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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노스트라다무스 Nostradam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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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미셸 드 노트르담 Michel de Nostredame |
출생 | 1503년 12월 14일[1] |
프로방스
생레미드프로방스 (現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부슈뒤론주 생레미드프로방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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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66년 7월 2일[2] (향년 62세) |
프로방스 살롱드프로방스 (現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부슈뒤론주 살롱드프로방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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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생로랑 성당[3] |
국적 |
[[프랑스 왕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의사, 작가, 번역가, 점성술사 |
신장 | 188cm[4] |
학력 | 몽펠리에 대학교 ( 의학) |
배우자 |
앙리에트 당코스 (1534년 - 1537년, 사별) 안 퐁사르드 (1547년 결혼) |
종교 | 가톨릭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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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명은 미셸 드 노트르담 (Michel de Nostredame).[5]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는 라틴어식 이름이다.프랑스 국왕 앙리 2세의 정책 자문이며 점성술사로도 유명했으며 천명을 읽었기 때문에 기구한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2. 생애
그의 조상은 원래 유대인이었으나 할아버지 때 가톨릭으로 개종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영민한 미셸은 상업 대신 학문의 길을 택해 15세 때 아비뇽 대학에 입학했으나 2년 뒤인 1520년에 흑사병이 돌아 대학이 휴교하자, 8년간 프랑스 전역을 방랑하며 견문을 넓히고 학문을 다듬었다. 이때 약재에 대한 지식을 배워 약종상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후 1529년에 당대의 명문 몽펠리에 대학 의대에 입학했지만 얼마 못 가서 교수들과 반목하다 과거 약종상으로 일한 전적이 있다는 것이 발각되어 퇴학당한다.[6]그 뒤 당대의 명의 스칼리제 밑에서 수련을 하면서 앙리에트 당코스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얻었으나, 흑사병 환자들을 치료해 주고 돌아와 보니 아내와 자식들이 흑사병에 걸려 사망해있던 비극을 겪는다. 그 후로 약 10년간의 행적이 묘연한데, 노스트라다무스의 삶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이 기간 동안 신비주의나 점성술과 같은 오컬트에 정진했다고 묘사된다.
그 후 1546년에 남부 프랑스에 흑사병이 퍼졌을 때 새로운 치료법으로[7] 흑사병을 치료하는 데 공헌했고, 1547년부터 살롱드프로방스라는 마을에 안주하며 여기서 안 퐁사르드라는 과부를 만나 재혼하게 된다. 안에게서 3남 3녀의 자녀들을 얻는다.
1550년경부터 다음 해에 있을 일들을 예언하는 달력( 토정비결 비슷한 달력)을 발간하기 시작했고, 이게 잘 맞는다 하여 예언가로서 명성을 쌓기 시작한다. 1555년에는 그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집의 초본을 발간하게 되는데, 인쇄술의 보급, 당시 지식인들 사이의 오컬트 열풍 등을 타고 프랑스 전체로 퍼져나가게 된다. 그러던 중 오컬트 신봉자인 앙리 2세의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에 의해 궁정으로 초청된다.
이후 앙리 2세의 마상 창 시합 도중의 사고사, 앙리 2세와 카트린 사이에서 얻은 아들들이 모두 프랑스 왕이 되지만 모두 요절한다는 예언이 들어맞으며 더욱 유명해진 그의 이름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사람들은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의 예언서를 뒤져보게 된다.
말년에는 통풍과 류머티즘으로 고생했으나, 왕비의 총애를 받아 그럭저럭 풍족한 노후를 보내며 62세로 사망했다. 1566년 7월 1일 병사하기 전날 밤에 자신의 죽음을 가족들에게 예언한 것이 마지막 예언이 되었다.
3.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자세한 내용은 1999년 지구멸망설 문서 참고하십시오.예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예언가로 런던 대화재, 나폴레옹,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과 자동차와 중동에서 벌어질 제3차 세계 대전, 이른바 1999년 지구멸망설에 대한 예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이 예언 덕분에 예언가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오죽하면 예언을 잘하는 사람을 "○○트라다무스." 라고 별명을 지어줄 정도.
