와 천황은 동생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날 오후 1시 10분경 노부히토 친왕은 도쿄의 일본 적십자사 의료센터(日本赤十字社医療センター)[12]에서 82살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동년 2월 10일에 그의 유해는 토시마오카 묘지(豊島岡墓地)[13]에 안치되었다.
쇼와 천황은 꽤 오랫동안 노부히토의 죽음을 슬퍼했다. 사실 쇼와 천황과 노부히토 친왕은 전후에 관계가 영 좋지 못했다. 사람들이 추측하길 "아마도 쇼와 천황은 전쟁을 그만두자던 노부히토의 말을 따라서 군부를 적극적으로 대적하지 않았던 것을 줄곧 후회했을 것이고, 노부히토가 화낼 때마다 그를 볼 면목이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 때문인지 실제로 쇼와 천황은 노부히토에게 비난받을 때마다 별 대꾸도 못하고 조용히 있었을 정도였는데, 그렇게 자신이 저지른 잘못들을 언제나 직설적으로 꼬집고 쓴소리를 해주던 유일한 사람이었던 노부히토가 세상을 떠나자 쇼와 천황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지난 잘못들도 떠오르며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허전했을 것이라는 얘기가 많았다. 오직 노부히토만이 쇼와 천황의 과오를 곁에서 직접적으로 비판했으니 쇼와 천황에게 그의 존재는 확실히 남달랐을 것이다.
노부히토가 죽고 2년 뒤인 1989년, 큰형 쇼와 천황도 노부히토의 뒤를 따라갔다.
6. 인물상
기후현의 한 골프장에서 골프를 즐기는 노부히토 친왕 |
적십자 등 사회에도 공헌을 많이 하였으며, 특히 미국에서 본 모금, 기부 문화에 매료되어 일본에 그것들을 들여와 전파하기도 하였다. 또 어머니 데이메이 황후를 이어 나병협회의 총재를 맡기도 하였다.
해군 장교로 근무할 때, 황족이기 때문에 많은 특권을 누릴 수 있었으나, 그 자신은 타 군인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고 싶어하였고, 황족의 특권을 절대 남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번은 해군 참모장이었던 아리마 가오루(有馬馨) 제독이 노부히토 친왕을 위해 참모장실을 제공하고 고급 주류를 바쳤으나, 노부히토 친왕은 단호히 거절하고 절대 받지 않았다. 이에 아리마 제독은 노부히토 친왕의 강직함에 크게 감탄하여 더 충성을 바쳤다고 한다.
표현하고 싶은 생각은 직설적으로 말하는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졌으며, 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과 같이, 전쟁을 무리하게 진행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평화주의자였다. 비록 일본 해군 장교로 복무했지만, 군인과 군대에 대해 쓴 소리를 하는 것을 삼가지 않았다고 한다.
1971년에 도쿄 이오지마(硫黄島)를 방문했는데, 그곳에는 전쟁이 휩쓸고 간 흔적이 있는 동굴이 있었다. 동굴 속에는 사람의 뼈 뿐 아니라 불발탄, 유황 가스 등으로 위험한 상태였는데, 노부히토 친왕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동굴에 들어가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다만, 전쟁에 반대하며 전쟁을 주도한 일본군 강경파들과 대립하고 형 쇼와 천황이 그들을 내치도록 조언하던 것과는 별개로 일본 황실 내에서는 황족이라는 부심이 강해서 그런지, 평민 출신의 조카며느리 미치코 황태자비와 그 친정아버지 쇼다 히데사부로(正田英三郎)를 평민이라는 이유로 무척 무시한 일화가 있다.
히데사부로는 닛신(日清) 제분[15]이라는 대기업을 운영하는 대재벌이며 그의 처가인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옛 화족( 백작)이라서, 황족 및 화족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장녀 미치코를 아키히토 황태자에게 시집보낸 후의 일이었다. 히데사부로는 노부히토 친왕을 만나자 깍듯하게 인사했지만, 이전까지 인사를 잘 받아주던 노부히토 친왕은 히데사부로의 인사를 싹 무시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평민과 인척 관계가 되어 불쾌하다는 시위.
또한 미치코 황태자비가 2번째 임신을 했다가 유산되었을 때, 노부히토 친왕의 아내 키쿠코 비는 "황실의 후사" 운운하며 미치코 황태자비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마음이 누그러져, 나중에는 미치코 황태자비와 친하게 지내고 그녀의 아이들을 귀여워했다고 한다.
