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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01:53:41

다니엘 파사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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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파사레야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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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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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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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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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파사레야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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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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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 1983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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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아르헨티나의 방송국 텔레페가 아르헨티나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아르헨티나인 100명'을 선정했다.
TOP 10
<rowcolor=#ffffff> 1위 2위 3위 4위 5위
호세 데 산 마르틴 레네 파발로로 후안 마누엘 판지오 알베르토 올메도 체 게바라
<rowcolor=#fff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디에고 마라도나 에바 페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마누엘 벨그라노 로베르토 폰타나로사
11위~100위
<rowcolor=#fff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 알폰시나 스토르니 알프레도 알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rowcolor=#fff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알프레도 팔라시오스 알리시아 모로 드 후스토 앙헬 비센테 페냘로사 안토니오 베르니 아르투로 프론디시
<rowcolor=#ffffff>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아르투로 움베르토 일리아 아스토르 피아졸라 아타우알파 유판키 바르톨로메 미트레 베니토 킨켈라 마르틴
<rowcolor=#ffffff>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 베르나르도 우사이 칼푸쿠라 카를로스 빌라르도 카를로스 가르델
<rowcolor=#ffffff>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카를로스 메넴 카를로스 몬존 카를로스 무기카 카를로스 레우테만 찰리 가르시아
<rowcolor=#ffffff>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 세사르 밀스테인 다니엘 파사레야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 엔리케 앙젤렐리
<rowcolor=#ffffff>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엔리케 산토스 디세폴로 에르네스토 사바토 에스테반 에체베리아 에스텔라 데 카를로토 파쿤도 키로가
<rowcolor=#ffffff>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플로렌티노 아메히노 프란시스코 모레노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가브리엘라 사바티니 기예르모 빌라스
<rowcolor=#ffffff>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구스타보 산타올랄라 헤베 데 보나피니 이폴리토 이리고옌 우고 포르타 호르헤 뉴베리
<rowcolor=#ffffff>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호세 에르난데스 호세 마리아 가티카 후안 바우티스타 알베르디 후안 호세 카스텔리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rowcolor=#ffffff>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후안 페론 후아나 아수르두이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 훌리오 보카 훌리오 코르타사르
<rowcolor=#ffffff>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 레안드로 알렘 레온 히에코 리산드로 데 라 토레 롤라 모라
<rowcolor=#ffffff>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루시아나 아이마르 루이스 페데리코 를루아르 루이스 산드리니 마누 지노빌리 마누엘 도레고
<rowcolor=#ffffff>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마리아노 모레노 마리아노 모레스 마리오 켐페스 마리기타 산체스 마르틴 미겔 데 구에메스
<rowcolor=#ffffff>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마리아 엘레나 월시 메르세데스 소사 니콜리노 로체 니니 마르샬 노르마 알레안드로
<rowcolor=#ffffff>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네스토르 카를로스 키르치네르 오스카 보나베나 끼노 라몬 카리요 라울 알폰신
<rowcolor=#ffffff>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리카르도 발빈 로베르토 알트 로베르토 비센조 로돌포 월시 로케 사엔스 페냐
<rowcolor=#ffffff>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살바도르 마사 산드로 데 아메리카 타토 보레스 티타 메레요 술 솔라르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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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축구인
파일:external/pxb.cdn.letrap.com.ar/1428642784994.jpg
이름 다니엘 파사레야
Daniel Passarella
본명 다니엘 알베르토 파사레야
Daniel Alberto Passarella
출생 1953년 3월 25일 ([age(1953-03-25)]세)
부에노스 아이레스주 차카푸코
국적
[[아르헨티나|]][[틀:국기|]][[틀:국기|]]
신체 173cm
직업 축구 선수 ( 센터백[1]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1968~1971 / 유스)
CA 사르미엔토 (1971~1973)
CA 리버 플레이트 (1974~1982)
ACF 피오렌티나 (1982~1986)
인테르나치오날레 (1986~1988)
CA 리버 플레이트 (1988~1989)
감독 CA 리버 플레이트 (1989~1994)
아르헨티나 대표팀 (1994~1998)
우루과이 대표팀 (2000~2001)
파르마 AC (2001)
CF 몬테레이 (2002~2004)
SC 코린치안스 (2005)
CA 리버 플레이트 (2006~2007)
국가대표 70경기 22골[2] ( 아르헨티나 / 1976~1986)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4. 지도자 경력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5.1.2. 개인 수상
5.2. 감독
5.2.1. 대회 기록5.2.2. 개인 수상
6. 여담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아르헨티나 축구선수 출신 감독. 선수 시절 포지션은 수비수.