4. 여담
예언서 외에도 의학, 요리법[8], 화장품 제작법에 대해 글을 남기기도 했다.또한 노스트라다무스는 의사로서도 당시 시대를 꽤 앞서 나간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1546년에 남부 프랑스에 흑사병이 퍼졌을 때 '새로운 치료법으로 흑사병을 치료하는 데 공헌했다'고 전하는데, 이 새로운 치료법이라는 게
- 거리에 널브러진 시체 전부 수습해 매장하기
- 한번 쓴 붕대는 재활용하지 않고 더러워진 붕대는 전부 태워 버리기
- 쥐는 보이는 대로 모두 잡아서 불태우고 도랑에는 술이나 뜨거운 물을 뿌려 쥐가 다니지 못하게 하기
- 죽은 환자가 사용했던 시트나 옷은 전부 불태우기
- 물은 무조건 끓여서 마시고 끓인 물로 목욕하기
- 신선한 공기 마시기
등이 있다. 동시기 동양권이나 현대 서양인 기준에서는 새롭게 느껴지기 어려우나 노스트라다무스가 살았던 시대는 ' 위생'이라는 개념이 모호[9]했던 중세 직후 르네상스 시대였다.[10] 노스트라다무스 본인도 이 치료법 대로 환자를 대할 때는 반드시 몸을 씻고 환자를 대했다고 전해진다.[11]
또한 노스트라다무스는 자신만의 독특한 조제법으로 제조한 약제법도 가지고 있었는데, 현대 학자들이 조사한 결과 장미꽃, 초록실측백나무의 톱밥, 정향, 창포 기름, 목질의 알로에 등으로 만든 가루를 섞어서 조제한 것으로, 재료를 수집할 때도 노스트라다무스는 장미를 구할 때는 반드시 이른 아침 새벽녘에 따야 한다는 규칙을 지켰고[12] 약을 환자들에게 먹일 때도 환자들에게 바로 삼키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 입에 머금고 있다 삼키도록 했는데, 농축된 장미와 창포 기름이 내뿜는 자극적인 냄새 덕분에 흑사병을 옮기는 쥐벼룩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게 본인이 의도하거나 원리를 이해해서는 아니고, "그렇게 하는 게 더 낫더라" 정도의 경험적인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안타깝게도 이 치료법이 항상 사람을 살린 것은 아니어서 간혹 가다 죽는 사람도 나왔다. 그래서 노스트라다무스가 자신의 치료법으로 벌어들인 그 많은 돈들은 치료에 실패해 사망한 환자들 유가족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위로금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또한 페스트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한다고는 하지만 환자들을 치료해 주는 과정에서 많은 돈을 벌어 들이고[13] 페스트 환자들이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돈방석에 앉게 되는 노스트라다무스를 "사람들은 지금 병에 걸려서 고통스러워하고 죽어가고 하는데 그런 환자들 이용해서 쉽게 돈 버네?"라고 아니꼽게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다만 대부분은 노스트라다무스 덕에 개점휴업한 의사들이었다.
또한 그 와중에 노스트라다무스의 아내와 두 아이가 (페스트가 아닌 병으로) 병사하자 노스트라다무스의 처가에서 노스트라다무스에게 아내의 결혼 지참금을 돌려 달라는 소송을 걸었는데, 이 소식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면서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자기 가족도 못 구했다더라", "전에도 이렇게 몇 번 노스트라다무스가 치료 못 해서 죽은 환자도 있어서 노스트라다무스가 돈으로 무마했었는데 사실은 그게 치료를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더라"라는 악의적인 뜬소문으로 번져나갔다. 심지어 노스트라다무스가 사실은 사탄이나 마녀와 계약한 사악한 마법사이고 '돈을 벌기 위해 악마와 결탁해 페스트를 일부러 퍼뜨려 놓고 자기가 치료해 주는 척하면서 돈을 뜯어내는 거더라'라는 악성 루머까지 번지는 바람에 노스트라다무스는 아내가 사망한 직후 서둘러 그가 살던 지역을 떠났다. 이후 6년 동안 유럽 각지를 떠돌아 다녔다. 그러면서 각지에서 의사 일을 계속 이어나갔고 페스트 환자에 대한 치료 행위도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노스트라다무스가 사악한 마법사로 몰려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화형당하는 사태까지 이르지 않았던 이유가 있다. 일단 노스트라다무스 본인이 당대 최고의 명문 의대 출신자로서[14] 페스트 환자들을 마다하지 않고 환자들이 있는 곳을 직접 찾아 돌아다니며 그들 사이에서 의료 행위를 행했던 점이 환자들 있는 곳에서는 다가가지도 않으려 했던 가식적인 다른 의사들[15]과는 확실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페스트 환자들 가지고 돈도 벌고 좋겠다고 비아냥대며 루머를 퍼뜨리는 이들은 대부분 의사들이거나 의사들의 가족들이기에 "니들은 겨우 그깟 돈 몇 푼 좀 벌어 보겠다고 저 사람처럼 페스트 창궐하는 동네만 찾아다니면서 환자들하고 맨몸으로 구르고 뛰고 할 수 있냐?"라는 반론이 나올 수 있었다. 또한 노스트라다무스의 치료법이 효과를 발휘해 병의 전파를 막아 목숨을 건진 사람도 치료법의 혜택을 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만큼이나 많았고[16] 노스트라다무스 본인도 환자들의 유족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는 등의 사후 수습책을 준비했기에 당대에 노스트라다무스를 환자들을 일부러 구하지 않는다거나 흑마법사로 몰고간 사람들에게 노스트라다무스의 치료법으로 살아난 사람들과 살아나지 못한 사람들의 가족들이 앞장서서 노스트라다무스를 적극적으로 변호해 주었다. 또 노스트라다무스 본인도 자신에게 눈 뒤집힌 사람들에게 더 꼬투리 잡히기 전에 루머가 퍼지는 지역을 서둘러 빠져나와 자리를 피해버림으로써 쓸데없는 충돌을 피하고, 또 그 전에도 혹시나 자신이 마법사로 의심받지 않도록 그가 작성하는 모든 문서에 '주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Dieu sur tout)'라는 글을 써 넣어서 악마와 결탁했다는 혐의를 피할 수 있었다. #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총애를 얻어 궁정을 드나들 당시, 자신이 만든 미백 화장품을 팔았다가 그 화장품을 산 귀부인들의 항의로 궁에서 쫓겨난 적이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게 그 미백 화장품의 주성분은 수은이었다. 명색이 대예언자 체면이 말이 아니었지만 수은이 주성분인 미백 화장품을 실제로 썼던 무시무시한 사례도 많다.[17]
과일 잼 제조법에 대한 책을 쓴 적도 있다.
