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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23:30:31

권용관/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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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G 트윈스 1기2. SK 와이번스 시절3. LG 트윈스 2기
3.1. 2013년3.2. 2014년
4. 한화 이글스 시절

1. LG 트윈스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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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고등학교를 졸업[1]하고 1995년 LG에 입단했다. 입단 당시에는 별다른 존재감은 없었고 흔한 백업 선수들 중 한 명이었지만 2001년 김성근 감독 취임 후 대수비 요원으로 급부상, 2002년 시즌 유지현의 부상으로 공석이 된 유격수 자리를 차지하여 유지현이 없는 LG 내야에 대한 불안감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주었고 이후 2003년부터 꾸준히 1군 유격수로 출장하며 LG의 주전급 내야수가 되었다.

김성근 감독과의 인연은 김성근이 LG 2군 감독을 맡고 있을 때 시작된다. 당시 1군과 2군 사이에 연습경기가 있었는데, 권용관은 상대가 1군 주전 선수들이라는 점 때문에 위축된 모습을 보였고, 이에 김성근 감독은 권용관을 데리고 극한의 펑고 연습에 들어간다. 권용관에게 "수비는 네가 류지현보다 잘하는데 왜 움츠러들어 있냐?"고 권용관을 다그쳤고, 그제서야 권용관은 수비에 자신감을 갖기 시작한다.

권용관의 최대 장점은 빠른 발을 살린 유격 수비로, 무릎 부상 이후 수비범위가 줄어들고 있던 박진만과 다르게 권용관은 빠른 발로 타구를 끝까지 쫓아가서 건져내어 아웃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점 때문에 2002~2004년 전성기 시절엔 수비만큼은 박진만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 어깨도 수준급이라 어려운 포구 자세에서 허리를 쓰지 않고 어깨만으로 무리없이 1루로 송구가 가능했었다.

단점은 타격이 너무 떨어졌다는 점.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주전 자리를 잡을 듯하다 잡지 못했던 이유는 수비는 확실하지만 타격이 너무나 떨어졌기 때문. 2005년에는 한 달 동안 5홈런을 때려내며 드디어 타격에서 빛을 보나 싶었지만 부상으로 이탈 후 한규식에 주전 자리를 내놓게 되었고, 2007년 전반기 한때 2할 후반대의 타격 성적을 기록하면서 기다림에 보답하나 싶었지만 후반기에 급하락하여 .241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수비를 중시했던 당시 김재박 감독의 성향으로 권용관은 타격 성적에 관계없이 주전 유격수로 자리를 굳혔다.[2]

2008년 시즌, 내야 수비 도중 불규칙 바운드에 튄 공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고 코뼈와 광대 일부가 함몰되는 사고를 당하며 시즌 중 이탈, 이후 별다른 출장없이 아쉽게 시즌을 마무리했다.

2009년 시즌에는 자신의 최다경기 출장(126경기)과 자신의 커리어하이 타율 .247을 기록하며 꽃을 피웠으나 2008년 당했던 안면 부상으로 인한 바운드성 타구의 처리 문제와 노쇠화로 인한 수비력 저하로 인한 실책성 플레이가 급격하게 늘어나[3] 아이러니하게도 커리어하이인데 자리를...

2010년 시즌, LG는 유격수로서 환갑[4]에 가까운 권용관을 2진급으로 밀어내고 오지환을 주전 유격수로 쓸 계획을 잡았으며, 이에 권용관은 주전 자리에서 물러나고 2군으로 내려가기도 했지만 2010년 5월 중순부터 박경수, 정성훈의 부상과 오지환의 수비불안으로 인해 내야진에 구멍이 뚫리자 2군에서 콜업되어 2루수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별명인 K-ROD는 권씨의 K + A-ROD를 합성한 것으로 일부 팬 사이에서만 쓰이던 별명이었으나 2007년, 오마이뉴스 야구기사에 해당 별명을 타이틀로 한 권용관의 기사가 각 포탈에 실리면서 퍼진 것.

다른 별명으로는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친 특이한 케이스로, 그로 인해 '권병장'이라는 별명이 있으며 사실 이 별명이 제1별명(?)이다

LG는 박경수를 입단시키면서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유지현을 무리하게 내칠 정도로[5] 박경수가 LG의 10년을 이끌 주전 유격수가 될 것으로 자신했다. 하지만 박경수는 그만큼 커주지 않았고, 수많은 자원들이 주전 유격수라며 명멸해갔지만 그 시도가 실패할 때마다 권용관은 묵묵히 유격수 자리를 지켜냈다. 요컨대, 권용관은 결과적으로 LG가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10년 주전 유격수이자 유지현의 후임자 소리를 듣게 되었다.

