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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딜 정책

뉴딜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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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딜을 위하여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진이 있는 뱃지.

1. 개요2. 배경3. 내용
3.1. 1차 뉴딜 (1933-1935)3.2. 2차 뉴딜 (1935-1938)
4. 결과5. 평가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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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New Deal

1929년 터진 대공황이라는 초유의 경제적 비상 사태를 맞닥뜨린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집권기 미국이 이에 대처하기 위해 1933년부터 1938년까지 내놓은 일련의 정책들을 말한다. 흔히 회자되는 경제적 영향 외에도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장기적인 영향을 남겼고, 결과론적으로 미국이 대공황을 극복하고 명실상부한 초강대국으로 오늘날까지 이르게 한 토대를 만들어주었다.

2. 배경

1929년 10월 24일 뉴욕 주식시장의 주가 대폭락으로 시작된 경제 불황이 미국 전역으로 퍼지고, 당시 대통령 허버트 후버의 필사적인 방지 대책에도 물가는 폭락하여 GNP를 1932년 당시 1929년의 56%로 떨어뜨리고 1,300만명의 실업자를 양산하게 되었다. 그리고 1932년, 이러한 경제적 상황과 정권 교체가 불 보듯 뻔한 시점에서 대통령 선거가 찾아오게 되고, 이때 민주당에서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사람이 바로 당시 뉴욕 주지사였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였다.

후보직을 수락한 루스벨트는 곧장 대선의 최대 이슈인 대공황 극복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브레인 트러스트(Brain Trust)라 불리는 각계의 전문가로 구성된 일종의 정책 자문단을 만드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기회와 부의 불균형, 경제적 불황으로부터 국민들을 구제하겠다는, 즉 ‘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뉴딜(신정책)'을 약속한다. 그리하여 당선된 루스벨트는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브레인 트러스트의 자문을 중심으로 구상된 정책들을 내놓게 되는데 이것이 뉴딜 정책의 시작이다.

3. 내용

3.1. 1차 뉴딜 (1933-1935)

대공황이라는 사태에서 최악의 지지도를 달린 후버도 마냥 손을 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어서 정부의 재정 지원 등 대책은 강구하고 있었다. 허나 그 강도가 쎄진 않았고, 루스벨트는 이들을 본인의 정책으로 계승시키기는 하지만 연방정부의 역할이 훨씬 더 확대된 대대적인 회생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윽고 1933년 3월 백악관에 발을 들인 루스벨트는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첫 100일"이라 불리는 기간 동안 미국을 회생시키기 위한 법안들을 의회의 적극 협조에 힘입어 통과시키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먼저 통과된 것이 연방정부가 대폭적인 지원을 해줌으로써 공황 상태로부터 은행을 구출하여 은행의 업무를 정상화시키려 한 긴급은행법으로, 이와 함께 금본위제도 중단을 통해 금의 유출을 막아 통화 안정과 유동성을 확보하는 한편 또다시 금융 시장이 미쳐 날뛰지 못하도록 제동 장치를 마련하는 증권법을 통과시켰다.

한편, 민생 쪽에 대한 방편으로 나온 것이 우선 과잉생산으로 나락에 빠져있던 주요 농산물 가격을 생산 통제로 가격 안정을 노림과 동시에 직접적인 농업구제 원조의 길을 여는 농업조정법. 거기에 농업이 주요 산업인 동남부의 테네시강에 다목적댐과 발전소 건설 사업을 일으켜 일자리 창출과 전력 공급이 핵심이 되는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Tennessee Valley Authority)의 설립이다. 당시 동남부는 전기조차 들어와 있지 않은 지역이 수두룩한, 여전히 전근대적인 농경사회를 못벗어난 낙후 지역으로 대공황의 직격탄을 그대로 맞은 곳이었다. 그런 이 지역에 전기를 들이고 농업의 현대화를 꾀하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정책으로 오늘날까지 개발공사가 유지되고 있다.[1]

