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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민대학교 개교 6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2006) |
2. 국민대학설립기성회의 발족과 건학운동
돌아보건대 본 대학은 내가 일생을 통하여 과거 40년 동안 우리 국민 전체가 일제의 압박 아래 신음한 것은 우리 국민이 몰지각한데서 비롯한 결과임을 통감하고 이 나라의 중견 국민을 양성해야겠다고 일구 월심으로 생각한 그 큰 이상을 갖고 세운 것입니다. 목숨이 붙어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이 정도나마, 고매한 학식을 갖춘 교수 여러분과 구지욕에 불타는 총명 호학의 생도 여러분과 국민대학 첫 입학생을 맞아 개강식을 갖게 되니 여러분들과 같이 일편 감개 무량하고 일편 감축해 마지 않는 바입니다.
신익희의 창학연설 中
신익희의 창학연설 中
해방 이후 1945년 12월 1일에 환국한 신익희는 건국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목표로, 이에 뜻을 같이하는 임시정부 인사와 국민대학의 설립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1946년 1월, 김구의 숙소인 경교장에서 대학설립문제가 논의되었고, 이때 건학의 목표를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하여 독립국가건설에 필요한 인재의 육성으로 정하였고 3월 3일, '국민대학설립기성회' [1]를 발족시켰다. 기성회 고문에는 김구[2]와 김규식이, 명예회장과 회장에는 조소앙과 신익희로 각기 선임됐다. 또 백낙준 등 교육계 인사들이 대거 이사진에 합류해 대학 설립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1946년 5월 18일자 동아일보 |
1946년 5월, 동아일보는 ‘ 국립대학 설립 준비’ 제목의 기사로 국민대학을 소개했다. '국립대학'이라는 표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세운 대학이라는 것을 배경에 둔 것. 그러나 이 당시 미군정에서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고[3] 임시정부파에서 세우는 대학이 '국립'이라 칭해지는 것은 미군정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에 대한 쿠데타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불쾌한 상황. 실제로 불과 3달 후인 1946년 8월, 신익희는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를 감행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물론 실패했지만.
1946년 9월 1일 국민대학관이라는 이름으로 국립 서울대학교와 동시에 개교했지만 결국 이러한 미군정과 임시정부파의 갈등, 한국 안에서 민족주의 바람을 우려한 점 때문에 미군정에서는 국민대학교를 정식으로 인가를 내 주지 않았다. 미 군정청은 개교한지 4개월여가 지난 12월 18일이 돼서야 국민대학관의 설립 인가를 허가했다.
이런 역사 때문에 국민대학교는 신익희 주도아래 임시정부가 세운 대학, 해방 이후 최초의 사립대학이란 민족적인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국민대학교는 민족의 대학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안고 설립되었지만, 재단을 확보하지 못하여 건학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 중에서도 교사(校舍)를 마련하지 못해 겪는 어려움이 가장 컸다. 설립준비위원회가 발족되고, 신학기에 맞추어 학생모집 광고를 냈지만 교사는커녕 원서를 접수할 사무실도 마련하지 못한 처지였다. 궁여지책으로 종로구 필운동 소재 한옥집 대문칸을 임시로 빌려 헌 책상 한 개를 놓고 흰 종이에 ‘국민대학교 신입생 입학원서 접수처’라고 써 붙이고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어렵사리 입학원서를 마감한 후에는 종로구 내수동에 있던 보인상업고등학교의 교실을 빌려 입학시험을 치르는 웃지 못할 광경이 연출되었다. 그러나 신익희의 명망 덕분에 국민대에 지원하려는 학생들의 열기는 뜨거워 당시 입학시험 경쟁률은 7대 1에 달할 정도로 높았다.
3. 초창기의 국민대학
1946년 9월 1일 개교를 앞두고서야 어렵게 보인상업학교 별관 2층 건물을 빌릴 수 있었다. 이것이 국민대의 첫 교사였다. 1층에는 학장실과 사무실, 강의실 하나를, 2층에는 넓은 강의실 2개를 마련하였다.개교식 기념사진 (1947.2.18) |
야간대학으로 출발한 초창기 국민대 학생들의 개교 당시 1회 학부생들의 나이는 20세에서 50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 중에는 다른 대학에 다니다가 입학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일본의 교토대를 졸업하거나, 서울대에 재학하던 학생이 편입한 경우도 있었다고.
