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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2:49:09

김월용

김월용
Kim Weol-yong
파일:김월용2.jpg
<colbgcolor=#004ea2> 출생 1955년
강원도 영월군
학력 검정고시
독학사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 정책학[1] / 석사)
한세대학교 대학원 ( IT융합학 / 박사[2])
경력 진양종합건설 회장(前)
진명 스포아트 회장(前)
한국뉴욕주립대학교 국제교육원 원장/ 기술경영학과 연구교수/ 입학사정위원장/평생교육원장(前)
계양인재육성장학재단 이사(前)
경인여대법인이사(前)
인천대학교 이사(前)
글로벌대학 이사(前)
학술진흥재단이사(前)
한국폴리텍대학교 경기인천 권역대학장(前)
인천인재평생교육진흥원 원장(前)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사업가로서의 성공2.3. 초졸에서 박사까지... 단 7년!2.4. 한국폴리텍Ⅱ대학 인천캠퍼스 제13대 학장 취임2.5. 인천인재평생교육진흥원장
3. 사회공헌활동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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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사업가이자 교육자이다. 진양종합건설의 전임 회장이며 진명스포아트의 전임 대표이기도 하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뉴욕주립대학교 국제교육원장과 연구교수를 역임했다. 그리고 2018년부터 2021년까지 한국폴리텍Ⅱ대학 인천캠퍼스 제13대 총장으로 재직하였으며 재임중 인천시 일자리위원회 공동위원장과 대통령직속 국가균형위 인천시 협의회장을 겸임했다. 그후 2021년 6월부터 2023년 2월까지 인천인재평생교육진흥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강원도 영월 산골 가난한 집에서 4남3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이 모두 편찮으셨기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했고 그야말로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바로 생업전선에 뛰어들어 생선가게, 양복점, 페인트공, 건설 노동자 등 말 그대로 닥치는대로 온갖 일을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중 탄광이 돈을 가장 많이 준다는 말을 듣고 마침 형이 그곳에서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어 그것만 믿고 부모님의 만류에도 무작정 강원도 태백 탄광촌으로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는 18살. 정규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다.
“나이가 어려서 처음에는 식료품 배달도 하고 생선 장사도 했어요. 그다음 탄광 기계를 탄광에 설치하는 일을 하다가 돈을 더 많이 준다고 해서 탄광에 세우는 갱목을 막장에 배달하는 일을 했죠. 동료들이 수없이 죽어나가고 저도 그때 손톱, 발톱 다 빠지고… 지금도 기관지 결절이 있어요. 그렇게 18살부터 8년 동안 꼬박 광산에서 광부로 일했죠.”
탄광촌에 들어간 그는 나이를 한살 속이고 광부가 됐다. 그때부터 8년간 시커먼 갱 속에서 일했다. 그 당시는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는 광부가 월급이 제일 많았다. 그곳에서 갱목을 져 나르는 일을 했다. 해발 700m에서부터 파내려간 시커먼 갱 속을 지하 1000m 씩 들어갔다 나오면 하늘마저도 까맸다. 천지가 석탄가루였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같이 일하던 동료들도 수없이 죽어나갔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3] 그곳에서 열심히 일했다. 편찮으신 부모님 약값이며 동생들 뒷바라지를 위한 생활비를 부치기 위해서는 그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석탄가루 가득한 작업장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와 함께 그을린 냄비에 끓여먹은 라면은 최고의 만찬이었다. 언젠가는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겠다는 꿈이 그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그러나 불행은 운명처럼 찾아왔다. 그가 26살 되던 해에 아버지께서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던 것이다.
“스물여섯이 됐을 때, 한 해에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다 지병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때 어머니가 유언처럼 ‘너는 공부도 잘했는데, 니가 탄광에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나 죽으면 이제 약 값도 안 드니 제발 탄광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가슴에 불도장처럼 찍혀 있었어요. 그 말씀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저는 탄광에 있었을지 모르죠. 어머니가 위암으로 돌아가신 지 한 달 만에 탄광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갔어요.”[4]

