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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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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구
金得九 | Kim Dukkoo[1]
파일:F10270E9-D84B-4C4E-B233-F1DEB37D3BB6.jpg
출생 1956년 8월 10일
강원도 고성군
(現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사망 1982년 11월 18일 (향년 26세)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68cm / 리치 165cm
가족 아버지 이동석
의붓아버지 김호열
어머니 양선녀
배우자 이영미(1959년생)
아들 김지완(1983년생)[2]
종목 복싱
스탠스 사우스포
전적 20전 17승 (8KO) 2패 1무
수상 한국 라이트급 챔피언
OPBF[3] 라이트급 챔피언

1. 개요2. 생애3. 복싱 경력
3.1. 생애 마지막 경기3.2. 밥 애럼 프로모터의 농간으로 말미암은 매치업
4. 사후5. 미디어6. 참조

[clearfix]

1. 개요

모든 것은 최선의 연습뿐이다.
절제하고 억제하며 오직 열심히 연습을 하자
화끈한 승리를 위해 강한 정신력으로 참고 훈련하자
나에게는 최후까지 싸울 용기와 의지가 있노라
대한민국의 前 권투 선수이다.

1956년 강원도 고성군에서 다섯 자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2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어머니는 3번 결혼을 했다. 원래 이름은 '이덕구'였으나 1967년 어머니가 김호열과 결혼해 그의 호적에 입적하면서 '김득구'로 개명했다.

2. 생애

호적상으로 1955년 1월 8일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묘비문에는 1956년 8월 10일 출생 강원도 고성군 출신으로 되어 있다. 전산화되지 않은 과거에는 일일이 본적지에 방문해서만 호적 사무를 볼 수 있었기에 한참 늦게 신고하면서 출생일/출생지를 혼동하는 경우, 영아사망률이 높아서 사망한 아이의 동생이 형의 호적을 물려받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 등 오류가 많아서 이런 일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가난하게 자랐으며, 1972년 이부형제들과의 갈등으로 17살 나이로 가출하여 서울로 상경했다. 권투 선수가 되기 전에는 구두닦이, 투어 가이드 등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았으며 검정고시에 붙어서 천호상업전수학교에 진학했다.

세계 타이틀에 도전한 해인 1982년 이영미와 약혼했다.

3. 복싱 경력

동아체육관에 입문해 아마추어 선수로서 활동하다가, 1978년에 프로로 전향했다. 1980년 12월 이필구를 10회 판정으로 이기고 대한민국 챔피언 타이틀을 얻는다.

이후 1982년 2월 28일 OPBF 챔피언 전에서 김광민에게 심판 전원일치 판정으로 승리하여 동양 챔피언이 되었으며 이 경기 결과로 인해 세계 복싱 협회에서 그의 세계 랭킹을 1위로 정한다.

이후 같은 해에 네 번의 경기를 더 가지면서 OPBF타이틀도 3차 방어전까지 해냈지만, 그때까지도 비 동양권 선수와의 경기는 커녕 아시아 내 원정 경기조차 단 한 번에 불과했을 정도로 세계 무대와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는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세계랭킹 1위가 되었다는 부분이 석연치 않은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래에 따로 서술한다.

이후 김득구는 WBA 라이트급 챔피언인 레이 맨시니(Ray Mancini)와 타이틀전을 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김득구 측에서는 어렵게 생긴 기회인 만큼 필승을 다짐하며 맹훈련에 들어갔다.

3.1. 생애 마지막 경기

파일:득구.png

김득구와 레이 맨시니의 1라운드부터 14라운드 경기

레이 맨시니와 김득구의 타이틀전은 1982년 11월 13일(한국 시간 14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유명 호텔인 시저스 팰리스(Caesars Palace)에서 열렸다.

김득구는 비장한 각오로 관을 준비해 놓고 가서 '패한다면 절대 걸어서 링을 내려오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미국으로 건너갈 때 성냥갑으로 모형관을 만들어서 가지고 갔다. 해당 인터뷰 그리고 그 말은 현실이 되었고, 이 경기는 기뻐하는 사람 없이 충격과 슬픔만이 가득한 비극만을 남긴 최악의 시합이 되고 말았다.