교사가 없는 상태에서 출발한 국민대학교가 정규대학으로 승격되기 위해서는 재단의 유치가 필요하였다. 보인상업학교 건물의 일부를 야간에 빌려 사용하는 열악한 상황 때문에 설립 주체들은 재단 유치에 관심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당시 조선불교 중앙총무원 총무부장이며 해인사 주지인 최범술이 재단을 구성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해인사의 사찰 재산을 기부하겠다는 것이었다. 교직원 및 학생들은 크게 환영하였고, 1947년 10월 16일 신익희를 이사장으로 하는 이사진은 사임하였고, 최범술을 이사장으로 하는 새로운 이사진이 구성되었다.
초창기 교사로 사용했던 남산의 구 동본원사[4] |
1947년 10월 3일 서울 중구 남산동에 있는 구 동본원사(현 남산초등학교 뒤) 건물을 교사로 쓰도록 미군정 관재처로부터 허가를 얻어냈고 10월 5일에는 동본원사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러나 한달도 못간 10월 30일에 미군정은 동본원사 사용허가 취소 통보를 내렸다. 이때부터 4달간 800여 명의 학생들과 교수·교직원들은 미군정에 반발하며 교사를 사수하였다. 미군정은 경찰들을 동원하여 학교를 폐쇄하고 책상·도서 등 비품들을 학교 밖으로 끌어내고자 했고, 이 과정에서 중부경찰서에 구치된 학생 가운데 3명이 군정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당시 언론과 남조선과도입법의원[5]에서도 주목받았다.
이종근 의원 : 국민대학은 돈 없는 자제가 공부하는 학교이에요. 낮에 일자리에서 일하고 밤에 배우는 돈 없는 청년이 공부하는 장소란 말이에요. 조선의 현재 소학교로부터 전문대학까지 그 교육하는 장소가 절대 중대한 필요한 기관이 아닌 것이 없지만은 그 가운데도 본 위원이 생각하기는 가장 절실히 느껴지는 것은 이 국민대학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제
신익희 의원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어떤 유족한 재산을 가지고 이 교육기관을 설립한 것이 아니라 배우고 싶으면서 돈이 없어서 쩔쩔매는 그 청년 동지들에 인물 양성하겠다는 취지에 대해서는 만공에 감격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니할말로
서울대학이 오늘 폐쇄한다고 하면 서울대학교 다니는 학생들은 내일이라도 다른 학교에 갈 장소가 있어요.
고려대학이나
연희대학이 오늘 문을 닫는다면 내일은 옮길 장소가 있단 말이에요. 그러나 국민대학은 문 닫으면 국민대학 학생들이 옮길 장소가 어디 있느냔 말씀이에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속기록(제201차 본회의, 1948. 02. 03.)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속기록(제201차 본회의, 1948. 02. 03.)
결국 남덕우를 비롯한 학생 대표들이 미군정청 사령관 존 리드 하지 중장과 담판을 벌여 서울 종로구 창성동에 있는 옛 체신요원양성소 건물을 얻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문교부는 1948년 8월 10일자로, 재단법인 국민대학(이사장 최범술)의 허가와 국민대학(학장 신익희)을 인가하였다. 이로써 국민대학교는 각종학교에서 정규대학으로 승격했다. 최범술 재단의 허가로 국민대학교는 정규대학이 되었으나, 재정적 뒷받침은 바라던 바와 같지 않았다. 기부하겠다던 해인사 재산은 최범술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던 것. 게다가 신익희가 학장에서 물러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최범술 이사장이 자금 출자자를 새 학장으로 선임하면서 생긴 일인 것이다. 신익희의 명망을 보고 입학한 학생들은 당연히 이 상황에 반발했고 재정적 어려움과 학생들의 반발이라는 악재가 겹친 결국 최범술 재단은 쫒겨나게 된다. 그 이후부터 재단의 분규가 시작되면서 재정난은 더더욱 심해지게 된다(...).