2.2. 사업가로서의 성공

영월을 떠나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으나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가진 것 하나없이 올라와 고생 끝에 인천의 어느 회사에 취업하였다. 그렇게 3년간 회사생활을 하며 능력을 인정 받아가던 그는 30대 초반부터 고향 친구와 동업으로 건축 사업을 시작해 경제적인 여유를 얻게 되었다. 1998년 IMF 구제금융 위기도 그에게는 기회였다.
“헐값으로 땅을 사 대형스포츠센터를 지을 수 있었어요. 그때도 동업이었죠.” 동업 다섯 번을 모두 성공했다는 그는 비결을 이렇게 말했다. “이익을 똑같이 나누면 (동업) 상대가 의심합니다. 저는 70%까지 (상대에게) 줬죠. 그렇게 하니 저를 신뢰하고 (경영을) 완전히 맡기더군요.”[5]
잘 나가던 회사들도 줄줄이 도산하던 그 시절, 모두가 몸을 사리던 시기에 그는 지금이 기회라 생각하고 더욱 과감하게 도전하였다. 땅값이 폭락한 것을 이용하여 인천에 대형스포츠센터를 지은 것이다. 이것이 현재까지도 인천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대형스포츠센터인 진명 스포아트. 그러나 처음부터 모든 것이 이렇게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최종학력 초등학교 졸업. 이것이 사회에서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탄광촌에서 올라와 회사에 지원을 했는데 최종 학력 증명서를 꼭 내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초등학교 졸업 증명서를 냈더니 그쪽에서는 놀라죠. 그렇게 몇 번을 떨어져서 눈물 흘리면서 계단을 내려오던 게 생각나요. 그 후로도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증'을 요구하더라고요. 그래도 원망하기보다는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만족하려 했어요. 늘 희망을 갖고 ‘나는 잘될 거다'라고 최면을 걸었죠.”
그러한 경험 때문에 지금도 누군가 만났을 때 나이가 몇 살인지, 어느 학교 나왔는지, 전공은 무엇인지 먼저 묻지 않게 되었다. 26년간 사업을 해오면서 영어, 한자 등을 틈틈히 익혔고 사업과 관계된 법률에 대해서는 법전을 다 외울 정도로 공부를 해왔지만 사회는 막연하게 자부심을 갖고 있던 ‘실력’보다는 공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증명서를 끊임없이 요구해 왔다. ‘벽’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벽’이 사업가의 꿈 너머에서 잠재했던 또다른 꿈을 일깨워 주었다. 그때 나이 56세였다.[6]

2.3. 초졸에서 박사까지... 단 7년!

"‘이제는 공부 한 번 해봐야 하지 않겠나’라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모르잖아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애들은 제가 대학 졸업한 줄 알고 있었어요. 못 배운 게 죄는 아닌데 자랑할 만한 일은 또 아니더라고요. 아무리 똑똑하고 사업에 성공해도 정규 학력을 갖지 않으면 누구도 인정을 안 해주는 게 현실이었어요. 학력에 대한 이야기는 평생 잘 안 하고 살았어요.”[7]
그가 성공한 사업가에서 만학도가 된 데는 우연히 켜진 불씨 하나가 크게 작용했다. 검정고시에 대한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을 때 즈음, 운명처럼 조력자를 만났다.

