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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22 21:19:51

면맥차관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자문위원회 논의3.2. 기술협력특별위원회의 창설과 일본의 방해3.3. 쑹쯔원의 귀국
4. 내용5. 참고 문헌

1. 개요

1933년 5월 29일, 국민정부 행정원장 대리 겸 재정부장 쑹쯔원과 미국 부흥금융공사 사이에 체결된 5천만 달러 어치의 차관을 말한다.

2. 배경

만주사변 이후 중국은 절대 다수의 중공업과 콩을 비롯하여 엄청난 작물을 생산하는 만주를 상실함에 따라 극심한 경제 위기를 겪게 되었다. 여기에 경제 대공황의 여파가 닥쳐왔으며 일본 측이 만주의 세관을 차례로 점령하고 중앙정부로의 송금을 차단함에 따라 대규모 불황을 겪게 되었다. 1933년 4월 21일, 화상사창연합회는 중앙은행, 중국은행, 교통은행 등 중국의 주요은행이 경영자금을 낮은 이자로 대출해줄 것을 행정원에 청원하였으며 5월, 화상사창연합회는 국민정부에 정부의 보증으로 각 은행이 2천만원을 융자해줄 것을 청했다. 이에 실업부장 천궁보 등도 긍정적으로 반응하며 각 은행에 2천만원을 대출하며 이자는 6%로 제한하여 정부가 4%, 방적업이 2%를 부담한다는 방침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중국은행 총재 장공권은 즉시 불가능하다고 정부의 요청을 딱 잘라 거절했으며 교통은행과 중앙은행은 아예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3. 전개

1933년 4월 18일, 쑹쯔원은 런던국제경제회의의 중국 전권대표로 임명되어 상하이를 출발했다. 5월 8일, 워싱턴에 도착한 쑹쯔원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합중국 대통령과 회담하여 4월 19일, 공동성명을 발표, 평화에 대한 조기회복을 희망한다고 표명했다.

5월 29일, 쑹쯔원은 부흥금융공사와 면맻가관 체결을 성공시켰다. 이는 미국 정부가 중국돈 2억원에 해당하는 미국 달러 5천만 달러를 중국에 제공하고 중국은 그것으로 미국에서 면화 4천만 달러, 소맥 1천만 달러 어치를 구매하여 매각한 후 자금을 확보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한 후 국민정부가 최초로 대차관 유치에 성공한 사례였다.

5월 30일, 쑹쯔원은 미국을 출국하여 6월 5일 런던에 도착하였다. 쑹쯔원은 영국 수상 램지 맥도널드, 외상 존 사이먼과 회담했다. 쑹쯔원은 영국 측에게도 중국에 차관 제공을 요청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쑹쯔원은 6월 19일, 7월 4일 두차레에 걸쳐 영국 외상 사이먼과 회담하며 중국인들이 영국의 대일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타진하며, 미국과 영국이 협력하면 일본에 대한 경제적 압박을 강화할 의향이 있으니 영국이 중국에 경제적인 원조를 제공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사이먼은 영국의 국제연맹의 멤버로서의 입장을 강조하는 것에 그쳤으며 거꾸로 중국 측이 일본의 침략에 저항할 능력이 취약하며 중국 측이 채무를 불이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3.1. 자문위원회 논의

6월 23일, 쑹쯔원은 런던에서 국제연맹 사무국 차장을 지낸 프랑스 금융인 장 모네, 영국의 대중죽 차관단 대표 C.S. 아디스와 회담하여 중국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벨기에, 독일, 미국이 각각 반액을 출자하여 국제적 회사를 창설할 것을 제안함으로 일본을 제외한 국제적 차관단을 재구성하는 것을 기도하였으나 유럽과 미국 대표들은 난색을 표했다. 7월 6일, 쑹쯔원은 미국 차관단 대표 T.W. 라몬트와 아디스를 초빙하여 모네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국 재정 자문위원회 결성을 제안했다. 이에 아디스와 라몬트는 자국 정부와 재단의 승인을 전제로 위원에 참가할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7월 12일, 라몬트는 주영 일본대사 마쓰다이라를 방문하여 쑹쯔원을 미국에서 가장 촉망받는 중국 정치지도자로 소개하며 쑹쯔원이 제안한 자문위원회는 정치적 성질이 없고 중국의 경제적 개선에만 관여하며, 위원에게 어떠한 의무를 지우지 않으니 참가할 것을 권유했다. 이어 라몬트는 쑹쯔원에게 4국 차관단 승인, 일본인 위원 참가, 위원에 대한 정부의 승인을 제안했으나 쑹쯔원은 일본인 참가는 거부했다.