창성동 신축교사 낙성식 기념 (1949.9.5) |
옛 체신요원양성소 건물은 비가 오면 물이 새는 등 총체적으로 부실한 상태였지만 재단과 학생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재단의 지원은 기대하기 어려웠고 그 결과 1948년 10월 학생건축위원회가 결성되어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교사를 신축하기로 결의하였다. 재단 측에서는 오히려 공사를 방해하는 등의 횡포를 부렸지만 끝내 교사를 완성시키기에 이른다.
제1회 졸업증서 (1950.6.24) |
최범술 재단이 쫓겨나고 다시 신익희가 학장으로 부임했지만 법적으로는 취임 승인을 받지 못했고 문교부는 신익희 학장 명의의 학위수여증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당시 국회의장으로 있던 신익희가 겸직을 할 수 없었던 것. 그래서 1949년에 졸업한 전문부 학생들은 박이순 부학장 명의로 졸업장이 수여되었다. 1회 졸업생들은 졸업을 거부하겠다며 이에 격렬히 반대했고, 결국 1회 졸업식에 신익희 명의의 졸업장을 받게 된다.
국민대학교 광고(2011) | 플라타너스 사진(2016)[6] |
졸업식 날, 1회 졸업생들이 창성동 교사 앞에 플라타너스를 심었고, 20년 후 1회 졸업생들이 그 자리를 다시 찾아 비문을 남기고 갔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창학의 뜻을 이어 보려고
돌싸움까지 하였던 이 자리에
6.25 바로 전날 졸업기념으로 심은 푸라타너스여!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잘도 자랐구나
숱한 어려움과 곡절을 간직하고
홀로 학교를 지켰나니
그대 이곳에 선지 어언 스무돐
모교에 남긴 너의 유래를 밝히고자
여기 이 비문을 새긴다
1970년 6월 24일
돌싸움까지 하였던 이 자리에
6.25 바로 전날 졸업기념으로 심은 푸라타너스여!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잘도 자랐구나
숱한 어려움과 곡절을 간직하고
홀로 학교를 지켰나니
그대 이곳에 선지 어언 스무돐
모교에 남긴 너의 유래를 밝히고자
여기 이 비문을 새긴다
1970년 6월 24일
1회 졸업식 다음 날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 하였고, 국민대는 6월 27일 휴교 후,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학교 당국은 1951년 4월 부산역 건너편 영주동에 있는 양재학원을 월세로 얻어 임시대학을 개강하였다. 52년에는 보수동에 있는 감리교회의 별채로 이전했고, 53년에는 부민동의 한 산비탈의 밭을 구입하여 2층짜리 건물을 지어 교사로 삼았다. 2년여의 부산 피난 생활 중, 제2회·제3회·제4회 등 3차에 걸친 졸업식이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부산에서의 임시대학 운영을 마치고, 1953년 9월 1일 제2학기 개강을 다시 서울 창성동 교사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그 이후, 재단의 분규[7]로 인한 재정난[8] 과 더불어 이승만 정권의 대항마로 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신익희가 선거 유세 중 급사하는 바람에 구심점을 잃은 학교는 존폐 위기에 처했었다.
4. 김성곤의 학원인수와 정릉동 시대
김성곤 이사장 취임식 (1959. 10. 20.) |
국민대학은 내 생애에 가장 보람을 느낄 수 있는 투자라고 생각한다. 이익을 내는 자본주의적 의미에서의 투자라는 말은 물론 아니다. 인재에의 투자, 국가에 필요한 지성들을 자유로운 분위기 안에서 길러내기 위한 투자라는 뜻이다. 국민대학교에 다니는 제군을 대할 때 나는 과거의 나를 대하는 것 같이 느끼곤 한다.
<<국민대학보>> 1968년 5월 20일자,「국민대학과 나」中
<<국민대학보>> 1968년 5월 20일자,「국민대학과 나」中
1959년 쌍용그룹의 창업주인 실업가 성곡 김성곤 회장이 해공 신익희의 뜻을 이어받아 국민대학을 인수하면서 국민대학은 기적같이 명맥을 이어나가게 된다.[9] 그러한 이유로 국민대학교에서는 신익희와 김성곤을 학교 역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한다.