25세 31일에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아 1978 월드컵을 우승한 역대 최연소 월드컵 우승팀 주장이다.[3]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파사레야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위치한 축구클럽인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의 유소년 팀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이후에 같은 곳에 위치한 클럽인 사르미엔토에서 프로 데뷔전을 가졌다. 처음 두 시즌동안 유망주 대접을 받으며 1군의 부름을 받지 못하다가 3번째 시즌부터 주전으로 자리매김하면서 36경기에서 9골을 터뜨리는 맹활약을 한다. 그후 파사레야는 1974년에는 리버 플레이트에 입단하고 첫 시즌에는 첫 시즌은 22경기 5골로 무난한 성적을 보낸다. 1975년에는 35경기 24골을 넣으며 미친 득점력으로 주목을 받았고, 전기 리그와 후기 리그에서 모두 우승해 아르헨티나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우뚝선다. 파사레야는 1982년까지 팀에서 1975, 1977, 1979, 1981년에 걸쳐 통산 4회의 리그 우승을 했고 리버 플레이트에서 통산 226경기 90골을 기록하였다. 이후 파사레야는 세리에 A 피오렌티나로 이적하는데, 당연히 파사레야는 주전이었고 맹활약을 하지만, 아무래도 당시 피오렌티나는 강팀이라 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리그는 겨우 5위에 UEFA컵에 나가서 광탈당한다. 다음 시즌은 무려 3위까지 올라가지만 또 무관에 그친다. 그 다음 시즌인 1984-85 시즌에는 당대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중 하나인 소크라치스가 피오렌티나로 이적하는데, 그 시즌에 9위를 하고 만다. 그 당시 세리에 A AC 밀란부터 시작해 유벤투스, 인테르, 토리노, 나폴리, 우디네세 칼초 등 슈퍼스타들이 이끄는 세계 최고의 리그였다. 그래서 그는 인테르로 이적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파사레야는 세리에 A와는 맞지 않았나 보다. 1986-87 시즌에는 인테르가 디에고 마라도나의 나폴리에게 밀려 3위를 하고, 다음 시즌에는 밀란에게 우승을 또 뺏긴다. 파사레야는 결국 자국으로 돌아가 리버 플레이트에서 1년 더 뛰다가 1989년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2.2. 국가대표 경력

그의 첫 FIFA 월드컵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이었다. 당시 1978 월드컵 이전의 아르헨티나의 상황은 참담했다. 자국 내에 독재 정부가 들어와 계엄령을 선포하며 아르헨티나의 사회 분위기는 살벌했다. 국민들은 군사정권에 대해 불만감을 품기 시작하고 독재를 했던 비델라 정부는 이를 모면하기 위해 관심을 돌리게 할 기회를 찾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침 그 때 열린 자국에서의 월드컵이다. 비델라는 월드컵이 열리기 무려 3년 전부터 자국 선수들의 해외진출을 금지시키고 발렌시아에 있던 마리오 켐페스는 임대료까지 쓰며 자국으로 복귀시켜 연습을 시켰고 홈 버프의 효과는 과연 있을지 궁금했다. 참고로, 당시 프란츠 베켄바워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 몇몇이 군사정권에 반대하며 참가를 아예 거부했다.[4] 파사레야는 25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주장 완장을 차고 참가한다.

비델라는 사실 본선에서 승부조작에 까지 관여했다. 아르헨티나는 1차 조별리그에서 헝가리, 프랑스, 이탈리아와 한 조가 되었는데, 헝가리와 프랑스를 심판 매수로 아주 얍삽하게 이긴다. 헝가리와의 경기에서는 2명이나 퇴장당했고, 헝가리 감독은 "심판이 열 두 번째 선수 같았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새 발의 피였고, 2라운드에서야 비로소 승부조작의 정점을 콕 찍었다. 브라질은 2승 1무로 경기를 모두 마친 반면 아르헨티나는 1승 1무로 아직 한 경기를 남겼을 때였다. 남은 한 경기는 페루와의 경기였고, 어차피 이 경기에서 이겨도 승점이 동점이기 때문에 골득실이 좋은 브라질이 올라가게 되었다. 때문에 아르헨티나는 페루를 상대로 네골 차이로 승리해야 했다. 이 때 비델라는 손을 썼고, 경기 상황이 안 좋던 페루 정부에게 3만 5천톤의 곡물과 5천만달러를 무상 지원 해 준다. 경기는 6:0으로 아르헨티나의 승리였다.[5] 그렇게 결승에서 네덜란드를 만났다. 결승에서는 마리오 켐페스의 두 골로 네덜란드를 3-1로 꺾고 자국의 첫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다.[6]
파일:다니엘 파사레야 1.jpg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파사레야