2010년 12월 그는 가족들과 유럽으로 패키지 여행을 갔는데 함께 간 일행이 중학교 교사 그룹이었다. 함께 여행을 하며 그들과 자연스럽게 친분이 생겼고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일행 중 한명이 지나가듯이 ‘학교는 어디 나왔냐’고 물었다. 아마도 그 교사는 그가 말을 잘하고 유식해보였기에 분명 좋은 대학을 나왔을 거라 생각하고 물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오랜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는 순간 말문이 막혀 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시간상으로는 1분도 되지 않았겠지만 그에게는 길게만 느껴졌다. 가족들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는 사실대로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얼굴이 시뻘개졌다. 사정을 들은 교사 일행들은 ‘당신 이야기하는 것 보니까 대졸자 못지 않다’면서 ‘무조건 할 수 있다’고 공부를 하라며 아우성이었다. 그에게 질문을 했던 교사는 귀국 후 서점에 가서 검정고시 교재들과 필통을 사주면서 필통에 ‘K. W. Y’라고 써주며 용기를 주었다. 그것이 그의 운명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바로 공부를 시작해 세달 뒤 중졸 검정고시에 붙었죠. 사실 그 전에도 마음은 있었지만 막연히 어렵다고만 생각해 도전을 못 했죠.” 그가 사업에 전념할 때도 주변 사람들은 다 자신을 대졸이라고 봤단다. “말도 잘하는 편이었고 평소 신문도 꼼꼼히 보고 독서도 많이 한 덕분이었죠."[8]
2011년, 그는 56살의 나이에 공부를 시작했고 그해 중졸 검정고시와 고졸 검정고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의 도합 6년 과정을 단 6달만에 마친 것이다. 그러자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 서울에 있는 3개 대학을 지원해서 모두 다 합격하였으나 지금 대학에 들어가면 환갑에 졸업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독학학위제, 학점은행제를 택하고 1년만에 국가공인 자산관리사, 공인중개사, 텔레마케팅관리사 등 각종 자격증들을 취득하는 등 총 155학점으로 국문학,경영학사 시험을 통해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때 스포츠 센터도 경영하고 인천시 교육특보 등 지역에서 여러 직책을 맡으면서 제일 바빴을 때였죠. 그래도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니까 힘든 줄 모르고 했어요.”
이후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수석으로 진학하여 공공정책 전공을 선택하였고 정책학 석사를 취득하여 한세대학교 IT융합학 전공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박사 공부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영어였다. 이때 당시 대학생이었던 자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처음 자신의 학력을 밝힐 때만 해도 가족들의 반응이 걱정됐지만 끊임없이 노력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자녀들은 김 원장에게 “위대한 아버지”라며 응원을 보내줬다. 그러한 치열한 노력 끝에 최우수논문상과 함께 3년만인 2019년에 64세의 나이로 공학박사를 취득하게 되었다. 사업 및 각종 사회활동들과 병행하면서 초졸에서부터 박사까지를 8년도 채 안되는 기간에 이룩해낸 것이다. 이 비법에 대해 본인은 ‘절실함'을 수차례 강조했다.
"저에게는 결핍이 굉장한 에너지가 됐어요. 저는 부족하니까 남들 잘 때 깨어있고, 남들 쉴 때 뛰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독학사 공부할 때 인터넷 강의를 듣는데 잘 때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잤어요. 머리에 들어오라고요. 검정고시와 독학사 공부할 때는 치열하게 외우고 또 외웠어요. 기본서를 철저히 읽고 이해하려 했고요. 석사, 박사 공부할 때는 같이 학교 다니는 아들뻘 학생들한테 많이 배웠어요. 특히 박사 공부할 때 석사생들과 친하게 지냈죠. 저는 ‘내가 해봤는데, 내가 아는데’라는 말이 나를 망친다고 생각하고 그런 태도를 버리려 했어요. 어른으로서 선배로서 대우받으려 하지 않았죠.”
뒤늦게 시작한 공부로 그의 인생은 다시 한번 바뀌었다. 석사 공부를 시작하면서 잘 나가던 스포츠센터 사업을 동업자에게 넘기고 2015년부터 경인여대 외래교수로 강단에 선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교육가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2.4. 한국폴리텍Ⅱ대학 인천캠퍼스 제13대 학장 취임