김성곤이 국민학원을 인수한 뒤에 준공한 창성동 교사(1959) |
김성곤이 국민대학을 인수한 후 신교사의 준공과 증축을 마친 결과 창성동 캠퍼스는 1,200여 평의 교지와 2,124평의 교사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규모로는 증가하는 학생 수에 비해 너무 협소한 것이었다. 더구나 창성동은 그 주변이 모두 주택가이고 바로 앞이 경복궁, 청와대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교지의 확장을 생각할 수 없는 곳이었다.[10] 교사 이전의 필요성을 절감한 학교법인 국민학원은 새 캠퍼스 자리를 물색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정릉동으로 캠퍼스를 이전하기로 하였다.[11] 이 과정에서 학교본부와 초창기 졸업생들과 큰 마찰이 있었다.[12]
한편 1962년 군부가 집권하면서 대학 정비지침에 따라 학교가 폐교될 뻔 했으나 주간부를 폐지하는 데 그쳤고, 국민여자초급대학을 병설한 후 야간부와 병행하여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1964년에 다시 주간부가 부활하였다. 가끔 나이드신 어르신들이 '국민대학'내지 야간대학으로 기억하시는 이유가 이러한 이유 때문.
국민대학 제1호관(현 본부관) 기공식에서 연설하는 김성곤 (1969) |
1965년부터 교지매입에 나선 국민학원은 총 44,100평의 교지 매입을 완료하고, 1968년 6월 정릉동 북악 캠퍼스 시대를 알리는 1호관(현 본부관) 교사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착공 후 2년 3개월만인 1971년 9월 준공식을 갖게 되었고 그 날 바로 2호관(현 북악관)을 기공했다.
국민대학 전경 (1975) |
1971년 9월 초순 현재의 정릉동 북악 캠퍼스로 이전하였으며, 새로운 교육환경을 바탕으로 1973년에는 종합대학 승격을 위한 장기발전계획을 수립하고 1976년에는 문교부의 실업대학인가를 받게 됐다. 실험대학인가는 문교부의 대학교육개혁 사업의 일환으로 엄격한 기준을 통과했어야했고 이를 통과했다는 것은 국민대학이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으로의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정부의 서울인구억제 정책에 의하여 한동안 단과대학체제를 그대로 유지해야했다. 결국 1980년 9월 29일에 가서야 문교부는 국민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허가했고 1981년 한국외국어대학교와 함께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5. 중형대학을 넘어 대형대학으로
종합대학승격을 축하하는 교문의 문구(1980) |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국민대학교는 여러가지 변화를 시도하였다. 우수한 신입생을 유치하기 위해 입시전형 방법을 종전의 후기에서 전기로 전환하였다. 또한 공학관 증축, 3호관(현 과학관) 준공, 강의실 개보수, 단과대학 시설 및 사무실 증축 등의 시설을 확충하였다.
1980년대에는 한국사회에 민주화의 열기가 크게 고조된 시기였고, 그 결과 국민대 내에서도 여러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1987년 11월 26일 교수협의회가 창립되었고 또한 이 해 12월 21일 국민대학교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이 무렵 대학자율화조치[13]와 함께 시행된 등록금 자율화 조치로 학교는 매년 학생측과 등록금 문제를 협의하게 됐고 업자들이 입점해 운영하던 여러 시설 대신 생활협동조합이 탄생하여 현재까지 학내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1990년대에는 교육부가 수도권 대학에 대한 정원 증원 억제 정책을 풀기시작했고 그 영향으로 국민대학교는 중형대학에서 대형대학으로의 발전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에 따라 여러 학과를 신설하고 정원을 늘렸으며 전임교원 수가 대폭 증가하게 되었다. 이같은 학교 규모의 전면적인 확대는 필연적으로 교육, 연구용 건물의 수요를 획기적으로 증대시켰고, 그 결과 성곡도서관 신축(1993), 본부관 · 조형관[14] · 공학관 · 학생회관(현 법학관)의 증개축(1994), 공학관 별관 · 영빈관 신축(1998), 국제교육관(현 국제관, 경영관) 신축(1999)이 이뤄졌다. 이러한 학교의 양적, 질적 성장으로 인해 국민대학교는 대형대학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참고로 90년대에는 학교의 교수(校獸)로 용두리상 대신에 백사자상이 있었다고 한다.
6. 2000년대 이후
2000년대에 이르어 국민대학교는 그 동안 쓰던 교표를 교체하게 되었다.