초기 뉴딜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실업률 문제와 노동자 복지 문제로, 루스벨트는 "첫 100일" 말미에 전국산업부흥법(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을 통과시켜 두 개의 기구를 설립한다. 첫번째는 공공공사관리국(Public Works Administration)으로 연방정부 주도로 댐이나 다리 등 거대 공사를 일으켜 실업률을 떨어뜨리고 경제 활성화에 목적을 두었다. 한편, 전국산업부흥법은 행정부에게 각 산업마다 공정경쟁규약을 통해 과도한 경쟁을 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한편,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의 보장을 명시했는데, 이러한 시장의 공정성과 노동자들의 권리 보호를 관리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 두번째 기구인 전국부흥청(National Recovery Administration)이었다. 그 외에도 지역 정부 단계에서의 실업률 문제 대처를 위해 연방 채권을 지역 정부에게 발행하는 연방긴급구제국(Federal Emergency Relief Administration)가 있었는데, 후버 정권 시절 설립된 기구를 승계하여 시행된 기구로 바로 브레인 트러스트의 핵심 인사인 해리 홉킨스(Harry Hopkins)가 주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초기 뉴딜은 곧 위기를 맞게 된다. 우선 정치적 차원에서 뉴딜 정책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민주당 소속으로 포퓰리스트였던 휴이 롱(Huey Long)부터 정반대 성향의 상류층 지원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당 인사에, 뉴딜 정책이 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연방정부의 역할을 주장하는 인물 등 다양한 곳으로부터 도전을 받게 된다. 더불어 측근인 브레인 트러스트도 의견 불일치 등으로 인사 교체들이 이뤄지며 몇몇은 아예 반 루스벨트로 돌아서기도 했고, 정책의 효과 또한 바닥을 치던 경제를 회복세로 돌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여전히 실업률은 크게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연방 법원의 뉴딜 관련 판결 문제였는데, 당시 연방 판사들은 루스벨트 이전 공화당 정권들에 의해 임명된, 뉴딜 정책과는 반대의 정치적 의견을 지닌 인사들이 대다수였다. 이들이 여러 뉴딜 정책들 관련 판결에서 연방 정부의 개입에 위헌 판결을 때려버리며 전국산업부흥법, 농업조정법 등 1차 뉴딜의 핵심 정책들이 무산되어버린다.[2]이로 인해 좀 더 적극적인 정부의 행동을 요구하는 여론은 높아지고 있는 반면에 루스벨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정치적 지지까지 대거 잃을 수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3.2. 2차 뉴딜 (1935-1938)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35년, 루스벨트는 앞서 실패한 정책들의 골자들을 이어받은 새로운 정책들을 내놓는 한편, 더욱 더 진보적인 과감한 뉴딜 정책을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이때 나온 것이 바로 뉴딜 정책을 대표하는 공공사업진흥국(Works Progress Administration)이다. 앞서 연방긴급구제국이 별 재미를 못보자 담당자이던 해리 홉킨스가 아예 뉴딜 정책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광범위한 실업률 구제 사업으로 내놓은 것으로, 지방 정부들과의 연계를 통해 병원, 다리, 공원 등의 시설 공사에 투입될 비숙련직 일자리들을 창출하고, 여기에 더 나아가 음악, 미술, 연극 등 예술 산업에도 손을 뻗쳐 수많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뉴딜 정책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정책으로 한창 땐 330만명의 실업자들을 고용 상태로 돌려놓는 경제적 영향은 물론, 상대적으로 소수이나 여성들 또한 일자리를 마련받아 경제 활동에 참여하고, 일부 흑인 예술가들이 정부 지원을 받아 예술계에 족적을 남기기도 하는 등 사회적 영향 또한 큰 정책이었다.[3]