나는 초·중·고, 대학 4년 대학원 2년 반, 박사 3년 총 20년 걸리는 것을 7년 만에 마쳤다.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에 해낼 수 있었다.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인 일본 경영의 신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 한국의 경영의 신 현대 정주영 회장의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다. 이분들은 기업인으로 성공해 많은 돈을 벌었지만 학벌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나는 사업을 하면서도 이분들이 안타까워했던 꿈을 이뤘다. (중략) 우리 대학이 그런 곳이다. 성적이 부족해도 기술을 배우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합격할 수 있다. 지원을 망설이지 말고 꿈을 가지고 도전했으면 좋겠다. 폴리텍대학의 문은 활짝 열려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누구든 하겠다는 의욕과 이루겠다는 절실함이 있다”면 내가 해낸 것처럼 꿈꾸는 것을 해낼 수 있다는 용기를 주기 위해서다.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여러분들의 용감한 도전’이다. 나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9]
2018년, 그는 경기,인천 5개 캠퍼스 한국폴리텍Ⅱ대학을 총괄하는 대학장겸 인천캠퍼스 제13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사업가였던 경험을 살려 그 동안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30여년 동안 교육 시스템, 시설 등이 열악하여 정체기에 있었던 인천캠퍼스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으며 본격적인 혁신을 시작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그가 학장으로 취임한 후 학교는 혁신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취업률이 80%를 넘겼고 캠퍼스 평가에서 직전까지 D등급이었던 성적을 최고등급인 S등급으로 급격하게 상승시키는 기적적인 성과를 이뤄냈다. 한국폴리텍대학 전국 36개 전체 캠퍼스의 상대평가는 상당히 혹독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여기서 S등급은 인천캠퍼스 50년 역사 이래로 처음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 자신도 전국교수협의회 학장평가에서 청렴도, 교수화합 등 13개 항목에서 S등급 받으며 2년 연속 1위를 달성하였다. 이처럼 기관장과 기관이 동반으로 최상위 점수로 S등급을 받아 학교의 위상과 교직원들의 자존감을 높인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가 이끌기 시작한 이후 기적적인 성과가 연이어 일어났던 것이다. 그가 학장으로 취임한 바로 다음 해인 2019년에는 한국폴리텍대학 인천캠퍼스가 전국 P-TECH 성과평가에서 97.9점이라는 매우 높은 점수로 최우수등급인 S 등급을 달성했다.[10] 그에 그치지 않고 2019년 지역 산업맞춤형 일자리창출 지원사업 고용노동부 평가 최우수과정(S등급)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11] 중간에 코로나 사태로 위축되기도 하였으나 그의 임기 1천여일 동안 그와 한국폴리텍대학 인천캠퍼스는 공공기관 고객만족도조사 S등급, 기관경영평가 S등급, 학장평가 S등급 2년 연속 달성 등 연달아 화려한 성적을 이뤄냈다. [12]

2.5. 인천인재평생교육진흥원장

"지난해 봄, 폴리텍대 인천캠퍼스 학장 퇴임하면서 이제는 쉬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2개월 동안 쉬면서 차도 SUV로 바꾸고, 제주 보름 살기도 해보고, 울진 앞바다 가서 멍 때리기도 하고요. 노는 것도 정말 열심히 놀았어요. 새벽 5시에 일어나고, 밤새 낚시하고. 아내가 당신은 왜 그렇게 극성스럽게 노냐고(웃음). 그러다 인천평생교육진흥원장 공모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제가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마지막으로 한 번 가보자 싶었죠.”[13]
2021년 6월 3일, 한국폴리텍대학 인천캠퍼스 학장을 퇴임하고 인천인재평생교육진흥원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장학사무국과 평생교육진흥원으로 나뉜 인천인재육성재단이 인천인재평생교육진흥원으로 재출범한 이후 최초의 상임이사 겸 원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

인천인재평생교육진흥원에 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그는 평생교육의 최대 수혜자였던 본인의 경험을 내세우며 시민들이 평생교육에 관심을 갖도록 적극적으로 홍보하였다. (#영상)

또한 우리 사회가 20대 이후 교육을 받을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개선하기 위하여 평생교육을 진흥시키자는 일념으로 치밀하게 연구를 했다.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인천 지역 내 있는 대학교 캠퍼스와 대학의 검증된 교수들을 활용하는 시민대학이라는 컨셉이 굳어졌다. 대형 인터넷 쇼핑몰처럼 만들어진 물건을 대신 팔아주는 공유경제플랫폼을 활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인천시민이라면 누구나 학비 부담 없이 원하는 교육 강좌를 수강할 수 있도록 인천 지역 대학과 함께 시민에게 평생교육을 제공하는 인천시민대학 '시민라이프칼리지' 체계를 구축하였다.[14] 이러한 체계에 대하여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세계적인 사례라고 소개를 하기도 하였으며, 국가진흥원에서도 많은 관심을 갖는 제도로 평가받게 되었다. [15]

