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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바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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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15일

1991년 9월 24일

1993년 9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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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인디 시절3. Nevermind 앨범4. In Utero 앨범5. 커트 코베인의 죽음6. 커트 코베인의 죽음 이후

1. 개요

미국 워싱턴 주 애버딘에서 결성된 밴드 너바나의 활동에 대해 서술한다.

2. 인디 시절

파일:너바나1988.jpg
1988년 너바나. 왼쪽의 인물은 드러머 채드 채닝이다.

1986년 워싱턴 주 애버딘의 애버딘 고등학교 동창 사이었던 보컬/기타의 커트 코베인, 베이스의 크리스 노보셀릭이 결성한 the Sellouts이라는 이름의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 커버 밴드로 추진했던 프로젝트가 시초이며 해당 프로젝트가 엎어진 후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최종적으로 드러머 아론 벅하드를 영입함으로써 1987년[1] 결성되었다. 결성 후 Skid Row, Pen Cap Chew, Bliss, Ted Ed Fred 등의 이름을 사용했으나 1988년 지금의 너바나(Nirvana)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결성 직후부터 시애틀 주위 언더그라운드 음악 씬[2]에서 공연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1988년 밴드는 이름을 너바나로 바꾸고 인디 레이블 서브 팝(Sub Pop)에서 데뷔 싱글 Love Buzz를 발매했다. 그 뒤 밴드는 드러머 채드 채닝을 영입하고 불과 600달러를 들여 198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첫 앨범 Bleach를 녹음했다. 이 앨범의 제작비를 대준 제이슨 에버맨은 채드 채닝의 친구이자 기타리스트였으며, 너바나의 음악에 매료되어 대게잡이 아르바이트로 번 600달러를 커트에게 앨범 제작비로 빌려주고 밴드의 4번째 멤버가 되었다. 고마움의 표시로 제이슨은 앨범 커버에도 같이 찍혔고 앨범 크레딧에도 적혀있지만 실제로 앨범 녹음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제이슨 에버맨은 Bleach 앨범 발매 후 몇 달 동안 너바나의 멤버로서 공연을 하였지만 곧, 다른 멤버들과의 성격 차이로 탈퇴하게 된다. 그리고 커트에게 빌려준 600달러는 끝까지 돌려받지 못했다.[3]

1989년 6월 15일, Bleach 앨범이 발매되고 너바나의 초창기 투어가 시작되었다. 너바나는 인상적인 라이브 공연을 바탕으로 언더그라운드씬에서 마니아 층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1989년 11월부터는 유럽 투어가 시작되며 활동 범위를 넓혔다. 활동량에 비하면 Bleach 앨범 판매량은 북미에서 약 4만 장 정도에 그쳤지만 투어를 통해 너바나는 그들의 독특한 음악, 비주얼을 대중들과 업계 관계자들에게 각인시켰다.

1990년 4월 2일부터 4월 6일까지 너바나는 프로듀서 부치 빅의 스마트 스튜디오에서 In Bloom, Lithum과 같은 곡들의 데모를 녹음했다. 이때 녹음한 In Bloom의 데모

스마트 스튜디오에서의 데모 녹음이 끝난 직후인 1990년 4월 8일부터 너바나는 40일간 미 전역을 돌아다니며 24번의 공연을 하였고 이 투어를 끝으로 드러머 채드 채닝이 너바나를 탈퇴한다. 채드 채닝의 공식적인 탈퇴 사유는 너바나의 공연 규모가 커지며 노래와 동시에 기타를 치는 커트 코베인이 밴드의 중심적인 위치로 부상하게 되면서 커트와 채드 사이에 불협화음이 생긴 것이었다. 커트는 채드의 드럼 실력에 불만을 품었고 채드는 너바나의 곡 작업에 참여하고 싶어했지만 커트에 의해 거절당했다고 한다.[4]

드러머 채드 채닝이 탈퇴한 후, 동료 '머드 허니'의 댄 피터스가 잠시 너바나의 세션 드러머로 참여하다가, 커트 코베인이 신뢰하던 '멜빈스'의 추천으로 하드코어 펑크 밴드 '스크림' 출신의 드러머 데이브 그롤이 너바나에 합류했다. 이렇게 너바나의 공식적인 최종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3. Nevermind 앨범