국민대학교 UI |
구 교표 | 현 교표 |
국민대학교 교표 변천 |
전통적인 교표는 세월이 흐르면서 약간씩 변화되긴 하였지만, '국민' 을 뜻하는 잎사귀가 대학이라는 글자를 받들고 있는 형상이었다. 국민대학교는 국민이 받들고 있는 대학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 성곡도서관의 오래된 책에는 이 교표가 붙어 있다.
1년여의 준비과정을 거쳐 3가지 안 중 가장 높은 득표를 기록한 3안을 새로운 교포로 선정하고 2001년 5월 UI 선포식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의 전통적 五方正色(청,백,적,황,흑)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영문 머릿글자 (KMU)는 동쪽을 가리키는 청색이며, 이는 탄생, 어짊, 나무를 의미한다. 흙에 해당하는 황색과 남쪽을 가리키는 적색은 조형 하단부에 위치시켜, 전체의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중앙은 흰 여백으로 남겨 놓았다. 오행에서 흑색의 서기(瑞氣)를 상징하면, 자존(自尊)과 견인불발(堅忍不拔)의 마음을 나타낸다.
우리민족 至高의 美를 대학의 상징으로 승화시킨 조형으로서 전체적으로는 화합과 융화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개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거대한 변화를 창조하는 과정을 시각화한 것으로서, 국민대학에서 배출한 인재들이 각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는 의미이다.
- 국민대학교 홈페이지
우리민족 至高의 美를 대학의 상징으로 승화시킨 조형으로서 전체적으로는 화합과 융화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개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거대한 변화를 창조하는 과정을 시각화한 것으로서, 국민대학에서 배출한 인재들이 각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는 의미이다.
- 국민대학교 홈페이지
2000년 이후에도 조형관 증축을 시작으로 예술관, 생활관, 지하 대주자창, 미래관, 제2영빈관, 종합복지관, 국제교육관, 산학협력관을 신축하여 교사면적이 확대 되었다.
60주년 기념행사(2006) |
2008년 1월에는 국민대- 파주시 제2캠퍼스 MOU 체결을 했으나 무산되었고[15] 그해 8월에는 로스쿨 유치에 실패하게 되었다. 지방할당 때문에 탈락하게 된 것인데 자세한 내용은 법학전문대학원 문서 참고. 이 두가지를 이유로 등록금을 인상했으나 실패하여 학교는 망신만 사게 되었다.
인서울 대학교인데도 2012년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으로 선정되어 충격과 공포를 주고 있다. 이것이 화제에 오르자 학교측에서는 재빨리 사태를 덮기 위한 공지를 띄웠다. 하필이면 또 이 때 재학생들에게 한 통화 5천원하는 ARS통화를 권하는 문자를 뿌렸고[16], 재학생들이나 졸업생들은 눈치가 그리도 없냐며 학교를 깠다.
취업률과 같은 지표가 문제[17]이지 재단이 돈이 없어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에 선정된 것은 아니다. 쌍용그룹이 1997년 외환위기로 공중분해되면서 사실상 재단으로서 전혀 역할을 못하고 있지만, 국민대학교는 의외로 재정이 탄탄하다. 2011년 대학적립금순위 물론 저게 예산은 과다 책정하고 결산은 적게 처리하면서 남긴 이월금이 십년 넘게 쌓인 결과물이다. 재단에 기업이 없는데 재정이 튼튼한 경우라면 거의 이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쉽게 말해서 저게 기부금이 아니라 죄다 학생들의 등록금. 그 쌓인 돈을 부실대의 오명을 벗기 위해 대대적으로 투입 중이다.
2013년 발표한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에 선정된 이후로 학교에서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벌어졌고 그 결과 산학협력 선도대학(LINC) 육성사업 선정, 수도권대학 특성화 사업(CK-II) 최다 사업단 선정, 전자정보통신대학 컴퓨터공학부 SW 특성화 대학 선정, 대학구조개혁평가 A등급 선정이라는 좋은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문과대학, 사회과학대학 등의 정원·지원 축소와 평생교육원등 수익용 기관의 확대로 인한 학내 공간 재배치[18]와 같은 어두운 면이 있다. 결국 2016년에 프라임 사업으로 인한 문과대, 사과대, 자연대의 구조조정안이 발표되었다.