1982 스페인 월드컵에도 파사레야는 주장 완장을 차고 참가했다. 이번엔 진짜 순전히 자신들만의 힘으로 1차 조별리그를 2승 1패로 통과한다. 파사레야는 엘살바도르와의 경기에서 페널티킥 골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의 공격진은 당시 최고였다. 지난 우승의 주역 마리오 켐페스와 신예 디에고 마라도나가 버티는 최고의 공격 듀오, 거기에다 후방의 파사레야까지... 그러나 2차 조별리그에서 브라질, 이탈리아와 한 조가 되었고, 두 경기에서 모두 패배해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는 허무하게 2차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만다.

사실 1982년 당시 아르헨티나 포클랜드 전쟁 중이였다. 때문에 선수들은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져 훈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가기만 하면 포클랜드 전쟁에 대해서만 묻는 기자단에 둘러싸여 하루종일 방에서 울기만 했다고 한다. 그래도 1라운드에서 그런 호성적을 거둔 것은 정말 대단하다. 그래도 파사레야는 이탈리아전에서 프리킥 골을 넣는 등 활약했고, 수비력 역시 좋았고, 파사레야만큼은 실력이 진짜배기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줬다.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예선에서 본선 진출을 이끄는 결승골을 넣는 등의 활약으로 이번에도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부상으로 인해 벤치를 지키면서 마라도나와 함께 뛰는 일은 없었다.[7] 결국 대회 내내 벤치에서 지켜봐야 했지만, 마지막 월드컵에서 우승이라도 맛보며 국가대표에서 행복하게나마 은퇴했다.

3. 플레이 스타일

남미 역대 역대 최고의 센터백 중 한 명. 여러 매체에서 센터백 순위를 매길 때 역대 10위 안에 거의 무조건 포함되며 남미 전체로 따져도 엘리아스 피게로아, 호세 나사치 정도를 제외하고는 경합할 수 있는 선수가 없다.

키는 173cm로 중앙 수비수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신장이었으나 그것을 커버할 만큼 뛰어난 도약력[8]과 지능적인 수비 지휘 능력, 그리고 전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상대에게 쫄지 않고 과감히 덤벼드는 투지를 지녔다. 사실상 신체조건만 뺀다면 당대 수비수들 중에서 여러 방면으로 고루 우수한 모습을 보여주던 수비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남미의 베켄바워'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였으니...

격렬하고 과감한 대인 방어는 물론이고, 지능적인 위치 선점 및 공간 장악, 그리고 캡틴이라는 직에 걸맞게 수비진을 진두지휘하는 능력 등 수비수로서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커팅 능력이 정말 발군이었는데, 공격수가 빠르게 전진하며 공을 운반하고 있으면 어디선가 빠르게 나타나 태클이나 슬라이딩으로 공을 탈취해 소유권을 되찾아왔다. 또한 1대1 상황에서의 수비 능력도 탑급으로, 발을 아주 절묘하게 사용해 공격수로부터 어떻게든 공을 빼내왔다. 뿐만 아니라 공격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특히 왼발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킥력은 그야말로 일품. 프리킥은 물론이고 페널티킥 등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파사레야의 왼발에서 시작되는 오버래핑 및 세트 피스 시의 공격 가담은 당시 아르헨티나 공격의 핵심 루트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그 정교함과 강력한 위력을 자랑했다. 그만큼 공수 양면에 걸쳐서 전반적으로 우수함을 보여주었고, 골 넣는 수비수로서의 면모까지 부각되었다.[9]

게다가 주장직에 걸맞게 정신력과 팀워크 또한 강인해서,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진두지휘하는 데 중추 역할을 담당했다. 당대 그의 카리스마는 마라도나의 등장 이전까지 대표팀 내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사실상 당시 감독인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가 파사레야를 중심축으로 하여 아르헨티나의 전술과 팀워크를 구상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한 셈이다.