한편 그의 부인인 키쿠코 비는 일본 황실에 남자아이가 없고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무남독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만 있던 시절, "여자의 천황 계승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발언을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물론 키쿠코 비는 여성 천황[16]을 찬성했지, 여계 천황[17]을 찬성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일본사에서 여제는 꽤 많았지만 황후가 천황이 됐던 게 아닌 이상 여계계승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키쿠코 비가 사망하고 2년 후인 2006년에 후미히토 친왕이 늦둥이 아들 히사히토 친왕을 낳으면서, 여성 천황이나 여계 천황 이야기는 주춤해졌다. 하지만 이후 후미히토 일가에서 다소의 문제가 생기면서 다시 여성 천황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종합해보면 일본 황실 인사 가운데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모범적인 상식인이자 평화주의자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7. 가족관계
- 조부: 메이지 천황
- 조모: 야나기하라 나루코[18]
- 부: 다이쇼 천황
- 모: 데이메이 황후
- 아내: 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 비
- 큰형: 쇼와 천황
- 작은형: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
- 막내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7.1. 황실 가계도
(
구황족 가계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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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쓰카사 도시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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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다카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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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히사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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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다 요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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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다다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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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소시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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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게 구니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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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야 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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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 황족에게 주어지는 개인 표식. 주로 식물이며, 사용하는 물건 등에 붙는다.
[2]
아리스가와노미야의 문장과 유사하게 만든 것으로, 아리스가와노미야를 계승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3]
이 사람의 재위 기간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고요제이 천황이 죽을 때의
일본의
연호가 게이초(慶長)이었기에,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게이초의 역'(慶長の役)이라고 부른다. 단, 임진왜란이 '처음' 발발한 때는
1592년으로, 이때는 일본 연호로 분로쿠(文禄) 원년(元年)이다. 임진왜란의 주요 전투가 분로쿠 연간이 아니라 게이초 연간에 일어났기 때문에 저렇게 부르는 것. 재위기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 빼고는 별 특징이 없고 오래 못 살았다. 그에 비해 아들인
고미즈노오 천황, 손자인
레이겐 천황은 장수했다.
[4]
형식상으로는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威仁) 친왕이
1913년 사망한 뒤, 부인 야스코(慰子) 친왕비가
1923년까지 친왕가를 지키다 사망하면서 아리스가와노미야는 공식적으로 단절되었다. 앞서 차대 당주가 될 예정이었던 다네히토(栽仁) 왕이
맹장염에 걸려 2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면서 후사가 아예 끊겼다. 그래서 노부히토 친왕이 다네히토 왕의 양자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다네히토 왕이 1887년생, 노부히토 친왕이
1905년생으로 아버지와 아들 뻘 되는 나이 차이다.
[5]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가업.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에는 대대로 이어내려오는 '아리스가와 류 서도'라는
서예 기법이 있었다.
[6]
현재
중국
길림성
창춘시(長春市).
[7]
노부히토가 더 작지만, 그의 키는 168cm로 형인 쇼와 덴노(165cm)보다도 컸다. 푸이의 키는 174cm로 추정된다. 둘 다 그 당시로서는 장신이었다.
[8]
어떤 전쟁에 참가하면 그를 표창하기 위해 부여하는 기장이다. 공적에 따라 차등부여했음.
[9]
노부히토 친왕이 해군대학교 재학 당시 포술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10]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최고 통수 기관.
[11]
전후의 인터뷰에서, 노부히토 친왕은 "전쟁의 급박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했던 까닭은,
천황의 친동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12]
1886년
11월에 개원한 일본의 대표적인 병원
[13]
천황과 천황의
황후 이외의 황족들이 묻히는 곳.
도쿄도
분쿄구(文京区)에 위치.
[14]
현재의
타카마츠노미야 기념. 본래
나고야의 주쿄 경마장에서 열리던 1970년의 주쿄대상전에서 친왕이 직접 우승컵을 수여한 것을 계기로, 다음해인 1971년부터 대회명을 타카마츠노미야배로 변경 및 재시작한 것이 이 대회의 시초다. 1997년부터는 중상대회 최상위 등급인 G1대회로 승격되고 이듬해인 98년부터 대회명을 현재의 타카마츠노미야 기념으로 변경하면서 가을의
스프린터즈 스테이크스와 함께 단거리마의 최강을 가리는 춘추 스프린트 대회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15]
아시아에서 제일 큰 제분회사라고 한다.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을 만든 기업인 닛신식품과 전혀 다른 회사다. 닛신제분은 1900년에 구
화족가문인 쇼다 테이이치로가 설립했고, 닛신식품은 1948년도
안도 모모후쿠라는
재일중국인이 세운 회사이다.
[16]
여성의 몸으로 천황직에 오르는 것.
[17]
여성 천황의 자손들이 뒤를 이어 천황이 되는 것.
[18]
메이지 천황의
후궁이다. 메이지 천황의 정실인
쇼켄 황후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