그뿐 아니라 시민행복 평생교육체계 구축을 위한 조직 개편과 예산확보 등 경영시스템 효율화를 위해 노력하여 그 결과 인천인재평생교육진흥원이 2022년 인천시 출자·출연기관 경영평가에서 전년 대비 9단계 상승한 ‘나’ 등급, CEO 성과평가 ‘S’ 등급을 달성했다. 그 이외에도 인천지역 내 대학교 캠퍼스와 연계한 시민라이프칼리지 등의 신규사업 영역 확대, 전년 대비 40% 상승한 기부금확보, 핵심사업 지표 달성도 상승 등을 인정받아 CEO 성과평가에서도 인천시 출자·출연기관장 중 1위를 달성했다. [16] 특히 CEO 평가에서 최상위 등급인 S등급을 받은 기관장은 진흥원의 김월용 원장이 유일하다. [17]
시민들 누구라도 학력과 경력, 나이에 상관없이 실질적으로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또 시민대학생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인천인재평생교육진흥원장으로 재임하면서 그는 시민들 모두가 학력과 경력, 나이에 상관없이 실질적으로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휴일도 반납해가며 시민대학을 완성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얻어 각자의 사정으로 배움을 중단해야 했던 많은 시민들이 만학의 꿈을 이룰 수 있었고, 특히 86세의 고재호 씨가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더 나아가 김월용 원장과 길을 찾아 90대 박사에도 도전하고 싶다고 하여 화제가 되었다. # 이는 중앙정부의 정책에도 반영되어 22년 교육부총리가 발표한 정부통합 각 부처의 계획안 ‘혁신적 평생교육 5개년’ 계획에는 김 전 원장이 직원들과 함께 만들어 낸 ‘인천시민대학 도입과 실천사례’가 도입됐다. 전국적으로 실행할 정책방향에 대거 인용·채택되기도 하였다.[18]

이러한 노력으로 그는 인천만의 평생교육 체계를 만들기 위한 초석을 다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인천인재평생교육진흥원 중점 사업인 인천시민대학 '시민라이프칼리지'가 혼란없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임기를 4개월 앞둔 2023년 2월에 퇴임하였다.[19] #인터뷰영상

3. 사회공헌활동

한국뉴욕주립대학교 평생교육원장 시절에 12년 동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자신이 운영하는 스포츠센터를 인근 학교의 체육시설로 이용하도록 개방하는 등으로 지역사회에 기여하여 자랑스러운 계양구민상을 수상하였다. 어려운 집안형편 때문에 공부를 포기해야 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돈 때문에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지나칠 수 없었다고. 덕분에 120여명의 학생들이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고 이때 지급된 장학금 총액이 6천만원에 달했다고 한다. [20][21]

인천시 교육특보로 활동하면서 오랜기간 우수학생과 불우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결식아동들을 지원하였으며 강연을 통한 교육기부 등 다양한 사회공헌을 통해 인천교육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제30회 인천교육대상을 수상하였다.[22] 또한 인천뉴스 통합 창간 19주년 기념 2017 올해의 봉사대상 시상식에서 행정안전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

대통령 직속 균형발전위원회 인천광역시 지역혁신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지역 일자리 창출을 위해 힘쓰고 시민들에게 학교 내 실습 공간인 '러닝팩토리'를 개방해 시민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등 지역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19년 산업부장관상을 수상하였다.[23]

인천시 일자리운영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경력단절 여성을 위한 맞춤형 취업지원 교육, 중·장년을 위한 취업과 창업 지원, 공공부문의 일자리 창출, 인천의 마이스터 글로벌화 등의 의견들을 취합하여 인천지역의 다양한 일자리 발굴과 일자리 질 개선으로 시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고 지역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힘쓰기도 하였다.[24]