5. 매체
원래는 한국에서 무명이었던 이 예언가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일본의 르포작가 고토 벤(五島勉)이다. 그가 1973년에 쓴 "노스트라다무스의 대예언"이 일본에서 초대박 히트를 치고, 1980년대에는 한국에까지 번역되면서 '노스트라다무스'하면 1999년 지구 멸망이 떠오르는 노스트라다무스 계열 종말론의 시초가 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 노스트라다무스에 대해서는 많은 아류작과 사이비 종교등의 확대재생산이 이루어졌으나, 그 시작을 따지자면 적어도 한국, 일본에서는 저 책이 시초였던 것이 맞다.노스트라다무스의 이 예언은 수많은 미디어에 영감을 주어 다양한 작품을 탄생하게 하였다.[18]
닥터후에서는 그의 부인이 닥터에게 목도리를 직접 만들어줬다고한다, 아주 긴 목도리로, 4대 닥터가 그 목도리를 하고 다녔는데, 그녀가 만들어줬던 거라면 완성된 것을 줬을 테니 목도리는 더 이상 길어져서는 안 되는데 4대 닥터가 닥터로 활동할 당시 시리즈가 계속될수록 처음엔 발목 정도로 내려오더니 나중엔 가슴이나 배까지 오도록 크게 두르지 않으면 땅에 질질 끌린다.
영화로는 1974년작 일본 영화인 노스트라다무스의 대예언과 1994년작 프랑스 영화 '노스트라다무스'가 유명하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로 노스트라다무스 역에는 뤽 베송판 니키타에서 교관 역을 맡았던 체키 카리요, 스칼리제 역에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 역을 맡았던 F. 머레이 에이브러햄이 출연. 그리고 감독은 로저 크리스티안으로 후속작이... 여기서 노스트라다무스는 어렸을 때부터 현대의 마천루들이 무너져 내리는 꿈을 꾸는데 나중에 장성해서 의사가 된 뒤 프로테스탄트들이 가톨릭 교회를 부수는 것을 보다가 비슷한 환상을 본다. 풍차가 무장 헬기로 변하고 현대의 군인들이 헬기에서 뛰어나오는 모습도 보며, 폐허가 된 공장에서 어린이들이 검은 비를 맞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핵전쟁이 벌어진 것을 본 듯. 악마의 앞잡이가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 것을 예언하며 벽에 하켄크로이츠를 그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노스트라다무스는 인류가 전쟁과 환경 오염으로 파멸해 간다는 환상 때문에 미쳐버리기 직전까지 간다.[19] 그래도 결말에서 노스트라다무스는 인류가 우주로 진출해 스페이스 콜로니를 만드는 장면을 보는 것으로 끝나 인류는 결국 멸망하지 않는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반면 1974년작은 꿈도 희망도 없는 내용이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으로.
래퍼 나스는 1999년에 노스트라다무스를 약간 비틀어서 Nastradamus(나스트라다무스)라는 앨범을 내기도 했다. 정규 4집 앨범인 이 앨범의 평은 지구 대신 나스가 망한 거 아니냐는 수준. 이 앨범의 낮은 퀄리티로 인해서 JAY-Z에게 디스당하기도 했다.
뮤지컬 썸씽 로튼에서는 그의 조카라는 설정을 가진 '토마스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예언가가 등장한다.
[1]
21일이란 말도 있다.
[2]
1일에 사망했다는 말도 있다.