파일:너바나수영장.jpg
너바나의 대표곡 Smells Like Teen Spirit 뮤직 비디오

한편, Sub Pop으로부터 실력에 비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느낀 커트와 크리스는 1990년부터 미 전역 및 전세계에 음반 배급망을 갖춘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하기를 원했고, 부치 빅의 스마트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데모를 많은 유명한 메이저 레코드 레이블들에게 보내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커트 코베인이 존경하고 교류가 많았던 소닉 유스 서스턴 무어가 데이비드 게펜 사장에게 너바나를 추천하여 너바나는 당시 소닉 유스도 속해 있었던 게펜 레코드의 산하 레코드인 DGC(David Geffen Company)와 1991년 초에 계약을 맺고 전에 같이 데모를 녹음했던 프로듀서 부치 빅을 앨범의 프로듀서로 발탁하여 메이저 데뷔 앨범의 녹음을 진행하기 시작한다.

너바나는 소닉 유스의 멤버 킴 고든의 추천을 받아 LA에 있는 사운드 시티 스튜디오에서 1991년 5월 2일부터 5월 28일까지 Nevermind 앨범을 녹음했다. 멤버들은 완성본이 어떻게 나올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녹음을 진행했고 앨범의 녹음이 다 끝난 뒤 프로듀서 부치 빅이 녹음물을 믹싱한 마스터 테입을 들려주었을 때가 되어서야 녹음 결과물이 너바나의 다듬어지지 않은 음악이 아닌 너무 깔끔한 팝송으로 만들어졌다며 경악했다고 한다. 그래서 밴드는 앤디 월리스[5]를 새로 고용하였고, 드럼과 기타 믹싱을 더욱 무겁게 손보았다. 훗날 월리스와 빅은 커트 코베인이 앨범의 최종 결과물을 듣고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고 밝혔다.[6] 앨범 녹음이 끝난 직후 밴드는 각종 록 페스티벌에 참가해서 곧 발매될 메이저 데뷔 앨범을 홍보하였다.

마침내 1991년 9월 24일 Nevermind 앨범이 발매되었다. 게펜 레코드는 당초에 소닉 유스가 1990년에 발표한 앨범 Goo의 판매량 25만 장 정도가 팔리리라고 예측했다. 앨범은 처음에는 빌보드 앨범 차트 144위를 기록하면서 게펜의 예상대로 가는 듯 했지만, 처음 찍어낸 5만 장이 순식간에 팔려나갔고, MTV에서 Nevermind 앨범의 첫 싱글 Smells Like Teen Spirit의 뮤직비디오가 계속 방영되면서 인기가 급상승했다.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발전하고 있었다. 1991년 말 앨범은 50만 장이 넘게 팔렸고, 1992년 들어서는 무려 300만 장이 넘게 팔렸다. 1992년 1월 11일, Nevermind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다. 시대가 바뀌었음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사실, 마이클 잭슨 Dangerous 앨범을 밀어냈다는 말이 있지만 이미 Dangerous 앨범은 4주 연속으로 1위를 차지한 뒤 내려올 시기에 너바나가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또한,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지만 1주 후 브룩스에게 빼앗긴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평가로서, 너바나의 'Nevermind'가 발매된 9월 24일을 기준으로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차지한 1992년 1월까지 기간이 약 4개월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Nevermind'가 주목받기 전 같은 소속사에서 압도적으로 밀었던 거물 ' 건스 앤 로지스'나 스래시 메탈의 지존이던 ' 메탈리카'도 1위에 올랐으나 단번에 밀려났다는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 이 때 너바나는 클럽과 투어 무대에서 공연하는, 소위 마이너급이었지만 저변에서 서서히 마니아층을 빠르게 넓히고 있었다. 인기가 지속적으로 높아지던 너바나는 1991년 겨울 무렵에 드디어 MTV를 통해 'Smells Like Teen Spirit'이 집중적으로 편성되기 시작하며 폭발적인 추진력을 얻게 된다.