마쓰다이라 대사는 라몬트의 정보 제공에 대해 감사한 후 본국에 장제스 황푸는 배일정책을 바꾸어 협조적 태도를 가직려 하지만 쑹쯔원은 구미에서 배일 분위기를 강화하고 있다고 보고, 위원회 설립에 대하여 "요컨대 자기의 기반을 강고하게 하고 이를 이용하여 더욱 반일태도로 나갈 우려가 다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 (자문위원회의 성립은) 차관단을 사실상 인정하는 것으로 실제로는 일본이 가입하고 있는 차관단을 파괴할 우려가 있고, 따라서 선의를 가지고 위원회의 참가를 승인하는 사람들도 일본 측에서 보면 그런 사람들을 결속하여 일본을 압박하려는 것이라는 의혹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라고 보고한 후 우치다 외상에게 자문위원회 성립을 방해해야 한다고 상주했다.

7월 14일, 마쓰다이라와 라몬트의 회담이 다시 행해졌는데 라몬트는 아디스 등과 함께 여전히 위원회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비추었다. 7월 15일, 우치다 외상은 마쓰다이라 대사의 의견에 동의를 표시하며 다음과 같은 훈령을 전달했다.
위의 원조가 시작되면 지나 부흥은 고사하고 오히려 내란과 분란의 도화선으로 될 우려가 있다. 그리고 지나의 전통인 이이제이책에 이용될 위험이 있는 것으로 (...) 일본으로서는 이 원조는 일본을 통하여 실시되던지 적어도 일본은 제외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인바 상기한 우리의 주장은 지나, 나아가 동양의 항구적 안정에 대한 일본의 열렬한 희망과 안정의 초래에 대하여 극력 노력하려고 하는 공고한 결의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동양에 있어서 우리의 지위와 실력으로 봐도 동양평화 확보의 중요한 기조가 되어야 하고 또 지나 및 열국의 존중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3.2. 기술협력특별위원회의 창설과 일본의 방해

6월 28일, 쑹쯔원은 연맹사무국에 편지를 보내 1932년 이래 연맹의 중국에 대한 원조와 협력관계에 감사를 표한 후, 중국이 수개 성을 골라 경제재건의 시범지대로 삼을 단계가 되어 있다고 밝히고 국제연맹에서 국민정부 및 전국경제위원회와 연락하기 위한 총연락책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7월 3일, 국제연맹 이사회는 대중국 기술협력특별위원회의 설치를 가결하고 오후 이사회에서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4개 상임이사국과 스페인, 노르웨이, 체코슬로바키아, 중국을 기술협력특별위원회 회원국으로 결정하고 필요한 경우 비연맹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를 초청하기로 결정하였다.