70주년 기념행사(2016) |
교육부의 대학구조조정이 다시 강화되는 추세에서 2016년, 국민대학교는 개교 70주년을 맞이하였고, 대격변기인 이 상황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느냐에 따라 국민대학교의 미래는 결정될 것이다.
[1]
사회교육 위원인 윤길중이 작성한 국민대학 「설립취지서」에 의하면, 국민대학은 법문계통은 물론이고 자연과학 그리고 “국민의 정신 방면에 기여할” 모든 학문등을 포괄하는 종합대학으로 구상됐다. 당시까지만 해도 문리대,이공대를 통합한 대학이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민족 종합대학을 세우려는 의지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새로 설립될 민족대학의 명칭을 ‘국민’ 대학으로 한 것도 민족 구성원, 즉 ‘국민의 대학’으로 세우고자 한
임시정부 계열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
하지만 신탁통치찬반 과정에서
신익희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해 '한민당'으로 정치노선을 선회함으로서
김구는
신익희와 갈라지고 기성회에서 떠나게된다.
[3]
미군정이
경성제국대학을 국립 서울대학교로 전환한 국립종합대학안(국대안)을 7월 13일 공표하고 강행하자 민족세력을 중심으로 소위
'국대안 파동'이 일어났고 많은 반발이 있었던게 당시 상황이다.
[4]
일본식 절
[5]
1946년
미군정이 정권을 인도하기 위해 설립하였던 과도적 성격을 띤 입법기관.
[6]
2021년 창성동 교사는 철거 후 재건축되었고, 플라타너스는 옮겨심기에는 상태가 좋지 않아 벌목 후 나무 밑동 일부를 학교에서 채취하여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7]
최범술 재단에 이어 대건기업주식회사의 대표인 정병조가 재단을 맡았지만 등기이전 문제로 갈라섰고, 그 이후에는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조경규를 이사장으로 삼았지만 얼마 못 가 조경규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망했어요.
[8]
당시 문교부에서는 대학의 무분별한 설립을 억제하고 질적 증가를 꾀하기 위해 1955년 「대학설치기준령」을 공포했는데 국민대도 이 기준을 맞추기 위해 재정 확보 없이 무리하게 신축 교사 건설을 하게 돼서 재정난은 더더욱 심해졌던 상황이었다.
[9]
김성곤이 국민대학교를 인수한 이유는 다름 아닌
고려대학교의 설립자
김성수 때문이다. 보성전문학교를 다닐 무렵
김성수를 보며 그와 같이 육영사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10]
경복궁의 서문 앞, 경복궁 내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 담장 너머 길 건너편 부근이다. 정릉으로 이전한 이후엔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 이사가기 전 오랜 기간 사용하였다. 동네 주민들은 80년대까지 구 국민대 건물로 불렀다.
[11]
국민대학교/북악캠퍼스 참고
[12]
창성동 캠퍼스는 초기 재학생들이 수많은 노력을 통해 얻어낸 곳이기에 창성동을 버린다는 것은 졸업생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13]
당시 이 조치로 대학 등록금이 큰 폭으로 오를 것이 뻔했기에 총학생회가 주도하여 등록금 자율화, 즉 인상 반대 투쟁이 있었다. 평소 엄청난 과제 양이나 평가 때문에 학내 민주화 시위에 잘 참여하지 않던 조형대, 공대, 사범대 일부 학과까지, ROTC를 제외한 전교생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14]
사범대 지하, 1층과 1호관에 흩어져 있던 조형대의 여러 학과들을 구 도서관 건물을 개조 확장해 모아 옮겼다.
[15]
같이 파주에 캠퍼스를 설립하기로 한
서강대와
이화여대가 철회한 영향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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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 나와있는 이유가 황당 그 자체인데, 학교에 대한 애정을 가지도록 하고 학교에 대한 관심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런 일을 한 거라고 한다.(...)
[17]
보통 대학들은 졸업생을 학사조교로 돌리는 등의 꼼수를 써서 취업률을 올리는데 국민대는 이 쪽 방면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결국 이 사단을 겪은 뒤에 그제서야 신경을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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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부터 시작된 복지관 열람실 축소, 신도서관으로 건립되던 건물이 국제교육관으로 변경, 경상대 이전 등의 학내문제가 이와 관련있다.