공공사업진흥국 외에도 1차 뉴딜을 계승하는 많은 정책들이 도입됐다. 우선 전국산업부흥법을 이어받아 똑같이 단결권, 단체교섭권 등 노동자 권리 증진을 발의한 전국노동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s Act)[4]을 내놓는 한편, 사회보장법(Social Security Act)을 통해 국민들에게 연금 등 전반적인 사회 안전망을 제공하는 복지 시스템을 구축한다.[5] 또한 이러한 정책들을 지원 사격하기 위한 Wealth Tax Act, 소위 부자 증세 혹은 부유세로 불릴만한 세제 개혁을 도입했다. 첫 임기 때 이미 63%까지 올린 소득세율 상한을 79%까지 끌어올린 이 정책은, 휴이 롱의 지지 세력을 루스벨트가 흡수하는 효과까지 낳았다.

이러한 법안들은 당연히 또 사법부의 반대에 부딪힐 것이 뻔했고, 이에 루스벨트는 1937년 연방 법원을 자기측으로 포섭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바로 의회에서 대통령이 연방 판사 인사권을 쥘 수 있게 하는 법안을 발의하는 초강수를 둔 것. 당연히 이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으나 이는 연방 법원에 충격을 주기엔 충분했다. 당시 9명의 연방 판사들 중에는 오웬 로버츠(Owen Roberts)라는 중도적 성향의 공화당계 판사가 4명의 보수적 공화당계 판사들의 판결에 따라가는 형태로 과반수를 만들어 루스벨트의 정책들에 위헌 판결을 내리고 있었는데, 바로 이 로버츠가 이때부터 다른 판결들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 위헌 판결을 받은 바있는 최저임금제 관련 소송에서 합헌쪽 과반수로 입장을 바꾼 것을 시작으로 이때부터 친 뉴딜로 입장을 변경, 이후 연방 법원을 친 루스벨트 성향으로 돌리게 됐다.

소득세 79%가 적용되었던 소득 기준은 연수입 500만 달러. 1930년대 기준으로는 비현실적인 소득이었기 때문에, 당시 이 기준에 부합하는 개인은 록펠러 1명 뿐이었다고. 이 외에도 1935년의 개인 소득세율 개정은 슬로건적 효과 쪽이 더 컸으나, 1936년의 사내유보금 과세 등 추가 세제의 도입을 통해 비로소 재원 확충이 가능했다는 시각도 있다. 관련 링크(위키백과).

4. 결과

이러한 미국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정책들은 대공황이라는 사태로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던 미국 경제를 붙잡아 다시 회복세로 돌리는데 성공한다. 당장 1937년 GNP, 산업생산지수, 통화량 등 지표 기준으로 대공황 이전 수준까지 회복됐으며 실업률도 제법 낮추는데 성공했다. 다만 실업률은 WPA 정책이 낮춘 부분도 상당히 커서 장기적으로 볼 때는 여전히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어쨌든 루스벨트는 그야말로 멘붕 상태의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희망을 주는 데는 성공하여 1936년 대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재선에 성공한다.

하지만 루스벨트 정권이 집권 2기 시작과 함께 맞게 된 것은 1937년 불황이었다. 불황의 원인으로는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데, 경제 주기상 찾아오는 일정한 불황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케인즈주의자들은 뉴딜이라는 대규모 정책을 굴리면서도 적자 예산에 굉장히 민감하게 신경써온 루스벨트를 비판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긴축 재정으로 뉴딜 정책을 오히려 지속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어찌됐든 덕분에 대기업 트러스트 해체, 노조 형성 등 뉴딜의 급진성에 불만이던 보수 세력에게는 좋은 먹잇감을 던져준 꼴로 1938년 선거에서 공화당 보수 인사들이 상당수 의회 자리를 차지하는 결과로 이어지면서[6] 루스벨트와 대기업-보수 정치세력 간 갈등은 고조된다.