리드 싱글 Smells Like Teen Spirit은 당시에 유행하던 록음악과 달랐으며 기본적으로 한번 들으면 귀에 들어올 정도로 노래가 좋았다. 정의하기 어려운 장르 또한 인기몰이에 힘을 실었다. 차트 1위를 찍을 무렵에는 1월 매주마다 50만장이 팔려 나갈 정도로 폭발력이 있었다. 그 덕에 마이클 잭슨을 누르고 1위를 차지하고, 가스 브룩스를 누르고 1위를 한 번 또 찍는다. 가스 브룩스와 마이클 잭슨이 압도적이었던 미국 시장에서 너바나가 1위와 어깨를 견줄 정도로 추진력을 얻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제 1위와 2위간 판매량 차이가 크지 않은 박빙의 순간들이었다. 또한 10위권 내에서는 압도적인 인지도를 지닌 ' U2', ' 건즈 앤 로지스', ' 메탈리카'와 경합해야 했다.

번외로 당시 너바나의 싱글, 앨범의 주 소비층이 14~30세 정도로 한정되어 있었다는 점에서도 결코 쉬운 소득은 아니었다. 이후 업계에서는 너바나와 비슷한 비주류 음악을 하는 밴드들이 폭발적으로 차트문을 두드렸고, 1994년 즈음에는 확연히 신구 세대교체가 뚜렷하게 윤곽을 드러내게 됨을 볼 수 있다. ' JAY-Z'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힙합 또한 1990년대 전성기를 꽃피울 순간이었으나[7] 너바나의 등장으로 우리는 잠시 기다려야만 했다."

4. In Utero 앨범

파일:external/wac.450f.edgecastcdn.net/Cobain.jpg
MTV Unplugged 공연에서 연주하는 모습. 이 공연은 나중에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1992년 2월 24일, 커트 코베인 코트니 러브와 결혼했고, 8월 18일에는 딸 프란시스 코베인이 태어났다. 프란시스가 태어난 직후인 1992년 8월 30일, 밴드는 레딩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를 장식하면서 생애 최고의 공연을 펼쳤으며, 곧바로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 시상식에서 여러 상들을 거머쥐었다. 액슬 로즈와 싸우기도 했다

이후 1993년 2월 12일부터 2월 26일까지 밴드는 In Utero 앨범을 녹음했다. 앨범의 원래 제목은 I Hate Myself And I Want to Die였고, 동명의 곡도 수록될 예정이었으나 커트 코베인은 자신의 블랙 유머를 팬들이 진심으로 여겨 자기가 자살하고 싶어하는 줄 알까봐 제목도 바꾸고 곡도 넣지 않았다고 한다.

프로듀서는 부치 빅에서 당시 여러 얼터너티브 밴드와의 작업으로 유명세를 타던 스티브 알비니로 교체되었고, 커트 코베인은 최대한 무겁고 더러운 사운드를 수차례 주문했다고 한다. 인디 시절의 펑크 음악으로 돌아가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결과물로 나온 사운드가 멤버들도 놀랄 정도로 지나치게 무겁고 더러웠고 결국 게펜 레코드는 몇몇 곡을 손보고 발매하였다. 이때 커트 코베인은 레코드사의 손을 거치면 자신이 원한 방향과는 다른 앨범이 나올까봐 우려해서 레코드사의 결정을 계속 반대했고 결국 시중에 나온 앨범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In Utero 앨범은 1993년 9월 21일에 발표되었고 비록 상업적 이해관계 때문에 음반사의 손을 거쳤다지만 어쨌든 커트 코베인 특유의 감성들은 앨범에 성공적으로 표현되었다. 정리되지 않은 거친 드럼소리, 기타 연주 등이 앨범에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이다. 앨범은 전작에 이어 또다시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올랐고 너바나는 미국 투어를 시작했다. 투어를 준비하면서 그들은 1976년부터 1980년까지 활동했던 펑크 록 밴드 Germs의 기타리스트였던 팻 스미어를 세컨드 기타리스트로 영입한다.[8] 팻 스미어도 너바나의 팬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지만 사실임을 알게 되자 즉시 수락했고, 1993년 9월 25일 첫 공연을 가졌다.[9]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 Heart Shaped Box
그러나 커트 코베인은 주류 록 밴드가 되어 버린 것에 복잡한 심경을 갖고 있었고, 다른 정신적 문제도 심해져서 헤로인에 깊숙히 빠져들었다. 거기에 팀 내부 불화까지 겹친다. 1994년 초, 너바나는 유럽 투어를 시작했으나 코베인은 3월 로마에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발견되어 병원으로 후송되기까지 했다. 이후 헤로인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재활 시설에 들어갔으나 코베인은 치료를 견디지 못하고 병원에서 도망친 후 시애틀로 돌아갔다. 그리고....