2. SK 와이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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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에 트레이드 되었을 때 당시 사진

2010년 7월 28일자로 SK에 트레이드 되었다. LG와 SK의 4:3 트레이드로, 권용관, 최동수, 안치용, 이재영 윤요섭, 박현준, 김선규가 유니폼을 바꿔입게 되었다.

참고로 SK 이적 후 박홍구 응원단장이 만든 응원가는 일명 용관타령(…)으로 불렸다. 구슬프면서도 입에 착착 감기는 병맛으로 솩갤에선 심심할 때마다 글에 첨부되어 올라왔다.

2005년 7월 9일 문학 SK전에서 1루 관중석을 향해 손가락질을 날린 전과[6]가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권법규'라고 불린 그가 SK로 온 것에 대해 많은 SK 팬들이 트레이드 당일 어느 정도 거부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적한 그 날, 하필이면 SK 대 LG 경기가 이루어졌고… LG의 청백전 혹은 01 LG덱 vs 10 LG덱으로 보였던, 이날의 경기에서 권용관은 10회초 밀어내기 볼넷을 얻어내며 '개인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스킬을 사용하나 싶었지만…10회말 끝내기 실책을 지지르며 그동안의 친정에 대한 사랑을 담은 보은을 실천하셨다.[7]

이 이후 몇차례 1군 경기에 나온 뒤 1군과 2군을 오가면서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시즌을 마쳤다.

2010년 시즌 종료 후 주전 유격수 나주환의 군입대 확정으로 2011년 시즌 많은 출장 기회를 부여받을 것으로 보였으나, 오프시즌에 FA를 위해 LG 시절부터 미뤄왔던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았며 스프링캠프까지 완전 불참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그 사이에 새로 영입된 박진만, 이미 내야유틸로 존재가치를 인정받은 김연훈, 타격이 심각하지만 수비는 봐줄만한 유망주 최윤석과의 경쟁에서 완전히 밀린 권용관은 11년 시즌 역시 레귤러 출장은 하지 못한 채 2군에서 출발하였다.

2011년 8월 6일 KIA 타이거즈 전에서 2루수로 선발 출장, 시즌 첫 안타도 기록을 하였고, 8월 14일 넥센 히어로즈 전에서 시즌 첫 홈런이자 만루홈런을 때렸다. 근데 상대가 하필이면 심수창 인터뷰에서는 심수창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이후엔 별다른 활약없이 1군 경기에 출장한 후 포스트 시즌 멤버에선 제외되어 2011 시즌을 마쳤다.

2012 시즌에 들어와서도 개막전 선발로스터에도 진입을 못하고 2군에서 선수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첫 1군 콜업은 6월 22일에나 이루어졌다. 이날 대타로 출전하여 한기주에게 안타를 뽑아내어 4:2에서 6:4로 역전하는 발판을 놓는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이미 유격수 핵심으로 자리잡은 박진만과 최윤석, 그리고 김성현의 벽을 넘지 못하며 2012년 역시 대부분의 시간을 2군에서 보냈으며 2군에서도 1~2할대의 타격을 보여주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지 못하는 듯했다.

3. LG 트윈스 2기

결국 2012 시즌 종료 후 방출되어 무직선수가 되었다가 2년 5개월만에 친정팀 LG로 복귀했다.

3.1.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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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8일, 1군 엔트리에 등록 되었다. 9회말 대타로 경기에 나섰지만, 경기를 뒤집지는 못했다.

5월 22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선발 3루수로 출장했는데, 2회 초 장원삼의 초구를 공략하여 시즌 첫 안타를 마수걸이 홈런으로 장식했다. 이날 경기에서 권용관은 4타수 2안타 1홈런 1타점 2득점 1볼넷을 기록하였다.

5월 23일 삼성전에서는 6회말 2사 1, 3루 상황에서 포수 이지영이 투수 윤성환에게 공을 천천히 송구하는 틈을 타서 홈스틸을 해내며 역전에 성공하였다! # 공식적으로는 홈스틸이 아닌 야수선택으로 기록되었다.[8] 시즌 후 LG 팬들 중에서는 이 날 권용관의 홈스틸이 LG의 2013시즌 운명을 바꿨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는데, 실제로 LG는 이 날 승리로 삼성과의 3연전을 위닝시리즈로 가져간 이래, 7월 넥센과의 3연전 직전까지 무려 10연속 위닝시리즈라는 대 상승세를 이어가게 된다.