그러나 불황이고 진영 갈등이고 뭐고 이 모든 상황을 다 쌈싸먹는 대공황 이상의 대사건이 터지니 그것은 바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경제는 1941년 참전과 함께 뉴딜 정책을 넘어 본격적인 전시 체제로 돌입하게 되고 전쟁 특수도 어느정도 누리게 되면서 대공황을 극복하게 된다.[7] 하지만 뉴딜 정책이 완전히 중단된 것은 아니어서 TVA, 사회보장제도 등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5. 평가

한마디로 말하면 죽어가던 자본주의 경제에의 응급처치.[8]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부상했던 시기와 겹쳐 케인즈주의의 영향으로 나온 정책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케인즈주의에 입각해 시작한 것이라기보다는 별개로 출발한 정책이다.[9] 다만, 케인즈의 이론과 뉴딜정책이 (인프라확충, 경기부양, 노동법, 반독점, 사회보장제도로 부의 불평등 해결 등) 상당수 부합하는 측면은 있다. 또한 정책의 집행과정에서 케인즈가 자문을 해주기도 했고, 정책을 추진하는 관료들 가운데서도 케인지언들이 많이 있었음을 감안[10]하면 케인즈주의가 꽤 큰 영향을 미쳤다.

위에서 봐 알 수 있듯이 루스벨트 행정부는 공업, 농업, 상업, 금융 등 경제 전분야에 있어서 대대적인 정책을 펼쳤고, 게다가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임으로써, 인위적으로 수요를 만들어냄으로써 묶여있던 자금이 공공사업에 투입되고, 이를 통해 부작용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대공황으로 무너져내리던 산업을 회생시켰다.

다만 이러한 개입 정책이 모두에게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특히 보수주의자에게는 노조 결성, 트러스트 해체 등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정책들이 기업들을 억압하고 시장의 자유성을 침해하는 사회주의적 정책이라고 받아들여져 불만이었다. 반대로 진보쪽에서 보기엔 반대로 정책이 너무 보수적이어서 대공황의 주범인 금융계를 정부가 여전히 자유롭게 놔뒀고, 가난한 대중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에는 시장 구조, 세제 등에 대한 개혁적인 면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뉴딜 정책이 1935년 위기를 맞았을 때, 인위적인 수요 창출로 통화가 너무 과잉공급된 바람에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고, 이 인플레를 막기 위해 다시 긴축예산이 편성된 것이 겨우 회복기에 들어선 경기를 하강시켜 1937년 불황을 일으켰다는 재정 운영 측면에서의 비판도 있다.

이 외에도 인종 갈등 문제를 좀 더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비판, 관료제의 비실용성을 키웠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노동법 도입 후 성장한 최대 노조 세력 둘이 대립하게 되자 노사 대립을 막기 위해 공정노동기준법을 시행하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제2차 세계 대전에 휘말려 성과를 보지 못한 점도 있다. 다만 이는 뉴딜 정책이 워낙 사회 각계에 대대적인 개입을 이루는 정책이다보니 긴 세월 수많은 측면에서 많은 비판들이 나온 것이며 반대로 부의 분배, 각 산업의 효율적인 균형 형성, 국가 위기 상황에서의 올바른 정부의 개입 선례를 남겼다는 점 등의 긍정적인 평가도 많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들을 떠나, 뉴딜 정책이 실제 미국 사회에 남긴 영향은 그야말로 막대했다. 뉴딜 정책의 복지 사회로의 방향성 제시는 이후 공화당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집권하고도 관련 정책이 이어졌으며, 더 멀리 보자면 린든 B. 존슨의 '위대한 사회'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도 미국의 자본주의는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는 방임주의적 체제에서 계획경제적 요소가 섞인 혼합경제로 성격이 변하게 된다. 실제 미국에 영향을 받은 서구권과 한국 등의 경우에도 불황이 오면 정부가 개입한다는 것은 이젠 좌우 가리지 않고 당연시 되고있다