교육은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며 관내 학생들이 학업에 전념해 지역사회를 위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데 보탬이 되길 바란다며 인천광역시 계양구 인재양성교육재단에 장학금 1천만원을 기탁하기도 하였다.[25]

4. 여담


[1] 공공정책전공 [2] 박사 학위 논문 : 순환신경망 알고리즘을 적용한 농산물 등급 분류에 관한 연구 [3] 갱내근로는 그때보다 설비가 훨씬 발전한 현재도 매우 위험하다 하여 근로기준법 제72조에서 여성과 18세 미만의 자는 종사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산업안전보건법령에서도 따로 관련 규정을 두고 있을만큼 위험한 일이다. [4] "64세에 받은 박사학위... 결핍이 가장 큰 에너지", 평생학습 e음, https://e-eum.net/people/?idx=11267248&bmode=view [5] “56살 중졸고시·64살 박사된 이력 살려 ‘시민대학’ 키웁니다”,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1039254.html [6] "'석탄수저' 출신에서 '교육전문가'로 거듭 진화했다 ", 인천뉴스, https://www.incheo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3789 [7] "64세에 받은 박사학위... 결핍이 가장 큰 에너지", https://e-eum.net/people/?idx=11267248&bmode=view [8] “56살 중졸고시·64살 박사된 이력 살려 ‘시민대학’ 키웁니다”,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1039254.html [9] "김월용 학장, 기술인 '꿈'을 디자인하는 청년들의 인생멘토", nbn 시사경제, http://www.nbnbiz.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50 [10] "한국폴리텍대학 인천캠퍼스, P-TECH 성과평가 최우수등급 달성", 중도일보, http://m.joongdo.co.kr/view.php?key=20190509010003224 [11] "한국 폴리텍대학 인천캠퍼스, 이웃사랑 실천", http://www.naewaynews.com/81866 [12] "Yes! 김월용호 1천여일의 여정 'S, S, 또 S' 최종 성적표", https://www.segyenewsagency.com/news/articleView.html?idxno=337256 [13] "64세에 받은 박사학위... 결핍이 가장 큰 에너지", https://e-eum.net/people/?idx=11267248&bmode=view [14] "<인터뷰> 김월용 인천인재평생교육진흥원장… 대학 인프라 활용 시민 만족 양질의 교육 제공",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20220210010001869 [15] "<와이드인터뷰> 김월용 인천평생교육진흥원장 "급변하는 시대, 수준 높은 평생교육에 대한 시민 열망에 부응할 것"", http://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363558624 [16] "“인천이 평생교육의 중심지가 됐으면 좋겠어요”", https://www.incheonin.com/news/articleView.html?idxno=92056 [17] "<뉴스 초점> '시선 집중'...인천 인재평생교육진흥원의 '화려한 변신'", http://www.newstheone.com/news/articleView.html?idxno=112979 [18] "“인천시민대학의 더 큰 성장을 위한 ‘물러섬’...이 또한 ‘진화’의 과정이다”", http://www.incheo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11357 [19] 김월용 인천인재평생교육원장 “초석 다진 뒤, 평화롭게 떠난다”,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30127580011 [20] "계양구민상 김월용씨 '취약층 학업정진' 한결같은 도움 손길", 인천일보, http://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656875 [21] "김월용 한국뉴욕주립대 국제교육원장 ‘자랑스러운 계양구민상’ 수상", 동아일보,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151001/73950179/1 [22] "김월용 시 교육특보, 제30회 인천교육대상 수상", 인천뉴스, https://www.incheo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7499 [23] "한국폴리텍Ⅱ대학 김월용 학장,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상 수상", 중도일보, http://m.joongdo.co.kr/view.php?key=20191002010000967 [24] "인천시 일자리위원회, 김월용 공동위원장 선출", 인천일보, http://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42206 [25] "계양구인재양성교육재단 김월용 이사, 장학금 기탁",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RPR20201124009900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