당시 경기상황을 보면 9회까지는 맨시니가 유효타는 더 많았어도 호각에 가까운 멋진 승부를 펼쳤다. 하지만 10회 때부터 김득구와 맨시니 두 복서 모두 체력 고갈로 난타를 허용하였다. 그 후 11~13회에 걸쳐 계속 수세에 몰리면서도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이때 허용한 두 선수의 집중타로 김득구와 맨시니 모두 눈 주위가 크게 부어올랐다.

파일:김득구 맨시니 14라운드.png

운명의 14회. 이미 패색이 짙었지만, 김득구는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공이 울리자마자 맨시니에게 다시 달려들어 펀치를 섞었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아 유효타를 날릴 수가 없었다. 이후 지칠 대로 지쳐 가드를 완벽하게 올리지 못한 김득구의 왼쪽 머리에 맨시니의 라이트가 강하게 적중했다. 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사진이 바로 이때 찍힌 장면이다. 이에 놀란 김득구가 뒤로 물러났으나 맨시니의 따라붙는 속도가 더 빨랐다. 이어지는 맨시니의 왼손 훅은 일단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긴 했으나 후속타가 계속 나올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이미 체력이 완전히 바닥난 김득구는 가드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스텝도 넓게 밟지 못해 안면을 그대로 노출했고, 달려들던 맨시니가 뻗은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김득구의 턱에 제대로 적중해 버렸다. 김득구는 이 충격만은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다운되고 말았다.

김득구는 필사적으로 로프를 붙잡으며 몸을 일으키고 결국 다시 일어서기까지 했지만 이미 경기 속행은 어려운 상태였다. 이에 심판이 KO를 선언하며 맨시니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맨시니가 승리의 세리머니를 하는 동안 김득구는 다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뇌졸중에 대한 처치와 혈전 제거를 위해 두 시간 반에 걸친 뇌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뇌사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5일 뒤 당시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해 있었던 어머니의 동의를 받아 산소 마스크를 떼어내고 장기기증을 하면서 26세의 나이로 돌아오지 못할 영면(永眠)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3.2. 밥 애럼 프로모터의 농간으로 말미암은 매치업

앞서 서술하였듯 김득구는 전적은 괜찮았지만 세계무대 경력이 없어 세계 복싱계에선 무명인 선수였는데 WBA 세계랭킹 1위가 되고 동급 최강으로 평가받는 챔피언과 매치업이 이루어진 부분을 이상하게 보는 시각이 많다.

이런 의아한 매치업이 이루어진 것은 매니 파퀴아오의 프로모터로도 유명한 프로모터 밥 애럼(Bob Arum)의 농간 때문이었다. 김득구는 세계적인 강자들과 싸울만한 기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복싱계의 일관된 평이었고, 김득구의 프로모터인 김현치 관장도 김득구의 기량이 세계적인 수준에 못 미친다는 것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정한 바 있다.

레이 맨시니가 챔피언으로 활동할 때 이미 세계 랭킹엔 하워드 데이비스[4]나 에드윈 로자리오 등의 쟁쟁한 복서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레이 맨시니와 챔피언 자리를 두고 일합을 겨루기에 부족함이 없는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외모로 흥행성을 갖춘 레이 맨시니가 패배하는 꼴을 볼 수 없었던 밥 애럼은 랭킹을 조작하여 맨시니의 타이틀전 상대로 위협적인 상대들을 모두 거르고, 떡밥이나 다름없던 김득구를 WBA 랭킹 1위로 만드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리하여 밥 애럼은 김득구를 레이 맨시니의 타이틀 유지를 위한 희생양으로 삼는다.

레이 맨시니가 CBS 채널과 거액의 계약을 체결한 사정 때문에 밥 애럼이 이런 무리수를 던지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레이 맨시니가 강한 상대와 싸우다 패배한다면 모처럼 맺은 TV 계약도 물거품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세계적인 선수들와 비교해 기량이 뒤떨어지는 김득구를 레이 맨시니의 상대로 링에 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속 선수를 돈벌이 상품으로만 여기는 밥 애럼은 다음 상대로 또 다른 약체(미끼) 선수인 캔 보그너를 이미 내정해 놓은 상태였다.

