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봉화군 출신 독립운동가, 권상익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찬수(贊粹) |
호 | 성재(省齋) 또는 청산(晴山) |
출생 | 1863년 3월 6일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내성현 유곡리 (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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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4년 11월 14일 (향년 71세) |
경상북도 봉화군 | |
본관 | 안동 권씨[2]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권상익은 1863년 3월 6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내성현 유곡리(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에서 아버지 권기연(權祺淵)과 어머니 함안 조씨 조성옥(趙性玉)의 딸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퇴계학파에 속한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으로, 과거를 보지 않고 향리에서 학문에 정진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만국공관(萬國公館)에 보낼 호소문을 작성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된 후 세상과 인연을 끊고 후학의 지도에 전념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한 후 김창숙, 곽종석 등 유림 137명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하였으며, 이의 발송에 참가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이중업(李中業)[3]이 중국에 독립청원을 하기 위해 장남 이동흠을 봉화 사동에 머물던 권상익에게 보내 청원서 작성을 부탁하자, 그는 기꺼이 써줬다. 이후 이중업은 중국에 가지고 가려 했지만 1921년 7월 23일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사망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25년 8월 김창숙이 중국으로부터 비밀리에 입국하여 내몽고 지방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할 자금으로 20만원 모금을 목표로 활동할 때 이에 찬동하여 군자금 모금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로 인해 1926년에 재차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학문에 전념한 그는 퇴계학의 성리설(性理說)에 관해 상당한 깊이의 이해를 가졌으며, 말년에는 향리의 덕곡서당(德谷書堂)에서 제자들과 더불어 경의(經義)와 예설(禮設)을 토론하며 교육에 전념하였다. 1934년 11월 14일 봉화군에서 병사했다. 사후 독립유공자 권경섭의 숙부 권상규(權相圭)가 그의 행장을 지었으며, 독립유공자 하겸진이 그의 비문을 써주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권상익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문집으로 <성재집(省齋集)> 28권이 있다.
2. 성진군 출신 독립운동가, 권상익
<colcolor=#fff><colbgcolor=#0047a0> | |
성명 | 권상익 (權相益) |
출생 | 1900년 11월 14일 |
함경북도 성진부 | |
사망 | 1943년 5월 5일 (향년 42세) |
중화민국 만주 목단강시 적십자병원 | |
종교 | 대종교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권상익은 1900년 11월 14일 함경북도 성진부(현 김책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함경도 성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5월 만주 밀산현(密山縣) 당벽진(當壁鎭)[4]으로 망명했으며, 그해 10월 대종교에 입교했다. 이후 1929년 밀산현에서 대일시교당(大一施敎堂) 찬무(贊務)와 전무(典務)를 역임했다. 이후 윤세복을 교주로 모시며 포교 활동과 민족 운동을 병행하였지만 1942년 11월 19일 국내에서의 조선어학회 사건이 벌어진 후 조선과 만주 각지에서 일제의 대종교 탄압이 가해지면서 동지 24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1943년 3월 목단강 경무처와 액하 형무소[5]에 이감되었으며, 3개월 동안 목단강성 경무청 특무과에서 혹독한 취조를 당했다.
그 후 목단강 고등검찰청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무수한 고문을 받고 병보석 출옥했지만 1943년 5월 5일 목단강시 적십자병원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권상익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