사실 뉴딜 정책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의는 미국이 자본주의 경제를 포기하지 않고 국가의 개입으로 자체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대공황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미국도 다른 국가들처럼 파시즘이나 볼셰비즘 같은 극단적인 방향으로 사회가 치닫게 될 수도 있었지만, 국민들에게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사회 내 극단주의자들의 성장을 억제하고 큰 틀에서의 기존 체제를 지켜내어 결국 2차 대전을 통해 미국이 세계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게 했고, 전후의 번영을 누리게 되는 발판도 마련시켰다. 결과적으로 따지고 보자면 '사회주의 정책'이라는 일부의 편협한 시각과는 달리 진정으로 자본주의를 수호하고 나아가 황금기를 구가시킨 정책이었던 것이다.

다만, 이 점에 대해서 미국의 초강대국화는 사실 뉴딜 정책과 무관하게 벌어졌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대공황 이후 전체주의에 잠식당한 나라는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 유럽의 후발주자들이었고,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상대적으로 오래 민주주의를 유지해온 나라들은 모두 기존 체제를 유지했다. 실제로도 1차대전 승리와 광란의 20년대라 불리는 1920년대의 폭발적인 경제성장으로 인해 미국의 강대국화는 이미 국제사회에서 공공연하게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허나, 대공황이 초강대국화에 카운터를 먹이면서 그 시기를 십년도 넘게 늦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때문에 대공황의 영향력을 불식시킨 뉴딜 정책이 저평가받을만한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일부 경제적 자유주의적인 경제학자들은 뉴딜이 시장의 자유를 침해하고 자연스러운 경기회복을 막아서 일시적인 경제불황을 장기적인 대공황으로 악화시킨 주범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루스벨트의 전임자이자, 뉴딜 옹호론자들에 의해 자유방임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힌 허버트 후버는 사실 루스벨트 못지 않은 개입주의자였고, 각종 공공지출을 증가시켜 뉴딜 옹호론자들이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재정적자를 꾸준히 실현했으며, 미국 농민들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도입해 미국 경제에 치명상을 입혔다. 또한 악화되는 경제상황에도 불구하고 임금을 낮추지 못하게 해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상황에서 생산성과 비례하는 임금조정이 이뤄지지 않아 실업률이 급증하게된 요인을 제공했다.[11]

실제로 뉴딜 정책 역시 1937년 발생한 2차 공황에 휩쓸리면서 끝모를 수렁으로 빠지게 되었고, 뉴딜 정책의 핵심인 적자재정의 근본적인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며 정책의 지속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뉴딜 정책 막바지였던 1939년의 실업률은 17.2%, 실업자는 948만 명으로 후버 정부 마지막 해(실업률 16.3%, 실업자 802만 명)보다 실업률이 오히려 악화되어, 루스벨트의 최측근이자 재무장관이었던 헨리 모겐소마저 1939년 하원 청문회에서 “이전에 없던 수준으로 돈을 썼지만 효과가 없습니다. … 이번 정부가 집권한 지 8년이 지났지만 처음 시작할 때만큼 실업률이 높습니다. … 게다가 부채도 어마어마합니다”[12]라며 정책의 실업률 조정 측면에서의 실패를 자인했을 정도다. 때문에 경제적 자유주의적 학자들은 루스벨트가 떠들썩하게 내세운 공공 부문의 일자리는 민간 부문의 일자리 파괴로 상쇄됐으며, 때마침 기적적으로 터진 2차 대전이 아니었으면 미국 경제는 적자재정과 인플레이션의 딜레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렇기에 이들은 대공황에서 촉발된 실업문제를 해결한 것은 뉴딜이 아니라 수천만에 달하는 전시 인력 수요였다며 뉴딜 정책을 비판한다. 아랫단락에 제시된 모든 변론에도 불구하고, 후버의 개입주의와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이 실업자 구조에는 별 도움이 안 되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점 때문에 오히려 진작 망해 없어져야 정상이었을 기업들이 2차대전 때까지 살아남아서 회생할 기회를 거머쥘 수가 있게 되었다.