밥 애럼은 검사 출신의 엘리트이지만, 뒷골목 범죄자 출신인 돈 킹보다 몇 배는 더 추악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런 복싱계 이면의 추악한 비지니스가 김득구의 생명을 뺏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밥 애럼은 김득구의 죽음조차도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였다. 김득구의 경기 이후 2개월간 본인의 프로모션에 큰 경기가 잡혀있지 않고, 라이벌인 돈 킹의 프로모션엔 3건의 큰 경기가 잡혀있다는 걸 파악한 밥 애럼은 돈 킹을 견제하면서 자신의 도덕적 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2개월간 미국 전역의 프로복싱경기를 중지하자고 제안한다. 심지어 밥이 이용한 돈은 프로모터로는 라이벌이나 사적으론 친한 사이였다.

이처럼 무리하고 추악한 대진을 기획하여 수많은 사람을 불행에 빠트린 밥 애럼은, 결과적으로 복싱계의 사정을 알고 있는 관련자들에게 약간의 비난만 받았을 뿐 실질적인 책임은 전혀 지지 않았고 지금도 미국의 프로 권투계를 좌우하는 거물 행세를 하고 있다.

물론 밥 애럼이 김득구가 사망할 것을 미리 알고, 또는 김득구를 진심으로 죽이고 싶어서 사망에 이르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저런 매치업을 추진했을 리는 없다. 김득구 쪽도 객관적인 실력이 떨어진다 해도 혹여나 이긴다면 챔피언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므로 이 경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평범한 매치업을 했더라도 당일 컨디션 조절 실패나 지명방어전 상황, 또는 해당 단체의 선수층이 얇은 상황 등에서는 얼마든지 기량차가 큰 경기가 나올 수 있기도 하다. 저런 상황에서 선수 보호를 위해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경기 운영인데, 당시에는 2000년대 이후와 비교해 선수를 보호하는 룰이 크게 부족했던 데다, 9라운드 이후 이미 승패는 판가름이 났음이 명백한 상황이 여러 차례 나왔는데도 주심이 경기를 중단시키지 않았다는 부분이 김득구의 운명을 결정짓고 말았다. 다만 당시 선수 본인이 경기를 계속하기를 강력하게 희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심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실제로 주심은 경기를 계속할지 여부를 선수 본인에게 확인했고, 김득구는 명백하게 경기의 계속을 희망했다.

결정적으로 아무리 떡밥대전이었다고 해도 김득구의 실력이 떨어져서 나쁜 결과가 나왔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또 시합 전이든 중이든 포기할 수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은 것도 그의 선택이었고 결국 비극을 맞고 말았다.

4. 사후

5. 미디어

6. 참조



[1] Kim Deukkoo라고도 쓰인다. 복싱 선수 홈페이지에는 Kim Deukkoo라고 쓰여 있으나 김득구가 복싱 선수로 활동했을 당시에는 Kim Dukkoo라고 쓰였다. 대부분의 외국인들도 Kim Dukkoo라고 알고 있다. [2] 김득구가 세상을 떠난 뒤에 태어났기 때문에 유복자이다. 현재는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3] 동양 태평양 복싱기구 [4]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뉴욕 골든글러브 우승 경력이 있다. [5] 행정안전부와 권투계에 따르면 권투계에서 훈장을 받은 것은 총 5명으로 1983년 김득구를 시작으로 해서 1990년 12월 31일에 전 WBA 챔피언인 유명우가 받은 맹호장 (2등급)과 김득구와 인연이 깊은 프로복서 출신의 프로모터인 김현치가 받은 기린장 (5등급), 2008년 1월 3일에 추서된 최요삼의 백마장 (4등급), 2004년 아테네 하계 올림픽과 2008년 베이징 하계 올림픽에서 웰터급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김정주의 거상장 (3등급)이 있다. [6] 해외축구 등지에서도 각종 찌라시성 기사로 악명이 높은 그 언론사가 맞다. 이 때문에 가제타의 이러한 민낯을 알고 있는 팬 일부는 그 더 선보다도 더 치를 떨 정도. [7] "One paper said I was so distraught I went to a local cemetery and prayed over a grave because I was thinking of Kim,” Ray says. “Absolute lie. They didn’t care. They just made it up.” Finally, Ray confronted a reporter who had been friendly upon his arrival. “Giovanni,” he asked, “why did you do this?” “Ray, you must understand,” he said. “We are journalists. It makes a good story." # [8] 죄책감이 엄청났었던 탓인지 자신이 김득구를 죽인 것이나 다름이 없다며 회한을 토로했다. [9] 이름만 보면 한국 밴드로 보이겠지만 밴드 멤버는 모두 미국인이다. 이름의 모티브는 한국의 복서 문성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