[3]
프란치스코 예배당에 안장됐으나
프랑스 혁명 당시 생로랑 성당에 재안장
[4]
16세기 사람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장신으로 현재 프랑스인 평균키 보다도 훨씬 크다. 아마 유전적으로도 큰 키이고 부모가 상인이었던 탓에 넉넉하게 자랐으므로 오늘날 현대인과 동등한 영양 상태였기에 저 정도 장신이 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5]
노트르담은
프랑스어로 우리의 부인, 곧
성모 마리아를 의미하며
노트르담 대성당에서처럼 흔한 명칭이며 미셀은
미카엘 대천사의 프랑스식 발음. 이름을 풀이하면 성모(聖母)의 미카엘(대변자)라는 뜻이기도 하나 미셸은 프랑스에서 흔한 이름이다.
[6]
당시 몽펠리아 대학 의대는 교칙으로 '육체 노동'을 금하고 있었는데 약종상이 그에 해당되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퇴학 문서는 아직까지 몽펠리에 대학에 남아 있다.
[7]
거리에 널브러진 시체 전부 수습해 매장하기, 페스트 환자에게 한번 쓰고 더러워진 붕대는 재활용하지 않고 태워 버리기 등 위생에 신경을 쓴 것이었다. 노스트라다무스 본인은 이 치료법을 지켜서 환자를 만날 때는 반드시 몸을 씻고 환자를 대했다고 한다. 때문에 노스트라다무스는 당시 흑사병의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것에 의지한 원시적인 대처 방식에 맞선 최초의 임상의로 평가되기도 한다.
# 당시 서구 문명에 '위생'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획기적이고 선구적인 것이었다.
[8]
주로 단 과자 종류. 설탕은 중세에 약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약사들은 사탕을 만드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
[9]
정확히는 모호한게 아니라 전무했다. 위생의 개념이 처음 도입된건 이보다 약 300년 뒤인
크림 전쟁 시기이며 간호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에 의해서 도입되었다.
[10]
당장 의사가 수술할 때는 꼭 손을 씻어야 환부 감염을 줄이고 산욕열 감염을 예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가 미친 놈 소리를 듣고 결국 누명을 쓰고 죽은 의사
이그나츠 제멜바이스(1818~1865)가 노스트라다무스보다 3백 년 쯤 뒤의 사람이었다.
[11]
엄밀히 말하면 치료법이 아니라 예방법이다. 흑사병 자체는 21세기에 들어서도 결코 치료하기 만만한 질병이 아니다.
[12]
촉촉한 장미 잎에는
곰팡이 균이 번식하기 좋았을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고 한다. 곰팡이라고 하니까 의외일 수 있는데 곰팡이는 항생제의 재료로 쓰이기도 한다. 가장 유명한 것이
페니실린.
[13]
노스트라다무스가 죽으면서 남긴 재산이 현금으로 무려 3,444
크로네였다. 당시 좋은 저택의 방 하나 연간 임대료가 4크로네 정도였다. 그리고 프로방스에 있던 노스트라다무스 자신의 자택에는 구텐베르크형 인쇄기도 구비되어 있었는데, 이 또한 노스트라다무스 생전엔 고액의 장비였다.
[14]
노스트라다무스가 다녔던
몽펠리에 대학교는 현존하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의과대학으로 당대에 유럽 내에서 시체를 해부할 수 있는 허가가 있는 유일한 곳이었고, 현대에도 명문 의대로 통한다.
[15]
환자들을 구한다고 한 의료행위가 바로 매질과 사혈인데 매질은 환자들이 평소에 죄를 지어 병이 생긴 것이라고 환자들을 의사들이 때리며 회개하라고 한 것이고, 시혈은 나쁜 피를 빼면 좋은 피만 남는다며 면역력이 떨어진 환자들의 혈관을 째서 피를 빼서 과다출혈로 죽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16]
심지어 노스트라다무스의 치료법으로 목숨을 건진 사람 중에는 카르카손 성에 머무르던 그 지역
주교 즉 가톨릭 사제도 있었다. 악마와 결탁해서 전염병을 퍼뜨린다는 사람이 성직자의 목숨은 또 구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심지어 노스트라다무스가 살던 시대는 성직자의 힘이 매우 강력했고 교황에게 찍힌 국왕은 권력도 명줄도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17]
대표적인 것이
에도 시대
가부키 배우들의 흰 칠 화장. 그 당시에는 수은 성분이 많아서 많은 가부키 배우들이 건강을 해쳤다고 한다.
[18]
세계의 미스터리 미스터리 조사반,
개구리 중사 케로로 등
[19]
3번에 달하는 대전쟁으로 인류가 망한다고 예언했으며, 마차를 타고 가는 길에 2차 대전에서 독일군이 전투하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