5. 커트 코베인의 죽음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커트 코베인 사망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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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4월 8일, 코베인은 시애틀의 집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사망 추정시간이 4월 5일 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커트 코베인의 자살은 수많은 논란을 몰고 왔다. 일단 경찰은 '하나뿐인' 문이 안쪽에서 잠긴 점, 유서의 존재, 타인의 지문이 없는 점 등을 들어서 자살이라고 발표하였으나, 어떤 사람들은 문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인 점, 유서의 끝 글씨체가 다르다는 점, 총에도 지문이 없다는 점, 코베인의 몸에 엄청난 양의 헤로인이 들어있었던 점 등을 들어 타살되었다고 주장했다.

타살의 배후에는 코트니 러브나 기획사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EI Duce 라는 한 무명 락 뮤지션이 어떤 한 인터뷰에서 " 코트니 러브가 나에게 커트를 죽이면 500만 달러를 준다고 한 적이 있어. " 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커트 코베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의 음모론에 가깝고, 커트 코베인은 자살했을 가능성이 높다. 코베인의 시신은 화장되어 일부는 코트니 러브가 가졌고, 일부는 뉴욕으로 갔다가 워싱턴 주로 돌아왔다. 그런데, 한 언론 기사에 따르면 커트 코베인의 유해 일부분이 도둑질 당했다고 전해졌다. 그리고 한 미술가는 자신이 커트 코베인의 유해를 가지고 있다면서 이 유해로 담배를 피우겠다고 해서 큰 논란이 되었다.

커트 코베인의 사망은 당시 전세계 음악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6. 커트 코베인의 죽음 이후

커트 코베인이 사망하자 밴드는 해체되었고, 여러 컴필레이션 앨범들이 나오고 리마스터링이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코베인이 죽은 직후 발매된 앨범 MTV Unplugged in New York이 있다. MTV 언플러그드 공연 때 불렀던 노래들을 모은 것으로, 공연을 중간 리허설이나 잡담 부분을 빼고 노래만 엮은 것이다.[10] 역대 최고의 라이브 앨범으로 꼽히며, 너바나에게 그래미 어워드를 안겨주었다. 2002년에는 컴필레이션 앨범 Nirvana가 발매되었는데, 여기에 수록된 미발표곡 You Know You're Right가 전 세계에서 히트했다. 2004년에는 61곡이 수록된 박스 세트 With the Lights Out이 발매되었다.

밴드 해체 후, 밴드의 드러머 데이브 그롤은 자신의 밴드 푸 파이터스를 만들었고 베이시스트 크리스 노보셀릭 정치인이 되었다. 미망인인 코트니 러브는 코베인이 죽기 전에 이미 홀(Hole)에서의 활동을 이어가며 좋은 곡들을 많이 냈다. 영화배우로도 활동해서 <래리 플린트> 같은 영화에도 출연했다. 팻 스미어는 푸 파이터스에 영입되었다.

2012년 허리케인 샌디 피해자들을 위한 자선 공연에서 폴 매카트니와 나머지 너바나 멤버들이 함께 무대에 서서 Cut Me Some Slack이란 제목의 곡을 연주하였다.[11] 이후 몇 번의 세션이 더 있었고, 데이브 그롤의 다큐멘터리가 흥행하면서 사운드시티 멤버가 함께하는 투어 세션에 기존 멤버들이 다시 등장하며 공연을 가졌다.

2014년 너바나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후보로 선정되며, 선정된 그 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시상식 당일 커트 코베인 사후 20년 만에 모든 멤버가 한 자리에서 히트곡을 연주했다. 당시 커트 코베인을 대신할 프론트맨을 찾았고 일부 'A급' 프론트맨이 거론되며 비공식 접촉이 있었으나 부담감에 모두 거절했고, 최종적으로 너바나의 오랜 팬이던 '조안 제트', '킴 고든', 너바나, 데이빗 보위에 많은 영향을 받은 후배 뮤지션인 세인트 빈센트(애니 클락), 로드가 무대를 장식했다. 이후에도 몇 번의 공연이 있었으며 2018년 푸 파이터스의 'Cal Jam'에서 다시 한 번 너바나의 멤버들이 공연하였다.