실제로 뉴딜 정책이 실업자들의 수를 줄이는 데는 실패하기는 했지만, 사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뉴딜 정책은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이라기보다는 망해가는 기업들을 구제하는 정책에 더 가까웠다. 노동자들의 임금을 보장해주기는 했지만 정작 고용 여부까지는 책임지지 않았다는 것에서 이 점이 여실히 드러나는데, 높아진 임금을 감당할 생각이 없던 기업들은 어차피 과잉 공급으로 팔리지도 않던 물건들을 찍어내는 생산라인을 줄이면서 잉여 노동자들을 모조리 잘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잘려나간 인원들이 실업자들의 대열로 합류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래도 뉴딜 정책에서 시행한 공공사업으로 이 실업자들 중 상당수가 흘러들어가 재취직을 할 수 있기는 했지만 결국 민간 기업에서의 노동자들의 숫자가 줄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로 인해 수혜를 입은 것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기업들이었다. 당장 그들은 남아돌던 생산라인을 정리함으로써 쓸데없는 초과지출을 막을 수 있었다. 거기에 정부가 시행한 공공사업에 취직한 노동자들이 정부에게서 받은 돈을 갖고 생산물 시장에서의 수요를 창출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기업들은 어떠한 부담도 지지 않은 채 정책의 성과만을 얻어먹을 수가 있었다.

뉴딜 정책이 없었어도 시장은 언젠가 균형을 찾을 거라는 것이 시중의 평가이기는 하나, 그 균형을 찾는 과정에는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기업의 희생도 필수적이었다. 당시 생산물 시장은 명백하게 과잉 공급인 상황이었으며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공급을 줄여야 했는데, 이 공급을 줄이기 위해서는 생산물을 찍어내는 노동자들을 잘라내 각 기업의 생산량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균형을 맞출 수가 없는 게 당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나아간 단계인 아예 생산물 시장의 공급자에 해당하는 기업들을 정리하는 수순까지 가서 공급자 수 자체를 줄여야지 균형이 맞춰졌을 거다. 확실히 뉴딜 정책이 없었어도 언젠가 균형이 맞춰지고 시장이 정상으로 돌아오기는 했겠지만 그 지점까지 가기 위해서는 기업들 수십, 수백 개가 부도가 날 것이 분명했다. 실제 통계를 확인해보면 뉴딜 정책 시행 직전까지 급증하던 기업과 은행들의 파산 건수가 정책 시행 시점을 기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뉴딜 정책은 원래라면 망함으로써 시장 균형을 맞추는 과정에서 희생되어야 했을 기업들을 회생시키고 현재까지 이어지게 만든 정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 살아남은 기업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전쟁특수에서의 공급자가 되어주었다. 시장에서의 공급량 조정은 단기적 요소이지만, 공급자의 수 조정은 장기적 요소라는 것을 생각하면, 만약 대공황 시기, 이러한 기업들이 쓰러졌더라면 제아무리 미국이라 하더라도 전쟁특수의 효과를 온전히 받아먹을 수는 없었을 거라는 게 중론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뉴딜 정책은 대공황에서 사라졌어야 할 기업들을 2차 대전이 터질 때까지 살려놓음으로써 미국이 전쟁특수를 통해 재도약을 할 수 있는 발판의 역할까지도 톡톡히 해줬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단순히 실업률을 잡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뉴딜 정책을 폄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6. 여담