5월 29일 잠실 한화전에서는 4회말 이태양의 초구를 받아쳐 2호 솔로 홈런을 날렸다. 이 날 경기는 스코어 7:1로 LG의 압승.

이후로도 큰 활약은 없으나 쏠쏠하게 경기 후반 내야 멀티로써 중용되었으며, 복잡한 LG 내야 상황에서[9] 1루를 제외한 나머지 내야수비를 모두 소화 가능한 권용관은 손주인과 함께 빈자리를 요소요소 메워주며 팀의 가려운 곳을 긁어줬다.

8월 10일 잠실 두산전에서 9회초 2:2동점 2아웃 상황에 나와 홍상삼의 초구를 때려 역전 솔로홈런을 때려냈고, 이 솔로홈런이 결승타가 되어 LG가 스코어 3:2로 승리했다.
"이제 권용관... 왼쪼오옥~ 떠갑니다아아~~~ 넘어갔어요~!!!! 역전~ 다시 재역전! 솔로 홈런을 뽑아내는 권용관~!!"
- 8월 10일 잠실 두산전에서 역전 솔로홈런을 때려냈을 때 한명재 캐스터의 홈런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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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성적은 68경기 104타수 24안타 4홈런 13타점 1도루 타율 0.231 출루율 0.316 장타율 0.404로 OPS 0.720을 기록했다. 수비에서 멀티플레이어로 주전들의 체력을 세이브해줄 수 있는 탄탄한 백업 역할을 해줬을 뿐만 아니라, 공격에서도 생각치도 못한 주루플레이, 일발장타 등을 터뜨리며 2013시즌 LG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활약을 했다.

두산 베어스와의 2013년 플레이오프에서 2차전은 대수비, 4차전은 선발 유격수 겸 2번타자로 출장하여 4타수 1안타, 타율&장타율&출루율 .250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1승 3패로 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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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후 FA 자격을 얻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이 때문에 신청을 하지 않을 것으로 봤는데, FA 신청을 했고 11월 16일 1년 1억 원에 계약하였다. 2013시즌 후 FA 시장 과열로 인한 화폐 개혁으로 SSC에 이어 새로운 화폐로 등극했다(1용관=1억). 일련번호가 0523810인데 아무래도 그가 홈스틸과 9회 2아웃 홈런을 기록한 날에서 비롯된 듯. 위쪽 서술 참고. LG에 남고 싶었다는 그의 발언으로 볼 때 2차 드래프트로 인한 타 팀 이적을 피하기 위해서 FA 신청한 듯하다.

3.2. 2014년

성장세가 더딘 오지환을 제치고 개막전부터 주전 유격수로 나왔었지만 생각보다 신통치 않은 수비에 타격이 8경기 17타수 2안타로 타율 .118, 출루율 .158로 식물과 다름없는지라 결국 4월 11일자로 1군 엔트리에서 빠졌다. 이후 2군과 3군에서 있다가 시즌 후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되며 방출 통보를 받았다.

4. 한화 이글스 시절

2014 시즌 종료 후 LG에서 방출당하며 은퇴 수순으로 가나 했는데, 한화 이글스의 오키나와 훈련장에 합류해 입단 테스트를 받았고 12월 16일 공식 입단이 확정된다. 2015 시즌에는 2002년 김성근 감독과 함께했던 김재현 타격코치, 조인성, 권용관이 한팀으로!

4.1.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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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는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며 알토란같은 활약을 한 Again 2013 모드를 보여주나 싶었으나 점점 시즌이 갈수록 팬들의 뒷목을 잡게 하는 플레이를 보여주고 결국 시즌 후에는 한화 팬들이 싫어하는 선수가 되었다.

거기에 정신줄 놓은 수비를 두 차례나 보여주며 까이기도 했는데, 그 중 하나는 말할 것도 없고, 두 번째는 일명 권용란 수비. 이 실책 이후 공수 자체에서 자신감을 잃은 듯한 모습을 보여주며 약간의 동정여론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시즌 후에는 말이 동정여론이지 한화 팬들 사이에서는 시즌 최악의 선수로 낙인찍혔다. 클래식 스탯부터 세이버 매트릭스까지 가리지 않고 모든 지표가 바닥을 찍은 타격과 뻔히 실책수가 적립되는 클러치 에러로 권용관의 가치가 마이너스라는 것에 대한 논리적 반박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 거기다가 권용관을 데려오지 않았다면 모 선수[10]가 갑질을 당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권용관이 백업수비로 1인분을 했으면 하주석을 등록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11][12] 권용관이 보류선수 명단에 있는데 왜 한상훈은 없느냐는 등 여러 말이 많았다.