4. 지도자 경력

1989년 은퇴 후에 리버 플레이트의 감독으로 부임, 1989-90, 1991-92, 1993-94 시즌 우승 했다. 1994 미국 월드컵이 끝난 이후부터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새 감독이 되었고, 1996년 하계 올림픽에서 결승전까지 진출했으나, 나이지리아와의 결승전에서 2-2로 비기고 있다가 90분에 골을 내줘 패배했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도 출전했으나, 8강전에서 네덜란드에게 2-1로 패했다. 당시 너무나 엄격하고 규율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주었기에 많은 선수들과의 반발 및 불화가 있었고, 그로 인해 팀 케미가 어수선한 적이 있었기에 논란이 일었다.[10] 결국 월드컵이 끝나고 그는 감독직에서 사임하였다가, 이후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선수 차출 문제로 2002 한일 월드컵 남미 예선 때 감독직을 사임했다. 2001년 파르마의 감독이 되었으나 좋은 성적을 내는데 실패했다. 2003년에 몬테레이의 감독이 되어 리그컵을 우승했다. 코린치안스 파울리스타의 감독이 되었으나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해 경질당했다. 2006년 1월 9일 다시 리버 플레이트로 돌아왔으나 2007년 10월 15일 사임했다.

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5.1.2. 개인 수상

5.2. 감독

5.2.1. 대회 기록

5.2.2. 개인 수상

6. 여담

파일:GOAL_Defender.jpg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수비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70년대 수비수들 중 1위를 차지했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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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1100> A조 파일:브라질 국기.svg
마리우
자갈루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크레이그
브라운


파일:모로코 국기.svg
앙리
미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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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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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조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체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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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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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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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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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손


D조 파일:스페인 국기.svg
하비에르
클레멘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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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루 세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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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리스토
보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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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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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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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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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회의 참가 감독
1930 1934 1938 1950 1954 1958
1962 1966 1970 1974 1978 1982
1986 1990 1994 1998 2002 2006
2010 2014 201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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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미론 · 2 바티스타 · 3 보치니 · 4 보르히 · 5 브라운 · 6 파사레야 · 7 부루차가 · 8 클라우센 · 9 쿠치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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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품피도 · 19 루게리 · 20 타피아 · 21 트로비아니 · 22 셀라다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카를로스 빌라르도



[1] 스위퍼 [2] 대표팀 역대 득점 공동 9위. [3] 2위는 바비 무어의 25세 109일. [4] 크루이프는 가족 납치 때문에 충격을 받아 불참했다. [5] 참고로 페루는 지금이야 남미 내에서도 중위권 수준으로 추락한 초라한 팀이지만, 당시에는 만만한 팀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1라운드에서 강호 네덜란드도 꺾고 1위로 올라온 팀이기에 의혹 제기는 계속 됐다. [6] 하지만 대회 때 아르헨티나가 우승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일등공신이다. 파사레야가 있었기에 당시 아르헨티나는 든든한 수비와 더불어 뛰어난 파사레야의 후방 공격 전개로 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다. 만일 파사레야가 없었더라면 아르헨티나의 우승도 없었을 것이다. [7] 당시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 이후 새로 부임한 카를로스 빌라르도 감독은 마라도나를 중심으로 전술을 짰는데, 나이가 많이 든 파사레야에서 이제는 마라도나에게로 서서히 주축이 기울어지는 터라... 게다가 오스카 루게리 등의 활약으로 파사레야의 공백을 메우게 되면서 결승까지 무난히 진출했기에 파사레야는 조명받는 일이 거의 없었다. [8] 공중 볼 상황에서 공격수의 뒤에서 점프를 했음에도 볼을 따내는 상황이 많았다. [9] 당시 A매치 70경기에 22골, 수비수로서는 흔히 내기 어려운 득점 기록이다. 게다가 그가 선수 생활 내내 뛴 기록은 통산 451경기 175골. 수비수로서는 가장 많은 골을 넣은 것이다. 다만 후에 이 기록을 깰 또 다른 네덜란드산 수비 본좌가 새로 나타난다... [10] 당시 반발한 주축 멤버는 페르난도 레돈도, 클라우디오 카니자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등. 이유는 선수들의 두발을 짧게 깎으라는 감독의 지시를 불이행했기 때문에... 이후에 바티스투타가 감독의 뜻에 굽혀 머리를 짧게 깎는 단발령까지 불사하여 국대 승선에는 성공했으나, 레돈도와 카니자는 끝까지 지시를 불이행하여 결국 대표팀에 승선하지 못했다. [11] Metropolitano (메트로폴리타노) [12] Nacional (나시오날) [13] B팀 [14] Apertura (아페르투라) [15] Clausura (클라우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