[1] 수십년간 테네시강 유역의 발전소들을 건설, 관리해왔으며 이 중에는 원자력 발전소도 몇 기 있다. [2] 다만 당시의 1차 농업조정법은 매우 문제가 많은 법이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이 농업조정법의 부작용으로 남부 농장지대에서는 수만 마리의 가축을 도살하거나 폐사해야 하는 등, 생산량 통제 정책의 부작용이 제대로 드러났기에 위헌 판결을 받은 것이지 단순히 연방 판사들이 친 공화당 성향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지만 농업조정법을 위헌으로 판결한 미국 대 버틀러 사건 자체는 법안에 포함되어있던 과세 문제와 연방정부와 주정부간 관할 문제에 관한 것이었으며, 농업조정법의 부작용에 관한 것은 아니긴했다. 농업조정법은 이후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등의 조언을 받아 더 나은 형태로 개선되었다. [3] 20세기 최고의 여성 성악가 중 하나인 매리언 앤더슨도 이 WPA의 수혜자이기도 했고, 아예 흑인으로만 캐스팅된 맥베스 연극이 지원받기도 했다. [4] 뉴욕주 상원의원이자 브레인 트러스트 멤버이기도 했던 로버트 와그너(Robert Wagner)의 이름을 따서 와그너법이라고도 불린다. [5]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는 바로 그 소셜 시큐리티, 미국 사회보장제도다. [6] 물론 그럼에도 절대치론 민주당이 많이 앞서갔었다. 사실 그동안 선거들이 민주당 입장에서 계속 압승이었었다. 1936년 하원의원 선거만 보더라도 민주당이 총 435석 중 334석을 쓸어갔을 정도였으니.. [7] 다만 이걸 가지고 주로 FDR 안티들이 "뉴딜은 역시 헛돈 낭비한 정책이었어"라는 과장된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전시 경제에서 활황은 분명 존재했지만 그것은 흔히 착각하기 쉬운 화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단 전시경제의 배급체계하에서 소비는 배급을 통해 품목별 수량별로 제약을 받기에 재정지출의 승수효과는 극단적으로 쪼그라든다. 뉴딜 시기와 비교해서 훨씬 낮은 승수효과가 그저 더 많은 지출규모에 의해 상쇄되었을 뿐이다. 이걸 효율적인 부양정책이라고 생각하면 그냥 바보. 다만 승수효과를 통해 보이는 효율성과는 별개로 전쟁엔 돈이 엄청 많이 들긴 한다. 규모면에서는 댐 공사와는 넘사벽일지도. 즉, 뉴딜을 까는 측에서 전쟁 운운하는건 인권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그 공황을 해결할 정도로 막대한 정부지출이 전쟁에 쏟아졌다는건 간과하고 있다. 게다가 전쟁이 마냥 활황과 연결되는 것도 아닌게 당장 2000년대 이라크 전쟁 직후 재정 부담 + 대침체로 휘청거렸던 미국을 생각해보자. 전쟁은 오히려 다수의 경우 경제 아작내는 지름길이다. 영국도 2차 대전으로 경제가 휘청거렸고, 소련 또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결정타로 여러 악재가 겹치며 결국 해체되었다. 애초에 1900년대 이후의 전쟁들은 이득보단 손해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예전 역사에서도 사례를 찾을 수 있다. 프랑스가 세금이 많았던 이유가 전쟁 때문이었다. 그 프랑스는 이후 어떻게 되었는가? [8] 응급처치라고 보기에는 스케일도 크지만, 다른 정책들도 섞여 있기는 하다. 다만, 여기서는 구제와 부흥에서의 관점이다. [9] 단편적으로 루스벨트는 2차 대전 참전까지 평균 3%의 예산 결손을 냈으며 1937년 불황이 찾아왔을 때는 균형 예산을 이루기도 하여 케인즈주의자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10] 케인스가 직접 미국에 방문했을 때 미국의 경제 관료들 사이에서 고전파가 거의 없어지고 유능하고 젊은 인재들이 많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11] 미국의 1920~1922년 경기불황 당시의 상황을 보면 임금과 실업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때 당시에는 1년 동안 임금이 20%가량 떨어졌지만 실업률도 빠르게 감소해 정상화됐다. 1921년 11.7%였던 실업률은 다음해 6.7%로 떨어지고, 그 다음해인 1923년에는 2.4%로 하락했다. [12]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Capitalism in America), 앨런 그린스펀·에이드리언 올드리지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