2015년, 커트 코베인의 전기 영화 커트 코베인: 몽타주 오브 헥이 개봉하였다. 커트 코베인과 너바나의 행보를 주변인들을 통해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영화의 사운드트랙 Montage of Heck: The Home Recordings을 통해 몇몇 곡의 데모 버전을 들어볼 수도 있다.

2019년 12월 이번에는 '벡', '세인트 빈센트'와 함께 멤버들이 다시 뭉쳤으며 특이하게 데이브 그롤의 딸이 무대에서 너바나의 곡 ' Heart-Shaped Box'를 부르기도 했다. 크리스 노보셀릭의 새로운 밴드인 'Giants in the Trees'가 푸 파이터스의 투어에 종종 참여하며 멤버들 간 이벤트가 이어지고 있다.

2019년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너바나의 히트곡 'Smells Like Teen Spirit'이 10억뷰를 돌파하며 뉴욕과 L.A.의 전광판에 10억 돌파 기념 광고가 개시되며 이슈가 되었다. 최근 데이브 그롤과 팻 스미어는 25주년 컴필레이션 앨범을 내는 등 푸 파이터스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크리스 노보셀릭은 '더 도어즈'의 자선 공연에서 세션으로 참여하는 등 다시 뮤지션으로서도 활동하고 있다. 너바나의 음악들은 꾸준하게 음반, 다운로드, 스트리밍 시장에서도 강세를 보이며 여전히 그 이름값을 하고 있다.
[1]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있지 않으나 대략적으로 1987년 1월-3월 사이로 추정된다. [2] 이 당시 시애틀을 위시한 워싱턴 주에서는 하드코어 펑크가 유행이었다. 커트 코베인 역시 블랙 플래그의 공연을 보고 지대한 영감을 받는 등 너바나의 뿌리는 펑크 록이라고 할 수 있다. [3] 제이슨 에버맨은 이후 사운드가든의 객원 기타리스트를 거쳤다가 음악계를 떠났고 1994년 미 육군에 자원입대해 그린베레 대원으로 아프간, 이라크 참전까지 하다가 2006년에 전역했다. [4] 실제로 2014년 너바나가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현액됐을 때 채드 채닝이 참석하였는데 채드의 후임 드러머인 데이브 그롤이 채드가 참석에 응해준 것에 대해 감사해하며 In Bloom의 드럼 라인은 채드 채닝이 작곡한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5] 슬레이어(밴드)의 Season in the Abyss와 화이트 좀비의 La Sexorcisto: Devil Music, Vol. 1 앨범을 프로듀싱하였다. [6] 그러나 커트 코베인은 사망 직전 인터뷰에서 Nevermind 앨범의 사운드가 펑크 록 답지 않고 너무 정제되었다며 당시 프로듀서들의 녹음본에 OK 싸인을 했던 자신의 결정을 무척이나 후회한다고 말했다. [7] 1990년대 힙합 씬도 갱스터 랩의 전성기라서 전세계적으로 인기가 매우 높았다. [8] 참고로 데이브 그롤은 커트가 팻 스미어를 영입한다고 했을 때 순간 '그 사람 살아는 있었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Germs가 당시 펑크/인디 록 씬에서는 꽤나 명망이 높던 밴드였던지라 너바나 멤버들 역시 Germs의 음악을 들으며 자란 세대였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물론 조롱의 의미는 전혀 아니며 자신들이 듣고 자란 음악을 만든 사람이 자신이 있는 밴드에 들어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나온 반응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Howars Stern 쇼에서 해당 내용을 언급하는 데이브 그롤 [9] 많은 사람이 착각하지만 그는 정식 멤버였다. 하지만 참가한 스튜디오 앨범이 없기 때문에 보통은 투어 멤버로 간주된다. [10] 커트 코베인 평전에 따르면, 코베인은 공연 직전에 헤로인 중독으로 인한 자신의 컨디션 문제와 언플러그드 공연인데 몇 몇 곡에 기타 이펙트를 넣은 사운드가 들어가서 관객들이 자신을 사기꾼이라고 하지는 않을까 걱정한 나머지 공연 직전까지 공연의 취소를 고민할 정도로 매우 노심초사했으나 공연이 끝난 후 매니저와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처음으로 이번 공연은 정말 만족스러웠다고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11] 다만 이 곡은 데이브 그롤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Sound City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다. 멤버 구성은 공연과 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