7월 18일, 대중국 기술협력특별위원회 1차 회의가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쑹쯔원은 런던에서 파리로 이동하여 이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미국 측도 중국의 요청에 따라 주불 미국 대사관의 마리나 참사관을 옵저버로 참석시켰다. 이날 회의는 국제연맹 사무국 위생부장 루트비히 라이히만을 만장일치로 대중국 연맹 총연착책으로 선출하였다. 라이히만은 1933년 4월부터 5월까지 4차례 중국을 방문하고 쑹쯔원과 긴밀히 연락하였다. 일본 측은 라이히만을 이름난 반일가로 지목, 쑹쯔원이 술책을 부려 라이히만을 총연락책으로 선출시킨 것으로 판단하였다. 우치다 외상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구미에서 쑹쯔원의 활동을 저지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7월 25일, 우치다는 정금은행 런던지점 지배인인 노하라를 시켜 아디스에게 "일본 측을 제외하는 한 본 위원회의 설립에 반대하고 열국 측, 특히 차관단 관계국측의 위원회 참가에 찬성하기 어려운 형편이다."라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통고하도록 지시했다. 결국 일본의 맹렬한 반대 때문에 아디스는 자문위원회 참가 의사를 철회하였고 이에 라몬트도 마쓰다이라에게 참가 철회 의사를 전달하였다.

7월 29일, 쑹쯔원은 유럽 방문을 마무리하고 캐나다와 미국을 경유하는 귀국길에 올랐다. 8월 7일, 쑹쯔원은 하이드파크에서 루스벨트 대통령과 다시 회담하였는데 일본 측은 이에 대해 대단한 불만을 표출하였다. 일본 측은 즉각 주미 일본 대사관을 통하여 중국이 면맥차관을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보장했는지 등을 질문하였다. 8월 10일, 주미 일본대사 가쓰지 데부치는 코델 헐 미국 국무장관에게 중국이 면맥차관으로 얻은 면화와 밀을 염가로 판매하고 그 수입을 각 방면에 사용하는 것은 일본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달하며 중국경제 회복을 위해 국제연맹이 지원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라몬트와 아디스가 자문위원회에 불참한 것에 대해서도 만족을 표하였다. 이에 헐 장관은 면맥차관은 미국 농산물 가격의 안정을 위한 것이며 다른 뜻은 없다고 해명했다.

3.3. 쑹쯔원의 귀국

8월 12일, 쑹쯔원은 제퍼슨호에 탑승하여 시애틀을 출발하였다. 제퍼슨호는 8월 25일, 요코하마에 기항하였고 일본 정부는 쑹쯔원과 회담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하였으나 쑹쯔원은 회담은 물론 일본에 상륙하는 것조차 거절하였다. 8월 28일, 쑹쯔원은 상하이로 귀국하여 차관을 유치한 대영웅으로 성대한 환영을 받았고 곧바로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 있는 자택으로 돌아갔다. 9월 1일, 쑹쯔원은 베이핑 정무정리위원회 위원장 황푸와 면담을 가졌다. 황푸는 쑹쯔원에게 구미제국의 원조를 얻어 일본을 자극하는 것이 득책은 아니라고 주장하였고 쑹쯔원은 차관으로 전투기 구입이나 강철공장 설치 등 군사적 건설사업을 하려는 것이 아니며 생산적 건설사업에 투자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9월 28일, 쑹쯔원은 자신의 몇 안되는 일본인 친구인 오무라와 만나 자신의 일본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자신은 결코 친일을 할 수 없다. 다만 이 의미는 일본이 과거 및 현재도 취하고 있는 압박정책을 버리지 않는 한 중일의 친선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 만주사변 후 오늘까지 일본이 취하여 왔던 행동을 보면 일본은 지나를 어떻게 하려 고하는 것인지 일본의 진의를 전혀 알 수가 없다. 현재 최근의 북지 정황을 봐도 일본이 과연 지나와 협력하여 북지정리의 성의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지나가 중일의 친선을 꾀하겠는가? 어떤 시각 올때까지는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다. 이 의견은 결코 자신 한 사람만이 아니라 아마 지나 전국을 통한 지식계급이 가지고 있는 의견이라고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으로 믿는다. (...) 오늘날 중국을 구원하는 길은 경제적 건설 외에는 없고, 이 의미에서 먼저 첫째로 절대 필요한 것은 내전을 중지하고 정치상 의견의 차이가 있는 것은 없앨 수 있지만, 군벌의 지반획득을 위한 전쟁만은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편 9월 14일, 일본에서는 주 소련 일본대사 히로타 고키가 신임 외상에 취임했다.

4. 내용

5.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