시즌 WAR -2.239를 기록하며 개인 통산 WAR 최저 기록을 갱신 했는데 저 정도면 안 나오는 게 팀에 도움을 주는 수준이다.[13] 각 팀마다 물빠따, 타선의 구멍 소리를 듣는 선수들의 WAR도 기껏해야 -0점대, 심해야 -1점대인데, 권용관의 2015 시즌 WAR은 무려 -2.239로 이쯤 되면 웬만한 2군 선수보다도 못한 수준이며 아예 나오지 않는 게 팀에게 이득이 되는 수준을 넘어 기용을 하면 감독이 쌍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는 선수. 참고로 2015 시즌, 행복야구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던 정범모의 2015년 WAR-1.392.

4.2.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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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13일 웨이버 공시되었고, 그대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시즌 타율은 2할 5푼으로 20여 년간 뛰면서 은퇴 전 마지막 해에 가장 높은 시즌 타율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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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확히는 광영고를 다니다가 야구부가 해체되기 직전에 성남고로 전학. [2] 김재박 감독은 현대 유니콘스 감독 시절에도 박진만이 1할대 타율을 기록해도 무조건 주전 유격수로 기용했다. 물론 그 이유에는 다른 유격수 자원인 염경엽은 더 타격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염경엽은 박진만의 백업으로 2년간 타율 0, 무안타였기 때문. [3] 에러 수나 수비율같은 표면적인 수치로 본다면 준수한 편이나(에러 12개/수비율 .979), 에러로 기록되지 않은 타구 중에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타구가 많았으며 병살을 잡을 타이밍에 병살을 잡지 못함으로서 실점의 계기를 만든다거나, 에러 또한 클러치 상황에 자주 범하는 등 수비력 하나만으로 알아주던 야수에게 기대하던 모습은 아니었다. [4] 내야의 스페셜리스트였던 김재걸, 김민재도 35살 즈음부터 수비력이 크게 저하되었고 결국 이는 은퇴로 직결되었다. [5] 유지현을 얼마나 무리해가면서 내쳤는지에 대한 내용은 류지현 항목과 이순철/지도자 경력 항목 참조 바람. [6] 직접적으로는 당시 상대투수였던 고효준이 예전 부상부위였던 허벅지를 맞춰서 벤치 클리어링까지 갈 뻔하다가 1루로 향했는데, 이때 1루 SK 응원석에서 야유와 욕설이 나오자 여기에 욱하는 바람에 저지른 것이다. 당시 중계방송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지를 올렸는지 검지로 삿대질을 한 것인지는 불분명한데, 권용관이 경기 다음날 사과를 한 내용을 다룬 기사에서는 검지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했다고 보도했으나, 당시 문학구장에서 직접 목격했던 적지않은 수의 SK팬들은 분명히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는 증언이 있었다. [7] 이 실책 또한 바운드성 타구로 2008년 안면 부상 이후 전진수비능력과 바운드성 타구 처리 능력이 크게 떨어진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8] 기록위원은 "투구동작 때 주자가 스타트하려는 의도가 없었고, 포수의 느슨한 송구를 틈 타 홈을 파고 들었기 때문에 포수의 선택 실수에 의한 득점으로 봐야한다"고 하였다. [9] 기본적으로 오지환이 유격수 붙박이에 3루 주전은 정성훈이었고, 2루는 손주인이 맡으며 1루는 김용의- 문선재의 플래툰으로 돌아갔다. 다만 정성훈은 나이가 있어 3루를 보기 좀 힘들어 하는 경향이 있었던데다 김용의가 3루를 볼 수 있고 문선재 역시 돌글러브 소리를 듣지만 2루를 볼 수 있었기에 내야진이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는 경향이 있었다. [10] 현재 정재원으로 추정된다. [11] 시즌 막판 하주석을 등록하기 위해 조정원 채기영을 임의탈퇴시켰다. [12] 만약 하주석을 시즌 막판 등록하지 않았다면, 하주석은 시즌 후 열린 2차 드래프트 40인 명단과 FA 정우람, 심수창의 보상선수 20인 보호명단에 넣지 않아도 자동보호가 될수있던 상황이었고, 하주석을 꼴랑 5경기 써보겠다고 등록시킨 결과 박한길을 심수창의 보상 선수로 롯데에 내주고 말았다. [13] 여담으로 권용관의 WAR을 보면, 권용관을 안 썼으면 한화는 비밀번호를 탈출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